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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행복, 절대적 행복
●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 시리즈 여섯 번째, 오늘은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행복에 대하여 나누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이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지식이나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불행한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불행하다는 것이고, 행복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1. 상대적 행복과 절대적 행복
행복에는 상대적 행복이 있고, 절대적 행복이 있습니다.
상대적 행복이란 나와 가정과 사회라는 삼자 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입니다. 예를 들면 가정의 가치관이 바르고, 부모님에게 정신적으로 배운 것이 많고, 사회가 바르고 나 자신이 바르게 살아갈 때 누리는 행복이 상대적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절대적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가정이나 사회가 아무리 일그러졌을지라도 그 일그러짐에 영향을 받지 않는 행복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절대적 행복을 누린 사람입니다(합3:16~!8).
하박국은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심판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온 나라가 환란 당할 것을 듣고 하박국이 느끼는 고통을 이렇게 말합니다.
(합 3:16 쉬운) 이 모든 것을 들으니 내 창자가 뒤틀립니다.
그 (전쟁)소리를 들으니 내 입술이 떨립니다. 내 뼈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치러 오는 백성에게 닥칠 재앙의 날을 참고 기다리겠습니다.
하박국은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해서 듣고 창자가 뒤틀리고 입술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 식중독에 걸린 것처럼 창자가 뒤틀렸습니다.
골수암에 걸린 자처럼 뼈가 썩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런 상황 중에서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합 3:17) 전쟁으로 인하여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논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7절 한 절에는 없다는 말이 무려 6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없다고 하는 것들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생활필수품들입니다.
무화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로 먹는 과일이고, 포도주는 음료수의 주종입니다.
감람나무는 기름을 짜는 것이고, 밭의 식물은 하루 세끼 일용할 양식입니다,
양은 털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이고, 소는 농사를 짓는 수단이며, 동시에 양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제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런 꼭 필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이스라엘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없는 것들로 인하여 불평하지 않았고 불행하지도 않았습니다.
(합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박국은 오히려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구원하시고 과거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박국은 다시 부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없음이 아니라 미래의 풍선한 모습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즐겁고 기뻐했습니다. 미래에 영광의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기쁨을 주고 즐겁게 합니다. 믿음은 한계상황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절대적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돈, 지위, 명에,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내적 행복을 절대적 행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 인하여 즐거워합니까? 어떤 때 즐겁습니까?
우리는 대체로 17절 말씀과 정반대일 때 아주 기쁘고 즐겁지 않습니까?
무화과 열매가 풍성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풍성하고, 논밭에 식물이 가득하고, 우리에 살찐 양이 많고, 외양간에는 소가 송아지까지 낳아서 젖을 먹이고 있을 때 매우 기쁘고 즐겁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목사는 양이 많아야 기쁩니다.
성도들은 월급이 좀 올라가야 기쁨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치르는데 신기하게도 공부한 데서만 문제가 나오고 예상외로 좋은 학점이 나올 때 기쁨이 있습니다.
좋은 직장이 생기고 돈이 생겨야 즐겁고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때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런데 하박국은 언제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까?
그는 구원의 하나님의 믿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앞으로 구원하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금의 시련을 통해 연단 하시고 장차 크게 구원하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믿으니 즐거웠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 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기뻐하세요.)
하박국은 2장에서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 때 즐겁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믿음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바울은 매를 맞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믿음으로 찬송하면서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쓰면서 믿음으로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은 친히 로마와 세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임재의 역사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아브라함도 현재는 아들, 딸 하나 없지만 앞으로 하나님께서 뭇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실 것을 믿고 기뻐했습니다. 믿음 자체가 기쁨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뻐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기뻐할 때 얼굴이 예뻐지고 행복합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2.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신33:29)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축복한 유언의 내용이 신명기 3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이런 축복을 합니다(신33:24-29).
(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무슨 말씀입니까?
있고, 없고, 가졌고 못 가졌고, 누리고 누리지 못하는 외부로부터 오는 만족을 행복의 기준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인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것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행복의 목표로 삼고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절대적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3. 쌍둥이 야곱과 에서(창25:31~33)
오늘 본문에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등장을 합니다.
먼저 에서를 상대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야곱은 절대적 행복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의 배경은 살펴보면 어느 날 에서가 사냥을 하고 돌아오니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너무나 배가 고파 동생 야곱에게 ‘동생아, 내가 배가 고프니 그 붉은 것을 내가 좀 먹게 해다오“(30절)고 말합니다.
그러자 형의 약점을 알고 있는 야곱이 약삭빠른 짓을 합니다.
31절에 보면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형, 먼저 형의 장자 권을 오늘 내게 파시오."
에서는 대답합니다.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장자 권이 내게 무슨 소용이냐?" 하고는 그 소중한 장자 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습니다.
에서는 훗날 깨닫고 보니 소중한 것을 알았지만 이미 빼앗긴 후였고, 잃어버린 다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히브리서 12:16절에 보면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에서를 망령된 자, 어리석은 자로 평가했습니다.
그것은
“음란한 죄를 범하지 말며, 에서처럼 하나님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에서는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었지만, 한 그릇의 먹을 것을 위하여 맏아들의 특권을 팔고 말았느니라”라는 뜻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상대적인 행복 때문에 절대적인 행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4. 장자 권의 중요성
오늘 본문에 장자의 명분이란 말이 4번이나 나왔습니다. 장자 권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장자 권이 중요할까요?
