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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직박스 스크랩 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부끄러워 만든 노래
보나 벤뚜라 추천 0 조회 51 15.08.24 07: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끄러워 만든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 부끄러워 만든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2004년 '5.18민주화운동' 24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광주 국립5.18묘지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군악대와 합창단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노무현 대통령을 바라보는 보수 우익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참석한 일부

관료들은 못마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 자체가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금지곡을 떠나 노래를 불렀다는 자체만으로 체포될 수 있었던 곡이었기 때문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처음 만들어진 1982년 이후 대학가와 노동,농민 운동, 6.10항쟁 등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불리던 노래였습니다. 어쩌면 이 노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대변하는 곡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하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행사장에서 공식 추모곡으로 불린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끝나고 들어선 이명박 정권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본 행사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으며, 2010년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식에서는 방아타령을 연주하기로 했다가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체할 공식 추모곡 제작에 나선다고 합니다.

이는 앞으로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퇴출하겠다는 의도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을 안다면 절대 그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담긴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과연 이 노래가 퇴출당해야 마땅한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끄러워 만든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소설가 황석영이 개사했고, 소니비엠지뮤직의 김종률씨가 작곡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은 한 마디로 [부끄럽고 죄송해서]였습니다.

 

▲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들이 망월동 묘역에 안치되는 장면, 박기순(좌)윤상원(우)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동묘지에서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결혼식을 하듯 축의금까지 받는 영혼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신랑은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작전으로 도청에서 사망한 윤상원

이고, 신부는 학생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취업하며 노동운동가로 활약하며 1978년 광천동 들불야학을 주도했던

박기순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던 1982년 광주는 수백 명의 5월 항쟁 관련자들이 여전히 감옥에 수감되고

입 밖으로 항쟁을 얘기도 할 수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1982년 3월 운암동 황석영씨 집에 황석영,김종률,전용호씨가 모였습니다.

이들은 5월 항쟁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영혼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마음을 두 사람의

영혼을 기리는 창작노래극으로나마 달래자는 황석영씨의 제안에 따라 전체 구상과 노랫말은 황석영씨가 작곡

은 대학가요제 수상 경력을 가진 김종률씨가, 전영호씨는 노래부를 사람을 물색하고 연락하는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황석영씨는 당시 출판됐던 백기완씨의 시집에서 시를 골라 노랫말을 만들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창작 노래극 넋풀이]

임을 위한 행진곡 (대사 - 윤상원· 박기순 함께)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합쳐지듯이
남녘땅 북녘땅이 합쳐지소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백기완 님 

[묏 비나리] 詩 : 백기완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중략)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노래 소리 한번 드높지만
다시 폭풍은 몰아쳐 오라를 뿌리치면 다시 엉치를 짓모고
그걸로도 안되면 다시 손톱을 빼고 그걸로도 안되면
그곳까지 언 무를 쑤셔넣고 아.........

(중략)
 

노래극으로 만들었지만, 공연은 운암동 황석영씨 자택 2층이었고, 장비는 기타와 장구,북,꽹과리,징, 빌려온

녹음기가 전부였습니다. 소수의 사람만 황석영씨 집에 와서 담요로 거실 유치창을 모두 막고 공연 관람과

녹음을 했고, 그렇게 공연겸 녹음이 함께 이루어진 '넋풀이' 창작노래극 테이프가 완성됐습니다.

 

이후 윤상원,박기순 두 사람을 위한 넋풀이에 들어있던 [임을 위한 행진곡] 테이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몰래 전해졌고, 이들은 숨죽이며 그 노래를 불렀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애창곡이 됐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떤 투쟁을 위해 시작된 노래가 아닙니다. 가사처럼 동지는 간데없고 산 자가 그것을 추모

하며 그 뜻을 이어가겠다는 의도였기에,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가족에게는 '오월의 노래'로 이보다 적합한

것이 없어 매년 5월이 되면 그들을 기억하며 울면서 불렀습니다.

