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중부 여행기5
2024년 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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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시에 일정이 시작된다. 아침을 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호텔 옆에 있는 미케(My Khe) 해변으로 갔다. 비는 내리지 않지만 해는 구름 속에 숨어 있었다. 기온은 섭씨 20도 정도로 높아서 나에겐 덮지도 춥지도 않고 쾌적하였다. 더구나, 목과 입천장이 붓고 열이 나던 감기 기운도 가라앉았다. 관유샘이 버스에서 ‘감기는 약 먹으면 일주일 가고, 약 먹지 않으면 칠 일 간다’거나 ‘여행 중에 아픈 것은 집으로 돌아갈 때쯤에는 다 낫는다’고 하신 말씀이 허언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혜였음을 알 수 있었다.
법륜 스님과 함께 간 백두산·고구려·발해·독립운동 유적을 답사하는 한여름의 여행 때는 속이 차가워지고 설사가 나서 연길에서 심양으로 가는 야간열차 간에서, 연변대학에서, 계속 화장실에 가고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여행 중에는 원인도 모르고 약을 사 먹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더위와 설사와 음식을 먹지 못하여 눈이 움푹 들어가고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비행기가 우리나라 영공에 들어 오자 거짓말 같이 배가 아픈 증상이 사라졌다. 한의원에 가서 진맥을 해보니 속이 차가워져 있다고 하였다. 환도산성에서 중국인 농부가 키워서 파는 오이를 사 먹고 속이 차가워져서 생긴 일임을 알게 됐다. 여행 중에는 정신이 맑지 못하여, 한여름일수록 속은 차가워지기 때문에 삼복(三伏) 더위에 열성의 삼계탕(蔘鷄湯)을 먹는 ‘以熱治熱(바깥의 열로 차가워진 속은 열성 음식으로 다스려라!)’의 지혜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천성 여행 때는, 이른 아침에 배를 타고 차가운 강물을 거슬러 낙산대불(樂山大佛)을 관람하고 나니 나를 포함하여 다섯 사람이 소변이 급하여 화장실을 찾았다. 중국인 가이드는 옵션을 위해 찻집으로 데리고 갈 생각만 하며 계속 전화만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한국인 여행사 사장에게 화장실에 간다고 알리고 시장통을 뒤져서 ‘칙소(厠所-뒷깐)!?’만 외치며 묻고물어 달려서 공중화장실을 돈 내고 이용하고 왔다. 화장실에 다녀온 다섯 사람은 개인행동을 하여 그날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며 죄인 취급을 당하고, 버스에 올라 여행사 가이드와 모임의 회장에게 마이크로 비난과 야단을 맞았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 단지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하며 반박하였다. 그리고 간 곳은 차를 파는 가게이었다. 외국 여행 중이라 모두가 정신이 맑지 못하고, 중국인 가이드는 옵션으로 받는 리베이트가 월급이라서 한국인 관광객을 계속 울궈먹을 궁리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낙산대불을 배 타고 구경하고 왔는데 5명은 왜 그렇게 소변이 급하였을까? 여행 뒤에 생각해 보니, 모두가 소변이 많은 태양인 체질이고, 아침 식사 때 물처럼 마신 차가 강한 이뇨 작용을 하였으며, 아침의 차가운 강물에서 나온 음이온에 노출 되어 그렇게 소변이 급했던 것이다. 여행의 성패는, 특히 중국 여행은 거의 가이드에게 달려 있었다.
산서성 여행 때는 속이 찢어지는 듯이 아프고 설사가 나서 1시간에 한 번씩은 화장실에 가야만 하였다. 화장실을 찾지 못해 버스 속에서, 시장 골목에서 정말 애를 먹었다. 여행 중에는 남에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원인도, 해결책도 몰랐다. 남들은 괜찮은데 왜 나만 그렇게 아픈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분은 나의 배탈 원인이 세균 때문이라고 여겼는지 물을 끓여서 먹으니 괜찮았다고 하였다. 여행 뒤에야 정신이 맑아지고, 가만히 돌이켜보니, 그것은 말로만 듣던 석회질 성분이 들은 중국산 생수 때문이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 사람마다 몸은 다 다르고 원인도 다 다르다, 나는 장이 석회질에 예민한 체질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인들이 왜 그렇게 펄펄 끓는 찻물을 마시는지, 프랑스인들이 왜 그렇게 포도주를 소중히 여기는지, 독일인들이 왜 그렇게도 맥주를 물 마시듯이 마시는지, 한국인이 왜 그렇게 물을 물 쓰듯이 하는지,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가 왜 금수강산인지, 그 까닭을 다른 나라 여행을 하고서야 알게 됐다. 그 뒤로는 외국 여행 때는 제주도 삼다수를 캐리어에 꼭 챙겨간다. 공간 여행인 지리와 시간 여행인 역사는 인간을 지혜롭게 하는 원천이고, 지리와 역사는 인간의 도덕과 규범과 문화를 지어내는 근원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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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로 가는 길목에 거의 송아지만큼 크고 늙은 누렁개가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오토바이 가게의 주인이 기르는 개는 사람을 보고도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가게 앞의 인도에서 마치 사자처럼 앞발을 앞으로 뻗고 고개를 들고 엎드려 지나가는 차와 사람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의연해 보이면서도 가슴 한구석에서는 연민의 정이 일어났다.
해변도로 가에는 화분에 심어진 녹색의 식물이 외벽을 덮은 건물이 눈에 띄었다. 다낭도 여름이면 섭씨 43도까지 기온이 올라간다고 한다. 지구 곳곳에 산불이 나고 숱한 동물이 타죽고, 사람들이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는 지금 불덩이가 되어 있다. 빙하가 다 녹고, 북극의 백곰과 남극의 펭귄이 살 곳을 잃고 굶어 죽고 있다. 기상 이변이 일상화되고, 식량난이 극심해져도 우리는 ‘지금 여기 나’만 괜찮으면 괜찮다는 식이다.
그뿐만이랴? 재생에너지를 개발하지 않고, 몇백만 명의 사람들이 사는 대도시 옆에 핵발전소의 노후 원자로를 점차로 폐쇄하는 것을 미친 짓이라고 하며 오히려 늘려나가고, 일본의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폭발로 생긴 막대한 분량의 방사능물질을 생명의 근원인 바다에 수십 년 이상 모조리 버리는 것을 저지하지 않고, 오히려 큰 예산을 들여 안전하다며 광고까지 해주는 ‘왕’이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현실이 이해할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자손들이 영문도 모르고 암에 걸려 죽어 나갈 것인지 우려가 된다. 미래세대와 억조창생이 살아갈 하나뿐인 지구를 지켜야 할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딸 같은 그레타 툰베리가 가이아신을 살리기 위하여 대서양을 무동력 보트를 타고 횡단하여 유엔에서 트럼프 같은 어른들을 상대로 성난 목소리로 연설을 하고, 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잔인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4차선 도로를 건너서 입자가 아주 고운 모래가 넓고 길게 펼쳐진 바닷가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서 맨발 걷기 명상에 나섰다. 온화한 날씨에 태평양에서 몰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호흡과 발바닥 감촉을 알아차리며 그 시공간에 온전히 존재하였다. 쓰레기나 오물이나 굉음을 내는 보트가 일절 없고, 해조음만 바다에서 밀려와 가슴 속에서 파도쳐 왔다. 나는 작년 가을부터 유투브에서 박동창 교수가 알려준 맨발 걷기 건강법을 틱낫한 스님이 가르쳐주신 걷기 명상법과 결합하여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있다. 깊은 잠을 잘 수가 있고, 소화와 배설이 잘 되어 좋다. 다낭에 와서 이 미케 해변에서 며칠 동안만이라도 맨발 걷기만 하여도 훌륭한 휴양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침 일찍 보드를 들고 서핑을 하러 물 속으로 들어가는 여성들이 보이고, 인도인은 불룩한 배를 드러내고 목욕을 하고 있었다. 정(淨)과 부정(不淨)의 관념으로 카스트를 만들고, 불가촉천민을 학대하고, 또 천민들은 자학을 하는 인도인은 어디서나 몸을 씻는 제식을 한다. 부처님은 강가(Ganga, 恒河) 강물에 씻는다고 죄업이 정화된다면, 물고기는 모두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며 비판을 하셨다. 아빠 따라온 인도인 오누이들은 분홍색 털모자를 쓰고,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 바다를 신비롭게 바라보고, 모래알로 발가락을 간질이며 몰려오는 파도와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지구의 맥박인 파도와 생명의 정화인 어린이들은 어머니와 자식들처럼 늘 즐겁게 지낼 수가 있는가 보다.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뱅골만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의 시가 생각났다. 중학생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시가 이방의 바다를 만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표현한 타고르는 그의 시와 함께 어린 나에게 무엇인가 신비로운 인물로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닷가에서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가없는 하늘 그림같이 고요한데,
물결은 쉴 새 없이 남실거립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소리치며 뜀뛰며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모래성 쌓는 아이,
조개껍데기 줍는 아이,
마른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웃으면서 한 바다로 보내는 아이,
모두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놉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헤엄칠 줄도, 고기잡이할 줄도,
진주를 캐는 이는 진주 캐러 물로 들고,
상인들은 돛 벌려 오가는데,
아이들은 조약돌을 모으고 또 던집니다.
그들은 남모르는 보물도 바라잖고,
그물 던져 고기잡이할 줄도 모릅니다.
바다는 깔깔거리고 소스라쳐 바서지고,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사람과 배 송두리째 삼키는 파도도
아가 달래는 엄마처럼,
예쁜 노래를 불러 들려줍니다.
바다는 아이들과 재미나게 놉니다.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습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길 없는 하늘에 바람이 일고
흔적 없는 물 위에 배는 엎어져
죽음이 배 위에 있고 아이들은 놉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는 아이들의 큰 놀이텁니다.
(양주동 옮김)
On the seashore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children meet.
The infinite sky is motionless overhead and the restless water is boisterous.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children meet with shouts and dances.
They build their houses with sand, and play with empty shells.
With withered leaves they weave their boats and smilinglyfloat them on the vast deep.
Children have their play on the seashore of worlds.
They know not how to swim, they know not how to cast nets.
Pearlfishers dive for pearls, merchants sail in their ships, while children gather pebbles and scatter them again.
They seek not for hidden treasures, they know not how to cast nets.
The sea surge up with laughter, and pale gleams the smile of the seabeach.
Deathdealing waves sing meaningless ballads to the children, even like a mother while rocking her baby´s cradle.
The sea plays with children, and pale gleams the smile of the seabeach.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children meet.
Tempest roams in the pathless sky, ships are wrecked in the trackless waters, death is aboard and children play.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in the great meeting of children.
해변에서 관유샘, 계림샘, 법련 거사님과 만나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뛰며 동심으로 돌아가 사진을 찍었다. 나는 발목 부상으로 뛸 수가 없어서 뛰는 흉내만 내었다. 여행은 이방에서 사람들과 나이를 초월하여 어울리며 망중한을 즐길 수가 있어서 또한 매력적이고 좋은 힐링이 되는가 싶었다.
북쪽으로 바라보니 선짜(茶山) 반도의 검푸른 산줄기가 태평양 바다로 뻗어 있었다. 선짜 반도의 북쪽은 부산의 광안리 해변이나 포항의 영일만처럼 생긴 다낭만이고, 그곳에 항구와 기차역이 있다. 한강(Han River)이 형산강처럼 영일만처럼 생긴 다낭만으로 여기 미케 해변의 서쪽 도심을 관통하여 들어간다. 다낭만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이양선이, 프랑스, 미국, 한국의 군함이 몰려왔다. 선짜 반도의 끝에 성냥개비처럼 작게 보이는 백색의 해수관음상이 가물거리며 시야에 들어왔다. 내일 그곳에 간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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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수돗가에서 발을 씻고 호텔로 돌아와 작은 가방을 메고 오늘의 답사에 나섰다. 북쪽으로 가서 한강의 까우(Cau) 다리를 건너서 시청 앞에 버스가 섰다. 시청 건물은 외벽이 유리로 되어 있고 모양이 베트남의 국화인 연꽃의 봉오리처럼 생긴 새로 지은 30층은 되어 보이는 초고층 빌딩이었다. 베트남 3대 도시인 다낭의 시세를 잘 보여주었다. 출입문이 있는 파사드도 웅장하고, 정면 벽에 공산당이 국가 위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 국가의 문장(紋章)이 붙어 있었다. 시청 입구의 화단에 분홍바늘꽃이 무리지어 피어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1955년에 국장(國章)이 제정되어 몇 차례 바뀌었다가 통일 후 1976년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해졌다. 붉고 둥근 바탕의 테두리를 볍씨로 감싸고 가운데에 베트남 공산당을 상징하는 노란색 별이, 아래쪽 가운데에 노동자를 상징하는 노란색 톱니바퀴가, 톱니바퀴 양쪽에 농민을 상징하는 노란색 벼가 들어 있고, 아래쪽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Cộng hoà xã hội chủ nghĩa Việt Nam")이란 말이 베트남어로 쓰여 있다.
시청 바로 옆에 다낭역사박물관이 해자 안에 있었다. 뜰에는 분재들이 있었고, 물 항아리에 피어난 흰색, 보라색 수련(睡蓮)이 아침 햇살을 받아 피어나 이방인을 반겨 맞아 주었다. 또, 응우옌 찌 프엉(Nguyễn Tri Phương, 阮知方, 1800~1873)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나폴레옹 3세의 통치 시기에 가톨릭교회와 상공업자, 해군은 침략에 적극적이었다. 프랑스는 침략의 구실을 잡기 위하여 1856년에 중국에서 외교를 담당하고 있던 샤를 드 몽티니(Charles de Montigny)를 다낭에 보내 응우옌 조정에 종교의 자유 보장과 통상을 요구했다.
몽티니가 다낭을 방문한 뒤에 그리스도교 탄압이 강화되는 가운데, 1857년 여름 스페인 주교가 통킹에서 처형됐다. 청과 텐진조약을 체결한 프랑스가 샤를 리고 드 주누이(Charles Rigault de Genouilly)를 제독으로 하여 중국 방면의 해군을 필리핀의 스페인 군대 연합군과 함께 다낭으로 파견하여 1858년 9월 다낭을 점령하여 3개월을 머물렀다. 베트남 식민화의 첫발을 내딛었지만, 응우옌 찌 프엉 사령관의 방어가 견고하여 후에로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자 리고 드 주누이는 다낭에 수비병만 남기고 사이공을 점령했다.
