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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8년 임오(1462) 2월 16일(신사)
08-02-16[02] 유구국 북쪽의 구미도에 표류하였다 돌아온 양성의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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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병자년 정월 25일에 선군(船軍) 양성(梁成) 등이 제주(濟州)에서 배를 출발하여 바람을 만나서 2월 초2일에 표류하다가 유구국(琉球國)의 북쪽 방면 구미도(仇彌島)에 이르렀었다. 섬 주위의 둘레는 2식(息) 가량이었고, 섬 안에 작은 석성(石城)이 있어서 도주(島主)가 혼자 거주하였고, 촌락(村落)은 모두 성밖에 있었다. 섬에서 그 유구국까지의 거리는 순풍(順風)의 뱃길로 2일 노정(路程)이었는데, 양성 등이 섬에 머무른 지 1개월 만에 공선(貢船)을 타고 그 나라에 이르러, 물가에 있는 공관(公館)에 거주하였다. 공관(公館)은 왕도(王都)에서의 거리가 5리 남짓하였고, 공관 옆 토성(土城)에는 1백여 가(家)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 나라와 중국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매 집으로 하여금 날마다 돌려가면서 양성 등을 공궤(供饋)하게 하였다. 1개월이 지난 뒤에 왕성(王城)에 갔는데, 왕성은 3겹으로 되어 외성(外城)에는 창고(倉庫)와 마구(馬廐)가 있었고, 중성(中城)에는 시위군(侍衛軍) 2백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고, 내성(內城)에는 2, 3층의 전각(殿閣)이 있었다. 대개 근정전(勤政殿)과 같았는데, 그 왕(王)이 길일(吉日)을 택하여 왕래하면서 그 전각(殿閣)에 거(居)하였으며, 판자(板子)로 지붕을 덮고 판자 위에는 납(鑞)을 진하게 칠하였다. 상층(上層)에는 진귀한 보물(寶物)을 간수하였고, 하층(下層)에는 주식(酒食)을 두고, 왕(王)은 중층(中層)에 거(居)하고 시녀(侍女) 1백여 인이 있었다. 그 나라의 지세(地勢)는 중앙이 협소(狹小)하여 혹은 1, 2식(息) 거리이나, 남북은 광활(廣闊)하여 그 끝을 볼 수 없었는데, 대개 장구[長鼓]의 모양과 같았다. 나라에는 큰 강[川]이 없고, 국도(國都)에서 동북쪽으로 5일 노정(路程)의 거리에 큰 산(山)이 있었으나, 산(山)에는 잡(雜)된 짐승이 없었고 다만 돼지[猪]만 있을 뿐이었다. 섬 안에는 군현(郡縣)을 설치하고 석성(石城)을 쌓아서 관(官)의 수령[守者]이 1인씩 있었는데, 도로의 서로 떨어진 거리가 혹은 1식(息), 혹은 2식(息), 혹은 반 식(息) 정도였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혹은 조밀(稠密)하기도 하고 혹은 드물기도 하였는데, 이(里)마다 각각 장(長)이 있었고, 공사(公私)의 집들이 크고 작은 것 없이 그 제도가 모두 한 일자(一字) 모양과 같았고 구부러진 곳이 없었으며, 띠풀[茅草]로 지붕을 덮었다. 그 나라는 항상 따뜻하여 서리와 눈이 없고 추운 겨울이 4월과 같아서 초목(草木)이 시들어져 떨어지지 아니하고, 옷에는 솜을 두지 않고, 말 먹이는 항상 푸른 풀을 사용하였고, 여름 해가 정북쪽에 있었다.
1. 절일(節日)ㆍ원일(元日)에는 짚으로써 왼쪽으로 꼰 새끼를 문(門)위에 걸쳐 놓고, 또 나무를 쪼개어 묶음[束]을 만들어서 쌓인 모래 위에 두고, 그 가운데 떡그릇[餠器]을 얹으며, 또 소나무를 가지고 묶은 나무[束木] 사이에 꽂는데, 5일이 지나서야 그만두었다. 그 풍속에 이를 기양(祈禳)한다고 이르며, 또 술을 두고 서로 즐기었다.
1. 7월 15일에 불사(佛寺)에 올라가 죽은 어버이의 성명(姓名)을 써서 안상(案床)위에 놓고 쌀을 상(床) 위에 올리고, 댓잎[竹葉]으로 땅에 물을 대는데, 중은 불경(佛經)을 읽고, 속인(俗人)은 예배(禮拜)하였다.
1. 노비(奴婢)는 일본인(日本人)이었는데, 비록 가까운 친족(親族)이라도 모두 사서 노비로 삼았고, 국왕(國王)의 친근(親近)한 사령(使令)들은 모두 사들인 자였고, 혹은 여국인(女國人)이 와서 노비로 바친 자들도 있었다.
1. 공장(工匠)은 단지 주장(鑄匠)과 목수(木手)만을 쓰고 나머지는 모두 보지 못하였다.
1. 포진(鋪陳)은 완초(莞草)로써 짠 자리였는데, 본국(本國)과 같았고, 혹은 중국에서 사온 것이었다.
1. 의복과 음식은, 남자의 복장이 본국의 직령(直領)의 제도와 같았는데, 다만 소매가 넓을 뿐이었고, 빛깔은 흑색ㆍ백색을 좋아하였으며, 여자의 복장은 의상(衣裳)이 하나같이 우리 나라와 같았으며, 군신(君臣)과 상하(上下)의 남녀(男女)는 모두 관(冠)이나 두건(頭巾)을 쓰지 않았다. 걸을 때는 맨발로 다니고 화혜(靴鞋) 따위의 물건이 없었고, 모든 소와 말의 가죽은 모두 관(官)에 바쳐서 갑옷을 만들었으며, 그 음식을 먹을 때에는 숟갈과 젓가락이 없었고, 완초(薍草)를 꺾어서 젓가락같이 만들어서 먹었다.
1. 남자는 말을 타는 것이 보통과 같았으나, 부인(婦人)들은 말을 탈 때에는 양다리를 함께 내리고 말 등에 걸터앉는데, 마치 교상(交床)에 앉아서 가는 것과 같았다.
1. 전화(錢貨)는 흥용(興用)하는 것이 전화(錢貨)이었으나, 그 주조(鑄造)하여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모두 중국에서 얻어다가 사용하였는데, 정축년에 중국 사람들이 처음으로 와서 가르쳤으며 10문(文)이 쌀 1되[升]에 준(准)하였다.
1. 장사아치[商賈]들이 강(江) 연안에 배를 정박(碇泊)시키는 곳에 일본 여국(女國) 사람들도 또한 와서 교역하였다.
1. 두승(斗升)은 되[升]가 우리 나라와 같았고, 말[斗]이 혹은 5되를 담기도 하고, 혹은 10되를 담기도 하고, 혹은 30되를 담기도 하였다.
1. 경점(更點)은 대궐 남문(南門)에 나무로써 누기(漏器)를 만들었는데, 그릇의 몸체는 둥글고 그 가운데가 비어 있고, 그 배에다 구멍을 뚫어서 물을 정량(定量)하여 부어 넣은 다음 물이 다 없어지는 것을 헤아려서 이를 1경(更)이라고 하며, 드디어 북[鼓]를 쳐서 알렸다. 북치는 수는 그 경(更)의 수와 같았고, 인정(人定)ㆍ파루(罷漏)는 본국과 다름이 없었다.
1. 조회(朝會)는 먼 지방의 읍장(邑長)들이 길일(吉日)을 택하여 잔치상을 준비하여 대궐 뜰에 바치는데, 국왕(國王)은 층각(層閣)에 있으면서 내려오지 않으며, 여러 신하들이 뜰에 있으면서 음식을 먹었으나, 음악(音樂)이 없고 헌작(獻爵)도 없었다.
1. 영조칙(迎詔勅)은 중국의 조칙(詔勅)과 우리 나라의 서계(書契)가 나라에 이르면 배가 정박하는 첫 지면(地面)에 기(旗)ㆍ둑(纛)ㆍ개(蓋) 등의 물건으로 의장(儀仗)을 설치하고, 또 군사들이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나가서 맞이하는데, 조칙(詔勅)이나 서계(書契)를 여교(轝轎)에 봉안(奉安)하고, 그 곁을 따르면서 북과 징을 울리고 태평소(太平簫)를 불면서 왕실(王室)로 맞아들였다. 왕(王)이 강의(絳衣)를 입고 관(冠)을 쓰고 절을 한 다음 앉으면, 이를 개독(開讀)하였다. 국왕(國王)은 항상 층각(層閣)에 있으면서 내려오지 않고, 부인(婦人)을 시켜 왕명(王命)을 전(傳)하며, 속인(俗人)은 관복(冠服)이 없이 모두 막배(膜拜)를 행하였다. 이때가 되면 뜰로 내려와 절하고 꿇어앉기를 대략 예법(禮法)과 같이 하였다.