부끄럽고 그들을 기억하고자 만든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불꽃처럼 대한민국을 지켰던 사람들]

윤상원,박기순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까요..?

빨갱이,5.18광주 사태를 저지른 북한 간첩..?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면 결코 그들은 빨갱이나 간첩이 아닙니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박기순은 명문고로 불렸던 전남여고를 졸업 전남대학교 국사학과에 다니다가 1978년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이 '민주교육지표선언'을 하다가 체포되자, 이들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다 무기정학을

당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광천동 '동신강건사'에 취직하여 공장에 다니면서 들불야학을

주도했습니다.

 


▲ 윤상원, 박기순이 합장된 묘지.


1978년 12월 26일 야학 학생들과 교실의 난방용 땔감을 구하러 야산을 헤매다 밤 11시에 오빠 집으로 와서

잤던 박기순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졌습니다.

 

광주 출신 윤상원은 전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주택은행에 근무했습니다. 그는 입사한지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며 노동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때 박기순이 들불야학을 맡아달라 했고, 수차례

거절에도 박기순이 끈질긴 설득을 하자, 결국 들불야학의 교사로 참여하였습니다.

 

▲ 1980년 들불야학 졸업식

 

들불야학은 광주 광천동의 빈곤 지역에서 시작됐는데, 박기순과 윤상원은 들불야학을 통해 '사랑이 밑받침된

진정한 인간 교육의 실현'을 추구했습니다.

 

당시 교육방법은 주입식 교육이 아닌 강학과 학생의 대화를 통한 문제 제기형 교육이었습니다. 교육 과정은

중학과정에 중심을 두었으며, 이들의 수업 방법과 운영 방식은 민주주의적이면서 굉장히 선진화된 교육 방식

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야학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왜 지식인들이

야학을 주도했느냐면 3.1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부흥하고 일본에서 독립되려면 문맹을 타파하고 그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고, 이를 위해서 야학운동이 점차 늘어난 것입니다.

 

▲ 마산노동야학을 주도했던 명도석의 생가터,

마산노동야학의 자금처였던 옥기환(우)과 그의 사업체였던 원동무역주식회사(좌)


대한민국  야학의 시작은 1906년 함흥의 농촌계몽운동 일환으로 설립된 농민야학 '보성야학'과 1907년 경남

마산에서 설립된 '마산노동야학'이 있습니다. '마산노동야학'은 마산 유지였던 옥기환,구성전이 돈을 내고

명도석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한 야학입니다.

 

마산노동야학의 학생은 노동자,농민,빈민의 자제로 가장 중요한 수업이 바로 조선어였습니다.

또한, 수업료도 받지 않고 이들을 가르쳤고, 이후 마산 경남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의

배경이 됐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의 주인공이었던 윤상원,박기순이 무엇을 하려고 했던 인물입니까..?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인물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과거 올바른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재산과 능력을 아낌없이 내놓고 우리 민족을 살리고자

애썼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1978년 12월 27일 박기순이

죽자 윤상원은 일기장에 ‘영원한 노동자의 벗 기순이가 죽던 날’이라고 기록하며 슬퍼했습니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훨 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우리의 가슴 속에서 피어난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노래를 돌려달라'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공식 행사에 불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기득권 세력으로 독재 권력과 영합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일신의 영달을 꾀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독재권력을 비판하며 불렸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목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약간은 창피하기도 할 것입니다. 많은 국민이 피 흘리는 자리마다 그들은 없었고 민족을 위해 애썼던

사람들에 비해 그들은 오로지 자신만의 삶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던 김종률씨는 [저는 총을 들고 나서서 싸우는 용감한 투사가 되지 못했어요.

