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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최승호, ‘반야왕거미’의 시학
세계에 붙지만 말고 세계를 타라
2011-05-20 백원기
▲ 최승호 시인
춘천 출생의 최승호(1954-)는 춘천교육대학을 졸업하고, 1977년 〈비발디〉로 《현대시학》지의 추천을 받고 시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대설주의보》,《고슴도치의 마을》,《진흙소를 타고》,《세속도시의 즐거움》,《달맞이꽃에 대한 명상》,《반딧불 보호구역》,《그로테스크》,《모래인간》,《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아메바》등 다수가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최승호는 초기 시에서 도시문명의 폐해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조화롭고 유기적인 관련 속에 삶에 대한 통찰을 담아내고 있다. 강원도 사북의 오지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던 그에게 까만 광산과 광부, 까만 절망이 가득한 곳으로 보였던 그곳의 모든 것이 그의 중요한 시적 소재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의 교사로 낙인찍혀 영혼의 골짜기라는 그 첩첩산중에서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상경했던 그는 그곳에서 썼던 시 <대설주의보>로 198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마을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이 시는 뛰어난 사실적 관찰로, 그 관찰의 대상은 극도로 막혀 있는 삶의 암울한 현실상황이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만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레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밀려드는 눈,
다투어 몰려드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대설주의보> 전문
첩첩산중의 어느 두메산골에 한겨울 폭설이 내리고, 그로인해 꼼짝할 수 없는 어떤 암담한 상황이 '백색의 계엄령’으로 묘출되고 있다. 군부독재로 온통 사회가 꽁꽁 얼어붙어 있던 1980년대 초, 이 시는 당시 독자들의 기억 속에 '백색의 계엄령'으로 강하게 각인되었다. 시에 나타난 광활하고 막막한 장면의 감동, 그리고 충만한 긴장감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생생하게 떠 올려 준다. ‘눈보라’와 ‘계엄령’은 당시의 정치현실과 관련하여, 폭력과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적 외연을 지닌 기표로 읽혀진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눈보라 속을 날아가는 굴뚝새의 작은 모습은, 폭압적 군부독재(눈보라) 속으로 항거하는 민중(굴뚝새)의 왜소한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
닫힌 공간과 달리 최승호는 긍정적 의미를 탐구하는 열린 공간을 통해 도시의 생명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가 발견한 ‘공터’는 막혀 있는 세계의 ‘숨구멍’과 같은 느낌을 준다. 욕망이 지배하는 현대적 삶의 황폐함에 대한 반성으로 공터가 이루고 있는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삶의 공간을 제시하면서, 그는 〈공터〉에서 담담하고 치밀한 시선으로 고요하고 작은 공간에서 자연의 변화와 생성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포착해 낸다.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로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공터〉전문
공터는 시의 배경이자 자연에 대한 은유로서 작용하고 있다. 공터는 현실과는 대척점에 있는 자족적이고 유기적인 삶의 공간이며, 그 공간의 만물은 '소유'가 아닌 '존재'로서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그동안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정복자로 무차별적으로 자연을 훼손하며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면, 자연의 공터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를 통해 자연의 조화를 이룩해 낸다. 시인은 도시의 공간과 육체에 균열을 가져오는 것이 소음과 병든 육체라면, 소음과 병 자체에 균열을 일으켜 다시 원초적 낙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고요함’이라는 아이러니함을 보여 주고 있다. 닫힌 공간과 달리 공터의 열린 공간은 내 것과 네 것이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의 공간이다. 세심한 관찰의 눈이 공터 속에 ‘고요’가 있음을 발견해 내고서야 공터에는 ‘고요’가 있게 되었다. 노자가 우주의 본원인 도는 고요히 머물러 있지만, 도가 발생시킨 만물은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보는 것은 도가 비록 만물을 생육하지만 만물을 주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자족적인 생명의 공간으로서의 자연을 그린 이 시는 노장적 자연관을 가장 함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또한, 최승호는 <고슴도치 마을>에서 현대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이 표제시집에서 시인은 도시문명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 상실, 사람들 간의 불신과 소통의 단절로 인한 소외 등을 고발하고 있다. 즉 도시 문명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고슴도치의 마을 사람들의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삶이 그려지고 있다.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평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가는 아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은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 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 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밤엔 莊子를 읽으리라
-〈고슴도치 마을〉전문
참담한 현실적인 삶의 실상을 응시하면서 스스로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시인의 역설의 인식이 드러나 있다. 1연에서는 ‘나비’라는 자유와 순수, 평화라는 이미지를 제시하여 산간벽지 사람들의 순박한 삶과 정직하고 성실한 삶이 묘파되고 있다. 이 마을은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아름답게 살아가는 공간이다. 2연은 ‘산사태, 곰, 산불’ 등의 재난이나 공포를 통해 마을의 평화가 깨어졌음을 표출하고 있다. ‘산사태, 곰, 산불’ 등의 이미지는 인간의 도시문명을 상징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유는 4연의 자연사상을 중시하는 ‘장자’라는 시어를 통해 재확인된다. 3연에서는 도시문명 속에서 평화로운 사람들의 마을이 고슴도치의 마을로 변해가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고 자신의 몸에 가시를 두른 채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서로의 몸이 가시이기에 그들은 서로를 불신하며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때문에 마지막 연에서 마을 사람들은 자기의 내면의 돌담을 쌓고 그 속에 파묻혀 상처의 현실과 공포의 현실을 도피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장자를 읽으리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자연의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혹여 우리 또한 현대문명의 사회에서 고슴도치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나아가 최승호는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빚어진 물질문명은 각종 공해문제를 야기하고 결국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진단한다. 그 종말론적인 절망은 〈공장지대〉에서 정점을 이룬다. 고도로 산업화 된 문명세계를 상징하는 공장지대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되고 있지만, 그 배면에는 한 산모가 ‘무뇌아’를 낳은 실제 사건을 통해 물질문명의 폐해에 대한 고발이 묘파되고 있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 종일 뽑아댄다.
