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73
7월1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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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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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yT9DE9g1Z0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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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놀랍도록 파격적이고 소탈한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상상이겠지만 주님께서 내가 매일 앉는 식탁 건너편에 앉아계신다고 생각해봅니다. 물론 처음에는 두렵고 떨리고 설레고 황송스런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괜찮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마라, 그저 너만 내 앞에 앉아있으면 그만이다는, 자상하고 그윽한 그분의 눈길에 떨리는 마음은 즉시 진정되고 세상 편안하고 얼굴로 그분과 마주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주님의 소탈하고 편안한 얼굴에 즉시 긴장이 해소되고 무장이 해제되어, 세상 행복한 얼굴로 점점 그분께 다가갈 것입니다. 마치 베타니아의 마리아처럼,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애제자 요한 사도처럼 말입니다.
거짓말 같겠지만 자비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매일 앉는 식탁에 함께 앉으십니다. 우리와 얼굴을 마주하십니다. 잘 잤냐? 괜찮냐? 별일 없냐? 물어봐 주십니다. 힘든 일 있으면 도와 줄께, 언제든 말해라, 힘내거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겠다며, 격려하십니다.
놀랍게도 어딜 가나 손 가락질 받던 뒷담화의 주인공이던 세리 마태오, 로마 식민 통치 아래, 우리로 말하면 친일파 앞잡이, 인간말종으로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마태오의 식탁 건너편에 편안한 자세로 앉으셔서 포도주잔을 기울이시고, 건배도 제안하시는 예수님의 파격적이고 소탈한 모습이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동족들로부터 죽일 놈 살릴 놈 소리를 밥 먹듯이 듣던 세리 마태오에게 새로운 삶과 구원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멋집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오 복음 9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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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IG30_rvU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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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마라, 이런 개는 꼭 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이것에 기분 나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하셔야 하는지 아십니다. 왜 바리사이들과 함께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들 마음을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개로 치자면 언젠가는 반드시 예수님을 물 수 있는 개들과 같았습니다. 그런 개 무리 안에 섞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994년, 자신의 부모를 살해하는 존속살해를 저질러 현재까지 사형수로 복역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존속 살해범을 논할 때 첫 손으로 꼽히고 있는 범죄자가 있습니다. 박한상입니다.
박한상은 사실 태생부터 상당히 안 좋은 인성을 가졌습니다. 이 때문에 학교와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비행을 일삼고 싸움질과 폭력을 행사하는 학교폭력 가해자였습니다. 이런 아이가 도박과 쾌락에 빠졌으니 돈도 안 주며 늦게서야 그를 질책하는 부모를 어떻게 했겠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어떤 자녀가 나를 물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을 힘들게 만드는 푸틴은 어렸을 때 어땠을까요? 그냥 깡패였습니다.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보다 덩치가 큰 형들과도 싸우고 다니는 동네의 말썽꾸러기였습니다.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숙제는 나 몰라라 하고 칠판 지우개를 친구에게 집어던지고 수업 중에도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등 늘 주변으로부터 손가락질받는 문제아였습니다. 게다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불량한 애들이랑 어울리며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녔습니다.
첩보원이 되고 싶었던 푸틴은 어린 시절부터 무술을 연마하여 삼보와 유도 등 무술을 배웁니다.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삼보나 유도 대회에서 우승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히틀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운동도 잘하지 못했습니다. 미술로는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많은 돈을 벌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을 보면 우쭐하고 대장을 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선생님은 이렇게 히틀러를 평가했습니다.
“1. 재능은 없고, 성실하지 않으며 교칙에 순응하지 않고 고집이 세며 고자세임.
2. 또한 꾸지람하면 오만불손하며, 급우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함.”
히틀러는 어떤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군인이 되어 전쟁하는 중에는 자기 지배력을 통제할 필요가 없었기에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수천만 명이 죽게 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개는 훌륭하다’를 보면 주인을 무는 개들이 나옵니다. 이 개들의 특징은 ‘세속-육신-마귀’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소유욕’이 큰 영구는 주인집이 자기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는 주인을 물려고 합니다. 또 ‘식탐’견도 여럿 나옵니다. 식탐이 많은 개는 주인이 밥을 주는데도 주인이 밥그릇을 만지면 성질을 부립니다.