여느 사람들처럼 데모하고 저녁에는 무서워 숨어다니는 대학생일 뿐이었죠. 하지만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본

저로서는 아픔이 무척 컸습니다]면서 1980년 5월을 기억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야학을 주도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교사와 학생들은 안 무서웠겠습니까..? 일제에 체포 투옥되던

그들도 인간이기에 무서웠고 두려웠습니다. 전두환이 정권을 무력으로 쟁취하고 국민을 억압하던 시점,

민주주의를 외쳤던 자들도 모두 무섭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무엇이든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작은 노력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 5.18묘역에서 파안대소를 하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추모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바로 당시에 희생된 사람들과 그 유족, 그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대로 곡을 바꾸려고 합니다.

 

아직도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의 보수는 5.18민주화운동을 반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은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신들의 정권이 민주주의에 위배된다면

어느때라도 국민이 일어서 반대할 수 있다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4.19혁명'
'부마항쟁'
'5월항쟁'
'6월항쟁'

이 모든 사건은 국민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3.15부정선거'
'5.16군사 쿠데타'
'12.12사태'

이 모든 사건은 개인이 나라를 독차지하기 위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대통령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국민이 피 흘리며, 아파하며,두려워하며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들이 앞선 자를 따를 수 있는 기억만큼은 돌려줘야 합니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압니다. 부끄러운 역사를 우리가 기억할 때만이 대한민국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무고한 국민을 죽였던 역사를 숨기기 위해 노래까지 바꾸려는 모습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합니까?

비록 두렵고 힘들어도 언젠가는 새날이 오리라 믿고 살아가렵니다. 큼큼~

 

 

임을위한행진곡/서영은

 

 

 

 

 

 

아래의 동영상은 해외판 [임을 위한 행진곡] 동영상들입니다.

 

중국 농민공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태국판 / 임을 위한 행진곡(Thai Labour Museum)

 

 

대만판 / 임을 위한 행진곡(黑手那?西專輯)

 

 

아래의 사진들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비극적인 현장의 영상들입니다.

 

↑ 광주시민과 함께 부상자를 옮기는 외국인

 

 

↑ 시체를 인도하라"는 현수막을 단 버스를 탄 광주 시민들

 

 

↑ 속옷차림으로 연행되는 남자들

 

 

↑ 연행되어 길바닥에 꿇어 앉은 시위군중과 이를 지켜보는 진압군

 

 

↑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금남로 하늘의 헬기

 

 

↑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연행되는 남과 여

 

 

↑ 버스 지붕위에서 항의하는 젊은 시위군중들

 

 

↑ 긴 행렬을 이루고 군과 대치하는 광주시민들

 

 

↑ 광주의 도로를 사수하는 젊은 시민군

 

 

↑ 시민들을 모아 도시청소를 맡을 조를 짜고 있는 청년과 지원자들

 

 

↑ 길거리에 차려진 시민군들의 식사시간

 

 

↑ 헌혈을 하는 광주 시민들

 

 

↑ 시민군이 일시적으로 무기를 수거하자 묵묵히 정리하는 시민들

 

 

↑ 살아 있음에도 목을 밟히며 손목의 끈을..

 

 

↑ 가족의 시신을 찾기 위해 영안실로 모여드는 시민들

 

 

↑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아직 곳곳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 철사로 손이 묶인 채 연행되는 젊은이들

 

 

↑ 타지에 안부를 전하기위해 전보를 치기 위해 우체국으로 모여든 사람들

 

☞ 사진 출처 - (http://cafe.daum.net/picturedream/8ctN/222)

 

 

가져온 곳 : 
블로그 >산으로, 그리고 또 산으로..
|
글쓴이 : 휘뚜루| 원글보기 

 

 

 

 

 

 

1980년대 '광주 학살' 의 광기 속에서

 

 

신군부의 지역분열주의 공작

 

  1979년 12·12 쿠데타를 통해 사실상 집권한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는 완전한 권력 장악을 위해 이른바 '김대중내란 음모사건'을 조작해냈다.

