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을 덥히자 청계천이 범람했다기후, 자연의 리듬을 벗어나다
기상청에서는 매년 전년도의 기상 현황을 분석해 연감을 발간한다. 『2022 기상연감』에 따르면 작년은 연평균 기온이 1973년 이후 아홉 번째로 높았고 11월과 12월의 기온 차는 역대 가장 큰 폭을 기록했다. 온난화 등 기후변동의 영향은 전 세계적으로 관찰된다. 근래의 기후이변은 지구가 자연적인 주기를 점차 이탈해가며 발생하는 것으로, 인간의 활동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질학적 초강대자가 되어 지구를 오랜 발전 단계에서 새로운 길로 이끈” 오늘날을 흔히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인류세 이전에도 예측 불가한 기후변동은 존재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빙기(小氷期, little ice age)이다. 지구는 지난 73만 년 동안 주기적으로 최소 8~9번의 빙기(glacial episode)를 겪어왔는데, 그 사이 사이에 소빙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기후학을 하나의 학문 분과로 자리매김하는데 공헌한 휴버트 H. 램의 연구에 따르면, 소빙기에는 여름과 겨울 모두 낮은 기온을 보이며 기온과 강수가 불규칙하게 변동하여 홍수와 가뭄 등의 재해가 빈번히 발생하게 된다고 한다.
수많은 연구를 통해 1300~1800년대 후반에 마지막 소빙기가 존재했으며, 특히 전 세계적으로 17세기에 그 여파가 가장 극심했음이 드러났다. 영국에서는 템스강이 얼어붙어 얼음 위에 장이 들어서기도 했고, 프랑스의 포도 수확은 예년보다 한참 늦어졌다. 조선 역시 소빙기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7세기 현종대의 경신대기근(1670~1671)과 숙종대의 을병대기근(1695~1696)은 모두 황충, 냉해, 가뭄, 홍수 등 이상기후로 인한 피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 무렵에는 한강도 더 오래 얼어있었으며 심지어는 동해가 수개월 동안 얼어붙기도 했다.
소빙기를 맞이한 조선의 모습
이상저온 현상이 최소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한 사회의 일상생활, 즉 의식주에 많은 변화를 야기했을 것이다. 의생활과 관련해서는 목화 재배 확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목화씨는 문익점’이라고는 하지만, 문익점은 고려 말 사람인데 반해 실제로 한반도에서 목화 재배가 확대된 시점은 수 세기가 지난 조선 후기에서였다. 왜 하필 그 시점에 목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을까. 농민이 자신의 재배 작물 목록에 목화를 포함시키기까지는 다양한 유인이 존재했을 것인데, 여름철에도 동해를 얼릴 정도의 이상기후 현상도 그 후보에서 배제할 수 없다.
소빙기가 조선의 식탁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해수 저온 현상과 그로 인한 어류의 이동이 발생했는데 이는 명태, 대구, 청어 등 한류성 어종의 어획량을 증가시켰다. 특히 명태는 대표적 한류성 어종으로 ‘명태’라는 이름이 처음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1652년(효종 3), 소빙기가 절정에 달했을 시점이었다. 17세기 후반 이후로는 명태 어업이 무척이나 활발해져 ‘깊은 산골의 궁벽한 고을이라고 하더라도 물리도록 먹지 않는 곳이 없’고,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혀’ ‘마치 오강(五江: 漢江, 龍山, 麻布, 玄湖, 西江)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주거환경에서는 온돌과 관련된 변화상이 눈에 띈다. 온돌과 유사한 형태의 난방 설비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으나, 이처럼 바닥을 데워 좌식 생활하는 것은 고대 이후로 줄곧 하층민의 생활양식으로 여겨졌다. 반면, 상류층은 최소 조선 전기까지 탁자나 침상을 사용하는 입식 생활을 주로 영위하였고, 난방은 화로와 같은 별도의 도구를 활용했다. 그러다 16세기 이후 차츰 사대부 계층은 물론이고 왕실에서도 하층민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온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온돌 구들의 면적이 넓어지고 고래 개수가 증가하며 온돌방을 둘 이상 설치한 건물이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에서 가장 뒤늦게 온돌을 일상화하게 된 공간은 궁궐이었다. 최소한 명종대까지도 임금의 처소에는 침상이 놓여있었고, 그 아래 화로를 두어 온기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인조대가 되면 궐내 온돌 증설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다. 궐 밖에서는 천민들도 온돌을 사용하는데 궁 안에 거주하는 이들이 추위에 떨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온돌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을 거둘 수는 없었다. 하층 생활양식인 데다 무수히 많은 땔나무가 투입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보물로 지정된 경복궁 아미산 굴뚝으로 교태전(交泰殿)의 구들과 연결되어 있다
(출처: 필자제공)
인조는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이미 설치한 온돌을 다시 없애거나 이용을 자제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임금이 먼저 온돌방을 찾게 되었다. 특히 영조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면 온돌을 자주 찾았다. 아래 두 기사를 비교해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온돌에 대한 태도가 극명하게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 궐내 내외의 온돌이 본래 일정한 제도가 있는 것인데 오늘날에 이르러 그 늘어남이 극심합니다. 마치 벌집과 같이 밀집하여 곳곳에 불을 피우니 그들은 실로 편하겠으나 백성들은 실로 견딜 수 없습니다.”