애로호 사건으로 일어난 제2차 아편전쟁의 텐진조약(1858) 뒤에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서 1860년 프랑스는 원정군을 중국으로 보내고, 스페인군은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이에 뜨득 황제는 응우옌 찌 푸엉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1만 2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사이공을 탈환하도록 명령했다. 1860년 10월에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 극동군 총사령관 레오나르 샤르네(Leonard Chrner) 제독은 2천500명의 정예 육군과 70척의 함대를 이끌고 사이공으로 가서 방어방을 뚫었다. 5천 명 만이 화기를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는 창으로 싸웠으며, 대포도 낡은 것이라 베트남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응우옌 찌 푸엉도 부상을 입었다.
전통적 보수세력에 의해 지배되면서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후에 조정은 코친차이나 6성을 잃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과도 같은 적극적인 개혁은 없었다.
1873년에 홍강을 통해 윈난으로 소금을 싣고 가서 일확천금을 얻으려고 한 장 뒤피(Jean Dupuis)를 태평천국군의 잔당을 토벌하러 하노이에 왔던 응우옌 찌 프엉이 막았다. 뒤피는 코친차이나 총독 쥘 마리 뒤프레(Jules-Marie Dupre)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뒤프레는 상하이에 있던 해군 장교 프랑시스 가르니에(Francis Garnier)를 불러들였다. 1873년 여름에 170명의 병력과 함께 출발한 그는 하노이에 11월에 도착하였다. 그는 응우옌 찌 프엉과 잠시 교섭한 뒤에 곧장 하노이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응우옌 찌 프엉은 아들과 사위와 함께 성 위에서 항전하였는데, 사위는 총탄을 맞고 전사하고 자신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그는 프랑스군의 치료와 식사를 거부하고 순국하였다. (유인선, <<베트남의 역사>>) 그의 충절은 우리 역사에서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이 의병 항전을 벌이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쓰시마섬으로 끌려가고, 그곳에서 단식 끝에 순국한 일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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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마당에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견학을 와 있었다. 생기발랄한 학생들의 표정이 꽃처럼 밝고 티 없이 맑다. 관유샘이 다가가 손자, 손녀 같은 아이들과 어울려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지으며 사진을 촬영하였다. 나도 얼른 달려가서 학생들 틈에 끼어들었다. 베트남 아이들이 한국관광객을 좋아하는 까닭은 케이팝과 케이드라마 때문임은 물론이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과 다를 것이 없는 옷차림이지만, 여학생들은 흰 아오자이를 겉옷 안에 교복으로 입었다. 바지 위에 원피스처럼 길게 내려오는 상의의 흰 아오자이는 평화를 사랑하는 베트남 민족의 순결한 정서와 자부심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옷이었다.
실내로 들어가니 정면 벽면을 베트남 역사를 보여주는 커다란 황동 부조가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우리 역사의 세종대왕과 비견되는 레 왕조의 타인 똥(聖宗, 1460~1497)이 전투복을 입고 전선을 지휘하여 남쪽의 참파국을 정벌하러 가는 장면이 있었다.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확립한 전레(前黎) 왕조의 타인 똥(聖宗)은 인도차이나 주변국에 적극적 공세를 취했다. 1467년, 참파는 레 왕조에 대한 사대를 거부하고 10만의 군사로 수륙 양면으로 침공하여 호아 쩌우를 약탈했다.
1469년, 타인 똥의 26만 정예부대를 동원한 원정은 참파의 침공을 끝내고, 참파 땅에 유교문화를 확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1월 초 수군 10만을 출정시키고 열흘 뒤 직접 15만의 수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랐다. 1471년 2월, 전투용 코끼리와 5천여 병력으로 저항하는 참파 군과 레 왕조의 500척 전선 및 3만 병력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타인 똥은 1천 척의 전선과 7만의 병력으로 참파 수군의 뒤로 가서 포위하여 궤멸시켰다. 다시 남으로 진격해 비자야를 포위해 사흘 만에 함락시키고, 그 왕과 처첩들을 생포해 탕롱으로 개선했다. 비자야 함락 때 3만여 명이 포로가 되고 4만여 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참파 장군 보 찌 찌는 판두랑가로 도피하여 참파 왕을 칭했다. 타인 똥에게 사절을 보내 신하로서 조공을 약속하고 왕으로 책봉됐다. 이 때 참파는 영토의 4/5를 잃고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타인 똥이 출정하는 장면의 오른쪽 위에는 타인 똥이 출정하며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의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三更夜靜銅龍月, 五鼓風淸鷺鶴船” 여행에서 돌아와 타인 똥이 지은 이 시의 원문을 찾아서 읽어보았다.
思容海門旅次
바다로 나가는 군진(軍陳)에서
混一車書共幅員
한 가득 책을 실은 황제의 수레는 같은 영토를 가고,
海雲橫界越南天
바다 구름 깔린 경계는 월남의 하늘이네.
三更夜靜銅龍月
삼경(三更)의 고요한 밤, 동롱(銅龍)에 달이 떴고,
五鼓風淸鷺(路)鶴船
오고(五鼓) 울리는 바람 맑은 낮, 로학(路鶴/鷺鶴)에 배 띄웠네.
夷落奉參期款塞
이적의 도성은 함락되어 조공을 기약하고,
閫臣愛國巧籌邊
장수는 나라를 사랑하여 변방 수비에 힘쓰네.
此身那得生還幸
이 몸은 어찌하면 살아서 돌아가는 행운이 있을까?
敢望班超到酒泉
서역을 평정한 반초(班超)가 주천(酒泉)에 돌아온 일을 감히 바란다네.
조선왕조의 세종대왕과 닮은 <타인 똥은 넷째 아들로 태어나 제위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유교 경전을 읽는 데만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유교 윤리와 신유학의 충효 사상을 통해 유교적 이상의 실현과 황제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인간이 금수와 다른 것은 예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베트남 사회를 유교윤리로 변화시키려고 하였다.
그의 통치 시기에 응오 시 리엔(吳士連)이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1479)를 편찬하고, 보 꾸인(武瓊)이 <<영남척괴(嶺南摭怪)>>를 발굴하여 체재를 정비하고 간행하였다. 전자는 우리의 삼국사기에, 후자는 삼국유사에 비교된다.
또한 타인 똥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신하 28명을 뽑아 ‘따오 단’(Tao Dan, 騷壇)이란 모임을 만들고, 본인이 따오 단 원수(騷壇元帥)가 되어 시회(詩會)를 주재했다. 작품은 대부분 유교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지만, 타인 똥의 작품 중에는 대외원정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삼은 것도 많다.>(유인선, <<베트남의 역사>>)
따인 똥의 부조 앞에 등받이가 없는 둥근 의자나 드럼처럼 생긴 황동 유물이 유리 상자에 들은 채 놓여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그것은 말로만 듣던 동고(銅鼓)였다. 윗면에는 가운데 태양에서 햇빛이 퍼져 나오고, 그 둘레에는 여러 겹의 원이 둘러쳐져 있으며, 그 바깥에 다시 굵은 빛살로 보이는 무늬가 들어있고 그 바깥에 다시 여러 겹의 원이 주출되어 있었다. 그 섬세하고 정밀한 무늬는 우리의 잔무늬 청동 거울이나 아즈텍 문명의 태양 무늬가 새겨진 석조 달력을 닮았다.
<베트남 최초의 국가 반 랑(文郞)은 기원전 2879년에 건국하여 기원전 3세기 중반에 멸망했다. 타인 호아 성(淸化省)의 동 선(Dong Son)에서 19세기 말에 발견된 기원전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정교한 청동기 유물들에 의해 반 랑의 전설이 입증되었다. 동 선 문화로 알려진 이들 유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청동 북(銅鼓)이다. 동 선 문화는 기원전 중국의 동남지역과 베트남 북부에 있었던 월족 중 락월(貉越/駱越) 즉 락 비엣(Lac Viet)에 의해 형성되었다.>(유인선, <<베트남의 역사>>)
2층의 유물 전시관으로 올라갔다. 선짜 반도와 다낭 만을 중심으로 하는 다낭시의 대형 지도를 먼저 보았다. 처음으로 내 눈에 띈 것은 두 개의 백옥 귀고리와 한 개의 취옥 팔찌였다. 옥 귀걸이는 기원전 6000년 경 랴오허강 유역의 신석기문화인 홍산 문화에서 제작되었는데 기원전 2000년경에는 베트남 북부, 기원전 1000년경에는 베트남 남부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많은 옥기들과 여신상을 모신 신전 유적이 발굴된 홍산 문화는 고조선 문명의 기원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유적, 여수시 안도 패총 유적에서도 홍산 문화의 옥귀걸이가 출토되었다.
고고학자가 제철 유적을 발굴하는 전시 모형 옆에 도가니 용광로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다낭의 총석동사(總碩泂社)의 자운사(慈雲寺) 종이 보였다. 자운사의 광흥(廣興) 스님이 어린 나이로 오행산(五行山)의 사찰에 출가하여 수도를 하고 나라의 평안과 중생 구원을 기원하며 1922년에 35킬로그램의 동종을 주조하였지만, 종소리가 새어서 다음 해에 63킬로그램의 큰 종을 주조하였다. 큰 용이 몸체를 둥글게 하고 발을 딛고 있는 걸이에 길숨한 몸통의 종이었다.
몸체에 주종 기문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기원 내용에는 ‘西兵(프랑스군)’과의 평화 관계를 기원한 것도 들어있었다. 주종 불사는 오행산의 삼태사(三台寺)와 영응사(靈應寺)의 승강(僧綱)인 복지(福智) 스님과 삼태사의 승목(僧目)인 열반한 아사리 복전(福田) 스님이 증명이 되고, 흠사통판(欽使通判) 진(陳)씨의 정실(正室) 부인인 우바이 완(阮)씨가 20원을 보시한 것 외에 여러 사람의 보시로 이루어졌다.
명에서 수입하여 황실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청화 백자도 있었다. 촛대와 향로, 병과 항아리, 대접과 주전자, 꽃병이 있었다. 안쪽에는 바다를 무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코너가 있었다. 바닷가에서 고기잡이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모형이 있었다. 신위를 마주하고 제사를 주재하는 제관과 좌우에서 보조하는 두 제관의 모형이 있었다. 제관들은 흰 바지와 금실로 수가 놓인 검은색 장포(長袍)를 입고,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은 노란색의, 좌우의 두 사람은 뒤로 내려뜨려지는 술이 길게 달린 노란색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배의 키, 세 개의 돛을 단 목선의 모형 등이 있었다.
꽝남성 다낭의 옛지도에는 선짜(茶山) 반도, 다낭만, 오행산, 한강, 투본강 하구의 삼각주와 해구(海口)인 호이안(會安)의 대점(大占) 등의 지명이 한자로 쓰여 있었다.
세조 고황제의 천하 통일을 기념하여(世祖高皇帝統一海宇) 취만성황신(翠巒城隍之神)에게 보안지신(保安之神)의 칭호를, 흠차북군도독부장부사증태보진군공(欽差北軍都督府掌府事贈太保鎭郡公)에게 광국정변수덕상등신(匡國靜邊樹德上等神)의 칭호를 추증하는 민망 황제의 칙명장(勅命狀), 진문여(陳文璵)가 청렴하고(淸), 신중하고(愼), 부지런하여(勤), 그에게 중순대부(中順大夫)의 품계를 내리는 뜨득 황제의 칙명장(勅命狀)이 있었다.
다낭 항구를 침략해온 프랑스 제독의 사진과 군함, 오토바이, 인력거, 어릴 적 우리 집에도 있었던 네 발 달린 흑백 텔레비전, 커다란 소리통을 가진 축음기, 트랜지스트 라디오, 작은 녹음기, 램프, 어릴 적 엄마가 숯을 넣어서 사용하던 무쇠 다리미, 녹슨 대포, 현고전향병정관기 완귀공 자 경보 시 용간의 묘비(顯考前鄕兵正管奇阮貴公字瓊甫諡勇幹之墓碑) 탁본, 월남공산당기,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 딘 광장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호치민의 사진, 젊은 날의 호치민 사진과 편지, 코민테른이 1924년에 베트남 노동자, 농민 협회에 코민테른에 가입하기를 요청한 편지, 무기를 제조하는 숲속의 대장간 등이 있었다.
다낭 사람 팜 딘 키에(Pham Dinh Kien)씨가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에 전선에서 연주하였던, 비파나 완함을 닮은 현악기인 만돌린이 인상적이었다.
5
꼰 다오(Côn Đảo) 섬의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의 유물이 유리 상자 속에 있었다. 남성의 담배 파이프와 여성의 머리핀, ‘박호(Bak Ho, Uncle Ho, 호 큰아버지, 호치민 주석)님 감사합니다’라는 리본과 핀과 녹이 쓴 별, 백색(홍색이 바래서 허옇게 보임)과 청색의 천이 상하로 이어져 있고 가운데에 금색 별이 들어 있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낡은 깃발, 감옥에서 쓴 편지 1통, 여성이 수놓은 3점의 수예 보이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미군이 비하하여 '베트콩'이라고 하였지만, 공산주의 저변 확대를 위해 조직한 단체이다. 남베트남공화국 정부와 미군에 대항한 세력이지만, 프랑스 식민시대의 프랑스에 항쟁한 세력이 발전된 조직으로, 명목상 북부 베트남 정부와 정규군과는 별도의 조직으로 주로 남부 베트남의 비공산주의자, 종교인, 여성들로 구성되었으며, 미군은 이들을 베트콩(Viet Cong) 또는 VC(Victor Charlie)로 불렀다.
꼰 다오 섬은 메콩강 하구에서 동남쪽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섬이다. 지금은 바다 거북이의 산란지로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된 유명한 관광 휴양지이다. 프랑스는 이 섬을 포올로 콘도르(Poulo Condor)라고 불렀다. 해양과 섬의 생태계가 살아있는 천국 같은 꼰다오 섬에는 지옥의 역사가 또한 도사리고 있다.
이곳의 역사 유적지가 된 푸하이(Phú Hải) 감옥은 프랑스군이 1862년에 건설했는데, 남부 베트남과 미군도 이곳에 죄수들을 수감했다. 총면적은 12,000 제곱미터 가량 된다. 이 감옥에는 공동 감방 10개와 프랑스 식민 시기에 사용한 중범죄자용 돌 갱도의 감방 20개가 있다.
‘호랑이 우리’라고 불리는 곳은 프랑스 식민 시기 및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사용한 감방이다. 마치 호랑이 우리처럼 쇠창살 아래 지하 감방에 죄수들을 수감하고 창살 위에 서서 창 같은 도구로 죄수들을 찌르는 잔인한 고문을 하였다. 여기에 수감된 죄수들은 천장의 쇠창살이 낮아서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해 다리 근육 위축증에 걸리기도 하였다.