 

 

이 사건의 발표는 7월 4일에 이루어졌지만, 조작의 첫 단계는 5월 17일에

시작되었다. 그날 김대중 이외에도 문익환, 김동길, 인명진, 고은, 리영희 등 수많은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이 사회혼란 및 학생 · 노조 를 배후조종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신군부는 민주 인사들을 검거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돌릴 목적으로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 체포를 끼워 넣었다.

반면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의 집엔 소총을 휴대한 수경사의 헌병등을 배치하여 김영삼을 외부와 격리시켰다. 손호철에 따르면,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두 야당지도자 중 김영삼 신민당 당수는 구속대상에서 제외됐고 김대중만이 구속됐다는 사실이다. 신군부는 정권장악의 마지막 장애물인 민중세력을 공격,세칭 '시민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민주화진영을 분열시켜 그 힘을 약화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이를 위해 재야 민중세력과 좀더 직접적인 연계를 유지해왔고 박정희 정권의 오랜 정치공작에 따라 '급진적' 이미지가 국민들 사이에 유포되어 있으며

지역기반 역시 소외된 호남인 김대중을 내란혐의의 구속대상으로 삼는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신군부는 광주 · 호남인들의 강한 반발이라는 효과를 초래할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의 역사를 내다보고 말한다면, 신군부가 저지른 가장 큰 범죄행위는 바로 이처럼 지역분열주의 공작을 펼쳤다는 점이었다. 만약 김영삼과 그 측근들도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시련을 받았다더라면, 이후 벌어질 광주 학살극이 과연 가능했을까? 단지 광주 학살에 대한 소문에 의해서라도 영남 지역이나 서울에서 대규모 동조 시위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가정일까?

 

 

'인간 사냥' 을 위한 '화려한 휴가'

 

  5월 17일 오후 광주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선 공수부대병력 1천여 명이 작전개시 준비를 마치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 명령은 '화려한 휴가' 였다. 그러나 그 '휴가' 는 차마 필설로 다 하기힘든 '인간 사냥' 을 위한 것이었다.

 

최정운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마음껏 모든 가능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첫날 부터 대검을 사용하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며 무지막지하게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박남선의 증언이다.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씹할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워카발로 할머니의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공수부대원들의 그런 만행을 숨을 죽이며 지켜본 시민들은 '이게 인간의 세상인가?' 하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통곡했다.

 

황석영의 기록이다.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단 말이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월남전에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 봤지만, 저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 저런 식으로 죽일 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놈들을 죽여 버려야 해' 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온 거리는 피의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이선(당시23세)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들은 '미움 받는 백성, 한 많은 백성 전라도 사람' 들을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개돼지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도망가는 사람의 등 뒤에서 착검한 총을 휘둘렀고 잡은 사람을 때릴 때도 얼굴이나 머리를 주로 때렸다."

  공수부대원의 그런 만행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한 증언이다.

  "공수부대원의 살육은 분명히 의도적인 듯했다.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그와 같은 살육을 자행하고 시민들이 이 광경을 보며 분노와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면 더 신이 나서 해대는 것이었다."

 

 

'지상의 지옥' 을 연출한 신군부

 

  사람을 죽인 건 순간 미쳤기 때문이라고나 할 수 있겠지만, 붙잡혀온 시민들을 대상으로

①워커발로 얼굴 문질러 버리기 ②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털이 만들기' ③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④사람이 가득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⑤두 사람을 마주 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⑥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⑦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 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⑧송곳으로 맨살 후벼 파기 ⑨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⑩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과 같은 악행들을 저질렀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5월 광주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몰려든 시신을 수습할 관이 모자라 도청

뒤에는 여기저기 시신이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이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른

자는 지금도 '전 대통령'의 예우를 받으며 잘먹고 잘살고 있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상무대에서건 그 어디에서건 붙잡혀온 사람들에 대해 신군부의 병사들이 저지른 악행은 문자 그대로 '지상의 지옥' 이었다. 공수부대 장교들이 "전라도 새끼 40만은 전부 없애버려도 끄떡없다"는 말을 내뱉었다거나, 붙잡혀온 사람들을 고문하면서 한결같이 김대중의 지령을 받았다는 자백을 하라고 강요하거나, "김대중이가 네 애비냐?" "김대중이가 밥 먹여주냐?" "김대중이가 빨갱이인 줄 몰랐냐" 따위의 말을 수없이 퍼부었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어떻게 해서든 광주항쟁을 김대중의 음모와 공작으로 만들겠다는 발악이 상부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나왔겠느냐는 것이다.

