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중부 여행기6
2024년 1월 2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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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침을 일찍 먹고 미케 해변으로 갔다. 어제처럼 날씨가 훈훈하고 맑았다. 슬리퍼를 벗어서 들고서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맨발 걷기’와 ‘걷기 명상’을 겸하여 걸었다. 티끌 하나 없고, 고운 모래가 쌓인 해변은 파도가 밀려와 바닷물에 젖어서 유리처럼 깨끗했다. 손윤락, 박원섭 두 분 교장 선생님의 모습을 촬영해드렸다. 북쪽으로 걸으며 멀리 선짜(茶山) 반도의 손가락처럼 작게 보이는 백색 해수 관음상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걸어가니 끊임없이 밀려오는 거센 파도를 타는 서핑(surfing)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서핑보드(surfing board)를 들고 얕은 물 속으로 들어가 파도타기를 즐기는 청춘 남녀가 부럽기도 했다. 야자수 그늘에 야자수잎으로 지붕을 올린 큰 원두막 안에는 서양 사람들이 열 지어 앉아서 서핑 경기를 관람하고, 한 청년이 마이크를 잡고 경기를 영어로 중계하고 있었다. 미케 해변은 세계 6대 서핑 해변인데, 우리나라에서도 동호인들이 4월에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미케 해변을 거닐자니, 오래전에 역주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의 여행기,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3월에 아들을 잃은 참척(慘慽)을 당하여 심회(心懷)가 울적한 숙부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에게 지기(志氣)를 시원하게 하시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 음력 8월, 황여일은 숙부를 모시고 울진 해월헌(海月軒)에서 동해안을 내려와 청하현 해월루(海月樓)로 오고, 조경대와 내연산을 유람하는 열흘 간의 여행을 하였다. 그들은 청하현 관아에서 하룻밤 묵고서 아침에 청하현 월포(月浦) 해변과 월포 해변 남단의 바위 절벽 위의 누대인 조경대에서 동해 바다와 내연산을 돌아보고, 월포의 깨끗한 모래밭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노닐었다.
“8월 5일 임술, 비 옴. 조 태수(청하현감 조정간(趙廷幹))가 진수성찬을 차려 정성껏 채 현감(신녕현감 채운룡(蔡雲龍))과 숙부를 동헌에서 대접하였다. 술자리가 파하고 숙부를 모시고 조경대로 유람 갔다.
대는 현의 남동 10리 지점에 있었다. 솔숲과 대나무가 있고 곳곳에 어부들의 집이 있었다. 옅은 안개가 끼고 이슬비가 내리는데 그대로 그림 같았다. 조경대에 올라 바라보자니 멀리 북쪽 바다 위에 하늘이 광활하였고, 서쪽 산에 구름이 우거졌으며, 가까이에 기이한 바위가 빽빽하게 서 있었다. 짙푸른 거울 같은 수면에 침을 뱉을 수 있었겠는가. 물 위에 떠 있는 갈매기와 나르는 백로(白鷺)가 한가로이 오갔다.
작은 배 수십 척이 저물녘에 다투어 고기를 잡고, 곁에 배 한 척이 있어서 노래를 부르며 남쪽으로 노 저어 갔다. 숙부와 나는 비취 빛 모래를 깔고 앉아 찬바람에 몸을 맡겨둔 채 술을 몇 잔 따르고 돌아왔다. 최 단양(丹陽, 영해부사 최경회(崔慶會))은 이미 해월루(海月樓)에 도착해 있었다. 붉은 등불 푸른 미녀가 요대(瑤臺; 유융(有娀)의 미녀가 산다는 누대)같이 빛났지만, 조경대의 웅장한 경치에 비하면 아지랑이이고 티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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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에 버스를 타고 간 곳은 다낭대성당(Giáo Xứ Chính Toà Đà Nẵng)이었다. 버스가 선 곳은 한강 가의 작은 조각 공원이었다. 난간에 기대서서 보니 발밑에 강물이 넘실대고 강 양쪽 가에는 새로 지은 빌딩들이 솟아 있었다. 북쪽으로 까우 송 한강 다리(Cầu Sông Hàn)가, 남쪽으로 멀리 용 다리(Dragon Bridge)가 있었다. 강폭도 넓고 수량이 풍부하여 보기만 하여도 몸에 물의 풍요로운 기운이 가득 차 올랐다.