이 섬을 찾은 베트남인 관광객들은 항 쯔엉(Hàng Dương) 국립묘지를 찾아 분향하고,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린다. 1862년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베트남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혁명 열사가 잠들어 있다. 보 티 사우(Võ Thị Sáu) 같은 어린 여성 열사의 묘지도 있어서 사람들을 지금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꼰 다오 감옥에 수감된 여성이 놓은 수예는 베트남 민족 최대의 명절인 뗏(節-설 명절)을 맞이하는 꽃인 황매(黃梅, hoa mai, Apricot blossom)와 한 쌍의 새, 도화(桃花, hoa đào, Peach blossom)이다. 차갑고 고통스러운 시멘트벽 안에서 죽음의 공포와 굶주림과 고문 속에서 고운 보에 매화와 복사꽃, 지저귀는 새를 수놓으며 민족의 해방과 평화와 생명의 환희가 약동하는 봄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였을 것이다. 고향 집에서 부모 형제가 함께 모여 흥겨운 설날이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다렸을 것이다.
또 한 장의 보에는 하노이에 있는 연화대(蓮花臺)를 수 놓았다. 1049년 리 왕조의 타이 똥(太宗) 황제가 관세음보살이 연화대에 앉아 있는 꿈을 꾸고, 그 모습대로 절을 지었다. 이 절에서 승려들이 독경을 하며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였는데, 지엔 흐우 뜨(Dien Huu tu, 延祐寺, 또는 Lien Hoa Dai 蓮花臺) 절이다. 하나의 기둥 위에 지어진 절이라서 보통 쭈아 못 꼿(chua Mot Cot, 외 기둥 사원)이라 불린다. 1954년에 프랑스군이 하노이에서 후퇴할 때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으나 11세기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연화대를 수놓은 여성은 고향이 북부 하노이일 것이다. 민족 해방 전쟁에 참가하였다가 먼먼 남방의 외딴섬, 차가운 감방에 갇혀서 베트남 민족의 자부심과 향수를 담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간절히 염원하였을 것이다.
전시 유물 중에는 정말로 살벌한 것이 있었다. 20세기 초, 프랑스 식민 지배 시기에 프랑스가 베트남에 도입한 형구인 단두대(斷頭臺, Guillotine)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 기요틴이 발명하여 루이 16세를 공개 처형한 단두대에서 기요틴 자신도 목이 잘렸다. 제네바 협상 뒤에 남베트남공화국 응오 딘 지엠 정권은 1959년 10월에 법률을 공포하여, 다시 이 무시무시한 형틀을 사용하여 애국지사들을 처형하였다.
6
오행산 지역 호아 하이(Hoa Hai) 수용소의 군인들과 인민들이 1969년에 미국 침략자들을 쳐부수기를 맹세하며 혈서로 이름을 적은 깃발도 있었다.
꽝 다 보안부의 응오 티 후에(Ngo Thi Hue) 여사가 1973년 다낭에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변장한 채 양산을 들고 원피스를 입은 채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사진에는 총을 든 2명의 경찰이 한 남자의 웃옷을 벗기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두 팔을 뒤로 묶은 채 끌고 가고 있는 장면도 들어 있었다. 파리협상 뒤의 다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스냅 사진이었다.
소련에서 개발되어 중국에서 생산된 에이케이-47(AK-47) 소총, 칼빈 소총, 바주카포, 자전거에 실어서 다니는 소형 대공(對空) 포, 박격포, 엠-16 소총, 엠-60 기관총, 권총, 수류탄 같은 폭탄을 쏘는 휴대용 무반동포, 물통, 주전자, 현미경, 모자, 가방, 항아리, 타자기, 서류, 후레쉬, 단검, 혁띠, 공산당 깃발, 남베트남 민족해방 전선 깃발 등 베트남 전쟁 당시에 사용한 물건들이 전시된 코너에는 트랜지스트 라디오 옆에 관음보살상이 있었다. 설명문을 읽어보니 관세음보살의 복장(腹藏)에 혁명 문서를 숨겼다고 한다.
미군 기지가 즐비하게 분포한 다낭의 지도 양쪽에는 1965년 3월 8일에 군함을 타고 와서 상륙정((landing craft)으로 다낭 해변에 뛰어내리는 3,500명의 미국 해병대, 1966년의 다낭항에 대형 태극기를 펼치고 군함에서 상륙한 한국군의 지휘관과 환영 나온 미군 사령관이 악수하는 장면, 호이안 부근에서 사열하는 한국군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낙하산으로 무기와 전쟁 물자를 투하하고 해병대가 상륙정을 타고 해안 모랫벌에 상륙하는 그림, 전투가 끝나고 초토화된 숲에서 불에 탄 나무 기둥에 기대어 엠-16 소총을 짚고 온몸에 총탄을 휘감은 미군 병사가 고개를 숙이고 참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장면, 미군이 베트남인을 묶어놓고 산채로 단검으로 배를 가르고, 목을 잘라서 피가 흐르는 머리를 들고 있는 너무나도 야만적이고 끔찍한 장면, 탱크 위에서 분노에 찬 표정으로 소리 지르는 미군, 맹호부대 마크가 크게 그려진 기갑 연대 휴양소 간판 앞에 웃통을 드러내고 차려 자세로 서 있는 한국군 병사, 이빨을 깨물고 악에 받힌 얼굴로 칼빈총을 왼손에 들고서 오른손으로 베트남 농부를 학대하는 맹호부대 병사의 모습, 추락한 미군 비행기의 조종사를 총을 든 베트남 여자 병사가 야무진 얼굴로 끌고 가는 장면, 미군 군종 신부가 불타버린 짚차 앞에서 합장하고 눈을 감은 채 하늘을 우러러며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 야전에서 미군 병사들이 선 채로 미사를 올리는 장면, 미군이 휴이(Huey)라고 불린 다용도 헬리콥터(UH-1A)로 동료 부상병을 급히 실어 나르는 장면 등을 담은 흑백과 컬러 사진들이 있었다.
교무실에서 함께 근무한 선배 선생님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월남전에 위생병으로 참전하여 뚜이 호아(Tuy Hoa) 지역에서 1년 간 복무했다. 매복 중에 수류탄을 맞아 다리가 절단된 채 혼자서 신음하는 미군 병사를 응급조치하고 헬기를 불러 후송하였다. 제대하고 복학할 무렵에 미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매스컴에 보도되고 학교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고 하였다.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유물 중에는 미군이 사용한 각종 폭탄과 탄약의 탄피가 있었다. 네이팜탄 탄피와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고 불린 다이옥신(Dioxin)을 담았던 통도 있었다. 네이팜탄은 미국의 과학자들이 어느 대학의 실험실에서 몰래 개발한 무기이라고 한다. 윤리를 망각한 과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밀림의 나무를 말려죽이는 고엽제(枯葉劑)로 쓰인 다이옥신에 대한 설명문을 읽어보았다.
“다른 나라의 생태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나라를 사람들은 인류 역사에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도 아무도 감히 하지 않았고, 감히 하지 않을 이러한 생태 실험을 하고 있다.”-1970년 8월, 미국 상원 의원 넬슨의 상원 청문회 발언(“Never in human history have people witnessed one country making war to the living environment of another. Yet, the United States has engaged in this ecological experiment that no one has dared or will dare carry out... ” -Senator Nelson U.S. Senate Hearing August 1970)
내가 교사가 되어 처음 담당하였던 우리 학급에 월남전에 참전하였던 학부형이 있었다. 그런데, 이분은 월남전에 가서 고엽제를 뒤집어쓰고서 평생 지독한 통증이 동반되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느린 총알(Slow Bullet)’이라 불리는 고엽제는 베트남의 밀림뿐만 아니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도 희망을 빼앗아 갔다. 설명문을 보니,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비행기에서 꽝찌(Quang Tri), 다낭 이남 지역의 남부 베트남 전선에 뿌린 고엽제의 분량은 7천338만1천4백4십2 리터였다.
섭씨 3천 도의 고열을 내며 반경 30미터를 불바다로 만드는 네이팜탄으로 다낭에서는 사람 살이 타는 냄새가 치솟아 코를 찔렀다고 한다. 에이피(AP)통신 사진 기자 닉 우트는 1972년 6월 8일 사이공 서쪽 짬방마을을 취재하다가 네이팜탄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미군은 네이팜탄을 주민들이 피신해 있는 사원에 투하하였다.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군인들 앞으로 도망치는데 불붙은 옷을 벗어 던지고 발가벗은 채 달아나는 모습을 촬영하여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전쟁의 테러(The Terror of War)’라는 제목의 이 사진도 볼 수가 있었다. 세계인들에게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렸던 사진이다. 닉 우트는 화상을 입은 9세의 판 티 낌 푹(Phan Thi Kim Phuc)을 곧장 병원에서 치료하도록 도왔고, 낌 푹은 수십 차례 피부 이식 수술로 생명을 건졌다.
1963년에 태어난 그녀는 나와 동갑의 나이이다. 킴 푹은 1992년에 캐나다로 이민 갔고 유네스코 친선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97년에 킴 푹 재단을 설립해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는 어린이를 도운다. 1999년에 방한해 “네이팜탄을 퍼부은 자를 용서하되 그 만행을 잊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2019년에 55세의 그녀는 독일 드레스덴 인권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나와 동갑인 낌 푹 여사는 말한다. “모든 사람이 사랑과 희망, 용서로 가득한 삶을 산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47만 명, 남베트남 정부군 13만 명, 미군 27만 명이 사망했다. 박정희 정부는 자발적으로 베트남에 파병했다. 1965년 2월 하순에 공병부대, 경비 병력의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 3천 명, 전투부대로 10월 9일 육군 2개 연대 규모의 맹호부대가 나짱에, 11월 20일 해병대 1개 여단 규모의 청룡부대가 꾸이 년에 도착했다. 1964년에서 1973년까지 파병 인원 32만 5,517명에 전사자 5,099명, 부상자 11,232명, 실종자 4명, 고엽제 피해자 15만 9,132명이 발생하였다.
어른이 되어 본 미국 영화 <포레스트 검프>와 한국 영화 <님은 먼 곳에>를 통해 베트남 전쟁의 기억을 되살렸다. 어릴 적 우리 옆집과 앞집의 형이 월남전에 참전하였다가 돌아왔다. 병사로 참전한 옆집 형은 돌아오며 트렁크에 온갖 물건들을 가져왔고, 하사관으로 참전한 앞집 형은 월남의 정글에서 착용하던 창이 넓은 전투용 모자를 들고 왔다. 앞집 형의 동생이 여름이면 산골 참외밭에 갈 때 쓰고 다니던 그 모자가 좋아서 어린 마음에 무척 가지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사를 담당하셨던 이헌재 선생님은 키는 크지 않지만 권투 선수로 전국체전에도 참가했을 만큼 맷집이 좋으셨다. 어느 날 수업 중에 어린 우리에게 월남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병으로 월남에 처음 갔을 때, 중대장이 생포한 베트콩을 총으로 쏘아 죽이라고 지시하였다. 중대장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총으로 선생님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가톨릭 신자인 선생님은 차마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버티다가 중대장이 쏜 총소리를 듣고 기절하였다. 깨어나 보니 중대장은 공포탄을 쏘았다고 하였다. 선생님의 용기와 생명 존중 정신은 어린 우리에게 큰 충격과 감명을 주었다.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각국의 평화 단체들이 제작한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영어, 일본어로 된 포스트들이 있었다.
“베트남에 평화를!/ 미국의 침략 전쟁을 멈춰라(Paix Au Viet Nam/ Halte A L’agression Americaine-프랑스어/ 논라를 쓴 베트남의 어머니와 어린 아들 흑백 사진)”
“스웨덴-베트남 연대/ 10월 15-21일 베트남 주간 이전에 베트남민족해방전선(FNL)에 6백만 크로나를 모금하자, 현재 40만499 크로나(Solidaritet Sverige-Vietnam/ 6miljoner till FNL fӧre Vietnamveckan 15-21 okt pg 400499.0-스웨덴어/ 총을 멘 여자 병사 흑백 사진)”
“전쟁은 지옥이다!/ 전쟁했던 사람에게 물어보라! 1968년 4월 27일 전쟁을 끝내도록 시위하자!/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집으로 당장 데려오라!(War is hell! Ask the man who fought one… . Demonstrate to end the war April 27, 1968. Bring our men home from Vietnam now!/ 부상 당한 병사를 운반하는 미군 병사 흑백 사진)
”미국의 침략 전쟁을 멈춰라Halte A L’agression Americaine-프랑스어/ B-52 폭격기 2대가 폭탄을 투하하는 사진 밑에 논라를 쓴 농부들이 모내기하는 흑백 사진)
“베트남의 평화(Frieden für Vietnam!-독일어/ 미군 폭격기 2대, 야자수가 있는 농촌 마을 그림/ 많은 서명)”
“베트남 민주공화국 4·10 성명, 단결 전투 승리하는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 신정치강령을 확고하게 지지한다!/ 일본과 베트남 두 나라 인민의 전투적인 연대 만세!/열렬한 악수/ 미 제국주의를 베트남, 일본, 아시아에서 몰아내자!/승리는 가까웠다!/미 제국주의를 쳐부수자!/일본전국노동조합(ベトナム民主共和國, 4·10聲明, 團結戰鬪勝利の南ベトナム 解放民族戰線新政治綱領を斷固支持!/日本とベトナム兩國人民の戰鬪的連帶萬歲!/熱烈な幄手/アメ帝をベトナム日本アヅアからたたき出とう/勝利の日は近い/アメ帝をたたきセ/全日本勞動組合/ 많은 서명)”
“연대가 승리를 돕습니다!(Solidaritāt Hilft Siegen-독일어/논라를 쓴 여인의 옆 얼굴 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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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3월 16일, ‘미라이 학살’을 저지르고도 미군 제11여단, 아메리칼 사단은 전쟁을 수행했다. 월맹군과 게릴라들은 저돌적으로 반격하며, 1969년 초에 전 아메리칼 사단 기지에 일제 공격을 감행했지만, 미군의 폭격과 포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당 투이 쩜(Dăng Thuy Tram)의 일기, 《지난 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Last Night I Dreamed of Peace)》 는 이 전쟁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일기는 임진왜란 때 수군을 지휘한 충무공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방불케 한다. 일기는 훌륭한 문학이고 역사로서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6세 연상의 연인이 남부의 전쟁터로 가자 5년 뒤에 하노이 의과대학을 졸업한 24세의 당 투이 쩜도 남부 득포 지역의 야전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며 전쟁의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녀의 전쟁 일기는 미군 정보장교가 소각하기 위해 드럼통 속으로 던졌으나, 베트남인 통역관의 건의로 불이 붙은 채로 건져졌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종전 30주년을 맞이하는 2005년 4월에 그녀의 어머니, 여든한 살의 조안 응옥 쩜 여사와 세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 가족에게 소포로 전달되었다. 투이의 아버지는 딸의 전사 소식에 충격을 받고 뇌졸중으로 사망한 뒤였다. 일기는 2005년 7월 18일 하노이에서 출판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5천 권 이상 팔린 책이 없는 베트남에서 43만 권이 팔렸다.
