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지정보]
신정일의 신 택리지 – 명당과 길지
신정일 지음 | 2024년 1월 24일 출간 | 값 22,000원 | 쌤앤파커스
[출판사 서평]
‘21세기 김정호’, 도보답사의 선구자이자 문화사학자
《신정일의 신新 택리지》 ‘명당과 길지’ 편 출간!
대한민국 도보답사의 선구자 신정일 작가가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걸으며 완성한 도보답사기 《신정일의 신新 택리지》 시리즈의 아홉 번째 책 ‘명당과 길지’ 편이 출간되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명당과 길지’를 알아낼까? 사람이 살 만한 곳을 고를 때는 첫째로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으로 그곳에서 얻을 경제적 이익, 즉 생리生利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고장의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으로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야 한다. 제일 먼저 물이 흘러나오는 수구水口를 보고 다음 들판의 형세를 본다. 그다음에는 산의 생김새를 보고, 다음에는 흙의 빛깔을, 다음에는 앞에 멀리 보이는 높은 산과 물, 즉 조산朝山과 조수朝水를 본다. 이 책은 신정일 작가가 직접 두 발로 찾아낸 한반도 최고의 명당과 길지를 소개한다. 땅과 길에 관한 신정일 작가만의 남다른 식견은 물론이고, 산 주변과 평야, 강가와 바닷가 등 ‘사람이 살 만한 곳’에 관한 흥미진진한 지리, 역사, 사람 이야기가 펼쳐진다.
[도서 소개]
“한반도 최고의 명당은 어디인가?”
문화사학자 신정일이 두 발로 쓴 ‘명당과 길지’ 이야기
대한민국 도보답사의 선구자 신정일 작가가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걸으며 완성한 도보답사기 《신정일의 신新 택리지》 시리즈의 아홉 번째 책 ‘명당과 길지’ 편이 출간되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명당과 길지’를 알아낼까? 사람이 살 만한 곳을 고를 때는 첫째로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으로 그곳에서 얻을 경제적 이익, 즉 생리生利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고장의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으로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야 한다. 제일 먼저 물이 흘러나오는 수구水口를 보고 다음 들판의 형세를 본다. 그다음에는 산의 생김새를 보고, 다음에는 흙의 빛깔을, 다음에는 앞에 멀리 보이는 높은 산과 물, 즉 조산朝山과 조수朝水를 본다. 대체로 물이 흘러나오는 곳이 엉성하고 넓기만 한 곳은 아무리 좋은 밭과 넓은 집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대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곳곳에 숨은 재미있는 지리, 역사, 사람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은 마치 입담 좋은 해설사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꼼꼼히 답사하는 것처럼 한반도 최고의 명당과 길지의 지형과 지세, 그곳에 얽힌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 전해 내려오는 설화들, 지명의 유래까지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땅에도 의지와 이치가 있으니
사람은 산하의 정을 닮는다
• 무릇 주택지에 있어서 평탄한 데 사는 것이 가장 좋고, 사면이 높고 중앙이 낮은 데 살면 처음에는 부유하다가 나중에는 가난해진다.
• 풍수에는 도읍이나 군현, 마을 등 취락을 중심으로 하는 양기풍수와 개인의 주택 자리를 보는 양택풍수 그리고 조상의 묏자리를 잡는 데 쓰이는 음택풍수가 있다. 음택이든 양택이든 좋은 땅을 고르는 방법은 본질적으로 같으며 간룡법, 장풍법, 득수법, 정혈법, 형국론을 활용한다.
• 예로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꼽았던 ‘영남의 4대 길지’는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과 안동 도산의 토계 부근, 안동의 하회마을, 봉화의 닭실마을이다. 네 곳 모두 산과 물이 어우러져 경치가 좋고 들판이 넓어 살림살이가 넉넉했다.
• 안동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말이 있다. 허씨들이 처음으로 하회마을을 개척했고 이어서 안씨들이 문중을 이루었으며, 류씨가 잔치판을 벌이고 흥청거릴 정도로 가문이 번성했다는 말이다.