길을 건너서 한 시장의 꽃 가게와 보석 가게 앞의 길을 지났다. 진주 목걸이, 진주 팔찌를 파는 가게의 주인 여자는 포대화상과 여의자와 금괴를 든 노랑옷의 신선상, 부채와 진주가 가득 들은 조개를 들고 빨강 옷을 입은 신선상, 조상과 사방의 신위를 모신 작은 제단에 국화 꽃병, 용과와 멜론, 과자와 진주가 가득 들은 조개를 올리고 오늘도 손님이 많이 오기를 바라며 향을 피우고 있었다.
다시 길을 건너서 남쪽으로 가니 도로 가에 다낭대성당이 있었다. 성당은 파사드가 아주 웅장하고, 첨탑의 꼭대기에는 십자가와 그 위에 수탉 풍향계가 있었다. 수탉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베드로와 관계가 있다. 베드로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3번 부정하였는데, 닭 울음 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의 배신을 알고 회개하였다고 한다. 성당의 외벽은 핑크색이라고 하지만, 분홍색이라기보다 살구색으로 칠하여 산뜻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다섯 개의 아치형 문 중에 가운데의 문 위에 둥근 광창이 있고, 그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예수상이, 남쪽 앞에는 칼을 집고 서 있는 바울상이, 북쪽 앞에는 천국의 문을 여는 큰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상이 있었다.
성당은 1923년에 사제 발레(Vallet)가 설계하고 건축하여 1924년에 완공하였고, 1963년, 2013년에 수리했다. 동서로 긴 고딕 건축인데 남북 측면에 11개의 크라운 아치가 있는 복도가 붙어 있어서 베트남의 우기와 햇볕을 피할 수가 있으며, 외관도 화려하고 시원한 맛을 주었다.
주교관과 이어지는 성당의 북쪽 울타리에는 성당과 다낭 지역에 가톨릭을 전파한 역사를 사진과 베트남어로 설명하는 10개의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여행 뒤에 구글의 사진으로 문자를 해독하는 앱으로 베트남어를 읽어 보았다. 첫째 안내판에는 1533년부터 베트남에 가톨릭 전파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도 훙 비엔(Dỗ Hưng Viễn)이 마카오에서 세례를 받고 그곳에서 1573년에 사망한 베트남 최초의 신자라고 하였다. 둘째 안내판의 두 인물 중 오른쪽 인물은 유인선 교수의 <<베트남의 역사>>에 등장하는 알렉상드르 드 로드 신부였다. 모자를 쓰고 콧날이 날카롭게 서 있고, 큰 눈에 긴 턱수염과 작은 얼굴이 이지적이었다. 그 옆의 인물은 프란체스코 부초미이었다. 알렉상드르 드 로드 신부가 라틴어로 만든 베트남어 문자, 국어로 교리문답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셋째 안내판에는 베트남인 사제 안레 푸 엔(Anrê Phú Yên)이 1644년 7월 26일에 처형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17세기 초 예수회 선교사들이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가톨릭을 전파하였다. 1615년 마카오의 예수회는 포르투갈인 디에구 카르발류(Diego Carvallho)와 나폴리인 프란체스코 부초미(Francesco Buzomi)를 다 낭에 파견했다. 카르발류는 잠시 머물렀지만 부초미는 24년간 체류하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에도막부가 그리스도교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마카오의 예수회는 새로운 선교지로 베트남에 관심을 가지고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1660) 신부를 파견했다. 프랑스 아비뇽 출신인 그는 1620년 하노이에 도착해 1624년까지 베트남어를 공부했다. 베트남을 떠났다가 1627년 다시 통킹으로 돌아와 선교하다가 1630년에 추방되었다. 이 기간에 6,000~6,700명을 개종시켰다고 한다. 마카오로 돌아갔던 그는 1640년에 베트남 남부로 돌아와 선교를 하다가 응우옌 씨에 의해 사형판결을 받고 추방형으로 감형되어 로마로 돌아갔다.
