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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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경에 일어나니 입천장의 붓기는 그대로지만 신열이 가라앉고 컨디션이 한결 가벼워졌다. 커튼을 걷고 창밖을 굽어보니 비는 그치고 햇살이 옅은 구름을 비집고 나와 사방을 훤하게 하였다. 오른쪽에는 강물이 굽어 돌고 붉은 지붕에 미황색의 벽을 한 건물들이 나무가 서 있는 녹지에 멀리 지평선까지 여기저기 원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검푸른 파도가 허연 포말을 일으키며 태평양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연안 바다를 청색 물감으로 그려낸 가로로 기다란 유화이었다. 화가의 마음에 담아진 베트남의 바다가 이방의 여행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것은 수평선 너머에서 간단없이 닥쳐오는 외세와 항쟁해 온 베트남 민족의 역사를 표현한 그림 언어이었다.
계란 후라이와 몇 그릇의 쌀죽으로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서 캐리어를 들고 로비로 내려와 사람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백색의 버스에 오르며 베트남인 가이드 흥(hùng 雄)과 버스 기사 썬(sơn 山)에게 “씬 짜오(Xin chào)!”라고 하며 인사를 건넸다. 다낭의 국립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흥은 눈썹이 진하고 웃을 때 보조개가 생기는 순수하고 인정스러운 청년이었다. 물어보니 틱낫한 스님을 알고, 여자 의사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가 매복한 미군에게 희생된 당 투이 쩜의 참전 일기를 읽었다고 하였다. 썬은 광대뼈가 나오고 검은 피부에 무뚝뚝한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인사를 건네자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답하는 정말 순박한 사람이었다.
운전석 옆의 유리창 밑에는 황토색 작은 향로와 함께 5개의 귀여운 인형과 2개의 백옥으로 된 포대 화상이 놓여 있고, 운전기사의 머리맡에는 불상 사진을 코팅한 것이 달려 있다. 그것은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베트남인의 현세구복(現世求福) 신앙을 잘 보여주었다. 인도를 여행할 때 버스 기사가 하루 운행을 시작하며 힌두교의 신에게 향을 사르며 안전 운행을 기원하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인형들은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르고 오른손에 하늘 복숭아를 들고 왼손에 굵은 지팡이를 짚은 신선과 그 좌우에 2명씩 붉은 관모를 쓴 관리들이 놓여 있다. 그들은 손에 저마다 붉은 지갑, 갓난아이, 금괴, 여의자(如意子)를 들고 있었다. 인간에게 장수, 재물, 자손 번창, 소원성취의 복을 주는 천부(天府)의 신선들이다.
불룩한 배를 들어내고 앉아 복스러운 얼굴에 웃음을 짓는 포대(布袋) 화상은 불교의 산타할아버지이다. 그는 당나라 말에서 오대 시기에 살았던 계차(契此, ?~917) 스님이다. 늘 자루에 보시받은 물건을 담아 둘러메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산서성 여행 때 오대산의 사찰 거리에서 ‘살아있는 포대 화상’을 만나기도 하였다. 포대 화상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불의 화신으로, 일본에서는 칠복신(七福神)으로 신앙되고 있다. 어린 날, 고향마을의 장터에 있는 상점의 간판에 두 개의 술통 위에 앉아 왼손에 술 자루, 오른손에 부자 방망이를 들고 앉은 복 영감이 그려진 금복주(金福珠) 상표가 있었다. 내가 태어난 해에 팔공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탄생한 대구·경북 지방의 소주, 금복주의 로고 광고가 ‘참소주’에서 복고 되어 근래에는 반갑게도 수도권에서도 볼 수가 있었다. 복덕과 지혜가 원만한 부처님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고, 불자의 오계(五戒)에도 ‘금주(禁酒)’가 들어 있는데, 금복주를 마시면 정말로 황금과 복과 여의주를 얻을 수가 있을까? 금복주 회사는 포대 화상에게 초상권 사용료와 광고 출연료를 지불했을까? 계차 스님이 남긴 게송이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실려 있다. “我有一布袋 나에게 포대 하나가 있으니 虛空無罣碍 허공처럼 걸림이 없어라. 展開遍宇宙 열어 펴면 우주에 두루하고 入時觀自在 오므릴 때도 자재하도다. 彌勒眞彌勒 미륵불 중에도 참된 미륵불 分身百千億 백천억 가지로 몸을 나누어 時時示時人 때때로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도 時人自不識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보지 못하네.”
버스가 남쪽으로 달리고 동허이(東海)의 더 넓은 녓 레 강을 건너갈 때 강 위에 사각형으로 쳐져있는 그물이 보였다. 어제 바닷가 포구(浦口)에서도 보았던 그물이다. 그물을 물 아래로 잠궜다가 건져 올려서 물고기를 잡는 것이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탐욕과 성냄의 그물에 걸려들어 윤회전생(輪迴轉生)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괴로움을 당하는 중생을 어여삐 여겨 부처님은 설법을 하셨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수행자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반야심경은 말한다. “보리살타는 일체가 공한 줄 아는 반야지혜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는 까닭에 공포가 없고 전도몽상의 어리석음을 멀리 여의느니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도로의 좌우에는 모가 자라는 녹색의 싱그러운 들판이 펼쳐져 있고 가끔 농을 쓴 한두 명의 농부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해안사구(海岸沙丘)가 발달한 곳에는 고압 전기 철탑이 열 지어 서 있고, 바닷바람에 풍력발전기의 커다란 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도로 가운데의 분리대에는 금성홍기와 호치민 사진이 들어간 깃발이 시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알리고 있었다. 길가에는 학교, 구멍가게, 관공서, 오토바이를 팔고 수리하는 점포, 불상을 조각하는 석물 공장, 향을 피운 제단과 무덤, 바나나와 옥수수가 자라는 밭, 서쪽 안남 (安南) 산맥에서 발원하는 수량이 풍부한 크고 작은 하천이 차창 밖으로 스쳐 갔다.
응우옌 씨는 북쪽의 찐씨(鄭氏)에 대항해 1630년과 1631년에 쯔엉 죽 루(長育壘)와 동 허이 루(東海壘)를 녓 레 강의 지류와 본류를 따라 쌓아서 북방 경계를 강화했다. 동 허이 루는 높이가 6미터, 길이가 12킬로미터나 되는 방벽으로 남북분단의 상징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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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동허이에서 100킬로미터를 남하하여 동호(Dong Ho)에 온 버스가 동쪽의 바닷가 쪽으로 접어들었다. 꽝찌성(廣治省) 빈린현(縣) 압정사(社) 빈목(詠木) 지역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남북 베트남을 분단하는 북위 17도 선의 비무장지대에 있는 빈목(Vinh Moc) 마을의 터널 유적에 온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내렸다. 휴게실 앞에서 미리샘에게 감기와 다리부상으로 몸이 불편한 내 사정을 말하면서 어제저녁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어색함을 해소하였다.
전시관으로 가는 길은 대나무들이 무리 지어 자라나 그늘을 이루고, 댓잎은 비를 맞아 한층 운치가 돌았다.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아침의 대숲 길을 우산을 쓰고 걸어 들어갔다. 전시관에서 유물들과 안내문을 보며 베트남인의 영어 설명을 가이드 윤 실장의 통역으로 들었다. 전시관 초입에 미군의 폭격과 헬기의 공격으로 화염이 치솟고, 그에 맞선 베트남 전사들이 대공 사격을 하며, 어린이와 노약자가 지하 터널에서 공포에 떨고, 의사가 진료를 하며, 전사들이 밀림에서 지도를 펴고 작전 회의를 하는 장면의 놋쇠 부조가 붙어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초가들이 빼곡하게 모여있는 평화로운 빈목 마을 하늘에 미국 공군의 폭격기들이 선회하며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에는 불꽃이 솟고 순식간에 불바다가 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실제 폭탄의 탄피를 그림 위의 천정에 매달아 놓았다. 잿더미가 된 마을 사진 옆에는 주민 호앙 진 콘(Hoang Dinh Con) 씨가 미국의 폭격으로 죽은 아내와 다섯 아들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고 있는 모습의 흑백 사진이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슬픔에 젖게 하였다. 그 한 장의 사진 앞에서 제국주의 미국의 탐욕과 잔인함에 공분하지 않고, 전쟁의 참극을 알지 못하고 평화를 말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서 독립을 하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 베트남 민족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시켰다. 듣자니, 베트남에 여행왔던 어느 중년 부인이 가이드의 설명에 베트남의 국부, 베트남 인민이 친근하게 ‘호 아저씨’라고 불렀던 호치민(胡志明)이 공산당의 우두머리이었다며 화를 내고 그를 비난하였다고 한다.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당대의 역사를 모르면 우리는 늘 거대한 무지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조작한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미국은 제네바협정 이후 설치된 북위 17도선 비무장지대 이북의 북베트남으로 지상군은 투입하지 않았다. 미국이 베트콩으로 부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는 인력과 물자를 보급하는 베트남 서부의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경유하는 호치민루트와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는 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비무장지대 부근을 중심으로 공군이 폭격을 하였다. 베트남 전쟁에 미군이 투하한 폭탄은 무려 1천500만 톤이었다. 비무장지대의 해안에 자리한 빈목 마을은 집중적인 폭격을 받아 초토화가 되고 숱한 마을 사람들이 죽었다.
미국의 폭격에 정부는 도시에서 시골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농촌에서도 방공호를 건설하도록 하였다. 5만 킬로미터 이상의 참호와 터널, 2천만 개의 방공호가 건설되었지만 1백만 명 넘는 베트남인들이 전쟁 동안에 죽었다.
잿더미가 된 마을 사진에 붙은 글을 읽어 보았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침략자들은 모든 종류의 폭탄 66만8천806 톤을 이 지역에 투하하였다. 평균하여 빈목 마을 주민 1인당 7 톤의 폭탄과 10발의 포탄이 떨어져 5천117 명의 사람들이 죽고, 4천200 명의 사람들이 부상당했으며, 1만5천656 채의 지붕이 불에 타고, 113곳의 학교와 병원 시설이 파괴되는 고통을 당했다. (From 1964 to 1972, American invaders dropped more than half a million tons of bombs of all kinds(668,876 tons); on average, each person in this area suffers from 7 tons of boms and 10 cannons 5,117 people were killed 4,200 were injured, more than 15,656 roofs were burned; 113 educational and health facilities were destroyed.)”
지옥을 방불케 하는 폭격을 피하여 주민들은 생존을 위하여 땅 밑으로 굴을 파고 들어갔다. 속옷만 걸친 근육질의 청년이 석회암 지대의 땅을 정을 들고 망치질하며 굴을 파는 사진 옆에는 곡괭이와 삽과 쇠스랑과 나무 손잡이와 외바퀴가 달린 손수레가 전시되어 있었다. 터널을 파는 모습의 사진 옆에는 설명문이 있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빈린(Vinh Linh) 지역의 군대와 인민들은 원시적이고 손으로 만든 도구로만 114개의 크고 작은 터널을 팠고, 91,840개의 지하실과 2,098,000 미터의 순환 땅굴은 총 부피 3,759,270 3제곱미터의 암석과 토양으로 7,518,540일의 작업량에 해당한다.(From 1965 to 1968, only with primitive and handmade tools, the army and the people of Vinh Linh dug 114 big and small tunnels; 91,840 basements; 2098,000m circulation trench with a total volume of 3,759,270m3 of rock and soil, equivalent to 7,518,540 workdays.)”
폭격기를 향하여 군인들이 일제히 사격하는 사진 앞에는 대공(對空)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고, 관유샘은 그 무기를 조준하여 보기도 하였다. 땅굴 밑에 살면서 사용한 사기 밥그릇, 불을 밝히던 램프, 베트남어로 인쇄된 낡은 신문에 찍힌 60대 초반의 나이로 보이는 호치민 사진, 금성홍기와 망치와 낫이 붙은 공산당 깃발, 반지하 대장간에서 담금질한 쇠를 두들겨 무기를 만드는 장면, 간호사들이 요람에 눕힌 갓난아이들을 돌보고, 교사들이 어린이들을 이끄는 사진, 트렌지스터 라디오, 낡은 소총과 기관총 등을 볼 수 있었다. 여자 병사들이 관유샘이 조정해보는 것과 같은 기관총을 조준하는 사진 옆에 붙은 안내문은 다음과 같았다.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빈린 지역의 군과 인민은 육군 주력 부대와 연합하여 293대의 미국 비행기(B52 폭격기 7대 포함)를 격추하고 69대의 미국 및 공화국 베트남 군함과 레이더를 침몰시켰으며, 빈린 지역은 ‘빈린 영웅’ 칭호를 수여 받았고, 21개 부대와 15명의 개인이 군대의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2개 부대는 두 번째로 표창), 691개의 메달과 다른 형태의 포상을 받았다.(From1965 to 1972, Vinh Linh army and people joined forces with the main army units to shoot down 293 American planes (including 7 B52S); submerge and fire 69 American and Republic Vietnam warships and raders; Vinh Linh area was awarded the title of Vinh Linh Hero; 21 units and 15 individuals were honored with the hero of the armed forces (2 units were commended in the second time); was awarded 691 medals of all kinds and other forms of reward.)”
여기를 방문한 호주인 관광객은 방문록에 “빈목 터널은 기술적으로 가장 위대한 20세기 건축의 하나이고 인간 생존 투쟁의 가장 찬란한 승리의 하나이다.”라고 적었다. 전시관에서 나오며 나는 방문록에 “베트남 민족의 강인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2024년 1월 24일 계림역사기행”이라고 썼다. 전시관 입구의 정면 부조 위에는 베트남어 “Tốn tại hay không tốn tại”와 영어 “To be or not to be”라는 글귀가 붙어있었다. 미국의 폭격으로 생존의 기로에 선 빈 목 마을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보여주는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3막 1절에 나오는 햄릿의 독백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이 빈목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결사 항전한 베트남 민족의 영웅적인 헌신을 너무나도 잘 대변하였다. 베트남 민족은 100년 동안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지 노예로 살았고, 2차대전 뒤에 프랑스와 전쟁을 하여 그들을 항복시켰으며, 다시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처절한 전쟁을 하여 물리치고 통일을 달성하지 않았던가!
“존재냐, 비존재냐-그것이 문제다.