한국어판 번역자 안경환 교수는 2005년 9월 2일 베트남 독립 및 건국 6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하노이에 있을 때 번역 제안을 받았다. 다음날, 당 투이 쩜의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만났다. 유가족들은 한국어 출판에 매우 기뻐하며 시디(CD)에 담긴 당 투이 쩜의 사진들을 안경환 교수에게 보내왔다. 당 투이 쩜은 현재 하노이 뜨 리엠 현, 쑤언 프엉 면의 열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옮긴이는 일기를 두고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나는 2008년 1월, 신문에서 이 책이 출간된 소식을 접하고 사서 읽었다. 그리고 16년이 지나, 이번 베트남 여행기를 쓰면서 밑줄을 치며 다시 읽었다. 베트남 전쟁과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랑의 슬픔을 아름다운 문체로 세세하게 묘사한 일기 문학의 백미이다. 역사책이 전하지 못하는 인간과 사회의 진실을 읽을 수 있었다. 내 딸 또래의 당 투이 쩜이 부상자를 위해 식량을 구하러 가다가 매복한 미군에게 사살되는 장면은 나의 가슴을 찢어지게 아프게 하였다. 남부의 전쟁터에서 몹시도 힘들어하며,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고향 집에 가지 못하고, 엄마의 다사로운 품에 다시 안기지도 못한 스물여덟 살의 그녀가 불쌍하여, 책을 놓고 잠들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였다.
지난주에 아파트 현관에 풍염하게 피어났던 붉은 모란꽃이 바람에 날려 다 떨어지고, 이제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시공 속에서 독자의 가슴 속에서 모란꽃보다 더 짙붉게 불타오르고 있다. 다음날, 하노이에 가면, 내 누님 같은 당 투이 쩜의 묘지를 찾아가 뗏 무렵에 피는 황매화꽃을 바치고 싶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거센 폭풍우에 맞서 싸우는 일이지만, 그 앞에 머리를 숙이지는 말자”고 한 당 투이 쩜의 이 말은, 2005년 8월 8일 중국 길림성 재중동포 연변자치주의 연길(延吉, 간도)의 신화서점(新華書店)에서 사 온 책,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에서 본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고 한 김학철 선생의 임종 유언을 생각나게 한다.
1968년 5월 6일
날마다 골치 아픈 일들이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디나 좋은 사람들만 모여 있을 수는 없겠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거센 폭풍우에 맞서 싸우는 일이지만, 그 앞에 머리를 숙이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그런데도 내 앞에 닥쳐오는 일들은 늦여름의 폭풍우처럼 음산하다.
1968년 6월 20일
감옥에 있는 드엉에게서 편지가 왔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가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내게 전해진 것이다.
“간단히 썼지만, 제 진심이 모두 담겨 있어요. 만약 이 세상에 제가 없더라도 죽을 때까지 누님을 존경하고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 나는 그가 총명하고 용기 있는 학생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았다. 사회주의 제도에서 평범하게 살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촉망받는 문인이 되었을 것이다. … 얼마 후 드엉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생포되었다. 그는 적의 무자비한 매질 앞에서도 우리 조직에 대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적군은 그를 꼰 다오 섬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다행히 옛 은사의 간청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베트남 남부 붕 타우 항구에서 215킬로미터 떨어진 꼰 다오(Con Dao) 섬에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 놓은 감옥이 있다. 드엉이 그곳에 갇혔다고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드엉은 적군의 군대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만약 드엉이 전쟁터로 보내진다면 도망쳐서 우리 혁명군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면 총알 한 방이 드엉의 희망찬 인생에 마침표를 찍게 할 것인가?
1968년 11월 26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적의 총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어깨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부상병을 대피시키는 데 익숙해진 지 이미 오래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2년간이나 전쟁의 화염 속에서 보냈으니.
이 시각 정글은 무서울 만큼 조용하다. 총소리도 잠잠하고, 사람들은 상황을 살피느라 침묵하고 있다. 북부지역에서 평화스럽던 시절이 떠오른다. 아빠와 엄마는 꽃을 사주었고, 따사한 겨울 햇살 아래서 생일잔치를 열어주셨다. 친구들이 찾아와 축하를 해주며 즐거운 웃음소리를 멀리멀리 날렸다.
이제 내 소망은 옛날과 다르다. 지난 이십삼 년간 죽음을 무릅썼던 사람들, 적개심과 희생 속에서 성장해 온 청년들을 구해야 한다. 이 남부 땅에 있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아빠, 엄마! 사랑이란 사랑은 몽땅 모아서 저와 남부에 있는 당신의 모든 아들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 주세요. 이곳에 있는 저의 동생들도 아빠, 엄마의 무한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1968년 12월 17일
옥살이를 하고 갓 석방되어 건강도 회복하지 못한 드엉이 또다시 생포되었다니, 드엉은 미군의 총에 피살된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지도 얼마 안 되었다. 그런데 적군이 다시 집으로 들이닥쳐 참호 밑에서 드엉의 형을 사살하고, 드엉을 생포해 간 것이다. 드엉의 어머니는 불타버린 집 위에 쓰러져 죽은 아들의 시선 옆에서 울고 있었다.
아, 드엉, 너를 생각할 때마다 원수 놈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숨쉬기가 어려울 지경이란다. 그들을 잡아 죄를 묻고, 수많은 동지들과 너의 복수를 해야만 한다.
1969년 3월 13일
복부 관통상을 입은 동지 한 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 죽은 그의 옷 주머니에 작은 노트가 있었다. 입술이 매력적인 아가씨가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여러 장이 그 속에서 나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고한 의지가 담긴 편지와 함께. “당신을 기다리며”라는 글자를 수놓은 작은 손수건도 있었다.
후방에 있는 아가씨야! 이제 당신의 연인을 다시는 못 볼 텐데 … . 당신의 긴 머리에 둘러야 될 두건은 슬픔의 무게로 더욱 무거울 텐데…….
이는 미 제국주의 살인자가 저지른 죄악이요, 살릴 수 있는 환자를 구해내지 못한 외과의사인 나의 회한이다.
1969년 6월 11일
임시혁명정부가 구성되었다. 그것은 혁명에 있어서 장족의 발걸음을 내딛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전쟁의 잔인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전쟁의 잔인함을 느꼈다. 밤낮으로 폭탄, 제트기, 무장 헬리콥터, 공중에서 선회하고 있는 HU-1A 헬리콥터의 굉음으로 온천지가 진동한다.
정글은 폭탄으로 깊게 파인 웅덩이로 가득하고, 나무들은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 다이옥신)로 색이 노랗게 변했다. 우리도 이 독극물에 노출되었다. 모든 간부들은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나른해져서 움직일 수도, 먹을 수도 없다. 우리는 서로 격려해주려고 애썼지만 겁에 질린 모습이 역력했다. 서로의 얼굴에 언뜻언뜻 스치는 비관적인 빛도 숨길 수가 없었다.
1969년 7월 16일
날강도 같은 미군 폭격기들의 공습을 지켜보았다. 오늘 오후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OV-10기가 마을 상공을 몇 차례 선회하다가 포안의 13번 촌락에 로켓포를 발사했다. 곧이어 두 대의 제트기가 번갈아 가며 급강하했다. 곤두박질하는 폭격기를 떠나 육중한 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저 멀리서 희미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사각형의 네이팜탄이 햇빛 속에 번쩍이며 땅에 내리꽂힐 때마다 시뻘건 불덩이가 치솟았고, 이어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폭격기들이 상공에서 굉음을 내며 대규모로 폭탄을 투하할 때마다, 폭발 소리에 고막이 터지는 것 같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조용히 앉아 분노로 치를 떨었다. 저 불덩어리 속에 타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땅속 깊은 폭탄 구덩이 안에 흩어져 있는 시신은 누구의 것인가? 내 옆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마을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낙심하며 말한다. “바로 저곳은 훙의 장모가 사는 곳인데…….”
남부 사람들보다 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69년 8월 6일
전쟁 상황이어도, 황혼이 깃들면 들판은 자못 시적이다.
바로 오늘 아침 적이 낌 자아오를 공격해 왔다. 동지 두 명이 중상을 입었고, 한 명이 희생당했다. 죽음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지만, 오후 늦게 벼가 익은 황금빛 논두렁에 서 있으니 생기가 돈다. 사람들은 아직도 벼를 거두느라 분주하고, 나와 함께 걷고 있던 어린 간부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돈다. 그의 이름은 꽁이고, 리엔의 애인이다. 리엔이 죽은 지 열흘이 안 되었다. 꽁은 마음이 한없이 아플 텐데도 내색 없이 웃으며,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함께 출발하기 전에는 만돌린을 안고, 신나는 노래를 켰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꽁의 입장에 놓였다면 웃거나 만돌린을 신나게 켜지는 못했을 것 같다.
고통과 죽음이 고르지 않고, 열정도 고르지 않은 이 땅에서 혁명이라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1969년 8월 29일
오늘 밤에 그녀가 왜 자신의 외아들에 대해 들려주었는지 모르겠다. 하얀 피부에 통통한 얼굴, 날씬한 몸매를 보면 누구도 그녀가 군에 간 지 3년이 된 아들이 있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나는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녀의 아들인 티엔이 나와 가까운 곳에 산다는 것을 알 뿐이다.
올해로 티엔은 18살이다. 티엔의 아버지는 재편성되어 북으로 떠났고, 젊은 그녀가 혼자 남아 아이를 키우는 데 전념했다. … 티엔은 나이를 한 살 더 늘려서 신고하고 군인 동지를 따라 입대해 버렸다. … 길고 긴 삼년 동안 아들은 돌아오지도, 어머니에게 편지 한 장 쓰지도 않았다. 아들이 집을 나가 있었던 삼 년은 그녀에게도 잔인한 세월이었다. 적이 급습해 가족의 마지막 거처지인 방공호를 수류탄으로 다 파괴했다. 그녀는 우기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며 거처할 곳을 찾아야 했다. 찬비가 내리는 날이면 며칠이고 다른 집 모퉁이에 웅크리고 자야 했다. 그러면서도 오직 아들 걱정뿐이었다. 지금 어디에 있을까? 띠뜻한 옷이라도 입고 있을까? 그녀는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털실을 사서 아들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아들의 옷을 떴다. 추운 계절이 다 지나도 티엔이 돌아오지 않자, 철이 바뀌면 옷이 작아질까 걱정하며 그 옷을 팔아 더 큰 옷을 떠놓았다.
그녀는 밤낮으로 아들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 아들을 찾느라 너무 지쳐 반달 가량을 심하게 앓았다. 그녀가 회복되고 났을 때, 아들의 부대는 이미 전선으로 떠나고 없었다. 또다시 떠나간 아들을 그리워해야 했다. … 그 간부의 팔을 잡고 아들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자 그가 주저주저하며 말했다. 티엔이 어머니를 찾아뵙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신청했었는데 허락을 받지 못하자, 한 달 전에 사라져 버렸다고.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그 간부에게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쳤다. “… 어미 가슴을 떠난 아들이 삼 년이 지나도록 어미를 못 만났는데, 어떻게 허락을 안 해줄 수가 있나. 내 아들 어디 있나? 만약 내 아들이 어미를 찾다가 죽기라도 했다면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세상 부모들 다 붙잡고 절대로 아들을 해방군에는 보내지 말라고 선전하러 다닐 것이다.” 그녀는 곧 하던 일을 팽개쳐두고 사이공으로 갔다. 그녀가 무엇을 하러 갔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아는 것이라곤, 그녀가 그 상태로 집에 있었다면 분명 미쳤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티엔은 부대를 이탈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부대로 전보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티엔이 쌀을 등에 지고 가다가 집에 들렀는데, 집에 어머니가 없었다. 티엔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녀는 사이공에 살면서 아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날 오후 꽝 응아이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그리고 아들을 만나 아들을 가슴에 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몸이 약하고 응석을 잘 부렸던 그녀의 아들 티엔은 검게 탄 피부에 씩씩한 모습을 한 군인이 되어 있었다. 티엔은 정식 당원이었고, 시련에 잘 단련된 동지였다. 그녀의 눈물은 무거운 짐을 메고 양 어깨가 헤진 초록색 군복 위로 끝없이 떨어졌다. 티엔은 열흘 휴가를 신청해서 어머니 옆에 머물렀다. 여름 내내 가물었던 논이 물 한 동이로 시원하게 해갈될 수 없었다. 그녀는 아들이 부대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든 절대로 더 이상 가지 마라. 네가 죽는다면 여기서 죽는 것으로 족해라. 혁명은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너를 절대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두 대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는 해먹에 누워,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미소를 지었지만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한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국을 위해 자식을 바칠 줄 알고, 자식 사랑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전형적인 베트남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결심이 필요하다.
아, 언니, 당신의 사랑이 비뚤어진 길로 가지 않도록 하세요. 저도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일기에 쓰렵니다.
밤이 깊었고, 티엔은 잠이 들었다. 군인이 다독거려주는 어머니 품에서 고이 잠든 어린아이가 된 것이다. 전쟁터를 누비며 빛나는 전공을 세운 해방군, 티엔. 어서 이 고모에게 말해 보렴. 너는 해방군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1969년 9월 3일
0시 47분, 호 큰아버님께서 우리와 영별하셨다.
큰아버님! 저희들이 큰아버님께서 못 이루신 사업과 소망, “남부 지역 해방과 조국의 자유와 독립 쟁취”를 위해 싸울 것을 맹세합니다. … 눈물이 복수심이 응고됩니다.
저희들과 베트남 민족, 세계 모든 무산 계급의 큰아버님께서는 결코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믿습니다. 큰아버님의 명성과 사업은 만대에 살아 숨 쉴 것입니다.
*호치민은 1945년 9월 2일 베트남 재통일의 의지를 천명한 날에서 정확히 24년째 되는 날, 1969년 9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날이 독립기념일이어서 하노이 정부는 경축 행사를 예정대로 진행하기 위해 사망일을 9월 3일이라고 알렸다. 하지만 다시 9월 2일로 정정했다.
