베트남 중부 여행기1
2024년 1월 22일
간밤에 꾸려놓은 캐리어를 들고 포항의 연화재 주차장으로 갔다. 새벽 공기가 크게 춥지는 않았고 시간은 5시 10분이다. 승차하여 눈을 감고 부족한 잠을 청하였다. 한참 달리던 신라 관광 회사의 버스가 경주 황실예식장 맞은편, 형산강 변 도로가에 서고 동행하는 분들이 차에 올랐다. 다시 고속도로를 달려 부산 방향으로 가다가 통도사휴게소에서 버스가 서고 연하샘이 탔다. 다른 해외여행팀의 사람이 가방을 싣고 우리 버스에 오르다가 잘못 탔음을 알고 내렸고, 연하샘은 내린 사람이 타야 할 버스로 알고 타지 않고 돌아서다 관유샘이 불러서 차에 올랐다. 김해로 가는 버스에서 자기 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여든 연세의 손윤락 교장선생님부터 오십대 후반의 퇴직 교사, 우리 부부를 포함한 몇 분의 부부가 있었다. 김해의 부산공항에 도착하여 캐리어를 화물로 부치고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작년 여름에 경주에서 포항에 온 관유샘의 전화를 받고 백련이 피기 시작하는 마장지 곁의 교회 카페에 나갔다. 계림역사기행의 해외 여행 계획을 알려주었다. 작년 4월 13일에 왼쪽 발목 골절상을 입은 나는 여행에 동참하기 힘들었으나 6개월 뒤의 일이니 일단 참가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여행 프로그램을 보니 베트남 중부의 다낭, 다낭 남쪽의 호이안, 다낭 북쪽의 후에, 후에 북쪽의 동허이가 들어있었다. 불교 신자인 나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준 틱낫한 스님이 출가하고, 열반에 든, 후에에 있는 뚜 히우 사(Chua Tu Hieu, 慈孝寺)에 몇 년 전부터 한번 가고 싶었다. 2022년 1월에 96세의 연세에 법랍 80세로 이 절에서 열반한 틱낫한 스님의 다비식을 유투브로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그래서 여행 프로그램에 뚜 히우 사를 넣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인도네시아 답사 여행 때 보로부두르가, 산서성 여행 때 윈강석굴이 나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지만, 이번 베트남 여행을 앞두고 뚜 히우 사에 가볼 생각에 자못 행복하기까지 하였다. 계림역사기행 카페에 다른 분들을 위하여 틱낫한 스님의 책들을 소개하는 글을 올렸다. 뚜 히우 사에 대한 정보들을 틱낫한 스님의 책 속에서 뽑고, 틱낫한 스님이 16세에 이 절에 출가하여 사미승 시절을 보내며 겪었던 일을 전해주는 스님의 수필들을 다시 읽었다. 그중에 동화처럼 순수하고 불심 깊은 아름다운 글과 틱낫한 스님의 생애를 보여주는 동영상을 유투브에서 골라 카페와 여행팀 단체 카톡에 소개하였다.