교황을 설득하여 1659년 아시아 지역 선교를 전담하는 새로운 독립기구인 파리외방전교회(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를 세웠다. 이 단체를 통해 프랑스 선교사들이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파견되어 훗날 프랑스가 이들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드 로드 신부는 베트남어를 로마자화하여 라틴어와 베트남어 대역으로 된 <교리문답(敎理問答)>을 만들고, <<베트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을 1651년에 간행했다. 이 로마자화된 베트남어 표기법은 현재 베트남에서 사용되는 꾸옥 응으(Quốc Ngữ 國語)의 모체가 되었다. 그가 새로운 글자와 사전을 만든 것은 선교사들이 베트남어를 쉽게 배우고, 베트남인들이 글을 익혀 그리스도교 교리를 빨리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정의 금지에도 신자 수가 불어났는데 초기의 신자는 주로 가난한 이들이었고, 신부의 강론보다 구호품의 쌀이 개종의 원인이었다. 개종자가 늘어날수록 박해가 심해졌다. 1660년대에는 찐씨가 가톨릭 서적을 불태우고 개종자들을 처형했다. 17세기 말에는 베트남 내의 정치문제에도 개입하여, 1802년 응우옌 왕조 성립 뒤에는 잠시지만 선교의 자유를 얻기도 했다.
18세기 말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원자재 공급과 생산품 판매를 위한 시장이 필요해져 유럽 각국은 19세기를 전후해 제국주의적인 팽창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유학에 조예가 깊고 중국문화를 이상으로 여겼던 민망 황제는 1825년에 가톨릭 금령을 처음 내렸다. 금령의 이유는 서양의 종교는 파괴적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다낭에 정박 중인 프랑스 군함이 선교사를 몰래 상륙시킨 게 발단이 되어 가톨릭 금령으로 이어졌다. 1826년에는 베트남의 모든 외국인 선교사는 후에에 와서 유럽 서적 번역에 종사하도록 명령했다. 1833년 레 반 코이의 반란에 가톨릭 교도들이 가담하면서 8명의 선교사와 신자들을 처형하는 박해가 있었다. 박해에도 신자 수가 계속 늘어난 것은 물가상승, 빈번한 자연재해로 인한 굶주림, 감시가 미치기 어려운 긴 해안선, 불교의 쇠퇴가 주요 원인이었다.
티에우 찌 황제 때, 아편전쟁 뒤에는 프랑스가 1843, 1845년 두 차례에 걸쳐 포함(砲艦)을 다 낭에 보내 구금된 선교사의 석방을 요구했다. 르페브르 주교의 사형 때는 다 낭에 있던 미국 해군함정의 존 퍼시벌(John Percival) 함장이 군대를 상륙시켜 지방관리들을 인질로 잡고 주교의 석방을 요구했는데, 서구세력의 베트남에 대한 최초의 무력개입이었다.
1847년에 선교의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 다낭에 온 프랑스 군함 2척이 베트남 함대에 발포해 침몰시키고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이에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이었던 티에우 찌 황제는 베트남의 모든 유럽인을 잡아들여 사형시키라는 조칙을 내렸다.
뜨득 황제는 프랑스·영국·스페인·미국의 사절들이 요청한 통상을 모두 거부하고, 외국인 선교사는 사형시키고, 베트남인 사제들은 이마에 자묵(刺墨)을 하여 유배보내도록 했고, 곧 베트남인 사제도 사형시키도록 했다. 이후 주로 북부에서 프랑스인 신부들과 베트남인 사제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체포를 면한 사제들은 산간지대로 숨어서 선교를 계속했다.>
-유인선, <<베트남의 역사>>, 255~260쪽
산업혁명 이후 국가와 자본가가 결합하여 자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해외의 약소 민족을 침략하여 상품의 원료와 시장, 잉여 자본의 투자지로 삼는 식민지를 경영한 제국주의는 군대·상인·선교사가 한 팀을 이루어서 약소 민족을 침략했다.