1969년 9월 23일
9월도 벌써 다 지나갔다. 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리 흘러간다.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에 다시 가을이 찾아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농사를 지었으면 배부르고 따뜻한 풍요가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닐까?
미 괴뢰와 반역도당이 들판을 위협하려 하고 있다. 아침 일찍 미 호송선단이 공격해 들어올 군인들을 쏟아 놓더니,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 한가운데 포탄을 퍼부었다. 공포와 복수심이 수확하는 계절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버렸다. 갑자기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영화와 음악이 머릿속에 떠오르더니, 한 가지 물음이 내 마음을 뒤틀고 말았다. 언제, 언제쯤이나 남부 지방에 평화와 자유와 독립이 오려나?
1969년 10월 20일
일기는 내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선 것이다. 남부 지방에 살고있는 강철 같은 인간들이 당한 고통의 기록이고, 전쟁의 화염에 뒤덮인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다.
1969년 10월 30일
홍수가 나서 논과 저지대 마을들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미군이 어제 아침부터 병력을 투입했다. 오늘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적의 습격에 대비했다. 비는 계속 퍼부었다.
아침 7시에 미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 지하 참호에 내려온 지 한 시간쯤 지나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가슴까지 차올라왔다. 추위로 몸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미군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뚜껑을 머리에 이고 덤불 속에 들어가 앉아 있기로 했다.
1970년 5월 5일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전쟁이 확전되고 있다. 미치광이 같은 개자식 닉슨이 어리석게도 전쟁을 키우고 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지긋지긋한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동지들과 함께 맹세한다. 내가 비록 죽을지라도 끝까지 싸우리라고.
적개심으로 오장육부가 다 터질 것 같다. 금싸라기 같은 자신들의 나무뿌리에 뿌리자고 우리 동포의 피를 빨아 가고자 하는 잔악무도한 인간들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탐욕의 주머니가 차지 않았고, 악마의 욕망을 다 채우지 못했단 말인가!
1970년 5월 7일
프랑스 식민주의 침략자들을 분쇄시킨 역사적인 디엔 비엔 푸 전승 16주년 기념일이다. 16년이 지났지만, 이 땅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뼈가 부서지고 있다. 남부지방이 전쟁의 화염에 휩싸인 지 25년이 되었다. …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전투를 하는 길마다 검붉은 피로 물든다. 전 세계에서 우리처럼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나라가 과연 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끈질기고 용감하게 싸웠던 사람들이 있을까?
1970년 6월 14일
일요일, 한 차례 비가 내린 후 날씨가 개더니 시원해졌다. 나뭇잎들이 더욱 짙푸른 윤기를 내고 있다. 집안 탁자 위에 놓인 꽃병에 아침에 꽃밭에서 막 꺾어온 꽃을 꽂았다. 방 한가운데 놓인 라디오 위로 예쁜 해바라기꽃들이 비스듬히 그림자를 드리웠고, 턴테이블에서는 귀에 익은 <도나우 강의 푸른 물결이>이 흘러나오고 있다. 놀러온 친구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아, 그것은 백일몽이었네. 잠을 자면서 꾼 꿈이었네! 온 세상이 조용하다. 만약 창공을 갈라놓을 듯이 난폭하게 날아다니는 비행기 소리만 없다면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만이 정겹게 들려올 텐데! 얼마 전 내가 있는 곳에 한바탕 폭격이 있었다. 그저께 오후에는 두 대의 정찰기가 오랫동안 선회하고 나서 로켓탄을 투하했다. 로켓탄이 폭발하는 소리에 모든 사람들이 황급히 지하 참호로 내려갔다. 머리 위에서 폭탄 소리가 들렸다. 바로 우리들의 앞에 있는 언덕에 폭탄을 투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네 차례의 폭격이 끝나고 적이 철수했다. 폭탄이 터진 곳이 우리가 있는 곳과 20미터도 안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나무숲은 완전히 황폐해졌다. 지붕을 덮은 비닐은 너덜너덜 찢어져서 파편 조각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나무줄기는 포탄 파편에 껍질이 벗겨져 나갔다. 돌과 흙이 지하 참호로 마구 떨어져 내렸다. … 건강한 사람은 모두 떠나고 중상자와 이동이 불가능한 병사 다섯 명, 이들을 간호할 여자 요원 네 명만 남았다.
어제 오후에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비닐을 가져다 집 바닥을 탄탄히 덮었지만 안으로 물이 계속 쏟아져 내렸다. 집 안은 온통 물 천지였고, 누구를 막론하고 다 비에 젖었다. 온종일 손으로 물을 퍼내야 했다. 부상자들은 빗물에 흠뻑 젖은 채 웅크리고 앉아 떨었다. 그런 광경을 보니 웃음이 나오다가도 눈에 눈물이 고였다. 라인 언니가 내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상황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진심어린 위로를 받고 싶다. … “제 소망은 평화가 찾아오면 엄마한테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정말 그것뿐이에요.” … 가족과 다시 만나는 것이 유일한 꿈이다. 그것뿐이다. 그리고 당과 노동자를 위한 일 외에는 바라는 게 없다.
1970년 6월 18일
해 질 무렵이 되자, 제트기와 정찰기의 시끄러운 소리도 멈췄다. 저녁의 정글에 갑자기 무서운 적막감이 돈다. 산새 소리도 사람 소리도 없고,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와 트랜지스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뿐이다. 노래 제목은 모르겠다. 단지 저녁 이슬에 젖은 고요한 벌판처럼 감미롭고 부드러운 음악에 빠져 있을 뿐이다. 갑자기 나는 모든 것을 잊었다. 요 며칠 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분위기가 사라졌다. … 이곳에서의 생활이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에 평화의 일분일초를 귀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 삶이 수많은 사람들의 청춘, 피 그리고 뼈와 맞교환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싱그러운 삶을 위해서 생을 마감해야 했는가. 북쪽이여! 너는 남부 사람들의 심정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1970년 6월 20일
쌀은 오늘 저녁을 해 먹으면 끝이다. 가만히 앉아서 부상병을 굶게 할 수는 없다. … 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나는 다 컸다. 역경 속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지금은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이 몹시 그립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거나, 친한 사람의 거친 손길이어도 좋다.
내게 다가와서 외롭고 힘들 때 내 손을 잡아주고, 눈앞에 다가오는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사랑과 힘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1970년 6월 22일 아침 아메리칼 사단 소속 중대 소속 병사들은 정찰하는 동안 “라디오에서 나오는 베트남 음악과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들었다. 그 후, 제2소대는 정글에서 자신들을 향해 내려오고 있는 네 명을 조준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검은 바지와 검은 상의를 입고 호치민 샌들을 신은 당 투이 쩜 의사였다. 미군이 총을 발사했다. 보이라고 하는 어린 북부 베트남군 한 명과 투이가 죽었다. 전투보고서에 따르면, “나머지 두 명은 정글로 도주”로 기록되어 있다. 투이의 소지품에서 발견된 것은 소니 라디오, 쌀 주머니, 자신이 치료한 부상병에 대한 진료기록부, 마취제 노보카인 몇 병, 붕대, 북부 베트남군 대위(당 투이 쩜의 연인)의 사진과 그에게 쓴 시 그리고 이 일기였다. 당 투이 쩜의 이 일기에는 한국군을 언급하는 대목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한국군을 미군의 일부로 인식한 것 같다.
8
꽝남성 다낭 지역에서 학살당한 민간인의 흑백 사진들이 빼곡하게 들어 있는 사진판을 돌려가며 보고, 그 옆에 있는 학살 사건 일지를 읽어보았다. 놀랍게도 미군과 함께 한국군도, 우리가 호텔에 투숙하고 해변을 거닐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관광을 즐긴 그곳 다낭 지역에서 어린이, 여성, 노인을 포함한 민간인을 무차별로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서 잔인무도하게 학살한 사실도 명기되어 있었다. 해병대 청룡부대는 호이안에 주둔하였다. 학살 사건 일지를 적어놓은 안내판의 테두리에는 남편의 시신 앞에서 어린 아들을 안고 울부짖는 아내가, 자식의 주검 앞에서 망연자실한 아버지가, 옷이 벗겨지고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살육당하는 남녀의 얼굴, 초토화된 마을과 성당, 불에 타는 집 등의 사진이 있었다.
꽝남성 다낭 지역의 민간인 학살
The Killing of Civilians in Quang Nam-Da Nang
-1965년 3월 16일, 미군이 만 꽝 초등학교(호아 꾸이, 오행산(五行山))를 폭격하여 45명의 학생들을 학살하였다.(On March 16th 1965, U.S troops bombarded Man Quang Primary School(Hoa Quy, Ngu Hanh San), killed 45 pupils.)
-1965년 8월 2일, 두앙 선, 캄 너(호아 티엔)에서 미군이 85명을 학살하고 45명을 상해 입혔다.(On August 2nd 1965 at Duang Son, Cam Ne(Hoa Tien), U.S troops killed 85 peoples and injured 45 people.)
-1967년 1월 30일, 31일에 투이 보, 라 토(디엔 반)에서 미군이 191명을 학살하였다.(On January 30th, 31st 1967 at Thuy Bo, La Tho(Dien Ban), U.S troops killed 191 peoples.)
-1968년 2월 24일에 디엔 안, 디엔 두옹, 디엔 논 디엔 푸옥, 디엔 남(디엔 반)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마을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총을 쏘아서 140명을 학살하였다. 몇 명의 어린이들의 시체를 토막 내어 불 속에 집어 던졌다.(On February 24th 1968 at Dien An, Dien Duong, Dien Nhon Dien Phuoc, Dien Nam(Dien Ban) U.S troops and South Korean troops killed 140 people by gathering the villagers and shooting, some children bodies were cut into sections and thrown into fire.)
-1968년 2월 25일, 캄 하(호이 안)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마을 사람들을 큰 구덩이에 모이게 하고서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아 120명의 사람들을 학살했다.(On February 25th 1968 at Cam Ha(Hoi An), U.S and South Korean troops killed 120 people by gathering the villagers into a big pit then throwing grenades and shooting.)
-1970년 4월 15일, 르 박 마을(두이 쑤엔)에서 미군이 38명의 사람들을 학살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노인, 여성, 어린이들이었다.(On April 15th 1970 at Le Bac hamlet(Duy Xuyen), U.S troops killed 38 people mostly elderly, women and children.)
-1972년 8월 19일, 미군이 란 투옹 성당(손 란-꾸 손)에서 45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예배에 참석한 100명을 학살하였다.(On August 19th 1972, the U.S troops bombed Lanh Thuong Church(Son Lanh-Que Son), killed and injured 100 people, including 45 women and children while attending church ceremony.)
1968년, 베트남 최대의 명절인 설(Tet)을 앞두고 월맹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월맹군 3만7천 명, 미군 2천5백 명이 전사하였다.
다낭에서 남쪽으로 호이안으로 가는 12km 지점에 퐁 니·퐁 넛(Phong Nhi Phong Nhat) 두 마을이 있다. 1968년 2월 12일 한국군 해병대 청룡 부대가 두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날, 청룡부대 제2여단 제1대대 1중대 병사 150명이 수색 정찰에 나갔다. 두 마을 옆으로 이동하던 중 한 명이 지뢰를 밟았고, 한 명이 저격당했다. 중대장은 마을 진입을 지시했고,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생존자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은 당시 8살이었다. 응우옌 티 탄은 언니 응우옌 티 쫑(Nguyen Thi Trong), 남동생 응우옌 득 쯔엉(Nguyen Duc Truong), 이모 판 티 응우(Phan Thi Ngu), 엄마 판 티 찌(Phan Thi Tri)를 포함하여 전 가족을 잃었다. 학살 당시 그는 엄마를 찾아다녔지만, 엄마 또한 총에 맞아 죽어 있었고, 5살짜리 그의 동생 응우옌 득 쯔엉은 총을 맞고 입이 다 날아간 채 죽었다. 8살의 응우옌 티 탄 또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튀어나온 창자를 움켜지고 도망쳐 동네의 어른들에게 발견되어 미군 헬기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다. 1년 동안 입원한 뒤에 퇴원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총 74명이 학살당하고, 17명이 부상을 입은 퐁니·퐁넛 마을의 학살에서 19살의 소녀 응우옌 티 탄(동명이인)은 유방이 잘렸고, 무차별 폭력에 희생된 지 2일 후에 목숨을 잃었다. 6세의 아이는 엄마와 같이 장 보러 가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퐁니·퐁넛 학살 위령비에는 78세 노인부터 1세 아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희생자 74명 중 26명이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다. 1963년,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5살 어린이만 4명이었다.
미군 본 상병이 담은 학살의 현장 사진은 주월 미군사령부와 대사관을 거쳐 미 국무부와 국방부에까지 올라갔고, 주월한국군 사령부를 포함한 한국의 군 당국에까지 건너갔다. 퐁니·퐁넛 마을 학살은 한국과 남베트남 간 외교 문제가 되었고, 미국이 한국에 강하게 항의했다. 당시 주월 미군 총사령관이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에게 편지를 보냈다. 채명신은 “한국군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어떠한 책임 있는 사건에도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고 회신했다.
1968년 3월 16일, 미군 제11 경보병 여단 소속의 소대는 꽝 응아이 북부 손 미(Son My) 마을에 들어가 노인, 부녀자, 어린이들을 개천에 몰아넣고 504명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성, 노약자, 아이가 대부분이고, 열에 1명은 유아이었다. 은폐되었다가 1년 뒤에 '미라이 대학살(My Lai Massacre)'로 세상에 알려졌다.
틱낫한 스님은 베트남 전쟁 시기에 남북 베트남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전쟁의 원인이 이념이었기에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불교도, 기독교도 어떤 이념과 종교도 내세우지 않고 오직 사람이 죽고 있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가 회복되기만을 염원하였다.
전쟁을 피하여 깊은 산 속에서 ‘프엉 보이(Fragrant Palm Leaves, 향기로운 야자잎)’라는 수행공동체를 건설하고 수행에만 정진하였지만, 폭탄이 선방 옆에 떨어지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마당에 참선만 하는 것은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사회봉사청년학교를 설립하여 1만 명의 봉사자들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을의 집을 재건하고, 주민들의 삶을 보살피는 데 주력하였다. 봉사자들은 남북 베트남 양측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끌려가 총살되는 일도 있었다.
스님은 파리 평화 회담에 불교 대표단을 이끌고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전쟁의 원인이 미국인의 탐욕에 있음을 간파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도움을 얻어 반전 평화 운동을 펼쳤다. 스님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1966년에 베트남에서 추방되었다.
