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군신화는 한국인의 사상적 고향
‘주역’과 한국 철학을 전공한 필자에게 단골로 주어지는 수업의 하나가 한국사상사 과목이다. 첫 주 오리엔테이션 시간을 지난 후, 본격적으로 학생들을 만나 다루는 주제는 단군신화다. 가을학기 동안엔 개천절이 있어서 좀 더 실감이 난다. 통상 다음과 같은 문답으로 문을 연다. “10월3일이 무슨 날인가요?” “개천절이요.” “개천절이 뭐 하는 날인데요?” “단군이 나라를 세운 날이요.” “그렇죠. 나라를 세운 날이죠. 그러니 다시 말하면 건국절 아닌가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순간 솔깃,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짓는다.
단군신화는 한국인의 사상적 고향과 같은 이야기다. 건국 신화는 그 신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틀이 되는 고전이다. 어릴 적부터 익숙해져 무의식의 뿌리를 이루는 문화 기풍과 그 잠재적 영향력은 어마어마한 것이 아닐까?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를 다 읽는다 하더라도 한국인에게 단군신화는 나의 이야기이고, 기타 신화들은 주변의 이야기이다.
그런 만큼 단군신화에 대해서는 여러 분야의 많은 논의가 있다.
단군신화가 지닌 샤머니즘의 기반에 주목하기도 하고, 고려 후기의 기록이니만큼 그에 섞여 들어간 불교적 요소나 유교 윤리적 요소를 지적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기독교 삼위일체 사상과 비교해 보기도 한다. 이처럼 단군신화를 해명하는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필자는 상반상생(相反相生)의 관계론, 천지인 삼재(三才)의 인간론으로 그 의미를 드러내 보려 한다.
■ 하늘 땅 사람이 함께 기뻐하다
단군신화에 대해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후기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다. 비록 13세기의 기록이지만, 일연은 기원전 2333년의 조선 건국을 말하고 있고, 또 ‘위서(魏書)’니 ‘고기(古記)’니 하여 몇 가지 문헌 근거를 들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단군신화는 그 연원이 오래되었고, 적어도 고려 후기 사람들의 의식 속에 단군은 이미 오래도록 익숙한 존재였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자.
단군신화의 구조를 살펴보면, 하늘의 이야기, 땅의 이야기, 인간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늘 무대에서는 환인과 환웅이 주연이고, 땅의 무대에서는 범과 곰이 주역이다. 거기에 하늘과 땅 즉 환웅과 웅녀의 결합으로 인간 단군이 탄생한다. 구조 자체가 상반상생(相反相生)의 대대(對待)와 천지인 삼재의 틀을 지니고 있다. 하늘로 상징되는 신성(神性)과 땅으로 상징되는 물성(物性)은 상반되지만 서로 배척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마침내 사람으로 결실을 맺는다.
이처럼 단군신화의 인간상은 신성과 물성이 함께 어울려 균형을 이루며 어느 한 편을 거부하지 않는다. 영(靈)과 육(肉)이 모두 온전하다는 이른바 ‘영육쌍전(靈肉雙全)’사상은 대립하는 성질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새로운 변화가 이어진다는 역(易)의 사고를 배경으로 한다.
‘주역’에서는 하늘(乾)과 땅(坤)으로 대립된 두 가치를 상징하고, 그 양면을 능동적이고 변증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인간상을 말한다. 이를테면 ‘숭덕・광업(崇德廣業)’이라는 말이 있다. ‘덕을 숭상하고 사업을 넓힌다’는 뜻이다. 덕을 숭상한 결과는 민생의 안정이라는 사업의 구축으로 돌아오고,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상 주역의 용어로는 利用安身이다)을 통하여 도덕문화를 높일 수 있는 기반을 닦는다. 상반성의 역동적 통합은 스스로를 닦아가는 ‘사람’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아울러 단군신화에는 상대를 너그러이 수용하는 평화의 기상이 깔려있다. 하늘에서는 환인과 환웅 부자가 서로의 뜻을 존중하고, 땅에서는 서로를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맹수가 그런대로 한 공간에서 기거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갈등의 요소를 발견할 수 없다. 환웅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려고 이 땅에 내려왔고 곰에서 변화한 여인은 그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으니 하늘과 땅과 사람은 서로를 살리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생의 정신은 우리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하나의 사례로 고려의 의종은 “신라에서는 선풍(仙風)이 크게 행해져 하늘이 기뻐하고 백성과 만물이 안녕하였다”고 말하며, 팔관회를 고풍(古風)대로 행하라는 교지를 내린 바 있는데, 여기서도 ‘천・지・인이 함께 기쁘고 안녕하다’는 관념이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도록 꽤 오랜 전통으로 이어졌음을 볼 수 있다.