베트남 여행은 처음이라 인터넷으로 유인선 교수가 쓴 <<베트남의 역사>>를 샀다. 40년 전, 대학생 시절 학과 도서실에서 빌려 온 <<베트남사>>를 첫 머리만 읽고 반납하였다. 그동안 몇 차례 개정되어 나온 이 책을 베트남 여행을 앞두고 밑줄을 치며 읽었다. 많은 고유 명사들이 등장하는 복잡한 역사인지라 읽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한자와 라틴어 알파벹으로 적은 베트남어를 괄호 속에 넣어 주어서 그나마 읽기에 편했다. 대학 시절부터 베트남과 우리나라가 대륙에 붙은 반도라는 지리와 중국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역사가 비슷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베트남은 우리 민족보다 더 중국의 지배 속에 있었다. 어릴 적 옆집의 형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돌아오며 가져온 트렁크 속에서 쏟아진 물건들을 구경한 일이 있지만 나에게 베트남의 수도는 사이공이었고, 베트남 역사의 중심지는 메콩강 델타 지역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사를 읽고서 베트남(越南) 역사의 중심지가 하노이가 있는 베트남 북부의 훙강 델타 지역인 것을 알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베트남은 중국에게 1,000년을 지배받았고, 조공과 책봉의 관계를 맺었지만 왕이라 하지 않고 황제라 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다. 송, 원, 명의 침공을 받았고, 그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그리고 베트남 중부 이남의 힌두교 문화를 받아들인 참파국과도 치열한 세력 다툼을 하였다. 청과 프랑스는 베트남을 두고 전쟁을 하였고, 2차대전 뒤에는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쪽에 중국 국민당 군대가, 남쪽에 영국군이 들어와 일본군 무장 해제를 하였다. 베트남은 문화적으로도 한자, 한문을 썼고, 유교와 중국의 한문 대승 불교, 도교가 전파됐다. 성리학 유교가 국가와 사회 지배 이념이 된 조선시대와 달리 베트남은 유교보다 불교의 영향력이 더 컸다. 그만큼 왕조가 안정이 되지 않고 굴곡이 심한 정치적 변동을 겪었고, 현재 베트남 인구의 80~90%가 불교 신자이다.
제주항공사 비행기로 5시간을 비행하였다. 낙동강 주변의 평야들을 굽어보던 비행기가 고도를 높여 구름 위로 올라 남쪽 태평양 바다 위를 날았다. 저가 항공사인지라 기내는 다소 좁고 기내식 서비스나 영화를 볼 수 있는 시설이 아예 없었다. 서연샘이 미리 준비한 꼬마 김밥을 점심으로 먹으며 지루한 비행을 하였다. 중간에 타이완의 높은 산맥 위를 지나갈 때는 육지를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이현주 목사가 옮긴 틱낫한 스님의 <<틱낫한 명상(The Miracle of Mindfulness)>>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은 30여 개 언어로 번역된 책이다. 오래 전에 중국 쓰촨의 아미산에 있는 절의 서점에서도 이 책의 중국어판을 볼 수가 있었다. 미국을 돌며 반전 평화 운동을 하던 틱낫한 스님이 베트남 전쟁에 피폐해진 민중의 삶을 도와주는 1만 명의 청년봉사학교 봉사자들을 심리적으로 지치지 않도록 편지로 명상을 안내한 책이다. 대념처경(大念處經)을 바탕으로 설거지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등 생활에서 정념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쓴 이 책에서 소개한 귤 먹기 명상은 학생들과 교실에서 함께 해볼 수 있었다. 계림샘의 지도와 도움으로 농사를 짓는 텃밭 곁에 마장지라는 저수지가 있다. 여름이면 백련이 피어나는 저수지의 물 위로 포항시에서 시민들의 걷기 운동을 위하여 나무다리를 설치해 놓았다. 이 나무다리 위에 틱낫한 스님의 이 책에서 뽑은 아포리즘이 쓰인 팻말이 있지만, 누구의 말인지를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물 위를 걷거나 공중을 걸으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물이나 공중을 걷는 게 기적이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게 기적이에요. 날마다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기적을 겪고 있는 겁니다. 파란 하늘, 흰 구름, 푸른 나뭇잎, 호기심에 찬 어린이의 까만 눈동자, 우리 자신의 두 눈, 이 모두가 기적이지요.”
여행 전에 경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서양 명화를 관람하고 온 뒤에 아내가 목감기를 앓았고, 나도 목이 결렸다. 아내는 약을 먹고 여행 직전에 감기가 나았지만, 나는 비행기에서부터 목이 붓고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발목 골절이 완치되지 않고 걷기에 불편한데, 몸에 열이 오르니 감기약도 가져오지 않아서 불안이 더 커졌다.
