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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작가 박범신은 작년에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중년인 지금의 나이까지 시간의 공백 없이 작품을 통해 그를 만났기 때문에 그는 집안의 서가에 늘 꽂혀 있던 책과 같은 작가라고 생각했다. 박범신 작가는 1973년 등단 이래 2024년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동안 쉼 없이 글을 써왔다. 스스로 절필을 선언한 기간 말고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품활동을 했다. 다만 1979년과 80년에 발표한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과 『풀잎처럼 눕다』와 같이 그가 ‘인기 작가 시절’에 쓴 소설과 2000년 이후에 발표한 『더러운 책상』과 『소금』을 동시에 읽은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지금까지 글을 계속 썼지만 독자는 그런 사실을 몰랐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고, 특히 작가의 초기 독자의 책읽기에는 단절이 있었다. 박범신 작가의 문학적 성과와 그에 대한 평가는 시기별로, 작품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그가 지금까지도 글을 쓰고 있고 이전의 대표작을 계속 뛰어넘는 작품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더러운 책상』(2003)은, 작가의 지속적인 글쓰기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책읽기에 단절이 있었다면, 8, 90년 대의 소설을 지나 현재까지 이어지는 글쓰기의 변곡점이 되고, 문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새로운 모색, 자기 탐색과 성찰이 나타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박범신 문학에서 이전과 이후의 어떤 소설과도 결이 다른 자전적 이야기이다. 56세의 내가 16세의 나를 소환하여 그때의 나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현재형으로 쓰고 생각이 단장(斷章)으로 묶이는 이유는 그 역시 자서전 쓰기라는 불가능한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그때의 내가 나인지, 지금의 기억과 과거의 기억이 하나가 될 수 있는지 묻고 답하는 일은 하나의 시도이지 답을 찾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작품이 중요한 이유는 작가에게서 삶과 문학이 구분되지 않은 시기였고, 현재의 작가를 배태한 시기였으며 가장 치열한 의식으로 삶을 살았던 시기를 그렸기 때문이다. 『더러운 책상』을 읽으면 ‘강경읍 채산동’의 “장 공장의 긴 외벽이 끝나고 키 작은 초가를 한 채 지나고 나면” 나오는 함석대문을 만날 수 있다. 박범신 문학은 “불과 석 자가 될까 말까 한 넓이의 (강경의) 함석대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론가 황현산이 ‘녹슨 함석’에 주목하여, “그에게 중요한 것은 녹슨 함석의 관 뚜껑을 닫아 버리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그’와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여전히 소설가의 삶을 이어가는 자기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이다”라고 언급한 것도 그 장면이 현재의 나를 만들어낸 원초적인 기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유년기를 강경에서 보냈고 강경을 출발하여 함열, 황등을 지나 이리까지 가는 통학 열차로 학교에 다녔다.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상과 파리를 알기 위해서는 발자크의 『인간희극』을 읽으면 된다. 마찬가지로 박범신 작가의 『시진읍』과 『더러운 책상』, 『소금』 이상으로 강경의 사회상과 삶, 풍경을 더 잘 알려주는 기록은 드물다. ‘철길 뒤 큰 미루나무에 둘러싸인 강경중학교와 금강 제방’, ‘통학 기차를 타기 위해 채운산을 돌아 정거장으로 가는 길과 그곳에서 보는 금강의 전경’ 그리고 ‘나바위 성지’는 1960년대 강경의 풍경이다. “갈대밭에서 날아오른 새떼들이 옥녀봉 꼭대기를 타고 넘는다” 그리고 “안개 낀 날의 새벽강은 너무 넓어서 바다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묘사는 강경의 과거와 오늘을 보여준다. 그밖에 연무읍에 있었던 황북초등학교와 연무읍 봉동리의 두화마을, 채운산 산허릿 길의 고아원은 박범신 작가의 기록이 아니면 이제는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소설가 박범신의 삶과 작품은 강경의 역사이자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박범신 문학이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고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작가 스스로 문학의 주제나 형식에 있어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고 그것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작가가 젊은 시절의 때 이른 재능으로 대표작을 내놓고 더 이상 작품을 쓰지 못하거나 최초의 작품을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박범신 작가의 경우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나온 소설이 세월이 흐를수록 문장은 더 단단해지고 사유는 더 깊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만약 오랜 기간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글의 힘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가에 대한 문학적 평가의 기준이 된다면 소설가 박범신은 한국문학에서 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문학
건양대학교 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양대 휴머니티칼리지 브리꼴레르 학부 학부장과 박범신 문학콘텐츠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투르니에 소설의 사실과 신화』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살로메』, 『춤추는 휠체어』, 『까미유의 동물 블로그』,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칸트 교수의 정신없는 하루-칸트 편』, 『데카르트의 사악한 정령-데카르트 편』, 『녹색 광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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