마지막으로는 ‘지배욕’이 강한 개가 나옵니다. 라오는 어렸을 때 받은 상처의 화풀이를 주인에게 합니다.
이들에게 하는 훈련은 그것들의 욕구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들이 주인을 물지 않게 하려면 탐욕이 강한 개에게 누가 주인인지 알려주고, 식탐이 많은 개에게는 그 밥이 누구에게서 오는지 알려주며, 지배욕이 강한 개는 물속에 집어넣어 주인에게 의지하게 만듭니다.
결국 세속-육신-마귀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개들에게서 나오고 그 개들이 남을 물지 않게 만들려면 그 탐욕-식욕-지배욕을 줄여주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구가 강한 개는 반드시 사람을 문다는 것이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한 번 그것들에 빠지면 개처럼 길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강 훈련사처럼 통제해 줄 어른이 없기 때문입니다. 박한상의 아버지는 늦게서야 그를 길들이려 했습니다.
“너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놈이다. 그렇게 말썽을 피우려면 호적을 파라.” 하지만 아들에게 물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아이들이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십일조’입니다.
세속-육신-마귀는 십일조만 낼 줄 알면 다 해결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오히려 돈에 대한 욕심, 쾌락, 교만을 키우기 위해 십일조를 했습니다. 이것을 줄이기 위해 내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주님 것이고 또 먹을 것을 좀 절제하고 그리고 주님께 의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무는 자녀로 성장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자녀로 성장합니다. 우리들도 결국 구원을 못 받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십일조를 삼구를 없애려는 마음으로 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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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9-13: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께서는 세관에서 일하고 있던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 주님께서는 그가 세리였지만 기꺼이 부르셔서 한순간에 사도가 되게 하셨다. 그는 세상일에 파묻혀 있었지만 거짓 없는 신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음속을 아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다는 판단을 받는다. 주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하시자, 한 순간도 머뭇거리거나 미루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9절)고 하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주님의 방문을 기해 자기 동료들을 불러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그래서 세리들과 또 죄인들이라고 표현된 그 사람들과 식사를 하시게 되었다.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심으로써 예수님은 나쁜 평판도 얻게 된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11,19; 루카 7,34) 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헐뜯게 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로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주 경멸하였고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과 거래는 물론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께서 세리인 마태오를 부르시고 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절) 이 말씀은 당신이 지금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와 계시며,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으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열심하고 착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모든 것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으로 이미 가득 찬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13절) 여기서 말하는 제사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예식인데 그 제사에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제사,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제사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형식과 의식은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에 우리 마음이 함께 봉헌되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우리가 실천하는 삶을 함께 봉헌할 때 참된 제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자선이 바로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시듯이 죄인들에게 가까이하시는 모습이다.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살아가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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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신앙인으로 부르시는 일과 직무를 맡기기 위해서 부르시는 일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일은, 신앙인이 되라고 ‘모든 사람’을 부르신 일입니다. 이 부르심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신 일은, ‘사도 직무’를 맡기기 위해서 특별히 선택해서 뽑은 사람들을 부르신 일입니다. 따라서 사도들 경우에는 ‘신앙인이 되라는 부르심’에 이미 응답한 상태에서 사도가 되라는 부르심을 다시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 사도를 부르신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사도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따라라.”라고 말하자 벌떡 일어나서 따라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사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고,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리였기 때문에, 또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마태오를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로 뽑힐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뽑혔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리라는 직업만 보고 ‘마태오는 죄인이었다.’ 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신 일이 많고, 실제로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이 위선자였지만, 위선자가 아닌 ‘진실한’ 율법학자도 있었습니다. 나타나엘은 ‘진실한 사람’이라고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요한 1,47) 그처럼 당시에 대부분의 세리들이 도둑이었지만, 도둑이 아닌 세리도 있었을 것이고, 마태오도 다른 세리들과는 다르게 도둑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일은, 사도들을 뽑으실 때 ‘직업’을 보지 않고 ‘사람’만 보셨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직업으로 사람을 판단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에 ‘열혈당원 시몬’이 있습니다. ‘열혈당’은 일종의 테러 집단, 또는 암살단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시몬 사도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그의 과거 경력을 보지 않고 현재의 신앙과 자격만 보고 사도로 뽑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0-13)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말씀은, ‘죄인만’ 부르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부르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을 의인과 죄인으로 구분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한 일입니다. 그들은 “우리는 의인이고, 세리들은 죄인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너희도 죄인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거짓 의인’들이었습니다.) 자기를 의인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위선과 교만이고,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주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모든 사람’을 부르러(구원하러)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야 한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도 부르러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식사 초대에도 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만나셨고, 모든 사람과 어울리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메시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병든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는 바리사이들은 “우리는 의인이다. 