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는 한옥마을로, 현재에는 총 947가구, 2,202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총 947동의 건물 중 한옥이 735개이다. 원래는 산지에 자리햔 촌이었으나 신라 문무왕(665년)때 완산주가 설치되면서 평지로 주거지가 이동했다.고려시대에 진주읍성을 중심으로 한벽당, 오목대, 간납대 등 건물이 지어졌고, 그 주위에 마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지금의 한옥마을이 되었다. 전주한옥마을에는 경기전과 전동성당, 전주풍패지관, 풍남문 등이 있다.
ㅡ경기전ㅡ
보물 제 1578호인 경기전 정전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초상화(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 지어진 건물이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의 어진 봉양처를 처음에는 '어용전'이라고 불렀다가 태종 12년(1412년)에 '태조 진전"이라 하였고, 세종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불렀다. 경기전 전체는 사적 제 3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조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경기전은 소실되었으나 영정은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 보존할 수 있었다.현재의 건물은 광해군 6년(1614년)에 전라도관찰사 이경전이 다시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중건한 것이다. 경기전은 하마비( 신성한 공간으로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함을 알리는 비석), 홍살문, 외신문, 내신문,정전( 어진을 모신 곳), 부속건물(수복청ㆍ수문장청ㆍ마청ㆍ동재ㆍ서재ㆍ어정ㆍ제사고ㆍ용실ㆍ전사청ㆍ조과청)구성되어 있다.또한
경기전 내에는 세종 21년(1439년)에 건립된 사고와 태조의 22대조이며 전주 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 이한 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그리고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 어진들을 모신 어진박물관도 있다.
■ 관람시간
♧ 3월~5월, 9월~10월 : 09:00~19:00
♧6월~8월 : 09:00~20:00
♧11월~2월 : 09:00~18:00
♧무료관람 : 매월 마지막 수요일
♧관람종료 시간 1시간 전 입장
■관람요금
♧일반권
ㅡ어른:개인 3,000 / 단체 2,500원
ㅡ청소년ㆍ군인: 개인 2,000원/ 단체 1,500원
ㅡ어린이: 개인 1,000원/ 단체 500원
♧전주시민 할인권
ㅡ어른 : 개인 1,000원/ 단체 800원
ㅡ청소년ㆍ군인: 개인 800원/ 단체 600원
ㅡ어린이 : 개인 500원/ 단체 300원
♧어진박물관의 관람료는 별도로 없음
♧ 문의 :063 - 231 - 0090/ 0190(어진박물관)
ㅡ전주풍패지관ㅡ
전주풍패지관이란 전주에 온 관리나 사신이 머물던 전주 객사다. 조선시대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축하의식을 행했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주관과 숙소로 사용하던 익헌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관의 처마 아래에는 '풍패지관'이라고 쓴 거대한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는 전주객사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풍패란 건국자의 고향을 이르는 말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를 풍패지향이라 하였는데, 이를 본따 전주객사의 이름도 풍패지관이라고 한 것이다.
전주풍패지관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4년(1473년)에 전주사고를 짓고 남은 목재로 서익헌을 고쳐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이후 1597년에 발발한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었고, 고종 9년(1872년)에 보수공사를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도로확장공사로 동익헌을 철거하여 주관과 서익헌만 남아있었으나, 1999년에 동익헌을 복원했다. 현재 주관과 동ㆍ서익헌, 객사를 관리하는 수직사가 남아있다.
(참고)
익헌: 본 건물의 좌우 양쪽에 딸려 있는 건물.
풍패: 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곳의 지명.
ㅡ전주풍남문ㅡ
전주풍남문은 조선시대에 전라 감영이 있었던 전주를 둘러싼 전주성의 남쪽문이다. 원래 전주성에는 동서남북 네곳에 문이 있었지만, 헌재는 풍남문만 남아있다. 전주성의 축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말에는 이미 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죠 30년(1597년)에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절반이 넘게 허물어있던 전주성을 영조 10년(1731년)에 크게 고쳐 쌓았고, 이 때 남문을 명견루라고 했다. 이후 영조 43년(1767년)에 불타자 관찰사 홍낙헌이 다시 짓고 풍남문이라 했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중굽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태어난 풍패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왕조의 발전지인 전주를 풍패에 비유하여 풍패향이라 불렀으며,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라는 뜻으로 풍남문이라고 했다.
문루 2층의 남쪽면에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고향임을 의미하는 '풍남문', 북쪽면에는 전라도 행정 중심도시의 의미인 '호남제일성' 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성문 밖에는 외부의 침입을 막으려고 만든 반원형 옹성이 있다.
ㅡ전동성당ㅡ
프와넬 신부가 설계한 전동성당은 천주교 성당으로 1908년에 완공되었다. 전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최초 순교자인 윤지충(1759-1791)의 순교지 위에 건설되었으며, 명동성당(서울), 계산성당(대구)과 함께 3대 성당으로 불린다. 성당의 아름다운 곡선미로 영화 <전우치>, <약속>에 등장한 곳으로 유명하다.
ㅡ경기전하마비ㅡ
하마비는 누구든지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적혀 있는 비석으로, 조선시대에 궁궐ㆍ종묘ㆍ문묘ㆍ향교 등의 문앞에 세웠다. 경기전하마비는 광해군 6년(1614년)에 경기전을 고쳐 지을 때 처음 세웠고, 철종 7년(1856년)에 고쳐서 다시 세웠다. 비석의 앞면에는 '지차개하마잡인무득입'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라고 적혀 있다.
하마비는 일반적으로 사각의 받침돌과 비석 몸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경기전하마비는 사자(혹은 해치)암수 두 마리가 직사각형 받침돌에 세운 비석 몸체를 등으로 떠받치고 있는 보기드문 형태이며, 말에서 내리도록 안내하는 기능뿐 아니라 경기전을 수호하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ㅡ참고ㅡ
■경기전에 대한 내용은 인터넷 다음 백과 '전주 경기전' 참조.
■전주풍패지관ㆍ전주풍남문ㆍ경기전하마비에 대한 내용은 안내판 참조.
■전주한옥마을ㆍ전동성당에 대한 내용은 인터넷 다음 '전주한옥마을','전동성당'참조.
첫댓글 여긴 전부터
한번 가보려구 벼르기만 하고
못간곳 인데
영춘이가 보게 해주네~땡큐~~^^
네
저도 처음 갔어요
그동안 한옥마을이 있다는 사실만 알았지요 ㅎ
오늘도 무덥네요
즐거운 오후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