• 이중환은 예안과 안동, 순흥, 예천 등 태백산과 소백산 아래의 지역을 “신이 가르쳐 준 복지”라 하여 전국 제일의 거주지로 꼽았다. 예로부터 이곳 양백兩百 지역은 《정감록》의 비결처이자 십승지 중의 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 박남현은 8만 석의 땅을 가졌다고 알려졌는데, 한성까지 자기 땅만 밟고 갈 수 있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풍수설에 따르면 그 명당자리가 일대 발복에 그치는 것이어서 그가 죽자마자 여덟 채의 집이 불에 타는 등 순식간에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신정일 작가는 30년 넘게 우리 땅 곳곳을 답사한 전문가로 각 지역 문화유적은 물론 400곳 이상의 산을 오르고, 금강·한강·낙동강·섬진강·영산강 5대 강과 압록강·두만강·대동강 기슭을 걸었으며, 우리나라 옛길인 영남대로·삼남대로·관동대로 등을 도보로 답사했다. 부산 오륙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닷길을 걸은 후 문화체육관광부에 최장거리 도보답사 길을 제안하여 ‘해파랑길’로 조성되었고, 그 외에도 소백산자락길, 변산마실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의 개발에 참여하였다. 이렇듯 두 발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걸어온 신정일 작가를 김용택 시인은 “현대판 김정호”라 했고, 도종환 전 문화관광부장관은 “길 위의 시인”이라고 했다. 김정호가 그랬듯 산천 곳곳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국토 인문서로 독자들에게 이 땅의 인문지리학적 통찰과 함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차례]
1 어떻게 살 것인가 : 땅에도 의지와 이치가 있으니
군자는 마을을 반드시 가려 택하고 | 사람이 사는 곳은 나무가 자라는 높이까지 | 풍속이 변하면 인심도 변한다 | 사람은 사람의 미래다 | 무릇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 명산에 명산 없고
2 어디에서 살 것인가 : 사람은 산하의 정을 닮는다
사대부로 산다는 것 | 사람이 살 만한 땅 | 산천의 영기로 선량한 사람이 태어나고 | 바람 들일 창 하나, 햇볕 쬘 마루 한 쪽 | 무릇 주택지에 있어서
3 산과 물이 어우러져 살 만한 곳 : 물이 휘돌아 마을 앞에 머무르고
강의 시작은 모든 곳의 시작 | 거처한 땅의 이름으로 호를 짓다 | 퇴계 이황이 살았던 도산 | 강물이 휘돌아 가는 하회마을 | 풍산 류씨 동족 마을 | 임하댐 아래에 있는 의성 김씨 학봉종택 | 묘한 아름다움이 있는 성천댁 | 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의 닭실마을 | 대대로 외손이 잘되는 양동의 서백당 | 태백산 남쪽에 있는 한수정 | 죽계구곡이 있는 순흥 | 임청각에서 낙동강 물을 바라보다
4 강가에서 살 만한 곳 : 물길과 바람이 조화로운 강 마을
단양팔경이 어디멘고 | 나라 안에서 가장 살 만한 강 마을 | 춘천의 우두벌 | 한강 변의 여주, 동창천 변의 청도 | 삼가천 변의 우당고택 | 큰물이 쉽게 드는 강 마을
5 바다는 끊임없이 새로 시작하고 : 항구에 불빛은 깜빡거리고
우리나라의 해안선 | 변모에 변모를 거듭한 항구 | 아름다운 항구 삼천포
6 사대부들이 대를 이어 살았던 곳 : 정자와 수목의 그윽한 경치
아무도 내 마음 아는 이 없으니 | 명옥헌에는 눈부신 배롱나무꽃이 피고 | 들판 가운데 자리 잡은 시냇가 마을 | 계곡이 아름답고 나무숲이 울창한 곳 | 난리를 피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땅 | 계정동과 징파도 | 금강 변의 고을들 | 양산팔경이 있는 금강 | 추풍령 일대의 산과 들
7 명당 중의 명당, 서원과 정자 : 사람들이 모이고 머무르는 자리
조선 성리학의 요람 | 우리나라 서원의 시작은 백운동서원 |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세워진 서원 | 산수 좋은 곳에 세운 누정 | 정자는 사람이 모이고 머무르는 곳 | 정자에서 흐르는 계곡을 바라보며 | 사대부들의 지적 활동 공간
8 인심이란 무엇인가 : 순후한 옛 풍속은 변함없이 남아