스님은 베트남 전쟁 뒤에 보트피플을 구조하는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82년에 프랑스 남부 보르도 지방에 수행공동체 플럼빌리지를 설립한 이후, 미국, 아시아, 유럽에 14개의 사원과 수십 곳의 수행 센터, 1,500여 개의 수행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스님은 80년 동안 불교가 삶과 사회 속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는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운동을 펼쳤다. 불교 수행, 시와 동화, 불전에 대한 해설 등 1백여 권의 책을 지어 인류를 일깨우고 사회를 변화시키며, 지구 생태 환경을 구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2014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에 베트남 후에의 출가 본사인 뚜 히우(chua Tu Hieu, 慈孝寺)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던 중 2022년 1월 96세에 열반하셨다.
베트남 전쟁의 지옥에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의 화신이 되어 중생을 구제한 스님은 유마경의 표현대로 불구덩이 속에서 피어난 하얀 연꽃(火中生蓮)이었다.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고 침략 전쟁을 한 프랑스,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을 지옥으로 만든 미국, 미국을 도와 베트남전에 파병을 하고 숱한 민간인을 학살한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를 돌며 마음과 사회와 지구의 평화를 위한 설법 여행을 하셨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편지를 써서 스님을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하였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된 것은 한국이 민주화를 거치면서부터였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를 최초로 연구하고 현장을 직접 조사한 구수정 박사는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80여 개 마을에서 9,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부터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알리는 노력을 한 구수정 박사와 한베평화재단은 2018년 4월 21일부터 22일까지 베트남전 시민 평화 법정이라는 이름으로 민간 모의법정을 열어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주심을 맡았고, 그는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에 책임이 있음을 선고하였다. 원고로서 참여한 두 명의 응우옌 티 탄(한 명은 퐁니·퐁넛 피해자이고, 다른 한명은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다.)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있었던 학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하여 4·3 항쟁의 생존자와 만나기도 했다. 한국군 월남 파병 60주년이 되는 올해도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이끌어온 구수정 박사가 해설하는 베트남 평화여행단 모집 광고를 한겨레신문에서 오늘 아침(2024년 5월)에도 보았다.
미 해병 제3 상륙전부대 소속 본(J. Vaughn) 상병이 촬영한 '퐁니·퐁넛 마을 학살'의 기록은 32년 만인 2000년 6월 1일 《한겨레21》 고경태 기자가 미 국립문서보관소 기밀 해제 문건에서 20장의 사진을 찾아내 2000년 11월 23일에 세계 최초로 보도했다. 기자는 18년 동안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본 상병의 짤막한 한 줄 사진 설명을 단서로 많은 사람들의 고난과 눈물이 수록된 장대한 서사를 취재하여 책으로 출간하였다.
여행 전부터 한국군에 의하여 잔인하게 학살당한 베트남 민간인이 1만 명 정도 되고, 응우옌 티 탄 씨가 한국의 법원에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를 보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하여 재판이 진행 중인 것을 신문 보도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생존자 응우옌 티 탄(64) 씨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국가배상소송의 2023년 2월 7일 1심 판결에서 승소하였다. 2024년 4월 5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 제1별관 312호에서는 응우옌 티 탄의 국가배상소송 항소심 두 번째 심리가 열렸다. 정부 측 변호인단은 베트콩의 소행으로 떠넘기고 있다.
형우 샘은 베트남을 여행하며 한국군에게 주민들이 학살당한 마을에 가서 위령비와 한국군 증오비를 촬영하여 우리 팀에게도 학살 피해자 마을에 가보기를 권했다. 문화유산을 위주로 역사를 탐구하는 기행이지만, 일정에 차질이 있고, 혹시 한국군과 미군의 잔인무도하고 천인공노할 만행에 불편해하실 분이 있을까 염려되어, 민간인 학살 현장의 마을에 가자고 제안하지는 못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겪은 한국 정부는 미국 제국주의와 함께 베트남에서 저지른 잔인무도한 만행을 인정도, 사과도, 역사교육도 하지 않으면서,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고, 역사 왜곡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베트남 전쟁의 한가운데, 1963년 내가 태어나서 1975년 초등학교 6학년, 13살이 되기까지 철없이, 티 없이 살았던 그 시절, 지금부터 50~60년 전, 지옥이 되었던 그 현장을 관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얼마나 많은 베트남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땀으로 적셔지고 뼈가 쌓인 땅이었던가!
베트남전 전시물을 보고 나니, 민속 유물들이 있었다. 신라 토기를 닮은 검은 오지그릇 항아리들 중에는 우리의 안동소주처럼 증류주인 소주(燒酒)를 제조하는 장치, 세 발 달린 무쇠솥, 어느 고관대작의 유물인지, 나전칠기 3폭 산수화 병풍 가리개와 뚜껑에 사자상이 올려진 은입사 구리 향로, 50세 생신을 맞은 분에게 준 축수(祝壽)와 축복의 한문 대련을 구양순체 글씨로 새긴 목재 고급 액자(祝南山三千朱履, 祠北海五十華誕, 揚名顯父母, 有穀貽子孫-3천의 귀한 손님들이 남산(南山)과 같은 수명을 빌고, 오십 세의 빛나는 생신에 북해(北海)와 같은 복을 빕니다. 이름을 드날려 부모를 명예롭게 하고, 곡식이 있어서 자손에게 물려 주네!), 둥글고 네모난 각종 무늬를 찍어내는 떡살판, 대패와 끌과 톱 등의 목공 도구, 연꽃 위에 법륜을 손에 받쳐들고 있는 그림을 검은 먹으로 인쇄하는 사찰의 목판, 부적을 붉은 먹으로 찍어내는 목판, 막대 저울, 주판, 용도를 알 수 없는 태극·팔괘 철판, 숯을 넣어 쓰는 무쇠 다리미, 약을 팔고 진맥을 하는 후발당약행(厚發堂藥行/ 厚意傳留才妙藥 發心承經德良醫-후의로 재능을 전해 받은 오묘한 약사, 마음을 내어 능력(德)을 전해 받은 어진 의사)의 모형, 남성 아오자이 등을 주마간산으로 보고 박물관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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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 역사박물관에서 나와 참파 문화유산 소장 박물관으로 가는 도로에는 큰 가로수가 그늘을 드리우고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차도 보였다. 다낭 참 조각 박물관(Da Nang Museum of Cham Sculpture)에서 7~15세기의 참파국 힌두교 사원에 모셔진 창조의 신 브라만,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신 등의 각종 조각들을 볼 수 있었다. 9세기 초에서 11세기의 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비석도 있었다. 캄보디아 지역에서 바닷길을 통하여 전파된 힌두교 문화의 소산들이었다. 15세기 레(黎) 왕조의 타인 똥(聖宗)의 남정으로 참파 문화도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참 박물관에서 인상적인 것은 힌두교, 밀교의 존상이나 연꽃 등에 여성의 팽창한 유방이 강조되어 있었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지모신의 변용들로 보였다. 불교가 힌두교 문화를 받아들여 만들어진 인도 후기 대승불교인 밀교의 존상들도 볼 수가 있었다.
야자수가 서 있는 길 좌우에는 사자 조각이 있었는데, 자바에서 본 힌두교·불교의 조각들과 기본적으로 같았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니 섬세하고 절제되고 유연한 곡선의 우아한 기둥, 뱀을 먹는 가루라상, 시바 신이 타는 난디(소)가 보였다.
13마리의 나가가 보호하는 가운데에 결가부좌로 앉은 4비의 비슈누는 성도 뒤에 9마리의 나가가 보호한 석가모니불상과 비슷하였다. 사방으로 많은 여성들이 돌아가며 새겨진 네모 기단 위에 앙련과 복련의 대좌 위에 링가가 모셔진 것은 그 크기로 보아 시바와 왕권의 상징으로 모셔진 것으로 보였다. 소 등에 타고 손에 금강저를 들고 있는 수문장 드와라팔라(Dvarapala)는 석굴암 금강역사상과 구조가 같았다. 춤추는 시바상은 팔이 9개인 것은 두 팔의 연속적인 자세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고, 얼굴은 환희와 삼매에 젖은 듯하며, 관람자가 흥겨움을 느낄 만큼 동작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작은 네모 액자 안에 말을 타고 폴로 게임을 하는 두 사람의 조각은 섬세하고 역동적이고 사실적이라서 참파시대 조각술의 빼어남을 잘 보여주었다. 수레바퀴와 연꽃 줄기가 새겨진 신전 조각은 힌두교의 세계관이나 시간관을 보여주었다. 드럼, 장고, 튜일라(막대 모양 현악기) 등의 악기 반주에 맞추어 궁중의 무희가 춤을 추는 조각은 4비(臂)이고 두 손에는 금강저, 정병을 들고 있으며 손 모양이나 복식은 미선 유적에서 본 압사라 춤과 같았다. 천상의 무희인 압사라는 팔, 팔뚝, 목, 허리, 엉덩이, 허벅지에 구슬을 꿴 장신구를 하고 있고 얼굴에는 고요한 미소가 있었다.
춤추는 4비의 시바상의 모자는 탑의 상륜부를 닮았고 연화좌대에 앉았다. 누운 비슈누의 배곱에서 나온 연꽃 줄기에서 태어난 브라만상, 비슈누의 배우자로 부와 행운과 번영의 여신인 락슈미는 무쿠다라라는 광배가 있었다. 자연의 정령인 약사는 가발 같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데, 굽타시대 조각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브라만의 배우자 사라스와티(Sarasvati)는 지식, 음악, 예술의 신으로 백조를 타고 다닌다. 대좌에 백조가 단순하게 새겨져 있다. 얼굴은 온화하고 미소를 머금고 있는 풍만한 얼굴이다. 사라스와티상을 네팔 카투만두의 학교 마당에서 본 일이 생각났다. 일본교토국립박물관 메이지고도관(明治古都館) 현관 위의 삼각형 파풍(破風)에는 불교의 미술과 공예의 신인 비수갈마(毘首羯磨)와 기예천(伎藝天)이 있다. 이들은 힌두교의 사라스와티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14~15세기의 농업의 신 발라라마(Balarama) 조각은 자바인의 자세로 앉아서 왼손에는 염주, 오른손에는 바퀴 달린 쟁기를 들고 있었다. 발리에서 본 쌀의 신 스리위자야가 생각났다. 연꽃이 새겨진 원형의 석조 좌대에는 여성의 유방이 24개 정도가 새겨져 있었다.
베트남의 국가 보물(National Treasure)로 지정된 구리로 된 타라 보살상은 얼굴이 남성인데 눈은 크고, 코는 오똑 튀어나왔고, 이마에 마름모꼴 백호가 있으며, 나발 위의 긴 육계에는 화불이 있다. 가슴은 여성의 팽팽한 유방이 있고, 긴 하체에는 치마를 두르고 있으며, 두 팔을 반쯤 내리고 앞으로 뻗어서 손바닥을 위로 들고 보이고 있다. 타라 보살은 밀교의 보살로 관세음보살의 눈물에서 탄생한 보살로 티벹불교에서 많이 신봉하는 보살이다.
티(T)자 모양의 평면을 가진 높은 기단 위에 여러 인물들이 빽빽하게 새겨진 의자에 통견의 아주 큰 불상이 고요한 얼굴로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있었다. 의자 양쪽에 공양을 올리는 인물상, 서 있는 보살상, 의자 앞에 경주 남산 옥룡암 불적의 안산불과 닮은 보살상, 석굴암 유희좌의 보살과 닮은 보살상이 있고, 앞쪽과 좌우에 기단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앞쪽 계단 양쪽에 드와라팔라상이 있었다. 자바처럼 참파국에도 힌두교 문화를 받아들인 불교인 밀교 사원이 힌두교 사원과 병존했음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발목의 압박감으로 불편하여 주마간산하고 출구로 나왔다. 그곳 뒷마당에는 박물관의 노란색 벽과 참나무처럼 생긴 나무와 반얀나무 두 그루 노거수의 푸른 잎새, 섭씨 20도 정도의 온화한 날씨가 어울려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시원한 그늘 속에 벤치와 테이블이 있어서, 앉아서 일행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초록별, 미리샘, 조은샘, 연하샘, 명희샘 등과 우리 부부는 함께 앉아 즐거운 순간을 사진 속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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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던 버스가 새로 지은 큰 리조트 시설 안에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니 현관에는 뗏 명절을 맞아 상서롭고 기운과 부와 자손 번창을 희망하여 베트남 사람들이 집안에 들여놓기를 좋아하는 금귤 나무 화분이 있었다. 황금색 작은 귤이 나무에 오롱조롱 열려 있었다. 경회루라는 큰 한국식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불고기 샤브샤브로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도 마당에는 보라빛 수련이 큰 항아리 물 속에 피어 있고, 동남아 여행에서 부겐벨리아와 함께 늘 보는 꽃이 이곳에도 있었다. 다섯 장의 하얀 꽃잎에 가운데는 노랗게 물들어서 아주 순결하고 고결하게 보이는 꽃이 잎이 없는 앙상한 나무가지에 피어 있었다. 베트남어 꽃 이름은 호아 셔(Hoa Sứ)이다. 라오스에서는 ‘덕참파’라고 하며 국화로 지정되어 있다. 라오스 말 이름이 참파국에서 들어온 꽃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 꽃의 이름은 학명이 플루메리아(Plumeria)이고, 흔히 ‘러브하와이’라고 불린다.
점심을 먹고 간 곳은 이비에스(EBS)의 세계테마기행에서 보았던 호이안의 바구니배 타는 곳이다. 입구의 좌우에 옷, 모자, 가방, 아오자이, 수공예품 바구니 등의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타는 입구에서 베트남인 남자가 노란 모자를 쓰고 마이크를 들고 한국의 트롯트 노래를 악을 쓰며 불러서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직경이 2미터 정도되는 대나무 바구니에 가로로 댄 나무판 의자에 뱃사공과 2명의 관광객이 탔다.
배를 탄 우리 일행은 카메라를 들고 논라를 쓰고 앉아 있는 다른 배의 사람들을 촬영하였다. 물가에는 요리를 체험하는 관광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었다. 어린 쌍둥이 딸을 데리고 온 베트남인 엄마도 있었지만, 거의 한국인 관광객들이었다. 코코넛 숲 사이로 난 물길 위로 노를 저어 내려가자 호수처럼 넓은 곳이 나왔다. 어부가 그물을 던져 고기잡이도 하였다. 한 남자가 바구니 배를 마치 허리로 훌라후프를 돌리듯이 돌며 화려한 묘기를 보였다. 박수도 치고 팀을 건네기도 하였다. 물 가운데에 두 남자가 노래방 시설을 갖추고 마이크를 잡고 한국 트롯트 가요를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악을 쓰며 온몸으로 불렀다. 그 둘레에서 구경한 우리는 그 성의에 미안해서라도 1달러 지폐를 뱃사공에게 건넸고, 뱃사공은 노에 물을 묻혀서 그 돈을 붙여서 두 남자에게 건넸다.
