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여기에다 올려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마땅히 올릴때가 없어서 올립니다. 제 네이버 블로그에다 올렸던 글이에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그냥 봐주세기 바랍니다.
나주 반남고분군은 역사전공자와 고고학자, 관심있는 몇몇사람, 나주시민 등만 알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반남고분군이 우리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반남고분군의 입구라고 할 수있는 덕산리 3호분 앞 주차장에 가면 나주 반남고분군이라고 안내판과 안내그림이 있다.(본 블로그 답사사진자료 참고) 안내판에서 주목할 점은 전방후원분이라는 보기 힘든 단어가 나온다. 전방후원분이란 말 그대로 앞에는 각지고 뒤에는 원이라고 해석된다. 전방후원분은 일본 나라와 오사카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이다. 그 무덤들은 모두 주위에 물을 두르고 있고 규모도 엄청나다. 한자 본 뜻은 앞과 같지만 이른바 전방후원분은 앞에는 사각형, 뒤에는 원, 그리고 물이 둘러져 있는 무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내그림과 안내판을 비교해 가면서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안내판에서 본 전방후원분, 즉 일본 나라지역과 같은 형태의 무덤이 보이지 않는다. 안내그림은 무덤의 위치 뿐만 아니라 형태도 그려놨기 때문에 문제점이 바로 드러난 것이다. 무덤의 형태는 약간 모양만 이상할 뿐이지 전부 원형과 사각형이다. 일본 나라의 무덤처럼 원형과 사각형이 붙어있는 무덤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안내판에서 전방후원분이라 한 것은 그냥 쓸게 없어서 쓴게 아닐 것이다. 나는 일본 나라의 무덤 형식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된다. 안내 그림에 약간의 오류가 있어서 그렇지 전방후원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적을 뿐이다. 대표적으로 신촌리 9호분을 들수 있는데 안내 글미에서처럼 사각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애매하다. 앞에서 보면 사각형인데 뒤에서 보면 원형이다. 그러나 일본형 전방후원분은 아니다. 한국형 전방후원분, 바로 부채꼴형 무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형 전방후원분인 나라형 무덤과 한국형 전방후원분인 나주형 무덤은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나라형은 완벽한 전방후원분이지만 나주형은 부채꼴형도 별로 없을 뿐더러 사각형도 있고 원형도 있다. 그냥 보면 아무 상관없는 무덤들이다. 그러나 무덤 축조시기를 알아보면 나주는 2~4세기, 나라는 5~7세기이다. 이 뿐만 아니라 나주의 무덤은 시기별로 원형에서 부채꼴로 발전하는 형태가 보인다. 그러므로 부채꼴에서 나라의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추측에 가깝고 좀 더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다. 여러 증거들을 통해 그 흐름을 따져보고, 그 증거들이 이 추측들을 설명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나주와 나라의 상관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주 반남 고분군이 일본의 것과 관계가 없다면 언제까지나 수수께끼의 마한 족장 무덤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겉보기에는 전방후원분이라는 이름나 닮았지 실질적으로 닮은 것은 없는 것 처럼 보인다. 나라지역 무덤의 특이한 점이라면 전방후원분, 무덤에 둘러져 있는 물, 그리고 무덤 위가 평평하다는 점이다. 이런 무덤은 어딜가도 찾을 수 없다. 전방후원분은 나주와 나라의 같은것은 아니지만 약간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다뤘다. 그렇다면 물이 둘러져 있다는 점은 어떨까.
나주 무덤에서는 물은 없지만 물이 둘러졌던 흔적이 분명히 있다. 앞서 전방후원분처럼 서로 다르지도 않다. 단지 물만 없을 뿐이지 모양은 똑같다. 하지만 물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과 모양만 같을 뿐이지 물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결정적 증거가 없다. 그러나 물이 없었다고 하기에는 그 가능성이 매우 적고 이 설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학설도 없기 때문에 나라의 것과 같다는 설이 가장 우세하다.
만약 확실히 물이 있었다고 하면 전방후원분이든 아니든 그 다음 증거는 필요없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무덤에 물을 두른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되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풍수지리학은 오랬동안 한반도와 주변지역을 지배해왔다. 풍수지리학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이어가는 집단이라면 백제, 신라, 마한과는 분명히 다른 집단이다. 그 당시 풍수지리학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그런 무덤은 한반도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무엇보다도 무덤양식은 한지역에 전파한다고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집단이 그곳에 집단 이주해 가지 않는 이상 더욱 발전된 무덤 양식은 불가능하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뒤에 가서 다루기로 한다.
사실 저는 이 글은 제 연구단계의 초기에 불과합니다. 앞의 글에서는 제가 나주의 고분과 나라의 고분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것뿐이지 한반도설이니 어쩌니 떠든 적이 없습니다. 그 내용은 여러 사료들을 종합해 연구하려고 헀던 초기단계 입니다. 앞의 내용갖고 한반도설이니 하는 것은 님 말대로 어이없는 발상입니
그렇게 되면 신라본기에서 소지마립간 이전 기사와 문무왕 이후기사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소지마립간 이전기사는 왜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문무왕 이후는 일본열도라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구요. 소지마립간 이전은 중국사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마한과 붙어있다는 것 같은 것이요.