처음부터 무역보다 가톨릭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스는 베트남을 100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하고, 2차 대전 뒤에 베트남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베트남으로 돌아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일으켰다. 디엔 비엔 푸 전투 뒤에야 항복하고 제네바 협정을 체결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했지만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국은 응오 딘 지엠 정권을 후원했고, 가톨릭 국가를 만들려는 욕심으로 부정부패한 정권에 저항하는 불교를 탄압하고 가톨릭에 편향적인 혜택을 주었다. 틱꽝득 스님을 비롯하여 스님과 신자들이 소신공양을 하며 정권에 격렬하게 저항하여, 월남의 이승만이었던 그는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성당의 안쪽에는 인공 바위굴이 있고 성모 마리아상을 모셔 놓았다. 벨기에 바뇌, 포르투갈 파티마에 이어서 프랑스의 루르드 마사비에 동굴에서 성모가 18차례 나타났다. 이 동굴은 로르드 마사비에 동굴을 재현한 것이라고 미리샘이 말해주었다. 동굴 입구에 하얀색 어린 양들의 상을 설치해놓고, 수련과 꽃과 푸른 나뭇잎으로 장식되어 평화롭고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성당의 남쪽으로 돌아오니 복자(福者)로 시성된 베트남인 사제 안레 푸 엔(Anrê Phú Yên)의 대리석상이 있었다. 사제복을 입은 그는 오른손에는 새 깃털로 만든 펜을 들고, 왼손에는 작은 책을 들고 있었다. 생몰년을 보니, 1625년에 태어나 불과 19세가 되는 1644년에 순교하였다. 석상 앞에는 안레 푸 엔을 위한 기도문이 새겨진 석조 책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한강 변 명승지인 잠두봉(蠶頭峯-楊花津)에 지어진 천주교 절두산 순교 기념 성당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생각났다.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는 1821년에 태어나 새남터에서 1846년에 26세의 나이로 효수당했다. 김대건 신부는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상하이 진쟈상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1845년 8월 17일 사제로 서품돼 그해 10월에 귀국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조각이 있고, 그 옆에는 어린 예수가 집을 짓는 아버지 요셉에게 나무 기둥을 주며 목수 일을 돕는 장면을 어머니 마리아가 지켜보는 단란한 가족의 백색 석상이 있었다. 아내와 함께 마당에 서서 기념 촬영을 하고 성당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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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가의 조각공원으로 돌아오며 건널목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길가의 관광공사 건물 앞에 중국식 대리석 사자상에는 2024년 설을 맞이하여 붉은색 띠로 금방울을 달아 놓고, 창문에는 황매화와 복사꽃의 흩날리는 꽃잎과 금화, 천도복숭아, 호리병이 달린 지팡이, 두루말이 족자, 여의자, 금괴를 들고 있는 도교의 세 신선들을 붙여 놓았다. 사자상 밑에는 작년에 붙인 입춘첩(迎春接福, 開工大吉-봄을 맞아 복을 접하네. 운세가 크게 길하네.)이 있었다.
한강 변 길을 달려 버스가 간 곳은 다낭 남쪽의 오행산이었다. 오행산을 서양인들은 마블 마운틴이라고 하지만, 석회암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대리석이 베트남에도 많다. 불교 성지이기도 한 오행산 주변에 석물공장이 있었다. 베트남 석수장이가 대리석을 쪼아서 빚은 석물의 대다수는 불상들이었다. 정병을 붓는 해수관세음보살, 복을 주는 포대화상, 약그릇을 왼손에 받쳐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한 약사여래, 선정인을 한 석가여래 등의 석상들이 한결같이 백옥처럼 깨끗한 색에다 얼굴에는 법열에 찬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도 청초하고 순결하고 어여뻐서 관광기념품으로 한 점을 사 오고 싶을 정도였다.
오행산 주변의 어느 건물 벽에 한국 맛집 음식을 배달하는 케이(K) 배달이라는 한글-베트남어 간판이 보였다. 그만큼 한국인 관광객이 오행산을 많이 찾아오고, 베트남인들이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다. 오행산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어서,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커피 쇼핑을 하러 다시 미케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갔다.