우리는 병들지 않았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자기들은 메시아가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메시아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면서 메시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결국 “나는 의인이다.”라고 주장하는 ‘자칭 의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리들 경우에는, 회개한다면 직업과 관련된 죄부터 끊어버려야 합니다. 바리사이들 경우에는, 회개한다면 위선과 교만에서 벗어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비의 실천을 바라신다.”라는 뜻인데, “너희는 모두 구원받아야 할 똑같은 죄인들이니 서로 도우면서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구분하고, 분류하고, 편 가르기를 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요즘에 성격 유형 검사 결과로 사람들을 분류하는 것을 볼 때가 많은데, 그런 일은 다른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하고, 차별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좋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똑같이 받는 형제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함부로 분류하지 말고, 형제로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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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교구 사제 모임 중에 주체한 본당의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 주례하였고, 사제들이 공동으로 집전하였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신부님들의 소개 시간이 있었습니다. 유독 한 신부님에게만 큰 박수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그 신부님이 8년 동안 그곳 신자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고생하면서 새 성전을 신축했기 때문입니다. 본당을 떠났고 4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 신부님도 교우들도 감회가 새로웠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선교하는 사제들에게도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사제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는 교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교구 사제단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님쓰신 가시관’을 불러드렸습니다. 교우들의 박수에 신학교 ‘교가’를 한곡 더 불러드렸습니다. 오랜 만에 사제들이 함께 교가를 부르니 마치 신학생이 된 것 같았습니다.
식사를 할 때입니다. 보통은 사제들의 자리와 교우들의 자리가 달랐습니다. 사제들의 자리는 꽃도 있고, 그릇도 깨끗하고, 음식도 신경을 더 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식사하였습니다. 20명의 사제들이 교우들이 있는 자리로 찾아가서 모두가 같이 식사하였습니다. 사제들만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만나는 교우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어색할 수 있지만 곧 웃음이 넘치는 만남이 되었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저도 사제단에서 나이가 많은 편이 되었습니다. 제가 찾아간 곳도 본당에서 연세가 많은 분들이 앉은 자리였습니다. 35년생이 가장 나이가 많으셨고, 45년생이 가장 나이가 어리셨습니다. 어르신들의 연륜과 경험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선교하는 사제들은 선교지의 이야기를 하였고,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청년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제들만이 모여서 식사하는 것도 즐거운 시간이지만 사제들이 신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채우는 방법입니다. 약을 투약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영양제를 보충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병을 치유하는 방법이고 대부분 이렇게 병을 치유하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비우는 방법입니다. 현대인들의 병은 대부분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넘쳐나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육식과 가공식품의 섭취가 있습니다. 과음, 과식, 과로는 현대인들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합니다. 약을 투약하기보다는 적절한 운동으로 몸의 면역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육식과 가공식품의 섭취를 줄이고 야채와 천연식품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과음, 과식, 과로를 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우는 삶을 살면 현대인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도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멀어진 것은 욕망을 채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하게 비우는 삶이었고, 나누는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모든 권위와 권한을 비우는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헌신하는 것은 철저한 나눔의 삶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 또한 나눔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하고, 헐벗고, 배고프고, 아프고, 외로운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7월의 첫날입니다. 그동안 내가 채우려고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비워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2022년 6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제 남은 6개월 동안에 욕심과 욕망은 비워버리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채우면서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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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다들 바쁘게 걷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제가 된 후에 아침 출근을 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사제관과 성당이 같은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구청에서도 출근 때문에 바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숙소와 사무실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새삼 세상 사람들이 바쁘게 살고 있으며,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딱 2년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2005년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입니다. 아침을 준비하고, 치우고 학교에 가는 길이 무척 바빴던 기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출근하는 그 시간만큼 저도 주어진 일에 더욱 충실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조지 캠벨은 신화가 가지는 4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과 자본으로는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신화가 가지는 4가지 특징은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길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화가 주는 첫 번째 특징은 ‘신비함’입니다. 무지개는 단순히 빛의 프리즘이 아니라, 하느님과 맺는 새로운 계약의 표징이 된다는 신비로움입니다. 수선화는 예쁜 꽃이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이 있습니다. 탄생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죽음은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다는 것 또한 신비로움입니다. 신비로움을 잊어버린 현대인들은 풍요 속에서도 빈곤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신화가 주는 두 번째 특징은 ‘우주적 힘’입니다. 신들의 세계에서 보면 지구는 아주 작은 별에 불과합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국경이 없는 둥근 별입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한마음, 한 몸과 같습니다.