■ 인간, 세계와 소통하는 주체
필자의 세대에겐 익숙한 단군과 단군신화에 대한 인상은 ‘혈연적 민족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한겨레’, ‘단군의 자손’, ‘단일민족’, ‘배달민족’ 등의 단어가 연상되어 따라 나온다. 아마도 20세기 후반에 받아온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된다. 지금의 공교육을 받고 자라는 세대는 단군과 단군신화에서 무엇을 떠올릴까? 무엇을 생각하든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는 빠지지 않을 듯하다.
필자는 단군신화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막상 그 내용에서는 혈연적, 그리고 배타적 민족주의의 요소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다시 읽은 단군신화는 오히려 탈 민족적 보편적인 이념으로 충만해 있었다.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 ‘이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로 감화한다’는 사상에 지역적·계급적·인종적 폐쇄성은 없다.
단군신화는 다른 이들을 향해, 그리고 하늘과 땅을 향해 열린 인간 주체를 말한다. 생태학적으로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관을 담고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할 때의 ‘인간 세상’과 재세이화(在世理化)라 할 때의 ‘세상’이라는 무대는 단순히 인간사회를 의미하는 차원을 넘어 하늘・땅・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러한 세상이라 생각된다.
천지인 삼재로서의 인간은 우주 안의 다른 존재자들과 생명의 연대의식을 공유하며 다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주체이다. 신시(神市)는 그러한 이상을 이루어가는 구체적 시공간을 의미하지 않을까? 하늘과 맞닿은 백두산(太白)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는 생명의 중심이자 삶의 원천으로서, 이 신화를 공유하는 집단이 늘 마음 한쪽을 비워 간직해야 할 신성한 공간이다. 이 신성한 ‘신시(神市)’의 꿈은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일이다. 단군신화에 담긴 인간의 모습은 삼재(三才)의 인간론이 풍성하게 피어난 한국적 열매이다.
■ 홍익인간, 모든 인류를 위한 행복과 평화
루마니아 출신의 작가 콘스탄틴 비르질(C.V.) 게오르규(1916∼1992). 장년층 이상의 독자는 <25시>라는 그의 작품과, 앤서니 퀸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세계대전과 냉전의 시대를 살았던 그는 ‘25시’라는 설정을 통해 24시가 지나도 새날이 시작되지 않는 극단적 절망의 당시를 묘사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와 그 처지를 듣게 된 게오르규는 차차 한국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한 그는 특히 단군신화의 ‘홍익인간’과 태극기의 문양 및 이에 담긴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한국에 대해 쓴 원고와 강연 모음이 번역되어 <25시를 넘어 아침의 나라로>(1987)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다소 길어질 수 있지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게오르규의 통찰을 소개해 보겠다. 그는 <비단옷을 만드는 종교>라는 글에서 ‘홍익인간’의 이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단군은 민족의 왕이며, 아버지이며, 주인이다. 그가 한국 민족에게 내린 헌법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것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복을 주는 일이다. 한국인은 다른 많은 종교를 받아들였지만 단군의 법은 변함없이 5천여년 동안 계속 유지되고 있다. 왜냐하면 단군의 법은 어떠한 신앙과도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모든 종교나 철학의 이상적인 형태로, ‘최대한의 인간을 위한 최대한의 행복’ 또는 모든 인류를 위한 행복과 평화이다.”
백두산 천지. 이선경 교수 제공
백범 김구 선생이 쓴 홍익인간.
이선경 조선대 초빙객원교수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