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4일
말씀 : 요한복음 14:20
제목 : 십자가, 부활, 성령강림
오늘날 성령에 대한 교회의 편파적인 가르침으로 인해 잘못된 신앙관을 갖거나, 혼란을 겪거나,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능력의 삶을 사는 데 오히려 방해되는 일들이 꽤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인식 중 첫째는 행8:18-19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마술사 빌립이 성령을 돈을 주고 사려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동했던 이유는 성령을 사람이 주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40일 금식을 했는데 금식 후에 성도들에게 ‘나에게 안수 받을 준비를 하라’는 광고를 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40일 금식을 통해서 나타나는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40일 금식의 목적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40일 금식을 했으니 자신에게 안수를 받으면 무엇인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광고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능력은 사람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둘째, 감각적인 체험 즉, 불, 진동, 환상, 방언과 같은 것들만을 성령의 침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따뜻하고 놀라운 느낌을 성령의 임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임재를 느낄 수 있게 하시지만 진리는 그분은 항상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말씀해주시는 짜릿함이 늘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힘들거나 외로운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며 의기소침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거나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히13:5). 그분이 우리를 떠났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성령을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십자가를 사역의 중심에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사역을 하시는 분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주관적인 진리의 한쪽 면만을 가르치는 일부 사역자들 때문에 잘못된 가르침이 나온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참된 진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 신앙의 구심점으로 삼아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 충만에 관한 어떤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는 사역의 효과적인 승리를 위해서 분명히 성령 충만의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교회사를 보더라도 성령의 역사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디, 칼빈, 웨슬리 등의 삶을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들이 살았던 시기를 다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말할 때는 오순절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은 한 번이었으며 부활도, 성령의 강림도 한 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을 통해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의 증거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먼저 ‘내가 가야 성령께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요16:7-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여기서 보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로 가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그 증거를 나타내 보이고 있는데요, 이들이 ‘너희들이 죽였던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증거를 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셨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죽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분은 약속대로 살아나셨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세 번째 증거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증거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6-18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하나님나라에 가신 분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성령의 강림을 통해 증거되는 진리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며, 생명이며, 길이라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4:26에는 ‘성령께서는 가르치시며 생각나게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말씀의 대상이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상에 대한 책망을 말하고 있는 이유는 그 대상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성령의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책망하시리라’는 미래형 헬라어로 ‘엘렝크세이’인데요, ‘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잘못을 꾸짖다’ 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백성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과 같이 첫째, ‘죄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을 의미하고, 둘째, ‘어떤 잘못에 대해 꾸짖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셋째, ‘세상의 잘못됐음을 증명하는 것’을 지적하기도 하고, 넷째, 허물을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나며, 다섯째,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이처럼 성령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을 수행하시기도 하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그들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이처럼 성령의 드러내시는 사역에 의해 세상 중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판단하시는 것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세상의 죄를 폭로함으로 그리스도의 죄 없음을 보여주시고, 죄 사함의 길을 여시며, 세상의 거짓된 의를 드러냄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의를 선포하시며,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그들이 이미 심판에 처해졌음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 영혼이 교회로 인도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 장소에 성령님이 운행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와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통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믿고 성령을 철저히 의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일들이 성령 부흥의 때에 굉장히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부흥의 때를 우리가 사모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갈보리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재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사건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십자가를 내가 지고 골고다에서 겪었던 모든 고난을 내가 겪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참된 의미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무덤을 뚫고 나오시듯 내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인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이런 부활을 실질적으로 체험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논리로 해석하면, 우리는 왜 오순절 성령강림의 모든 외적인 현상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성령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역사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알아야 할 십자가, 부활, 성령의 내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실제화된 상태에서 외적인 부분을 다 재현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 언어적 방언, 설교를 통한 삼천 명의 회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로 인한 죽음 등이 동일하게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물론 일어날 수 있지만 일반화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참된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내재되고, 적용되며, 나타나야 합니까?
요14: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3대 사건은 십자가, 부활, 성령강림입니다. 이 사건들을 연결해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들을 벗어나서는 이 3가지의 참된 의미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마귀가 힘을 발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흔들리고 시험에 드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생각이 혼돈하고 복잡하며 공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근본적인 이유는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강림에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확실히 받아들이고 그 위에 서 있으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갈 수도, 속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죄 사함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보다 더 큰 충만함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성령의 일하심을 무시한다면 성령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생명의 진리를 깨닫고 그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린 성도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하고 안전한 위치입니다.
요14:20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순절’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의 문맥을 보면 ‘그날’은 오순절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제자들이 주님을 한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몸을 입은 주님을 보았고 만질 수 있었습니다. 승천하시기 전까지 영체를 가진 주님을 볼 수 있었고, 승천하시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에는’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날은 어떤 날입니까? 그날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는 날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셨을 때 아버지 곁으로 가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날’ 즉,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에 예수님께서 영으로 오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와 영으로 연합되어 하나 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아버지께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의 영을 하나님과 연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연합으로 인해 우리의 타락으로 빚어진 하나님으로부터의 격리는 사라졌습니다.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그날이 오면 그들은 성령을 통해서 그들의 생명의 근원이 바뀌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요14:20절 본문 말씀을 종합해서 말씀드리면, 오순절 성령강림의 위대한 내적 역사는 성령께서 성도들 안에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실을 자각시키고 실제화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 부활, 오순절 성령강림은 차례대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깨닫고, 그 후에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됨을 깨닫고, 마지막으로 승천하신 주님과 연합되어 아버지 품 안에 거하는 우리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오순절의 의미입니다.
성령강림 때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강림의 실질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오신 그 순간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나라 보좌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요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이 우리 안에 부어지면 새로운 ‘중심’이 발견됩니다. 이것은 땅에 사는 나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새로운 중심, 즉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 중심 안에 있는 자신을 자각하고 승천하신 주님과 연합될 때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 거하므로 그분의 옷으로 덮어씌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다는 놀라운 능력의 사실을 알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전도’보다 ‘선교사적 사명’이라는 단어를 쓰기를 원합니다. 전도라는 단어가 틀리다는 말이 아닙니다. 전도를 통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생명 구원은 선교사적 사명으로 전해야 훨씬 실감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도보다는 선교사적 사명을 직업의식과 사명의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연합되어 있다는 것과 우리 안에 주님께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다면 그것은 수동적인 연합입니다. 즉, 내가 거부하거나 순종하지 않거나 믿음이 흔들리거나 충성된 삶을 살지 못하면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 우리가 연합되어 있다면 그분의 책임감과 약속으로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 부활, 성령강림으로 그분과 하나 되게 하심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 삶이 지금 실질적으로 내재화되어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면, 주님이 나를 이끄실 것입니다. 내적인 삶의 고통을 치료하실 것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계신 그분과 실질적으로 연합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과 확신을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강림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승리할 수밖에 없고 다른 세계의 삶을 누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십자가와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그 나라를 준비하는 능력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