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의 업(業)을 갚고자 자식이 되어
주경스님(강원 성원사)
이제 업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부모·자식의 관계를 맺고 잘못된 길로 흘러가는 예를 들어 업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자기가 전생에 만들어놓은 업을 뒤집어쓴 채 그 업에 맞는 몸을 찾아 들어갑니다. 내가 무안군의 해운사에 머물며 법무부교화위원을 맡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마을의 한 청년이 아버지인 김 처사를 자기 집 마당에서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죽인 청년이 어느 생에선가 죽임을 당하였거나, 죽은 아버지가 청년에게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준 일이 있었음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은사이신 청화스님께서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셨던지 사건의 정황을 자세히 살펴볼 것을 권했습니다.
마을로 간 나는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습니다.
"김처사는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아 애지중지하며 정성을 다해 길렀지요. 아들 또한 예의바르고 착실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동네에서도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장성한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고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아마도 아들의 정신상태가 약간 이상해지기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김 처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들이 좀 이상하다' 며 걱정을 내비치기도 하였는데 결국은 바깥출입을 일절 못하게 하였고 심지어는 친구들이 찾아가도 '몸이 안 좋다' 는 핑계로 돌려보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몽둥이를 들고 아버지에게 달려들면서 소리쳤습니다.
'네 놈이 감히 나를 쳐?'
아들은 김 처사에게 몸둥이를 휘두르며 원한 섞인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이 놈이 술만 먹으면 나를 괴롭혀! 술만 먹으면 나를 못살게 굴어!'
그러면서 사정없이 아버지를 때려 결국 숨지게 하고 말았지요.
그리고 청년의 사촌에게서 집안의 내력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죽은 김 처사가 서른 살이 되었을 무렵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멀쩡하던 김 처사는 술만 먹었다하면 아버지께 온갖 폭언과 폭행을 일삼으며 행패를 부렸고 아들의 행패를 보다 못한 아버지는 몇 년 후 들보에 목을 매고 자살을 하였습니다. 결국 자살을 했던 아버지가 그 한을 풀지 못하여 김 처사의 아들로 태어나 전생에 아들이었던 아버지를 죽이는 참담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마침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가 우리 절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기에 나는 판사를 찾아가 한마디 건넸습니다.
"너희가 생각하기에는 죽임을 당한 사람은 죄가 없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 모든 죄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살인한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죽임을 당한 사람 역시 죄가 있다는 것을 참작해야 한다."
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릇된 업을 지은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있겠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저지른 악업으로 인해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되면 결국 그 원결은 언젠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 이라는 나무에는 고통과 괴로움의 뿌리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나무가 무성해지면 무성할수록 그 괴로움의 뿌리도 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간사입니다.
이러한 세상살이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앞서서 해야 할 일은 계행을 잘 지키며 맑고 밝은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마치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것처럼 전생에 지어놓은 업을 뒤집어쓴 채 잘못된 인연을 계속 이어주는 몸을 찾아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수십 년 전 내가 향일암을 갔을 때 만났던 어느 보살과 죽은 아들과의 인연을 소개하겠습니다.
1987년, 해제철이 되어 걸망을 매고 이 절 저 절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할 때의 일입니다. 그 해 나는 강화 보문사에서 시작하여 오대산 상원사,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 등 전국의 큰 절을 두루 다니며 기도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향일암을 찾아갔습니다.
향일암에 도착해보니 멀리 공주에서 왔다는 성지순례단의 보살들이 있었습니다. 법당을 향해 반배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 보살들 중에 유난히 나의 눈에 띄는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보살이 유별나게도 크고 진한 까치집 같이 생긴 '롱(籠)'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나의 눈에만 보인 것입니다. 나는 그 보살에게 청했습니다.
"보살님, 일행과 함께 돌아가지 말고 기도나 좀 더 하다가 가십시오."
보살은 행색이 볼품없었던 나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일행들과 함께 가버렸습니다.