  신부 김성용은 5월 26일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광주를 탈출한 후 남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27일 새벽 2시경에 작전을 개시한 계엄군이 6시경에야 도청을 접수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피가 또 흘렀을가. () 주님,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신 주님, 광주 시민이 흘린 피의 부르짖음도 들어주소서….

80만 남도시민의 피맺힌 한과 응어리진 슬픔은 언제나 풀릴 것인가. 자꾸만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답답한 가슴을 어이할 거나? 아, 분노보다 슬픔이……."

  그러나 신군부에겐 더할 나위없는 기쁨이었다. 사상 유례 없는 이처절한 '피의 광란' 에 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던 신군부는 "주도면밀한 계획과 대담한 실시로 시민의 희생 없이 완수한 작전으로서 사상 유례 없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공수특전부대 사령관 정호용 등 살인마 66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들에겐 그야말로 '화려한 휴가' 였던 셈이다.

 

 

일부 비호남인들의 호남 모멸과 박해

 

  광주학살의 참상을 목격한 후 서울로 올라왔던 서강대생 김의기는 충격을 견디지 못해 5월 3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글을 뿌리면서 투신 자살했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공포가 우리를 짖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5월 31일 계엄사령부는 "광주 사태로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모두 170명이 사망했으며,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1백 44명등 380명이 다쳤다" 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를 그대로 믿는 광주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 그걸 일일이 세는 것조차 힘겨웠다. 훗날,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 신고가 접수되지 않은 사망자 수까지 합하면 전체 사망자 수는 2000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처음부터 사상자 수를 은폐하기 위해 사상자가 발생하는 대로 트럭에 싣고 아무도 모를곳에 파묻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적어도 800명 이상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 수많은 학살 사건들이 있었지만, 좌우(左右) 대결이 치열했거나 전시중이었던 1950년 전후가 아닌, 그 때로부터 30년이 지난 1980년에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지난 30년간 역사는 아무런 진보도 하지 못했던 걸까?

  박현채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의 정치 정세를 "보수 제세력 간의 격렬한 정치 투쟁에서 비록 확연한 우세를 견지하고는 있지 않았지만 군부에 강력히 저항하는 김대중계와 재야세력의 연합이 강력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역사적 반동에의 길은 광주에서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곳 어디에서든지 일어나게 되어 있었"지만, "박정희체제의 후계를 노리는 군부의 작은 고야잉들" 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승부처를 "끈덕진 저항의 역사를 가지면서 경제력에서 약하고  역사적투쟁에서 싸움의 좌절과 좌절 속에서 처절함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절 속에서 체념을 배운 전남에서 선택" 했다고 보았다.  이후 운동권을 제외한 일부 비호남 지역 사람들의 호남인들의 한(恨)에 대한 모진 모멸과 박해는 박현채의 주장이 타당함을 입증해 주었다. 광주 시민들은 동료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대검과 총탄에 무참히 쓰러져 갈 때에 "전두환을 갈갈이 찢어 죽이자"고 외쳤지만, 내내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좌절 속에서 처절함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절 속에서 체념을 배운" 호남인들이 아니라면 결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무력감에 빠진 호남인들은 훗날 아무 말 없이 오직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통해 그 한(恨)을 풀고자 했지만 인정머리 없고 광주 학살에 대해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는 일부 한국인들은 그들의 그런 평화적인 선택에 대해서조차 경멸을 보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일부 진보적인 사람들도 광주 학살자들이 주동이 된 정당 또는 그 정당을 이어받은 정당에 표를 줄 수 없기에 김대중의 정당에 몰표를 줄 수밖에 없었던 호남인들의 선택을 비웃는 데에 게으르지 않았다. 일부 정신나간 한국인들은 전두환 일당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내는 데에도 주저 하지 않았다. 이는 이후의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학살자들의 나팔수가 된 언론

 

  언론 기능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광주 학살이 가능했을까?