『인조실록』 1623년(인조 1) 3월 24일
서명균이 아뢰기를, “당초 비국이 관문을 보내 예전 장릉(長陵)에 행행(行幸)할 때의 전례를 하나같이 따르게 하였는데, 온돌에 대해서도 감결 가운데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듣기로 승정원이 온돌을 만들었다고 하기에 추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 해당 승지를 파직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1733년(영조 9) 9월 12일
인조 연간에는 온돌을 없애야 한다고 건의했던 승정원이 100여 년이 지난 영조대에는 자신들의 임시 숙소에까지 온돌을 설치하는데 이르렀다. 온돌에 대한 태도가 이토록 돌변할 만큼 조선 후기 사람들은 그야말로 열기에 취해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이상저온 현상은 조선 사회를 조금씩, 하지만 완전하게 바꿔놓았다.
불 땔 나무를 구하라
온돌에는 필연적으로 땔감이 투입된다. 17세기 이후 온돌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땔감 소비량이 급증했는데, 특히 인구가 집중되고 산물이 부족한 한성부에서는 땔나무 수급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더욱이 사람들은 점차 구들을 미지근하게 데우던 초기 방식에서 벗어나 뜨겁게 바닥을 달구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기에 아궁이에 던져지는 나무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500년 내내 ‘산림천택(山林川澤) 여민공지(與民共之)’를 표방하며 특정 구역을 제외하고는 숲을 민간에 개방하고 임산물 역시 백성들이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숲을 가꾸는 방책은 별도로 마련하지 않아 점차 산물이 고갈되고 산림은 헐벗게 되었다. 자연히 땔나무로 쓸만한 목재도 구하기 어려워져 조선 후기 한성부에서는 땔감 가격이 4배에서 많게는 10배까지 오르고, 포졸들이 잠복했다가 금지 구역에서 몰래 나무 베어 오는 이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한성부는 ‘땔감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스펀지’였으며, 그 대부분은 구들을 덥혀 추위를 견디는 데 사용되었다. 17세기에 한양에 처음 등장한 시목전(柴木廛:땔나무 판매점)의 존재는 당시 도성의 땔감 수요 증가 상황에 대한 확실한 근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며 한성부를 에워싼 산들은 점차 훼손되어 더 이상 자연적 재생장이 어려운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다소 뒤 시기이긴 하지만, 1910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반도 전체에서도 성림지라고 할 만한 공간은 32% 남짓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렇게 나무가 없는 상태가 되면 비가 올 때 무척이나 위험해진다. 토사가 유출되기 쉬운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비만 오면 넘치는 청계천
소빙기는 단순히 이상저온 상태를 보이는 데 그치지 않고 불규칙한 기후 패턴을 보이는 데 그 특징이 있다. 16~18세기 조선에서도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특히 홍수로 인한 피해가 심각하였다. 조선총독부 관측소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시대 한양에서 발생한 홍수는 1651~1750년에 주로 집중되어 있었다.
