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을 끝낸 차태현과의 인터뷰중이었다. 시종일관 가볍고, 명랑활달하게 모든 대답을 이어가던 그의 얼굴에서 잠시 낯설게도 진지한 표정이 스쳤다. "사실요, 제가 다른 배우를 보면서 긴장하는 법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공동경비구역 JSA>의 하균이 형을 보는데, 순간 떨리는 거예요. 아, 큰일났구나, 저렇게 돼야 되는데, 어휴~ 갑자기 걱정이 확 밀려오더라고요." 신하균은 그랬다. 한국영화의 허리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의 바통을 이어받을 다음 주자들 사이에서, 한때 신하균이란 배우는 위협적일 만큼 강렬한 존재였다. 데뷔 초기 '장진 사단'의 일원으로 "멀쩡하게 생긴 애가 이상한 역할만 골라서 할 때"부터 신하균은, 물론 대중적으로야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충무로 제작자들과 배우들 사이에서 "언젠가 사고 한 번 크게 칠 놈"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병으로 죽어가는 누나를 살리기 위해 '착한 유괴'를 하고, 지지리 운도 없게 그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복수는 나의 것>의 류. 그는 태초부터 악마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 서서히 파괴되어가는 인간이었다. 원래 박찬욱 감독은 "류를 소화해낼 배우가 국내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이든 홍콩이든 그 느낌이 나는 배우를 찾을 셈으로 시나리오에 '류'를 청각장애자로 설정했다. 하지만 <…JSA>를 끝낸 후엔 생각이 달라졌다. "소년병을 하기엔 너무 늙어서"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신하균이 <…JSA>를 통해 어떻게 자신을 설득해나가는지를 지켜보았던 그는 "이 친구라면 충분히 류를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그 판단은 옳았다. 신이 쥐어준 송곳으로 원수의 목을 처참하게 뚫어버리고, 복수의 칼날로 도려낸 피 묻은 신장을 어그적어그적 씹어 삼키는 이 남자. 그의 소름 끼치도록 건조한 표정 속엔 순하디 순한 소년의 미소는 이미 살해된 후였다. "제가 표현은 잘 못해도 이해는 잘하는 편이거든요. 감독님과의 대화 속에 충분히 <복수는 나의 것>이 어떤 영화인지 받아들이게 됐어요. 류가 언제 어디서부터 변화되었는지 정확한 방점을 찍을 필요도 없고, 그 시점을 나도, 관객도 모르게, 굳이 알려 하지도, 굳이 계산하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언제 어떻게 변하는지도 모르는, 게다가 말도 못하는 남자라니, 대사가 없는 빈 여백을 어떻게 채워나갈까, 혼자 짊어진 이 많은 씬들은 어떻게 연기해낼까, 외로움도 절반, 즐거움도 절반이었던 촬영이었다. "대사가 없으니까 편할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오히려 기가 많이 뺏겨요. 한순간도 뱉어내지 못하고 머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진이 빠지는 연기였죠. 다이어트를 안 해도 살이 쭉쭉 내렸구요……" 게다가 쾌감이 거세된 복수라니, 그것은 후련하다기보다 처연했다. 자살한 누나를 안고 "어어억…… 꺼어억" 울부짖던 류가 결국 장기밀매업자를 찾아내 누나의 복수를 대신하는 대목에서, 옆구리가 열리고 창자가 쏟아지는 잔혹함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보다 그 모든 행위들이 왠지 서글퍼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렇게 대사 한마디 없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분노를 전달했던 <복수는 나의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거친 1년 반 후, 신하균에 대한 무형의 기대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배우들의 진짜 성격은 자신들이 가장 제대로 표현해내는 캐릭터와 아주 반대인 경우가 많다. 가령 지고지순한 순정남 연기에는 따라갈 자가 없는 배우가 사실은 마음을 한 곳에 두지 못하는 바람둥이라거나, 웃기고 까부는 역할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배우가 일상생활에서는 너무 진지한 말만 늘어놓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식이다. 배우 윤여정이 말한 대로 "세상 다 아는 양아치가 공주 역할을 잘하는 건 걔가 양아치지만 늘 마음속으로는 공주를 그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하균도 그런 배우들 중의 하나다. 이 사람은 참 순하다. 만약 그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은 사람이 신하균과 만난다면, 아니 저렇게 순하기만 해서 무슨 배우를 하겠어, 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정도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눈을 반달로 만드는 선한 웃음을 먼저 던지고, 언제든지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남자. 게다가 과묵하면서도 사려 깊기까지 하다. 그러나 신하균이 '전매특허'를 낸 캐릭터들은 대부분 그런 그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멀다.