인심을 가려 살 터를 마련하니 | 전라도의 물길은 산발사하 | 인걸은 지령으로 태어난다 | 동서 붕당의 시작 | 불확실성의 시대 |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의 전말 | 붕당으로 공존의식이 무너지고 | 정읍에서 사사된 송시열 | 이중환이 연루된 신임사화 | 탕평의 시대가 열리고 | 당쟁으로 변화된 팔도의 인심 | 오직 들리는 것은 만당의 웃음소리뿐 | 권력은 씨앗 다툼 같은 것이라 나눌 수가 없고
9 생리란 무엇인가 : 인간은 자연의 손을 놓지 못하고
넉넉하게 된 뒤에 가르친다 | 땅이 기름지면 오곡 가꾸기에 알맞고 | 산에도 가깝지 않고 바다에도 가깝지 않고 | 나라가 태평함에도 가난했던 조선 | 조선의 특산물 | 몸은 하나이고 기능은 네 가지인 돈 |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 나라 | 인간이 자연의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
10 풍수, 음택과 양택 : 산수가 어울려 음양이 화합하니
풍수지리란 무엇인가 | 음양과 산수 | 죽은 사람은 생기에 의지하고 | 지팡이를 짚고 천리 길에 올랐던 도선 | 우리나라에 이름난 풍수사들 | 동기감응이란 무엇인가? | 조상이 편안하면 후손이 편안하고 | 덕 있는 사람이 길지를 만난다 | 옛사람들의 풍수관 | 좋은 땅은 과연 존재하는가 | 뭇 산이 머무는 명혈이 유원지가 되다 | 진산과 도읍풍수 | 고을을 옮기고 시장을 열고 | 우리나라에 이름난 명당 | 아시아의 주거풍수 | 이해의 기쁨이 곧 아름다움이다 | 산이 인접한 강기슭이 살 만한 곳
[저자소개]
신정일
문화사학자이자 도보여행가.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으로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가져온 도보답사의 선구자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펼쳤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 10대 강 도보답사를 기획하여 금강·한강·낙동강·섬진강·영산강 5대 강과 압록강·두만강·대동강 기슭을 걸었고, 우리나라 옛 길인 영남대로·삼남대로·관동대로 등을 도보로 답사했으며, 400여 곳의 산을 올랐다.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닷길을 걸은 후 문화체육관광부에 최장거리 도보답사 길을 제안하여 ‘해파랑길’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었다. 2010년 9월에는 관광의 날을 맞아 소백산자락길, 변산마실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을 만든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독학으로 문학·고전·역사·철학 등을 섭렵한 독서광이기도 한 그는 수십여 년간 우리 땅 구석구석을 걸어온 이력과 방대한 독서량을 무기로 《길 위에서 배운 것들》, 《길에서 만나는 인문학》, 《홀로 서서 길게 통곡하니》,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곳 33》, 《섬진강 따라 걷기》,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전3권), 《낙동강》, 《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등 60여 권의 책을 펴냈다.
[추천사]
신정일의 책은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이 땅 구석구석을 누구보다도 많이 걸었던 그의 발이 쓴 국토 교과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덕일, 역사가
《택리지》의 현장정신을 계승한 신정일 저자는 30년 넘게 전국의 산천을 답사한 전문가이다. 아마 이중환보다 더 다녔으면 다녔지 못 다닌 것 같지가 않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안 가본 산천이 없다.
-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우리가 사는 지금, 김정호 선생을 닮은 사내가 있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산을 오르기 시작한 그가 다음은 강 길을 걷더니, 이제는 아예 우리나라 전 국토를 이 잡듯 뒤지며 걷고 또 걷는다. 나는 그를 보며 나는 ‘저 사내 틀림없이 김정호 귀신이 씌었지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한다. 현대판 김정호, 그가 바로 신정일이다.