억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에 참는 것이 고귀한 일인가,
만난의 바다에 팔을 걷어붙이고
저항하여 끝내는 것이 고귀한 일인가?
죽음은 자는 것, 그뿐이다. 잠으로써
육체가 이어받는 아픔과 온갖 병을
끝낸다 할진대, 이는 진정 희구할
행복한 결말이다. 죽음은 잠자는 것.
잠은 혹시 꿈꾸는 것. 오, 문제는 그것.
썩을 몸을 벗은 후에 죽음의 잠에
찾아올 꿈에 망설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토록 기나긴 인생을
고난의 연속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그 누가 참겠는가? 세상의 채찍과 모멸,
압제자의 횡포, 거만한 자의 거드름,
멸시받은 사랑의 아픔, 느려터진 법의 걸음,
관리들의 오만함, 인내하는 선한 자가
못난 자로부터 당하는 천대를?
작은 칼로 간단히 자신의 종말을
지을 수 있거늘.-누가 짐 지고
지친 삶에 신음하며 땀 흘릴 터인가?
죽음 뒤에 찾아올 그 무엇의 두려움,
미지의 그 나라, 그 지역에서
돌아온 길손 없어 의지를 교란하니
알지 못할 불행으로 달려가기보다는
차라리 당장의 불행을 참지 않는가?
이리하여 분별이란 물건은 모두를
겁쟁이로 만드나니, 결단의 붉은 빛은
창백한 사색의 우울로 뒤덮이고
심각하고 중대한 결단의 계획들은
이런 생각 때문에 물길을 돌려
행동의 이름을 잃고 만다.-잠잠하라.
어여쁜 오필리아다.-선녀님, 기도 중에
내 모든 죄도 기억하시오.”
-이상섭 옮김, <<햄릿>> 3막 1절
전시관을 나와서 가까운 남쪽에 있는 지하 터널의 13개의 입구 중 5번 입구로 들어갔다. 터널은 3층에 걸쳐 만들어졌다. 좁고 천정이 낮은 땅굴 속의 계단을 내려가는데 키가 큰 관유샘이나 계림샘은 허리를 숙이고 다니느라 힘들어하였다. 전기 조명이 있지만 굴 안은 습기가 차고 물방울이 스며 나오며 바닥에는 물이 개울처럼 흘러내리기도 하였다. 좁아서 몸을 돌리기에도 갑갑하였다. 통로 좌우로 가족이 사는 좁은 방, 지하수가 고여있는 우물, 분만실, 회의 공간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지하 터널의 내부에는 4년에 걸쳐 600명이 살았고, 우물과 부엌, 6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집회장과 기타 생활 공간이 되는 방을 만들었다. 터널 속에서 17명 이상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상상만 하여도 답답한 굴속을 돌아 겨우 바닷가로 뚫린 10번 입구로 나왔다. 구름이 낮게 드리운 흐린 날씨지만 천지가 훤하였다. 회색의 거센 파도가 몰려오는 태평양 바다가 그렇게 광활할 수가 없었다. 해안 언덕에 피어나 있는 흰도깨비바늘꽃이 너무나도 반갑고 소중하게 보였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베트남 민족의 인내와 투쟁에 진실로 경의를 바칠 수밖에 없었다.
3
터널에서 돌아 나오니 서양인 관광객을 실은 버스가 들어왔다. 도로 가에는 염전으로 짐작되는 평야와 망고나무 과수원이 있었다. 첫날 갔던 벤하이강 위에 놓인 히엔 롱 나무다리와 추모탑이 창밖으로 보였다. 모가 자라고 흰 해오라기가 먹이를 사냥하는 푸른 해안평야가 있고 물이 고인 웅덩이에는 오리 떼가 평화로이 헤엄쳤다. 금성홍기가 펄럭이는 국기 게양대가 나열되어 있고 석상이 서 있는 광장이 있는 시가를 스쳐 버스는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셨다는 라방(La Vang) 성당을 향하여 남쪽으로 달렸다.
버스에서 내려 라방 성당의 경내로 들어갔다. 울타리 담장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에는 분홍빛 부겐벨리아꽃이 우리나라의 배롱나무꽃처럼 신선하게 피어나 여행객들을 살뜰하게 맞아 주었다. 드넓은 경내의 북서쪽에는 연못이 있고 옆의 나무 아래에 성모상이 있었다. 경내의 중심에는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앞부분만 겨우 남은 붉은 벽돌의 옛 성당 건물이 검은 이끼가 낀 채로 서 있었다. 그 동쪽에는 계단 위에 인공으로 만든 세 개의 반얀나무 밑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다. 신부님의 인솔로 우리나라에서 순례 온 한 무리의 천주교인들이 그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반가워서 어디에서 오셨는지 물으니, 원주의 흥업성당에서 오셨다고 한다.
국민학교 때 전교생이 소풍을 갔던 내 고향의 구룡산(九龍山) 꼭대기에는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형성한 교우촌과 1921년에 시공하여 1933년에 준공한 한옥 성당(공소)이 지금도 있다. 구룡 교우촌에는 1885년부터 1986년까지 평균 50명의 신자가 있었다.
한편, 흥업성당 관할 교구에는 뮈텔(Mutel, 1854-1933) 주교가 1900년대 초에 창건한 한옥 건물인 대안리 공소가 있는데, 근대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프랑스 출신의 뮈텔은 조선에 파송되어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로마 가톨릭교회 선교사이고, 친일 행위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1881년 조선에 와서 선교에 힘썼고, 1885년 파리 대학 학장이 되어 돌아갔다가, 1890년 제8대 조선 교구장이 되어 다시 조선에 왔다. 조선 가톨릭 교회의 확립을 위해 힘썼으며, 신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한문에 능하였고, 순교자의 공적을 조사하였으며, 가톨릭교회의 자료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06년 경향신문을 발간하였고,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뮈텔 주교는 대한성공회와도 관련이 있는데, 성공회신문에 실린 뮈텔 주교의 글에 따르면, 한국에 오는 배에서 대한성공회 3대 교구장인 마크 트롤로프 주교를 만났다고 한다.
뮈텔은 조선인들에 대해 차별적인 우월의식이 있었으며, 동양의 미개한 지역에 와서 봉사한다고 생각해 조선인 성직자마저 동역자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항일 의병들을 약탈자와 산적에 비유하고,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을 퇴학시키는 등 조선인 신자들의 독립운동 등 현실 참여를 봉쇄하였다. 오직 신앙만을 강조했으나 정작 자국의 국가적 위기인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다르게 행동했다고 한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거사를 수행할 당시, 뮈텔은 안중근을 일방적으로 출교하고 그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계를 전면 부정하였으며, 처형을 앞두고 종부성사를 위해 프랑스인 사제를 보내달라는 안중근과 그 가족의 요청을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안중근을 찾아가 종부성사를 집행한 프랑스 선교사 니콜라 조세프 마리 빌렘을 징계하는 등의 행각을 벌인 사실이 그의 일기를 통해 밝혀졌다. 뮈텔은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신부가 교구장에 임명된 소식을 접한 1890년 8월 4일부터 지병으로 선종(1933년 1월 23일)하기 직전인 1933년 1월 14일까지 약 42년 5개월 동안 그 자신의 개인사와 교회 활동 및 선교사들의 업무보고 내용, 동학, 의병, 3·1운동 등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 외교, 사회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관심사를 기록한 <<뮈텔주교일기>>의 필사본이 파리외방선교회에 소장되어 있다가 최석우 신부의 역주로 최근에 출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반얀나무 아래에 모셔진 성모상 입구의 양쪽에는 날개가 달린 맨발의 두 천사가 합장하고 한쪽 다리를 꿇고 있고, 화분들이 성모상 아래에 올려져 있었다. 또 촛불이 켜져 있고 향로에는 많은 향이 타고 있었다. 베트남 신자들이 성모 마리아를 둘러싸고 앉아서 뭔가를 읊조리며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베트남인의 얼굴을 한 성모상을 관세음보살상으로 바꾼다면 여느 사찰에 온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만큼 가톨릭이 베트남 문화에 적응한 것이다. 파괴된 옛 성당의 벽에 붙여놓은 동판에 성모 마리아가 출현한 사연이 주출(鑄出)되어 있었다.
<라방의 우리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신 이야기>
까잉 팅 꾸앙 똰(景盛 光纘 1792-1802) 황제의 박해 시기, 1798년 8월 17일에 가톨릭 금지령이 발표되었을 때 가톨릭교도들은 피난처를 찾아야 하였다. 꽝찌(廣治) 지방 딘 캣 지역의 가톨릭 주민들은 라방의 숲속에 피난처를 마련했다. 박해를 받는 기간 동안, 고통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 질병을 앓았다. 밤마다 신자들은 그들의 고통을 구해주도록 100년이 넘은 반얀나무 밑에 모여서 묵주 기도를 드리며 성모에게 간청하였다. 평소처럼 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 밤, 성모가 두 천사를 데리고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서 달빛 같은 후광 속에서 그들에게 나타났다.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기꺼이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겠다고 하였다. 성모는 "나는 그대들의 기도에 응답하였다. 앞으로 이곳에 와서 나에게 간구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겠다."라고 말하였다.
이 일은 100년이 넘은 반얀나무 근처의 풀밭에서 일어났고, 신자들은 묵주(默珠) 기도를 올리기 위하여 그곳에 모였었다.
불행한 처지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돕기 위해 우리의 성모님은 몇 차례 더 나타나셨다. 그날 이후 라방의 우리 성모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이곳에 기도하러 온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The Story Apparition Our Lady of La Vang> During the persecutions under the reign of Emperor Cánh Thinh(1792-1802), Catholics were obliged to seek refuge when an anti-Catholic edict was declared nationwide on August 17th, 1798./ A number of Catholic inhabitants of Dinh Cat, Quang Tri Province, took refuge in La Vang forest. During the time of hinding, in their utter misery, many were struck with different diseases without medication. Every night, they gathered together at the foot of a century-old banyan tree to pray the rosary, imploing our Lady to rescue them from their distress./ One night, while they were praying unusal, suddenly our Lady appeared to them together with two angels at her sides, radiant with halos of tender looks, holding her infant Jesus in her arms, consoling them, encoraging them to suffer willingly for God’s sake and to keep their diseases. She said, “I have answered your prayers. From now on, I will fulfil the entreaties of those who come here to implore me.”/ This incident happened at the grass covering, near the foot of the centuary-old banyan tree, where the faithful gathered to pray the Rosary./ Our Lady appeared several more times to support and console people in their misfortune. Indeed from that day on, our Lady of La Vang has worked many miracles and bestowed favors upon those who come here to pray to Her.)
경내의 가운데에 있는 옛 성당의 잔해 남쪽에 광장이 있고 그 끝에 하늘색 기와를 올린 백색의 웅장한 성당이 보였다. 궁전보다 더 웅대한 성당의 건축 양식은 우리나라의 한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입구에 있는 도면의 그림을 보니 건물의 이름이 “Vúơng王 Cung宮 Thánh聖 Đúớng道”이었다. 3층 지붕의 정방형 본당이 뒤쪽에 있고, 그 앞에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일(一)자형 문루가 있는데 지붕이 3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용마루에 십자가가 올려져 있으며 큰 중문과 그 좌우에 2개씩의 작은 문이 있었다. 본당의 동서쪽에 문이 있고 남쪽에는 높은 지붕의 문이 붙어있다. 베트남의 가톨릭 교단과 정부가 협력하여 새로 조성한 성모 출현 기념 성당으로 보였다.
성모상을 보고 돌아 나오는데 붉은 벽돌로 지은 옛 성당의 높은 종탑에 달린 스피커에서 전자음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호흡에 집중하여 마음챙김을 하며 성모 출현 성지를 걷고 있던 내 마음에 그 종소리는 그레고리안 챈팅처럼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 마치 유럽의 어느 유서 깊은 성당의 뜰을 수도사가 되어 홀로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후에의 천모사(天姥寺)를 둘러보고 나와 가톨릭 신자인 미리샘에게 어제 그 종소리가 성당에서 쓰는 무슨 음악인지 물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강생과 잉태를 알려준 일을 기념하고 성모를 공경하는 뜻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아침 6시·정오·저녁 6시, 하루 3번의 ‘삼종 기도(三鐘祈禱 Angelus) ’를 올리는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이었다고 하였다.
반얀나무 밑의 성모상 맞은편에는 나무 그늘 밑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여러 개의 성모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중에는 앙코르와트의 압살라를 닮은 옷을 입은 성모와 농을 쓰고 아오자이를 입은 성모도 보였다. 전자의 옷은 중부 이남의 베트남에 오랫동안 존속하였던 힌두교 문화를 받아들인 참파국(占婆國) 문화의 복식이었다. 받침대에 ‘아베 마리아(Ave Maria)’라고 새겨 놓은 성모상도 있었다. 어느 테너 가수의 웅장한 목소리로 나의 뇌리에 박혀 있는 “아베~ 마- 리~ 아~”라는 노래 구절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의미는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여행기를 쓰는 지금 찾아보니, 천주교 신자가 아닌 나에게도 그 의미가 심장하다. 여행은 여행기를 쓰고서야 비로소 완성되고, 그로부터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는가 보다.
“문자적으로는 '안녕하십니까? 마리아여!'(Hail Mary)란 뜻이다. 수태한 마리아를 방문한 천사의 문안 인사(눅1:28)와 수태한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한 인사(눅1:42)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원래 6~7세기 가톨릭교회의 기도문 가운데 하나였는데, 10세기경에 곡을 붙여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고 찬미하는 성가곡으로 사용되었다. '성모송'이라고도 한다.
"은혜가 충만한 성모 마리아여! 주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나이다. 그대는 여인들 중에 복이 있으며 그대의 태의 열매, 예수도 복이 있나이다. 거룩하신 마리아여! 하느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여! 이제 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소서(빌어주소서). 아멘."
