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1일 일본식민지 지배하의 한국에서 일어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배경] 일본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정치를 펴는 한편, 민족고유문화의 말살, 경제적 침탈의 강화로 전체 조선민족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 민족자본가 계급은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실시된 회사령 會社令(1910)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농민의 경우 토지조사사업(1910∼18)으로 조상전래의 토지를 빼앗기고 빈농·소작농으로 전락, 극히 일부 지주층을 제외하고는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또한 농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흘러들어 자유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과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차별등으로 극악한 환경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처럼 식민통치 10년동안 자본가·농민·노동자 등 모든 사회구성 계층이 식민통치의 피해를 직접적·구체적으로 입음으로써 그들의 정치·사회의식이 급격히 높아져 갔고, 더욱이 미국대통령 윌슨이 전후처리를 위해 <14개조평화원칙>을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이 기회를 이용한 지식인·종교인들이 불길을 댕기자 항일민족운동은 삽시간에 거족적인 운동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경과] 손병희를 대표로 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적 인사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마침 고종황제의 인산 因山(국장)이 3월 3이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 3월 1일 정오를 기해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인쇄물을 뿌리고 시위운동을 펴기로 했다. 또 각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고 독립선언서와 함께 운동의 방법·날짜 등을 전달해두었다.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대한 통고문, 미국대통령·파리 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낼 의견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비용과 인쇄는 천도교측이 맡아, 2월27일 밤 보성인쇄소에서 2만 1천장을 인쇄, 은밀히 전국 주요도시에 배포했다. 손병희 이하 33명의 민족대표는 3월 1일 오후 2시 정각 인사동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한용운이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끝내자 만세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 체포당했다. 한편, 파고다 공원에는 5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鄭在鎔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나섰다. 이들의 시위행렬에 수만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되고, 만세운동은 삽시에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오후6시 진남포·선천·안주·의주·원산·함흥·대구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다음날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서울에서는 3일의 국장 당일에만 잠잠했을 뿐 매일 가두시위가 벌어졌으며, 학생은 휴교, 상인은 철시, 노동자는 파업, 관리는 퇴직으로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에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 비무장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부상·투옥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화수리·정주·맹산·강서·대구·밀양·합천등 많은 곳에서 일제에 의해 잔인한 집단학살이 저질러지고, 유관순의 참살 등이 자행되었으며, 민족대표를 위시한 지도자 47명은 내란죄로 기소되었다.
[결과.의의]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운동 상황을 보면 집회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202만3,089명, 사망자수7,509명, 부상자1만5,961명, 검거자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2개교, 민가715채나 되었다. (일본측발표).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비록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낸 바가 되어, 우리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점이 되었다. 그 결과 대내적으로는 일제의 무단정치가 끝나고 보다 교활한 문화정치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상해의 임시정부탄생, 해외 무장독립운동의 촉진,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민족운동 등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 배영排英운동인 제1차<사타그라하>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등 아시아·중동지역의 민족운동을 촉진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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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이해 12월 2일부터 10일간 광무황제 재위 40년 기념행사와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기념비전이 건립되고, 스웨어러 선교사는 목천지역에서 교회의 사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고했다.
12월 7일 유관순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둘째 아들 유인석(柳仁錫)이 태어났다.
2월 9일 러시아와 일본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불안한 사람들이 안전을 구하기 위해 기독교로 많이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관순은 이 전후 시기부터 약 5~6세까지 탑원리에서 살았다는 증언이 있다.
11월 17일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해 감리교 지령리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용두리의 조병옥이 영명소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2월 목천군 청년회에서는 민영환과 조병세 두 충정공에 대한 분향소를 설치하고, 이분들과 같이 순국한 분들을 위하여 군내 복귀정에 사당을 만들었다.