선짜 반도 가까이에 있는 미케 해변의 한적한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보름달 커피 숍(Cafe Full Moon Da Nang) 안으로 들어갔다. 큰 홀에 커피를 볶는 대형 기계가 있고, 그 안쪽에 커피를 시음하고 판촉하는 공간이 있었다. 커피 가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내린 커피는 맛이 헤이즐넛 커피를 닮은 위즐(Weasel) 커피이었다. 발리에서는 사향 고양이 루왁 배설물 커피를 팔았는데, 여기는 족제비가 커피 열매를 먹고 배설한 커피이었다. 한국에 유학했다는 통통한 여인이 유창한 한국어로 손님들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였다. 커피 성분이 들어 있는 크림을 피부에 발라 문지르니 각질이 된 죽은 세포가 죽죽 밀려 나와서 신기하였다. 물론, 관광객들을 겨냥한 과장 광고이었지만, 1시간 정도의 설명을 들은 뒤에 아내는 바구니를 들고 몇십만 원어치 커피 상품을 바구니에 주워 담았다.
커피를 구입하고 점심밥을 먹으러 갔다. 쌀국수, 노랑색 쌀로 지은 밥, 닭고기 튀김, 상추 등을 바나나 잎을 깐 대소쿠리에 담은 베트남 음식, 분짜이었다. 식당에서 나와서 선짜 반도의 영응사로 가는 해안선은 굽어서 하나의 만을 이루고 있었다. 파도를 피해서 수백 척의 어선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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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선짜 반도의 영응사(靈應寺)로 갔다. 가이드 윤실장님은 베트남 전쟁과 전후에 보트피플이 된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 가 살면서 쌀국수, 포(Pho)를 팔아서 번 돈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희생된 원혼들을 위하여 지은 절이라고 한다. 내가 즐겨 먹는 베트남 쌀국수, 포가 미국에 이주한 베트남인 보트피플이 개발해 팔았던 음식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찰에 들어서니 부겐빌리아 꽃나무가 심어져 있고, 녹색 기와를 올리고 용이 휘감고 있는 6개의 돌기둥이 있는 대웅보전의 2중 처마 사이에는 ‘淨佛國土(번뇌가 없는 불국 정토)’, ‘如來所都(여래의 도성)’, ‘佛光普照(부처님 지혜의 빛이 널리 비춘다)’가, 3개의 문 위에는 가운데에 ‘靈應寺’가, 좌우에 ‘禪門鎭靜(선종 문 안의 고요함)’, ‘海衆安和(바다처럼 많은 중생의 안온과 평화)’라는 글씨가 새겨진, 리본을 좌우에 3겹으로 접은 모양의 액자 현판이 붙어 있었다. 대웅보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금귤이 많이 달린 귤나무와 황매화가 피어난 황매화 화분이 놓여 있고 그 밑에는 사자석상과 함께 긴 여의봉을 들고 있는 손오공상이 있는 것이 특이하였다. 대웅보전 앞에서 손윤락 교장샘과 함께 기념 사진을 촬영하였다.
대웅보전 마당에는 많은 분재와 괴석이 놓여 있고, 그 좌우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한 나한상들이 열지어 있었다. 나한들은 사슴, 사자, 코끼리 등 다양한 동물들을 타고 있었다. 미당 끝에 높이가 30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해수관음상이 미케 해변과 다낭 시가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 얼굴을 클로즈업하니 복스럽게 늘어진 큰 귀와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상이었다. 관음상 대좌는 불상을 봉안한 법당이었다. 백색 대리석으로 빚은 전법륜인의 불상, 그 앞의 검은색 돌로 쪼은 작은 선정인의 불상, 맨 앞에는 태국에서 볼 수 있는 아주 긴 관을 쓰고 선정인을 하고 있는 금동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불단에 공작새 모양의 촛대가 놓여 있고 그 앞에는 복전함이 있었다.
관음상 앞에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계단 끝에 2층의 아치형 문이 층마다 세 개가 있는 이층의 패방이 있었다. 패방의 2층 가운데 문에는 칼을 짚고,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수호신인 위태천상이 모셔져 있었다. 가운데 큰 문에는 ‘佛日增輝 法輪常轉(부처의 해가 빛을 더하고, 부처님 진리의 수레 바퀴가 늘 구르고,)’, ‘風調雨順 國泰民安(바람이 고르고 비가 때 맞춰 내리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네)’이, 좌우의 작은 문에는 ‘靈應祈求如意願(영응사에서 기도하여 소원이 바람대로 이뤄지고,)’, ‘山茶罷孛實顯靈(선짜에서 액운을 깨고 영험이 실현되네.)’이라는 대련이 도자기를 박아서 만든(嵌瓷) 글씨로 쓰여 있었다.