하지만 성모를 신앙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개혁(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베 마리아(Ave Maria, Hail Mary)>
성모 신앙의 현장에서 오래전부터 궁금하던 것이 떠올랐다. 가톨릭에서 종교개혁을 한 개신 기독교에는 일절 성모 신앙이 없고, 성상 숭배 문제로 로마교회가 동서로 분열되었다. 가톨릭에서 성모를 신앙하는 교리적 이유가 있는지를 다낭의 핑크성당에서 미리샘에게 물으니 성모는 불교의 관세음보살처럼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였다. 법정 스님이 백석 시인이 사랑한 자야, 길상화(吉祥華) 김영한 보살에게 보시받은 길상사가 산문을 여는 법회에 김수환 추기경님이 오셔서 축복 강론을 하셨고, 절 마당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상은 천주교인 조각가 최종태 교수가 법정 스님의 뜻을 받들어 성모상과 닮게 조각하였다.
325년 니케아공의회(公議會)에서 기독교의 정통신조로 공인한 삼위일체(trinitas, 三位一體) 교리에서 성모에 대한 신앙의 이유를 찾을 수는 없지만, 기독교인들이 천상의 신을 ‘하나님 아버지(聖父)’라고 하듯이 예수(聖子)를 잉태하고 낳은 마리아를 성모(聖母)로 신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성모 신앙은 서양인들의 어머니에 대한 효도이고,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숭배하고 신앙하였던 ‘어머니 대지(大地)’의 여신이 기독교 속에서 변용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겨레가 가장 많이 읽은 경전이 부모은중경인데, 어머니의 은혜를 부처님이 설파하였다. 나는 어린 날 어머니가 암자에서 보시받아온 이 경전을 엄마로부터 건네받아 호롱불 밑에서 읽다가 눈물을 떨구었다. 정조가 총애한 번암 채제공 선생도 절에서 우연히 부모은중경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애틋한 효심으로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명복을 발원하는 사찰인 용주사에서 불교의 효경인 부모은중경을 단원 김홍도가 그린 그림을 넣어서 간행케 하였다. 그런데, 유교의 효경은 아버지에 대한 효도를 말한다. 부모의 자식 사랑(慈愛)과 은혜에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도가 있다. 틱낫한 스님이 출가하고, 열반한 절, 자효사(慈孝寺)의 이름은 유교와 불교의 효 사상이 융합되어 있다. 성부와 성모, 성자의 신성(神性)은 성령(聖靈)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내 주변의 기독교인과 대화하면, 샤먼이 신 내림하는 것처럼 기도를 하면 성령이 강림하여 응답한다고 한다. 기독교의 최고 경지는 접신이고, 기독교는 신의 계시와 신앙의 종교인가 보다. 불자인 나는 기독교의 본질은 기독, 예수의 가르침에 있다고 여긴다. 틱낫한 스님은 예수는 서방세계의 부처라고 말했다. 마음챙김(正念, Mindfulness) 수행은 부처님과 예수님의 숨결과 가르침이 내 마음에 살아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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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을 성모 출현 가톨릭 라방 성지를 둘러보고, 이제는 응우옌 왕조의 수도이고 궁궐이 있는 남쪽 후에(順化)로 버스는 달렸다. 1번 국도의 오른쪽에는 단선의 협궤 철로가 보이고, 헤드라이트를 켠 기관차가 수십 량의 화물칸을 매달고 힘차게 북쪽으로 달렸다.
후에의 오후 일정에는 궁궐과 내가 가보고 싶었던 뜨 히우 절(Chùa Từ Hieu)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가이드 두 분은 뜨 히우 절은 가보지 않았고 알지 못하였다. 버스에서 유창한 설명을 하느라 마이크를 내려놓지 못하는 가이드 윤 실장은 틱꽝득 스님은 알아도 틱낫한 스님은 누군지 몰랐다. 더구나, 평생 국내외 여행객을 인솔하신 관유샘도 옆자리에 앉은 계림샘과만 대화를 나누었다. 30여 년을 문화유산 안내를 하고 현장 강의를 하신 계림샘도 이번엔 바쁜 일로 답사자료집조차도 만들지 못하고, 목이 붓는 감기로 힘들어하며 말이 없었다. 나의 부탁으로 여행 코스에 들어갔지만, 일행은 아무도 틱낫한 스님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윤 실장에게 자청하여 뜨 히우 절에 대하여 설명을 하겠다고 하였다. 가이드 대신 여행객인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일행에게 설명을 한다는 것이 정말 부담스러웠다. 자칫하면 남에게 자기 자랑처럼 비추어져 밉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나는 장황하게 설명을 토해낸 윤 실장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뜨 히우 절은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볼 만한 문화유산은 없지만, 그 장소의 의미는 크다고 하며 운을 뗐다. 그리고 절의 창건 유래와 절 이름의 의미, 그리고 이 절에 16세에 출가하여 사미승 시절을 보내고, 96세의 연세에 법랍 80세로 이 절에서 열반한 틱낫한 스님의 생애를 말씀드렸다. 우리나라의 숭산 스님, 달라이 라마 성하,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 스님과 함께 세계 4대 ‘살아있는 부처’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틱낫한 스님의 출가 본사인 이 절에 가본 것은 참 의미 깊은 일이었다. 설명을 마치며 전 세계의 수백만 독자들에게 감명 깊게 읽힌 스님의 100여 권의 책 중에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의 한국어 번역본인 <<틱낫한 불교>>를 소개했다.
후에에 도착하여 왕궁 옆을 지나 비가 뿌리는 날씨의 흐엉강(香江)을 건너서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은 ‘KTV Restaurant, Coffee & Breakfast’이었다. 식당 이름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식당, 커피 및 아침 카페’로 읽혔다. 식당 앞에 버스가 서자, 주인이 마중 나와 우렁찬 우리말로 인사하며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쌀국수와 만두 튀김 말이, 삼겹살과 쌈장과 상추, 김치와 김국, 어묵 꼬치, 마늘과 고추와 베트남 소스 등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바깥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렸지만, 사흘 만에 신열이 내리고 입맛이 돌아온 나는 상추에 삼겹살을 싸서 배부르도록 먹었다. 주인 남자는 빛고을 광주에서 두 해 동안 고생하며 돈을 벌어와 한국인 관광객을 맞이하는 식당과 카페를 차렸다고 한다. 한국인 손님을 맞이하는 목소리에 신명이 깃들어 있었다. 해마다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내며 국운이 날로 융성해지는 베트남의 오늘을 실감하였다.
식당에서 나와서 흐엉강의 동쪽 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돌아 강변에 있는 동 바(Dong Ba) 재래시장으로 갔다. 아케이드가 있는 아주 큰 시장이었다. 손가방, 우산, 장난감 인형 등의 잡화를 파는 가게 옆에는 어릴 때 먹었고 지금도 술집에 가면 안주로 나오는 마카로니 뻥튀기 과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사지는 않았지만 입에 넣고 씹으면 파삭하고 부서지며 금방 녹아서 달콤하고 산뜻한 맛을 선사하는 추억 속의 과자를 보니 괜히 좋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스테인레스 다라이에 가득 담아놓고 파는 여러 종류의 젖갈, 유리병에 담은 절임, 액젖, 비닐봉지에 담은 양념 따위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팔고 있었다. 그 옆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매콤한 양념에 비벼먹는 국수와 바나나잎에 싼 밥을 먹고 있었다. 시장 바깥의 도로로 나오니 강황, 마늘, 양파 등의 양념거리를 파는 가게가 있고, 과일 가게에는 용과, 귤, 망고, 용안, 포도, 로즈애플, 수박, 키위, 사과, 망고스틴 등의 열대와 온대 과일이 싱싱한 빛깔과 생기를 머금은 채 팔리고 있었다. 가이드 윤 실장이 버스에서 용안이 몸에 정말 좋은 과일이라고 설명한 터라 서연샘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용안(龍眼)을 한 봉지 샀다. 아내와 나는 용안과 달리 내 체질에 좋은 바나나를 사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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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나와 흐엉강 강변의 도로를 서쪽으로 달려 황성(皇城)으로 갔다. 오전에 라방에서 후에 시내로 들어올 때부터 보았던 붉은 벽돌로 쌓은 긴 성벽과 넓은 폭의 해자가 있었다. 빗줄기가 잦아들지 않았다. 전동차를 타고 해자에 놓인 다리에 있는 문을 지나 황성의 정문으로 가는 넓은 도로에 내렸다. 그곳에서 아내는 비옷을 내어 입고, 나는 우산을 펼쳐 들었다. 해자를 따라 난 도로를 걸어 황성의 정문으로 갔다. 궁궐 앞의 길가에는 황궁에 설치했던 대형의 포 5문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는 가이드 베트남 아가씨 ‘영미’씨가 궁궐의 정문인 오문(午門) 앞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해 주었다.
어린 날, 옆집의 형이 월남에 파병됐다가 돌아왔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가서 지켜보는 가운데 월남에서 화물로 부친 박스를 열었고, 그 속에서 처음 보는 온갖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중에 큰누나가 그 형에게 사진을 얻어왔는데, 미니스커트를 입은 월남 아가씨들이 양산을 들고서 궁궐문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날은 50년 전에 보았던 그 흑백 사진 속의 궁궐문 앞에서 우리가 기념사진을 남겼다.
오문 앞에 파놓은 안쪽의 해자 가에 세운 담장과 문루(門樓)의 이중 지붕에는 황제 만이 쓸 수 있는 황색의 유약을 바른 기와가 올려져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 가이드 영미씨에게 건기인데 왜 이렇게 비가 날마다 내리는지를 물었더니, 지금은 우기라고 유창한 우리말로 대답했다. 영미씨의 표정이 정말 생기발랄하고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서 그런지 눈과 입가에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 내가 촬영하니 영미씨는 손으로 브이 자를 지으며 애교 만점의 표정을 지어주었다.
영미씨를 따라 오문의 문루로 올라갔다. 황금 장식을 붙인 보좌(寶座), 서수(瑞獸)나 용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황금빛 휘황한 인장들이 전시돼 있었다. 국가와 황실에서 사용한 황금 옥새들의 날인 주문(朱文), 제작연대, 용도를 베트남어와 영어로 설명해 놓았다. 촬영한 사진으로 안내문과 복제한 옥새들을 여행에서 돌아와 살펴보았다. 응우옌 왕조와 황실의 통치를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었다.
*封贈之寶: 銀, 자롱(嘉隆, Gia Long) 1년(1802), 공신 칭호 수여
*皇太子寶: 자롱(Gia Long) 15년(1816), 왕자 응우옌 푹 담(Phuc Dam, 뒤의 민망황제)를 황태자로 책봉
*治曆明時之寶: 자롱 연간(1802~1819)의 달력
*制誥之寶: 자롱(Gia Long) 통치기(1802~1820)에 훈계, 문무관에게 발급한 문서, 승진, 좌천, 조언의 조칙(詔勅)에 사용
*皇帝尊親之寶: 민망(明命) 황제 8년(1827) 10월, 황제, 황후 칭호 부여
*勅命之寶: 민망 8년(1827) 10월, 경사일 포상
*張慶公印: 은도금, 민망 11년(1830), 미엔(Mien Tong) 왕자(뒤의 Thieu Tri 紹治 황제) 칭호 부여
*皇太后寶: 민망 2년(1821), 민망 황제의 모후를 태후로 책봉
*欽文之璽: 민망 8년(1827), 학교 건축, 시험, 재능과 덕망을 갖춘 인재 발굴, 도서 준비, 도 서관 업무 등의 교육업무 처리 문서
*睿武之璽: 민망 8년(1827), 무기, 무장, 병사들에게 내리는 명령, 군대 운동회 공고, 무예 대 회, 군사 훈련 관계 주요 문서
*正后之寶: 민망 17년(1836)
*齊家之寶: 민망 19년(1838), 응우옌 황실 급료 지급 문서
*仁皇后之寶: 티우치(Thieu Tri 紹治) 1년(1841), 사당(廟)에 민망 황제의 황후 사후에 시호를 새긴 금책(金冊)과 함께 봉안.
*皇太后寶: 뜨득(Tu Duc 嗣德) 2년(1849), 팜 티 항(Pham Thi Hang) 부인을 황태후로 책봉
*慈裕太皇后之寶: 함 응이(Ham Nghi, 咸宜) 1년(1885), 뜨(Tu) 태후(뜨득 황제의 tu Duc 모 후)로 책봉
*保大辰翰: 바오다이(保大) 1년(1926), 황제가 붉은 먹으로 쓴 문서에 찍음
*端徽皇太后寶: 은도금, 바오다이 8년(1933), 모후를 황태후로 책봉
*皇后之寶: 은도금, 바오다이 9년(1934) 1월, 남풍(Nam Phung) 황후 결혼일
*輔天純皇后之寶: 은도금, 바오다이 10년(1935), 동칸(Dong Khanh) 사후에 올린 시호, 금책과 함께 사당(廟)에 봉안
*皇太子寶: 은도금, 바오다이 14년(1939), 바오 롱(Bao Long) 왕자에게 황태자 칭호 부여
1945년 3월 9일 밤, 일본군이 프랑스 식민정부를 전복한 쿠데타 이후 일본의 2차대전 패망으로 호치민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하는 구국군은 1945년 8월 19일 하노이에 무혈 입성했고, 후에에서는 8월 22일 청년단체가 시내를 장악하여 베트민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8월 25일에는 사이공에도 그 영향력이 미쳤다. 이를 베트남공산당은 8월 혁명이라고 부른다.
8월 25일 바오 다이 황제는 퇴위하고 8월 30일 권력의 상징인 옥새와 황금 보도(寶刀)를 인도차이나 공산당 대표에게 넘겨주었다. 응우옌 왕조 143년 역사가 끝나고 천 년 동안의 왕조시대도 막을 내렸다. 문루에 전시된 사진들은 황제의 기마병 의장대, 황제의 가마 행렬, 옥새와 황금 보도를 인도차이나 공산당 대표에게 넘겨주는 장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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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영미씨에게 황성(皇城)의 모형 앞에서 설명을 들었다. 황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의 남쪽 바깥에 삼단의 기대(旗臺)가 있고, 오문의 북쪽에 태화전(太和殿)이 있으며, 태화전 앞에 좌우 액지(液池)가 있다. 태화전 뒤의 대궁문(大宮門) 안이 근정전(勤政殿), 건성전(乾成殿, 곤태전(坤泰殿) 등이 있는 궁성(宮城) 곧 자금성(紫禁城)이다. 흐엉강 북쪽 강가에 정방형의 도성(都城, 京城)이 있고, 경성(京城) 남쪽에 정방형의 황성이 있으며, 황성 안에 다시 궁성이 있다. 도성 바깥으로 운하를 파서 강물을 끌어들인 호성하가(護城河)가 있고, 경성과 황성에도 각기 해자가 있다.
