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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파도가 지나갔습니다. 이제 다시 쓸려간 자리를 다듬고 정리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바로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있나요? 그냥 달라지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변화가 없는 것이지요.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리네 의식입니다. 간절히 바랐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반대편에게는 안도의 숨을 쉬게 해주었다고나 할까요? 다시 임기를 시작하며 조금 더 자신감을 얻었을 것입니다. 기대했던 쪽은 실망만 안고 여태 해오던 방식에 조금 변화를 만들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라면 변화를 만들기는 해야 할 것입니다. 이대로 버틴다면 희망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실제적 변화는 없어도 의식과 태도의 변화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돌맹이가 금방 모래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부서져 내리기를 바랍니다. 길을 막고 있는 바위덩이에서 지나갈 수 있는 터널이라도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뭐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버틸 수도 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 남아있습니다. 누가 더 끈질기게 버틸 것인지의 싸움을 좀 더 보며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저 힘없는 백성이 아플 뿐입니다. 이 권력이 지긋지긋해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의 질서라도 유지하려면 그나마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균형 있는 대치로 버티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백성이 원하는 사람은 싸움 잘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일 잘하는 일꾼이라는 사실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몇 년 후 판가름 나겠지요.
달라진 것 없습니다. 물가는 여전히 그 자리입니다. 점심 한 끼 먹으려 해도 배춧잎 하나 정도는 가져야 합니다. 참고 버텨야지요.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건강하게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힘을 냅시다. ㅎㅎ
2024년 4월 13일 김종우 목사 드림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창세기 24 : 67)
<왓츠 러브>
통상 결혼은 두 남녀가 어떻게든 접촉하여 서로를 좀 알고 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상례입니다. 물론 대부분 서로 사랑하기에 결혼이라는 합의점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그렇게 서로 좋아해서 결혼을 한다 해도 십년 이십 년 그 이상으로 길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야 그럼에도 서로 참고 버티며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몇 년이 되든 서로 마음이 틀어지면 언제고 헤어집니다. 결혼을 처음부터 헤어지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서로 적응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깁니다. 참다못하여 아픔을 감내하고 이혼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혹 부부 사이에 자식이라도 있다면 조금 더 까다로워집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특히 양반집 자녀들은 본인의 의사보다 부모의 의사가 더 중했고 가문을 잇는다는 명분이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든 신랑이든 첫날밤에 비로소 보게 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남녀가 마주볼 일도 없고 그것이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가문을 이어가는 일이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자기 집안을 이어갈 아들을 낳아줄 만한 규수를 찾으면 그만입니다. 본인들의 사랑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도 남녀의 사랑이 나타날 수 있는 기회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도 생기고 그런 이야기를 남몰래 들으려고도 하고 그것을 책으로도 만들었습니다. 사랑 이야기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기입니다.
전혀 모르던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하여 한평생 해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역사이고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남녀가 그맘때 꿈꾸어보는 동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문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라면 이루기 어려운 꿈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환경을 이겨내고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더욱 사람들을 감동시켜줍니다. 또한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도 비슷한 꿈을 심어줍니다. 꿈과 현실은 다릅니다. 그리고 실제 사랑을 해본 사람은 그 꿀 같은 맛과 더불어 쓴 맛도 알게 됩니다. 대화 속에 나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평화를 잃어.’ 경험해본 사람은 압니다. 좀 과격한 말이라 생각되지만 일리도 있습니다. ‘사랑은 위험한 정신질환’이랍니다.
처음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문화를 따랐습니다. 아마도‘카즈’가 결혼을 결정한 것은 그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도 보기는 했답니다. 화면으로. 세상이 발전하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제는 화면으로도 통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짧게 교제하고 결혼으로 들어갑니다. 소꿉친구였던 ‘조이’가 따라갑니다. 마침 결혼을 주제로 한 기록영화를 만들려던 참이었으니 때가 잘 맞았습니다. 영국에서 파키스탄으로 함께 갑니다. 그리고 카즈의 약혼녀와 가족들을 만납니다. 조이가 궁금해 한 것은 이런 결혼이 가능한가? 행복할까? 어떻게 이루어지는 결혼문화인가? 등등입니다. 그리고 이 결혼의 당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만족해하고 행복할까, 하는 것이 궁급합니다.
