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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31일 토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수도회] 내 인생에 풍랑이 일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히브 11,1-2. 8-19
† 복음 마르 4,35-41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의 말이다. 그는 1815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근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요한 보스코는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 사제가 되었다. 특히 청소년을 사랑했던 그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오다가 1859년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 생활을 익히게 하려고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도 세웠다. ‘고아들의 아버지’
라고 불릴 만큼 19세기의 탁월한 교육자로 꼽히는 그는 1888년에
선종하였고, 1934년에 시성되었다.
★ 이스라엘 역사의 신앙 전통은 하느님의 약속에 믿고 참여한 성조들은
영원한 것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서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의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제1독서).
★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신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성조들이 믿음으로
고대하였던 세계를 당신을 통해 직접 보게 하셨다. 자연의 풍랑도, 공안
선풍의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도 모두 예수님 권능의 말씀 한마디에
복종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친밀감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그렇게 살고 싶다. 주님과 가장 친밀하고 든든한 상태라면 어떤
때일까? 아버지를 의지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때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며 하늘의 음성을 들으셨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흐르는 강물에
인간으로 서 있지만 오로지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심한
갈증 때에 물을 들이키면 곧바로 전신에 퍼지는 것처럼 느껴지듯이,
주님을 영접하면 즉시 내 몸이 영으로 가득 차서 알 수 없는 충만한 느낌이
된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의식할 때가 내 삶의 최상의 상태인데,
주님의 영에 합일된 순간을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합일의
감정은 표현할 수 없는 환희와 평온함으로 가득하다. 내 삶의 모든 것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면 주님의 영으로 채워져서 주님께서 내 몸으로 사시게
된다. 내가 걱정하고 근심하는 일은 내가 해결할 일이지만, 그것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해결하실 일이 된다. 친밀감을 감사의 말로는 미치지
못해 그저 말 없음일 뿐이다.
제자들은 온종일 스승을 수행할 때 기쁨으로 충만했다. 두려움도 불만도
아쉬움도 없었다. 그런데 풍랑을 만나는 순간 공포에 질려 버렸다. 주님의
현존 의식을 놓쳐 버린 때가 바로 두려움과 고독이 엄습하는 순간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잊어버릴 때 내 영혼은 좌불안석한 가운데 공허감에
쌓인다. 그래도 제자들은 곧바로 주님을 찾을 줄 알았으니 다행이다.
“스승님, 저희가 다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풍랑은
멎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믿음의 사람들 -믿음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31일 토요일(뉴튼수도원 82일째),
성 요한 보스코 사제(1815-1888) 기념일 히브11,1-2.8-19 마르4,35-41
제1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2.8-19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믿음의 사람들 -믿음 예찬-
믿음의 사람들이 감동을 줍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진정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감동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제 주변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어제 인용했던 올 2월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개인전(2.4-2.10)을 여는
민경숙 루치아 교장님도 진정 믿음의 사람입니다.
지체없이 축하의 카톡을 보냈습니다.
"아,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자매님 믿음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시간 내어 개인전 꼭 다녀오고 싶네요.“
카톡을 통해 대표 그림을 전송 받은 제 형수의 소감입니다.
"와, 민경숙 선생님이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렸나요.
따뜻하면서도 힘이 넘치네요.
꼭 가봐야겠어요. 그림을 보니 그동안 자알 살았네요."
몇 번 인용했던 예화도 소개합니다. 예전 왜관수도원에 갔을 때
저녁기도전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모여드는 노수사님들의 모습이 참
초라하고 허무해 보였습니다.
순간 깨달음처럼 스친 강렬한 생각입니다.
아, 그 순간 노수사님들의 존재자체가 믿음으로 보인 것입니다. 다
증발하면 흰 소금만 남는 바닷물처럼 다 증발되고 순수한 믿음만 남은
모습으로 보인 것입니다. 흡사 믿음이 걸어다니는 착각도 들었습니다.
요즘도 평생 믿음으로 살아온 노수사님들이나 노신부님들을 보면 무조건
존경스런 마음입니다.