1. 상장(喪葬)은 본래 국왕(國王)이 죽으면 일체 시위(侍衛)에 응(應)해야 하는데, 주민(住民)은 마관(麻冠)ㆍ마의(麻衣)를 입고 곡(哭)하여 슬픔을 다하고 14일[二七日]만에 끝내었다. 모든 백성들이 부모의 상(喪)을 당하면 족친(族親)들이 상가(喪家)에 모여서 조상(弔喪)하고 곡(哭)하며, 상(喪)을 당한 사람은 흰옷[白衣]을 입는데, 모두 3일 뒤에야 고기를 먹으며, 7일 안에는 살생(殺生)하지 않았다.
1. 국왕(國王)의 장례(葬禮)는 바위를 파서 광(壙)을 만드는데, 광(壙) 안의 사면(四面)에 판자(板子)를 짜서 세우고, 드디어 관(棺)을 내려 묻은 다음에 판자 문(門)을 만들어 자물쇠를 채우고, 묘(墓) 앞과 양쪽 옆에다 집을 짓도록 하여서 묘(墓)를 지키는 사람이 거주하며, 묘를 빙 둘러서 석성(石城)을 쌓는데 성(城)에는 하나의 문(門)이 있었다. 보통 사람의 장례(葬禮)는 광(壙)을 파서 관(棺)을 묻는 것은 같았으나 다만 집을 짓고 성(城)을 쌓는 따위의 일이 없을 뿐이었다.
1. 혼가(婚嫁)는 혼인(婚姻)할 때에 남자 집에서 먼저 중매(中媒)를 하여 혼인을 약정(約定)하고 날짜를 택하는데, 남자 집의 친족(親族) 여자가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 행례(行禮)하며, 그날 밤에 양쪽 집 족친(族親)이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헤어졌다.
1. 제사는 그 나라에 제향(祭享)이 없었다.
1. 조관(朝官)은 무릇 사람을 쓸 때에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의 천거(薦擧)를 들어주고 관(官)에서 노비(奴婢)ㆍ토전(土田)ㆍ집[家舍]과 군기(軍器) 등의 물건을 주며, 만약 유능하지 못하면 파출(罷黜)하고 아울러 그에게 주었던 물건을 회수하였다. 상시로 1백여 인이 대궐 안에 있으면서 정사를 다스리는데, 5일씩 서로 교체(交遞)하였고, 또 4, 5인의 장번(長番)이 있어서 대궐을 나가지 않는데, 만약 자기 뜻대로 자주 출입(出入)하는 짓을 행하면 파출하기를 위와 같이 하였다. 그 입번(入番)할 때에는 모두 공름(公廩)에서 녹을 받고, 그 중에 1인이 우두머리가 되어 이들을 총괄하여 다스렸다.
1. 도적(盜賊)은 본국(本國)에서는 도적이 없고, 일본(日本)에서 팔려간 자들이 왕왕 남의 재물(財物)을 훔치는데, 체포하여 국문(鞫問)하고 죄가 크면 이를 주륙(誅戮)하고 작으면 다른 섬에 유배(流配)하였다. 그 추국(推鞫)하는 법은 태형(笞刑)ㆍ장형(杖刑)이 없고, 다만 땅에 두 개의 판자를 겹쳐 놓고 죄인의 다리를 그 사이에 끼워서 그 양쪽 끝을 묶고 사람으로 하여금 올라가서 휘어지게 하는데 한쪽 끝에 3인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1. 농상(農桑)은 여러 가지 곡식이 모두 있었으나 다만 팥[小豆]ㆍ보리[大麥]ㆍ녹두(菉豆)가 없었다.
1. 뽕나무ㆍ삼ㆍ목면(木綿)이 없었고, 다만 생저(生苧생모시)가 있었는데, 그 길이가 2장(丈)쯤 되었으며, 1년에 세 번 취(取)하였다.
1. 한전(旱田)과 수전(水田)은 쟁기[耒耜]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손으로써 매만졌고, 매 10월에 모종하였다가 다음해 정월에 모를 나누어 심어서, 5월이 되어 익으면 그 이삭을 베고 짚 줄기를 베지 않는데, 거기에서 곁가지 모가 또 번성하여 10월에 다시 거두었다. 전지를 매만지는 데 다만 삽(鍤)으로 할 뿐이었고, 쟁기를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1. 소산(所産)은 금(金)과 은(銀)이 나지 아니하여 남만(南蠻)ㆍ일본(日本)에서 사서 사용하였다.
1. 금수(禽獸)는 가축으로서 소ㆍ말ㆍ돼지ㆍ닭ㆍ개가 있었고, 날짐승으로서 까마귀ㆍ참새가 있었는데, 그 풍속이 앵무(鸚鵡)새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여 항상 중국에서 사왔었다.
1. 수륙(水陸)의 산물은 물에서 나는 것이 다만 어물(魚物)뿐이었고, 육지에서 나는 것은 유자(柚子)ㆍ귤(橘)ㆍ감(柑)뿐이었다.
1. 군사(軍士)는 군사 1백여 명을 정원으로 하여 날마다 바꾸어 숙직(宿直)을 교대하였으나, 그 원래의 수는 쉽게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군사 장비와 갑옷ㆍ투구는 본국과 다름이 없었다. 쇠로써 조각을 만들어 그 얇기가 종이짝 같은데 갑령(甲領)에 붙이니, 마치 목을 보호하는 문양(文樣)과 같았다. 또 쇠로써 인면(人面)을 만들어 얼굴 위에다 붙이는데, 그 모양이 마치 가면(假面)과 같았다. 환도(環刀)ㆍ방패ㆍ창(槍)은 본국과 다름이 없었으나, 다만 쇠로써 네 가지가 난 날[刃]을 만들어 그 모양이 굴곡이 있고 2장(丈)쯤 되는 나무로써 자루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그 풍속에 이를 구(拘)라고 이르며, 먼 곳의 죄인을 참형(斬刑)하는 병기(兵器)였다.
1. 화통(火筒)은 그 크고 작은 것과 체제(體制)가 하나같이 본국의 제도와 같았다.
1. 궁시(弓矢)는 뽕나무로써 활을 만들고 저사(苧絲)로써 시위를 만드는데, 활은 본국의 마전(磨箭)과 같았으며, 혹은 대나무로써 활촉을 만든 것도 있었다.
1. 교린(交隣)은 중국과 일본국(日本國)ㆍ여국(女國)과 서로 통호(通好)하였으나, 그러나 종종 하는 것이 아니었다.
1. 중국과의 정도(程途)는 동남풍(東南風)을 따라서 배가 7일 동안 가면 도착하고, 일본(日本)과의 정도(程途)는 서풍(西風)을 따라서 배가 18일 동안 가면 도착하였다.
1. 공전(攻戰)은 나라의 동쪽에 두 섬이 있었는데 하나는 지소도(池蘇島)이고 하나는 오시마도(吾時麻島)였으니, 모두 항복 귀부(歸附)하지 않았다. 오시마도는 공격 토벌하여 귀순(歸順)한 지가 지금 이미 15여 년이나, 지소도는 매년 토벌하기에 이르지만 아직도 복종(服從)하지 않고 있었다.
초득성(肖得誠) 등 8인이 금년(今年) 정월 24일에 나주(羅州)에서 배를 출발하여 2월 초4일에 표류하다가 유구국(琉球國) 미아괴도(彌阿槐島)에 이르렀다. 섬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실어 와서 먹이고 인도하여 이 섬에 머물게 하고서 섬사람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음식을 준비하여 공급하였다. 섬의 길이가 2식(息) 가량, 너비가 1식(息) 정도 되었다. 2월에 보리를 이미 거두어 들였고 밀이 모두 익었으며, 참외와 가지도 또한 이미 열매가 맺혔다. 4월 16일에 이르러 유구국 상선(商船)에 쫓아가 부탁하여 그달 27일에 본국(本國)에 도착하였다. 국왕(國王)이 궁내(宮內)의 남쪽 행랑(行廊)에다 두고 접대하였는데, 날마다 불러 보고 후하게 공궤(供饋)하였다. 7월 6일에 출발하여 돌아왔다.