내 옆자리 사람부터 주변 사람들은 교회 신자들이었고, 그들은 아마도 베트남에 선교를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미국 다음으로 해외에 선교 인력을 많이 보내는 한국의 교회들은 경쟁적으로 장단기 선교를 위해 아시아 각국으로 선교 인력을 보낸다. 동남아시아는 이슬람교 국가도 있지만 이들의 선교 지역은 주로 불교 국가들이고, 소수 민족 사회이다. 민족 간에, 가족 간에 정체성을 분열시키고 민족 간 분규를 일으키는 원인을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제공하는 셈이다. 순수한 의미의 봉사를 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거늘, 기독교 선교를 위한 봉사와 물질적 도움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독교 선교가 아니라 ‘희생’과 ‘이웃 사랑’ 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기도는 골방에서 조용히 하고, 선행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선행을 하는 사마리아인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좋다고 하였다.
베트남 3대 도시에 들어가는 다낭(沱灢) 공항에 마침내 오후 1시경에 도착했다. 출국 수속을 하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베트남 가이드가 계림역사기행이라고 쓴 종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고, 우리나라 양산성당의 신자들이 성지 순례 프랭카드를 들고 도착 기념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다낭 시내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된장찌개와 돼지고기 수육, 상추 쌈으로 늦은 점심밥을 먹었다. 식당의 벽에 ‘외부에서 술을 들여오면 베트남 돈 2억 동의 벌금을 매긴다’는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한국인 관광객이 소주를 들고 베트남에 많이 온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베트남의 화폐 단위가 높다는 것에 또 놀랐다.
다낭을 관통하는 강 이름이 한강이고 강폭도 서울의 한강만큼 크고 수량도 풍부하였다. 강 다리에 노란색의 거대한 용 조형물이 붙어있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78년에 출간된 박영한의 소설, <<머나먼 쏭바강>>의 ‘쏭바강’이 다낭의 이 한강이라고 한다. 베트남어 '쏭'은 강이라고 한다. 어릴 적, 책장에 꽂혀있는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병사와 베트남 여대생의 연애가 줄거리인 소설로 기억한다. 소설은 1993~1994년에 에스비에스(SBS) 창사 기념 티브이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다낭의 용다리를 건너서 버스는 동하까지 192킬로미터의 길을 간다. 베트남의 남북을 잇는 2,300킬로미터의 국도 1호선인 도로는 편도 1차선이다. 다낭 북쪽의 험준한 고개인 하이 번 관(海雲關) 밑을 뚫은 긴 터널을 지나서 후에(順化)로 접어들었다. 일본과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아 만든 터널이 생겨 1시간가량 차량 운행 시간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응우옌 왕조의 터를 닦은 응우옌 호앙(阮潢)은 1602년에 하이 번 관을 넘어서 투언 호아(順化, 후에Hue)의 남쪽인 꽝남(廣南)으로 갔다. 그곳에서 군사 제도 확립을 위하여 진영을 세울 자리를 지정하고, 창고를 세웠다. 꽝남은 북부와 대결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을 제공하였다. 그는 뒷날 자신의 후계자가 되는 여섯 째 아들을 꽝 남 영(廣南營) 진수(鎭守)로 임명했다.