요즘의 깨달음 하나도 나누고 싶습니다. 일출과 일몰의 장면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산티아고 순례 시 스페인의 땅끝, 피스텔라에서 찍은
황홀찬란한 일몰 사진을 많은 분들이 일출 사진으로 착각했습니다.
마찬가지 여기 뉴튼수도원에서 찍어 보낸 아름다운 일몰 사진 역시
여러분이 일출 사진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아, 미국에서 일몰이 한국에선 일출이 될 수 있겠구나,
믿음 좋은 이들의 일몰같은 죽음의 끝은
그대로 하늘나라에서 일출같은 새로운 탄생의 시작일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마음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믿음은 인체로 말하면 뼈와 같습니다. 뼈가 바르고 튼튼해야 몸도 바르고
튼튼하듯 믿음이 바르고 튼튼해야 삶도 바르고 튼튼합니다.
골다공증의 뼈처럼 골다공증의 믿음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
요즘처럼 성가가 맛있게 느껴지기는 처음입니다.
온마음과 온힘으로 우렁차게 성가를 부릅니다.
성가뿐만 아니라 미사나 성무일도시 마음을 담은 목소리로 말씀을 읽고
노래하니 말씀의 맛 또한 좋습니다.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만 아니라
성가도, 미사도, 성무일도도 참 좋은 렉시오디비나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
나는 진리의 샘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평생 목마르지 않고
진리의 샘을 만날 것입니다.
나는 구원의 길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헛된 수고 않고
구원의 길을 찾을 것입니다.-
어제 미사중 입당성가(421장)도 신선한 깨달임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삶에 비약은, 첩경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모든 믿음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 은총의 믿음이지만
우리의 항구하면서도 평범한 믿음을 위한 노력이 필수입니다.
보슬비에 옷이 젖듯이 이런 사소해 보이는 성가도
믿음으로 충실히 하다보면 마음도 믿음으로 촉촉이 젖어듭니다.
어제는 뉴튼수도원 수도형제들의 특별한 배려로 극장에 가서 형제들과
함께 뮤지컬 '모세의 이야기(The Story of Moses)'를 관람했습니다.
거리만으로 왕복 6시간(유마티아수사 운전)의 장거리에 3시간의
관람시간, 거의 하루가 소요된 시간이었지만 관람료도 시간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충전시킨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극장의 정면 앞 사자와 양의 조각상 앞에서 찍은 사진에 대한
형수의 카톡 응답에서 받은 깨달음도 새롭습니다.
"사자하고 양 때문에 사자가 맹수같이 보이지 않아요.
아무튼 셋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믿음이 좋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사자(?)와 양(?) 사이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극장의 정문 왼쪽 위쪽에 큰 글자로 쓰여진 문귀도 인상 깊었습니다.
"Where the Bible come to life(성경, 생명이 나오는 곳)!"
수년간 기도하며 준비한 작품이라 합니다. 모든 배우들이 믿음을 다해
온몸과 온맘으로 열연했기에 감동도 컸습니다. 팜프렛을 읽던 중 모르는
영어 말마디가 마음에 걸려 즉시 갖고 간 아이패드로 찾았습니다.
"Brick by Brick“
찾자마자 환호했습니다. '벽돌을 쌓듯이, 차곡차곡'이란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 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믿음으로 벽돌을 쌓듯이 차고차곡 실행하는 삶의 습관이 견고한 믿음을
만듭니다. 영성생활은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이 좋은 믿음을 형성합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실로 서사적(epic)입니다.
스케일의 크기가 참 웅대합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믿음의 이야기는 또 얼마나 서사적이요 고무적인지요.
말그대로 위대한 믿음의 찬가(a magnificent hymn of faith)입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이 주인공이지만 이어 모든 이스라엘 믿음의 선배들이
열거됩니다.