저녁 공양을 하고 예불과 기도를 하기 위해 법당으로 갔더니 그 보살이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보살님, 간다더니 왜 아직 남아있지요?"
"스님께서 기도하고 가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목탁을 칠 테니 끝날 때까지 절을 하십시오."
그렇게 6시부터 시작된 기도는 어느새 새벽 1시를 넘어섰고, 보살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지만 열심히 나의 목탁소리에 맞추어 절을 했습니다.
2시 경이 되었을까 보살이 '욱!' 소리를 내며 헛구역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토하시오" 라고 하자 몇 번을 더 헛구역질을 하더니 '욱!' 하면서 간과 비슷한 핏덩어리를 토해냈습니다. 물론 그 핏덩어리 또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보살에게 더욱 부지런히 절을 할 것을 권하였고, 보살은 열심히 절을 하며 두 세 번 더 토를 하였는데, 그 붉은 핏덩어리의 색은 점차 더 옅어졌고 얼굴도 환해져 매우 편안해 보였습니다. 새벽 도량석이 시작되자 기도를 끝내었는데 아침이 되자 보살이 다시 찾아와 울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보살에게는 총명하고 효심 깊은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들이 얼마나 잘 하였던지 부모의 혼을 쏙 빼 놓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1980년의 광주사태 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아들이 죽었고 보살 내외는 한없는 슬픔과 그리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같은 꿈을 계속 꾸었는데 아들을 쏙 빼닮은 남자 아이가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엄마, 내가 이 집에 태어났는데, 가난해서 먹을 것도 없고 배가 고파. 엄마가 좀 와 봐."
그리고는 산길을 가는데 산 위에 외딴집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그 장면이 생생하였고, 저절로 그곳을 찾아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마침 성지 순례차 향일암에 왔다가 그곳으로 가보려 하였는데, 밤 새워 기도를 하고 나자 그 길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한번만이라도 아이를 보고 싶다.' 고 하면서 나에게 천도재(薦度齋)라도 올려달라며 매달렸습니다.
얼마 뒤 내가 있는 강원도의 절로 보살이 찾아왔기에, 죽은 아들의 천도재를 잘 지내 주었습니다. 그 뒤 이 보살의 집안은 어려운 일들이 모두 풀어지고 화목해졌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원결입니다. 원수가 자식으로 찾아오는 경우를 나는 종종 보았습니다. 이 보살은 전생에 악담을 매우 많이 한 사람으로 이 보살님으로부터 말 할 수 없이 많은 악담을 듣고 살았던 이가 죽어서 아들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 생에 아들로 태어나 공부 잘 하고 효도를 잘 하여 입 안의 혀처럼 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으로써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꿈에 나타난 아이를 직접 찾아가서 만나게 되면 죽은 아들 생각이 나서 그 아이를 두고 올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데리고 와 애지중지 키워놓으면 또 어떤 식으로든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고 평생 마음고생을 시키는 일이 반복해서 벌어지게 됩니다. 다행히 이 보살은 진참회(眞懺悔)를 하여 업장소멸을 이루었기에 이와 같은 원결을 모두 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모와 자식과의 인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데가 있으면 진참회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디 업의 실체와 윤회를 이해하고 지극한 수행을 통하여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잘 가꾸어 가시기를 발원 드립니다.
■주경 스님은
태안사 조실이었던 청화 스님을 은사로 득도, 30여년간 수행정진 해 온 주경 스님은 강릉 포교당 성원사에 재가불자를 위한 시민 선방과 불교교양대학을 개설 운영. 인도와 중국, 라오스, 태국 등에서 사미를 선발해 한국불교의 수행법과 문화를 지도해 국제포교사로 양성함. 강릉 성원사 회주로서 갈앙선원 선원장, 청화사상연구회 회장, 무주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법무부 교화위원 등을 역임. 2008년 3월 서울 대치동에 ‘정중선원’을 개설해 불자들에게 염불선을 지도함. 2010년 입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