첫째는 제사의 권한이 장자에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에게는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제사드릴 특권이 장자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둘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기업으로 얻게 되는 권한이 장자에게 있었습니다.
앞으로 계속되는 기업을 이을 자는 장자였습니다.
셋째는 메시아의 계보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장자 권이 계승되는 혈통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십니다.
(마1:2)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
야곱 대신에 에서가 들어가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에서는 이 귀한 축복을 한 끼의 배고픔을 참지 못해 경솔한 행동을 했습니다.
더욱더 장자 권의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축복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축복하셔야 소득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연습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시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유명한 성경 해설자 매튜 핸리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도와주심과 성공케 하심과 자비로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설교도 할 수 없고, 강연도 할 수 없고 축도도 할 수 없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복의 근원이 되어 복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일시적인 배고픔 때문에 포기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에서가 실수했으니 에서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까?
먹고사는 문제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뜻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34절 끝부분에 있습니다.
(창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이 말씀은 에서의 사람 됨과 그의 본성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에서는 영적인 신령한 권리와 신령한 축복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과 신앙,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장자의 명분을 소홀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임종을 맞이하면서 로마서 8;18절을 수없이 반복하며 외웠다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어떤 고난을 받을지라도 심지어 죽는 고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5. 보이는 것(육적인 것)과 보이지 않는 것(영적인 것)의 중요성
보이는 육적이고 물질적인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 영원한 것에 대한 큰 가치를 두고 소중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자꾸 되새기고 강조하는 것입니까?
사람은 너무 자주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려운 일을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서처럼 육체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말씀에 묶어두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행동을 계속해야 썩어질 것들에게 메이지 않는 것입니다.
에서를 보십시오. 창세기 28:8~9을 보면 에서는, 자기 아버지 이삭이 가나안 사람의 딸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어긋장 나게 가나안 여인인 마할랏과 결혼을 합니다.
부모님과 상관없이 오히려 부모님이 싫어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보다 육체적인 욕심에 더 집착했던 사람입니다.
보이는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팥죽을 달라고 할 때도 그렇습니다. 순간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좀 더 참고 기다리면 됩니다. 조금만 참으면 온 식구와 함께 웃으면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형, 사냥 나갔다가 오늘은 허탕치고 왔네, 피곤하겠어. 많이 먹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배가 고파서 기다릴 수 없으니까 당장 내놓으라고 합니다.
32절에 보면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정말 죽게 되었습니까? 한끼 배고픈 것으로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배고파 죽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한 사건을 과장하는 것, 스스로 위기를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로 성도들 가운데는 약간의 문제만 생기면 더 이상 못 살겠다느니, 이제 끝이라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느니 하는, 에서와 같은 스타일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너무 눈에 보이는 것, 현실적인 것에 매여 정말 중요한 신앙까지 잃어버리지는 마십시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성도들에게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고후5:1-3, 7 새번역)
(고후 5:1)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육체)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고후 5:2)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이 장막 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고후 5:3) 우리가 이 장막을 벗을지라도, 벗은 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고후 5:7)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지만 신령한 것, 영원한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육체를 위한 것을 위해 죽기 살기로 매달리지 마시고 영적인 것에 매달리십시오.
눈앞에 당장 떨어지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더 좋은 미래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고사성어에 조삼모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송나라 때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좋아하여 집에서 많이 키웠는데 날이 갈수록 숫자가 많아져 먹이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원숭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열매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씩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데모를 합니다. 적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말을 바꾸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도 당장 눈앞에 떨어지는 것만 생각하고 미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에서의 스타일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제 본문 34절의 유감스러운 장면을 생각하며 마치겠습니다.
(창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너무 배가 고파서, 헛소리를 했다손 치더라도 팥죽 먹고 배부른 다음에라도 정신 차리고 “야곱아,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었다” 하고 말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잘못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먹고 마시고 일어나 그냥 가 버렸습니다.
에서는 그 한마디 말을 못해서 평생 은혜 없는, 복 없는 생을, 원망하는 생을 살아가는 어리석고 망령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후에라도 “야곱아 미안하다” 하며 반성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창세기 27:36-41절을 보면 야곱이 간사하고 나쁘다며 증오하며 죽이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망령된 행동이었습니다.
에서는 야곱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간직하지 못하고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현세적인 것, 눈앞에 당장 벌어지는 사건에 매여 신령한 것. 영원한 것, 은혜로운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방법으로는 잘못한 점이 있습니다만 신령한 복, 절대적인 복을 간절히 사모한 나머지 마침내 장자의 기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소홀히 여겼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극대화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보이는 일시적인 행복에 올인 할 것이냐? 아니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것, 신령한 것에 가치를 두고 목숨을 거느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상대적 행복을 추구할 것이냐? 절대적 행복을 추구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야곱의 길이냐? 에서가 걸었던 길로 갈 것이냐?
여러분, 스스로 가야 할 목표를 정하십시오,
그러나 어리석다거나 망령되었다는 평가를 듣지 않도록 올바른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십시오.
(딤전6:17-19 새번역)
(딤전 6:17)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딤전 6:18)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
(딤전 6:19)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아멘.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보이는 행복에 집착하지 말고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상황과 관계에서 오는 상대적인 행복이 아니라 상황에 상관없이 누릴 수 있는 절
대적인 행복을 위해 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149장 주님 한 분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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