하늘의 별들처럼 교회 하늘에 영원히 반짝이는 별들같은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고립된 우리 믿음이 아니라 이런 믿음의 선배들의 믿음을
유산 받고 있는, 교회의 믿음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용사'란 말보다는 '선배'란 말이 친근감이 갑니다. 이런 선배들의 믿음이
부단히 신선한 자극과 충격이 되어 우리 믿음을 성장, 성숙케 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요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실상 그들은 다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히브11,13-14.16).
고난과 시련 중에 있는 신도들의 믿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히브리서
저자의 노력이 눈물겹습니다. 오늘날 믿음의 시련을 겪고있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위로와 격려 말씀입니다.
하여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 하며(homesick at home)', 하느님 계신
본향을 갈망하며 믿음 속에 죽어간 믿음의 사람들은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련중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상징하는바 깊습니다. 흡사
거센 돌풍의 세상 바다에 떠있는 우리 교회요 가정이요 수도공동체
같습니다. 답은 믿음 뿐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깨어 일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명령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조용해 집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흡사 세상 바다에 시련 중인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주님께 청할 것은 단 하나, 부족한 믿음을 도와달라는 것뿐입니다.
이런 구원체험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도 한층 깊어졌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잡혀 말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화두입니다. 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님만이 우리 믿음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고, 마음의 풍랑을 잠잠케 하십니다.
"주님,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시편90,14).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내 인생에 풍랑이 일때
2015년 나해 1월31일 토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
마르 4,35-40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내 인생에 풍랑이 일때
2015년 나해 1월31일 토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제1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2.8-19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우리네 인생길은 바람 잘 날이 없다. 세상살이가 때로는 일이 꼬이거나
몸이 아파서 힘겹고 때로는 마음이 아파서 고통스러우며, 어느 때는 다른
사람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잠 못
이루기도 한다. 이렇듯 갖가지 풍랑 속에 살아가는 게 인생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적사화를 통하여 어떻게
풍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다.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하고 말씀하신다
(4,35).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분부를 따라 순순히 배에 타고 계신 그분을
그대로 모시고 갔다(4,36).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이 거의 배 안에
가득 차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4,38). 사실
예수님께서 먼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으니 이런 상황에
대해서 책임을 지셔야 한다. 그렇다면 주무시고 계시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배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곧 그분의 주권과 신적인 평온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같은 배를 타심으로써 이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신 것이며,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도 주무시고
계시는 것은 인간이 겪는 엄청난 고통과 위기마저도 그분의 주권 아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돌풍이 일어날 수도
있는 호수를 건너자고 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있음이 곧
위험을 이겨내는 길임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를 알아채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4,38) 하고 따진다. 이미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자신들과 함께 있는데도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염려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어 풍랑을 가라앉히셨다(4,39). 꾸짖음은 악한 세력들에 대한
하느님의 책망을 가리키며, 잠잠하라는 것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금지를
명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직접 풍랑을
가라앉히심으로써 곤궁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제자들에게로 눈길을
돌리시어 ‘겁 많음’과 ‘믿음 없음’을 나무라셨다(4,40). 제자들의 잘못은
과연 무엇일까? 단지 믿음이 부족한 것만이 문제일까? 그들의 믿음 부족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점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을 생각하며 위험한 상황을 예수님과 함께 나누려 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이 바로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결정적 열쇠임을
보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 그들이 도주하였을 때도
되풀이되었다.
우리는 어떤까?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 자신과 가족, 신앙공동체가
고난을 겪을 때 그것을 주님과 나누고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받아들이는가?
오히려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붙들고 소유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서로에 대해서도 외면하지는 않더라도 그저 인사치레로 말 몇마디 건네며
피상적인 관심을 보이는데 그치지는 않는가? 아니 좀더 고상하게
'기도해줄께!'라고 말하고선 무책임하게 말로만 그쳐버리는
'기도 공수표'를 남발하지는 않는지.
또 하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가라앉히셔서
제자들이 평온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풍랑을 가라앉혀 주실 능력을 지니신
분이 '함께 계시다'는 알아차림과 수용이 평온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풍랑이 일어나는 자리는 밖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한다. "이 세속의 걱정과 일상의 근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8,2) 걱정 근심에 사로잡힌
가난하지 못한 마음이야말로 풍랑의 뿌리요 가장 큰 문제이지 않은가.