- 김용택, 시인
신정일 선생은 촌놈 같기도 하고 동학군 같기도 하여 어수룩해 보인다. 그런데 이 ‘촌놈’의 얘기가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절로 무릎을 치게 한다. 신정일은 무당처럼 답사를 한다. 이렇게 혼이 실리고 신명나는 답사의 궤적을 따라가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 이정만,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이 책은 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산과 들, 강과 바다, 시간적 과거들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소망들을 책상물림이나 머리로 쥐어짜는 짱구들의 억지 글과는 판이하다. 그는 자기의 발이 도달한 산천 도처에서, 금강의 여러 구비에서 울고 웃는다. 나는 그를 ‘발로 쓰는 민족사상가’라고 부른다.
- 김지하, 시인
우리가 사는 이 땅을 구석구석 밟아보고, 그 땅의 자연과 물산과 그 땅에 심어 놓은 조상의 문화를 직업 체험하면서 죽도록 이 땅을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250년 전에 이중환은 불우한 가운데서 그런 일을 했고, 《택리지》라는 명저를 냈다. 150년 전의 김정호도 이 땅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아름다움을 《대동여지도》로 그려냈다. 그런데, 바로 지금 또 하나의 21세기 《택리지》가 나타났다. 세월이 변하고 국토가 변하고, 문화가 바뀐 이 시점에서 당연히 《택리지》는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고, 그 일을 신정일이라는 문화사학자가 일구어냈다. 비록 분단의 북쪽 땅을 샅샅이 밟아보지 못하고 일부분만 보았으나 이 책은 왜 우리가 죽도록 이 땅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뜨거운 가슴으로 말하고 있다. 귀중한 현장 사진과 더불어 옛날과 지금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면서 땅과 사람의 대화를 그려낸다.
-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책 속에서]
류성룡柳成龍의 6대조인 류종혜柳從惠는 풍산 상리에서 살다가 길지를 찾아 지금의 하회마을로 이주했다. 류종혜의 조부이자 고려의 도염서령都染署令이라는 관직에 있던 류난옥柳蘭玉이 풍수에 밝은 지사를 찾아가서 택지를 구했다고 한다. 이때 지사는 3대 동안 적선을 한 뒤라야 훌륭한 길지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류난옥은 하회마을 밖 큰길가에 관가정觀稼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적선을 베풀기 시작했다.
류종혜가 길지를 잡아 발복한 까닭인지 점차 류씨 가문이 번성하고 류성룡과 류운룡이 활약하면서 대단한 문벌을 이루게 되자 화산 기슭의 허씨와 안씨들은 상대적으로 문중이 위축되면서 마을을 뜨는 사람이 늘어났다. 결국 하회마을은 화산 기슭에서 지금의 화안에 자리 잡은 류씨들의 세거지지로 중심을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 역사가 담긴 말이 하회마을에 전해져 온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말이다. 김해 허씨가 터를 닦아 놓은 그 위에 광주 안씨가 집을 짓고 풍산 류씨는 안씨 집 앞에서 잔치판을 벌였다는 뜻으로, 풀면 허씨들이 처음으로 하회마을을 개척했고 이어서 안씨들이 문중을 이루었으며, 류씨가 잔치판을 벌이고 흥청거릴 정도로 가문이 번성했다는 말이다. 류성룡의 선조가 하회에 자리를 잡게 된 연유를 보면 조선의 사대부들이 살고자 했던 땅과 짓고자 했던 집, 살고자 한 삶이 무엇이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 77p, 무릇 주택지에 있어서
예로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꼽았던 ‘영남의 4대 길지’는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과 안동 도산의 토계 부근, 안동의 하회마을, 봉화의 닭실마을이다. 네 곳 모두가 ‘사람이 모여 살 만한 곳’으로 대부분 산과 물이 어우러져 경치가 좋고 들판이 넓어 살림살이가 넉넉했다. 특히 낙동강 범람으로 만들어진 저습지를 개간한 하회마을 입구의 풍산평야는 안동 일대에서 가장 넓은 평야이며, 또 양동마을 건너편에는 형산강을 낀 안강평야가 발달해 있다.