7월 19일 광무황제는 일본의 압력에 의해 칙령을 발표하고 퇴위하였다. 4월부터 12월까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8월 ‘충남 목천 이동면 대지령 야소교당’의 이름으로 82명의 교인과 동리사람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 조인원, 유중무와 유우석의 이름으로 유중권 등 3.1운동의 주역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9월 3일 아침 조치원 북쪽의 소정리 정거장이 의병부대의 공격을 받아 불탔다. 하반기부터 의병운동이 병천 주변에서 격화되었다. 가을(10월 말경) 목천 교회가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군의 총살형을 받고도 구사일생으로 한 사람이 살아나왔다.
9월 27일 목천군 기호흥학회가 출발했다. 목천군에서는 이 시기에 보명학교, 수신학교, 녹동학교, 진명학교, 장명학교, 명진학교, 병진학교와 그 후신 홍호학교 등 여러 학교가 설립되고 매우 활발하게 교육운동이 진행되었다. 지령리 유관순의 동리에서는 지령리예수교회에서 ‘진명(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6월 12일 충북 진천의 다섯 개 학교와 병천학교가 연합운동회를 열었다.
이복언니 이계출이 시집가다.
사촌 유경석이 공주 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하고, 조병옥이 평양 숭실학교 입학했다. 8월 29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다.
막내 남동생 유관석(柳冠錫)이 1911년 1월 10일 태어났다.
오빠 유우석이 진주 유(柳)씨와 결혼했다. 사촌 유경석이 공주 영명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조병옥은 배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5월 27일 유우석의 어린 신부 유씨가 전염병에 걸린 친정부모를 간호하다 전염되어 사망하였다.
6월 6일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어 목천군, 직산군이 천안군에 통합되고, 면리에 큰 변화가 있었다. 조병옥이 미국 유학을 떠나다. 그는 『신한민보』3.14일자에 「독립의 희망봉」이란 글을 기고했다.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4월 1일 유관순이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서울 정동교회에 손정도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인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오빠 유우석이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하였다. 4월 3일 사촌 유경석(유중무의 장남)이 영명학교 출신의 노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유경석과 노마리아 사이에 조카 유제경이 출생하다. 유관순은 조카를 위해 뜨개질로 모자를 만들어 선물했다.
유관순이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4월 1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하였다
6월 감리교 연회에서 정동교회에 이필주 목사를 파송하였다. 8월에 미가 폭등으로 8월 28일 종로소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경성구제회미염매소의 판매소에서 민중소요가 일어났다. 10월부터 스페인독감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은 전체인구의 3명 중 한명꼴인 742만 2,113명의 환자가 발생해 그 중 13만 9,128명이 사망했다. 11월 11일 4년간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3월 1일 3.1운동이 발발하였다.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3월 3일 광무황제 국장례가 거행되었다. 이날은 시위가 자제되었다.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3월 10일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3월 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왔다. 유예도는 이 때 학교 선배그룹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금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3월 14~3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각 부락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3월 31일 유관순,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4월 1일 아우내 만세시위 발발하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속장 조인원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다 부상당해 붙잡혔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6월 유관순과 아우내 만세 주역들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에 따라 유관순과 이들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6월 30일 유관순은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8월 29일 유우석은 공주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9월 11일 유관순을 제외한 병천과 수신.성남지역 시위 주도자들의 상고가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1월 22일 광무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 400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였다.(2.8독립선언) 3월 14일 오후 4시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목천 기미독립운동기념 사업회에서는 171명이라 함)이 교정에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11월 6~11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천안지역 3.1운동 피해보고와 함께 수감 교역자에게는 20원, 기타 수감자에게는 5원의 구제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결혼기념 특사령으로 형기가 절반인 1년 6개월로 단축되었다.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정부에서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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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1920년 9월 10∼12일에 만주 지방에 있던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의 우리 독립군 2, 500명이 화룡현 청산리 계곡에서 5만의 일본군을 맞아 크게 쳐부순 싸움. 청산리 대첩이라고도 한다. 1920년 8월 하순에 왕청현 서대파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가, 일본군이 우리 독립군에 대해서 협공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얻었다. 