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 선 준 규 -
꽃섬의 겨울은 추우나 활기가 넘치는 한바탕 잔치를 치르듯 분주하다.
여름부터 시작된 김발 준비는 청년들과 남자들이 바다에 펼칠 김발을 짜느라 정신이 없고 여학생들과 여자들은 여름방학을 오롯이 김을 물에서 떠 햇빛에 말리는 발장을 짜느라 바쁘다. 뒤란 그늘을 찾아 삼삼오오 모여 다가올 겨울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가을이 되면 김발을 바다에 펼쳐 떠다니는 김 포자를 붙이고 본격적인 김 작업의 시작을 알린다. 어촌계에서 김발 자리를 정리하고 각자의 자리가 정해지면 말뚝을 박아 김발을 펼치고 바람과 물살에 파손되지 않게 고정을 시키는 고단한 작업의 연속이다. 그래서 청장년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품앗이로 작업을 하며 준비해 나가는 것이다. 섬에서는 북서풍을 피할 꽃섬의 남쪽에 김을 말릴 건조장 준비를 하고 김발에 김이 잘 붙어 쑥쑥 자라기를 기다린다. 한해 김 농사는 김 포자가 얼마나 잘 붙느냐로 결정이 난다.
그래서 날씨와 바람 수온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모든 경험치를 동원해 준비해 나간다.
12월이 되고 날씨가 추워져 김이 발에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길게 늘어뜨려지면 김 채취 작업과 함께 마른 김을 만드는데 온 가족과 빌릴 수 있는 모든 손들이 동원되는 길고 긴 꽃섬의 겨울이 시작된다. 어른들은 배를 타고 나가 김발에 붙은 김을 배 가장자리에 엎드려 손으로 뜯는다.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에도 바다에 나가 바람과 맞서며 바닷물에 손을 담궈 김을 뜯는 일은 보통의 고단한 일이 아니다. 뜯어온 김을 지게로 가파른 섬의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것도 만만치 않아 장정들도 진이 다 빠진다. 지게로 김을 날라 창고에 널어놓고 다음날 고단한 작업을 위해 이른 잠에 든다. 꽃섬은 전기도 자가 발전이라 해지는 시간 즈음에 전기가 들어와 초저녁 9시 즈음이면 발전기가 멈춰 온 섬이 잠으로 빠져든다.
다음 날 길고 긴 하루의 시작은 새벽 한시나 두시부터다. 어른들은 일찍이 일어나 김을 분쇄기에 갈아 물에 헹구는 작업부터 한다. 새벽에 샘가에 모여들어 한바탕 난장이 벌어지고 헹군 김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작업장으로 옮겨 본격적인 김 뜨기 작업이 시작된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온 가족이 일어나 물에 풀어진 김을 발장에 일일이 한 장씩 떠내는 춥고 지난한 작업이다. 어른들이 김을 뜨고 반대편에서 아이들이 뜬 김을 들어내어 차곡차곡 쌓아 탈수기에 돌려 물기를 빼는 작업이 새벽 내내 이루어진다. 꽁꽁 언 새벽 물에 손을 담그는 작업은 손이 시렵고 추워 한쪽에는 장작불을 피워 언 손을 녹여가면서 아침까지 작업을 이어 간다. 김 뜨는 작업을 아침까지 마치면 부랴부랴 아침식사를 한다. 그나마 아침 식사 때에서야 서로의 얼굴을 보고 따뜻한 방에서 밥으로 몸을 녹이고 충전하여 남은 긴 하루를 준비한다. 새벽 내내 떠 놓은 김을 건조장으로 옮겨 김 발장을 꽂을 수 있는 짜여진 나무 틀 못에 한 장 한 장 끼우기 시작한다. 꽃섬의 모든 주민이 각자의 창고나 작업장에서 새벽 내내 김을 뜨고 날이 밝으면 건조장으로 모여 김을 틀에 끼우느라 정신이 없다. 다 끼우고 나면 온 건조장이 빼곡이 김이 널어져 펼쳐진 풍경 또한 장관이다. 하지만 김 양이 많거나 일손이 적으면 오전까지도 김을 뜨고 김을 너는 일도 정오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이제부터는 햇빛에 김이 마르기까지 기다리는데 양이 많으면 한쪽에서는 마른 김을 걷어내고 다시 물김을 틀에 널어 짧은 오후 해에 마르기를 기다린다. 배정된 자리가 한정되고 언덕배기에 계단식이어서 가져다 나르고 모으고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잠시도 쉬는 시간이 없다. 이때부터는 어른들은 김을 뜯으러 바다로 나가고 아이들과 여자들이 남아 마른 김을 걷어내고 발장에서 마른 김을 벗겨내는 작업을 한다. 이 작업들도 만만치 않음은 일일이 걷어낸 마른 김을 한곳에 모으고 벗겨내는 작업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데 겨울의 짧은 해에 캄캄한 저녁까지 이어지기 일쑤다. 이 작업이 겨울 내내 이어진다. 한 손이 아쉬워 식구 많은 집이 그나마 원활하다. 쉬는 날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불어 바다에 김을 뜯으러 가지 못할 때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날이고 어른들은 모아 놓은 김을 다듬어 백장씩 속지로 묶어 수협에 위판을 한다.
김 생산이 많은 인력과 손이 많이 가는 수고로운 작업이지만 워낙에 고가품이라 식구가 없는 집에서는 육지에서 일꾼을 들여온다. 아쉬운 손을 보태기 위해 남녀 가리지 않고 가까운 친척들을 불러 손을 보태기도 하며 봄이 오는 3-4월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작은 꽃섬이 사람들로 가득차고 활기가 넘쳤다. 그래서 육지에서는 꽃섬을 돈 섬이라 불렸다. 꽃섬엔 지나다니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80년대 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며 활발하게 이뤄지던 김 양식도 김을 떠 말리는 작업까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공장들이 생기고 대형화와 기계화에 밀리기 시작했다.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 꽃섬 사람들은 썰물처럼 섬을 떠났다.
이제는 김 건조장으로 북적북적했던 남쪽은 흔적도 없이 고요하기만 하고 30년 된 소나무, 아카시아 나무들만 무성해 옛 영광을 무색케 하고 있다. 그때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아 꽃섬과 함께 녹슬어 가면서도 활기가 넘치고 사람 북적북적한 그때를 추억한다. 춥고 고단했지만 그해겨울이 그립다.
* 고흥군 수협 소식지 <마파람>에 실린 글입니다.
첫댓글 어렸을 때 고모네가 김을 많이 했는데 한 번 따라갔다가 손 끊어지는 줄 알았어요.
바닷물에 잠긴 손보다 물과 바깥의 경계 지점이 너무 아프더군요.
그 당시 먹은 김이 무척 소중한 김이었군요.
30년 된 소나무가 김 역사의 기승전결을 고이 간직하고 있겠지요.
김에 얽힌 소중한 기록입니다!!
김 먹을 때마다 섬사람들의 언 손과 발이 생각날 것 같아요.
감상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