1. 성(城)은 3겹으로 되었고 모두 석성(石城)이었는데 성(城)의 높이는 우리 나라의 도성(都城)과 같았으나 약간 높았으며, 성문(城門)도 또한 우리 나라와 같았다. 그 성(城)은 구부러져서 마치 곡수(曲水)와 같았는데 두 성(城)의 서로의 거리가 마치 한 필(匹)의 베[布] 길이와 같았다.
1. 국왕(國王)은 2층(層)의 전각(殿閣)에 거(居)하였는데, 그 전각은 모두 단청[丹艧]을 입히고 지붕을 판자(板子)로 덮고 취두(鷲頭)마다 납(鑞)으로써 진하게 칠하였다. 낭무(廊廡)는 주위 둘레에 돌아가면서 연접(連接)하였는데, 그 간수(間數)를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군사들이 머물러 숙위(宿衛)하였는데, 조회(朝會)와 죄수(罪囚)를 국문(鞫問)할 때에 군사들은 갑옷을 입고 시위(侍衛)하였으며, 또 면갑(面甲)을 착용하였는데, 마치 가면(假面) 모양과 같았으니, 쇠로써 두 뿔을 만들어 모양이 마치 녹각(鹿角)과 같았고 금(金)ㆍ은(銀)으로 진하게 칠하였다. 쇠로써 행등(行滕)을 만들어 그 두 다리를 묶었다.
1. 국왕(國王)은 나이가 33세였다.
1. 국왕(國王)은 아들 4인이 있었는데, 장자(長子)는 나이가 15세쯤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리었다. 장자(長子)가 출입(出入)할 때에는 군사 10여 인이 모시고 따랐었다. 왕자(王子)들은 국왕(國王)과 더불어 같은 곳에 살지 아니하고 따로 다른 곳에서 살았다.
1. 옛 궁궐은 살고 있는 궁성(宮城)의 남쪽에 있는데, 그 층각(層閣)과 성곽(城廓)의 제도가 항상 거처하는 궁궐과 같았다. 때때로 왕래하면서 혹은 2, 3일씩, 혹은 4, 5일씩 머물러 거처하였다. 국왕(國王)이 행차할 때에 시위(侍衛)하는 군사는 약 3백여 명이었는데, 모두 갑옷을 입고 말을 탔으며, 잡고 있는 병기(兵器)는 혹은 궁시(弓矢)이거나 혹은 창(槍)이거나 혹은 검(劍)이었고, 혹은 모양이 갈고리[鉤] 같은 것도 있었는데, 전후로 대열(隊列)에 섞여서 행진하였다. 국왕(國王)은 혹은 교자(轎子)를 타기도 하고 혹은 말을 타기도 하며, 시위하는 군사들은 노래를 부르는데, 그 곡절(曲節)이 마치 농부가(農夫歌)와 같았다. 국왕의 나이 어린 세 아들은 대열의 앞에 있고, 장자(長子)는 대열의 뒤에서 따랐다.
1. 국왕(國王)이 한가롭게 거(居)할 때에는 혹은 홍백초(紅白綃)를 사용하거나 혹은 흑초(黑綃)를 사용하여 머리를 싸매지만, 만약 출입(出入)할 때에는 왜립(倭笠) 착용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본국(本國) 여자들의 죽립(竹笠)과 같으며, 안은 붉고 바깥은 검었다. 복식(服飾)은 조관(朝官)과 별 다름이 없었다.
1. 5일마다 한 번씩 조회(朝會)하는데, 좌우에 각각 하나의 대기(大旗)를 세우고 다른 의장(儀仗)은 없었다. 조관(朝官)이 뜰에 들어가 합장(合掌)하여 세 번 절하였다. 그날 인민(人民)들이 술통을 가지고 와서 궁궐에 술을 바치고, 또 생저(生苧)도 바쳤다.
1. 백성들의 거주(居住)가 조밀(稠密)하여 집들이 가까와 담장이 붙었고, 길거리가 매우 좁은데, 인가(人家)에서는 소나무와 종려나무 두 그루를 심기를 좋아하였다.
1. 의복(衣服) 제도는 하나같이 왜복(倭服)과 같았는데, 다만 바지를 입지 않을 뿐이었다. 그 복장은 단자(段子)ㆍ사초(紗綃)와 저포(苧布)를 쓰는데, 남녀가 같은 복장이었다.
1. 그 풍속에 항상 크고 작은 칼 두 자루를 차고 다니는데, 음식을 먹고 기거(起居)할 때에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칼의 모양은 본국(本國)의 환도(環刀)와 같았다.
1. 상하(上下)의 남녀(男女)는 아울러 모두 맨발로 다니며 신발을 신지 않으나, 다만 성(城) 밖에서는 신을 신는데 왜혜(倭鞋)와 같았다. 궁성(宮城)에 들어오면 신지 않으며, 비록 성(城) 밖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존장자(尊長者)를 만나면 또한 벗어버렸다.
1. 남자는 상투를 땋아서 머리의 왼쪽으로 두고, 여자는 상투를 땋아서 머릿골 뒤에 두는데, 항상 관건(冠巾)을 쓰지 않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혹은 왜립(倭笠)을 쓰기도 하고, 혹은 종려 잎을 쓰기도 하고, 혹은 전삼(氈衫)을 쓰기도 하고, 혹은 도롱이[蓑衣]를 쓰기도 하였다.
1. 조관(朝官)의 녹봉(祿俸)은 5일마다 한 차례 반사(頒賜)하였다.
1. 외성(外城) 안에 창고(倉庫)와 내구(內廐)가 있는데, 항상 큰 말 6필(匹)을 길렀다.
1. 강(江)가에 성(城)을 쌓고, 그 가운데 주고방(酒庫房)을 설치하여 방 안에 큰 옹기(甕器)를 배열(排列)하고 술들을 가득 채워 놓고서, 1년치, 2년치, 3년치의 주고(酒庫)에 그 정액(定額)을 나누어 써 붙였다. 또 군기고(軍器庫)를 설치하여 철갑(鐵甲)ㆍ창(槍)ㆍ검(劍)ㆍ궁시(弓矢)를 그 가운데에 가득 채워 놓았다.
1. 여러 가지 곡류(穀類)가 모두 있었다.
1. 그 가축(家畜)은 소ㆍ말ㆍ닭ㆍ개가 있었고, 짐승은 노루ㆍ사슴이 있었고, 날짐승은 제비ㆍ꾀꼬리ㆍ까마귀ㆍ뻐꾸기ㆍ참새가 있었으나, 호랑이와 표범은 없었다.
1. 그 채소(菜蔬)는 파ㆍ부추ㆍ마늘ㆍ생강ㆍ무우ㆍ상치ㆍ파초(芭蕉)ㆍ양하(蘘荷)ㆍ토란ㆍ마[薯藇]가 있었다.
1. 선척(船隻)은 항상 벌레가 먹을까 염려하여 강(江) 가에 초사(草舍)를 지어서 들여놓았다.
1. 저자[市]는 강(江) 가에 있었는데, 남만(南蠻)ㆍ일본국(日本國)ㆍ중국의 상선(商船)이 와서 서로 교역하였다.
1. 남만(南蠻)은 나라의 정남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3개월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일본국(日本國)은 나라의 동남쪽에 있는데 5일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중국은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20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1. 다만 모든 도적(盜賊)은 다 주륙(誅戮)하였는데, 혹은 국왕(國王)이 친히 국문(鞫問)하고 군사들이 잡아가서 성(城) 밖에서 죽이었다. 혹은 관부(官府)에서 유사(有司)가 죄를 다스려서 죽이기도 하였다.
1. 수산(水産)은 오로지 어물(魚物)뿐이었고, 육지에 있는 것은 오로지 배나무ㆍ밤나무ㆍ복숭아ㆍ종려나무ㆍ소나무ㆍ상수리나무ㆍ왜귤(倭橘)나무뿐이었다.
1. 처음에 미아괴도(彌阿槐島)에 이르렀더니, 본도(本島) 사람과 인근의 굴이마도(屈伊麻島)ㆍ일남포도(日南浦島)ㆍ시마자도(時麻子島)ㆍ우감도(于甘島)의 5섬 인민(人民) 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술을 마셨는데, 매양 서로 갈 때마다 반드시 초득성(肖得誠) 등을 청하여 후하게 위로하였다.