젊은 날 영국에 유학하여 언어학을 공부하였다고 하는 가이드 윤 실장은 우리의 여행 일정이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탐험 코스라며 다른 한국인은 거의 하지 않는 일정이라고 하였다. 동남아의 지리를 코끼리의 머리에, 베트남은 베트남이나 중국에서 짐을 나를 때 앞 뒤로 짐 바구니가 달린 어깨에 매는 막대기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코끼리의 발가락이 몇 개인지에 대한 퀴즈를 냈다. 저마다 발가락 개수를 말했다. 나는 20개라고 하였지만, 정답은 앞발에 5개, 뒷발에 4개의 발가락이 있어서 모두 18개가 정답이었다. 태국의 치앙마이에 정착해 살지만 아내만 그곳에 살고, 자신과 자녀들은 직업 때문에 한곳에 머물러 살지 못하고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하였다. 자본을 따라 이동하며 사는 새로운 유목민 가족이다. 젊은 날, 인도 여행을 하며 바라나시에서 갠지스강 가의 화장 모습을 보고 마음의 동요가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수따니파타의 유명한 구절을 읊기도 하였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도로 가에 휴게소가 없어서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하여 버스가 잠시 멈춘 곳은 바나나풀이 울타리 안의 밭에서 자라는 주유소이다. 의류와 과자 등 잡화를 파는 제법 넓은 마트를 지나 건물 뒤쪽의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오는데 마트 앞에서 게임기를 들고 놀고 있는 서너살 먹은 아이가 귀여웠다.
다낭에서 출발하여 3시간 넘게 달려서 버스가 북위 17도 선의 동하(Dong Ha)에 있는 벤하이강(Song Ben Hai) 위에 남북을 잇는 히엔 룽(Hien Luong) 나무다리에 도착했을 때는 주위가 어둑어둑하고 사물을 촬영하기가 어려웠다. 서늘한 밤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부는 나무다리의 중간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왔다. 다리의 남쪽에는 전쟁 희생자 위령탑이 있고, 도로 건너편 서쪽에는 거대한 받침대 위에 커다란 금성홍기(金星紅旗)가 펄럭였다. 국기의 붉은 색 바탕은 베트남 민족 해방의 혁명과 피를, 금색 별의 5각은 노동자, 농민, 지식인, 청년, 병사를 상징한다고 한다. 받침대의 정면에는 베트남 지도가 있고, 베트남 역사를 보여주는 벽화가 받침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다리의 북쪽에는 국경 초소 건물이 있었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초소 건물 울타리 밖의 길바닥에 마을 주민들이 원혼들에게 향을 피워 올리는 작은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에 히엔 룽 다리 역사박물관이 있었다. 버스에 오르는데 마을 사람이 멍키 바나나를 팔았다.
2차대전이 끝나고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하여 북위 16도선 이북에는 중국 국민당 군대가, 남쪽에는 영국군이 들어왔으며 뒤이어 프랑스가 베트남이 자신들의 유산임을 주장하며 들어왔다. 임시정부의 수반인 호치민은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1945년 9월 2일에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하이 퐁에 대한 함포사격과 공습을 한 프랑스군은 1946년 11월 23일에 하이 퐁을 점령하였다. 베트남과 프랑스의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1954년 5월 7일 프랑스는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항복했다. 프랑스군은 1,600명이 전사하고 4,800명이 부상당했으며 1,600여명이 실종됐다. 포로가 된 4,800명의 송환자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보 응우옌 지압(武元甲) 군대도 인해전술로 피해가 컸다. 전사자 7,900명 부상자 15,000명이었다. 1954년 이승만은 2차례 미국에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의했다. 1954년 7월 20일에 조인된 제네바협상으로 호찌민 정부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남북의 경계를 북위 17도선으로 한다는 데 동의했다.
300일 이내에 호찌민 정부군과 프랑스군, 자유의사에 따라 민간인은 17도선 이북과 이남으로 이동한다. 군사경계선은 잠정적인 것이고 독립과 통일이라는 원칙에 근거한 정치적 문제의 해결은 1956년 이전에 총선거로 결정한다. 일체의 외국군대는 증원될 수 없으며 프랑스군은 총선까지 주둔할 수 있다. 캐나다, 폴란드, 인도 3국 국제감시위원회를 두어 협정 이행을 감시한다. 바오 다이 정부는 이러한 제네바협정의 휴전조약에 반대하면서 서명을 거부했다. 미국도 베트남 절반이 공산화된 데에 대한 불만으로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고, 군사개입은 않겠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북위 17도선에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고, 벤하이강 위의 이 나무다리는 남북을 잇는 다리이었다. 한국전쟁 뒤에 휴전선에 비무장지대가 설정되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임진강 위에 설치된 것과 닮았다.