양가 가족들은 모두 기뻐하고 만족해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결혼 축제가 열립니다. 대단합니다. 아마도 기본 사흘의 과정이 있는가봅니다. 결혼식 당일을 기준으로 그 전날의 행사가 있고 그 다음날의 행사가 있습니다. 나름의 그 날의 이름들이 있기도 합니다. 아무튼 사흘에 걸친 큰 축제입니다. 조이는 가족 중 딸이 자기 사랑을 좇아 가족을 떠난 이야기도 듣습니다. 더구나 종교적으로 다르기에 집안 전체가 반대하였고 그 맨 앞에 가장 어른인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쫓아낸 셈이지요. 그들 문화에서 우선은 종교입니다. 타 종교인과의 결혼은 결납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집과 사랑하던 가족을 떠나야 했습니다. 근래에는 손자까지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아직도 존재하는 폐쇄된 사회를 보여줍니다. 그래도 변화를 막지는 못합니다. 특히 젊은이들 세계는 달라집니다. 세계를 보고 들으며 의식과 문화가 변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노인들의 시대는 가고 있습니다. 세대는 바뀔 것입니다. 시대의 주인공들이 바뀌는 것입니다. 잔치가 진행되는 가운데 조이는 카즈의 약혼녀가 몰래 다른 남자와 통화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사이 같습니다. 그런데 강제결혼을 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카즈는 행복하다고 합니다. 물론 그 앞에서 약혼녀도 그렇다고 긍정합니다. 조이의 보기에는 전혀 아닌듯한데 말입니다. 또 한편 조이 자신이 혼란에 빠집니다. 카즈와 오랜 시간 함께 하였기에 말이지요.
관습, 의식, 문화, 그리고 종교 등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것들과 다르게 가고자 할 때가 있습니다. 그 강력한 힘이 바로 사랑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족을 떠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당사자는 때로 목숨을 거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프고 힘듭니다. 가능하면 양편이 이해하고 서로 가까이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말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고집, 선입관, 전통과 관습 등등. 우리는 왜 매여서 살아야 할까요? ‘척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 행복일 수 있습니다. 영화 ‘왓츠 러브’(What's Love Got to Do with It?)를 보았습니다.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감옥에 두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바라보는 곳이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늘 쇠창살만 보며 불평과 욕지거리만 내뱉고 살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쇠창살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언제고 이 감옥에서 나가 저 하늘을 맘껏 보리라 하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같은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바라보는 것이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는 대로 만들어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누차 말씀 드리지만 지나온 시간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다가올 미래를 바꾸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며 사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헬렌 켈러 여사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고를 가지고 자랐습니다. 먼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과 용기를 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 가운데 ‘태양을 바라보고 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태양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자기 그림자를 볼 수 없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어도 그림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을 향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세상의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것만 바라보며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어두운 과거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밝은 미래를 향해 나갑니다.
위대한 성악가의 꿈을 가진 소녀가 뉴욕 맨하탄에서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끝나고 나자 음악평론가들이 하나같이 부정적으로 혹평을 해댔습니다. 꼭 남자 목소리 같다. 무슨 목소리가 저 모양이야?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가지고 성악을 할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일까? 음악, 더구나 성악을 할 사람은 결코 아니다 등등 하나같이 비관적이었습니다. 이 소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딸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흑인이니까 맘대로 떠들었을 거야. 엄마는 네 재능을 믿는다. 너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세계적인 성악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단다.’ 이 소녀는 절망을 딛고 일어나 미래의 꿈을 꾸며 최선을 다해 훈련을 쌓았습니다. 과연 그 소녀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바로 마리아 앤더슨의 이야기입니다. 흑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이고 또 한 사람은 바로 이 마리아 앤더슨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을 향한 꿈이 있으면 현재의 고난은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 실례입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창 12 : 1) 이사 다니기 쉽지 않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가야 하는 땅은 알지도 못하는 곳입니다. 이때의 상황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 11 :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사할 때는 옮겨야 할 목적지가 있습니다. 사전에 다 보고 살 만한가 살펴보고 결정하고 그리고 계약을 하고 날짜를 정하여 이사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런 과정이 없었습니다. 가라. 예.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리고 짐 싸가지고 떠난 것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앞에 이런 말이 토로 붙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간 것입니다.
1. 우리 소망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가라”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과거로 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로 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가라. 우리는 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미래를 정확히 바라보십니다. 창 15 :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그 자손의 사백 년 앞까지 보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인간의 전 역사를 한눈에 보고 계십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4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우리는 그 후 과연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의 앞과 뒤를 다 보고 계시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인생의 처음과 나중을 다 통찰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오해를 받아 로마군에 잡혀 죄수가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넘겨지면 재판도 없이 개죽음 당할 것이 뻔하기에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합니다. 그래서 로마로 호송을 당하게 됩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지중해 가운데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납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폭풍입니다. 죄수든 간수든 군인이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 죽을 판입니다. 해도 못보고 풍랑 이는 바다에서 14일,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살 소망도 잃었습니다.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외칩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의 몸입니다. 죄수인 그가 사람들 앞에서 뭐라 외칩니까? 행 27 : 21 - 25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연 배는 부서지고 침몰하였지만 한 사람도 낙오 없이 다 살아남습니다. 바울의 예언이 어떻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까? 하나님이 계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앞을 내다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앞길을 준비하고 인도해주십니다.