【원전】 7 집 512 면
【분류】 외교-유구(琉球)
[주-D001] 병자년 : 1456 세조 2년.[주-D002] 포진(鋪陳) : 자리 깔개.[주-D003] 화혜(靴鞋) : 신발.[주-D004] 완초(薍草) : 억새풀.[주-D005] 정축년 : 1457 세조 5년.[주-D006] 헌작(獻爵) : 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것.[주-D007] 둑(纛) : 대장기(大將旗).[주-D008] 개(蓋) : 의장(儀仗)의 하나로 양산(陽繖) 모양임.[주-D009] 여교(轝轎) : 수레.[주-D010] 막배(膜拜) : 남방 사람들이 절을 말함.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주-D011] 장번(長番) : 교대하지 않고 계속 입번(立番)하거나, 교대하는 기간이 오래 되는 입번(立番).[주-D012] 생저(生苧) : 생모시.[주-D013] 마전(磨箭) : 전쟁에 쓰는 화살의 하나. 《세종실록》 오례의(五禮儀)에 보면, “화살의 깃이 좁고 철촉(鐵鏃)이 작은 것을 마전이라 한다.” 하였음.[주-D014] 공전(攻戰) : 공격하고 싸우는 것.[주-D015] 금년(今年) : 1462 세조 8년.[주-D016] 취두(鷲頭) : 망새.[주-D017] 낭무(廊廡) : 정전(正殿)에 딸린 부속 건물.[주-D018] 면갑(面甲) : 얼굴을 가리는 갑주(甲胄).[주-D019] 행등(行滕) : 행전(行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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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13권 중편 / 동우(棟宇)
낙오정기(樂悟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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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三江)의 명승 중에 서호(西湖)가 가장 크다. 한강 물이 노량(露梁)과 용산(龍山)에 이르러 나뉘어 두 갈래의 물이 되었다가 서강(西江)의 용수(龍首)를 지나 다시 합류하여 물줄기가 방대하고 깊어져 서쪽의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높은 강 언덕은 울룩불룩하고 긴 모래톱에는 자갈이 깔려 있고 외딴 섬 모래톱에는 강물이 넘실거린다. 그곳에 사는 새는 기러기ㆍ들거위ㆍ갈매기ㆍ따오기ㆍ촉옥(燭玉)이고, 자라는 풀은 갈대ㆍ줄풀ㆍ개구리밥이며, 이 밖에 목축인의 얼룩소와 염소, 아낙네들이 가꾸는 뽕나무, 의원이 심은 약초, 어부가 펼쳐 놓은 그물이 있다.
강변의 절경은 봄 강가의 물소리가 듣기 좋고, 월출이 보기 좋고, 포구의 빗소리가 듣기 좋으며, 저물녘에 내리는 눈이 보기 좋다. 낙랑(樂浪 평양)에서 탐모라(耽毛羅 제주도)까지 만리 뱃길을 선박이 왕래하니 생선과 소금 등 온갖 물자를 실은 배들이 나루에 가득하다. 여염집이 많고 죽 늘어선 가게들은 장사를 하여 생활이 부유하고 안락하다. 언덕에 오르면 듬성듬성 큰 나무가 있고 누대가 여기저기 서 있다. 그리고 한가한 사람과 은사(隱士)의 생활이며 어부와 나무꾼들 간에 문답한 것에 대한 기록들이 전해 온다
.三江之勝。西湖最大。漢水至露梁龍山。中分爲二水。過西江龍首。復合流。渾渾泱泱。西注海門。高岸長洲。崛𡾊磧歷。別島沙渚瀰漫。其鳥。鴻雁鴐鵝鷗䳱燭玉。其草。蒹葭菰蘆靑蘋。牧人之犁牛羝羊。妾子之桑。醫師蒔藥。漁子設網。臨江絶景。宜於春渚。宜於月出。宜於浦雨。宜於暮雪。樂浪耽毛羅。漕舶萬里。魚鹽百貨。舸艦迷津。閭閻且千。列肆互市。謠俗富樂。登岸疏木巨樹。臺榭相望
반구정기(伴鷗亭記) 임진강 하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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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은 그 옛날 태평 시대의 정승 황 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의 정자이다. 상국이 죽은 지 근 300년인데, 정자가 허물어져 소가 쟁기를 끄는 땅이 된 지도 100년이 다 되었다. 이제 황생(黃生)은 상국의 자손으로 강가에 집을 짓고 살며 반구정이라 이름 붙여서 옛 이름을 없애지 않았으니,정자는 파주 읍내에서 서쪽으로 15리 되는 임진강(臨津江) 하류에 있는데, 썰물이 되어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강가로 날아 모여든다. 잡초가 우거진 넓은 벌판이 있고 모래톱에는 강물이 넘실거려 9월이면 기러기가 찾아온다. 서쪽으로 바다 어귀까지 20리이다.금상 6년(1665) 5월 16일에 미수는 쓰다.
후조당기(後凋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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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당은 세조(世祖) 때의 명신 권 익평공(權翼平公 권남(權擥))의 옛집이다. 당은 목멱산(木覓山 남산) 북쪽 기슭의 비서감(秘書監) 동쪽 바위 언덕에 있다. 세조가 그의 집에 거둥했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일을 말하고 있다. 그 서쪽 언덕에 있는 돌샘을 ‘어정(御井)’이라 부른다. 그 위쪽에 소한당(所閑堂)의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당은 3칸으로 남쪽에 온돌방이 있다. 겨울에는 따뜻한 방에서 거처하고 여름에는 서늘한 곳에서 거처하였는데, 화려함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푸른 비탈에 석양이 비칠 때면 창문이 산뜻해진다. 지은 지가 오래되어 상국 당시부터 수백 년을 거쳐 6대를 내려와 사도공(司徒公 형조 판서 권반(權盼))에 이르러서야 중건되었다. 마룻대를 바꾸거나 기둥을 교체하지도 않았고 더 꾸미지도 않았으며, 기울고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음침한 곳을 새롭게 단장하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곁채 남쪽에는 샘물이 바위 밑에서 솟는데 매우 맑고 차갑다. 섬돌 밑은 모두 암석이 울퉁불퉁 깔려 있고 마당가에는 층층의 절벽이 더욱 기이하다. 3월에는 산에 꽃들이 만발하며 동산에 가득한 소나무는 한겨울 추위가 닥쳐도 푸르른 가지와 잎은 변하지 않는다.지세가 높아서 주위를 둘러보면 웅장하고 화려하다. 화산(華山 북한산), 백악산(白岳山), 인왕산(仁王山)이 죽 늘어서 있고, 금원(禁苑)의 깊은 숲, 층층의 궁전, 높은 대궐이 있다. 이곳에 관청을 세우고 시장을 열어서 세상을 다스리는 방도가 나오고 온갖 재화가 증식한다. 그리하여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넓은 길이 종횡으로 뚫려 번화하기 그지없다. 차계(叉溪)ㆍ학동(鶴洞)과 함께 남산의 명승으로 불린다
대명홍설(大明紅說) 신해년에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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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큰 가뭄, 홍수, 태풍이 있었고 또 추석 전에 서리가 내려 - 7월 그믐에 서리가 내렸다. - 온갖 곡식이 영글지 않았다. 또 금년에는 보리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심히 주리고 돌림병도 크게 돌아 나라 안 곳곳에서 죽은 자들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으며 5, 6, 7월 석 달 동안 장마가 졌다. 마을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굶어 죽은 시체들이 나오는 족족 묻어 주었다.
지난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천자가 전후에 걸쳐 남북 지역의 관병(官兵) 18만 명을 징발하고 왕실 창고의 돈 3만 냥과 산동(山東)의 곡식 10만 석을 방출하여 왜놈을 정벌하였다. 전란을 치른 뒤에 나라에 큰 기근이 들자, 또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의 12만 석의 곡식을 방출하여 구재해 주었다. 우리나라 모든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천자의 고마움을 알고 잊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아, 옛날부터 망한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혹은 제후 때문에, 혹은 권력이 강한 신하 때문에, 혹은 오랑캐 때문에 망하기도 하지만 그 근본은 모두 간인(奸人), 요부, 환관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들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나라를 망치면 외적이 그 틈을 타고 일어나는 법이다. 저들이 나라의 권력을 훔쳐서 상벌과 명령의 권한을 독점하고 권력을 끼고 서로 해쳐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망하며 자신이 주륙을 당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는데도 경계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명나라는 천계(天啓 희종(熹宗) 연호) 이후로 권력이 환관에게 옮겨갔고 끝내는 도적에게 멸망당하였다. 오랑캐가 중화(中華)를 어지럽히기 전에 천하가 벌써 크게 혼란해졌던 것이다.