-〈공장지대〉전문
생태환경이 오염된 공장지대에 사는 산모가 ‘무뇌아’를 낳은 사건은 참으로 끔찍한 관찰이고, 그로테스크한 시적 묘출이 아닐 수 없다. 몸과 공장지대는 분명한 이항대립을 보인다. 그 안에 젖/허연 폐수, 탯줄/비닐끈, 아이/고무인형, 남성/굴뚝이라는 불행의 이항대립의 요소들이 들어 있고, 이러한 부조화의 대립요소들의 결합으로 몸은 굴뚝과 간통한 형국이 되고, 그 결과 산모는 무뇌아를 낳게 되며, 젖은 허연 폐수처럼 흐른다. 여기에는 머지않아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서고 몸은 공장지대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몸의 미래, 인류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시인의 예리한 생태환경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모두는 인간 몸 안의 욕망에서 나온 것임을 시인은 간파한다. 뿐만 아니라 ‘무뇌아’를 낳고 머리털을 뽑아내고 있는 치매 상태의 산모에서 우리는 인간이 저질러 놓은 오염으로 받는 현실의 과보가 섬뜩하리만큼 날카로운 직관과 관찰로 묘파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관찰자적 화자의 시선은 제어장치가 없는 고도성장의 결말은 이처럼 비극적임을 보여 준다.
시인의 여행은 도시의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의미한다. 도시는 최승호의 시에서 대개 삶의 생기와 생명의 에너지를 억압하는 장소로 나타난다. 이 도시 탈주를 통해 대면하는 것이 자연인데, 이 자연은 자연뿐만 아니라 내면의 자연 즉, 억압되지 않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마음을 포함한다. 자연과의 대면이 낳은, 무한 자연과 자유로운 정신의 무한을 노래한 가장 아름다운 시중의 하나가 〈텔레비전〉이다.
하늘이라는 무한 화면에는
구름의 드라마,
늘 실시간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네
연출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수줍은지
모습 드러내지 않네
지난 여름의 주인공은
태풍 루사가 아니었을까
루사는 비석과 무덤들을 무너뜨렸고
오랜만에 뼈들은 진흙더미에서 해방되어
강물로 뛰어들었네
기를 쓰며 울어대던 말매미들이
모두 입적한 가을
붉은 단풍이 고산 지대로부터 내려오고
나무들은 벌거벗을 준비를 하네
그들은 어느 산등성이를 걷고 있을까
툭 트인 암자 툇마루에서 쉬고 있을까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지
산 좋아하는 이들을 마지못해 따라나서도
계곡에서 그냥 혼자 어슬렁거리고 싶네
누가 참 염치도 없이 내다버렸네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바위투성이 개울 한 구석에 처박혀 있네
텅 빈 텔레비전에서는
쉬임없이
서늘한 가을물이 흘러가네
-〈텔레비전〉전문
확 트인 자연 속에서 부단히 변화하는 생명들과, 그 품안에 어슬렁거리는 인간과, 문명의 잔해인 고물 텔레비전을 병치시킴으로써 자연의 무한함을 일깨워 주는 시편이다. 특히 다양한 사물을 품에 안고 끊임없는 생성을 거듭하는 우주적 자연을 펼쳐 보이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영상기계’와 수명을 다해 바위투성이 개울가에 처박혀 있는 껍데기뿐인 텔레비전의 병치는 절묘하다. 시적 화자는 친구들과 등산 중이며, 하늘이 펼쳐 보이는 구름의 드라마를 보며 지난해 루사가 보여준 드라마의 의미를 떠 올린다. 태풍으로 무덤 속의 뼈들이 진흙더미를 뚫고 강물에 뛰어들었던 일, 눈앞의 계절의 순환과 말매미의 입적, 잎을 떨구는 나뭇잎들, 개울가 가을물 속에 잠긴 껍데기만 남은 고물 텔레비전(인공적이고 유한한 영상기계) 등은 모두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는 대자연이 연출하는 드라마의 풍경들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자신의 눈을 빌어 다만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보여줄 뿐, 마음속에 어떤 안쓰러움이나 자의식의 흔적 같은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최승호는 후기 시에 들어오면서 전기 시에서 볼 수 없었던 화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드러내 보인다. 즉 물질문명이 낳은 도시의 한 풍경을 바라보며, 비정하고 비인간화 된 세계에 대하여 깊은 비애감을 느끼고, 이것이 참다운 생산력을 갖지 못한 황폐한 문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아마존 수족관속 열대어들처럼 물화되어 버린 인간과 세계를,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다는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한다.