분재 테두리에 앉아서 해수관음상을 우러러보다가 가이드 흥과 함께 기념 사진을 촬영하였다. 패방 밖으로 나가 미케 해변과 바다를 바라보다가 대웅보전 마당을 지나 돌아나오다가 보리수 그늘이 좋아서 그 아래의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 계림서연샘 부부도 거기에 앉도록 하고 사진을 촬영해드렸다.
마당에 떨어진 보리수잎들을 주워서 목탑 형태의 거대한 팔각 칠층 시멘트탑이 보이는 뒷문을 지나 버스가 있는 곳으로 오는데, 가이드 흥이 내 손에 들린 보리수잎을 보더니 반가워하며, 자신의 휴대폰 뒷면에 코팅해서 끼워놓은 작은 보리수잎을 보여주었다. 자세히 보니 보리수 잎에는 동자승이 염주를 합장한 손에 든 그림과 함께 “Bình An”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자를 배우지 못한 흥은 나에게 그 베트남어의 의미를 나에게 영어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平安(평안)’의 베트남어 발음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착하고 인정스러운 흥은 불심이 돈독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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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응사에서 돌아나와 다시 남쪽의 미케 해변에 있는 침향(沈香, Agarwood) 가게로 갔다. 여행 오기 오래 전부터 케이블 방송에서 침향 광고를 자주 보았다. 침향나무 통나무가 전시되어 있고 침향의 효능을 설명하는 전시물이 붙어 있는 홀의 안방에 들어갔다. 부산말을 구사하는 부산 남자가 감언이설로 판촉 활동을 했다. 이상한 알약, 가루를 주고 무슨 생체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아예 그것을 먹지도 않았다. 어둡고 서늘한 실내에서 사지도 않을 물건 판촉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어서 한참 뒤에 밖으로 나왔다. 물론, 리베이트가 가이드의 급료가 되지만 말이다. 밖에서 광옥샘, 미란샘, 흥 등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렸다. 침향이 약효가 좋아서 구입한 분들이 효과를 보고, 바가지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침향을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곡 ‘침향무(沈香舞)’를 통해 처음 알았다. 침향을 피운 공간에서 법열에 젖은 춤을 추는 모습을 음악으로 형상화한 신비로운 음률의 곡이다. 침향무를 들으면,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최승희의 보살춤이 떠오른다.
식민지가 되지 않고 외침이 거의 없는 일본은 문화의 연속성이 놀랍도록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일본 여행 중 나라의 호류지에서 침향 2통을 사 와서 한 통은 주지 스님께 선물하고, 한 통은 부처님께 공양 올렸다. 예불을 올리는 스님이 인조 화학 향으로 목과 눈이 아프다며 힘들어하셨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천연 약재로 만든 향이 생산되고 있지만, 어릴 적 제사에 쓸 향으로 쓰려고 아버지는 나에게 향나무의 껍질을 베어오라며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처음 만들어진 싸구려 인조 향을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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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올갱이 된장국으로 먹었다. 올갱이가 좀 딱딱하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상추쌈으로 밥을 그런대로 맛있게 먹었다. 식당에서 나와 야자수가 길게 서 있는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아오자이(Ao Dai) 패션 쇼를 보러 갔다. 한강의 남쪽 강변에 있는 큰 공연장에는 수백 명의 한국인 남녀노소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첫 번째 공연은 후에의 궁궐, 태화전(太和殿)을 무대로 펼쳐졌다. 황금색 아오자이를 입은 황제가 용상에 앉아 있고 그 앞에 홀을 든 관료들과 호위무사, 비빈과 궁녀들이 화려한 아오자이 복식을 입고 도열했다. 길고 화려한 원피스와 머리에 달처럼 둥근 모자를 쓴 궁녀들이 황제 앞에서 좌우의 손에 각기 종자기 2개를 들고 손가락으로 부딪치며 춤과 노래를 불렀다. 자막을 보니 노래는 임금을 찬미하고 백성을 축복하는 시가 가사이다. 자우반(Chau Van)이라는 이 공연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객석의 맨 앞줄에 앉은 우리 일행은 궁녀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주는 2개의 종자기를 손가락에 끼워서 부딪히며 소리를 내어 보았다.
