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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오늘을 기록하며 삶의 온기를 전하는,
조성당(操省堂)
입에서 단내가 폴폴 났다. 펄펄 끓는 방구들에 무거운 목화솜 이불을 코끝까지 덮어도 한기가 돌았다. 열에 들떠 사경을 헤매는 나를 깨운 건 외할머니의 거친 손이었다. 들큼한 무꿀즙이 내 입안을 적셨다. 나는 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른이 된 후 고열에 시달릴 때면 그 겨울의 뜨거운 방구들과 외할머니의 무꿀즙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끊어진 필름 같아서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선 어디에 있다. 그 경계선 어디쯤 있는 나의 어린 시절 겨울 방학, 그땐 몰랐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묵직하고 투박한 사랑을 이젠 조금 알 것도 같다. 방구들이 식을까 찬 새벽 공기 마시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러 나오신 외할아버지, 그의 손에 있던 불쏘시개까지 생각나는 겨울, 겨울은 온기가 다다.
조성당 김택룡과 그의 일기
새해,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며 뜨거운 떡국을 먹었다. 나는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것처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 2024년에도 계속되기를 소원하며 새해 떡국을 먹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때론 지루하고 퍽퍽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실상 오늘과 같은 시간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고,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고, 지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들….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대단한 이벤트가 아닌 하루에 한 줄씩 써 내려간 ‘일기’가 아닐까?
여기 400년 전의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가 있다. 그 일기 속으로 또박또박 걸어 들어가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의 온기 가득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러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찾았다. 안동시 예안면 태곡리에 있는 한천정사는 김택룡의 학식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786년(정조 10)에 설립하였다. 한천정사의 ‘한천(寒泉)’은 『시경(詩經)』, 「개풍(凱風)」 편의 “맑은 샘물이 준 고을 아랫녘에 있네. 아들 일곱 사람이 있으나 어머님이 고생하셨겠네.[爰有寒泉 在浚之下 有子七人 母氏勞苦]”라고 하는 것에서 따온 말로 자식들이 어버이를 잘못 섬긴 것을 자책한다는 뜻이다.
한천정사
한천정사 편액
한천정사의 마루에 조성당 편액이 걸려 있다. 조성당은 ‘항상 마음을 바로잡고[操] 되돌아본다[省]’는 의미이다. 김택룡이 지향하는 삶의 태도가 ‘조성당’에 녹아있다. 그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삶의 다짐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기 위해 조성당을 호(號)로 지어 부르고 썼다.
조성당 편액
조성당 편액의 맞은편에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 김택룡 영정 2본이 모셔져 있다. 한천정사는 강학 공간인 동시에 제사 공간이기도 하여 해마다 김택룡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한다. 영정 속 김택룡은 용 같은 용맹함과 냉철함, 그리고 할아버지 같은 인자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김택룡 영정
김택룡은 지금의 한천정사가 있는 경상도 예안 한곡에서 승지 김양진과 숙부인 안동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풍골(風骨)을 지닌 김택룡은 총명함이 보통 아이들보다 뛰어나 8세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고제자(高弟子) 중 한 명인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의 제자가 되었다. 학문적으로 이황과 조목의 적통을 계승한 김택룡은 1576년(선조 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경릉 참봉(敬陵參奉)을 제수받았다. 42세 때인 1588년(선조 21) 문과에 급제하고 통사랑(通仕郎)이 되어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에 보임되었다. 이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병조 정랑(兵曹正郎)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주까지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기도 했다. 1600년(선조 33) 김택룡 나이 54세에 접반사[接伴使,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벼슬아치]로 임명되어 명나라 군대를 따라 평안도에 가기도 했는데, 이때 명나라 장수 여러 명과 주고받은 시가 『조성당선생문집』에 남아있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즉위년인 1608년 12월에 영월 군수(寧越郡守)가 되었다.
김택룡은 영월 군수를 끝으로 관직 생활을 그만두었다. 62세에 퇴임(退任)한 그는 주로 본가가 있는 예안과 영주, 봉화를 오가며 일상을 영위했다. 그때의 생활을 기록한 『조성당일기』는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권은 1612년(광해군 4) 66세 때 쓴 일기, 제2권은 1616년(광해군 8) 70세 때 쓴 일기, 제3권은 1617년(광해군 9) 71세 때 쓴 일기이다. 약 3년간의 일들이 기록된 『조성당일기』는 중간중간 종이가 헤어져 탈락된 부분이 있고 간혹 날짜와 날씨만 적어놓거나 나중에 추가 기록한 부분도 있지만, 이는 그가 매일의 일들을 빠짐없이 기록하기 위해 들인 노력의 흔적이라 생각한다. 지금 전해지는 이 일기는 김택룡이 전 생애를 거쳐 기록한 일기 중 극히 일부분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김택룡의 『조성당일기』 (출판: 한국국학진흥원, 2010)
17세기 영남 사족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그의 일기에는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담겨 있다.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느끼는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의 감정은 17세기를 넘어 21세기를 관통하는 삶의 화두(話頭)다. 400년 전, 어느 노 선비의 희로애락은 우리에게 소소한 일상의 행복과 위안 그리고 온기를 안겨 줄 것이다.