황성의 동쪽 앞에 추존된 9대의 응우옌주(阮主) 위패를 봉안한 태묘(太廟)가 있고, 그 북쪽에 조조로 추존된 1대 완주 부친의 위패를 모신 조조묘(肇祖廟)가 있다. 응우옌 왕조의 첫 황제인 세조(世祖) 자롱(嘉隆) 황제와 5명 황제의 위패를 소목제(昭穆制)와 동당이실(同堂異室) 형식으로 봉안한 세조묘(世祖廟: 세묘)가 황성의 서쪽 전면에 있다.
다만 5대 공종 죽득제(恭宗 育德帝), 6대 히엡제(協和帝), 8대 함 응이帝), 10대 타잉 타이제(成泰帝) 제11대 쥐떤제(維新帝), 12대 카이 딩제(啓定帝), 13대 바오다이제(保大帝)는 신위가 모셔져 있지 않다. 5대는 공종묘(恭宗廟)에 신위가 모셔져 있다. 6대는 낭국공(朗国公)으로 폐위되었고, 8대는 프랑스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13대는 응우옌의 마지막 황제라서 신위가 모셔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제 2대 황제 밍망제가 세조의 부친을 추존하여 위패를 봉안한 흥조묘(興祖廟, 皇考廟)를 북쪽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세묘를 건립하였다.
좌묘우사(左廟右社), 동쪽의 종묘와 서쪽의 사직단을 생각한 우리는 사직단은 어디 있느냐며 영미의 설명에 의문을 표시하였다. 영미는 자신의 설명이 맞다고 강조하였지만 사직단이 왜 황성의 서쪽에 없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여행 뒤에 관련 논문을 찾아보고서야 의문이 풀렸다.
19세기 이전 베트남의 역사는 북거남진(北據南進)으로 요약될 수 있다. 기원전에 세워진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文郞, ?∼B.C.258?)과 어우 락(甌駱, B.C.257?∼B.C.208), 한(漢)이 베트남을 정복하고 세운 9군, 당(唐)의 안남도호부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하노이 일대를 그 거점으로 삼았다. 1천 년 이상 이어지던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응오(吳) 왕조(939∼968), 최초로 국호와 칭제, 그리고 개별 연호를 사용한 딘(丁) 왕조(968∼980), 띠엔 레(前黎) 왕조(980∼1009), 리(李) 왕조(1009∼1225), 쩐(陳) 왕조(1226∼1400), 호(胡) 왕조(1400∼1406)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하노이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남부 베트남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레(黎) 왕조(1428∼1789)는 1527년 막 당 중(莫登庸)의 찬탈로 멸망되었다가 회복되었지만, 찐주(鄭主)와 응우옌주(阮主)의 권력 싸움으로 인해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응우옌(阮主)의 지배지에서 일어난 떠이선조(西山朝)가 찐주(鄭主)와 응우옌주(阮主)를 무너뜨렸고, 그들에게 밀려난 응우옌주(阮主)는 베트남 남부의 자딘(嘉定, 호치민시 부근)으로 거점을 옮겨야만 하였다.
1792년 떠이선조(西山朝) 꽝쭝황제(光中皇帝)의 사후에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세력을 키운 응우옌주(阮主)의 후예인 응우옌 푹 아인(阮福暎)은, 1801년에는 응우옌주(阮主)의 고도였던 푸 쑤언(富春: 후에)을 수복하여 도성으로 삼고, 1802년에는 하노이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그는 같은 해에 연호를 자롱(嘉隆)으로 정했으며, 1803년에는 청(淸)으로부터 비엣남(越南)이라는 나라 이름을 받았다. 이후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침입으로 1860년대에 이미 독립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으며, 1880년대에는 완전히 주권을 빼앗겨 식민지화하였다가 1945년 8월 제13대 바오다이제(保大帝)가 퇴위하며 막을 내렸다. 후에(Hue, 順化) 일대가 본격적으로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찐주(鄭主)와 투쟁하던 응우옌주(阮主)가 후에 일대를 거점으로 삼으면서부터이다. 즉, 1대 응우옌주(阮主) 응우옌 호앙(阮潢)이 1558년 10월 후에의 북쪽인 아이 뜨(愛子)를 그들의 본거지로 삼았다가 다발(茶鉢)로 옮겼으며, 다시 아이뜨(愛子)의 동쪽으로 옮긴 후 갈영(葛營)이라 불렀다. 2대 응우옌 푹 응우옌(阮福源)은 갈영(葛營)에서 복안(福安)으로 옮겼으며, 3대 완복란(阮福瀾)은 1635년에 금룡(金龍)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후 5대 응우옌 푹 타이(阮福溱) 때인 1744년 푸 쑤언(富春: 후에)으로 옮긴 후, 8대 응우옌 푹 코앗(阮福濶) 때인 1754년에는 그 내부에 12영을 설치하고 도성(都城: 경성)으로 칭하였다.
풍수지리학의 논리에 따라 동남쪽의 어병산(御屛山)을 안산(案山)으로 삼았기 때문에 경성(도성)의 좌향은 정남향에서 동남향으로 바뀌었다. 경성(京城)은 둘레 10km, 높이 6m, 두께 21m이다. 프랑스의 전함, 무기, 축성법에 의존하여 떠이선 왕조를 격파하고 통일을 이룰 수가 있었기 때문에 경성의 외성은 보방(Vauban)식으로 쌓았다. 석성에 대포를 쏘면 파편이 튀기에 방어에 위험성이 크다. 그래서 포탄이 박히는 흙(벽돌)으로 축성하고, 별 모양으로 성벽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여 포탄이 빗나가게 하며, 접근하는 적을 고구려의 치성(雉城)처럼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성 앞에는 흐엉강이 천연 해자가 되고, 폭 40미터의 호성하(護城河)를 파서 동북쪽에서도 흐엉강이 경성을 디귿자 모양으로 감싸고 흐르도록 하였다.
호성하 안쪽에 폭 약 23미터의 해자를 파서 외성을 미음자 모양으로 에워쌓다. 외성 안의 황성 북쪽에 어하(御河)를 파서 배로 세곡(稅穀)을 경창(京倉)으로 수송하였다. 호성하의 동북쪽에 외성 해자와 호성하로 둘러싸여 섬처럼 된 곳에 자성(子城)인 진평대(鎭平臺)를 두어 흐엉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제국주의 국가의 군함을 방어하였다. 외성에는 24개소의 포대가 설치되었고, 황성에도 다시 너른 해자가 있다.
황성의 규모는 둘레 2.5km, 남북 634m, 동서 653m 정도가 된다. 응우옌 왕조의 적통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태묘를 황성의 좌우에 두었고, 황성 서쪽에 공간이 부족하여 고려나 조선과 마찬가지로 황성의 서쪽 바깥에 사직단을 두게 되었다. 좌묘우사의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셈이다. 당의 장안성이나 그를 모방한 발해 상경성, 일본의 헤이조쿄와 달리 궁성이 경성의 남쪽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6부의 관청은 황성의 동편에 두었다. 경성의 서북쪽에 선농단이 있고, 사직단 북쪽에 공종묘(恭宗廟)가 따로 있다.
-우성훈, <응우옌 왕조의 도성 Hue의 배치 특성에 관한 연구> <<건축사연구>> (제25권 1호, 통권 104호), 2016,
문묘(文廟)는 경성의 서쪽편에 있고, 흐엉강의 남쪽 교외에 남교단(南郊壇)이 있었다. 천연과 인공의 3중 해자는 응우옌 왕조의 시조인 응우옌 호앙이 하노이가 있는 훙강 델타에서 남하하여 후에(투언 호아)에 자리를 잡고 북쪽의 찐(鄭)씨 가문과, 하이번 관(海雲關, 꽝남) 남쪽의 참파국과 치열한 세력 싸움을 하고, 또 남북의 베트남을 통일하고 1802년 세조 자롱 황제가 응우옌 왕조를 창건한 뒤로도 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과 각 지역의 반란 세력을 얼마나 경계하였던가를 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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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듣고 모형을 촬영하고 돌아서는데, 영미를 따라가며 설명을 듣던 우리 일행이 종에 새겨져 있는 한자가 무엇인지를 나를 불러 물었다. 글자는 ‘明命 三年 四月 初六日…’이었다. 가이드 영미에게 학교에서 한자를 배웠는지를 물으니, 100자를 배웠다고 한다.
라틴어 알파벹으로 말을 표기하는 베트남 젊은 세대가 한자와 한문에 무지하기는 한글만을 배워서 제 이름도 한자로 쓰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와 다를 게 없었다. 궁궐에서 나와 갔던 뜨 히우 절(慈孝寺)의 일주문에는 ‘常樂我淨’의 ‘淨’자가 ‘靜’자로 되어 있고, 범종에도 ‘佛日增輝’의 ‘增’자를 ‘僧’자로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갔던 텐무사(天姥寺)의 징원(澄源) 스님 탑에는 손글씨 ‘之’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석공이 ‘山一’로 새겨 놓은 것을 보았다. 우리나라보다 심각한 현대 베트남 사람들의 ‘한자 문맹’을 잘 보여주었다.
서구인들이 고전 언어인 라틴어를 배우듯이 한자문화권의 동아시아 사람들은 한문을 배워야 한다. 한·중·일·월 네 나라의 말은 기본적으로 한자 어휘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자를 표음문자로만 표기하면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또한 한문을 배우지 않으면 표음문자를 쓰기 이전에 나온 고전이나 기록을 전혀 읽을 수가 없다. 동아시아 사람이 한문을 모르는 것은 자신의 뿌리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어휘의 요소가 되는 기본적인 한자라도 가르쳐야 한다. 옛사람들은 우주, 자연, 역사, 도덕을 망라하는, 125절 250구 1,000자로 이루어져 있는 위대한 서사시, 천자문(千字文)을 어릴 때 완전히 습득하였다. 선친은 어린 날 조부가 이틀 동안 붓으로 쓴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웠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어린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웅대한 정신세계가 유년기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국어책에 한자어휘는 괄호 속에 한자를 넣어 주면 어린이들은 한자를 바로 흡수한다. 신문에도 괄호 속에 한자를 넣어 주면 한자는 아주 쉽게 익힐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어문 교육정책이 국민을 ‘문맹’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일제에게 식민 지배를 당하여 민족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부정당하였다.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고, 전쟁까지 하여 겨레의 자아가 남북으로 분열된 오늘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남북한이 모두 민족사는 물론이고 한글과 함께 한문을 가르쳐야 한다. 수천 년 역사와 문화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영어와 미국 문화에 휩쓸려 영혼의 깊이가 없이 고작 케이팝과 케이드라마로 세계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 슬펐다.
오문 문루의 서쪽에는 북이, 동쪽에는 종이 걸려 있었다. 이들은 황제가 궁궐을 드나들 때 관현악단과 함께 울렸고, 종은 도성의 문을 여닫을 때도 쳤다. 종은 산처럼 볼록 솟은 윗면의 정상부에 용뉴가 있어서 고리에 걸려 있었다. 종 걸이에 걸려 있는 종의 높이는 1미터 남짓하며 지름은 60여 센티미터이고, 무게는 815.4 킬로그램이었다. 종의 하대(下帶)에는 3중의 띠가 둘러쳐져 있었다. 위에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무사가 창을 들고 적을 공격하는 12개의 인물상이 마치 신라왕릉의 12지 신상들처럼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었다. 그 자세가 모두 다르고 아주 생동감이 넘쳤다. 응우옌 왕조 시대의 무예를 보여주었다. 중간에는 당초(唐草) 문양이 화려하게 들어가 있고, 하단에는 구름 문양의 띠가 둘러쳐져 있었다. 하단 구름 문양의 띠에 앞뒤로 2개의 당좌(撞座)가 보였다. 상대에는 28수(宿)가 주출(鑄出) 되어 있었다. 동청룡(각·항·저·방·심·미·기), 남주작(정·귀·류·성·장·익·진), 서백호(규·루·위·묘·필·자·삼), 북현무(두·우·여·허·위·실·벽)에 각기 일곱 별자리가 돌아가며 들어 있었다.
사찰의 범종이나 한양 도성의 보신각종(普信閣鍾)은 성문을 여는 새벽에는 28번을, 성문을 닫는 밤에는 33번을 울린다. 33번을 치는 이유는 불교의 우주관에서 수미산 정상의 동서남북 사방에 천인들이 사는 각기 8개의 천성(天城)이 있고, 중앙에는 제석천(인드라신)이 사는 선견성(善見城)이 있는 33천(도리천)이 있기 때문이다. 28번을 울리는 까닭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천문학에서 설정한 28개의 성좌(星座)를 상징한다.
오래전에 불국사 덕민(德旻) 스님께 금강경오가해 강의를 들을 때, 절에서 스님들 간에 종을 28회 치는 이유를 두고 토론이 있었다고 하며, 28회는 주역의 하도·낙서에서 나온 숫자라고 말씀하셨다. 또 최근에 어떤 분은 중국 선종의 초조인 달마가 인도 선종의 초조인 마하가섭으로부터 28대의 조사가 되기 때문에 28회를 타종한다고 하였다. 33회를 치는 것은 삼일 독립만세 투쟁의 민족 대표 33인을 의미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민망 황제 3년(1823)에 주조한 그 종의 28수가 이러한 낭설을 내 마음속에서 깨끗이 지웠다.
상대와 하대의 가운데의 종의 몸통에 4개의 액자가 있고 그곳에 명조체(明朝體)의 해서로 종명(鐘銘)이 새겨져 있었다. 응우옌 왕조의 문화융성을 이루어 낸 민망 황제 즉위 3년에 한림원 장원(掌院)인 학사 황금환(黃金煥)이 편수하고 오세미(吳世美), 오덕(吳德)이 지은 문장이었다. 아내가 촬영해 온 종명을 여행에서 돌아와 읽어 보았다.
“옛적의 천자는 좌우에 종을 걸어서 그 소리를 밝혔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 즉위 3년에 처분과 조치를 백 가지로 하여 섬세하고 자세하게 하셨다. 이에 큰 종을 주조하도록 신하와 공장(工匠)에게 분부하셨으니, 글을 지어서 이 일을 기록한다.