앞서 살폈듯 이중환은 이 중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우리나라 시냇가에서 가장 살 만한 곳으로 꼽았다. 게다가 “도산은 두 산줄기가 합쳐져서 긴 골짜기를 만들었는데 산이 그리 높지 않다. (태백) 황지에서 비롯된 물이 이곳에 와서 비로소 커지고 골짜기의 입구에 이르러서는 큰 시냇물이 되었다”라고 했다. 그 말은 최근에 와서 더욱 들어맞는다. 지금의 도산서원 일대는 안동댐으로 더 드넓어져 바다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토계마을은 현재 안동댐에 수몰되어 그 지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 90p 퇴계 이황이 살았던 도산
내앞마을은 ‘완사명월浣紗明月’의 형국, 즉 비단옷을 밝은 달빛 아래 깔아 놓은 명당이라고 하여 영남의 길지 중 하나로 보았던 곳이다. 이 마을 앞쪽 강 건너편에 길이 나 있는데 옛날에는 길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마을 바로 앞으로 34번 국도가 지나가고 마을 앞쪽에 음식점이 들어서서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다. 이 마을에는 “종가 사랑채 마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의 갓 꼭지가 보이면 이 땅의 정기가 다 빠진 때이므로 이 터를 떠나라”라는 선조의 유훈이 대대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래서 후손들은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의 금광평에 집터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와 같은 예언이 들어맞아선지 집 앞으로 국도가 생기고 바로 위쪽에 임하댐이 들어섰으며 영양, 청송, 안동으로 향하는 차들이 쉴 새 없이 다니고 있다.
- 118p 임하댐 아래에 있는 의성 김씨 학봉종택
마을의 유래에 의하면 이곳 양동마을은 ‘대대로 외손이 잘되는 마을’, 즉 외손발복外孫發福의 터라고 하는데 이곳 손씨 대종가인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는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있다. 외가에서 출생한 이언적은 별다른 스승이 없이 외삼촌인 손중돈이 관직 생활을 했던 양산, 김해, 상주 등지를 따라다니면서 학문적, 인간적 가르침을 받았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 서백당의 며느리 방에서 서원에 배향되는 혈식군자血食君子(불천위로 모시는 조상) 세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외손인 이언적이 태어난 뒤부터 그 방은 며느리 외에는 그 누구도 거처하지 못하게 했다. 월성 손씨들은 지금도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다고 주장하고, 여강 이씨들은 그렇지 않다고 맞서 두 집안의 갈등으로 비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 중 그 무엇 하나 스승이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 129p, 대대로 외손이 잘되는 양동의 서백당
이 집은 방술상 동쪽을 향해 용用 자형으로 설계된 집이다. 건물 가운데 몇 개의 작은 행랑과 중정이 있는 이런 모양을 양택풍수陽宅風水에서는 길하다고 한다. 이 집은 동서 양쪽에 문을 만들었으나 남쪽으로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면부지의 한 승려가 찾아와 이 집을 자세히 살펴보고 남쪽 벽에 작은 문이라도 내면 도난을 피할 수 있다고 권했다. 오래전부터 도난 때문에 고심하던 주인은 이 말을 받아들여 작은 문 하나를 남쪽 벽 사이에 달았다. 그 후 자주 이 집을 드나들던 도둑이 이 작은 문으로 집 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눈이 캄캄해져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집 안 사람들에게 붙잡혀 추방을 당했는데, 금세 눈이 보이게 되었다. 이런 사실이 근방에 알려지자 ‘도둑의 눈을 멀게 하는 이상한 문’으로 소문이 나서 인근의 도둑들이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 집의 동북쪽 한 귀퉁이에 있는 내방內房은 세 사람의 정승을 낳는 방으로서 이미 두 사람의 정승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태어나 상주시 낙동면 류씨 집으로 시집간 딸이 임신한 뒤 몸이 무거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딸이 그 방을 좋아하여 어머니가 말려도 해산 때까지 기거했다. 마침내 그 방에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자라서 영의정을 지내는데, 류심춘柳尋春이라는 인물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기이한 점은 이 집 며느리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 방에 기거하면서 해산하여 정승을 낳은 두 사람 모두 출가외인이었다.