2. 고난과 역경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길이 어떠했습니까? 평탄하고 순탄한 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나그네 인생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이번에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서 보겠습니다. 행 7 : 5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 평생에 가져본 땅이 있다면 자기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내기 위해 헷 사람에게서 산 막벨라 굴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결혼하는 날부터 시작됩니다. 무슨 꿈입니까? 내 집 마련의 꿈입니다. 좀 여유가 생기면 땅도 가져봤으면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부자가 되었어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 한 뙤기 안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5절 하반부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입니다.
때로는 애굽으로 또 때로는 불레셋 땅으로 아브라함은 어디 정착하여 내 집 짓고 살지를 못했습니다. 행인이요 나그네로서 어쩌면 외롭고 힘든 인생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그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뚜기 아시지요? 신앙인은 오뚜기와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넘어진다 해도 다시 일어납니다. 잠 24 : 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아멘! 우리라고 안 넘어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도 넘어집니다. 때로 낙심하고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모압과 암몬 그리고 에돔 사람들이 연합하여 유다를 쳐들어 왔습니다. 어마어마한 대군 앞에 온 백성이 겁에 질려 있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그 때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대하 20 : 12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그 때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15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를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7절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아멘! 그리하여 여호사밧 왕이 백성들 앞에 나아가 외칩니다. 대하 20 : 20 “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는 고난과 역경 중에도 반드시 일어납니다. 능력의 주께서 붙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까?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인간의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거나 의심하는 것입니다. 왜 불행입니까? 그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의 죄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는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가장 큰 불행입니다. 의심하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롬 14 :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아브라함은 도저히 불가능한 조건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응답 등 보통 사람이 믿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그것들을 수용하고 믿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이라는 칭호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의처증이 많았는데 요즘은 의부증도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내를 또는 남편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하니까 더 극성인 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요즘 사람들 대부분 핸드폰을 가지고 다닙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것입니다. 왜요? 어디 있느냐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사람도 괴롭지만 당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믿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갑니까? 24 시간 붙어 다녀야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일합니까? 설령 같이 가게를 운영한다 해도 화장실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매일 당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못 견딥니다. 의심은 병입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은 신앙이 병들었다는 말입니다. 약 1 : 6 - 8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의심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할 때도 믿고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약속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 --- 해라 그리하면’ 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나옵니다. 말씀대로 행하면 그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승리의 소망을 가졌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어라 말씀하셨지요? 수 1 : 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수아는 그 말씀, 그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가나안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4. 우리의 소망 그것은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어도 아직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없이 나그네 생활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 약속하신 대로 주실 것을 믿음 중에 소망합니다. 우리가 환난과 역경 중에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그 능력, 그 보호하심과 그 인도하심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 39 :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아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오늘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다 신비의 열쇠를 하나씩 주셨습니다. 신자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가지고만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요.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무용지물입니다. 집에 아무리 기막힌 냉장고가 있다 해도 사용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스터키라고 합니다. 우리 앞에 큰 장애물이 있습니까? 이 열쇠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열쇠를 가리켜 흔히 천국 창고를 여는 열쇠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여기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응답이 때로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원칙을 알면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장애물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늪을 지나갈 때 구덩이를 다 제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적들과 싸울 때 적들을 다 없이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가령 우리 앞에 커다란 바위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뚫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뭐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 이 바위를 치워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위를 치우십니까? 아닙니다. 치우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 바위를 지나갑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바꾸시는 경우도 때로는 있지만 대부분 환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꾸십니다. 세상은 나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살도록 섭리하십니다. 나 하나만을 위하여 함부로 바꾸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기도하면 그 환경을 극복해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어도 처음에는 살만한 땅 한 평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소망이 닥쳐오는 어려움들을 이겨나가게 해주었습니다. 앞길을 예비하고 미래를 보장하며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내일을 향한 소망을 간직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과 소망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약속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함께 하시고 이루신 하나님, 우리에게서도 함께 하시고 이루실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을 만드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다시 만들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시작으로 하나님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마귀가 쥐고 있는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처음 아담에게 하신 복이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창 1 : 27 - 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아담 이후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일단 죄 값을 치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공로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죄악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의 원인인 마귀를 이겨야 하는 숙제가 남은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우리는 죄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모시고 천국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첫 아담으로 이루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초림으로 오셔서 일단 죄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마귀와 그 소속한 자들을 잡아 지옥으로 쫓아내고 하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천국이 땅으로 내려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그 소망을 가지고 신앙하고 있습니다. 계 21 : 2 - 3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천국입니다. 이곳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땅입니다. 그 때 사망도 없어지고 바라던 영생 천국을 살게 됩니다.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소망을 가지고 이 땅을 그리며 신앙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약속을 붙잡고 따라갑시다. 우리 모두 그 땅으로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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