가만히 생각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는 제도와 도구(器)에 깃드는데, 악기에서 빛난다. 그 소리는 금성(金聲: 쇠(金), 돌(石), 실(絲), 대죽(竹), 박(匏), 흙(土), 가죽(革), 나무(木)로 된 여덟 악기 중 쇠(金)로 된 악기의 소리)보다 쨍쨍한 것이 없고, 상음(商音: 궁·상·각·치·우, 오음(五音) 중 상조(商調)를 주음(主音)으로 하는 악성(樂聲))보다 맑은 것이 없다. 지금 큰 종은 곧 천지의 원음(元音)이 일어나는 곳이니, 조회(朝會)와 연회(宴會)와 제향(祭享)에 쓴다. 쟁쟁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임금이 나라를 통치하는 도를 생각하나니, 이를 위하여 종소리를 떨쳐 일어나게 하고,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사람들의 마음이 감화된다. 종은 황제의 덕을 기르게 하니 그 공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으며, 그 교화를 고무시키니 그 쓰임은 헤아릴 수가 없다. 성음(聖音; 국가에서 쓰는 음악)의 도는 정교(政敎)와 통하니 종을 울려서 태평성대를 드러내는 것이다.
명을 지어 말한다.
우리 황상 폐하가 통치에 힘쓰시니, 백번을 닦고 밝히시네.
종을 주조하여 설치하시니, 소리는 알맞고 규범은 적정하네.
막히지도 않고 사치하지도 않아서, 원음(元音)이 화창하게 울려 퍼지네.
그 소리 먼 곳에 드러나고 가까이에 밝아서, 함께 화평한 세상을 즐거워하네.
만 년 동안, 길이 그 성취를 보리라.
한림원장원 학사(翰林院掌院學士) 신(臣) 황금환(黃金煥) 원고를 닦고, 신(臣) 오세미(吳世美), 신(臣) 오덕(吳德)이 황제의 분부를 받들어 지었다.
종의 높이는 3척 9촌 1푼이고, 지름은 2척 3촌 1푼이며, 구리 무게는 1천3백5십9근이다.
시중위위관리무고(侍中衛尉管理武庫) 신(臣) 진등룡(陳登龍), 공부첨사(工部僉事) 참판무고(叅辦武庫) 신(臣) 진등의(陳登儀), 주장국정해관(鑄匠局正該官) 신(臣) 등문은(鄧文殷) 황제의 분부를 받들어 주조하였다.
민망(明命) 3년(1822) 4월 초6일 길시(吉時)에 주조함.”
①古者天子 左右設鐘 昭其聲也 我皇上卽位之三年 注措百爲 纖悉具擧 爰鑄洪鐘命臣工 爲文以記之 竊惟道寓於器 而徽於聲器 莫堅於金聲 莫淸於商 今大鐘乃元音之所自起 用之於朝會宴享 鏗鏗然 從聞生思治道 爲之振起 其大發越 將使人心感焉 涵泳其德 而莫②知其功 鼓舞其化 而莫測其用 益見聖音之道 與政化通 于以鳴太平之盛焉 臣謹拜手而獻 銘曰 我皇勵治 百度修明 鐘所由設 鈞中規程 不弇不侈 宣暢元聲 遠彰近亮 共樂和平 於萬斯年 永觀厥成 ③翰林院掌院學士 臣 黃金煥 編修 臣 吳世美 臣 吳德 奉撰 高參尺玖寸一分 徑貳尺參寸壹分 銅重壹千參 百五拾九觔 侍中衛尉管理武庫 臣 陳登龍 工部僉事 叅辦武庫 臣 陳登儀 鑄匠局正該官 臣 鄧文殷 奉鑄 ④明命三年四月初六日吉時 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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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의 문루에서 남쪽으로 보니 금성홍조기를 게양한 삼단의 게양대가 있고, 동서로는 큰 해자가 있으며, 북쪽으로 연못 가운데로 난 도로 끝에 황색의 기와를 올린 이층 지붕의 태화전(太和殿)이 보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황성은 자금성(紫禁城)을 모델로 지은 것으로 보였다. 태화전 뒤의 대궁문 안에 근정전이 있는 궁성이 자금성으로 불렸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동아시아인의 별자리에서 임금인 북극성 주변을 자미궁이라고 하고 그 담장을 자미원이라고 한 데서 비롯한다. 자금성의 ‘자(紫)’는 ‘자미(紫微)’, ‘금(禁)’은 임금이 사는 ‘금단(禁斷)’의 궁궐을 의미한다.
조선왕조 개국 뒤에 어떤 사람이 태조 이성계에게 천문도를 진상하였다. 그것은 고구려 평양성이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되며 대동강에 던져졌던 고구려 천문도 석판의 탁본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지 724년이 지나고 평양성과는 위도가 다르기 때문에 관상감에서 수정하여 돌에 다시 새기게 한 것이 오늘날 기적적으로 전해오고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이다.
나는 아이들이 어릴 때, 동서네와 함께 경주의 동악미술관(東岳美術館, 신라역사과학관)에서 이 천문도를 구해와 액자로 표구하여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실에 걸어두고 본다. 천문도에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사방의 28수를 포함하여 300여 개의 별자리가 베풀어져 있고, 서쪽에서 중앙을 거쳐 남쪽으로 흐르는 은하수가 푸르게 굽이친다.
한자문화권 사람들에게 북극성은 옥황상제이고, 그 주변은 임금이 사는 궁궐인 자미궁(紫微宮)이고, 자미원(紫微垣)의 별은 궁궐을 지키는 장수와 신하이다. 자미원에서 북두칠성 아래 봄철 별자리에 하늘나라 임금이 대신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는 정부청사인 태미원(太微垣)이 있다. 그 옆에는 백성이 사는 하늘나라의 도시인 천시원(天市垣)이 있다. 붙박이 별들(經星) 사이로 돌아다니는 별들(緯星)인 일·월·화·수·목·금·토 일곱 개의 별을 칠정, 칠요(七曜)라고 하는데, 칠정산(七政算)은 칠정의 운행을 계산하는 천체달력이다. 해가 다니는 길인 황도(黃道)가 태미원의 단문(端門, 午門; 태미원 남방 두 별의 사이) 부근을 지나고, 행성은 황도를 따라 움직이므로 칠정이 태미원을 드나드는 것처럼 보인다. 태미원에 있는 하늘 임금과 신하가 정책을 의논하여 명령을 내리면 해와 달과 5행성이 명령을 받아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제후인 28수에게 전한다.
오문에서 내려와 전동차를 타고 황성의 서쪽으로 갔다. 잔디가 깔린 너른 공간이 보이고, 가로수처럼 큰 나무들이 서 있었다. 네 겹의 기와지붕이 있고 모양이 개선문처럼 생긴 숭성문(崇成門) 안으로 들어가니 정원이 있고 정면에 황색 기와를 올린 이중 지붕의 세조묘(世廟)의 옆면이 보였다. 세조묘는 정면 13칸의 동서로 긴 건물인데 우리나라의 종묘(宗廟)와도 닮았고, 내부에는 붉은 칠을 한 기둥이 열 지어 있었다. 그 앞의 너른 마당에서 지금도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정원에는 굽고 늙은 소나무, 노랑 꽃이 핀 황매화, 나무와 화초, 풀밭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하여 사당 옆의 건물로 들어갔다. 영미씨는 민망 황제의 후궁이 백 명이 넘는데 황제가 밤마다 그들을 상대하느라 민망하게도 코피를 흘리고 힘이 빠져 죽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국인 관광객들을 재미있게 하느라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가이드 중에서 제일 코믹하다고 소문이 난 영미씨의 ‘허무 개그’는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먹고 마시고 보고 웃고 즐기는 관광을 하는 한국인이 만든 것이었다.
다시 전동차에 나누어 타고 일행은 황성을 에워싸는 해자의 안쪽 도로를 달려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후문으로 나왔다. 중국의 자금성 만큼이나 넓지만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는 황성을 1시간도 보지 못하고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고 나왔다. 흐엉강의 서쪽 다리를 건너서 내가 가보고 싶었던 뜨 히우 사원으로 향했다. 흐엉강의 폭은 넓고 수량은 풍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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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의 강남에 있는 뜨 히우 사원은 도성의 서남쪽 5킬로 지점에 있다. 절의 일주문이 있는 도로 가에 버스가 섰다. 문 안으로 난 숲속 길을 걸어서 들어갔다. 오른쪽 야트막하여 언덕처럼 보이는 산 위의 솔숲에 3층의 전탑이 서 있었다. 그것은 황태후가 시주하여 1896년에 경전과 불상을 갈무리한 ‘보리탑’이었다. 왼쪽 울타리 너머로 산문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가 않고 울타리의 문도 잠겨 있었다. 가이드 흥과 윤 실장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산 중턱에 최근에 지어서 산뜻하게 칠을 한 묘엄사(妙嚴寺) 산문이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돌아 나와 들어왔던 길의 샛문으로 들어가 겨우 뜨 히우 사의 고풍스러운 산문을 찾아갔다.
중국어로 권공식문루(卷拱式門樓)라고 하는 시멘트와 회로 만든 산문 앞에 아주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아치형 문은 중앙의 큰 문 좌우에 작은 문이 있고 가운데 문 위에 ‘慈孝寺門’이라고 돌에 새긴 편액이 박혀 있었다. 3문의 이층 기와지붕의 3칸 벽 중 가운데는 솟아있어서 문은 전체적으로 3층이었다. 2층 좌우 칸에는 매화로 보이는 나무가 그려져 있고, 가운데 칸에는 원 안에 ‘壽’자가 들어 있었다. 가운데 칸의 법륜이 올려져 있는 3층 용마루와 문 좌우에 불교기가 걸려 있었다. 문의 기둥에는 타일을 넣어 만든(嵌瓷) 주련이 있었다.
福祉月初弦有盈無闕
복덕의 달은 초승달이나 상현달이니 차기만 하고 이지러짐이 없고,
移孝爲忠得其門而入
효를 옮겨 충으로 삼아 그 문을 얻어 들어가네.
緣慈悟脫于彼岸先登
부처님 자비(어머니 사랑)의 인연으로 해탈을 하니 피안에 먼저 오르고,
恩波溪似帶其存者長
부처님 은혜(어머니의 은혜)의 물결 문 앞의 시내처럼 오래도록 흐르리라.
오른쪽 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서 문의 뒷면을 보았다. 3층 가운데 감실에는 절을 수호하는 위태천(韋馱天)이 칼을 두 팔로 안은 채 합장을 하고 대웅전을 향하여 서 있었다. 위태천 좌우로 기린이 그려져 있었다. 타일로 만든 한자로 된 주련이 들어있는 4개의 기둥머리에는 각기 常·樂·我·靜(淨의 오자)의 1자씩 들어 있었다. 상락아정(항상 행복하고, 즐겁고, 참된 나가 있고, 마음이 청정함)은 무상(무상하고)·고(괴롭고)·무아(나라고 할 실체가 없으며)·오염(번뇌로 마음이 오염되어 있음)의 중생이 깨달아서 얻은 열반의 경지를 표현한 말이다.
九陛錫之田似績祖此
황제 폐하가 하사한 전답(사찰 부지)은 조사들이 여기를 이어온 것 같고,
兜率天高京國同佛國
도솔천 큰 나라(자효사)는 부처님 나라와도 같네.
上方月出前溪肖後溪
절(上方)에 달이 뜨니 앞 시내는 뒤 시내를 닮았고,
百巖歸其室爰及友朋
백 개의 바위가 그 방으로 돌아가니 이에 벗에게도 미치네.
문을 들어서자 바로 반달 모양의 큰 연못이 있었다. 연못을 왼쪽으로 돌아가니 나무 아래 풀밭에 백색의 불상이 보였다. 틱낫한 스님이 8~9세에 너무나도 평화로운 얼굴의 불상이 풀밭 위에 앉아 있는 불교 잡지의 사진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플럼빌리지의 숲 아래에 있는 현무암 불상들이나 자효사의 하얀 불상은 스님이 어릴 때 본 그 불상을 재현한 것으로 보였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통로에서 일행을 불러 연못과 산문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연못에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틱낫한 스님이 사미승 시절에 이 연못에서 채소를 씻었다. 반달 연못의 좌우에는 여름이면 연꽃이 가득 피어나는 자연 연못이 있고 그 위로 나무 다리가 놓여 있었다.
연못에서 대웅전으로 오르는데 고동색 가사 위에 잠바와 모자를 쓴 푸른 눈의 비구니가 마음챙김 걷기 명상을 하며 내려왔다. 합장하고 인사를 하니, 눈웃음을 지으며 답례했다.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솔숲 속의 오솔길을 걸어서 층계 위에 있는 종정(鐘亭)을 찾아갔다. 자효사는 세계 14개의 플럼빌리지 수행공동체의 뿌리가 되는 절이기도 하다. 종정은 프랑스에 있는 플럼빌리지(Plum Village 매화 마을), 미국에 있는 블루클리프 선원(Blue Cliff Monastery 碧巖禪院) 등에 있는 것의 원형이다. 이중 기와지붕에 4개의 기둥이 있는 종정에 걸린 새로 주조한 동종은 높이가 1.5미터는 되어 보이는 큰 종이었다. 종의 겉면에 주출(鑄出)되어 있는 문양과 글을 읽어 보았다.
종의 상단에는 ‘南無娑婆敎主本師釋迦牟尼佛作大證明(나무사바교주본사석가모니불작대증명-사바세계의 가르침의 주인이시고,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의 근본 스승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의 큰 깨달음에 귀의하나이다!)’이, 그 아래에 사방으로 ‘慈孝祖庭(자효조정)’이라는 큰 글자가, 그 밑에 ‘佛日僧(增의 오자)輝 法輪常轉 世界和平 衆生安樂(부처의 해가 더욱 빛나고, 진리의 수례바퀴가 늘 구르며, 세계가 평화롭고, 중생이 안락하기를 기원합니다.)’이라는 기원문이 사방에 돌아가며 들어 있었다.