- 142p, 임청각에서 낙동강 물을 바라보다
이중환은 예안과 안동, 순흥, 예천 등 태백산과 소백산 아래의 지역을 “신이 가르쳐 준 복지”라 하여 전국 제일의 거주지로 꼽았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에 태백산, 각화산, 문수산, 선달산, 소백산 등 큰 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산 아래에 낙동강의 지류인 금계천, 죽계천, 사천, 낙화암천, 운곡천, 황지천, 철암천 등 수많은 물줄기가 사람이 살 만한 땅을 펼쳐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곳 양백兩百 지역은 《정감록》의 비결처이자 십승지 중의 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두 번째로 꼽았던 곳이 진안, 금산, 장수, 무주 등의 금강 상류 일대이다. 현재 진안의 운장산 자락에서 발원한 주자천은 경치가 좋기로 소문난 운일암雲日巖과 반일암半日巖을 지난 뒤 용담댐으로 접어들었다가 금강으로 합류하고 금산의 봉황천과 조정천 역시 금강으로 접어든다. 또한 장수의 장계천은 장수천과 합하면서 금강으로 유입되고, 무주의 남대천은 구천동 계곡을 지난 뒤 무주읍 대차리에서 금강으로 들어간다.
-242p, 금강 변의 고을들
어쩌면 정여립 사건은 호남의 음식과 풍류가 발전하게 된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들이 넓고 물산이 풍부한 덕에 음식 문화가 꽃을 피워 그 기반 위에서 문화 예술이 발전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위의 주장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전 태조에서 선조 때까지 전국의 생원과 진사 합격률을 보면 서울이 1위, 전주가 2위, 나주가 3위, 남원이 상위권이었는데 선조에서 숙종 때까지를 살펴보면 서울이 1위이고 전주는 10위, 나주는 11위에 머물고 있다. 결국 기축옥사가 일어난 뒤 호남 사대부들은 벼슬길이 막히게 되자 맛이 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풍류를 즐기게 되어 맛과 멋의 고장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 317p,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의 전말
풍수에는 도읍이나 군현, 마을 등 취락을 중심으로 하는 양기풍수와 개인의 주택 자리를 보는 양택풍수 그리고 조상의 묏자리를 잡는 데 쓰이는 음택풍수가 있다. 풍수에서 음택이든 양택이든 좋은 땅을 고르는 방법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한다. 그 원리는 간룡법, 장풍법, 득수법, 정혈법, 형국론 이렇게 다섯 가지다.
우선 간룡법看龍法은 ‘용을 보는 방법’이다. 풍수에서는 평지보다 한 치만 높아도 산이라 부르며 그것을 곧잘 ‘용龍’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한다. 따라서 ‘용’은 산이나 산맥을 이르는 말이며 정기가 흘러내리는 길을 나타내는데, 그 길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데 필요한 법칙이 곧 간룡법인 것이다(그러므로 ‘용’이라 할 때, 용을 닮은 산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다음 장풍법藏風法이란 산을 타고 흘러내린 정기가 바람을 타고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 즉 ‘바람을 가두는 방법’을 말한다. 그리고 득수법得水法이란 물을 얻는 방법으로서, 땅속의 정기는 물줄기를 타고 옮겨 다니기 때문에 물이 고이는 곳에는 정기도 함께 모여든다는 것이다. 또 정혈법定穴法은 정기가 뭉쳐 있는 곳을 찾아내는 기술이며, 형국론形局論은 산의 형세나 물의 흐름 등을 동식물이나 사람 또는 사물에 견주어 나타내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좋은 터’는 형국론을 빌려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410p, 음양과 산수
풍수로 인해 하나의 마을이나 고을을 옮긴 일도 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犢川里의 ‘독천장’은 1899년 용산리에 있던 것을 옮겼다고 하는데 그렇게 된 연유가 재미있다. 이 시장의 북쪽에는 묘가 하나 있는데, 그 주인은 영암면 망호리에 사는 사람으로 이곳이 땅의 기운이 왕성한 명당터라고 하여 묏자리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바람이 헛되지 않아 자손들이 번성했으나 친족들 사이에 자주 간통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지관을 데려다 묘지를 살펴보게 하자, 묘 앞으로 음수陰水가 마르지 않고 왕성하게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막기 위해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든지 아니면 왕성한 음기를 풀어 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자손이 번성하고 발복이 현저한 명당을 버리고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그 집안에서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음기라는 것은 본래 여성의 기이므로 남성의 기운이 감돌게 하면 기가 약화될 것이라는 절묘한 해석과 방법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을 묘 앞에 개설하기로 하고 인근 용산리에 있던 오일장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그 뒤부터는 불순한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 456p, 고을을 옮기고 시장을 열고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청천장은 우암 송시열의 묘를 경기도 수원에서 이곳으로 이장할 때 새로 개설한 것이다. 