강수량이 많은 날이면 산으로 에워싸인 한성부는 사방에서 흘러드는 토사와 빗물로 신음하였다. 특히 도성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에는 지속적으로 흙이 쌓여 개천으로서의 성격을 잃을 지경이었다. 사실 청계천은 태종대에 대대적으로 공사해서 파낸 인위적인 물길인 데다 여타 강들과는 달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구조였기에 자연 배수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사방에서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큰 것만 어림잡아 세어 봐도 24개가량이었으니 비가 내리면 물과 흙이 모두 모여들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채제공(蔡濟恭)은 준천가(濬川歌)에서 “도읍으로 정해진 지 400년이 됐는데 비가 한 번 지나가면 막힌 곳이 하나 더 늘어나고 평지가 된다. 6~7월 장마철이 되면 땅 위로 물이 솟아서 무릎까지 찬다”고 읊었다. 물론 문학적 표현이겠지만, 아주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었던 듯하다.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 연구에서는 식민지기 복개 사업 이전의 청계천 유역을 추출한 뒤 모의 홍수범람 시험을 하여 강수량에 따른 범람 유역을 확인한 바 있다. 실험 대상 기간 중 가장 비가 많이 내린 날은 1885년(고종 22) 7월 16일이었는데, 하루 동안 서울에 392mm의 비가 내렸다. 그러자 청계천과 제일 먼 지점에도 40cm의 물이 차올랐고, 청계천 변 인근에는 범람한 물이 1m에 달했을 것으로 나타났다.
수치고도모형(DEM)을 이용해 모의로 추산한 일강우392mm(1885.07.16.)일 때
청계천 본류 및 인접 지류의 홍수 범람 구역
(출처: 윤경호, 김현준, 2015 「역사기록에 나타난 극치호우사상 검증을 위한 홍수범람 해석」,
『한국위기관리논집』11(7), p.141)
한성부의 지리적 요건과 황폐해진 사산(四山), 소빙기의 변덕스러운 기후까지 겹치며 도성은 물 마를 날이 없게 되었다. 이에 18세기 영조대의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작업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다고 하겠다. 영조는 준천에 대한 의지를 밝히면서 “개천가에 사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은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소나무를 베고, 경작해서 모래랑 자갈이 흘러내리기 때문”이라 언급하였다. 준천 이후에는 도성 인근의 벌목을 금하고 개천을 관리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대 사람들도 산림 황폐화가 토양 유실을 가속화시켜 청계천을 범람시킨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 배후에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소빙기라는 거대한 이상기후 현상도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아채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사람들에게 소빙기라는 것은 갑자기 닥친 큰 변동이 아니라 야금야금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난 점진적 변화였고,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광여도(廣輿圖)』 「도성도(都城圖)」에는 흥인문 옆 오간수문, 이간수문이 보이고 그 앞에는 청계천 준설 후
퍼올린 흙을 쌓아 올린 가산(假山)이 묘사되어 있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근대인’의 눈에 비친 청계천과 온돌
식민지기 일본인들은 도성을 무척 더럽고 비위생적인 공간으로 인식했다. 특히 청계천 인근은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곳으로 여겨졌다. 이들은 그 원인이 인근에 나무가 없기 때문이라 여기고 청계천 상류 발원지부터 조림(造林) 사업을 시작하였다. 한편, 일본인 학자들은 이토록 한반도 전역의 산림이 황폐화된 것은 온돌 때문이라 주장하였다. 조선인은 조상 대대로 온돌을 써왔는데 이는 지극히 비위생적이고 비경제적이라는 것이었다. 땔나무를 지나치게 벌목하고 낭비해 산림을 황폐화하므로 분구개량사업 등을 통해 온돌을 없애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수목 생장을 가로막고 뜨거운 구들에 몸을 뉘고자 하는 욕구를 낳은 것은 조선인의 게으른 천성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 세기에 걸쳐 나타난 이상저온 현상이었음은 알지 못하였다.
필자 소개 김소라
서울대학교에서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논문으로는 「양안의 재해석을 통해 본 조선 후기 전세 정책의 특징」, 「광무양안과 결수연명부의 結負 비교 -慶州郡 府內面 校里, 仁旺里 사례 연구」, “For Whom the Line is Drawn: Korean Indigenous Conceptions of Boundary in the Nineteenth Century and Changes in the Colonial Period”, 「불과 물: 조선 후기 이상저온 현상 속 한성부의 온돌 확산과 청계천 준설」 등이 있다.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당대적 맥락에서 이해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