‘조정’은 사방에 건물을 붙여 짓고 가운데에 뜰이 있는 선종 조사(祖師)가 머문 절이라는 뜻이다.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면벽 수행한 중국의 숭산 소림사에서 보았다.
종의 배에는 ‘鳴鐘(명종)’과 ‘聞鐘(문종)’의 게송이 한문과 베트남어로 사방에 돌아가며 들어 있었다. 종소리를 들으며 읊는 게송인 ‘문종’ 게송은 우리나라 절에서도 들어보았지만, 종을 울릴 때 읊는 게송인 ‘명종’ 게송은 처음 보았다.
문종 게송의 ‘火坑(화갱)’은 우리나라에서는 ‘三界(삼계)’라고 하고, 게송 끝에 명종 진언이 함께 들어가 있었다. 화갱은 ‘불구덩이’이라는 뜻이다. 베트남전쟁으로 미국은 1천5백만톤의 폭탄을 퍼붓고, 네이팝탄을 터뜨려 베트남 땅은 그야말로 불구덩이의 지옥이 되었다. 법화경의 비유처럼 삼계는 ‘탐진치의 불이 붙은 집(火宅)’이니 ‘화갱’과 의미가 통한다.
하단에는 바다의 파도 무늬가, 그 위에는 사방에 ‘春·夏·秋·冬(춘하추동)’의 한 글자와 ‘南無幽冥敎主救苦本尊大願地藏菩薩(나무유명교주구고본존대원지장보살-사후 세계의 가르침의 주인이시고, 괴로움을 구원하는 근본 성인이시며, 지옥 중생을 모두 구원하려는 크나큰 서원을 하신 지장보살님께 귀의하나이다!)’이 들어 있다. 그 위에는 용 문양이 돌아가며 들어있고, 사방에 당좌(撞座)가 있고, 큰 당목이 달려 있으며 그 밑에 의자가 있었다. 새벽이나 저녁에 의자에 앉아 종을 울리는 것이다.
鳴鐘 종을 울리며 읊는 게송
願此鐘聲超法界 바라건대 이 종소리 법계를 뛰어넘어,
鐵圍幽闇悉皆聞 철위산과 지옥의 모든 중생에게 들리고,
聞塵淸淨證圓通 사바세계에 들려서 청정하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게 하고,
一切衆生成正覺 일체중생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소서!
聞鐘 종소리를 들으며 읊는 게송
聞鐘聲煩惱輕 이 종소리 듣고 번뇌가 가벼워지고,
智慧長菩提生 지혜가 자라고 깨달음이 생기며,
離地獄出火坑 지옥을 여의고 불구덩이에서 나오고,
願成佛渡衆生 부처를 이루고 중생을 건지기를 바라나이다.
唵伽囉帝耶莎訶 옴! 가라제야 사바하!
사회봉사청년학교를 만들어 일만 명의 봉사자들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을 돕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도움을 받으며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한 틱낫한 스님은 '화중생련(火中生蓮)'이라는 유마경의 말씀처럼, 베트남전쟁의 불구덩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이었다. 틱낫한 스님이 1942년 16세에 출가하여 사미승 시절을 보낸 이 절에서 섣달그믐날 이 종을 울려 베트남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한 이야기를 여행 오기 전에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11.~1954.5.) 시기에 있었던 이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피난길에서 처음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양춘령(楊春嶺)이라는 야산 근방에 도착하고 보니 거의 보름 전에 몇 가구가 이미 돌아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피난길에서 처음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 절로 가는 오르막길에는 풀이 많이 자라나 길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 우리는 몇 달 동안 절을 떠나 있었다. (…) 우리는 대여섯 날을 걸어오고 있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피곤에 절어 온몸이 쑤셔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이 가까워 오자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야산과 언덕을 따라 퍼져 있는 작은 마을들을 지나면서 공포와 침묵에서 비롯된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흔적이 있어서 마음이 편해졌다.
“저기 절이 보인다!”
만 사제(師弟)가 기쁨에 겨워 큰 소리로 외쳤다. 키가 큰 소나무 그늘 아래로 절 지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먼 옛날의 친구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과도 같았다. 그 모습에 우리는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뚜 보살님이 염려되었다. 보살님은 별일 없이 살아계실까? 소개(疏開) 명령을 받았을 때, 뚜 보살님은 남아서 절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절 마당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보살님의 안위를 걱정하던 내 마음은 사라져버렸다. 저 멀리 보살님이 빛이 바랜 갈색의 긴 승복을 입은 채 샘에서 물을 긷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만 사제가 보살님을 행해 소리쳤다. 보살님은 양동이를 내려놓고 이쪽을 바라다보았다. 보살님은 우리를 보자 곧장 달려왔다. 감정이 격앙되어 보살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절 지붕은 총탄에 맞아 여러 군데가 부서져 있었다. 절의 벽도 여기저기 총탄에 뚫려 구멍이 나 있었다. (…) 우리가 절에 돌아온 날은 음력 섣달 27일이었다. (…) 우리는 음력으로 새해, 즉 쥐띠 해를 축하하는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 밤이 되자 전쟁과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찾아왔다. 총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총탄이 우리 절 지붕 위로 날아다녔다. 우리는 문을 잠그고 방안에만 있었다. 조명탄 불빛이 벽 틈으로 보였다. 일련의 기관총 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나는 조사당(祖師堂)에서 만 사제와 함께 꺼질 듯 말 듯한 호롱불 곁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 죽음의 장면을 떠올리며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시간이 좀 지나자 밤은 조용해졌지만, 그것은 답답한 적막이었을 뿐이었다.
우리가 돌아온 날 이래로 만 사제는 범종을 친 적이 없었다. 뚜 보살님이 못 치게 했던 것이다. 보살님이 말하기를 어느 날 밤 계단을 올라 종이 있는 층계참으로 가서 종을 대여섯 번 쳤는데 그때 아래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달려 내려가 보니 대여섯 명의 프랑스 군인이 보였다. 총으로 보살님을 위협하며 다시는 종을 치지 말도록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종소리가 적을 위한 암호로 생각했거나 종소리가 듣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
평소 우리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침상에 앉아 범종 소리를 들으며 수식관(數息觀; 호흡을 세는 명상)을 하거나 칭명염불(稱名念佛-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부르며 불보살의 지혜와 공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른 아침이 되어도 더 이상 종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섣달그믐 날 밤, 우리 모두는 요사채 한가운데 있는 화롯불 둘레에 앉아 있었다. 뚜 보살은 설날 음식으로 엿을 고았다. 그리고, 화로 위에 솥을 올려 떡을 쪘다. 바깥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별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간간이 총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해 미륵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자정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날 밤 절에는 뚜 보살님과 우리, 일곱 사람밖에 없었다.(…)
스승님은
“악업의 씨앗을 심으면 어디로 가든 그 과보를 피할 수가 없게 되는 법이니라.”
고 하셨다. (…) 피난 가지 않고 남아 있으면서도 별 탈 없이 지내는 가난한 가족들이 많은가 하면,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났지만 위험을 피할 수 없었던 부자 가족도 많았다. 뚜 보살님은
“지금 같은 때에는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요. 믿을 것이라곤 각자가 쌓은 공덕 뿐이라우. 재산이나 머리는 믿을 것이 못 되지요.”
어쩌면 가장 믿을 수 있는 갑옷은 자비심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평소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공덕이나 복덕은 각자가 짓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생기는 법이 없다. (…)
자정과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의식을 올릴 준비를 했다. 향로에서 오르는 연기가 대웅전을 가득 채웠다. 나는 종각으로 가서 받침대를 딛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산과 숲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하늘에는 몇 개의 별들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눈에 불을 켜고 보았지만 어둠 속의 마을에는 불빛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문을 잠그고 뜬 눈으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조상님께 인사를 드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땀 만 사제가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새해 축하 의식을 올리는데 범종과 법고를 치면서 반야심경을 독송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방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막 꿈에서 깨어난 듯했다. 맞아, 새해를 맞이하는데 반야 지혜의 종과 법고를 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매년 새해 축하 의식을 올릴 때면, 절에서는 언제나 종과 법고를 일곱 번 쳤다. 그 소리를 신호로 새해를 축하하는 불꽃놀이가 시작 되었다. 불꽃은 하늘을 밝히고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는 언덕과 산자락에 있는 여러 마을에 울려 퍼졌다. 올해는 감히 불꽃놀이를 하려고 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종과 법고도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바깥을 내다 보았다. 산과 언덕 그리고 여러 마을은 모두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이렇게 두려움이 가득한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새해를 제대로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평소대로 종과 법고를 쳐보지 않을래?”
내가 이렇게 묻자 만 사제는 움찔했다.
“프랑스 군인들이 총을 쏘아대면 어쩐다죠?”
나라고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해가 이렇게도 음울하게 막 시작되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용기가 되살아났다.
“걱정마, 그들도 오늘이 섣달 그믐밤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렇게 해보자 지금 분위기는 너무 무겁잖아. 이래서 새해가 오기나 하겠어? 사제, 어서 종과 북을 치자, 만일 그들이 온다면 내가 프랑스말을 아니까 설명하면 되겠지 뭐.”
땀 만 사제는 단호한 내 모습을 보고는 자신감이 생겨서 고루(鼓樓)에 올라가서 법고를 치기 시작했다.
‘댕… 댕…’ 은은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법고의 박자에 맞춰 점점 더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잇따라 들려오는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강렬한 북소리는 멋지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재촉했다. 일곱 번에 걸친 종과 북소리는 새해가 온 것을 축하하면서 어두운 밤하늘을 뒤흔들어 놓았다. 종소리와 함께 스님들의 조화로운 염불 소리와 끊임없이 목탁을 치는 소리가 대웅전에 울려 퍼졌다.
만 사제는 한 손을 내 어깨 위에 얹고는 어둠 속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형, 저기 보세요!”
마을 사람들이 새해가 시작된 것을 환영하고 있기라도 하듯 사방에서 등불이 어둠을 밝히며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문이 활짝 열린 듯했다. 언덕과 야산을 짓누르고 있던 황량한 느낌은 사라지고 한층 부드러운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다. 범종에서 나는 웅장하고도 은은한 소리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물리치고 어둠을 쫓아버렸다.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이들은 전쟁 중인 나라에 따뜻한 봄이 왔음을 느꼈을 것이다.
범종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 강렬한 소리는 따뜻한 마음과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퍼져나갔다. 사제와 나는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불단 앞에 꿇어앉은 채 승가와 함께 우리 민족과 조국을 위해 평화스럽고 기쁜 한 해가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렸다.
-틱낫한 지음, 진현종 옮김, 김담 그림, <어둠을 걷어붙인 새해의 종소리> <<내 스승의 옷자락 My Master’s Robe>>(청아출판사, 2003).
11
일행에게 종의 명문을 소개하고 돌아 나와 비석과 묘들이 있는 곳에서 왼쪽 길로 가서 틱낫한 스님의 위패와 사진을 모신 사당에 가려고 하니 일을 하고 있던 스님이 가지 못하게 제지하였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서 대웅전 쪽으로 나왔다. 중간에 있는 시멘트로 덮은 묘들과 절의 창건주인 낫진(Nanh Dinh 一定) 선사의 탑비를 보려고 했지만, 비가 내려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그만두었다. 스님의 탑은 8각 기단에 3층의 팔각지붕이 올려져 있고, 그 위에 연잎과 공 모양의 연꽃 봉오리가 올려져 있었다.
대웅보전 앞의 마당에는 비를 막는 노란색의 고급스러운 천막을 두 개 이어 쳐놓았고, 대웅보전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가이드 흥에게 부탁하여 절의 스님에게 틱낫한 스님을 모신 사당이 어디 있는지 물었지만, 사찰의 큰 의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법당과 사당 등이 모두 잠겨져 있다고 하였다. 하는 수 없이 문에 붙은 유리창으로 대웅보전의 내부를 잠깐 보고는 돌아서야 하였다. 대웅보전에는 과거(연등불), 현재(석가모니불), 미래(미륵불), 3세의 부처와 관세음보살 등을 모셨다. 대웅보전의 좌우 벽에는 채색한 기린이 새겨져 있고, 붉은 기둥에는 긴 주련이 붙어있었다. 대웅전에도, 틱낫한 스님 사당에도 참배를 하지 못하고 비가 뿌리는 길을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와 대웅전 앞의 비문을 아내가 촬영한 흐릿한 사진으로 읽어 보았다. 비명 중에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정치 혁신에 실패하고 유배 가서 지은 명문, <누실명(陋室銘)>의 구절을 인용한 구절이 있어서 흥미를 느끼고 전문을 읽으려고 시도하였지만, 비각 속이 어두워 촬영한 사진으로는 비문의 태반이 판독하기에 어려웠다. 간신히 비제(碑題)를 알아내어 ‘구글 베트남’에서 검색하니 베트남의 지식인이 뜨 히우 사의 비문들을 채록한 글이 검색되어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구글에서 찾은 비문을 읽다가 문맥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사진의 비문과 대조하여 읽으니 오탈자가 수두룩하고, 문장 중간에 52자가 빠져 있었다. 양자를 대조하고, 또 문맥을 보고 겨우 비문의 원문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조선왕조처럼 응우옌 왕조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기에 절 이름에도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이 융합되어 있었다. 대학사(大學士) 완등해(阮登楷)는 유불 융합의 의미를 사찰 이름에서 이끌어 내었다. 흥미롭게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우리나라의 속담과 비슷한 속담이 비문에 나왔다. 또한 절에 지은 건물 중에 이름이 애일당(愛日堂)이 있어서 친근감을 느꼈다. 농암 이현보 선생이 94세의 아버지가 늙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도산서원 입구에 지은 건물이 애일당이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효자는 부모를 봉양하는 '날을 아낀다(愛日)'라는 말은 <<양자법언(揚子法言)>>의 <지효편(至孝篇)>이 출전이다.