오사구동교별업기(吳司寇東郊別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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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구아경(司寇亞卿 형조 참판) 오공(吳公)이 동쪽 교외(東郊)에 새로 별장을 짓고서 귀래당(歸來堂)이라 하였다.별장은 동쪽 성문 밖 적전(籍田) 서쪽 안암(安巖)에 있는데, 산자락이 울퉁불퉁 고르지 않고 솔숲이 울창하다. 앞으로는 잔잔히 흐르는 시내와 백사장이 있고, 그 너머 큰길에는 관왕사(關王祠)의 뾰족한 용마루와 흰 담이 보이고, 또 그 너머에는 동지(東池)에 연꽃이 깔려 있고 넓은 농토가 펼쳐져 있다. 동강(東岡)에는 사찰이 있고 북산(北山)에는 석부도(石浮圖)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종남(終南), 관악(冠嶽), 청계(淸溪) 등이 죽 늘어서 있다. 산성(山城)의 성가퀴는 구름에 닿아 있는데, 도시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
쌍백재명서(雙栢齋銘序) 안산(安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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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韓氏)의 마유리(馬遊里) 바닷가 별장에 오래된 두 그루의 잣나무가 서 있는 집이 있는데, 이는 그 선친의 옛 집이라 한다. 한씨의 이름은 덕량(德亮)이고, 자는 명중(明仲)이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바닷가 토질은 척박하고 늪이 많지만 물고기와 소금이 많고 나무도 많습니다. 선친의 옛 집에 두 그루의 잣나무가 있는데, 이것도 선친께서 심으신 것
海濱壤壚猪澤。多魚鹽。多樹藝。
삼봉사기(三峯祠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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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홍주(洪州) 삼봉산(三峯山)에 최영사(崔瑩祠)가 있다.”라고 하였다. 우왕(禑王) 14년(1388)에 우리 태상왕(太上王 이성계(李成桂))이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했을 때 우왕이 폐위되고 최영이 죽었다. 훗날 최영의 신이 가장 영험하여 화복과 길흉을 부려서, 건방지게 굴며 공경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즉사하였으므로 홍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엄숙히 제사 지내고 또 영신사(迎神祠)와 망신사(望神祠)를 세웠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보면 “최영은 사공(司空) 유청(惟淸)의 5대손으로 기골이 장대하였다. 힘이 장사여서 젊은 나이에 양광군(楊廣軍)에 예속되어 열사(列士)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1년(1352)에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은 안우(安祐)ㆍ최원(崔源)과 함께 그를 공격해 참수하고 그 공으로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3년에 원(元)나라 승상 탈탈(脫脫)을 따라 고우(高郵)를 토벌하면서 27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였고, 또 강소성(江蘇省) 회안(淮安) 일대와 화주(和州)ㆍ사주(泗州) 등지에서 적을 방어하고 격전을 벌인 결과 참수하고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귀국하여 서해(西海)에서 왜구를 공격해 크게 무찔렀다. 8년(1359)에 홍두적(紅頭賊)이 서경(西京)을 함락시키자, 최영은 서북변 병마사(西北邊兵馬使)가 되어 적을 토벌한 공로가 있어 서경 윤(西京尹)에 제수되었다. 11년(1362)에는 장병 20만 명을 모아 사유(似劉)와 관선생(關先生)을 공격하여 죽이니, 전사한 적의 수가 십여 만 명이었으며, 마침내 경성(京城)을 수복하였다. 12년에 김용(金鏞)이 반란을 도모하여 군사를 일으켜 흥왕사(興王寺) 행궁(行宮)을 침범하자, 최영이 재빨리 공격하여 섬멸하였고 그 공으로 문하찬성(門下贊成)에 제수되었다. 신돈(辛旽)이 최영을 시기하여 왕에게 참소하자, 계림 윤(鷄林尹)으로 폄직되었다가 얼마 후 삭탈관직되고 고양(高陽)에 유배되었다. 20년(1371)에 왜구의 침입이 있자, 불러들여 육도 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를 제수하고 모든 장수의 출척(黜陟) 권한을 맡겨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는 임의대로 처단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양광(楊廣)ㆍ전라(全羅)ㆍ경상(慶尙) 제도(諸道)의 도통사(都統使)가 되어 삼도의 병사 2만 5000명을 징발하여 제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목호(牧胡)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ㆍ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ㆍ관음보(觀音甫) 등을 쳐서 평정하였다. 우왕 2년(1376)에는 홍산(鴻山)에서 왜구를 무찔렀고 또 해풍(海豐 개성 장풍군(長豐郡))에서 격전을 벌여 크게 무찔렀는데, 왜구들이 ‘백발 노장 최 만호(崔萬戶)를 조심하라.’라고 서로들 경계하였다 한다. 10년(1384)에 시중(侍中)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도통사의 인수(印綬)를 올려 병권을 해임해 주기를 청했지만 우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태상왕이 회군한 뒤에 최영이 요동 정벌의 정책을 결정했다 하여 순군(巡軍)에 가두고 국문한 다음 충주(忠州)로 유배시켰다가 끝내는 참형에 처하였다.” 하였다.
최영은 절약 검소하고 직간(直諫)을 잘하였으며, 30년간 군대를 이끌면서 성을 공격하고 적진을 함락시킬 때는 반드시 선봉에 섰으며, 싸울 때마다 승리하여 패배한 적이 없었다. 참형을 당하는 자리에서 탄식하기를 “내 평생 악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죄 없이 죽는구나. 내 죽어도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가 죽자, 도성 백성들은 시장을 열지 않았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주검을 거리에 내다버렸는데, 그 곁을 지나던 길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갔다. 그의 무덤이 고양에 있는데, ‘붉은 무덤〔赤塚〕’이라 부른다. 4년 후 고려는 멸망하였다. 훗날 시호를 무민(武愍)이라 하였다.
[주-1] 장병 …… 죽이니 : 1361년 10월에 반성(潘誠),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끄는 홍두적 10만 명이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들이 자비령(慈悲嶺) 방책을 부수고 개성으로 진군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신하고 개성은 함락되었다. 이해 12월에 고려는 안동에서 군사를 정비하여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세우고 적을 막게 하는 동시에 각 도에서 군사 20만 명을 모으고 안우를 상원수(上元帥)로 삼아 개성을 탈환하게 하였다. 이때 최영이 안우와 함께 개성에 진공하여 사유와 관선생 등을 죽이고 홍두적을 퇴각시켰다. 《高麗史 卷113 安祐列傳》
[주-2] 김용(金鏞)이 …… 침범하자 : 흥왕사는 개성 장패문(長霸門) 밖에 있으며, 홍두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갔던 공민왕이 환도하면서 궁전이 수리될 때까지 흥왕사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 김용이 왕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자, 오히려 자신의 일당들을 모두 죽이고 난을 진압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잔당 90여 명이 체포되면서 그 진상이 밝혀져 처형되었다. 《高麗史 卷131 叛逆列傳 金鏞》
[주-3] 목호(牧胡) …… 평정하였다 : 목호는 말을 기르는 오랑캐라는 뜻으로, 고려 말 제주도에 들어가 말을 기르던 몽고인을 말한다. 1374년 명나라에 말 2000필을 바치기 위해 목호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석질리필사ㆍ초고독불화ㆍ관음보 등이 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최영ㆍ염흥방(廉興邦)ㆍ이희필(李希泌)ㆍ지윤(池奫)ㆍ김유(金庾) 등을 전함 314척, 군인 2만 5605명과 함께 제주도에 보내 난을 평정하였다. 《高麗史 卷113 崔瑩列傳》
[주-4] 홍산(鴻山)에서 왜구를 무찔렀고 : 1376년 7월 충청남도 연산(連山)에 있는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한 왜구가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를 죽이는 등 행패가 심하자, 최영이 자진 출정하여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았지만 끝까지 진두지휘하여 적을 섬멸시켰다. 《高麗史 卷113 崔瑩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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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선생집 제7권 / 서(序) 16수(首)
목장 지도 뒤에 씀[牧場地圖後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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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정(馬政)은 국가의 중대한 일에 속한다. 국가에서 목장을 설치할 때 대부분 주도(洲島)를 택하는 것은 대체로 개간할 수 없는 땅을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국초(國初)에 융성했을 당시에는 당연히 어느 목장이고 말이 없는 곳은 있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태평 시대가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마정(馬政)이 점차 해이해진 결과 선묘(宣廟) 중기에 이르러서는 폐지된 목장이 무려 40여 곳이나 나오게 되었다. 게다가 임진년의 변란을 겪은 위에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을 말함)의 난정(亂政)이 계속되고 급기야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치르게 되어서는 만사가 모두 예전의 모양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 목장들이 쇠잔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괴상하게 여길 것은 없다고 할 것이다.본시(本寺)에는 예전부터 목장 지도(牧場地圖)가 있었는데 난리를 겪으면서 잃어버린 지가 오래되었다.