송시열의 묘는 시장 뒷산에 있으며 풍수로 따지면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의 명당이라고 한다. 그런데 장군은 수많은 병사를 거느리는 법이므로 풍수에서도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병사가 없으면 장군의 위엄도 없고 따라서 발복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묘를 쓰는 산에 많은 병사가 있을 리 없으므로 수를 써야 했다. 송시열의 후손인 송종수宋宗洙는 결국 수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시골장을 묘 앞에 개설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청천동민과 의논하여 시장을 건설하는 데 드는 비용을 주선한 뒤 엽전 300냥을 기부했고, 그에 따라 묘지 앞에는 오일장이 들어서 수많은 사람이 마치 병사처럼 모여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 곳이 박문수朴文秀의 묘 아래 자락에 있는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장이다. 오늘날 병천순대로 널리 알려진 아우내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시민金時敏과 독립운동가 조병옥趙炳玉이 태어난 곳으로 3·1운동 당시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바로 그 장터다. 그런데 이곳에 시장이 개설된 이유가 재미있다.
박문수가 이곳 병천 지방에 체류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의 마부 노릇을 했던 김모씨는 지관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런 연고로 해서 박문수는 그에게 자신의 묏자리를 미리 잡아 달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지금의 은석산銀石山 정상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의 형세 역시 ‘장군대좌형’이기 때문에 박문수의 후손들도 병천시장을 개설함으로써 지세의 문제를 해결했다. 박문수는 분묘로부터 시장이 보이는 동안은 자손이 번창하지만 만약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기면 그 즉시 자손들이 몰락할 것이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의 묘는 옮길 수도 없는 묘가 되고 말았다.
- 458p, 고을을 옮기고 시장을 열고
예전 같으면 그 유명한 만석꾼을 12대나 이어간 경주의 최 부잣집이나 청도의 9대 만석꾼 심 부잣집을 최고의 부자로 꼽았겠지만 요즘에는 사업을 통해 재산을 늘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수많은 부자들, 특히 재벌이라고 일컫는 기업주들이 나타났다. 그들 중에는 때로 하루살이처럼 금세 사라지는 사람도 있고 날이 갈수록 번창해 가는 사람들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 전라남도 강진에 터를 잡고 살았던 김충식과 보성의 박남현(일명 박필만)을 예로 들어 보자. 이 중 김충식은 마량 수군 만호를 지낸 김도순의 손자인데 장사로 돈을 벌었던 사람이다. 그는 해상운송업을 시작해 벌어들인 돈으로 병영, 작천 일대의 농지를 대량으로 사들여 농장을 설립했다. 그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영등포에 제약회사를 설립하기도 하면서 화산백화점의 박흥식, 광산왕 최창학과 함께 한국의 3대 재벌로 꼽혔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농지 분배로 땅을 빼앗긴 데다가 축첩으로 인한 자식들 때문에 깡그리 망하고 말았다.
박남현은 8만 석의 땅을 가졌다고 알려졌는데, 지금의 평수로 보아 1600만 평의 땅을 가진 부자로서 한성을 갈 때는 자기 땅만 밟고도 갈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풍수설에 따르면 그는 명당을 써서 당대에 8만 석 지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명당자리가 일대 발복에 그치는 것이어서 그가 죽자마자 3500평의 대지에 세운 여덟 채의 집이 불에 타는 등 순식간에 가세가 기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집이 망한 이유는 축첩한 결과 후손들의 재산 싸움이 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467p, 우리나라에 이름난 명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