언론이 차라리 침묵만 해주었더라도! 언론은 학살자들의 나팔수였다.

그 대장 노릇은 『조선일보』가 맡았다. 『조선일보』는 5월 25일자 사설에서 항쟁세력들을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 으로 몰아붙이고는 "57년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며 마치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한 일본인 폭도들에 비유하기도 했다.

  5·18 민중항쟁 서울 ·경기동지회 사무국장인 임종일은 "조선일보는 24일부터 보도태도가 동아, 중앙과는 달랐는데 이는 신군부에게 조기진압 명분을 주려 한듯하다"고 지적했는데,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27일 새벽 계엄군 투입으로 사태가 일단락 되자 『조선일보』는 28일자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거짓말까지 동원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지금 오직 명백한 것은 광주 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안전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

          다. (…)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광주사태를 진정시킨 군의 어려웠던 사정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한 국군이 선량한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조선일보』, 80년 5월 28일자 사설)

 

 

  신군부가 단지 억압적인 언론 통제만으로 여론을 조작한 건 아니었다. 신군부는 언론을 위협하는 동시에 포섭했다. 광주에서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던 5월 22일 전두환은 서울 지역의 주요 언론사 사장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겁을 주었다.

  "그동안 언론과 대학의 내막은 물론, 누가 선동하고 있는지도 샅샅이 알고 있다. 경영권자가 권한행사를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들을 선동한 사람들을 파악해서 체포할 것이다. 그러한 사태가 없도록 사장들이 수습하고 책임을 지기 바란다." 그런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삼고 있던 신군부는 심지어 광주 학살에 대한 여론 조작을 해달라고 두툼한 촌지까지 뿌렸다. 이와 관련, 윤덕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광주에서 유혈극이 절정에 달하고 있던 5월 22일 전두환은 각 언론사 발행인을 불러 계엄 확대 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언론계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어 사태 보도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사회부장들을 요정으로 불러내 똑같은 당부를 하고 1인당 1백만 원씩 촌지를 돌렸다. 당시 중앙 일간지의 부장급 월급이 45만 원 내외였으므로 1백만 원은 촌지의 수준을 넘는 거금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일부 사회부장들은 전두환으로부터 촌지를 받은 것이 부끄럽고 괴로워 부원들과 통음을 하는 것으로 드 돈을 다 써버렸다고 하지만 상당수는 입을 씻고 너스레를 떨어 기자들로부터 눈총과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광주항쟁 기간 내내 광주에 머물면서 취재를 했던 『한국일보』기자 채의석은 단 한 줄도 진실을 신문지상에 보도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신음하면서 괴로워했다. 그가 서울에 돌아온 뒤에도 철통 같은 언론검열은 여전했다. 그는 제정신 가진 언론인은 무조건 해직될 수밖에 없다는, 자신에게 곧 들이닥칠 운명을 감지한 것인지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

 

   문공부,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제기획원, 서울시청과 육해공군에서 차출된 공무원 및 3군 장교 50여 명이 아래로 계단을 이루고 늘어 앉아 있는 검열단, 그리고 OK사인을 받기 위해 훈련소에 갓 입소한 이등병마냥 한껏 긴장된 표정으로 기사 교정쇄를 들고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기자라는 쟁이들의 모습. 기사의 어느 부분이 작살날지 모른다. 아니, 기사가 통째로 날아갈지도 모른다. 순전히 칼을 가진 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 신문을 특정 집단의 게시판쯤으로 전락시켜버리는 이 엉터리 국가의 진풍경.

