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닮은 인간 생명의 풍요로움
사도 10,25-26.34-35.44-48; 1요한 4,7-10; 요한 15,9-17
부활 제6주일; 2024.5.5
1. 말씀의 초점과 전례의 취지
부활 제6주일인 오늘은 현대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고 생명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이루어 나가자는 취지로 제정된 ‘생명 주일’입니다. 마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랑의 계명에 관해 가르치시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랑의 계명이야말로 생명의 존엄성을 수호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러하셨듯이 제자들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름으로써 생명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선언하셨으며, 실제로 제자들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교회는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러한 기도를 바치면서, 예수님의 지향을 본시 그대로 재현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 사랑의 문명
가톨릭교회는 사회적 가르침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사랑의 문명’이라는 현대적 용어로 해석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화 제3천년기를 맞이하여 이 ‘사랑의 문명’의 큰 수확을 얻으리라고 기대하는 가톨릭교회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를 위한 이정표로서 제시된 교황권고 문헌 ‘아시아 교회’를 통하여 ‘생명의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인간 발전을 위한 봉사는 하느님의 큰 선물인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시작됩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큰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계획과 책임성으로서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수호자들이지 그 소유자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자유롭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이 생명의 시작부터 그 자연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존중하고 수호하는 일을 결코 중단할 수 없습니다. 잉태의 순간부터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창조 활동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명의 샘이시며 유일한 목적이신 하느님과 이루는 특별한 관계 속에 영원히 머무르게 됩니다.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 특히 자기 자신을 방어할 목소리조차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이는 참된 발전도, 참된 시민 사회도, 참된 인간 향상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어머니 태중에 있든 환자의 생명이든 장애인 또는 노인의 생명이든 모든 이를 위한 선물입니다.
주교대의원회의 교부들은 인간 생명의 거룩함에 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저의 회칙 「생명의 복음」을 포함하여 그 뒤에 잇따른 교도권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다시 강조하였습니다. 저도 여기에서 그들과 함께, 인구 통계학적 문제가 종종 낙태와 인구의 인위적 조절 계획을 도입하려는 논쟁으로서 이용되고 있는 나라의 신자들에게 ’죽음의 문화‘에 저항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계획들을 지지하고 또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투신과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입니다.”(35항)
3.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아시아 복음화
이상과 같은 ‘사랑의 문명’을 실현하기 위한 생명의 복음 선포는 교세 확장이나 종교 간 개종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연의 사랑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자면 낙태와 인위적 인구 조절이 아니라, 또한 저마다 더 가지려고 하고 더 강해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투신과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사도 16,6) 사도 바오로 일행이 로마제국 안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써, 결과적으로 서방의 복음화 과업이 추진되었음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또한 샤를르 드 푸꼬, 마더 데레사, 뱅상 레브 등 선구적인 선교사들을 통해서 아시아의 복음화 과업이 예언자적으로 추진된 모범 사례까지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서양에서는 신앙의 활력이 가라앉고 성소자가 급감하여 파견할 선교 인력이 사라진 터라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러 올 선교사가 나올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보편교회는 물론 아시아의 주교들도 이제 아시아의 복음화는 자력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주체적인 선교 사명을 지니기를 아래와 같이 강력하게 촉구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온 교회가 선교적이며, 복음화 활동이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의무라고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하느님 백성 전체는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되었기 때문에 복음화는 결코 개인적이거나 고립된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신앙 공동체 전체와 함께 하는 친교 안에 이루어져야 하는 교회의 과업입니다. … 모든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의 일치된 삶의 증거를 보여 주지 않는다면 복음의 진정한 선포가 있을 수 없음은 명백한 일입니다. … 아시아 사람들은 지적 논쟁보다는 생활의 거룩함에 더욱더 감동받기 때문입니다.”(42항)
‘아시아 그리스도인에 의한 아시아 복음화’라는 명제와 명분에 있어서 보편교회의 기대와 여망을 가장 많이 그리고 크고도 폭넓게 받고 있는 지역교회는 한국교회입니다. 비록 최근에 그 활력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교회는 아시아 대륙의 다른 지역교회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커다란 영향력과 잠재적 역량을 지니고 있습니다. 백 년 박해를 이겨낸 역사적 체험은 물론, 인구 대비 신자들의 수효가 10%에 달할 만큼 사도직 활동이 활발하며, 이러한 교회적 역량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 나라의 경제적인 역량의 뒷받침까지 받고 있어서, 아시아 복음화 과업을 선도할 역량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최근의 한류 현상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광범위한 공감을 꾸준히 얻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한류가 복음화될 수 있을 때, 아시아 복음화의 과업은 그야말로 ‘사랑의 문명’에 한층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기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복음화를 갈망해 온 한국교회 자신의 정체성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한국교회가 서구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 지구적인 표준을 받아 들여 성공적으로 국제화에 성공하기는 하였으나, - 이 점은 대한민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 서구화에 치우친 나머지 토착화 과제에 소홀했던 탓으로 아직도 여전히 외래 종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시급히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한민족의 정체성 회복에 기여할 수 있는 커다란 기회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 역사의 근원으로 올라가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한미족을 이끄셨던 하느님의 거룩한 손길을 상기해 보고자 합니다.