바구니배 타는 곳에서 투본 강에서 유람선을 타기 위하여 호이안 옛 시가의 오래되고 좁은 도로를 지나서 탄하(Thanh Ha) 도자기 마을로 갔다.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며 본 초등학교가 정겨웠다. 14개의 교실이 있는 2층 건물의 학교에는 크지는 않지만 나무와 놀이 기구가 있는 운동장이 있었고 건물은 산뜻해 보였다. 도자기 마을이라서 그런지 가로등도 다섯 개의 황토색 테라코타 도자기 등이 빨강색 철 기둥에 달려 있는데 그 자체가 미술품이었다.
골목 안으로 걸어서 들어가니 한 가게에 열두 띠 동물, 사람 얼굴이 들은 해, 부엉이, 꽃병, 화분, 향로, 찻잔, 풍로, 냄비, 주전자 등의 황토색 테라코타, 청색과 하늘색이 섞인 자기 화병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강변의 곰 카페(Gom Cafe)에 앉아 가이드 윤실장이 제공하는 냉커피를 마시며 망중한의 시간을 가졌다. 가게에는 물소를 탄 어린이, 두 손을 베고 몸을 웅크리고 자는 부처, 물레를 돌리며 저금통, 항아리, 냄비를 빚는 노파 등의 테라코타 도자기가 보였다.
윤실장님은 우리에게 각자 자신의 띠 동물 테라코타를 고르게 하여 선물했다. 베트남에서는 12지신에는 내 띠인 토끼(卯)가 없고 대신에 한자로 같은 음이 나는 고양이(猫)가, 소는 물소이었다. 아내와 나는 각기 범과 고양이 테라코타 오카리나를 골라서 어린 날 봄이 오면 입에 물고 불던 버들피리처럼 불며 동심에 젖기도 했다. 카페 앞에는 가냘프고 작은 키의 여인이 바지를 걷고 그릇과 인형을 만드는 흙을 이기고 있었다.
카페에서 나오는 골목에 수탉이 철사 조롱 속에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릴 적 보던 덩치가 크고 깃털이 풍성하며 당당한 풍채를 가진 수탉이 아니었다. 몸집은 가녀리고 머리와 목의 털이 다 뽑혀 있었다. 투계용 닭인 것 같았지만 베트남의 수탉은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연민의 정이 생겼다.
<호이안은 응우옌 왕조의 대외무역항이었다. 명의 해금정책이 1567년에 해제되면서 중국인이 남해무역에 종사하며 머물렀다.
중국인들은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상호 왕래가 금지된 틈을 타서 중간에서 남북교역에 종사하며 이득을 보았고, 명과 일본 사이에 직접적인 무역관계가 없어서 중계무역으로 부를 쌓았다.
17세기 초에 슈인센 제도(朱印船制度)에 의해 동남아 무역이 성행하여 호이안에 일본인 거리가 형성되었다. 1630년대 말에 에도막부가 쇄국령을 내린 뒤로 일본인은 유럽 상인들의 통역이나 중개인으로 활동했다.
포르투갈은 16세기말부터 마카오를 거점으로 점차 북의 찐씨와 남의 응우옌씨 양측을 상대로 정기적인 무역관계를 형성했고, 응우옌씨에게 대포 제조법을 가르쳐주어 호감을 샀다. 북부 통킹 지방에서 생사(生絲)를 구입하여 일본에 판매하여 큰 수익을 얻었다.
영국은 1600년 동인도회사를, 네덜란드는 1602년 동인도회사(VOC)를 각각 만들어 무역경쟁에 뛰어들었다. 프랑스는 무역보다 가톨릭 선교에 관심이 있었다. 마카오의 예수회는 새로운 선교지로 베트남에 관심을 갖고 알랙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1660) 신부를 파견했다.>
-유인선, <<베트남의 역사>>, 252~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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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도자기 마을의 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강의 하류로 대략 30분 정도 내려갔다. 투본 강(Thu Bồn Rive)이 하구에서 남쪽에서 흘러드는 두 지류와 합류하여 바다로 흘러드는 지점에 크고 작은 삼각주가 15개 정도 있고 강의 북안에 호이안 옛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강폭은 넓고 강물은 풍족하며 바다와 연결되어 예부터 강과 바다를 잇는 포구인 호이안은 해상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강변 좌우에는 나무와 건물과 배들이 줄지어 있었다. 호이안 옛 시가지가 가까워지자 강변에는 배들이 정박해 있고, 키가 큰 야자수가 높이 섰으며, 노란 벽에 검은색 기와 지붕의 벽돌로 쌓은 2층의 맞배집 건물들이 어깨를 붙이고 이어져 있었다. 이층 집 중에는 발코니가 있는 서양식 건축도 보였다.
베트남은 어디나 수량이 풍부한 강들이 서쪽의 고산지대에서 일어나 동쪽 바다로 흘러든다. 풍부한 수량의 강물과 망망대해와 추위가 없는 온화한 기후는 농업과 교역으로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을 온유하게 하였다. 베트남 여행 내내 강을 보면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우리나라의 메마른 강과 달리 베트남의 강에는 물이 풍부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오월과 같이 선선하고 다사로운 날씨에 바다같이 넓고 수량이 풍부한 강의 양쪽에는 붉은 지붕의 서양식 집들과 노란색 벽에 기와를 올린 베트남식의 고가, 싱그러운 활엽수와 거룻배들이 줄지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배에서 내리니 야자수 가로수 길이 있고 길 건너편의 분홍색 부겐벨리아꽃과 녹색 잎의 덩굴, 우기의 이끼가 말라 거무티티하고 노란색 벽, 알록달록한 등이 어울려 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카페 안과 그 앞의 노천 파라솔 아래에는 서양인 남녀가 앉아 커피를 마시고, 엽서를 쓰고 있었다. 가게 앞으로 관광객을 태운 시클로(인력거)가 줄지어 지나갔다. 길거리에 쭈그려 앉아 대나무를 잘게 자르고 껍질을 벗겨서 장미와 방아깨비를 손으로 만들어 파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길을 건너서 출입문 위에 떤끼고택(Nhà Cổ Tấn Ký, 進記古宅)은 호이안으로 이주해온 중국인의 7대 후손이 살고 있다. 떤끼(進記)라는 큰 한자가 네모 액자 속에 쓰여 있는 고가 안으로 들어갔다. 강수량이 많고 햇빛이 따가운 지방이라서 그런지 어두워 등을 켠 실내에 마당, 침실, 응접실, 사당이 함께 배치되어 있고 비단 커튼으로 공간을 분리하였다. 관광객이 워낙 많아서 내부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있는 작은 뜰 가운데에는 우물이 있다. 입구에 보관 되어 있는 풍구(風具), 멧돌, 대나무로 만든 소반 등의 생활 용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풍구는 어릴 적 우리 집에도 있었던 것과 모양이 똑같았다. 아버지, 어머니를 도와 추수 뒤에 나락 속의 쭉정이를 바람으로 날리고 알곡을 분리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베트남과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같은 벼농사 지역이고, 문화적으로 같은 한자문화권이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홍수로 강이 범람하여 물이 차오른 날짜를 기둥에 붙여 놓은 것이 보였다. 2009년 9월 30일에는 거의 2미터 높이까지 물이 차올랐다. 그래서 선조를 모신 사당이나 사진 등의 귀한 것들은 머리 위 높은 곳에 두고 있었다. 중국 광동성에서 무역을 위하여 호이안에 오래 전에 정착한 중국인 가옥인지라 집안 곳곳에 자개 침대와 테이블과 의자, 청화백자 병, ‘德繼馨(덕은 향기를 잇고)’, ‘心常泰(마음은 늘 태평하네)’ 등의 한문 대련과 산수화, 사군자 그림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수천 년 한자 문명의 인문 정신이 무역으로 쌓은 부와 잘 어울려 있었다.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富潤屋, 德潤身)’고 한 <<<대학>>의 말 그대로이었다.
떤기 고택의 뒷문은 안쪽 상가로 이어져 있었다. 발코니에 아치형 문이 이어진 유럽풍 2층 집의 노란색 벽과 파초가 어우러져 화사하고 싱그러운 기운이 돌았다. “부귀화개만원향(富貴花開滿院香-모란꽃이 피어 뜰에 향기가 가득하네)”라는 주련이 붙은 고택 앞에는 윤기 나고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땋아 가슴 쪽으로 내리고, 백색의 바지에 붉은 원피스의 아오자이 차림에, 굽 높은 샌들을 신은 베트남 아가씨가 노란꽃 다발을 안고 앉아 있고, 같은 옷을 입은 친구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정말 티 없이 맑고 고와서 한 송이 모란꽃이 피어난 것만 같았다.
청·홍·녹·황 여러 가지 색의 등이 건물과 길거리에 걸려 있고, 카페와 기념품 가게, 식당이 길 양쪽에 길게 늘어 서 있었다. 어느 집 문 앞에는 보리수가 화분에 심어져 있고 그 옆에 선정인을 하고 연화좌에 앉은 테라코타 불상이 놓여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길거리는 아치문이 이어진 발코니가 있는 이층의 노란색 서양식 건물과 검은 기와와 이끼가 있고 목조인 중국식 집과 꽃과 녹색 잎과 오색 등과 주민과 관광객이 어울려 정겹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지류가 투본 강으로 흘러들고 그 골목 안쪽에 광조회관(廣肇會館)이 동쪽에, 1593년에 일본인이 놓은 오래된 내원교(來遠橋)가 서쪽에 있는 길거리가 다시 있었다. 광조회관 앞에서 일행이 오기를 기다려도 관유샘이 오지 않아서 한참을 기다렸다. 청년이 가로수 아래 길바닥에 앉아서 관광기념품으로 잉어를 그려서 팔고 있었다.
광조회관은 광주부(廣州府)와 조경부(肇慶府)에서 호이안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함께 만들고 모이는 회관이다. 구름무늬가 들어간 네 개의 분홍색 기둥 사이에 세 문이 있는 패방의 문미에는‘광조회관’, 가운데의 두 기둥에는 대련(廣資集公益群賢盛會, 肇啓濟衆生合境同安-광범위한 물자는 공익을 모으고 뭇 현인들이 성대하게 모이며, 관성대제의 열어 보임은 중생을 건지고 같은 땅에서 함께 평안하네.)이 있었다.
안쪽의 좁은 출입문에는 머리 위에 금색 광조회관 편액, 광서 2년(1876)에 쓴 힘이 넘치는 북위체 큰 글씨의 대련이 윤기 나고 검은 판에 금빛으로 쓰여 있었다. “광주부 백아담(白鵝潭)에서 덕택을 입고, 조경부 영양협(羚羊峽)에서 은혜의 물결에 목욕하네(鵝湖蒙德澤 羚峽沐恩波)” 출입문을 지나자 머리 맡에 ‘자운경해(慈雲鏡海-자비의 구름, 거울처럼 맑은 바다)’, ‘호의가가(好義可嘉-좋은 의리는 아름답네)’ 같은 글씨를 새긴 현판을 걸어 놓았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좁은 마당에 티엔허우(天后聖母, Thiên Hậu)를 모시거나, 관우를 재물의 신, 관성대제(關聖大帝)로 모신 징한당(澄漢堂), 만선당(萬善堂) 같은 사당이 있고, 응접실처럼 생긴 방의 벽에는 아주 큰 글씨의 복자 옆에 德脩四時受天之祜 躬膺百祿行地無疆-덕을 사계절 닦아 하늘의 복을 받고, 몸소 백 가지 복록(福祿)을 안고 끝없는 땅에 행하네.) 그 마당에 화려한 색의 용과 잉어상을 설치해 놓았다. 사당에는 작은 관세음보살상이 유리상자에 들어 있고 그 뒤에 고목 그루터기가 통째로 있는데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사당 뒤쪽으로 돌아가니 사당의 벽에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고, 눈 내린 날, 삼인이 제갈량의 초려를 찾아가는 삼고모려도(三顧茅廬圖)가 그려져 있었다. 뒷마당에는 괴석들이 있고, 6각형 작은 연못 안에 아홉 마리 용상이 있고, 그 옆에는 하얀 어미 영양과 새끼 영양들의 모습을 조각하여 세워 놓았다. 나무와 괴석들이 있는 작은 정원이었다. 광조회관에는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신앙 공간, 생일 파티 등 예식 공간, 정원이 어울려 있는 친목과 만남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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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광조회관에서 돌아나와 내원교(Lai Viễn Kiều, 來遠橋)를 지나 서쪽 옛 일본인 거리의 첫머리에 있는 풍흥고택(Nhà Cổ Phùng Hưng, 馮興古宅)으로 갔다. 1593년에 냇물 가운데에 4개의 석조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5칸의 목조 기와 지붕 건물을 올린 내원교는 전면적인 수리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옛 건물들은 그림, 등, 가방, 모자, 손수건, 인형, 불두(佛頭), 바나나와 오렌지 파이 등을 파는 가게들이 되어 있었다. 풍흥고택에는 중국에서 이주해온 사람의 8대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
베트남은 바다를 끼고 인도와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연결되는 해상 교통로를 통하여 예로부터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중국과 서양 세력의 무역선과 군함이 끊이지 않았다. 베트남 중부 지역의 호이안은 투본 강의 삼각주와 육지로 둘러쳐진 하구가 태평양과 연결되어 천혜의 무역항이 되었다. 19세기에 다낭으로 상업의 중심이 옮겨 갔지만, 전쟁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호이안에는 200년 전통의 844채의 고가들이 5개의 길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목조가옥인 풍흥고택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는 연등 천장 밑에 일층과 이층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기둥과 난간 등의 목재는 검은 윤기가 나서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보여주었다. 붉은 바탕에 금빛 나는 글씨의 ‘世德流光(대대로 이어지는 덕이 흐르는 빛)’이라는 액자가 높이 걸렸고, 벽면에는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 그림이 붙어 있었다. 곳곳에 호이안의 풍경을 담은 그림 액자, 목조 나한상, 나전칠기 현판 등이 보였다. 머리 위 높은 곳에는 향로, 꽃병, 과일, 촛대가 있는 작은 사당에는 신주가 봉안되어 있고, 문 좌우 기둥에는 금빛 글씨의 대련이 있었다. “梅雪松風淸几席, 天光雲影照琴書-매화의 눈, 솔의 바람은 궤석(几席)을 맑게 하고, 하늘의 햇빛, 구름 그림자는 거문고와 책을 비추네.) 나무 계단으로 2층으로 올라가 발코니에 서니 기와지붕에 풀이 나고 푸른 이끼가 쓴 이층 고가들이 길 양쪽에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발코니 천장에 목조 쌍어 장식이 붙어 있고, 곳곳에 금색 장막이 쳐져 있으며, 붉은 술이 천장에서 드리워져 있었다.