내가 나의 몸을 돌보듯이, 우리는 같은 지구별에서 사는 이웃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싸우는 일이 없듯이, 내 몸의 지체들은 한 방향을 향해서 나가듯이 지구별에 사는 우리는 모두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신화가 주는 세 번째 특징은 ‘사회적 합의’입니다. 신화는 모두 ‘권선징악’을 이야기합니다. 신화는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문화와 제도는 신화의 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계명과 법전은 신화의 토대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와 문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모든 문화와 문명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서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달라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화가 주는 네 번째 특징은 ‘생명의 존중’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지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탐욕은 많은 생명의 멸종을 가져왔습니다. 생명의 멸종은 결국 인간 역시 지구에서 살 수 없도록 할 것입니다. 꽃, 나비, 새, 물, 바다, 하늘을 존중해야 합니다. 인간은 어쩌면 이 지구에 아주 짧게 머물다 가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지구의 환경과 생명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신화가 가지는 특징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자신만을 위하면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웃의 것을 빼앗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역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재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화가 주는 특징을 가르침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들의 꽃도 아름답게 입혀주시고, 하늘의 새도 먹이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장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해 준 것이, 지금 가장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바로 형제요 자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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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구원 사명’이 마태오 복음사가의 성소 이야기 안에서 소개됩니다.
먼저, 마태오는 중풍 병자가 치유된 사건(9,1-8 참조)에 이어서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평상에 누워 있던 중풍 병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해방된 이야기가, 자신이 한평생을 묶여 살았던 세관에서 해방된 체험과 닮았다고 본 듯합니다. 또 마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자신을 먼저 “보시고” 시작되었음을 전하면서 이 부르심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셨고,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마태오는 자신의 성소 이야기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실인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이유’를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가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을까요? 마태오도 우리처럼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한참 뒤에나 알게 되었을 듯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마태오는 회개하였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회개하였다는 점입니다. 부르심이 회개에 앞섭니다. 교회는 회개한 이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런데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의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의 속마음을 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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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길>
마태오 9,9-13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람길>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난다네
가던 길 멈추고
사람을 부른다네
그 사람과 함께
다시 길을 걷는다네
길을 걸어야
사람을 만난다네
사람을 만나러
길을 걷는다네
길이 사람이요
사람이 길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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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열려있는 분>
우리는 기왕이면 깔끔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합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있어 보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호감이 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은총이요 복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수록 밥맛인 사람도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너무도 달라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도 참 소중한 사람인데 담을 쌓을 때가 있습니다. 더더욱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는 마태오라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부르셨다는 것은 하루하루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부르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길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현장인 이 세상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세상은 간이역입니다. 