   "그래, 너희들은 3등 국가의 군인들이요, 나는 저항의 몸짓 한 번 제대로 지어 보이지 못하는 3등 국가의 쟁이.  유유상종이라고 했지. 지금 우리는 끼리끼리 모여 우리 수준에 딱 어울리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뭐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입술을 씹으면서 시청 뒷문을 빠져 나왔다. 광화문 미 대사관 뒷길을 갇다가 대사관 뒷담을 따라 4~5백미터를 늘어선 장사진을 목격한다. 우리는 미국 비자를 받으려고 늘어선 저 시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민신청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신문사는 이미 '미국 이민 신청자 급증' 이라는 기사를 검열단에 넣어 보았으나 통째로 삭제당한 적이 있었다. 12 · 12 이후 서울 장안의 불안이 가중되자 중산층의 이민 희망자들이 놀라울 만큼 불어나 대사관 뒷길은 연일 새벽부터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을, 이 추악한 도시를 탈출할 수는 없을 것인가."

   나는 진정 서울을 버리고 싶었다. 아니, 살덩어리뿐인 내 자아까지 어디다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채의석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살덩어리의 축제를 즐겨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신군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5 · 18의 진상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작업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신군부에 끌려간 리영희

 

  '광주 학살'의 전모를 이해하지 못하면 80년대 내내 왜 그 수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광주의 자식'이 되기를 자청하면서 신군부의 5공정권과 신군부를 지원한 미국에 대해 저항하는 길로 나섰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리영희의 책들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그걸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리영희도 '광주 학살'의 사전 단계로 취해진 5· 17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5월 17일에 신군부에 끌려갔다. 그는 이틀 전에 비상계엄령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 134인 선언' 에 참여한 것뿐이었지만, 신군부는 조작의 명수였다.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 신군부는 요술방망이를 가진 것과 같았다. 무엇이든 소설을 마음대로 쓰면 그게 사실로 둔갑하여 언론에 그대로 보도됐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가 발표한 이른바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사건' 도 바로 그런 픽션이었다. 그러나 그 픽션은 잔인했다. 픽션을 사실로 둔갑시키기 위해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에게 인간적 모욕과 모진 고문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구속자 가족들이 나중에 작성한 「우리가 당했고, 당하고 있는 부당 불법 잔혹한 처우」라는 자료는 그 실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대중 = 한줄기 햇빛도 없는 지하실에서 하루 18시간씩 조사를 받았으며 몇차례나 옷을 발가벗기운 채 '고문하겠다'는 협박을 당했음. 문익환 = 날조된 혐의 사실을 시인하지 않자 '젊은 군인들에게 넘기겠다' 며 옆방의 참혹한 고문 소리를 들려 주었음. 이문영 = 군침대 각목으로 무수히 맞았으며 그 여파로 1심판결 때까지 왼쪽 팔을 들지 못했음. 예춘호 = 고문 때문에 음성이 변했음. 이신범 = 손톱 발톱을 구둣발로 밟았으며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고 비틀었음. 조성우 = 연행되자마자 거꾸로 매달려 물 두 양동이를 마시고 몇차례나 졸도를 했으며 매달린 채 수없이 맞았음. 설훈 = 너무 많이 맞아 다리 전체에 피멍이 들었음. 수사관이 '다리가 끊어지겠다'고 걱정을 할 정도였음. 이해동 = 피멍을 빼기 위해 날쇠고기를 썰어 엉덩이에 붙인 채 사흘이나 인사불성이 돼 엎드려 있었음. 이호철 = 심한 고문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한동안 수사관에게 '엄마' 라고 불렀음.