풍흥고택에서 나와 내원교를 지나 동쪽 거리를 구경하러 걸어갔다. 좁은 상가의 양쪽에는 노란색을 칠한 벽에 발코니가 있는 서양식 이층 건물과 기와 지붕의 작고 오래된 가게들이 이어져 있고, 여기에도 알록달록한 등을 길 위로 매달아 놓았다. 가게마다 입구에는 등나무 같은 덩굴 식물을 심어서 처마와 지붕과 외벽에 푸른 잎이 그늘을 드리우고 부겐빌리아 같은 분홍색 꽃이 피어나 있었다. 아오자이, 티셔츠 등의 옷을 파는 가게, 모자와 가방 가게, 카페, 식당이 즐비하고 동서양 관광객들이 논라를 쓴 베트남 사람들과 뒤섞여 흘러갔다. 시클로를 타고 가는 한국 사람, 흰 아오자이와 논라를 입은 여자와 청바지를 입은 남자, 꽝 가인(Quang gánh)을 어깨에 메고 짐을 운반하는 베트남 여인도 지나갔다. 꽝 가인은 긴 대나무 막대기 양끝에 바구니를 달고 그 안에 짐을 넣어서 어깨에 메고 나르는 도구이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지게를 졌던 것처럼, 베트남 여인은 꽝 가인을 지고 다니며 물건을 팔고, 짐을 나른다. '어머니의 지게'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베트남 여성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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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안쪽에 작은 마당이 나오고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가운데에는 화강암 판석에 머리카락이 길고 턱수염이 풍성한 서양 사람의 얼굴을 조각한 석상이 있었다. 석상 앞에는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등의 과일과 꽃병을 올리고 향을 피워 놓았다. 비문을 읽어보니 폴란드에서 온 건축가로 호이안의 옛 시가지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도록 헌신적인 활동을 한 분이다. 벤치에 앉아 잠시 불편한 다리를 쉬다가 일어섰다.
카지미에르쯔 키와트코프스키(1944~1997)
Kazimierz Kwiatkowsky(1944~1997)
카지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건축가 카지미에르쯔 키와트코프스키는 1944년 7월 2일에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에 그는 열정과 재능을 가지고 베트남과 폴란드 문화유산 보존 협력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하여 베트남에 왔다. 그는 문화유산의 발굴, 연구, 홍보에 크게 기여 했다. 또한 호이안의 옛 시가지를 199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병으로 1997년 3월 15일에 사망했다. 그는 생애와 열정을 베트남과 세계의 문화유산 보존에 바쳤다.(Architect Kazimierz Kwiatkowsky better known as Kazik, was born on 2 July 1944 in the Republic of Poland. In the 1980’s of the 20th century, he came to Vietnam to take part in the cooperative program for the preservation of the Vietnamese and Polish cultural heritage with his enthusiasm and talent. He contributed greatly to discovery, research and publicity. He also helped Hoian old town to be listed as a world cultural heritage in 1999. He became ill and died on 15 March 1997 in Hue. He dedicated his life and zeal to the cause of preservation of Vietnamese and world cultural heritage.)
기와지붕의 이층 오래된 목조 건물의 옷 가게에는 처마에 연보라, 노랑, 빨강 3가지 색의 루엘리아꽃 화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더 걸어가니 길바닥에 앉아 대나무를 잘라 장미와 방아깨비를 만드는 모자 쓴 아저씨, 도화지에 내원교, 노랑색 벽의 집과 투본 강의 배, 대나무와 등을 즉석에서 그리는 청년, 호떡을 굽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나란히 앉아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좁은 입구의 시장 안을 들여다보니 기둥이 나열되어 있고 수십 개의 작은 식당이 열을 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골목이 끝나고 네거리 갈림길에는 큰 보리수가 있고, 그 옆의 정자 안에는 우물이 있었다. 아주머니가 두레박을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맑은 물이 풍부하였다. 그곳은 말 그대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시정(市井)이었다. 우물 주변에는 각종 등과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 가게가 있고, 선글라스를 쓰고서 슬피퍼를 신은 금발의 서양 아주머니가 자전거를 끌고 지나갔다. 가까이에는 푸젠회관(福建會館)이 있고, 패방 안으로 보니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곳에서 돌아서 다시 광조회관 앞으로 오는데 날은 어둑해지고 가게들마다 등불을 켰다. 한 아주머니가 길바닥에 자리를 깔고 색종이 공예품을 파고 있었다. 색종이를 오려서 팬더곰, 다람쥐, 강아지, 코끼리, 원숭이, 해바라기, 내원교, 선박, 자전거, 삼단의 생일 케이크, 시클로, 논라를 쓰고 어깨에 막대를 올리고 짐을 나르는 아오자이를 입고 논라를 쓴 여인, 선물 꾸러미, 꽃과 나비, 용 등을 만들었는데, 접으면 평면이고 펼치면 입체가 되었다. 어릴 적 본 이런 종이 공예를 다시 볼 수가 있는 것은 베트남 여행에서 만난 묘미였다.
코발트색 벽 저택의 샛문 앞 계단에 논라를 쓰고 허름한 옷차림을 한 노파가 도자기 마을에서 본 테라코타의 작은 항아리, 물을 길어 항아리에 붓는 여인상, 열두 띠 동물, 가옥 등의 도자기를 소쿠리에 담아 놓고 손님을 기다리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만 담고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못하고, 눈빛도 마주치지 않고 돌아섰지만, 노파의 쓸쓸한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할머니의 등 뒤 샛문 위에 붙은 ‘博愛(박애)’라는 웅장한 글씨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그림을 사서 돌아 나오니, 아내는 다른 분들과 함께 스카프와 숄을 쇼핑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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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는 바닥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림을 파는 가게들을 볼 수가 있었다. 기계가 만드는 제품이 아니라 사람의 숨결이 스며든 베트남과 호이안의 풍미를 전해주는 관광 기념품으로 그림이 단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클림트풍의, 박수근풍의 그림들을 볼수가 있었는데, 연꽃 줄기를 들고 있는 아가씨들을 그린 그림에 계림샘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몇 곳의 그림 가게를 들어갔다 나왔지만, 수묵채색 문인화를 파는 가게 앞에 내 발길이 멈추었다. 붉은 꽃이 검은 가지에 점점이 피어난 매화, 붉은 꽃과 푸른 잎을 구상과 추상의 기법으로 표현한 연꽃, 검은 먹으로 친 국화와 대, 바위와 난초, 풍성하고 짙붉은 모란 등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제법 큰 그림 한 점이 100달러였다. 우리돈으로 13만 원이니 그림의 품격에 비하면 가격이 저렴했다.
"베트남 문학을 가르칠 때면 언제나 리(李) 왕조의 선사(禪師) 틱만짝의 이 시를 언급한다.
봄이 갔을 때
거기 어떤 꽃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지 마라.
바로 어젯밤 앞뜰에
한겨울 매화 한 가지 꽃이 피었네."
-틱낫한, 《젊은 틱낫한의 일기(Fragant Palm Leaves)》
지갑이 없는 나는 법련 거사님께 20불을 빌려서 15달러 하는 작은 매화 그림 한 장을 골랐다. 법련 거사님께도 큰 그림 한 점이 100불이면 아주 싸다고 사기를 권했다. 화가의 프로필을 물으니, 주인이 가게 안에 있는 화가의 프로필과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림을 파는 그 주인은 화가의 아내로 보였다. 가게에는 시어머니로 보이는 백발의 여인과 중풍으로 숨소리가 그렁그렁한 노인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남쪽 나라에서 돌아오니, 내가 몇 해 전에 식물원에서 사와서 심은 납매(蠟梅)는 추위 속에서 가지마다 샛노란 꽃을 피우고, 새큼한 향기를 흩날렸다. 사람을 기다리다가 지쳐가는 납매가 지고 기러기 돌아가면, 홍매가 터져서 향기를 뿌릴 것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화가의 페이스북을 보니 프로필과 다른 작품들이 포스팅되어 있었다. 응오 득 치(Ngo Duc Chi)는 1988년생으로 36세의 소장 화가이다. 2012년에 후에 대학교에서 한문-베트남어 학과를 졸업하고, 2014년에 중국 윈난(雲南) 대학에 유학하여 미술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동아시아 미술과 개념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 회화 연구와 그리기를 수년 동안 했다. 그는 “나뭇잎 한 장, 곤충 하나에 반영된 세계를 느끼는데 여전히 머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림에 찍힌 인장에 들어있는 별호는 대점야인(大占野人; 대점(호이안)의 들사람, '위대한 참파국의 백성')이고, 그림에 쓰는 아호는 한강(寒江)이다. 현대중국의 화가 오창석(吳昌碩)이나 제백석(齊白石)의 영향이 보이는데 화격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사군자의 하나인 국화를 그린 그림에 내 눈길이 멈추었다. 명나라 시인 이몽양의 시가 그림과 잘 어울려서 운치와 문기가 돌았다. 시와 그림, 글씨가 어울려 고귀한 인문 정신을 표현하는 문인화의 품격을 잘 보여주었다.
菊花
국화
明·李夢陽
이몽양(명의 시인, 서예가, 관료)
不隨群草出,
뭇 화초를 따라 피어나지 않고,
能後百花榮。
온갖 꽃 흐드러진 뒤에야 피네.
氣爲凌秋健,
기운은 찬 가을을 이겨내어 튼튼하고,
香緣飮露清。
향기는 이슬을 마시고 맑네.
細開宜避世,
가늘게 피어나 세상을 피하기 알맞고,
獨立每含情。
홀로 서서 송이마다 유정하여라.
可道蓬蒿地,
쑥대밭이라 할지라도,
東籬萬代名
동쪽 울타리 가에서 만대에 이름 높네.
*동리(東籬): 도연명의 시, <음주>의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壬寅年 春月 於大占海口 寒江 寫
임인년(2022) 봄,
베트남 대점(大占-옛 참파국, 호이안)의 바닷가 하구에서
한강(寒江)이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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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리고 등불이 켜지자 호이안은 다시 화려하고 아늑하여 사람의 마음을 다시 행복하게 하였다. 다리를 건너서 투본 강의 삼각주에 조성된 새 길거리로 갔다. 그곳의 강변 이층 건물과 길거리에 홍·황·녹·청·백 오색의 등불이 주렁주렁 매달려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였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참 참 식당(Cham Cham Restaurant & Bar)으로 들어갔다. 이층에 미리 마련되어 있는 밥을 먹었다. 베트남식 음식인데, 한국인을 위한 것인지, 미역국이 나왔다. 미리 차려놓은 음식이 식어서 맛은 반감되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하였다.
저녁을 먹는데, 순경샘과 미성샘이 오지 않고, 휴대폰을 찾으러 광조회관 길거리로 다시 갔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모두 나가고 계림샘과 식탁을 지키고 있는데 두 분이 늦게서야 왔다. 휴대폰을 찾지 못했다고 하였다. 위로의 말을 건네니 미성샘이 울먹이며 휴대폰에 온갖 정보들이 담겨 있다고 하였다. 아내가 전화를 했는지 물으니, 순경샘 폰으로 전화가 되지 않아서 통화를 시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두 분이 식사하는 것을 보고 식당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관유샘에게 아내가 미성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보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휴대폰을 주운 한국인 젊은 청년이 전화를 받아서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그분도 우리가 저녁을 먹고 나온 식당의 일층에 있다가 다가와서 “왜 이제야, 전화를 하였느냐?”며 휴대폰을 전해주고 돌아섰다. 일행이 모두 안심하였다. 하마터면, 즐거울 수가 없는 여행이 될 뻔 하였다.
옥현샘, 초록별샘, 우리 부부 네 사람이 강변 나루에서 사공이 노를 젓는 배에 함께 탔다. 사공은 배를 타고 강물을 오르내리다가 촛불로 밝힌 종이 등을 손에 들고 있는 우리 모습을 휴대폰으로 촬영해 주었다. 소원등을 물결 위에 띄워 보냈다. 건물과 배에 달린 등불의 빛이 일렁이는 물결 위를 비추었다. 어둠이 현실의 모습을 가리고, 화려한 등불이 세상과 마음을 비추어 환상적인 시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날씨와 함께 빛이 사람의 온갖 마음을 빚어내는 것을 다시금 실감할 수가 있었다.
배에서 내려 식당 옆의 야시장 거리에 갔다. 알록달록 화려한 등불을 가득 켠 가게 앞에는 등불 속에서 촬영하고 돈을 내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온갖 물건들을 파는 가판대가 길게 이어져 있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왁자지껄하였다. 아내와 함께 구경하다가 발목이 불편하여 나는 먼저 입구로 나왔다. 허름한 옷차림에 백발에 비녀를 꽂은 노파가 등불 빛이 희미하고 어두운 길바닥에 앉아 중국산 부채를 팔고 있었다. 나는 아내가 오자 부채 2개를 사고, 법련 거사님께도 '에누리 없이 부채를 사 드리라'고 말씀드렸다.
화려한 등불이 켜져있고 숱한 관광객들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호이안의 밤거리에서 남송의 시인, 신기질(辛棄疾)의 악부체(樂府體) 시가 떠올랐다.
東風夜放
花千樹
봄바람 밤에 불어
천 그루의 나무에 꽃을 피우고,
更吹落
다시 불어
星如雨
불꽃이 비처럼 쏟아지네。
寶馬雕車
香滿路
화려한 마차
향기가 거리에 가득하고,
鳳簫聲動
봉황 퉁소 소리 울려 퍼지며,
玉壺光轉
옥빛 달이 휘영청 한 데,
一夜魚龍舞
밤새 물고기,
용 모양 등이 춤을 추네。
蛾兒雪柳
黃金縷
아미, 눈빛 버들, 황금실
머리 장식을 한
笑語盈盈
暗香去
여인들 웃음소리 가득하고,
향내 풍기며 지나가네。
衆裏尋他
千百度
군중 속에서
그녀를 백번 천번 찾는데,
驀然回首
문득 머리 돌려 보니,
那人卻在
그 사람,
燈火闌珊處
등불 희미한 곳에 있네。
-<청옥안(青玉案), 정월 대보름날 밤(元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