이 절은 1847년 10월에 입적한 베트남 선불교 임제종(臨濟宗)의 낫 진(Nhat Dinh 一定) 선사(禪師)가 1843년에 이곳 ‘양춘령(楊春嶺)’이라는 동산에 안양암(安養庵)이라는 초막을 짓고 여든 연세의 노모를 모시고 수행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스님의 효심에 감동한 뜨득(Tu Duc 嗣德) 황제가 스님에게 '聖嗣孝嗣‘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847년에 스님이 열반에 들고, 1848년에 환관들과 청신녀(淸信女)들이 재물을 희사하고, 현재와 같은 큰 규모로 짓고 자신들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이에 황제도 거금을 보시하고 ‘慈孝寺(자효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낫진 스님은 꽝찌(廣治)성 등창(登昌)현 라총중견(羅總中堅)촌 사람으로 1784년에 어린 나이로 보국사(報國寺) 보정(普淨) 화상에게 출가하여 19세에 밀홍(密弘) 화상에게 수계하고 법명을 성천(性天), 자를 낫진(一定)이라 하고, 또한 보정 화상의 사법(嗣法) 제자가 되었다. 병진년(1796)에 보정 화상이 입적하고 보국사 주지가 되었다. 밍망 11년에 도첩을 받고, 14년에 충령(充靈), 우관(祐觀) 두 절의 주지가 되었다. 또한 황제의 명령으로 각황사(覺皇寺)의 승강(僧綱)이 되었고, 티에우 찌(昭治) 2년 계묘년(1843)에 60세가 되었는데, 황제의 은혜를 입어 병을 회복하고 노년의 삶을 보살피게 되었다. 일찌기 추계(鄒溪), 병상보(秉常甫)와 미리 자신의 승탑을 세울 자리를 이곳에 잡았는데, 그 왼쪽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안양(安養)이라 하고, 병을 요양하기를 7년이 지난 정미년(1847), 64세 10월 초7일에 문득 입적하시니 안양암 오른쪽에 승탑을 세웠고, 가르침을 받은 문도가 또한 많았다. 뜨득(嗣德) 원년 내원 태감(內院 太監, 환관) 여러 명이 함께 발심하여 이 절을 다시 일으켰다.
-안양암일정화상행식비기(安養庵一定和尙行寔碑記)
인각사(麟角寺)로 하산한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선사도 진존숙(陳尊宿)처럼 노모를 모셨고, 삼국유사에도 <효선편(孝善篇)>을 넣었다. 효심이 깊었던 틱낫한 스님도 은사로부터 낫진 스님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승복을 입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시장에서 생선을 사 온 이야기, 뜨득 황제가 절에 찾아와 노승과 고구마를 맛있게 먹었다는 일화를 전해 듣고 감동하였다고 하였다. 틱낫한 스님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며 <당신의 호주머니를 위한 장미( A rose for your pocket)>라는 글을 지어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사람들이 어머니를 만나도록 하였다. 나는 이 글을 번역하여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학생들과 사람들에게 선물하곤 하였다.
慈孝寺碑記
자효사비기
寺在承天香水縣楊春社 分土山連還 前襟小溪 御屛鎭其東南 香江繞其西北 亦京師一妙勝景也
절은 후에의 승천부(承天府) 향수현(香水縣) 양춘사(楊春社)에 있는데, 갈라져 나온 흙산이 이어져 절을 두르고 절의 앞 소맷자락 위치에는 작은 시내가 흐르며, 어병산(御屛山)이 그 동남쪽을 누르며, 향강(香江)이 그 서북쪽을 감싸고 흐르니, 또한 도성의 한 아름답고 빼어난 경관이다.
寺乃一定禪僧古俗阮住持顯化處也 僧初住覺皇寺戒律精嚴 久爲檀那所信向 晩臘返于斯土 結庵修禪 善信雲集 徒弟日衆 終依然一方丈一蓬廬也
절은 곧 속성이 응우옌(阮)씨인 낫진(一定) 선사가 주지하고 교화를 드러내었던 곳이다. 스님이 처음에 각황사(覺皇寺)에 머무실 때 계율을 엄격하게 지킨 청정승이었기에 오래 신도들의 믿음을 받았다. 만년에 여기에 돌아와 암자를 짓고 참선 수행을 하시니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들이 운집하고 제자들이 날로 늘어났지만, 끝내 한 방장(方丈)과 한 초가에 사셨다.
丁未年 十月 七日 僧示寂其山門 因于故庵築塔藏舍利焉
정미년(1847) 10월 7일 스님이 암자에서 입적하시니 옛 암자에 탑을 세우고 스님의 사리를 갈무리하였다.
戊申年二月日在家信弟子 太監 楊威 鄧信 阮卿 杜示 阮德 陳襲 陳言 吳超 宮監 范廩 阮肅 武衢 范森 高詳 楊乙 范深 鄧三 阮眞 黃正 倂 信女 法名淸芳鄧氏討 法名明安伲人黎氏 專淑人阮氏 卯承事陳氏 宣隨事阮玉氏嚴 阮氏幸 久慕世尊慈悲之德 追感一定勸化之功 發菩提心 倂 力捐貲 新其寺三間二廈 後建統會堂 左樂善堂 右愛日堂 及碑鐘亭僧房各一均 墻以磚 屋以瓦 內安三世佛像 觀世音菩薩像 護法龍天菩薩像 地藏王菩薩像 伽藍眞宰關聖帝君菩薩像 鉅鐘一 祀田 祀器 法器胥備留 原僧綱弟子孝徒等 監守工旣 以事聞欽奉勅賜名慈孝寺 倂奉恩給錢七百貫示勸落成
무신년(1848) 2월 어느 날, 재가 제자인 태감(太監; 환관) 양위(楊威), 등신(鄧信), 완경(阮卿), 두시(杜示), 완덕(阮德), 진습(陳襲), 진언(陳言), 오초(吳超), 궁감(宮監; 궁궐 소속 세금 징수관) 범름(范廩), 완숙(阮肅), 무구(武衢), 범삼(范森), 고상(高詳), 양을(楊乙), 범심(范深), 등삼(鄧三), 완진(阮眞), 황정(黃正)과 청신녀(淸信女) 법명 청방(淸芳) 등씨(鄧氏) 토(討), 법명 명안(明安) 탁인(伲人) 여씨(黎氏), 전숙인(專淑人) 완씨(阮氏), 묘승사(卯承事) 진씨(陳氏), 선수사(宣隨事) 완옥씨(阮玉氏) 엄(嚴), 완씨(阮氏) 행(幸)이 오래 세존의 자비의 덕을 사모하고 일정 선사의 교화의 공덕에 추모하고 감화되어 보리심을 내었다.
아울러 힘써 재물을 내어 그 절의 3칸 2하(廈; 2중 처마의 대웅보전?)를 새롭게 하고 그 뒤에 통회당(統會堂), 그 좌측에 낙선당(樂善堂), 그 우측에 애일당(愛日堂)을 세우고, 이어서 비석, 종정(鐘亭), 승방을 각기 고루 갖추었다. 담장은 벽돌로 쌓고 지붕은 기와를 올렸다. 법당 안에는 삼세불상(三世佛像; 연등불상, 석가불상, 미륵불상), 관세음보살상, 호법용천보살상(護法龍天菩薩像), 지장왕보살상(地藏王菩薩像), 가람진재관성제군보살상(伽藍眞宰關聖帝君菩薩像), 대종(大鐘) 일 구(口), 제사 비용을 충당하는 전답, 사당의 집기, 법구(法具)를 거의 갖추었다.
승강을 맡았던 각황사 시절의 제자와 효성스러운 문도 들이 감독하여 공사를 마치자, 이 일이 황제께 알려져 황제께서 ’자효사(慈孝寺)‘라는 절 이름을 하사하셨다. 아울러 황제께서 700관(貫; 꿰미)의 돈을 시주하시어 낙성하였다.
太監楊威鄧信杜示等 將具事勒碑徵文於楷 楷素好內典不獲辭 即盥手 謹誌之
태감 양위, 등신, 두시 등이 이 불사의 내용을 빠짐없이 갖추어서 비석을 세우려고 비문을 나 해(楷)에게 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해는 평소 불전(佛典)을 좋아하는지라 사양할 수가 없어서 손을 씻고 삼가 불사의 기문을 지었다.
曰 妙哉寺乎 美哉其名乎 古寺 曰招提 曰伽藍 曰道場者 以其名也 曰遺愛 曰憫忠 曰報恩 曰崇慶 因其義也 寺且無量無邊計也 而以慈孝命名 此其一也 夫慈者佛之大德也 非慈無已接衆生濟萬類 孝者佛之首行也 非孝無冠天地達幽冥
오묘하도다, 절이여! 아름답도다, 그 이름이여! 옛적에 절을 초제(招提; 산스크리트어 catur-diśa의 음사), 가람, 도량(道場)이라고 부른 것은 그 이름을 말한 것이다. 사랑을 줌, 진심임, 은혜를 갚음, 경사를 받듦은 그 뜻을 말한 것이다. 절은 또한 한량없고 가 없는 일을 도모하는 곳이다. 그리고 황제께서 ‘慈孝(자효)’로 명명하신 것도 절이 가지는 의미의 하나이다.
무릇 자비, 사랑과 연민은 부처님의 큰 덕이다. 사랑과 연민이 없으면 중생을 교화하고 뭇 생명을 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효도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으뜸가는 실천 행동이다. 효도가 없으면 인간 존재가 천지에 으뜸일 수가 없고, 돌아가신 조상님께 닿을 수도 없는 것이다.
大學曰 君子不出家而成敎 於國則以止慈敎天下之爲人父 以止孝敎天下之爲人子 慈孝者也 夫非儒釋之達行歟 非獨此寺爲可名天下之有寺者皆可名 非獨語釋者以爲法言 天下之語儒者 皆可奉爲法言也 大哉遠乎 旨哉淵乎 聖人爲人心世道計者 亦至矣 矧是寺也
<<대학>>에서 말했다. 군자는 출가하지 않고 교화를 이룬다. 국가로 말하면 지극한 자애로써 천하의 남의 아버지 된 자를 가르치며, 지극한 효도로써 천하의 남의 자식 된 자를 가르친다. 자애와 효도라는 것은 무릇 유교와 불교의 통달한 행동이 아닌가? 이 절뿐만 아니라 천하의 절이 모두 이름할 수가 있으니, 불교를 말하는 것만 법언(法言)으로 삼지 않는다. 천하의 유교를 말하는 것도 모두 받들어 법언으로 삼을 수가 있다. 위대하도다, 그 원대함이여! 그 뜻이여, 깊도다! 성인이 인심과 세상의 도덕을 위해 헤아리는 것이 또한 지극한 것이다. 하물며 이 절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一定禪僧能奉慈接衆生 而檀樾許多人 或可以登花藏之玄門 悟毘盧之性海者 非慈之屬耶 宮監人等能以孝道奉師長 而莊嚴此功德 又可以寓先人之香火 作身後之津梁 非孝之屬也 誰六年成道一定也 未敢望之大雄師 十頃布金善信也 未敢擬之給孤獨 而其顯一門之慈孝 振萬古之尊風 此寺豈虛名乎 未論從因受果 瓜豆之理必然 但即道敎之明 名義之正 斯人也 斯寺也 而斯名也 其善蓋不可泯焉 是爲記
낫진 선사는 자비로 중생을 잘 교화하여 많은 후원 신자들이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올라가서 비로자나불의 법성(法性)의 바다를 깨닫게 한 것은 자비심이 아니겠는가? 궁감(宮監; 궁중의 태감; 환관) 등의 사람이 효도로 스승님(師長; 낫진 스님; '스승님'의 줄임말이 '스님'이다.)을 받들었으니 이 공덕이 장엄한 것이다. 또 조상에게 천도재를 올려서 돌아가신 뒤에 피안으로 가는 나루를 만들어 드리는 것은 효도가 아니겠는가? 비록 낫진 스님이 6년 만에 성도하였지만, 감히 '위대하고 영웅적인 스승(大雄師)'이신 부처님을 바라볼 것이며, (환관과 청신녀들이 보시로) 10경(頃)의 땅에 금을 깔았다고 하지만 감히 급고독(給孤獨) 장자에 비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한 산문이 자비와 효도를 드러내었고, 만고에 자비와 효도의 풍조를 떨쳤으니, 이 절이 어찌 헛된 이름이겠는가?
물론, 원인에 따라 과보를 받고 '오이 심은 데 오이 열리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다만 도교의 지혜, 유교의 명분과 의리의 바름은, 바로 이 사람들이고, 이 절이고, 이 절의 이름이다. 그 선함은 대개 인멸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기문으로 삼는다.
銘曰
명사(銘詞)를 지어 말한다.
慈悲孝順 자비와 효도는,
佛敎精玄 불교의 참된 진리이네.
慈孝名寺 자효(慈孝)라고 절을 이름하니,
皇訓寓焉 황제 폐하의 훈화가 깃들었네.
山不在高 산의 명성은 높은데 있지 않고,
名在有仙 명성은 신선이 있음에 있네.
緬維一定 아득히 생각하니 낫진(一定) 스님은,
苦行修禪 고행과 참선을 하셨네.
楊春故址 양춘(楊春) 마을 옛터에,
庵院蕭然 암자와 사원이 쓸쓸하였네.
善哉宮監 아름다워라! 궁감(宮監; 환관)들이여,
信悟有緣 믿음과 깨달음의 인연이 있었네.
追懷德水 낫진 스님의 감화를 그리워하여,
爰廣福田 이에 복의 밭을 넓혔네.
梵宇煌煌 전각은 빛나고,
金匾箋箋 금색 편액의 글씨가 걸렸네.
上奉佛祖 위로 불조(佛祖)를 받들고,
內承家先 안으로 조상께 효도하네.
一門慈孝 한 산문(山門)의 자비와 효도는
耀後光前 앞뒤의 세월에 빛이 나네.
善不爲小 선행을 함이 작지 않으니,
福等無邊 복은 한량이 없을 것이네.
勒之貞石 깨끗한 비석을 세워서,
以壽其傳 그 전함을 길이 하노라.
嗣德萬萬之二己酉孟夏穀日
사덕 만만년의 두 번째 기유년(1849) 음력 4월 곡우일(穀雨日)
署協辨大學士 領刑部尙書 受在家菩薩戒法名大方 阮登楷恭誌
서협변대학사 영형부상서 재가보살계를 받은 법명 대방(大方) 완등해(阮登楷) 공손히 기록함.