마침 독립군 때문에 대일 관계에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근거지를 옮겨 장백산으로 입산하여 낭림 산맥을 타고 게릴라전을 펼칠 계획이던 북로 군정서군은 1, 500명으로 편성된 전투 대대인 제2제대와 비전투 요원 1, 000명으로 구성된 제1제대로 하여금 180량의 치중차(輜重車)를 이끌고 대이동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북로 군정서군은 장장 80리의 골짜기에 100m 내외의 밀림으로 자연성을 이룬 청산리의 백운평 골짜기로 제대를 진출시켜 우진·좌진·중우진·중좌진의 기습 포진을 펴고 적을 기다렸다. 9월 10일 아침, 적의 척후가 나타나 식은 말똥을 만져 보고 아군이 이 백운평을 지나간 지 오래된 것으로 오인하고, 기마대·보병·공병의 1만 혼성 여단이 골짜기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아군은 적이 함정 속으로 다 들어올 때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이범석이 쏜 총이 전위 사령을 거꾸러뜨림과 동시에 공격을 하여 3차로 적의 부대가 몰려들 때까지 적 2, 200명을 사살하고, 아군은 겨우 20명의 사상자를 낸 것에 불과한 대전과를 거두었다. 타격을 받은 적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장기전 태세에 들어가자, 아군은 주력 부대가 그대로 백운평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밤 사이 120리를 강행군하여 갑산촌에 도착함으로써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이어 아군은 시마다가 지휘하는 120기병 중대가 한국인 촌락인 천수평에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집단 병력을 투입해서 도망자 4명을 제외한 중대장 이하 전원을 사살하고, 19사단의 2만 병력이 어랑촌에 있음을 알고 기선을 제압하여 어랑촌 전방의 마록구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로부터 만 이틀 밤낮에 걸친 혈전을 통하여 2, 000명의 아군 병력은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이용해 2만의 적병 중 1, 000여 명을 전사케 하고, 아군 전사자는 90명만 내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5만 병력을 2, 500명으로 맞아 3, 300명을 죽인 청산리 3차의 싸움은 한국 무장 독립 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싸움에서 치욕적인 참패를 당한 왜적은 그 보복으로 만주 전역의 우리 동포에게 무자비한 만행을 자행하기 시작하여, 간도 동포 참살 사건 등을 빚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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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1920년 6월4일 독립군 홍범도.최진동부대의 1개소대가 북간도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아군은 장교1명, 병졸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내었을 따름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대안의 활발한 독립군 활동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해왔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에 매복시키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다. 일본군은 잠복해 있는 독립군부대 앞까지 추격해왔으며, 이 때가 6월 6일 오전 10시였다.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살하였는데, 독립군은 2명이 전사하고 재류동포 9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홍범도·최진동 등 독립군 수뇌부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요지를 점령하는 것이 득책이라 판단하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안산촌락 후방고지에서 수세를 취하였다. 6월 7일 새벽 야스카와부대가 전방 300m의 텅빈 안산촌락으로 돌입할 때에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야스카와부대는 니히미중대와 합세하여 응전하였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불의의 기습을 받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부대는 야마자키중대를 주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야스카와부대가 고려령 서방에 도착하였을 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치열한 사격을 받은 일본군은 소수의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안산과 고려령 두 전투에서 120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도 거듭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봉오동으로 유인되었다. 봉오동전투는 삼둔자 부근 전투에 이어 전개되었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령의 험준한 사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장 수 십리를 뻗은 계곡지대이다. 봉오동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는데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서 최진동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민가는 상촌(북촌)·중촌(남촌)·하촌 등 3개 부락에 흩어져 있었으며,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었다. 독립군은 6월 7일 아침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부대를 새로 재편성하였다.
1·2·3·4 중대의 각 책임자로 이천오.강상모 강시범 조권식을 정하였으며 별개로 2개 중대를 두었다. 안무는 사령부부관으로, 이원은 연대부장교로,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하였으나 이는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로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홍범도장군이었다. 작전진행은 다음과 같다. 제1중대는 상촌서북단에, 제2중대는 동쪽고지에, 제3중대는 북쪽고지에, 제4중대는 서산남단 밀림 속에 매복하고, 연대장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남산 중턱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도하여, 일본군 주력부대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 중에 들어설 즈음에 일제히 사격을 단행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상촌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다. 홍범도장군의 명령에 따라 동·서·북 3면에서 일본군을 협공하니 일본군은 갈팡질팡하면서 쓰러졌다. 오후 3시 소좌 야스카와는 가미야중대와 나카니시소대를 지휘하여 동쪽고지에 매복한 강상모중대를 향하여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강상모중대는 이를 격퇴하여 100여명을 사살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온성 유원진으로 패주하였다.