아마존 수족관 열대어들이
유리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
세검정 길,
장어구이집 창문에서 연기가 나고
아스팔트에서 고무 탄내가 난다.
열난 기계들이 길을 끓이면서
질주하는 여름밤
상품들은 덩굴져 자라나며 색색이 종이꽃을 피우고 있고
철근은 밀림, 간판은 열대지만
아마존 강은 여기서 아득히 멀어
열대어들은 수족관 속에서 목마르다.
변기 같은 귓바퀴에 소음 부엉거리는
여름밤
열대어들에게 시를 선물하니
노란 달이 아마존 강물 속에 향기롭게 출렁이고
아마존 강변에 후리지아 꽃들이 만발했다.
- 〈아마존 수족관〉전문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는 아마존의 세계이다.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대로 만들어 낸 세계는 진정한 아마존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존 수족관일 뿐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대로 만들어낸 콘크리트 건물들(철근)을 아마존의 밀림으로 착각하고 수없이 늘어선 현란한 상업적인 간판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을 아마존의 열대 기후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것들이 그들을 만족시켜 주질 못한다. 야생의 생명성을 지닌 진짜 아마존 강은 ‘아득히 멀’리 있기 때문이다. 아마존 수족관에 갇히기 전의 열대어와 물화되기 전의 인간은 모두 시와 영혼을 가진 고귀한 존재였다. 때문에 그들에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시의 생명력이다. 기계적인 무감각적인 것이 아닌 따뜻한 인간의 혼인 것이다. 따라서 시를 선물 받은 세계와 인간은, ‘아마존 강물 속에’ 비친 ‘노란 달’처럼 향기롭게 출렁거릴 것이고, 아마존의 세계에는 모든 생명체가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그 속에서 향기롭게 생명력을 발휘하는 후리지아 꽃들이 만발할 것임을 시인은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문명의 비판을 거쳐 최승호는 최근 선적 직관과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더 큰 대승적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 불교적 함의를 지닌 이미지와 상징들은 선의 활달함을 내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매개물이 변기와 자루이다. 자루는 변기와 마찬가지로 쓰레기와 똥 등을 담는 그릇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욕망을 섭취하지만 밑이 터져 그 쓰레기들이 흩어져 버리는 ‘자루’와 같은 삶을 담아낸다. 시인의 ‘자루’ 시리즈의 시편은 ‘변기’의 이미지에 비해, 그 해소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 번째 자루〉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백지를 보여 줌으로써 욕망의 해소로 스스로 우주가 되어버린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다.
자루의 밑이 터지면서 쓰레기들이 흩어진다, 시원하다.
홀가분한 자루, 퀴퀴하게 쌓여서 썩던 것들이
묵은 것들이 저렇게 잡다하게 많았다니 믿기 어렵다.
위에도 큰 구멍, 밑에도 큰 구멍, 허공이 내 안에
있었구나. 껍데기를 던지면 바로 내가 큰 허공이지
-〈세 번째 자루〉전문
시인은 사람이 곧 자루임을 말하고 있다. 거기에 무엇을 담느냐의 여부는 각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루에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담는다. 그것은 곧 쓰레기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자루를 터 버림으로써 우주에 닿는 방법을 모색한다. 잡다한 ‘묵은 것들’은 얼룩진 것들로 겹겹이 쌓인 일상의 때, 욕망이 만들어 낸 온갖 통념들과 물질적인 것들 일체를 가리킨다. 자루를 터 버리는 것은 무욕이 경지를 말하고, 무욕은 곧 무위에 이른다. 실제로, 그 ‘자루’는 한없이 물질을 담으려는 지칠 줄 모르는 욕구에도 불구하고 허공처럼 비어 있다. 그 ‘자루’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허공과 한 몸이다. 이처럼 육신을 자루 안에 담긴 오물과 부패한 쓰레기로 묘사하는 것은 다분히 불교적 발상이다. ‘구멍 난 육신’이라는 껍데기를 홀가분하게 내 던지는 것은 대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망이다. 그 갈망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거쳐 ‘허공’에 이르면서 진정한 ‘공’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시인은 깊이 있는 성찰로 우리 주변의 수많은 생물들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노래한다. 우리 주변에 숨 쉬고 있는 나비, 달팽이, 새, 강아지, 지렁이, 벌 등 생태와 환경을 꿰뚫어 보며, 생태계 현장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따뜻하게 그려낸다. 그는 〈나비〉에서 모든 동 식물들과 동일한 생명성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의 생명성을 부정하고 있는지를, 생명의 속성 그 자체로서의 나비의 행위와 속성을 통해 말하고 있다.