연리지락[連理之樂, 부부의 화합하는 즐거움]
한겨울 세파를 이겨내고 돋아난 밭 가의 봄 쑥, 봄바람에 휘날리는 꽃잎, 더위를 식혀줄 한 줄기 시원한 바람과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쓸쓸하지만 화려하게 떨어지는 단풍 그리고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눈은 한기로 가득한 우리의 삶을 온기로 채워주는,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자연의 한가운데에서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기쁨을 선사한다. 쌍희[囍]는 부부가 서로 즐거움을 나누어 기쁨이 두 배가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부간의 기쁨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쌍희 문양에 담아 혼수 가구로 만든다. 지금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 조선의 혼례식, 둘째 딸의 결혼식 장면을 기록한 김택룡 일기를 들춰본다.
미닫이문 앞면 중앙에 쌍희문(雙喜文)이 장식된 자개농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1616년 3월 26일 맑음
숙수 이복이 와서 이진동과 함께 요리를 했다.
1616년 3월 27일 맑음
혼서(婚書)가 도착했다. 사위의 이름은 ‘근오(謹五)’다. 언복을 시켜서 기다리게 했다. 신시(申時)에 사위가 왔다. 참봉 권호식과 그의 아우 준신·중방, 이지남이 수행하여 왔다. 합근례를 행하고, 예작(禮酌)을 차렸다.
좋은 날 잔치 음식이 빠질 수 있을까? 3월 26일, 김택룡은 잔치 음식 장만을 위해 온 요리사[熟手]를 맞이했다. 3월 27일, 결혼식 하객 이름 사이에 결혼을 위해 처가에 온 사위 이름이 보인다. 원래 우리나라는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혼례를 올리고 처가에서 생활하는, 고구려 때부터 내려온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혼례 방식을 택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정권으로 넘어오면서 중국 스타일의 친영(親迎), 즉 ‘신랑이 친히 신부를 맞이하는’ 방식의 혼례 방식을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친영을 했던 왕실과 달리 일반 백성들은 친영을 따르지 않다가 17세기 이후 친영과 서류부가혼의 절충안인 반친영(半親迎) 풍속에 따라 혼례식을 거행했다. 김택룡의 둘째 딸 혼례식도 반친영 의식을 따랐다.
행복으로 가는 또 다른 시작 결혼, 하지만 살다 보면 맑은 날보다 궂은날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딸의 혼례 날, 김택룡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딸의 결혼 생활이 내내 ‘맑음’이기를 기도하지 않았을까?
기인편재[欺人騙財, 사람을 속이고 재물을 빼앗다]
출근 시간에 연락처 하나 없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두고 이중 주차를 한 차주에 뒷목 잡을 때가 있다. 또 옷을 산 다음 날 30% 할인행사를 할 때, 핵 매운 치킨이라고 주문했는데 인중에 땀 하나 나지 않을 때 그리고 부자 시댁을 둔 사촌이 땅을 샀다고 자랑할 때 화가 난다. 그래도 1시간도 안 되어서 다시 원래의 평정심을 찾게 되는 이 정도의 화는 애교다.
2023년 12월 8일 기준, 밝혀진 전세 피해 금액만 약 700억 원, 접수된 고소장만 4백 건이 넘는 ‘수원 전세 사기’의 피해자들은 고통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피해자 대부분은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20~30대 청년층들이다. 전세 사기 피해자를 위한 ‘특별법’이 그들을 실질적으로 구제해주지는 못해서,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에 억장이 무너진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탐욕에 눈이 먼 사기꾼들은 남의 돈을 제 돈처럼 삼키며 피해자를 고통의 나락 속으로 빠뜨린다. 조선의 김택룡이 겪은 토지 매매 사기 사건을 들어보자.