우리나라는 팔도(八道) 가운데 오직 강원도에만 목장이 없다. 경기도의 경우는 30개 목장 중에서 말이 있는 곳이 16개소에 감목관이 2원(員)이며, 공청도(公淸道)의 경우는 10개 목장 중에서 말이 있는 곳이 4개소에 감목관이 1원이며, 전라도의 경우는 42개 목장 중에서 말이 있는 곳이 14개소에 감목관이 3원이며, 경상도의 경우는 21개 목장 중에서 말이 있는 곳이 4개소에 감목관이 2원이며, 함경도의 경우는 6개 목장 중에서 말이 있는 곳이 5개소에 감목관이 1원이며, 황해도의 경우는 10개 목장 중에서 말이 있는 곳이 7개소에 감목관이 2원이며, 평안도의 경우는 4개의 목장이 있는데 병란을 치른 뒤로 모두 폐지된 상태이다.
이를 모두 합하면 목장이 1백 23개소에 말이 있는 곳은 50개소이며 폐지된 곳은 73개소이다. 한편 탐라(耽羅)는 바다 밖에 떨어져 있고, 관서(關西) 지방의 목장 네 곳은 요동(遼東) 백성들에게 점거되어 있고, 화살곶[箭串] 목장은 국도(國都)의 교외(郊外)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 지도로 작성하지 못하였는데, 그 밖의 목장들은 모두 지도로 만들어 놓았다.
용졸당기(用拙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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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白馬江)이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가림군(加林郡) 남쪽 지점에 이르러 남당강(南塘江)이 되는데, 이 강 연안에 당우(堂宇) 한 채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산림이 울창하게 우거진 데다 너른 들판 또한 볼 만한 경치를 제공해 주고 있는데, 이 집이 바로 민 관찰 사상(閔觀察士尙 사상은 민성휘(閔聖徽)의 자(字)임)씨의 별장(別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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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전서 제5권 / 기(記)
용졸당기(用拙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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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졸(用拙)은 호남 관찰사 민공(閔公)의 당호(堂號)이다. 공의 선조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당하여 우림(于林)으로 내려와 귀양살이하였는데, 자손이 뒤이어 그대로 거주하게 되었다.용졸당은 남당강(南塘江) 가, 곧 백마강(白馬江) 하류에 있다. 큰 강물 밖에 많은 산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어, 한 번 눈을 들어보면 수백 리가 또렷하게 모두 눈 아래에 펼쳐져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이다. 강에는 농어와 붉은 게들이 있고 연못에는 순채(蓴菜)가 있기에, 중국 오(吳) 땅의 풍미(風味)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정자의 좌우에는 대나무 숲과 매화 언덕이 있는데 화초와 과일 나무가 어우러져 있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짓기에 알맞은바, 참으로 조정에서 물러나 한가히 지내는 자들이 즐길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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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헌선생문집 제8권 / 잡저(雜著)
용졸당설(用拙堂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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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堂)의 주인이 현광(顯光)에게 글을 보내오기를, “당(堂)은 임천군(林川郡) 남당강(南塘江)의 서쪽 강안(江岸)에 있으니, 바로 제가 터를 잡아 세운 것이며, 당호(堂號) 역시 저의 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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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졸당기(用拙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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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嘉林)은 충청도의 바다와 육지가 접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깊숙한 오지이다. 산천과 고적(古蹟) 및 물산으로 칭할 만한 것이 전 시대 사람들이 기술한 가운데에 많이 보여서 낙토(樂土)라고 불린다. 용졸(用拙) 민공(閔公)이 이미 영남 관찰사의 직임을 사직하고 돌아와 머물러 살 만한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비로소 구전문사(求田問舍)할 계책을 세워 군(郡)의 경내에 있는 남당강(南塘江) 가의 입포(笠蒲)의 안에 알맞은 터를 얻어 터전을 닦은 다음 당(堂)을 세웠다.
사방을 둘러 바라보면 높이 솟아서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은 성흥산(聖興山)이고, 망연히 앞을 두르고 있는 것이 제석촌(帝錫村)이다. 그 북쪽으로는 기름진 들판이 있고, 들판 가운데에는 다리가 있으며, 도롱이를 뒤집어쓴 촌부와 관리들이 탄 가마와 수레가 다니는 길이 있다. 동쪽으로는 유람하며 볼만한 곳이 많아 용연사(龍淵寺)와 사인암(舍人巖) 등의 여러 고적이 이곳에 있다. 서쪽으로는 웅포(熊浦)와 접해 있는데, 남당강을 따라서 아래로 내려가면 채 십 리도 가지 않아 닿게 된다. 그곳은 남북(南北)의 배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해외에서 나는 맛 좋은 과일과 색다른 물산인 귤홍(橘紅)이나 부자(附子) 같은 좋은 약재와 석류나 동백과 같은 기이한 꽃들이 이르러 오지 않는 것이 없다. 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대나무 통발로 물고기를 잡아 사시사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맛 좋은 해산물이 번갈아 부엌을 가득 채우며, 작은 물고기와 살진 게 등은 노복들이 먹기에도 남음이 있다.
당의 주변에는 대나무 숲과 매화 동산이 있다. 대곡(大谷)의 배와 무릉(武陵)의 복숭아, 연(燕) 땅의 대추와 밤, 산동(山東)의 감 등을 직접 그곳에 심었다. 수목이 우거져 푸르고 꽃들이 흐드러져 아름다우며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보고 즐길 수 있고 그릇에 수북이 쌓을 수가 있는데, 아래로 자손들에게 남겨 주면 역시 천호(千戶)의 소봉(素封)은 잃지 않게 할 수 있다. 당의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을 전부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상에서 말한 것이 그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다.
[주] 가림(嘉林) : 충청도 임천(林川)의 옛 이름이다.
[주] 용졸(用拙) 민공(閔公) : 민성휘(閔聖徽 : 1582~1647)로,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초명은 성징(聖徵)이며, 자는 사상(士尙)이고, 호는 졸당(拙堂)ㆍ용졸이다. 호조 판서ㆍ형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송경방고록(松京訪古錄)》이 있다.
[주] 구전문사(求田問舍)할 계책 : 전답과 가옥을 사려고 묻는다는 뜻으로, 자기 일신상의 이익만을 꾀하고 국가의 대사에는 무관심함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조정에서 물러나 시골에 살려고 하는 계책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주] 귤홍(橘紅) : 약재로 쓰는 물품으로 귤피의 안쪽 흰 부분을 긁어 버린 귤껍질을 말하는데, 담(痰)을 치료하는 약재로 쓰인다. 진피(陳皮)라고도 한다.
[주] 대곡(大谷)의 배 : 아주 맛이 좋은 배를 말한다. 대곡은 낙양(洛陽)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그곳에서는 좋은 배가 생산되기로 유명하다. 《문선(文選)》 권16〈한거부(閑居賦)〉에, “장공(張公)의 대곡의 배, 양후(陽侯)의 조비(鳥椑)의 감, 주 문왕(周文王)의 약지(弱枝)의 대추, 방릉(房陵) 주중(朱仲)의 오얏이 심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는데, 그에 대한 유량(劉良)의 주(注)에, “낙양에 장공이 있어 대곡에 살았다. 그 집에는 하리(夏梨)가 있는데, 천하에서 오직 이 한 나무만이 있다.” 하였다.
[주] 소봉(素封) : 관작(官爵)이나 봉토(封土)가 없어도 그 부(富)함이 봉후(封侯)와 같음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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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집 제38권 / 기(記) 5수(五首)
유서산기(遊西山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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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漢陽)의 산이 복정(覆鼎북한산)에서부터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왕도(王都)의 진산(鎭山)이 된 것을 공극(拱極북악)이라고 일컫는다. 이 공극에서 갈려 나와 산등성이가 불쑥 솟아나 꾸불꾸불 뻗어 내려오다가 서쪽을 끼고 돌면서 남쪽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을 필운(弼雲인왕산)이라고 한다. 나의 집은 이 두 산의 아래에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들락날락하면서 일찍이 산을 가까이에서 접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산 역시 다투어 내 집의 창과 실내로 들어오려 하여 친근함을 더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항상 자리에 누운 채로 바라보고 즐겼다. 그러면서도 일찍이 산속의 바위며 골짜기 사이에는 오간 적이 없었다.
