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누나라면, 나도 있으면 좋겠다.” 십대 청소년이거나, 많아야 스무 살쯤 돼 보이는 남자가 영화관을 나서며 한숨 쉬듯 토해내는 말이 귀에 꽂혔다. 그가 막 보고 나온 영화가 성유리가 주인공 누나 역으로 나오는
<누나>였으니,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 또래 누구라도 저런 말이 나올 법하지, 싶었다. 이원식 감독의 영화 <누나>는 어린 시절 폭우로 불어난 강물에 빠진 자신을 구하다 죽은 동생 때문에 비에 대한 트라우마(trauma)를 안고 살아가는 ‘윤희’(성유리 분), 그리고 수술비가 없어 죽어가는 엄마를 버리고 재혼한 아빠를 원망하면서 불우하고 불량하게 살아가는 고등학생 ‘진호’(이주승 분)가 주인공이다.
영화는 장마 때문에 집을 나서지 못해 직장을 잃은 윤희가, 외진 골목에서 진호에게 지갑을 빼앗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갑 속에는 유일하게 남은 동생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과 갈등과 화해의 과정 가운데 결국 각자 내면에 난 상처를 치유한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치유의 감동을 체험할 수도, 보다 성숙해진 성유리의 열연 덕에 영화라는 꿈길을 편안히 걸을 수도 있다. 영화는 1월 3일 개봉됐다.
갓피플은 영화배급사 어뮤즈가 언론시사회를 연 지난 12월 27일에 성유리를 만났다. 영화를 보기 전에 별도로 만나는 자리가 잠시라도 없었다면, 시사회 후 어지럽게 터진 100여 대의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어쩌면 성유리를 영영 놓쳤을지도 모른다. 1981년생인 성유리는 지금도 여전히 세상이 주목하는 ‘아이돌 스타’임을 그날 새삼 알았다.
성유리는 지난해 12월 31일 열린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신들의 만찬’ 주인공 자격으로 ‘여자 최우수 연기상(특별기획 부문)’을 차지했다. 성유리는 상을 받은 후 “연기 시작하고 이렇게 큰 상 받은 것은 처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라고 크리스천다운 소감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촬영 현장에서 고생하는 분들이 따뜻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촬영했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언급해, 스타의 그늘에 가려 소외된 방송제작 관계자들까지 염려하는 훈훈한 마음씨도 보여주었다.
글 이한민 / 사진 주명규 / 자료제공 amuse
전설적 걸그룹, 핑클의 화이트
성유리는 1998년 5월, 90년대 원조 걸그룹(girl group) 핑클(Fin.K.L:Fine KIlling Liberty)의 일명 ‘화이트’(white)로 불리며 요정처럼 화려하게 등장했다. 핑클은 가요대상을 세 번 수상했으며, 여성그룹 최초로 대규모 단독콘서트를 열 정도로 인기가 매우 높았다. 멤버는, 이제는 각자의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이효리, 옥주현, 이진, 그리고 성유리였다.
핑클 멤버는 모두 개신교인이라고 알려졌는데, 그 중에서 특히 성유리의 아버지는 목사이다.
거꾸로 말하면, 목사의 딸이다. J신학대학교 성종현 교수가 바로 성유리의 부친. 성 교수가 독일 유학중이던 1981년 3월 3일에 유학생 간호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유리는 태어났고, 네 살 때 가족을 따라 귀국했다. 서울의 강동 지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캐스팅되어 가요계에 데뷔했다. 경희대학교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했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하나님의 딸로 자라다
기자는 시사회가 끝난 후 영화관 로비에서 성 교수와 인사를 나눴다.
초면이었지만 첫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너무 닮았으니까, 그리고 딸을 바라보던 눈빛에서 아버지가 아니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어떤 무엇이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화 시사를 끝내고 객석 뒤쪽에서 물끄러미 기자회견 중인 딸을 바라보던 성 교수의 눈은, 무척 어두웠던 극장 안에서도 따뜻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종현 교수는 ‘신약총론’과 ‘공관복음대조연구’ 등을 썼고 한국 신약신학 학계에 널리 알려진 신학자이다.