건기라고 하지만 후에의 북쪽에는 비가 내리고 날씨가 쌀쌀한 편이었다. 빗길에 버스가 편도 1차선의 도로를 시속 60킬로 정도의 속도로 가로등이 없는 어둑한 길을 달렸다. 관유샘이 법련(法蓮) 거사님께 빗길 안전 운행을 위하여 불경을 낭송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뒷자리에 앉은 법련거사님이 앞자리로 와서 마이크를 잡고 천수경(千手經)을 구성지게 읊었다. 불자인 나는 그 내용을 알아들었지만, 다른 분들은 우리 겨레의 유구한 불심으로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가톨릭 신자는 독경의 음성과 가락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하다며 좋아했다.
관유 샘이 지루해하는 일행을 위하여 아재 개그를 하였다. 강원도 묵호항에 헤밍웨이가 젊은 날에 와서 낚시를 즐기며 이용한 식당에서 천하일품의 메밀묵을 먹었다. 몇십 년의 세월이 흘러 그 메밀묵이 생각나서 묵호항에 와서 다시 그 묵을 먹어보고는 맛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서 헤밍웨이가 쓴 유명한 소설이 “무기여! 잘 있거라!”이었다.
북위 17도의 비무장지대에 있는 벤하이강의 히엔룽 목교에서 다시 동허이(Dong Hoi)까지 100킬로미터를 더 북상하였다. 1번 국도 양쪽 가에 있는 집들은 전면은 좁고 뒤쪽으로 길게 지어져 있다. 베트남 정부에서 도로 앞면을 골고루 분배하면서 만들어진 주택 모양이라고 하였다.
히엔 롱 다리에서 100킬로미터를 북상하여 베트남 시간으로 밤 10시 30분경에 버스가 멈춘 곳은 동허이의 쌀국수집, 포 란(Pho Lanh)이었다. 포(Pho)라고 불리는 쌀국수는 고소한 맛이 나는 닭고기가 들어있고 국물이 시원하였다. 베트남 전쟁 뒤에 미국으로 건너가 살던 베트남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팔았던 음식이 포이었다고 한다. 주인은 한국인 손님은 처음이라며 두 손을 맞잡으며 한국-베트남의 우의를 다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비가 내리는 쌀쌀한 날씨에 목의 염증이 심해져서 몸에 열이 났다. 베트남 쌀국수 가게인 ‘포메인’에서 담백한 쌀국수를 즐겼지만, 정작 쌀국수의 현장에서는 감기로 입맛이 떨어져 뜨끈한 국물만 마시고 면과 고기를 많이 먹지는 못했다. 내 자리 옆의 벽면에 장식품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반합이 놓여 있었다. 어린 날, 또래 아이들과 소를 몰고 마을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소에게 풀을 먹게 하고, 옆집 형이 이와 똑같이 생긴 반합을 들고 와서 모닥불을 피우고 밥을 지어 함께 먹었던 기억이 생각났다. 소들이 풀을 뜯어먹을 동안 아이들은 억새 줄기를 뽑아 칡으로 묶은 기관단총을 만들어 들고 머리에는 떡갈나무 잎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는 풀섶을 기어다니며 전쟁 놀이를 하였다. 그 형은 군인이던 자형에게 얻은 쌍안경과 반합을 가지고 있었다. 육이오전쟁 때와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사용한 야전용 취사도구인 반합이나 쌀국수 포는 전쟁의 고난을 겪은 베트남 민족의 현대사를 증언하였다. 가게 안에는 재물의 신을 모시는 작은 제단이 있고 과일과 술, 차와 국수, 꽃 등을 공양 올려놓았다.
집을 나선지 거의 20시간 만인 밤 11시경에 동허이 시내에 있는 삼 꽝빈(廣平) 호텔(Sam Quang Binh Hotel)에 체크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