두 번째 공연은 시장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사람들은 궁중과 달리 논라를 쓰고 상의도 상반신만 덮고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는데 색상도 크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안내문에는 17~19세기의 이들 복식은 단순하고, 겸허하고, 우아하고, 경건한 맛이 난다고 하였다. 1744년에 시작된 아오자이에서 앞의 2조각 천은 부모를, 뒤의 2조각 천은 처부모를, 5개의 단추는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5덕을 상징한다고 한다.
세 번째 공연은 전통 혼례를 공연하였다. 신부가 가마 대신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등불을 들고 길을 밝히며, 붉은 보자기로 덮은 상을 들고 혼례식장에 들어왔다. 신랑 신부가 분홍색 비단에 수를 놓은 혼례복을 입었다. 신부의 혼례복은 우리 전통 혼례의 활옷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는데, 너른 소매 끝동은 황·적·자·백·녹의 띠를 이어붙였다.
네 번째 공연은 연꽃을 들고 추는 춤이었다. 연꽃은 순수하고, 소박하고, 우아함의 상징이라고 한다.
다섯 번째 공연은 학생들의 교복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는 남학생 교복과 달리, 여학생 교복은 흰 바지에 길게 드리운 흰 드레스를 입는 복식이었다. 베트남인의 민족과 나라와 자기 문화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에는 태극기와 금성홍기를 가슴에 붙인 두 사람이 화려한 아오자이를 입고 나와 두 나라의 우의를 다지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남녀 가수들이 춤과 노래를 부르며 객석을 돌았다. 남자 가수가 우리 일행을 일으켜 세워 함께 즉석에서 춤을 추기도 하며 관객과 함께하는 흥겨운 마당을 연출하였다.
7
한나라 무제가 기원전 111년, 고조선을 정복하고 4군을 설치하기 3년 전에 남월(南越)을 정복하고 그 영토에 7개 군을 설치하고 군 아래에 현을 두었다. 그 이듬해에 하이난 섬에 2개 군이 추가로 설치되었고, 이 9군을 감독하는 교지자사부(交趾刺史部)가 구성되었다. 7개 군 중 4개 군은 광둥과 광시 지방에, 3개 군은 베트남에 설치되었다. 베트남에 설치된 3개 군은 자 오찌(交趾), 끄우 찐(九眞), 녓 남(日南)이다. 자우 찌와 끄우 쩐은 남월이 설치했던 지역과 같고, 녓 남은 끄우 쩐의 남쪽으로 베트남의 중북부에 해당한다. 녓 남은 다낭을 비롯하여 우리가 여행하고 있는 지역에 해당한다.
아오자이 공연장에서 나와 간 곳은 용다리 부근의 야시장이었다. 고개를 드니 동녘 하늘에는 섣달 열이레 달이 떠올라 있었다. 이방에서 쳐다보는 달은 나그네를 향수에 젖게 한다. 신라 혜초 스님도 바닷길로 인도로 가는 길에 기러기가 없는 이곳 베트남의 일남(日南)에서 밝은 달을 쳐다보며 너울거리며 떠가는 구름 편에 고국 계림으로 편지를 보냈지만, 세찬 바람 소리에 답장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시를 읊었다.
시장에는 천막을 치고 만든 가게들이 길게 이어져 있고 사람들이 복닥거렸다. 사람들은 주로 망고가 들어가지 않은 망고맛 젤리 사탕을 구입하였다. 나는 다리가 불편하여 시장 중간의 어느 건물 앞에 앉았다가 버스가 기다리는 후문으로 혼자서 먼저 빠져 나왔다.