봉오동 전투의 전과와 의의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지리적 요지를 선용한 뛰어난 작전계획이었습니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로 독립군의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의 하나입니다. 또 우리민족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승리 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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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현재 소련 원동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그의 홍범도일지에 의하면 1868년 8월 27로 명기되어있으며 그의 출생지 또한 일지에 의하면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홍범도장군의 본관이 남양 홍씨로 남양 지금의 경기도수원과 화성일 때의 옛 지명이었고, 여천(汝千)이라는 호는 뒷날 의병장이 되어서야 가지게 되었다.
홍범도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홉살 때 아버지마저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다. 그후. 15세까지 머슴을 살았으며1883년 나이 두살을 올려 평양 1883년부터 1887년까지 보병 부대에서 나팔수로 복무하였으나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한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영하였으며 이때의 군영생활은 이후 그가 무장 항일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데 있어서 전술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1887년부터 1890년까지 황해도 수안 지방 부근의 총평 동네 종이공장에서 일을 하였고 이곳에서도 임금문제로 사주와 싸운 다음 금강산에 있는 신계사로 들어가 1890년부터 1892년에 신계사(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창대리)에서 지담대사 상좌로 수행하면서 간단한 한자나 한글을 깨우쳤으며 이때 지담 대사( 이순신장군의 후손)를 통해 항일의식을 전수 받았을 것으로 추정 된다. 홍범도장군은 얼마 동안 전전한 끝에 함남 단천으로 가서 금을 캐는 광산의 노동자로 2년간 일하고 그곳에서 삼수 출신의 부인과 결혼을 하였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93년경에 다시 삼수로 이거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출중한 사격술이 인정되어 산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직업적인 산포수 생활을 하였고 얼마 뒤 다시 북청으로 이거, 그곳의 산포수조직인 안산사포계(安山社砲契)에 가입,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포연대장(捕捐 大將)에 뽑혔다.
이는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정하고 이를 납부하는 일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그는 1907년 의병항전을 개시할 때까지 14년 동안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에서 산포수 생활을 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홍범도장군이 의병 활동을 시작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07년 9월 3일 일제가 공포한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의 졸속한 시행에 있었다. '총포 및 화약류를 판매하는 자는 관찰사의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는 법령은 군대해산에 뒤이어 모든 한 국민을 완전히 무장 해제시켜 무력저항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홍범도장군은 안산사포계의 동료들과 함께 일제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즉각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장군의 인솔하에 약 70여명의 산포수들은 머리에 혁관(革冠)을 쓰고 1907년 11월 15일 북청군 안평사(安坪社) 엄방동(嚴方洞)에서 회집하여 항일 의병전에 나설 것을 천명하였다.
그 이튿날 거사의 성공을 비는 혈제(血祭)를 지내고, 일진회 회원으로 친일파인 안산(安山)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총살하고, 계속해서 인근의 부일배들을 소탕하였고 이로써 홍범도장군은 항일독립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후 일생 동안 항일무력전선에 온갖 정력을 쏟았던 것이다. 70여명의 산포수를 근간으로 봉기한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점차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화전민, 토막민(土幕民) 등의 의병지원자를 받아들여 이듬해에는 1천여 명에 달하는 대 부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거의 초기에 7지대로 나뉘어 십장제(什長制)로 편제되어 있던 의병부대를 이때에 와서는 구한국군의 편제를 모방해서 개편하였다.
