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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 우리나라의 집시법은 정치권력이 권위주의적 폭력으로 변질되는 통로가 된다. 대중들이 자신의 목소리로써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차단하는 최강의 수단이 돼 있기 때문이다. 혹은 자의적인 정치권력을 민중의 감시와 항의로부터 차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압적인 국가권력이 가장 잘 사용하던 폭력방식이 바로 이 집시법의 적용이었다. 사실상 위헌적인 허가제를 취하면서 경찰서장이 마음만 먹으면 어떤 집회든 불법으로 처벌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정치권력에 항의하던 시민들을 무수히 전과자로 만들어 버린 것도 바로 이 집시법이다. 어쩌면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보다 더 반민주적인 법이 이 집시법일지도 모른다. 지난해 9월 헌법재판소가 야간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한 집시법 제10조를 위헌이라 보고 헌법불합치결정을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그것은 ‘야간의 집회’의 가능성에 대한 헌법판단이라기보다는 집시법이 야기했던 수많은 반민주적, 반헌법적 폭력들에 대한 반성이자 일종의 과거청산이다. 헌법재판소가 그 결정문에서 “집회의 자유가 형식적ㆍ장식적 기본권으로 후퇴하였던 과거의 헌정사에 대한 반성적 고려”라는 표현을 쓰고 있음은 이를 대변한다. 과거의 권위주의체제를 벗어나 “관용과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다원적인 ‘열린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헌법적 결단이야말로 이 시대의 당면과제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비판의 십자포화를 받았던 한나라당의 집시법 개정안은 이런 헌법규율을 정면에서 거역한다. 그것은 악법의 대명사로 불렸던 과거의 집시법보다 더 후퇴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집시법은 어쨌건 야간에도 집회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개정안은 야간집회를 원천 금지되는 것으로 못 박는다. 헌재의 결정이 야간집회는 원칙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취지였음에도 한나라당은 이런 결정의 취지를 애써 무시한다. 그들은 야간집회금지시간을 조정하는 것으로 반발을 무마하고자 하지만 사정은 변함이 없다. 대중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그들의 정치참여를 전방위적으로 차단했던 과거의 억압정치를 그대로 반복하고자 할 따름이다. 실제 야간의 집회는 야간의 어둠에 편승한 익명성의 문제라든가 주거의 안전과 평온의 침해가능성 등 분명한 위험인자를 안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와 야간집회의 원천적 금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도심 번화가에서의 야간집회와 주거지역에서의 야간집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또는 한 장소에 국한된 집회와 이동하는 시위나 행진 또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주거지역의 경우, 확성기를 사용하거나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것은 주거권 침해를 야기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집회나 행진이 금지돼야 하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밤새 통행이 빈번한 번화가에서까지 야간집회가 금지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야간’의 문제는 이렇게 개별화돼야 한다. 한나라당은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미국 각지의 조례를 예시하면서 야간집회금지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인권선진국을 자랑하는 우리가 중국이나 러시아 등의 인권후진국의 예를 참조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뿐더러, 미국의 조그마한 주거타운에서 조례에 의해 그것도 야간의 ‘행진(parade)’만을 금지하는 것을 우리 국민들의 입과 귀를 막는 수단으로 원용하고자 하는 것은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집회와 시위는 민중의 것이다. 그것은 민중이 민주정치의 주체로 나서는 최적의 수단이 된다. 아니, 민중이 정치에 나서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이 길거리다. 신문이나 방송은 돈이든 지식이든 가진 자의 전유물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한 사회가 민주사회로 자리매김 됨에 있어 집회와 시위의 보장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소가 야간집회를 금지한 집시법을 위헌이라 한 것은 이 점에서 전향적이다. 모처럼 어렵게 확보한 이 작은 참호 하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는 그 다음의 작업이다. 우리의 주권을 확인할 방법이 길거리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우리 무지렁이 대중들에게 맡겨진 또 하나의 시대적 과업인 것이다. 모쪼록 길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야 하는 억장 무너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