4. 한민족을 아시아 동방으로 불러내신 하느님
창세기 1장에서 11장은 모든 민족들에게 해당되는 인류의 원역사(元歷史)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단연 돋보인 인물은 “의롭고 흠 없이 살았다.”(창세 6,8-9)고 하느님께서 평가하신 노아였는데, 그는 그야말로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존재답게 아담에 이은 인류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멈춘 아라랏산으로부터 서쪽으로 이주해 갔던 노아의 후손 중 4대손 니므롯(창세 10,8)은 힘센 장사여서 사람들을 규합해서는 신아르 지방의 너른 평원에 자신의 왕국을 세웠고, 제단으로 쌓던 벽돌탑을 제사 용도 대신에 왕국의 랜드마크로 세우고자 하는 욕심에서 훨씬 더 높이 세우려다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말이 섞이고 달라져서 더 이상 탑공사를 함께 하기가 어려워지자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창세 11,1-11).
그런데 니므롯은 노아의 아들인 함의 3대손이었지만, 노아의 또 다른 아들인 셈의 4대손 에베르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각각 펠렉과 욕탄이라고 이름 짓고서는 노아 선조의 유훈에 충실하게 키워서 각각 아시아의 서쪽과 동쪽으로 보냈습니다(창세 10,24-25). 그 후 큰 아들 펠렉의 6대손인 아브람이 니므롯 무리에서 벗어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나서 칼데아 우르에서 빠져나와 아시아의 서쪽 끝인 가나안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창세 12,1-9). 그리고 작은 아들 욕탄은 그의 아들들과 함께 “메사에서 동부 산악 지방인 스파르 쪽까지”(창세 10,30), 그러니까 아시아의 동쪽 끝으로 가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리하여 에베르의 시대에 세상이 동서로 나뉘어졌습니다(창세 10,25). 그리고 에베르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데에, 펠렉의 가계에서는 6대가 걸린 반면에 욕탄의 가계에서는 당대에 실현되었습니다.
창세기는 원역사에 이어서 12장부터는 아브라함을 민족의 시조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록 문자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아시아의 동쪽에서 민족 단위의 생활과 의식에 5천년 동안 뿌리내린 문화로 이어져온 욕탄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도 수많은 신앙인들의 통찰과 성령의 계시로 기록되는 것이지만, 문화 역시 어느 한 두 사람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 현상 역시 문자 기록에 못지않게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알아보는 데에 중요합니다. 남은 숙제는 그 해석이지요. 대홍수로 말미암아 그 이전에 살던 모든 생명체는 죽었으므로 욕탄과 그 아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아시아의 동쪽 끝까지 가서 살면서 이룩한 문명은 동아시아 최초의 문명이 되었으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 유감스럽게도 일반 역사가들은 이 점을 인정하거나 전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
그런데 최근 고고학과 유전학, 인류문화학과 언어학 등의 발달로 새로운 유적이 발굴되고 학제간(學際間) 종합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무신론적 역사관에 기초하여 통용되어 온 기존의 역사 상식을 뒤집어야 할 새로운 해석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지명을 따서 ‘홍산(紅山) 문화’나 ‘요하(遼河) 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는 나라 이름을 따서 ‘고조선 문명’이라고 불리는 동아시아 상고시대(上古時代)의 문명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특징적인 유적 겸 유물이 있습니다. 바로, 고인돌입니다. 전 세계에서 발견되는 7만여 기(基) 가운데에서 무려 절반 가량인 4만여 기의 고인돌이 아시아의 동쪽 끝인 만주, 산동 그리고 특히 한반도에 몰려 있습니다. 바벨탑처럼 벽돌에 역청을 발라 쌓은 수메르식 탑제단과 달리, 고인돌은 수백 명이 함께 힘을 써야 할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바위를 자연 상태에서 재단하여 또 필요로 하는 자리까지 이동시켜서 쌓은 돌제단입니다. 이 거대한 크기의 제단에서 알 수 있듯이, 니므롯과 달리 욕탄과 그 후손들은 노아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일에 최고의 정성을 들였고, 이것이 한민족의 제천의식(祭天儀式)으로 계승되었는데, 고인돌은 이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표지 유적으로서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고인돌에서 바친 제사로 그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 진리는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이타적(利他的)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이었습니다. – 이 점에서 중국이나 일본, 그리스나 로마의 건국신화들과는 질적으로나 차원으로나 훨씬 도덕적이고 복음적인 가치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 흔히 니므롯 같은 자들이 권력을 쥐면 자기 혼자 ‘천자(天子)’로 자처하고서 나머지 사람들을 이등 인간으로 부리려 들었지만, 욕탄과 그 후손들은 모두가 천손, 즉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뜻에서 평등하게 여겼으며, 고조선 연방 체제에 속한 여러 부족들 가운데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이 입었던 흰 옷을 즐겨 입어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불리었습니다. 한민족은 태양에서 나오는 밝음, 즉 하느님을 상징하는 가치에 따라서 이룩한 선진문명을 이웃 민족들에게 전해 주었으며 주변 나라를 침략하거나 그 백성을 노예로 삼아 억누르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진리와 평화라는 문명의 빛을 전해준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를 왜곡하고 강력한 힘만을 추구해 온 중국 및 일본 민족과 질적으로 차이나는 문명적 특성이요 선진적 천손의식으로서 오늘날 한류 문화 현상의 뿌리입니다.