<간첩 리철진>에서 맨날 싸움질만 하고 돌아다니던 겉늙은 불량 고등학생이 바로 신하균이었다. <반칙왕>에서 임대호(송강호)와 실랑이를 벌이던 싸가지 없는 거리의 아이가 신하균이었다. <내 나이키>에서 코 묻은 돈을 삥 뜯던 동네건달, <사방의 적>에서 오로지 '키스'에만 환장한 양아치가 신하균이었다. <복수는 나의 것>의 지독히 어둡던 류, <지구를 지켜라!>의 왕또라이 병구도 신하균이었다. 그가 정상에서 멀어질수록, 본인이 가진 선한 미소나 예의범절, 과묵이나 사려 깊음에서 멀어지면 질수록 관객들은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멀쩡하고 착해지면, 인간 신하균과 비슷한 연기를 하기 시작하면 흥미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고급 외제차를 타고 젠틀한 태도를 잃지 않았던 멜로영화 <서프라이즈>에서는 너무 '노멀'해 보였고, <킬러들의 수다>의 정우는 킬러라고 하기엔 조금 싱거웠다. <화성으로 간 사나이>의 착하디 착한 승재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화성으로 간 사나이>를 끝낸 신하균은 <공동경비구역 JSA>을 끝낸 신하균과 분명 달랐다. '어디서 저런 배우가 숨어 있었어?' 하는 찬탄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던 <…JSA>를 지나, <복수는 나의 것><지구를 지켜라!>에서의 기괴한 역할을 척척 소화해내면서 배우 신하균에게 바라는 관객의 기대치도, 스스로의 달성 목표도 조금씩 조금씩 상향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추억들을 되새김하는 것이 좋았던 탓에 출연을 결정"했던 <화성으로 간 사나이>는 의외의 선택이었다. 물론 차승원, 이요원과 함께 출연했던 <아이 러브 유> 뮤직비디오에서처럼 아이같이 순수한 신하균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이 화성으로 간 사나이의 순정 역시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류'나 '병구'보다 더 독하고 더 가열한 캐릭터를 기대했던 관객들이라면, 이 '무공해 청정 멜로'는 이 맛도 저 맛도 없는, 그간 너무 '센' 역할만을 해온 배우의 '농도 조절'을 위한 영화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멜로에 초점을 맞추었다기보다는 그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그런 걸 그리고 싶었거든요. 만약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제가 부족한 탓이었겠죠……" <화성으로 간 사나이>의 개봉에 맞춰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고 힘든 인터뷰를 끝낸 그는 "예비군 훈련 받으러 가야 한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그는 정말 동네 어귀에서 어슬렁거려도 좋을 '예비군 아저씨'같았다. <지구를 지켜라!>로 인사를 나눈 것이 한두 달밖에 안 지났는데도 신하균은 그사이 외관상으로 살도 좀 붙었고 머리도 덥수룩이 자라 있었다. 워낙 자신의 상태를 말로 드러내는 성격이 아닌 탓에 "허허" 하는 웃음 속에 속내를 숨기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엔 '나 요즘 고민하고 있음'이란 사인이 역력했다. "살이 찐 게 아니라 부은 거예요……(웃음)"라며 부정하는 얼굴 선의 변화나 요사이 부쩍 늘었다는 술, 담배 소비량도 그의 상태를 짐작케 하는 단서였다. 솔직히 신하균은 작품이나 감독을 좀 '타는 편'이다. 학교 선배이자 <매직 타임><박수칠 때 떠나라>등의 연극을 비롯, 데뷔작부터 영화를 늘 함께해온 장진 감독. 그와 함께라면 신하균은 마치 오랫동안 활동해온 만담 커플처럼 기분 좋은 궁합을 만들어낸다. 거침없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는 연민 어린 독특한 질감을 뽑아낸다. 장준환 감독의 집요한 세계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가서는 생전 들어본 적 없는 흥미로운 소리를 창조해낸다. 하지만 <서프라이즈>에 이어 <화성으로 간 사나이>를 본 장진 감독은, 배우가 감독에 따라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면 어떡하냐고, 그렇게 기본이 흔들리면 어떡하냐고 꽤 심하게 야단을 쳤다.
"사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야단을 친 거였지 크게 걱정하진 않아요. 스물한 살에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하균이는 트레이닝을 멈추지 않는 배우였거든요. 사실 배우들이 점점 타성에 젖어서 관습적이고 고착화된 패턴의 연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래 지켜본 사람으로서 하균이는 자기 창조를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배우예요. 신하균이란 인간의 평화주의적 인성이 변하지 않는 한, 그의 성실한 배우관이 변하지 않는 한, 굴곡은 있을지언정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일 거예요. 물론 또다시 실패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다음에 뭐가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단 말이죠.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구요. 하균이는 정말 '미궁 같은 배우'예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남들이 절대로 못 풀 것 같은 어려운 문제는 척척 아무렇지도 않게 풀면서, 정작 간단한 덧셈, 뺄셈에 쩔쩔매는 사람들. 신하균 역시 어떤 영화에서는 100점 만점에 480점짜리 연기를 하고, 어떤 영화에서는 42점짜리 연기를 한다. 하지만 연기란 것이 어디 과목간 상향 평준화를 이루어야만 인정받는 내신이던가. 어디 배우란 직업이 평균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되는 수능시험이던가. 신하균의 연기는 최고점과 최하점을 바쁘게 오간다.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흥미진진한 그래프다. 그러니 불안해할 필요도, 섣부른 판단을 내릴 필요도 없다. 위치에너지가 촤하일 때, 운동에너지는 최고에 이른다. 이 추에서 내려오지 않는 한, 지금 신하균은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으로 뛰어오를 순간이다. 그것이 자연의 물리학이요, 이 배우가 성장해나가는 역학인 것이다.
-하균닷컴에서 피나콜라다님이 올리신것을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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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하셔요~ㅠㅠ
멋지십니다 ^^ 예비군아저씨 ㅋㅋㅋ;ㅁ;
아 멋져용 ㅜㅜ 감동의 물결 ~~!!!!<큭.........
히히히 오빠멋져!! <<응?
아이고!!!! ;ㅁ; ♥ <-
너무 멋짐 ,,,,,,
정말 마음에 쏙 드는 글이네요! 멋집니다 ~
찐게 아니라 부은거라니....귀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