버스 옆에서 기다리며 곁에 있는 안복사(安福寺, chua An Phuoc)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대웅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석가여래상과 관세음보살상 등을 모신 대웅전 앞 마당에는 작은 종을 걸어놓은 종정, 백색 대리석 관세음보살입상이 있었다. 대웅전 옆의 종무소로 보이는 벽에 “堪妙(감묘)”라는 달필의 큰 붓글씨가 들은 액자가 보였다. “順化普光寺本師並兄弟, 堪妙, 沱城安福寺住持補任之禮, 佛曆2561 丁酉 春2017-감묘(堪妙-빼어난 아름다움), 후에의 보광사(普光寺) 본사(本師) 및 사형(師兄)과 사제(師弟)들이, 다낭 안복사 주지 취임의 예식에 선물로 드림, 불력(佛曆) 2561년 정유년 봄 2017년” 액자 사진을 촬영하러 가까이로 다가서니 주지로 보이는 남자가 실내에서 급히 나오더니 화가 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손짓으로 액자를 가리키니 그제야 표정이 누그러지고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며 물었다.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코리아!”라고 대꾸하였다. 종무소 앞에는 앞쪽 머리카락만 남기고 깎은 아이가 엄마를 돕고, 엄마는 한 중년의 여자 신자로부터 기도금을 받으며 장부에 기록하고 있었다.
시어머니로 보이는 노파가 나타나 나를 따라 들어와 사진 촬영을 하는 초록별, 박원섭교장샘 그리고 나에게 무턱대고 기도비를 접수하거나 복전함에 시주하라는 몸짓을 하며 소매를 잡았다. 베트남 돈이 없는 나는 지갑에서 레왕조의 타인 똥(聖宗)과 비견되는 조선왕조의 세종대왕님이 들어 있는 지폐 한 장을 복전함에 넣었다. 불청객이 하마터면 남의 나라 낯선 절에서 봉변을 당할 뻔하였다. 나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사찰의 삼문 중 가운데 큰 문의 문미에는 “安福寺(안복사)”, 왼쪽 문의 문미에는 “慈悲(자비)”, 오른쪽 문의 문미에는 “智慧(지혜)”라는 편액이 붙어 있었다. 가운데 문의 기둥에는 “安於仁樂種慈根道由玆進, 福在智 欣持淨戒 功謝此成-어짐에 안주하여 즐겨 자비의 뿌리를 심으니 도는 이에서 나아가고, 복은 지혜에 있으니 흔쾌히 청정한 계율을 지니니 공덕은 이에서 절로 이루어지네.”이라는, 좌우 문의 기둥에는 “安天立道場 弘法利生酬聖德, 海地築梵宇 接僧度衆報鴻-편안한 세월에 도량을 세워 법을 널리 펴고 중생을 이롭게 하여 부처님의 은덕을 갚고, 바닷가 땅에 절을 지어서 스님들을 맞이하고 중생을 건지니 과보가 크네.”이라는 대련이 쓰여 있었다.
안복사에서 나와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향하는데, 금성홍기와 공산당기 아래에 수염이 있는 마른 얼굴에 인민복을 입고 검은 샌들을 신고서 오른손을 들고 웃으며 연꽃이 피어난 길을 걷는 호치민 사진이 들은 큰 현수막이 내걸린 건물이 있었다. 간판을 보니 그 지역 인민위원회 건물이었다. 강을 보니 달 아래 2층의 유람선이 가고 있었다.
강변에 주차해 있는 버스를 타고 간 곳은 유람선 선착장이었다. 다낭에 온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주말에 하는 용다리의 용이 불과 물을 뿜어내는 쇼를 보러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수십 대의 관광버스가 주차하고 있었다. 가이드를 따라 한참을 가서 배에 탔다. 차가운 강바람 속에서 미선 참파 유적에서 본 압사라춤 무희 한 사람이 올라오더니 관광객들 앞에서 외로운 춤사위를 보였다. 승객들 앞의 테이블에는 수박 조각을 담은 접시가 올려졌다. 춤 공연이 끝나고 사진을 함께 촬영하자고 손짓하였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무희는 퇴장했다.
드디어 우리 배도 강물 위로 나아가더니 강 가운데에서 멈췄다. 용다리의 황룡이 불꽃을 몇 차례 내뿜더니 다시 물을 분사했다. 한참 진행되는 쇼를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보았다. 옆자리에 앉은 옥순샘과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용다리 쇼가 끝나고 밤의 강물 위로 운행하는 유람선이 용다리를 지나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강변의 빌딩 외벽에 레이저로 금성홍기를 비추어 보이더니, ‘Tet, Happy New Year 2024’라는 글자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