인생의 풍랑 앞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시고
함께 하려는 가난한 마음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십시오.
2015년 나해 1월31일 토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제1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2.8-19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먼저 공지사항 알려드립니다. 제가 오늘부터 2월 8일까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다녀옵니다. 그래서 새벽 묵상글은 이 기간 동안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활동하셨던 이스라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주님을 느끼고 주님의 뜻을 더욱 더 제 안에 간직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 새벽님들을
기억하면서 미사와 기도를 봉헌하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넷이 가능하면
종종 소식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제가 없는 동안 새벽 카페를
잘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어떤 회사에서 운전기사 채용공고를 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습니다. 회사는 많은 응시자 중에서 3명의 후보를 가려서 마지막
면접을 실시했지요. 면접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낭떠러지의 가장자리 끝에 금 덩어리가 놓여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차를
몰고서 이 금 덩어리를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낭떠러지의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두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요?”
첫 번째 응시자는 “저는 운전을 능숙하게 하기 때문에 낭떠러지로부터
2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세우두면 된다고 봅니다.”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응시자는 “저는 운전을 더 잘하기 때문에 1미터 정도에도 충분히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응시자는 “저는 낭떠러지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차를 세우겠습니다. 금 덩어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안전이니까요.”라고 말합니다.
누가 운전기사로 채용되었을까요? 마지막 응시자였다고 합니다. 능숙한
운전보다도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험한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냉정함을 갖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냉정함이 바로 채용 기준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많은 유혹이 다가옵니다. 그때 자신의 재주와 능력만을 믿고서
유혹을 대수롭게 생각한다면 그 유혹에 쉽게 넘어져서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죄의 유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유혹을 과감하게 물리칠 수 있는 냉정함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유혹을 이겨내기란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이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분, 바로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제자들은
거센 돌풍으로 배에서 너무나 힘들어합니다. 사실 제자들 중에는 어부
출신이 많았지요. 그래서 거뜬하게 이겨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들은
예수님을 깨웁니다. 이 모습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유혹의 한가운데
있는 우리는 우리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흔들어야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도 많은 유혹이 내 앞을 가로 막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십시오. 그 모든 유혹들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설렘이 있어야 목표를 이뤄 나가는 과정에서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행복과 재미의 구체적 내용도 설렘이다. 설레는 일이 있어야 삶이 행복하고
재미있다는 이야기다(김정운).
식물은 포기하지 않는다(‘따뜻한 하루’ 중에서)
나는 이 모양인데 저 친구는 왜 저렇게 잘나가는 걸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환경이 그러니까 절대 나아지지 않을 거야. 환경이 안 좋았어도,
얼굴이 예쁘고 잘생겼으니까 잘 된 거야.
나에겐 희망이 없어. 난 능력도 없고,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도와줄 형편도
안 되고, 외모도 별로니까. 내 인생은 죽은 나무고, 버려진 폐품이고,
차가운 아스팔트야. 그런 데선 절대 꽃이 피지 못하는 것처럼..
과연 그럴까요? 죽은 나무에선 다른 꽃이 피어납니다. 버려진 폐품에서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차가운 아스팔트를 뚫고 아름다운 꽃이 곱디고운
자태를 뽐냅니다.
인생은 그렇습니다. 절대, 절대, 절대 희망이 보이지 않다가도 기회가
찾아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을 때 포기하지 않는다면 뛸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날 수 있는 능력이 더해집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오는 기적이 아니고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불시에
찾아오는 인생이 주는 선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혹에 자주 넘어진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깨울 수 있는 용기, 이 용기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을 통해서
나옵니다.