'수원 전세사기' 정 씨 일가 송치, 변제 계획 질문엔 묵묵부답
(출처: MBC 뉴스데스크 2023.12.08)
1612년 1월 17일 맑음
아들 대생과 함께 가동(檟洞)에 갔는데 반유실(潘有實)이 밭을 판다고 하기에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1612년 1월 20일 흐리고 혹 맑음
반유실이 왔는데, 밭을 팔고자 하기 때문이다. 가동에 있는 밭 일석락[一石落, 씨 한 섬을 뿌릴 만한 밭]이었다. 반유실이 부른 가격이 무명 50여 필이었다. 소 2마리, 옷 2벌, 무명 20여 필로 대체 환산해 지급하고 샀다. 매매문서를 만들고 공증인으로 하여금 문서를 작성하게 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1612년 1월 30일 흐리고 흙비가 내려 불쾌했다. 심하게 어두컴컴했다.
반유실과 임수공(林守工)이 왔는데, 밭을 거래하는 문서 일 때문이다.
1월 17일 김택룡은 반유실의 땅을 사기 위해 아들 대생과 가동에 갔지만 밭 주인 반유실이 오지 않아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사흘 뒤 그는 무명 50여 필에 해당하는 땅값을 지불하고 반유실의 땅을 샀다. 1월 30일 반유실이 밭 소유권에 관한 서류 작성을 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다. 이를 통해 지금의 토지 매매처럼 조선 역시 매도인과 매수인이 만나 토지 매매 계약서를 쓰고 토지 소유권 이전에 관한 문권(文券)을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가족의 주요한 경제적 소득원인 토지를 구입했으니 그가 얼마나 뿌듯하고 기뻤을까?
1612년 2월 11일 맑음
반유실과 임수공의 논을 구입하는 일로 관에서 사령을 보내어[發差, 죄지은 사람을 잡아 오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 금석(金石)을 잡아넣었다고 한다. 수군(水軍)의 전지(田地)는 팔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영선(李榮善)이 주쉬(예안 현감)에게 아첨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그 밭을 매입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일이 잘되지 않았으므로, 힘써 청탁하여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다. 분통이 터진다.
토지 구입 열흘 후에 듣게 된 분통 터지는 소식, 김택룡은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그가 사들인 땅은 애초에 매매가 금지된 수군전(水軍田)이었다. 수군전은 세금을 내지 않는 땅인데, 세금을 면제해 주는 대신 그것을 가지고 수군에 근무하는 사람을 지원하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1425년 세종 때부터 군역에 관계된 땅은 함부로 매매할 수 없도록 했다. 아마도 반유실은 수군에 편제되어 군역을 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자신이 매입한 땅이 매매 금지에 저촉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김택룡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조선에서는 보통 토지 거래에 있어 양반의 가노(家奴)를 시켜 매매를 진행했다. 그랬기에 새로 산 땅의 실소유주는 김택룡이었으나 매매 계약서에는 노비 금석의 이름이 올려져 있었다. 그가 관아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여 겨우 금석이 풀려났다. 기쁨도 잠시, 2월 14일 그는 ‘금석을 아병[衙兵, 지방 관아에 딸린 병졸]에 넣어 안동의 군사훈련에 참가시킨다고 하였다.’는 공문을 받게 된다. 갑작스러운 금석의 속오군 편입으로 금석이 군사훈련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했다.
사건은 노비 금석의 속오군 편입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김택룡이 구입한 땅을 환퇴[還退, 샀던 땅이나 집 따위를 도로 무름]까지 해야 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이영선(李榮善)이란 자가 있었다. 이영선 역시 김택룡이 사들인 반유실의 땅을 탐냈지만 사지 못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영선은 국법으로 금지된 수군전 매매 사실을 관아에 고발했다. 이영선은 금석을 속오군에 편입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2월 20일에는 ‘이경선이 제 마음대로 내은복을 시켜 반유실에게 땅값으로 지급한 소를 가지고 오게 하’는 등 토지 거래 자체를 무효화시키려 했다. 김택룡은 매매 금지된 땅을 판 반유실도 미웠지만 이영선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상명지통[喪明之痛, 자식을 잃은 슬픔]
돌쟁이 아기가 엄마를 향해 인생의 첫발을 떼며 걸어와 안길 때, 그때의 행복감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첫걸음을 뗀 아기가 걷고 뛰고 달리는 동안 부모는 그의 뒤에 서서 기꺼이 아기에게 닥칠 험난한 인생길의 안식처가 되어 준다.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깨질까 금지옥엽(金枝玉葉)처럼 귀하고 소중하게 키운 내 아이가 아프다면, 나는 ‘소아과 오픈런이 엄마들의 브런치 탓’이라고 욕을 먹어도 기꺼이 ‘소아과 오픈런’을 위해 뛸 것이다. 가까이에 오픈런 할 의원조차 없던 조선, 아픈 아들을 그저 바라만 봐야 했던 애끓는 아비의 심정이 김택룡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1616년 9월 28일 맑음. 매우 추움.