성 교수는 유학 중에 낳은 딸과 함께 어릴 때부터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라’고 가르쳐왔다고 한다. 그런 부모의 적극적인 신앙지도 덕분에 성유리는 연예인으로서 항상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하며 대중의 인기에 일희일비하지도 않고, 그룹 가수 활동을 그만두고 연기자로 변신한 뒤에도 연기 실력과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올 수 있었다.
이제는 가수 아닌 연기자로
2002년 가수에서 연기자로 변신한 후, 처음에는 잠시 연기력 논란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인기를 얻은 후의 공백기도 비교적 긴 편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상황 속에서 크게 좌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가 비교적 무난하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그녀 자신의 신앙심이 가져다준 인내심과 의지, 그리고 가족의 기도와 같은 영적 보호막이었다.
그런 극복의 과정 덕분인지, 최근 성유리는 연기자로서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는 평을 많이 받는다.
이번에 공개된 영화 <누나>도 사실 2010년에 촬영된 것인데(독립영화 특성상 극장 상영 일정이 늦어졌을 뿐이다), 영화가 공개된 후 성유리의 연기력에 대한 호평이 대부분이다. MBC 연기대상 수상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영화인 <차형사>에서는 파격적인 연기 변신도 불사했다.
목사의 딸로 태어났지만, 이제는 성유리 자신이 신앙의 힘으로 삶의 어려움도 극복해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맡은바 연기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만큼 성장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일찌감치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다
성유리는 처음부터 연예인이 될 마음은 딱히 없었다고 말한다.
집에서는 딸이 아무리 예뻐도 연예인이 된다는 건 상상하지 않았고, 당시 살고 있던 동네에서는 연예인을 본 적도 없고 관심을 둘 일도 별로 없었다.
물론 어려서부터 악기를 배우고 소질이 보이기도 했지만, 오빠처럼 의사가 되거나, 나중에 특별한 일을 하거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 교외 사생대회에 나갔다가 현장에 나온 연예 기획사의 캐스팅 전문가 눈에 띈 것이 계기가 되어 그룹 ‘핑클’의 멤버가 된 것이다.
그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성 교수와 가족들도 합심기도를 드린 후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고 딸의 연예계 진출을 축복했다고 한다. 신앙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자녀의 생각과 삶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분위기인 것이다. 성유리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사랑이 넘치고 개방적이며, 제 의견을 늘 존중해주셨어요. 그런 점이 참 감사해요.
제가 항상 하나님 중심주의의 생활을 한다면 연예계에서 활동하면서도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죠.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드러내며, 전도의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고 하시죠.”
말씀과 기도를 강조하고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우선하라는 부모의 가르침은 바쁜 일정 가운데 세상의 유혹과 스캔들에 빠질 수도 있는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도 그녀를 깨끗하게 지켜주는 원동력이 됐다. 실제 성유리는 연예활동 가운데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으려 힘썼고 수시로 새벽기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웃사랑을 위해 다일공동체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성유리는 오래전 성령체험을 통해 기도생활이 깊어졌다고 말한다.
그녀는 대학교 졸업을 얼마 앞두고 기도생활에 전념하던 중, 아버지의 제자였던 전도사와 함께 기도하다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이 함께하신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세상이 말하는 이른바 1세대 아이돌 연예인이기에, “나를 통해서 많은 청소년과 팬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연예인이 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한다”는 것이다.
‘누나’ 영화에 노개런티로 출연
연기자로서 성유리는 그동안 주로 밝은 역할을 연기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공개된 영화 ‘누나’에서는 침울하고 복잡한 내면을 가진 역할이다. 새로운 연기의 폭을 보여준 셈이다. 게다가 출연료를 받지 않는, 이른바 ‘노개런티’ 출연을 자처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영화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성유리는 이에 대한 일반 매체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예산 독립영화라 예산이 충분하지 않을 거라는 점도 배려했어요, 개런티를 받지 않아도 제가 충분히 할 만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화 ‘누나’는 2009년 제7회 서울기독교영화제 사전제작 지원 작품이자 2009년 영화진흥위원회 하반기 독립영화 제작지원작이기도 하다. 일반 영화계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독립영화이지만, 기독교 문화계의 관점에서 보면 일반인을 향해 복음 메시지를 은근히 담아낸,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영화인 것이다. 성유리가 이 영화에 출연한 이유에 대해, 갓피플에게 특별히 들려준 답은 이러했다.
