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0일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15-20
예수님께서 왜 당신이 직접 우리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시고 교회에 그 권한을 위임하셨을까?
오늘 복음은 매우 교회론적입니다. 왜 교회에 예수님께서 묶고 푸는 권한을 주셨는지 설명합니다.
누구의 죄든 먼저 혼자 가서 타이르고 안 되면 둘이나 셋이, 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하신 말씀처럼 교회에도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당신께 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치 아드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에 반기를 든 사람이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 용서의 권한을
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권위를 부정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각자가 다 사제이기 때문에 직접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회에 죄 용서 권한을 주시고 파견하셨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유용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든 예수님을 상정해놓고 그냥 용서받을 것이라고 믿고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실제로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며 예수님께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2003년 12월 19일, 당시 나이 24세였던 이 씨는 자신의 6살짜리 아들과 5살짜리 딸을 동작대교 위에서 한강으로 던져 죽게 하였습니다.
기자가 “왜 같이 안 죽었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기자가 “기독교인인데 사람 죽이는 건 괜찮아요?”라고 묻자 그는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가톨릭 신자라면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만약 자신이 한 행위를 직접 예수님이 아니라 사제에게 고백해야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제보다 더 쉽게 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먼저 교회에서 죄를 용서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 안에 흐르는 용서의 힘의 효과입니다.
인간에게 죄 용서의 힘을 주셨다면 나에게도 그 힘이 미치고 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먼저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게 됩니다.
토니 던지는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 역사상 최악의 팀들을 최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승에서 번번이 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5년 성탄절에 끔찍한 비극이 닥쳤습니다.
던지의 큰아들, 제이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힘이 팀 전체를 감쌌습니다. 모두가 감독을 위로하기 위해 전적으로 감독을 믿고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다음 해에 콜츠는 역사에 남을 명경기로 역전승하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피는 성령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도 용서의 힘인 그 피가 돌고 있습니다.
피는 모든 세포 안으로 스며듭니다. 그 피가 곧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뜻은 그 본성으로 모인다는 뜻입니다.
개는 인간이 죽었을 때 모이지 않습니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입었고 그 본성이 우리 심장에 피로서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가더라도 그도 한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힘이 있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것으로는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걸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그 용서의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믿는 믿음은 각 개인이 누군가를 용서하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게 고정원 씨처럼 용서가 불가능하게 보이는 사람까지도 용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용서를 위한 힘은 용서의 권한이 주어진 교회의 일원이라는 믿음으로 강화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닌 교회에 와서 용서받고 용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0일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15-20
이웃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의 표현, 형제적 교정!
돌아보니 수도공동체에 몸담은 지가 40여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수련기 때 계획으로는 지금쯤 공동체 생활의 달인이자 친교의 전문가가 되고도 남을 순간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아직도 공동체 생활이 부담스럽고 어렵습니다.
아직도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보다 공동체가 내게 뭔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요즘도 이런저런 수도회 회의에 참석하면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가 있습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입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 말은 쉬운데, 정말이지 요원한 과제처럼 느껴집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도 저희는 또 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위한 방안을 모색합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위해 다른 무엇에 앞서 따뜻한 형제애가 필요합니다.
특히 공동체 책임자들의 부성애, 그리고 흘러넘치는 일상적 친절과 배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책임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우선적인 역할은 공동체 안에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늘 예의주시하고 고무하는 역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들을 춤추게 하고 살맛 나게 하는 칭찬과 격려도 필요합니다.
끝없는 용서, 한없는 인내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더 가치 있고, 꼭 필요하고, 차원이 다른 사랑의 실천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형제적 교정’입니다.
그러나 형제적 교정은 말은 쉬운데,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고도의 조심성과 극도의 예민함, 숙련된 기술과 강도 높은 기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 형제가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한 형제의 눈이 뭔가에 잔뜩 씌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한 형제가 본래의 정체성과 사명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래서 증거의 삶은 사라지고 반대 표양이나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를 가장 사랑하는 형제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형제라면 침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용기를 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아프겠지만, 정확하고 예리한 형제적 교정 작업을 실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척 어려운 작업이기에 적당히 해서는 낭패를 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우선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겠지요.
그리고 문제의 핵심과 정확한 현실을 파악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교정 작업을 위한 로드맵을 세워야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오늘 우리에게 아주 실효성 있는 교정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오 복음 18장 15~17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3주일 강론>
(2023. 9. 10.)(마태 18,15-20)
<공동체, 형제애>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5-18).”
사람들 가운데에는, ‘용서’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자신도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용서하는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똑같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동체와 형제애를 강조하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우리가 모두 똑같은 죄인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위치에 있는 의인과 용서받는 위치에 있는 죄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를 청해야 하고, 서로 용서해야 하고, 서로 타일러야 합니다.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입니다.>
따라서 “그를 타일러라.” 라는 말씀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가 죄를 지었을 때, 형제가 와서 너를 타이르면
그의 말을 들어라. 그래야 네가 참으로 그의 형제가 될 수 있다.”
만일에 남을 타이르는 일은 잘하면서, 남이 와서 타이르는 것은 듣기 싫어한다면?
<그것은 위선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나를 타이를 때, “너나 잘해라.” 같은 반응만 보인다면?
죄를 짓는 형제를 타일러서 회개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누가 와서 나를 타이르는 말을 할 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다.” 라고 생각해서 그런 경우도 있고, 마음속으로는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남의 충고를 듣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생각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든 누가 와서 타이르거나 충고하기 전에 먼저 자기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없는 사람을
타이르는 일은 아무 소득 없이 끝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타이르는 말을 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또,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가서 타이를 때, 그것을 ‘다수의 압력’이라고 생각해서 회개하기는커녕 반발심만 품고 형제애에서 더욱 멀어져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 상황에서 ‘다수의 압력’과 ‘공동체의 형제애’가 잘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평소에 형제애가(사랑이) 잘 유지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평소에 꾸준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배신자라는 말씀을 처음 하셨는데, 그때까지 사도들은 배신자가 있는지도 몰랐고, 배신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요한 13,22).
심지어 사도들은 유다가 완전히 공동체를 떠난 뒤에도 그가 배신자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요한 13,28-29).
다른 사도들과 유다 사이에는 대화가 전혀 없었을까?
동료 하나가 믿음이 흔들리고, 고민하고, 그럴 때에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을까?
유다 혼자만 외톨이였을까? 따돌림을 당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도들도 각자 따로 흩어져 있었나?
하여간에 사도단 안에서 배반자가 생겼는데도 사도들이 그것을 마지막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사도단을 공동체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적어도 그때에는 그랬습니다.)
‘참된 공동체’는 구성원 모두가 서로 관심 갖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한 몸’입니다.
구성원 중에 누군가가 고민하고 있는데도, 아파하고 있는데도, 슬퍼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그것에 관심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공동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관심 갖고 있다면,
누군가가 죄를 짓기 전에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막는 것을 실패하더라도 금방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공동체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일이 생긴다면, 떨어져 나간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라는 말씀은, “그를 파문하여라.”, 즉 “그를 공동체에서 추방하여라.”인데, 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네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너는 공동체에서 추방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도 됩니다.>
그러나 추방된 후에라도 ‘회개하면’ 다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고. 18절의 ‘매고 푸는 권한’에 관한 말씀은, 사도들에게 ‘집행권’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뜻’을 땅에서 실행하는 ‘집행권’입니다.>
어떤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는 ‘결정권’은 주님만의 권한입니다.
사도들과 교회에는 모든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노력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