대웅전 주변에는 응우옌 왕조의 비빈(妃嬪), 환관의 능묘들과 낫진 스님 등의 고승의 탑과 비가 많았다. 낫진 선사의 사법(嗣法) 제자로 89세에 입적한 하이 띠우(Hai Thieu, 海紹; 당호가 쿠옹 키Cuong Ky, 綱紀) 스님은 81세에 15개의 서원을 하였다. 겸손하고 철저하며 '평상심이 곧 도'라고 하는 선불교 수행자의 풍모를 보여주어 정말 놀랍다. 중용의 '평범함의 철학'도 느끼게 한다. 스님의 탑비에 15항목의 서원(誓願)이 새겨져 있다.
1. 몸은 모양이 세속과 다르니 흰옷(속인?)을 닮지 않는다.(一願身形異俗不似白衣)
2. 입은 늘 청정하여 시비를 말하지 않는다.
3. 뜻과 행동은 평화롭고 바르게 하여 높거나 낮은 사람에게 차별이 없다.
4. 마음은 늘 욕됨을 참아서 어리석음과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탐욕과 성냄을 버린다.
5. 오전에 한 끼의 식사를 하고 뒤로 미루지 않는다.
6. 작은 것에도 긍지를 가지고 자세(옷차림, 威儀)를 흩트리지 않는다.
7. 절은 견고하고 불전은 빛나게 한다.
8. 삶을 늘 평온하게 하고 일상생활을 이지러지지 않게 한다.
9. 제자들이 재난을 길이 떠나도록 기도한다.
10. 시주하는 신도들의 복과 수명과 평안함과 번창을 기도한다.
11. 원한이 있거나 친하거나 모두가 평등하게 함께 극락에 태어나도록 기도한다.
12. 적멸에 들어가는 시간이 오면 미리 알 수 있기를 바란다.
13. 단정하게 앉아서 입적하고 달마대사처럼 짚신 한 짝 들고 서방정토로 가기를 바란다.
14. 불생불멸하는 반야지혜를 깨닫기를 서원한다.
15. 일찍 부처를 이루어 중생을 널리 구하기를 서원한다.
대웅보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참배하고 시주를 하며, ' 자효조정(慈孝祖廷)'을 거닐며 눈 밝은 역대 조사들의 훈향을 맡지도 못하였다. 그리운 틱낫한 스님께 절을 올리지도 못하였다. 찬물로 얼굴을 씻고 옷깃을 여미며 새벽 예불에도 참석하고, 마음챙김을 하며 오솔길을 걷고, 해가 질 무렵 파도쳐 오는 범종 소리를 들으며 고즈넉한 산사의 정취를 느끼고 싶었다. 산문 안, 반달 연못 가에 서서 비를 맞으며 사진 한 장 찍고 흙길을 걸어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도로 가로 돌아 나왔다. 돌아나오는 길 좌우에 있는 숙소와 식당, 명상 홀에는 고동색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많이 보였다. 버스에 올라 가이드 윤실장님은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사찰의 그윽한 분위기를 느꼈다며 좋아했다. 가이드 일에 쫒겨서 그날도 마이크를 잡고 열심히 설명하는 그의 호흡이 가팔라질 때는 안스럽기도 하였다. 뒤에 가이드 흥은 내가 틱낫한 스님을 존경하는 동기를 물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흥이 카톡으로 틱낫한 스님이 소설 형식으로 쓴 부처님의 전기, "<<옛 길 흰 구름(Old Path White Clouds)>>(한국어판 <<붓다처럼>>)을 읽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 책의 베트남어판 표지 사진과 함께 보내왔다. 나는 답을 하였다. "이미 이 책을 한국어판으로 읽었지만, 다시 읽겠다."
오래 전에 학교 친목회에서 삼척 두타산으로 갔다. 그곳에 있는 삼화사(三和寺)는 조선 왕조 개창 뒤에 몰살시킨 고려 왕실의 원혼을 위하여 국가에서 수륙재를 봉행한 절이다. 삼화사에서 만난 미국인 영어교사 리와 산을 내려오며 어떻게 불자가 되었는지 물었다. 그는 틱낫한 스님이 쓴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하며 나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했다. 나는 이 책의 영문판을 아마존에서 사서 교무실에서 영어 공부 삼아 첫 부분을 읽었다. 그리고, 어느 해,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새로 출판된 이 책을 읽고 인물 문인화를 즐겨 그리는 심관(心觀) 화백께도 선물했다. 대학시절 자취방에서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떠오르게 하는 문체의 이 책은 읽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수행이 되었다. 영국의 설법 모임에서 부처님은 어떤 분인지를 묻는 어린이의 질문에, 틱낫한 스님은 이 책을 소개하며 답을 대신했다. 이 책은 본래 베트남어로 출판되었고, 베트남 예술가가 새긴 아름다운 목판화들이 삽화처럼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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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앞에서 출발한 버스는 후에의 랜드마크가 되어 있는 티엔 무 사(天姥寺)를 찾아갔으나 날이 저물어 사위가 어두워 오고, 저녁 일정이 빠듯하여 다음 날 아침에 오기로 하고 저녁밥을 먹으러 갔다. 하지만, 코로나 감염병이 창궐한 여파로 우리가 찾는 서울식당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없었다. 다시 찾아간 식당에서 창가 자리에 계림과 서연 내외분과 우리 부부가 마주앉아 저녁밥을 먹었다. 아직도 바깥에는 밤비가 뿌리고, 우리는 고도 후에에서 천하일품의 따끈한 김치찌게를 먹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마사지를 하러 갔다. 감기 기운이 여전하고 공기가 썰렁하였다. 아픈 발목 부위는 문지르지 말도록 하였지만, 평소에 쓰지 않는 근육들이 아팠다. 옆자리의 교장 선생님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마사지를 하는 여인은 그 교장 선생님의 배를 가리키며 쌍둥이를 임신하였다며 농담을 건넸다. 꿉꿉한 침대나 담요가 찝찝하였지만, 야무진 손길로 해주는 마사지가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어 좋았다. 빛고을에서 돈을 벌어온 그 사장님이 살금살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서비스가 만족스러운지를 모든 손님들께 다가와 묻고 갔다.
2시간의 마사지를 하고, 4달러의 팁을 건네고, 9시가 넘어서, 응우옌 왕조의 임금이 살았던 자미원(紫微垣) 앞을 은하수처럼 굽이쳐 흐르는 흐엉강(香江)의 남안(南岸)에 자리잡고 있는 파크 뷰 호텔(Park View Hotel)에 체크 인 하였다.
페이스북에 접속하니 플럼빌리지에서 공지 사항을 올려 놓았다. 2022년 1월 22일 자정에 96세의 연세, 법랍 80세에, 16세에 출가한 본사, 뜨 히우 사에서 입적하신 틱낫한 스님의 2주기 탈상재(脫喪齋)를 29일에 봉행한다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본래 망자의 영가(靈駕)를 위하여 7일마다 7번 올리는 49재, 100일만에 백일재, 1년만에 소상재(小祥齋), 만 2년만에 대상재(大祥齋), 모두 10번의 천도재를 봉행한다. 국제 플럼빌리지 14개 수행 공동체의 400여 제자들, 후에의 스님들, 세계 30개 나라의 재가불자들, 베트남 신자들이 ‘자효조정(慈孝祖庭)’, 뜨 히우 사에 집결하였다고 한다. 베트남 선불교 임제종의 42대 법손으로서 국제 플럼빌리지 수행 공동체의 개창조인 틱낫한 스님은 탈상재가 봉행되고 나면, 애도는 공식적으로 마감되고, 스님은 이 절의 5대 조사로 추존된다고 한다.
그제서야, 낮에 이상하리만치 절이 폐쇄되었던 까닭을 알게 되었다. 우리보다 먼저 세계에서 오신 스님들이 플럼빌리지의 뿌리가 되는 뜨 히우 사(Chua Tu Hieu, 慈孝寺)의 반달 연못에 둘러서서 걷기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드론 카메라가 촬영하고, 한 비구니 스님이 반주 없이 낮은 목소리로 틱낫한 스님의 시를 노래하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본래 베트남 말로 쓴 이 시는 반야(중관 中觀) 지혜를 표현하였다.
잔잔하여 마음을 한없이 고요하게 하는 그 노래가 좋아서, 나는 후에의 호텔에서 여행을 함께하는 길동무들에게, 영국의 노신사에게, 알래스카의 아이 엄마에게, 히말라야의 행복왕국 부탄의 딸에게, 괴테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연구하고 번역하였으며 여든의 연세에 장편소설을 창작하여 작가의 꿈을 이루신 서울의 노학자께, 경주의 릴리 누님께 그 노래를 보냈다.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감미롭고도 영혼을 평안하게 하는 노래이었다.
나는 여전히 오고 감에 자유로우니,
존재와 비존재에 걸림이 없네.
아이야! 느긋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오렴!
이지러지지도, 차지도 않네,
단지 하나의 달이니.
바람은 여전히 여기에 있는 줄을 아느냐?
먼 데 비가 구름 곁으로 오고
햇살이 높은 곳에서 쏟아질 때,
대지는 늘 청정한 하늘을 볼 수가 있지.
I still come and go in freedom,
being and non-being are not a question.
Arrive home, my child, with relaxed steps,
not waning nor waxing, just one moon.
Do you know the wind is still here?
When distant rain reaches nearby clouds
drops of sunshine fall from on high
so the earth can see the always-clear sky.
-Thich Nhat Hanh’s poem, Coming and going in freedom(Đến đi thong dong)
-틱낫한 시, 오고 감에 자유롭기
누구에게나 결코 물리거나 추해 보이지 않는 물건이 있는 법이다. 나는 닳아 해지고 빛이 바랜 고동색 승복 한 벌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승복보다 나는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도반들은 우스갯소리로 그것을 “서른일곱 번이나 윤회하며 고행의 삶을 거친 승복”이라 불렀지만, 나는 그 옷이 낡았다거나 추하다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바오 크억 사원에서 지내며 불교 대학 공부를 하던 시절 그 옷을 입고 지내며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 옷은 스승님께서 깨달음의 삶, 즉 승려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내게 주신 것이었다. 이제는 너무 닳아 해진 바람에 실제로는 더 이상 입을 수 없지만, 여전히 사미승 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나의 수계식은 이튿날 오전 네 시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날 밤 (…) 나는 당신의 방에서 깜박거리는 촛불을 곁에 둔 채 방석에 앉아 계신 스승님을 찾아뵈었다.
스승님 곁에 놓여 있는 탁자 위에는 오래된 경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나에게 물려줄 당신의 낡은 고동색 승복의 해진 곳을 꼼꼼하게 깁고 계셨다. 연세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승님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신 데다가 눈까지 밝으셨다. 만 사제(師弟)와 나는 입구에서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천히 바느질을 하고 계신 스승님의 모습은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보살을 보는 듯했다.
우리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스승님께서 쳐다보셨다. 우리를 보시자 스승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고 나서 다시 숙이시고는 계속해서 바느질을 하셨다. 만 사제가 말했다.
“스승님, 이제 그만 쉬십시오. 벌써 꽤 늦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우리를 쳐다보시지 않고 그대로 바느질을 하면서 말씀하셨다.
“내일 아침 꾸언(Quan)이 이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바느질을 마저 마치련다.”
(중략)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스승님, 뚜 보살님에게 부탁해서 바느질을 마치도록 하시지요.”
“아니다. 내 손으로 직접 기워서 네게 주고 싶다.”
스승님께서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그리고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우리는 감히 더 이상 한마디도 못 드리고 다소곳이 합장을 한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스승님께서는 바늘에서 눈을 떼지 않으신 채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적에 단지 승복을 기운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었던 제자의 이야기를 경전 속에서 본 적이 있느냐?” 스승님께서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마. 그 제자는 찢어진 승복을 고치는 일에서 기쁨과 평온을 얻는 적이 많았단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것뿐만 아니라 도반의 것도 고쳐주곤 했었지. 한땀 한땀 뜰 때마다 그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힘을 갖추리라는 착한 마음을 내었단다. 어느 날 바느질을 하다가 그는 심오하고도 훌륭한 가르침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지. 그리고 여섯 땀을 뜨고 나서 육신통(六神通)을 얻게 되었단다.”
나는 고개를 돌려 공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스승님을 바라보았다. 스승님께서는 육신통(六神通)을 얻지는 못하셨다 해도 우리가 도달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심오한 경지에 이르셨던 것이 분명하다.
이윽고 바느질이 끝났다. 스승님께서는 가까이 오라고 내게 손짓을 하셨다. 그리고는 한번 입어보라고 하셨다. 그 옷은 내게 조금 컸지만, 그 때문에 눈물이 날 만큼 행복감이 밀려왔다. 나는 감동했다. 수행자의 삶을 살면서 가장 신성한 사랑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잔잔하면서도 한량없는 그 순수한 사랑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나의 수행자로서의 삶에 힘과 기쁨을 주었다.
스승님께서는 나에게 옷을 건네주셨다. 나는 옷을 받아들면서 그 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을만큼의 커다란 격려와 온화하면서도 사려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해주신 스승님의 목소리는 내가 그때까지 들어본 말 중에서 아마도 가장 부드럽고 상냥한 것이었을 것이다.
“내일 네가 이 옷을 입게 하려고 내 손으로 고쳤단다. 내 아들아!”
꾸밈이라고는 전혀 없는 수수한 말씀이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듣고 나는 무척 감동했다. 그때 내 몸은 부처님 앞에 꿇어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입은 일체 중생을 구하겠다는 큰 서원을 읊조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 마음은 진정한 보살행의 삶을 살아가겠노라는 심대한 서원을 세우고 있었다. 땀 만 사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랑과 존경심이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다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우주가 향기로운 꽃으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그날 이래로 지금까지 나는 새 승복을 여러 벌 얻었다. 새 고동색 승복은 한동안 눈길을 끌곤 했지만 나중엔 잊혀져버렸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주신 낡고 닳아해진 그 고동색 옷은 언제까지고 내 마음속에 신성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옛날에 나는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스승님을 떠올리고는 했다. 이제 그 옷은 너무 닳아 해진 바람에 입을 수가 없지만, 때때로 아름다웠던 옛날 기억을 되살려 보고자 여전히 그 옷을 간직하고 있다.
-틱낫한 지음, 진현종 옮김, 김담 그림, <스승님이 물려주신 가사> <<내 스승의 옷자락 My Master’s Robe>>(청아출판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