저의 큰 형님이십니다. 어제 회갑 맞이해서 함께 식사를 했지요. 벌써
회갑이시라니... 시간의 빠름에 깜짝 놀랍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2015년 나해 1월31일 토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제1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2.8-19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오늘은 1월 31일입니다. 1월 한 달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충실하게 들었는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았는지 돌아봅니다. 세상의
것을 얻으려는 그 노력만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면 오늘
하루는 피정하는 마음으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는 1988년 5월 4일에
군에서 제대를 했습니다. 벌써 27년 전입니다. 신학교 복학 전에 저는
‘돈보스코 센터’에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돈보스코 센터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직업훈련을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낮에는
직업훈련을 받았고, 방송통신 고등학교에도 다녔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용접도 조금 배웠고,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신학교에 복학 할 때까지 1년가량 지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련한
추억입니다. 돈보스코 센터는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요한 보스코 사제가
설립한 수도회입니다.
신부님과 수사님들은 아이들을 믿어 주셨습니다. 늘 아이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농구, 축구를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굳게
닫혔던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년
후원회원들과 선배들이 참여하는 축제가 열렸습니다. 저도 신학교에
복학한 이후에 그 축제에 함께 했었습니다. 그늘진 곳에 따뜻한 사랑을
비추어주던 신부님과 수사님들이 생각납니다.
어둠이 강하고, 악이 만연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악한
사람들이 많은 중에 소수의 사람이지만 희망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사람들은 사람은 착하고 선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사람들은
지체 없이 구하려 하듯이, 지금은 민둥산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고
예전에는 울창한 숲이었듯이 원래 사람들은 선하고 착하다고 합니다. 다만
악한 기운들이 많아져서 선한 모습을 가렸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을 보면 아주 소수의 사람들일지라도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을
봅니다. 꽃동네의 오 웅진 신부님과 최 기동 할아버지는 단지 두
사람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었고, 지치고 힘든 사람,
얻어먹을 힘조차 없던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데 여러 사람이 필요했지만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한 사람만 있어도 된다고 합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거짓 희망을 보게
됩니다.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좋아지고, 국민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고
하는 말들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기도와 실천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거두어 주신다는 확신을 통해서 현실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이겨내는 것이 참된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희망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배가 항해할 수 있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이 빠지면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면 살이 빠지고 행복해 진다고 말을 합니다. 생활이
안정되면 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생활도 안정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행동 없는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셋째, 희망은 ‘공동체’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시인 박노해
씨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시를 썼습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을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희망은 함께 할 때 현실이 되고, 함께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2015.01.3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금넌도 벌써 한달이 다 지나가네요.
한달 동안 어떠셨나요? 행복하셨나요? 별로였다구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시네요.
1월 한달 살면서 적극적으로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살지 못한 이유가
괜히 사람을 겁내고 일을 겁내고 뭔가 잘못되면 어쩌나
망설임도 꽤 있었음을 간파하시고 하시는 말씀 같아요.
그래요. 2월은 까짓거 겁내지 말고 자신있게 우리 살아봐요.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뭘 두려워하고 뭘 겁낼 게 있나요.
한달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두려움,
걱정거리도 있었지만 이렇게 잘 살아오셨잖아요.
서로에게 수고를 격려하고 함께 해 주었음에 감사하며
오늘을 보내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참된 믿음은 어려울때 드러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월31일 토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마르4,35-41)
제1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2.8-19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참된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며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무엇을 무서워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 꿈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결정적으로
위기 앞에서는 주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 안에 있었는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었습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이쳐서 위험에 처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8)하고 하소연
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을 드러내 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지만 사실은 깨어나야 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실
능력의 주님과 함께 하면서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이
연약한 믿음의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탄
것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동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풍이라는
환난이 옴으로써 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탓입니다. 제자들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풍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 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4,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와 함께 죽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을 접지 마십시오. 폭풍 속에서도 주님은 “잠잠해
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성경에서 밤이란 악마가 활동하는 시간이고, 깊은 물과 풍랑은 생명을
위협하는 혼돈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종종 악의 세력이
거센 풍랑처럼 우리를 위협하여 혼란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역경이 폭풍처럼 휘몰아칠 때 우리는 혼자라는 생각에 더욱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손희송). 시련과 역경
속에서 주님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곁에
함께 계심을 굳게 믿고 그분께 끊임없이 간청하면서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으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행정 부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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