1907년 11월 22일 홍범도장군의 의병들은 북청 후치령(厚峙嶺)에서 매복하였다가, 기만적인 방법으로 무기를 회수해 가던 일군 무기수송대을 섬멸시켜 버렸다. 이를 이어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역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갑산으로부터 북청으로 향하던 우편마차 호위 일군을 공격, 전멸시켰으며 그 다음 날에도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후치령에 잠복, 북청에서 혜산진으로 향하던 일군들을 전멸시키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들의 잇다른 승리에 놀란 일군 북청수비대는 궁부(宮部) 대위의 지휘하에 2개 소대 52명을 후치령으로 급파, 홍범도장군의 의병을 공격케 하였다.그러나 홍범도장군의 의병은 이를 알고 11월 25일 후치령에서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역시 유리한 지형에서 유격전으로 이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후치령 전투를 ***로 홍범도 의병부대는 삼수, 갑산, 북청 등지에서 험산준령을 타며 유격전을 펼쳐 이들을 추격해 오는 일군토벌대를 맞아 연전연승을 거두어 점차 그 명성을 더해 갔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1908년 3월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등 의병수뇌부가 일제의 회유공작에 말려 수난을 겪게 되었고홍범도장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도선, 태양욱 양인은 '귀순'을 원하던 2백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1908년 3월 17일 일군에게 '귀순'해 버렸으나 일군들은 무장해제 유예기간 1개월의 약조를 지키기는커녕 '귀순'의병들을 즉각 무장해제시켜 버렸고 이에 저항하던 태양욱은 총살되었고, 차도선 등은 홍범도를 유인할 목적에서 피체, 투옥되었습니다.
이들의 '귀순'은 의병부대의 전력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와 항일전 수행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 무렵 일제는 홍범도장군을 위협, 유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 용범(龍範) 등 가족을 구류시켜 인질로 삼는 비열하고도 잔인한 짓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은 구국대의를 위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의병부대의 전열을 가다듬기에 바빴고 결국 그의 가족(부인과 큰아들)은 끝내 일군에게 희생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그후 불굴의 투지로 의병부대의 재편성에 착수한 홍범도장군은 1908년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삼수, 갑산, 무산, 북청 일대를 몸소 돌아다니면서 아직 의병부대에 가입하지 않은 산포수들과 청년들을 권유하여 의병에 가담시켰다. 그 결과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재편되어 1908년 4월 말에는 5백여명, 다시 5월 중순에는 650여 명에 달해 새로운 항일전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홍범도장군은 1908년 4월부터 의병항전을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같은해 12월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삼수, 갑산, 장진(長津), 북청 등지를 오가며 각처에서 일군과 조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일진회 회원 등을 비롯한 부일주구들을 처단, 민족반역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홍범도장군은 한반도 북부지방의 의병항일전을 주도하는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 일대의 주민들로부터는 열렬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때 당시 함경도 북부지방에서 그의 의병부대의 항일전을 찬미하며 불리던 노래가 “날으는 홍범도가“이다.
이처럼 홍범도장군이 도처에서 일군들을 격파하며 의기(意氣)를 드높히자, 일제는 크게 당황해 일군 동부 및 북부수비관구 전 병력을 동원하여 6, 7월 2개월을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 '대토벌' 기간으로 정해 놓고 홍범도 의병 '토벌'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홍범도장군은 신속한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벌여 이들의 예봉을 피해가며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홍범도 의병부대는 전력이 점차 소모 되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가 1907년 11월 15일 봉기 이후 탄약 고갈로 고통을 받던 1908년 9월까지 일군과 약 37회의 대소 회전을 치뤘다고 한다.
홍범도장군이 연해주로 건너간 것은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는 일방, 연해주 일대의 의병부대 및 남한의 의병부대와도 연락을 취해 대규모 의병항전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그는 그러한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安重根), 엄인섭(嚴仁燮) 등이 인솔하는 의병이 국내진입작전에서 일군에 패한 뒤 연해주의 의병항전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의 의병규합노력은 여건상 불리한 형편이었고 결국홍범도장군은 1910년 3월 마침내 일단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간도의 장백현(長白縣) 왕개둔(汪開屯)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1913년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고이로써 홍범도장군의 의병항전은 종료되었다
첫댓글 어찌 다 읽을꼬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