"왜인은 대방군 동남쪽 큰 바다 속에 있으며..." "왜로 가는 데에는 해안을 따라..(중략)..한국(韓國)을 지나서...(중략)... 왜의 『북쪽 해안』에 있는 구사한국에 이르게 된다."-삼국지 왜인전. 거기다가 지형을 소개할 때 "바다를 건너'라는 표현이 제가 찾은 것만 5차례나 나오네요. 마한전의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있다면, 마한은 전라도 지역에 있지요. 자기한테 불리한 기록을 유리한 기록인양 태연한척 올리지좀 마시죠.
일본에 남아있는 유물들만으로도 왜가 일본열도에 있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4세기경부터 왜 기사가 사라지기 시작한다니....진짜 삼국사기 읽어보셨습니까?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왜를 쳤다는게 어떻게 왜가 한반도에 있다는 근거가 됩니까?
전지를 아신왕때 보냈는데 아신왕은 392~405 동안 재위 헀습니다. 이때되면 이미 일본에서는 고분시대가 시작됩니다. 당연히 배타고 가야죠.
님은 그렇다면 4세기경에 왜가 일본열도로 건너갔다는 건데, 갑자기 왜가 왜 일본열도로 건너가게 됐는데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근초고왕의 남정은 아니겠죠? 4세기경 갑자기 일본으로 넘어갈려면, 장기적인 압박이 아니라 일시적인 침략이 있어야 할 텐데요.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소지마립간 때 479∼500 기사가 마지막이고 문무왕 때야 다시 보입니다.고구려본기는 왜가 보이지 않습니다. 백제본기에는 왜 기록이 꾸준히 가끔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건 삼국사기가 아니라 신라본기입니다. 이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광개토왕이 왜를 쳤다는 것은 증거가 아니라 앞의 삼국사기 관련 증거를 뒷받침 해주는 기사라고 할 수있죠. 왜가 무너진 다음 신라본기에서 왜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 일시적인 침략이 광개토왕비의왕의 왜 침략 기사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글은 제 연구단계의 초기에 불과합니다. 앞의 글에서는 제가 나주의 고분과 나라의 고분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것뿐이지 한반도설이니 어쩌니 떠든 적이 없습니다. 그 내용은 여러 사료들을 종합해 연구하려고 헀던 초기단계 입니다. 앞의 내용갖고 한반도설이니 하는 것은 님 말대로 어이없는 발상입니
앞의 글에서 제가 하고싶은말은 나주와 나라의 고분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한반도설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부족한 것같아 왜관련 내용들을 끌어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더 연구해 올리겠습니다. 아무말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있다는 가정아래 야그를 해보지요. 400년 광개토태왕은 5만을 이끌고 신라에 침략한 왜를 격퇴하고 남정해 들어갑니다. 이 시점에서 왜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바로 4년 후에 왜가 또 다시 고구려를 공격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404년 왜가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광개토태왕에게 개쪽 당한 다음에 일본열도로 건너갔다고 한다면(이덕일씨 주장), 그것은 지나친 억측입니다. 세계 어느나라가 침략전쟁이 실패한 뒤 지딴에 쫄아서 국가를 딴곳으로 옮기는 대역사를 단행한단 말입니까.
제가 처음에 영산강 독립설에 대해 글을 쓴 것은, 님을 염두해 두고 쓴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것이니 오해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님을 염두해 쓴 거라면 한반도 왜설로 그 폭을 좁혔겠지요.
고구려는 다시 몰아냅니다. 사실 그 기사 갖고는 왜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 조차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료들과 종합해보니 그렇게 해석된다고 한 것입니다. 어쨋던간 연구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앞의 내용은 연구초기단계이고 단순히 무덤양식만 비교한 것 뿐입니다.
음.... 저도 이 코멘트를 끝으로 더 이상 논쟁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404년 이후 고구려와 왜의 전쟁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라본기에서 소지마립간 이전 기사와 문무왕 이후기사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소지마립간 이전기사는 왜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문무왕 이후는 일본열도라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구요. 소지마립간 이전은 중국사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마한과 붙어있다는 것 같은 것이요.
저도 마치겠습니다. 다만 바로 앞 코맨드에 이어서 조금 잇겠습니다. 문무왕 이후의 중국사서는 바다건너 있다고 나옵니다. 고려 조선때도 그렇고요. 하~~ 코맨드 꽤길다 60이 넘었네
"왜인은 대방군 동남쪽 큰 바다 속에 있으며..." "왜로 가는 데에는 해안을 따라..(중략)..한국(韓國)을 지나서...(중략)... 왜의 『북쪽 해안』에 있는 구사한국에 이르게 된다."-삼국지 왜인전. 거기다가 지형을 소개할 때 "바다를 건너'라는 표현이 제가 찾은 것만 5차례나 나오네요. 마한전의
접(接)해 있다는 애매하고도 추상적이고 단편적인 기록만을 내세우시지 말으셨으면 합니다.
어쨋든간 끝.. 좀더 연구해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