큰아들 김숙이 동생 적에게 문병 갔을 때 쓴 편지가 지금에서야 전달되었다. 편지에는, “아우 적의 병이 약간 차도가 있기는 하지만 등이 시린 것과 허리 통증이 번갈아 발작하여 나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증세가 심했다 덜했다 하면서 전혀 차도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아우가 요산의 타작이나 이곡[利穀, 남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이익을 남기는 일]의 일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아버님께서 조사하시고 받아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라고 썼다.
김택룡의 둘째 아들 김적은 천식을 앓고 있었다. 9개월 전, 1월 21일 ‘아들 김적의 편지를 받고 천식을 매우 심하게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쓴 일기를 보더라도 적의 병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김택룡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오고 가는 인편으로 아들의 소식을 들으며 병의 차도가 있으면 안심하고 심해졌다고 하면 노심초사하길 반복했다. 그는 담박호(痰剝蒿)와 곤담환(滾痰丸) 같은 약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다. 가래 삭이는 데 효과가 있다는 ‘청몽석(靑礞石)은 중국 수입 약재라 가장 비싸서 구하기 어렵다’고 하니 아비로서의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는 그저 ‘아들 김적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지난 겨울부터 인사 오지 않고 있다. 병세가 이와 같으니 걱정된다. 어찌하겠는가?’라고 탄식만 할 따름이었다.
9월 28일에 도착한 첫째 아들 김숙의 편지가 김택룡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김숙은 아버지에게 동생의 가계(家計)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하며 아우 적의 장리치부[長利置簿, 남에게 곡식이나 돈을 빌려준 장부]와 열쇠를 같이 보냈다. 10월에 김택룡은 아들 김적의 수확 곡식과 이조[利租, 이자로 받은 벼]를 받아 창고에 넣어두고 관리를 했다. 아들 대신 아들의 집안 경제를 살펴야 했던 김택룡은 한 잔 술을 마시며 가슴 속 울분을 씻어 낼 뿐이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김택룡은 10월 18일 ‘푸닥거리를 하며 아들 김적의 병이 낫기를’ 기도했다. 무당을 불러 굿까지 했으나 아들의 병은 갈수록 더 심해졌다. 그는 마음이 심란하여 붓을 잡을 여력이 없었던 것일까? 1616년 12월 25일부터 1617년 1월 27일의 앞부분까지의 기록이 빠져있다. 그는 1월 28일 ‘아침에 책방의 작은 대청에서 아들 김적의 상복을 입었다’라고 시작하는 일기를 썼다. 천식을 앓은 지 약 1년 만에 김택룡의 아들 김적이 죽었다.
아비보다 먼저 죽은 아들의 묏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그 심정은 어떨까? 애간장이 타서 속이 새카맣게 타버릴 것만 같다. 1617년 4월 16일, 아침 김택룡은 아들의 신주 앞에 술 한 잔을 올리며 제문을 읽었다.
정사년 4월 15일 너를 장례 치른 다음 날 아침 늙은 아버지는 아들 적의 영전에 고한다. 네 몸은 한곡으로 돌아가고 혼은 산양에 돌아가기에 술 한 잔 따르고 영혼을 위로한다.
아들을 묻은 아버지의 슬픔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김택룡은 슬픔을 다하여 곡을 했다. 부모에게 자식은 늘 애틋한 첫사랑인 것을, 자식을 먼저 보낸 세상의 모든 부모가 슬픔 속에 오래 머물지 않기를….
등용문[登龍門, 입신출세의 관문]
약 10년 전, ‘문송합니다’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문과생의 극심한 취업난을 표현한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는 이제 상투적인 말이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문송’들은 높아진 취업 벽에 취업 사이트를 클릭한다. ‘문과 침공, 이과 침공’이라는 신조어가 생긴 요즘, 취업 준비생들이 원하는 곳에 취직해 축하주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문과의 나라 조선에서 무과 급제한 이에게 축하주를 나누는 이야기가 김택룡 일기에 남아있다.
1612년 1월 6일 맑음
선전관 금결이 어제 이미 초청장을 보냈는데 지금 또 심부름꾼을 보내 초청했다. (중략) 이날의 연회는 선전관 금결을 위해서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 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여 지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새로 합격한 사람을 부르면서 장난치는 신고식을 하여[呼新設戲] 마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크게 웃고 마침내 질탕하게 마셨다.