종착역은 하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악명 높은 사기꾼이나 탐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간주 되어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 집의 식탁에 앉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죄인과 의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세리는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자기가 번 돈을 가치 있게 쓸 줄을 몰랐던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고 따돌림 당하던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리를 함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안목이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안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예수님의 품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크게 열어도 스스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꼭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이나 이해관계를 따지며 안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영적성장이 멈춘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안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돌림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곳을 떠나면 죽는 줄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을 생각하면 떠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은총의 날, 진정한 행복의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옛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안주를 탈피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안주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큰 품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될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새 삶이 시작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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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작년 아버지 장례 때에 집안 어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종친회 같은 곳에 잘 나가지 않아서인지 정말로 오랜만에 뵌 것입니다. 그런데 집안 어르신 중의 한 분이 “조 신부, 올해 몇 이지?”라고 나이를 물으셨습니다. 제 나이를 말씀드리니, “참 좋을 때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삼십 대에도 또 이십 대에도 제 나이를 물으셨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참 좋을 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보다 젊은 나이를 사는 제가 부러워서 그렇게 말씀하셨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항상 ‘좋을 때’에 살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나쁠 때가 있기도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쁠 때도 가장 좋은 시간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나이는 집안 어르신의 말씀처럼 가장 좋은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좋은 때를 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구원받기를 원하셨던 주님이시지요. 구원으로 나아가는 지금이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위어 주님께 데려옵니다.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당시에는 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었습니다. 죄를 지었기에 벌로 병을 얻게 되었다고 간주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권한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죄를 용서하신 다음에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중풍 병자를 걷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셨다는 율법 학자의 비난이 근거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맞이하고 함께하는 지금이 어떤 때일까요? 가장 좋은 때입니다. 문제는 가장 좋은 때, 은총으로 충만한 때를 살면서도 불구하고 ‘믿음 없음’으로 인해 가장 좋은 때를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믿음을 두지 못하는 율법 학자들이 오늘의 상황을 마주하면서 기뻤을까요? 아닙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다가와서 겸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때를 사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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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여정>
- 예수님 닮기 -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2)
‘주님의 법’이라는 주제하에 장장 176절까지 계속되는 시편119장 내용이 참 풍부하고 은혜롭습니다. 어제 6월 예수성심성월이 끝나고 9월 순교자 성월이 시작되기 전까지 두달은 영적방학처럼 생각되어 마음도 넉넉해지는 오늘 7월 첫날입니다.
어제 온종일 내린 비로 힘차게 흐르는 새벽 불암산 계곡물 소리에 새힘이 솟는 느낌입니다. 어제는 아침, 점심 두차례 종점까지 불암산 계곡 개천따라 우렁차게 노래하며 흐르는 물길따라 ‘시냇물’ 동요를 부르며 걸었습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바짝 마른 바닥
잡초와 오물들 대책없이 썩어
악취를 발하던 시내
폭우 내려 말끔히 씻겨 정리되니
하얀 모래 백사장에
맑게 흐느는 물
살아 노래하는 시내가 되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2001.7.19.
문득 21년전 써놨던 ‘혁명’이란 자작시가 생각나 조용히 읊어봤습니다. 물론 우리 믿는 이들에게 혁명은 영적혁명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사랑하는 주님을 만남으로 일어나는 회개를 통해 일어나는 영적혁명입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내적으로 하느님 바다 향해 힘차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영적혁명靈的革命의 삶이 되었으면 소원所願이겠습니다.
이어 어제의 끝은 오늘의 시작입니다. 어제 오늘 7월 첫날을 앞두고 생각난 이육사의 ‘청포도’란 시입니다. 저에게 시편처럼 생각되는 시이며, ‘내가 바라는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은 주님처럼 생각됩니다.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바로 우리는 7월 첫날 이런 두 분의 반가운 손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입니다. 이런 참좋은 손님을 모시는, 만나는 재미로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관에 우두커니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던 세리 마태오를 찾아온 주님이십니다.
“나를 따라라.”
마태오의 내적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부르셨고 즉시 첫눈에 반해 그분을 따라 나선 마태오입니다. 이제 주님을 따라 맑게 흐르는 시냇물로 살게 된 마태오입니다.