 

리영희는 이 때에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호철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출옥하자마자 몇 달 지나지 않아 다시 1980년 5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낸) 2개월간 남산 지하실의 감금생활은 그에게 있어서나 필자에게 있어서나, 평생에 가장 괴로웠던 추억으로 아로새겨져 있지만, 또한 동시에, 그 속에서의 피차의 은밀한 눈 마주침, 어쩌다 얻은 오징어 다리나마 결코 혼자 먹지 않고 필자 방으로 보내오곤 하던 그 형님같은 따뜻하고도 인정스러운 마음씨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귀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5월 17일 자정에 연행되어 7월 13일 까지 두 달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하고 지하실 속에 갇혀 있었고, 바로그 기간에 제5공화국의 틀과 구도가 완성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원천적으로 범죄의 산물이었으며 5공 비리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악폐들, 전두환씨 친인척의 갖가지 범죄와, 그밖에도 5공 핵심인물의 비리 · 범죄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요청인 민주화를 바라는 양심들을 묶어두고 가둬둔 상태에서만 이룩해낼 수 있었다."

  리영희는 60일간 감금되었다가 7월에 석방되었지만 대학에서 이미 해직된 상태였다. 이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지만, 리영희의 분신이라할 그의 책들은 살아 있었다. 바로 이 분신들이 오늘의 '리영희 신화'를 만든 것이다.

 

리영희의 분신은 살아있다.

 

저서

 

  • 《8억인과의 대화》. 창작과비평사. 1977년 10월 1일. ISBN 2006335000027.
  • 《분단을 넘어서》. 한길사. 1984년 10월 1일. ISBN 8935656925.
  • 《10억인의 나라》. 두레. 1985년 1월 1일. ISBN 2001792000016.
  • 《베트남전쟁》. 두레. 1985년 7월 1일. ISBN 2001792000351.
  • 《역설의 변증》. 한길사. 1987년 3월 1일. ISBN 8935656933.
  • 《역정(나의 청년시대)》. 한길사. 1988년 3월 1일. ISBN 8935656941.
  • 《반핵:핵위기의 구조와 한반도》. 창비(창작과비평사). 1988년 8월 1일. ISBN 8936410865.
  • 《서대문형무소》. 열화당. 1988년 10월 1일. ISBN 8930105238.
  • 《우상과 이성》. 한길사. 1990년 8월 1일. ISBN 8935656909.
  • 《자유인 자유인》. 한길사. 1990년 9월 1일. ISBN 893565695X.
  • 《인간만사 새옹지마》. 범우사. 1991년 7월 1일. ISBN 8908061010.
  • 《국가선진화를위한 개혁과제 20》. 길벗. 1994년 2월 6일. ISBN 8975605035.
  • 《지식인의 세계》. 동녘. 1998년 3월 20일. ISBN 8972973890.
  • 《스핑크스의 코》. 까치. 1998년 11월 5일. ISBN 8972912123.
  •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1999년 1월 20일. ISBN 8936410040.
  • 《반세기의 신화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 삼인. 1999년 1월 31일. ISBN 8987519287.
  • 《동굴 속의 독백》. 나남. 2000년 1월 31일. ISBN 893003750X.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한길사. 2001년 12월 17일. ISBN 8935656968.
  • 《대화》. 한길사. 2005년 3월 10일. ISBN 8935655546.
  • 《21세기 아침의 사색》. 한길사. 2006년 8월 30일. ISBN 893565700X.
  •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 한길사. 2006년 8월 30일. ISBN 8935656917.
  •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우리시대 희망을 찾는 7인의 발언록)》. 철수와영희. 2008년 5월 10일. ISBN 9788995833889.
  • 《희망》. 한길사. 2011년 1월 14일. ISBN 978893566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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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타파 - 목격자들 10회 "임을 위한 행진곡"

    게시일: 2015. 6. 7.

    억압이 있는 곳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 그 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 아니냐'고 따져 묻고, 노래를 만든 사람의 행적을 문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먼저 떠난 사람들을 위한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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