갑인년(1614, 광해군6) 가을에 어머님께서 눈병이 나셨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서산(西山)에 신통한 샘이 솟아나는데 병든 사람이 머리를 감으면 이따금 효험을 보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마침내 날을 잡아 산에 올랐는데, 큰형님과 나와 광찬(光燦)과 광소(光熽)가 함께 따라갔다.
인왕동(仁王洞)에 들어가서 고(故) 양곡(陽谷) 소 이상(蘇貳相)이 살던 옛집을 지났는데, 이른바 청심당(淸心堂), 풍천각(風泉閣), 수운헌(水雲軒)으로 불리던 것들이 지도리는 썩고 주춧돌은 무너져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양곡은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어 이미 귀하게 된 데다가 부유하였으며, 또한 심장(心匠)이라고 칭해졌으니, 집을 지으면서 교묘함과 화려함을 극도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교유하였던 선비들도 모두 한때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이 읊었던 것 중에는 필시 기록되어 전해질 만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채 백 년도 못 되어서 이미 한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선비가 믿고서 후세에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곳을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니 절벽에서는 폭포가 쏟아지고 푸른 잔디로 덮인 언덕이 있어 곳곳이 다 볼만하였다. 다시 여기를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자 돌길이 아주 험하였으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다시 한 번 쉰 다음 샘이 있는 곳에 이르니, 지세가 공극산의 절반쯤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높이 솟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새가 날개를 편 듯이 지붕을 얹어 놓은 것 같았다. 바위 가장자리가 파여 있는 것이 처마와 같아 비나 눈이 올 때 예닐곱 명 정도는 들어가 피할 만했다. 샘은 바위 밑 조그만 틈새 가운데로부터 솟아 나왔는데, 샘 줄기가 아주 가늘었다. 한 식경쯤 앉아서 기다리자 그제야 겨우 샘 구덩이에 삼분의 일쯤 채워졌는데, 구덩이의 둘레는 겨우 맷돌 하나 크기 정도이고 깊이도 무릎에 못 미칠 정도여서 한 자 남짓 되었다. 샘물의 맛은 달짝지근했으나 톡 쏘지는 않았고 몹시 차갑지도 않았다. 샘 근처의 나무에는 여기저기 어지럽게 지전(紙錢)을 붙여 놓은 것으로 보아 많은 노파들이 와서 영험을 빌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석굴의 앞에는 평평한 흙 언덕이 있었는데 동서의 너비가 겨우 수십 보쯤 되어 보였다. 비로 인해 파인 곳에 오래 묵은 기와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인왕사(仁王寺)의 옛 절터인 듯하였다. 어떤 이가 북쪽의 맞은편 골짜기에도 무너진 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옛 자취가 다 없어졌으니 분명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일찍이 듣기로는 국초(國初)에 도읍을 정할 때 서산의 석벽에서 단서(丹書)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산 전체가 바위 하나로 몸체가 되어 산마루부터 중턱에 이르기까지 우뚝 선 뼈대처럼 가파른 바위로 되어 있고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와 겹쳐진 절벽이 똑바로 서고 옆으로 늘어서 있어 우러러보매 마치 병기를 모아 놓고 갑옷을 쌓아놓은 것과 같아 그 기묘한 장관을 이루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산줄기가 이어지면서 산등성이를 이루고 여러 산등성이가 나뉘어 골짜기가 되었다. 골짜기에는 모두 샘이 있어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치매 수많은 옥이 찰랑거리는 것 같았는바, 수석(水石)의 경치가 실로 서울에서 으뜸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금령(禁令)이 해이해져 산 전체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소나무나 전나무 그늘이 있고 단풍나무나 녹나무가 언덕을 둘러싸고 있어 솔솔 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바람 맑고 달빛 밝은 저녁에 느릿느릿 서성인다면 봉호(蓬壺)나 곤랑(崑閬)도 어찌 부러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등 뒤로는 구부러진 성이 아주 가깝게 보였다. 하인을 보내어 올라가는 길을 찾아보게 했는데, 길이 험하여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광찬과 광소가 빠른 걸음으로 갔다가 오더니 자기들이 본 것을 잘 말해 주었는데, 사현(沙峴)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으며 삼강(三江)의 돛단배들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헤아릴 수가 있다고 하였다. 내 나이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기력이 너무 쇠하여 가까운 거리임에도 오히려 더 걷지를 못하고 험한 길을 당하여 멈춰 서고 만 데 대해 스스로 탄식하였다. 그러니 이런 기력으로 어찌 벼슬자리에 나아가 있는 힘을 다해 일하면서 내가 젊어서 배운 것을 펼쳐 도를 행하여 남에게 미치게 할 수가 있겠는가.
큰형님과 더불어 남쪽 봉우리에 오르니, 산봉우리 아래에 술 곳간이 있었다. 두 채를 서로 마주 보게 지어 놓았는데 십여 칸 정도가 서로 이어져 있었다. 술 냄새가 퍼져 나가 새들조차 모여 들지 않으니, 모르겠다만 얼마나 많은 광약(狂藥)이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온통 취하게 하였던가.
앞쪽으로는 목멱산(木覓山)이 보이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는 듯하였다. 남쪽으로는 성이 산허리를 감고 구불구불 이어진 것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아래에 어찌 용같이 훌륭한 인물이 누워 있겠는가. 지금 반드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아래로 수많은 여염집의 기와지붕이 땅에 깔려 있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마치 물고기의 비늘과 같았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를 치른 뒤 23년이 지나 백성들의 수가 날로 불어나 집들이 많기가 이와 같이 성대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남자들의 숫자가 수십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요순(堯舜)을 도와 당우(唐虞) 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한갓 나라의 힘은 더욱 약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초췌해지고 변방의 방비는 더욱 위태롭게 돼 지금과 같이 쇠퇴해지는 데 이르게 하였다. 어찌하여 저 푸른 하늘은 인재를 내려 주는 것이 이렇게도 인색하단 말인가. 아니면 하늘이 인재를 내려 주긴 했는데 쓸 줄을 몰라서 그런 것인가? 어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운명 탓이 아니겠는가.
경복궁의 동산은 텅 비었고 성은 허물어지고 나무는 부러졌으며 용루(龍樓)와 봉각(鳳閣)은 무성한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 단지 경회루 연못에 있는 연잎이 바람에 뒤집히면서 저녁 햇살에 번쩍이는 것만 보였다. 앞에서는 어진 인물을 막고 나라를 그릇되게 하여 전쟁을 불러들이고 온갖 고난을 겪게 하였으며, 뒤에서는 부추기고 이간질하면서 임금께 아첨을 하여 간사한 말이 행해지고 법궁(法宮)을 황폐해지게 하였으니, 간신의 죄를 어찌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동궐(東闕)이 쌍으로 우뚝 솟아 있고 화려한 집들이 늘어서 있으며, 금원(禁苑)의 숲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한 가운데, 호분(虎賁)과 용양(龍驤)은 궁궐을 깨끗이 청소하고 임금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王者)의 거처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본디 운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임금다운 임금이 즉위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때가 있는 것이다.
흥인문(興仁門)의 빼어난 모습이 동쪽을 향하여 우뚝 서 있고 종로(鍾路)의 큰길이 한 줄기로 뻥 뚫려 있었다. 길 좌우에 늘어선 상점은 많은 별이 별자리에 따라 나뉘어 있는 것처럼 반듯반듯하게 차례대로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수레와 말이 오갔으며, 달리는 사람과 뛰는 사람들이 허둥지둥 분주하게 오갔는데, 그들은 모두가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니 당나라 사람의 시에 이른바 “서로 만나느라 늙는 줄도 모른다.〔相逢不知老〕”라고 한 것은 진실로 뛰어난 구절이다.
불암산(佛巖山)은 푸른빛으로 서 있는데 바라보니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보였다. 바위 봉우리가 빼어나게 솟은 것이 예사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만약 왕실을 가까이에서 보익하여 동쪽의 진산(鎭山)이 되어 서쪽과 남쪽과 북쪽의 세 산과 더불어 함께 우뚝 솟아 있었다면, 실로 도성의 형세를 장엄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 서울을 수십 리 벗어난 곳에 있어 마치 거친 들판으로 달아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바, 조물주가 사물을 만든 뜻이 참으로 애석하였다.