이렇듯 부르심의 성소는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불러 주셨기에 따라 나선 마태오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비로소 참으로 존재하게 된 우리들입니다. 진정 그렇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충만한 존재로 살고 있는지요.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마태오가 불림받지 않았다면, 또 우리가 불림받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는지요. 새삼 우리 성소는 우연이 아니라 특별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부르심을 받아 마태오가 주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했듯이 우리는 주님의 교회공동체에 합류하게 되어 이렇게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세리 마태오가 공동식탁에 참석하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의 시비성 물음에 제자들을 대신한 주님의 명쾌한 답변이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진정 복음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성심의 말씀이자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면서 회개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죄인罪人이자 병자病者로서 우리의 신원을 확인하게 됩니다. 착한 목자牧者이자 최고의 명의名醫이신 주님을 만나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이 해결되고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받는 이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세상에 죄인아닌, 병자아닌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부른 것이 아니라 부족한 죄인이자 병자라 불러 주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겸손하게 합니다. 참으로 차별이 없으신, 자비하신 주님을 닮게 합니다. 바로 이들이 성인이며 우리 인생의 궁극목표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오늘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전례의식 자체가 원칙적으로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근본 계명을 소홀히 할 정도로 전통적 종교의식에 편중된 자세를 바로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전례의 생활화, 생활의 전례화를 통해 자비를 생활화하라는 것입니다. 전례가 없는 삶은 맹목盲目이 될 수 있고 자비로운 삶이 빠진 전례는 공허空虛할 수 있습니다. 새삼 자비 역시 부단한 노력과 수행의 영성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는 예수님의 예표이자 영적형제처럼 느껴집니다. 빈민이 착취당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가진 자들의 횡포를 고발하며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아모스입니다. 날로 극심해지는 생존경쟁과 빈부의 양극화로 오늘도 계속되는 가난한 자들의 고통입니다. 참으로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며 가진 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아모스입니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나는 모든 사람이 허리에 자루옷을 두르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가 되어,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게 하고, 그 끝을 비통한 날로 만들리라.”
유비무환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가 스스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다음 아모스의 진단이 정확합니다. 그대로 오늘의 현실같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말씀의 발견과 생활화가 절실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다.”
말씀은 영이요 빛이자 생명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한 부단한 주님과의 만남이 날마다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겸손한 삶을 살게 합니다. 내적內的 혁명가革命家가 되어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 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ㄷ)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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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구원받는 길!>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십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예수님의 이 말씀이 참으로 기쁨과 희망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리사이와 세리가 함께 기도했지만,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세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셨고(루카 18,9-15 참조), 돌아온 탕자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신 아버지의 모습 때문입니다(루카 15,11-32 참조).
내가 구원받고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십자가 사랑 앞에서 금방 확인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십자가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늘 짧고 굵은 세리의 기도 밖에 드릴 수 없는 나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오늘 독서인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십자가의 완전한 사랑을 망각하면서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에 가난한 이들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주님의 파멸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아모 8,10)
이제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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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태오 신부님]
<“혹시, 저더러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Mens sana in corpore sano!”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던가? 병든 자의 아픔은 육체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은 라틴어 속담이다. 육체가 약해지면 영혼도 약해지기 마련이다.
예수님 시대에 한센병(나병) 등 모든 종류의 피부병 환자들을 물론이고 갖가지 육체의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은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세의 율법이 규정하는 바에 의하면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사제의 선언에 의해 스스로 ‘부정(不淨)한 사람’이라고 외쳐야 하며, 병이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진지 밖에 자리를 잡고 따로 살아야 하기는 했다.(레위 13,46)
그러나 율법이 그를 죄인(罪人)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병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격리시키고 소외시켰는가? 바로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스스로의 죄를 씻기 위해 하느님께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던 사제들이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물론 하느님 앞에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사람이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지 못한다. 죄인은 스스로에 의해 고백되거나 하느님에 의해서만 선언될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기보다 가급적 죄를 묻지 않으시며, 묻더라도 용서하기 위해 물으시는 분이시다.
어제 복음에서 중풍병자의 육체적인 병보다 정신적인 병을 더 걱정하신 예수께서 그의 병을 치유하기에 앞서 죄를 먼저 용서하여 주신 점만 보아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다. 이제 예수께서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사고(思考)를 바로잡아 주신다.
오늘 복음을 보자. 전직이 세리였던 마태오가 제자로 불림을 받는다.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즉각 따라 나선 마태오다. 단 한 구절의 간략한 이 대목은 사실상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르나움 도읍의 나들목에 자리를 잡고 로마제국을 위해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 마태오는 이미 당대의 상업적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만약 내가 세리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설마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본인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복음의 이 대목을 기록한 마태오복음사가 스스로가 자신을 죄인의 그룹에 넣고 있다. 그러면서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을 것이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태오는 자신을 가리키며 “혹시, 저 말입니까?”하고 반문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태오의 반신반의가 믿음으로 기울었다. 이미 여러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를 거느리고 다니시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목한 것이다. 기회는 왔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세리의 직업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아무런 미련 없이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대한 자비와 용서이다.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 안에서 이러한 핵심적인 내용들을 계속해서 피력한다. 오늘 복음도 마르코가 전하는 세리의 소명사화(마르 2,14-17)를 옮겨 쓰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마태오는 자신의 편집의도에 집중한다.
