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선진(先進)’에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성어로 잘 알려진 고사가 실려 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현명합니까?”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부족하다.” “그러면 자장이 더 낫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모자라기에 둘 다 중용(中庸)의 도에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중용은 유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로, 중은 ‘편벽되거나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다. 용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변하지 않음’을 뜻한다. 즉 ‘중용’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올바른 도리이자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도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용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도리는 아니었다. 중용의 도를 집대성한 책 <중용>에서 공자는 “천하의 국가를 평정하여 다스리는 것도 가능하고, 직위나 녹을 사양하는 것도 가능하며, 시퍼런 칼을 밟고 서는 것도 가능하지만, 중용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고사에 등장하는 자장과 자하는 공자의 제자들이다. 자장은 능력도 있고 적극적인 성품이지만 의욕이 지나친 면이 있었다. 동문들로부터 “능력도 있고 당당하지만 더불어 인(仁)을 행하기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자하는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공문십철(孔門十哲)에 꼽히는 제자이지만 고지식하고 소극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서 공자는 자하의 부족함을 지적하며 “군자와 같은 선비가 돼야지 소인과 같은 선비가 돼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군자는 수양과 학문이 뛰어난 인물로, 모두가 되고 싶어하는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에 비해 소인은 인격과 수양이 부족한, 평범함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가의 제자들은 모두 군자가 되기 위해 수양 중인데 거기다 대고 “소인과 같은 선비가 되지 말라”고 스승이 얘기했으니 자하에게는 보통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논어> ‘자장’에는 자하가 군자에 대해 말했던 것이 실려 있다. 스승의 지적처럼 소극적이고 고지식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군자다운 선비가 되기 위해 스스로 목표로 삼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바로 군자의 세가지 변화, 즉 군자삼변(君子三變)의 모습이다.
자하가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가지 변화가 있다. 그를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서 대해보면 온유하며, 그의 말을 들어보면 엄정하다(君子有三變 望之儼然 卽之也溫 聽其言也厲 군자유삼변 망지엄연 즉지야온 청기언야려).”
여기서 군자의 변화란 군자가 스스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군자는 변함없는 모습을 하고 있으나 보는 사람들이 각각의 상황에 따라 군자에게서 받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먼저 멀리서 볼 때 위엄이 있는 것은 겉모습이 가볍지 않고 의젓한 것이다. 이는 겉을 꾸며서 얻는 엄숙함이 아니라 내면의 수양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품격 있는 모습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까이하기 어려워한다. 엄숙하고 당당한 모습에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에서 그를 대해보면 온화하고 부드럽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사람을 대할 때 따뜻한 인간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공자의 핵심철학인 인(仁)이 삶에서 드러나는 모습이다. 인은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충(忠)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서(恕)의 정신이다. 한마디로 하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다.
마지막으로 군자는 진실하고 엄정한 말의 능력을 갖고 있다. 비록 달변은 아닐지 모르지만 했던 말은 반드시 지키는 신의가 있다. <논어> ‘리인’에 실려 있는 ‘군자란 말은 더디지만 행동은 민첩하다(君子欲訥於言 而敏於行·군자욕눌어언 이민어행)’가 그것을 뜻한다.
엄숙함과 온화함, 그리고 말의 엄정함은 서로 어울리는 덕목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가지 품성이 어긋남 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것이 바로 군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어른, 존경받는 지도자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