아, 조석으로 생활하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접하던 산을 태어난 지 45년이나 지난 오늘날에서야 비로소 한 번 올라 보았다. 천지는 잠시 머물러 가는 주막인 거려(蘧廬)이고, 희서(羲舒)는 비탈길에 굴러 가는 구슬과 같은바, 부생(浮生)의 백년 세월은 이 우주에 잠시 몸을 의탁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이 마치 바람 속의 물거품과 같아 멀리 떠가거나 가까이 있거나 흩어지거나 모이거나 하는 것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 여생이 몇 년이나 더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어머니와 형을 모시고 아들과 조카를 따르게 하여 다시 이 산에 놀러와 여기에 머물러 먼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루 종일 즐기는 것을 어찌 또다시 기약할 수 있겠는가.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그것을 쓰고 때를 기록해 두고자 한다.
현옹(玄翁)의 집은 남쪽 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금릉(金陵)으로 쫓겨났고, 백사(白沙) 역시 불암산 아래 은둔해 있다.
[주] 복정(覆鼎) : 북한산(北漢山)의 옛 이름으로, 산의 모양이 마치 솥을 엎어 놓은 듯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산은 이 이외에도 삼각산(三角山), 북악(北嶽), 부아악(負兒嶽) 등으로도 칭해진다.
[주] 공극(拱極) : 경복궁(景福宮)의 주산인 백악(白嶽)을 가리키는데, 중종 때 중국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백악을 공극산, 인왕산(仁旺山)을 필운산(弼雲山)이라고 개명하였다.
[주] 소 이상(蘇貳相) : 좌찬성과 우찬성을 지낸 소세양(蘇世讓)을 가리킨다. 소세양은 뛰어난 시재(詩才)를 가지고 있어 한때의 문풍(文風)을 주도하였다.
[주] 심장(心匠) : 독특한 구상이나 설계를 말한다.
[주] 단서(丹書) : 중요한 내용을 붉은 글씨로 써서 깊이 간직해 숨겨 둔 것을 말한다.
[주] 봉호(蓬壺)나 곤랑(崑閬) : 봉호는 바다 속에 있으며 신선들이 산다는 전설상의 봉래산(蓬萊山)을 말한다. 《습유기(拾遺記)》〈고신(高辛)〉에, “삼호(三壺)는 바로 바다 속에 있는 세 산으로, 첫 번째는 방호(方壺)인데 이는 방장산(方丈山)이고, 두 번째는 봉호인데 이는 봉래산이고, 세 번째는 영호(瀛壺)인데 이는 영주산(瀛洲山)으로, 모양이 술병과 같이 생겼다.” 하였다. 곤랑은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는 낭풍원(閬風苑)으로, 역시 신선이 산다고 하는 곳이다.
[주] 삼강(三江) : 지금의 용산(龍山), 마포(麻浦), 양화(楊花) 일대의 강을 말한다.
[주] 동궐(東闕) : 창덕궁의 이칭이다. 창덕궁은 태종이 이궁(離宮)으로 세운 궁전으로, 임진왜란 때 경복궁ㆍ창경궁과 함께 불에 탔으나 1609년(광해군1)에 가장 먼저 중건하여 오랫동안 법궁(法宮)으로 사용되었다.
[주] 호분(虎賁)과 용양(龍驤) : 조선 시대 오위(五衛)에 소속된 군사 조직으로, 임금의 호위를 주 임무로 하였다.
[주] 서로……모른다 : 맹교(孟郊)의 시 〈송유순(送柳淳)〉에 나오는 구절로, 명예와 이익을 좇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 분주히 만나고 다니느라 자신이 늙어 가는 줄도 모른다는 말이다.
[주] 희서(羲舒) : 해를 몬다고 하는 신인 희화(羲和)와 달을 몬다고 하는 신인 망서(望舒)로, 전하여 세월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주] 현옹(玄翁)의……있다 : 현옹은 신흠(申欽)의 호이고, 백사(白沙)는 이항복(李恒福)의 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23년이 지난 해는 1615년(광해군7)으로, 이때 신흠은 1613년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인해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 지목되어 파직된 후 김포(金浦) 근처에 있었고, 이항복은 같은 해 인재 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북인(北人)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불암산 아래에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피금각기(披襟閣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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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金堤)는 평야지대에 속한 고을이다. 그래서 사방 경내(境內)에 바라 볼 만한 명산(名山)과 대천(大川)이 없음은 물론 높은 지대라고 해야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하고 아래로 내려오면 모두가 습지로 뒤덮여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고을의 관아를 보더라도 이른바 언덕이라고 하는 조금 높은 지대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나 공간이 협소하고 낮을 뿐만 아니라 바라볼 곳도 마땅치 않기 때문에 여기 오는 자마다 이를 병통으로 여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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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선생집 제8권 / 기(記) 19수(首)
남한성기(南漢城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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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경성(京城) 동남쪽 40리(里) 지점 한수(漢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광주(廣州)의 옛날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5리(里)가 약간 더 되는 거리에 있다. 남한산은 가운데가 평평한 반면 밖으로 높이 솟아오르는 등 그 에워싼 형세가 치밀하기 그지없는 가운데 웅혼한 자태를 보여 주고 있는데, 산성은 바로 산 정상의 능선들로 이어져 높은 지세에 웅거하면서 평평한 지대를 포용하고 있다. 또한 성 안에 늘 샘솟는 곳이 매우 많아 겨울이건 여름이건 마르는 날이 없는데,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들은 대간(大澗)으로 합쳐져 동쪽 수문(水門)을 통해 빠져 나간다.
문의 바깥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들이 곳곳에 서려 있고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길이 몇 십리를 두고 이어져 있다. 산세(山勢)는 사방이 온통 깎아지른 듯하여 어떻게 부여잡고 올라갈 길이 없는데, 오직 동남쪽 모퉁이 산기슭만은 약간 경사져 있을 뿐이라서 포루(砲樓) 세 곳을 설치해 놓았다. 이와 함께 건방(乾方 북서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에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가 있었으므로 누대(樓臺)를 하나 세운 다음 용도(甬道)를 쌓아 성과 연결시켰다
고전번역서 > 기언 > 기언 제24권 중편 > 기행
척주(陟州)에 있을 때 쓴 기행문을 간추린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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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비령(火飛嶺)의 남쪽에 지명이 정동(正東)이라는 곳이 있는데 동해 가의 작은 산이다. 산은 전부 돌이고 산의 나무는 모두 소나무인데 춘분에 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해가 한가운데에서 떠오른다. 옛날에는 동해신의 사당이 있었으나, 중고(中古)에 양양(襄陽)으로 옮겼다. 산세가 기이하고 험준하며 신령스러워서 나무 한 그루라도 베면 한 마을에 재앙이 일어나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으로 받들어 섬기고 전염병이 돌 때면 그곳에 기도드린다. - 화비는 재의 이름이니 명주(溟州 강릉(江陵)의 옛 이름) 남쪽에 있다. -대관령(大關嶺)을 넘으면 횡계역(橫溪驛)인데 날씨가 매우 추워서 오곡은 자라지 못하고 메밀만 심을 수 있다.
동호(東湖)의 범사정(泛槎亭) 주인을 방문하여 동척(銅尺)의 옛 제도를 들었다. 정통(正統) 11년(1446, 세종28) 12월 우리 장헌왕(莊憲王 세종) 때에 검은 기장을 구해 율(律)과 도(度)를 바로잡고 이 규격의 동척을 주조하였으니 오늘날의 포백척(布帛尺)에 비해 3푼이 적다. 군현에 내려 주었는데 지금 삼척부에도 하사받은 자〔尺〕를 보관하고 있다
재 아래는 암벽 사이로 시냇물이 모여드는데 적담(賊潭)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동해에서 물고기와 소금을 운반하는 길로 대관령 아래는 장사치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언젠가 이곳을 지나가던 자가 사람을 죽여서 물에 빠뜨렸는데 이로 인하여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아, 악계(惡溪)나 탐천(貪泉)이 어찌 물의 죄 때문이겠는가. 교지(交趾)의 풍부함과 악어의 포악함 탓에 이처럼 이름을 치욕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을 기록하여 세속과 야합하여 악명(惡名)을 뒤집어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의 경계로 삼는다.
嶺下巖壁間溪水積焉。名曰賊潭。此東海魚鹽之路。大嶺之下。商賈之所過。嘗有過之者。殺人而沈之。因以得此名。嗟乎。惡溪,貪泉。豈水之罪也。交趾之富。鰐魚之暴。能辱名如此。書之。以爲同流合汚。蒙惡名而不恥者戒。
인용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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