마태오의 편집 의도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이다. 그래서 세관원의 소명사화에서 마르코가 말하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이름을 자신을 지칭하는 마태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결국 마태오는 소명사화의 주인공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마르코가 정작 예수의 제자로 불림 받은 알패오의 아들 세관원 레위의 이름을(마르 2,14) 12제자의 명단에는 마태오(마르 3,18)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감안하여 합리적으로 고쳤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분류되었던 세관원이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 그냥 따라다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제자로 삼은(마태 4,19) 뒤에 베드로의 집에 들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자 일어나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는 일(마태 8,14-15)을 보더라도 추종은 곧 친교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나선 마태오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동료 세리들과 많은 죄인들과 함께 식탁공동체를 주관하시면서 친교(親交)를 선물로 주신다.(10절)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를 보고 못마땅해 한다.(11절) 그래서 제자들에게 “당신네 선생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흑백(黑白) 친교 불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흑백의 논리를 ‘의사와 병자’(12절), ‘제사와 자선’(호세 6,6 참조), ‘죄인과 구원’(13절)의 원리로 보시면서 이 둘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대상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래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걸어 다니시고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연과 마귀와 죄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위로써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선물을 이 땅에 선사하시는 것이다.
남을 부정하다고 하여 자신이 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리 마태오와 같이 오직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나를 따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추종하여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할 때 하느님 앞에 거룩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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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북 왕국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져 세상 탐욕에 집착하며 하느님을 저버렸을 때, 하느님께서는 아모스 예언자를 뽑아 그들에게 파견하시고 그들의 방탕과 만용을 징벌하십니다.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그들이 지금은 먹고 마실 것이 넘쳐 나고 가난한 이들의 것까지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지만, 그들이 곧 굶주리게 될 것이고, 양식과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게 될 것이라고 아모스 예언자는 경고합니다.
세상살이가 넉넉하고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살려는 고민이 늘어납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고, 상대적 빈곤감에 싸여 충분히 가지고도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돈은 모든 근심과 죄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돈이 쌓이는 곳에는 영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주저 없이 따라나서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없던 세리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돈과 재물을 관리하면서 본 인간의 탐욕의 결과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돈 때문에 울고, 재산 때문에 분쟁을 겪고, 친구를 잃고 나면 비로소 깨닫습니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쌓아야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진 재물이 아니라, 남에게 베푼 사랑으로 우리를 평가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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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oXeEsW5G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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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매순간이
사랑이다.
무엇이 참된
사랑인지를
다시 보고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다.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이
다름아닌
우리를 향한
참된 치유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언제나
가능성을
열어 놓으시는
주님이시다.
그 어떤 사랑보다
더 할 수 없을 만큼
많고 크신 사랑을
오늘도 우리는
체험한다.
언제나
사람들 안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시는
주님이시다.
변화와 희망의
새로운
살맛나는
새 길이다.
죄인과 함께
하나된 행복을
만끽하시는
행복의
실천가이신
주님이시다.
자연스럽게
우리들 삶에
사랑의
가르침을 주신다.
병든 이들에겐
의사가 되시고
죄인들에겐
빛이 되시고
나눔이 되신다.
죄인들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회개의
나날들이다.
참으로 진실하신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이시다.
다름 아닌
저 자신이
죄인이며
병자임을 알기에
오늘도 사랑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한다.
이것이 삶의
가장 큰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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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아끼십니다.
죄인에게도
문을 열어주시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죄인이기에
엉엉 울며 애절히
통곡하게 됩니다.
우리모두는
회개할 자격이
있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손가락질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와 기도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의인도 죄인도
함께 가야할
사람들이며
함께 살아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심판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사랑의 치유입니다.
다시금
살아간다는 것이
무언지를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시간은 의인이라
자만하는 착각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에
감사하는 회개입니다.
죄인의 슬픔이 아니라
죄인의 기쁨을 다시
우리에게 안겨주십니다.
딱 잘라 단정짓는
판단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죄인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앞에서 처음으로
우리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다시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회개할 아름다운
권리를 다시
되찾게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회개의 주인공이
되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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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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