“물론 시나리오가 좋았던 점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이 작품을 통해 제가 받은 달란트를 쓰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찍으면서 내적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경험한 방송 드라마나 대형 영화사의 작업 방식과 달라서 아무래도 힘든 여정일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인 걸 알았던 만큼 더 참고 좀더 크리스천다운 행동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을 때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연기자로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될 것을 기대하고, 뭔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촬영을 시작했지만, 그러지 못하여 힘들어했고요. 하지만 촬영을 끝내고 나니까 제가 크리스천으로서 뭔가 기여해야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이 영화를 찍는 과정 자체가 저도 모르게, 오히려 저부터 힐링하는 과정이 되었어요. 또 영화가 완성되고도 2년이 지나서야 개봉하는 걸 보면서, 이 모든 과정이 저를 연단하는 과정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 이뤄진 결과라는 걸 알게 되었고요, 그 과정 속에서 저를 치유하신 이유도 알게 되었어요. 모든 걸 내려놓아야 제가 원하는 걸 하나님이 주신다는 걸 많이 느끼게 해준 작업이었습니다.”
기대 밖의 솔직한 대답이었다.
주연배우가 힘들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할 만큼 제작 환경이 어려웠기 때문에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염려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영화 ‘누나’는 전반적으로 종교적 메시지를 담았다는 느낌을 직접적으로 들지 못하도록 잘 찍은 ‘웰 메이드 무비’(well made movie)임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의 치유 과정, 다시 말해 영적인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거리전도 찬양팀이 등장하고 병원심방을 온 목사님이 예배드리는 장면도 잠시 나오고 성경책과 십자가 목걸이도 등장하지만, 일반 관객은 그런 장면에 그리 신경쓰지 않을 수 있다. 이야기의 긴장감이 탄탄하고 성유리의 연기 몰입도가 결말에 다가갈수록 깊어지기 때문이다.
“힘들면, 누나라고 불러!”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 성유리를 만나보자. 빗속에서 잃어버린 동생 때문에, 비가 오면 밖에 나서지 못하는 트라우마(재해를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윤희 역의 성유리는 “너 때문에 동생이 죽었어! 넌 쓸모없는 아이야!”라며 날마다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 소리 한 번 내지 못한다. 하루는 그 장면을 몰래 지켜보던 진호가 뛰어 들어와 아버지를 때리고 윤희를 구해내자 “네가 뭔데 상관이냐?”고 소리친다. 그러자 진호가 씩씩대며 말한다.
“네가 내 누나라며?!”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죽은 엄마의 원수를 갚겠다며 살인을 암시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진호를 찾기 위해, 윤희는 매질하던 아버지를 처음으로 뿌리치고 빗길로 나선다.
혼절을 거듭하다 간신히 도착한 병원 한 구석에서 폭력배들에 둘러싸인 진호를 가로막을 때, 폭력배들이 웃으면서 묻는다.
“네가 뭔데 나서?” 그러자 윤희, 성유리는 힘을 다해 소리 지른다.
“내가 얘 누나니까!”
하나님의 힐링이 담긴 영화
앞으로 이 영화는 극장뿐 아니라 온라인 상영관과 케이블방송을 통해서도 시청할 수 있다.
“예쁜 성유리가 연기도 잘하고 영화도 감동적이래. 같이 보자”고 마음에 품었던 전도대상자에게 권해볼 만하다. 다만 모든 관객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검은 화면에 하얀 글씨로 뜨는 성경 말씀을 몇 초 동안 보아야 한다.
이사야서 43장 4절 말씀이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이 말씀은 이원식 감독이 이 시대의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음성을 들려주고 싶어 선택한 말씀이라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성경책을 찾아 펼쳤더니, 같은 장의 앞에 있는 1절 말씀이 이것이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성유리가 이 영화를 통해 힐링을 경험했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성유리는 어떤 분들이 이 영화를 보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극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던 분들, 혹은 가슴에 감동이 많이 없어서 메말라 계신 분들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자극적이지도 않고 은은하게 힐링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니까요. 저부터 이 영화를 통해 주님의 만지심을 경험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