무과에 급제한 금결(琴潔, 1544~1615)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선전관[宣傳官, 선전관청의 무관 벼슬]이 되었다. 금결은 취업 성공 합격 턱을 내기 위해 지인들을 초대했다. 김택룡은 선전관이 된 금결을 축하하는 동시에 선전관의 선배로서 호신래(呼新來)를 이끌며 분위기를 띄웠다. 호신래는 선배 급제자들이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을 집 밖으로 불러내어 얼굴에 먹칠을 하거나 옷을 찢는 행위를 말하는데, 오늘날의 신고식과 비슷한 말이다. 이러한 신참 신고식은 금결이 앞으로 근무하게 될 선전관청(宣傳官廳)이 특히 더 심했다. 선전관은 무관의 직위에서도 꽤 중요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신고식을 치르는 신임 관리(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후배의 새로운 앞날을 축하하며 건넨 한 잔의 술은 성공의 기쁨과 즐거움이 배가 되게 한다. 술은 험난한 인생을 치유해 줄 마법의 묘약 같다. 단, 술의 마력(魔力)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친한 친구들과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 김택룡의 일기를 읽고 있으면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는 생각에 위안이 된다.
1612년 3월 21일 흐리고 혹 맑음
여러 친구들이 계대(溪臺)에 모였다. (중략) 모두 술을 차고 찬합을 들고 왔다. 종일토록 단란하게 마시다가 흠뻑 취하였다. (중략) 제군들이 다투어 술을 흠뻑 마셔서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 집으로 돌아와 엎어져 누워서 인사불성이었다.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여러 친구들이 꽃이 흐드러져 경치가 한창이 계대에서 이처럼 즐겁게 와서 놀았으니, 정말 훌륭한 일이다.
모임 전날, 김택룡은 사마계회(司馬契會)의 초청장을 받았다. 여기서 사마계회는 당시 예안 일대 지역의 선비 가운데 사마시(司馬試) 즉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자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계모임을 말한다. 일종의 동기 모임에 참여한 김택룡은 그곳에서 특별한 동류의식을 느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 만족스럽다. 봄꽃 가득한 3월, 경치 좋은 계대에서 좋은 사람들과 웃고 이야기하며 술을 마신다면 시 한 수가 절로 떠오를 것 같다.
화룡점정[畵龍點睛, 중요한 마무리]
누군가의 일기장을 엿보는 일은 흥미롭다. 그가 겪은 일화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날마다 그날의 하루를 돌아보고 내일을 살아갈 마음을 다잡은 김택룡! 노년의 그가 쓴 일기에는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 일상의 기록들이 나에게 위로와 온기를 안겨 준다.
2024년 대한민국의 10대 소비트렌드 키워드를 전망하는 『트렌드 코리아 2024』의 서문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앞으로 상당한 기간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사람만의 영역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중략) 인공지능이 내놓은 비슷비슷한 결과물 속에서 어떤 ‘휴먼 터치’가 마지막에 더해졌느냐에 따라서 그 수준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이 필요하다.”
‘인공지능의 시대, 결국은 인간이다’를 제시한 『트렌드 코리아 2024』에 살포시 숟가락을 얹어본다. ‘인공지능의 시대, 결국은 인간의 ‘온기’가 용의 승천을 완성할 마지막 점정(點睛)이다’라고 말이다. 조성당 편액에 새겨진 말처럼 ‘항상 마음을 바로잡고 내 삶을 돌아보며’ 누군가의 헛헛한 마음을 채워줄 따뜻한 떡국 한 그릇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
2. 스토리테마파크 (https://story.ugyo.net)
3. 조선의 가례 (https://form.ugyo.net)
4. 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
5. 이혜리 기자, 「‘수원 전세사기’ 정씨 일가 송치, 변제 계획 질문엔 묵묵 부답」, 2023년 12월 08일 기사, MBC
6. 이상호 칼럼, 「1612년, 토지 부당거래 사건」, 2021년 3월 24일 기사, 뉴스민
7. 김택룡 저, 하영휘 역, 『조성당일기』, 한국국학진흥원, 2010.
8. 김택룡 저, 박미경 역, 『조성당선생문집』, 한국국학진흥원, 2021.
9. 윤성훈 외 5명, 『조성당일기: 일기를 바탕으로 복원한 17세기 영남 사족의 생활 궤적』, 은행나무, 2023.
10. 김난도 외 10명, 『트렌드 코리아 2024: 청룡을 타고 비상하는 2024를 기원하며!』, 미래의창,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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