5. 홍익인간적 가치관의 선교적 의미
우리 말과 글에는 이러한 선진적 천손의식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 말은 전 세계의 유수한 언어들 중에서 유난히 존대어법이 발달한 언어입니다. 수메르어에서 파생되었다고 추정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다른 서양 언어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하느님을 하늘처럼 우러러보던 전통과 관습에서 우러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에 대한 존대어도 ‘말씀’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다른 동식물들도 돌보라고 말씀하신 뜻에 따라서 우리 말에는 인간사와 사물들, 동식물의 습성과 모양을 표현하는 의태어와 의성어, 형용사와 부사가 독보적으로 풍부합니다.
이러한 우리 말을 기록하고자 세종대왕이 창제한 우리 글도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입니다. 모음은 홍익인간 이념의 근간이 된 천지인(天地人)의 삼재사상(三才思想)을 반영했으며, 자음은 발음기관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문자는 세계적으로 한글이 유일합니다. 더군다나 한글은 지배층이나 지식층 또는 부유층이 아니라 대다수 백성을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천손의식에 부합하는 민주적인 문자이고,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소통하는 현대에 와서 그 진가가 더욱 돋보이는 미래형 문자입니다. 한때 한글을 천시하던 유림들이 사라지고 아예 한글을 말살하려 들었던 일제총독까지 떠나간 뒤에는 온 국민이 한글을 배워 익힐 수 있었고 높은 교육열까지 더해서 오늘날 선진국 대열에 들 수 있는 국력의 바탕이 되었으며, 오늘날 세계적으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한류 현상이 쉽사리 퇴색될 수 없는 근거입니다.
6. 한류 현상의 바탕인 한(恨)과 정情)과 흥(興)
우리 말과 글이 바탕이 된 민족 문화 내지 한류 현상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민중의 정서인데, 이를 대변하는 세 가지 요소는 한(恨)과 정(情)과 흥(興)입니다.
고조선 이후 역대 왕조에서 지배 엘리트들이 저질러온 사회적 불의 탓에 억울하게 희생된 의인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여기서 민중의 한이 생겨났으므로 한을 노래한 민요들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가 국난을 당하게 되면 평소에 품었던 한의 에너지가 폭발하여 힘을 모아 풀어내다가 정이 생겨났고,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흥도 우러나왔습니다. 흥을 돋구어 주는 춤과 노래는 우리 민족 역사의 초기부터, 그러니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입니다. 이 한과 정과 흥이 모두 어우러져 있는 노래가 아리랑입니다.
이것이 반만년 동안 생명의 풍요로움을 표현한 말과 글로 이어온 끝에 마침내 원수 사랑은 물론 이웃 사랑을 한과 정과 흥으로 녹여내면서 온 세계인의 공감을 자아내고 있는 우리 민족 문화의 홍익인간적인 사연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류 현상의 대표적 아이콘이 된 K-Pop, K-드라마, K-시네마 등에는 한민족, 그 중에서도 민중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역사적 서사(敍事)가 녹아 있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생산된 작품들이 종종 원색적이고 폭력적이며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자본주의적 가치관만을 단조롭게 묘사하는데 비해서, 한류가 표현하는 작품들에서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다양하고 정감이 넘치는가 하면 공동체적인 가치관을 진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우수한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도 구약시대에는 물론 예루살렘이 함락된 유대 독립전쟁 이후 2천 년 동안이나 전 세계로 흩어져 살면서 많은 고난을 겪었고 선민의식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만, 그들이 또 다른 선민이라고 부러워하면서 열심히 연구하는 대상이 바로 우리 한민족과 그 문화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진리와 평화를 존중해 온 문화가 있습니다. 생명의 풍요로움을 실현하는 데에는 경직된 법률보다 부드러운 문화가 훨씬 더 유리할 것입니다만, 그 오랜 고난의 세월을 견디면서도 하느님께 충실하려는 그들의 견고한 신앙에 대해서는 우리도 배울 것이 많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래서 하느님께서 특별히 부르셨고 또 돌보아주셨던 이 두 민족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바탕으로 생명의 풍요로움으로 세상을 복음화시키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바람의 힘으로 창공을 나는 새 알바트로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