등에 짐짝을 짊어지고 날거나
헬리곱터처럼 짐을 매달고 날아가는 나비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비는 가벼운 몸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몸 하나가 전 재산이다
그리고 무소유이다
무소유의 가벼움으로 그는 날아다닌다
꽃들은 그의 주막이요
나뭇잎은 비를 피할 그의 잠자리다
그의 생은 훨훨 나는 춤이요
춤이 끝남은 그의 죽음이다
그는 늙어 죽으면서 바라는 것이 없다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자유롭다
-〈나비〉전문
나비는 ‘몸 하나가 전 재산이다. 그리고 무소속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 시인은 무소유의 가벼움으로 날아다니는 나비를 통해 너무나 무거운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 삶의 방식에 대한 강한 충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나비는 ‘등에 짐짝’을 지지 않고 ‘매달고’ 다니지도 않으며, ‘가벼 운 몸 하나’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머무른다. 그는 평생 춤추며 죽을 때조차도 자유롭게 죽는다. 죽으면서도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다. 그야말로 ‘무소유, 무소속’의 삶이다. 반면, 인간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그것을 과시한다. 나비가 아무 것에도 소속하지 않는 반면,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룹을 형성하여 끊임없이 대립한다. 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탐욕스런 인간은 나비처럼 가볍게 이동할 수도 없고, 늙어서 죽을 때조차도 자신이 소유한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여기에서 무소유의 가벼움이 강조되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나비처럼 무소유의 가벼움으로 날아가는 생명의 본성에 대한 회복이 역설되고 있다.
최승호의 시세계는 뚜렷이 불교 또는 선시를 표방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사유의 시적 세계는 오늘날 세속도시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욕망의 극복, 또는 선적 초월과 극복을 꿈꾸고 지향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그런 시인에게 자연의 변화, 생성의 이치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소재가 ‘눈사람’이다. 시인은 <눈사람의 길>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고정된 실체가 없는 눈사람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공’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소재임을 명징하게 보여 준다.
눈사람이 녹는다는 것은
눈사람이 불탄다는 것,
불탄다는 것은
눈사람이 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
재가 물이다
하얀 재
더 희어질 수 없는 재가 물이다
시냇물
하얀 재 흐른다
눈사람들이 둥둥둥 물북을 치며
강으로 바다로 은하수로 흘러간다
흘러간다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
돌아간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
-〈눈사람의 길〉전문
눈사람은 경계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상징물이다. 육신의 해탈이 죽음의 재로써 이루어졌다면, 그 재의 형상마저 벗어나 우주를 자유롭게 순환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꿈은 눈사람이 되어 녹는 것이다. 눈사람은 변형과 흐름 그 자체인 삶이다. 그러나 그 삶이란, 인생을 넘어 우주라는 무정형의 허공을 향해 흘러간다. 눈사람이 녹아 물이 되는 것은 물체가 불타 재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고, 이 물과 재는 어디론가 흘러들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계속 변화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그 이치가 곧 연기이며 공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자신의 몸 자체만으로 존재하면서 소멸하고 다시 그 몸 자체로 돌아오는 눈사람을 통해서 시인은 걸림 없이 순환하는 생명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무명은 또 얼마나 질긴지/ 돌 비누 같은 經으로 문질러도/ 무명에 거품 일지 않는다”(〈때밀이 수건〉)고 말하는 최승호는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을 대립시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 예는 지혜로운 왕거미를 통해 욕망의 그물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결국 자신이 만든 제도 속에 스스로 속박되어버린 것에 비판을 가하며 조롱하는데 잘 드러난다. 〈반야왕거미〉에는 욕망에 얽매인 인간과는 달리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거미 왕이 등장한다. 시인은 ‘하늘의 그물’을 짜는 조물주에 비유되는 반야왕거미가 자유자재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세계에 '붙기'보다는 세계를 '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너는 조물주를 흉내낸다
너는 게워낸다 세계를
펼치고 그 위를 걸어간다
망가진 세계를 너는 기울 줄도 알지
다 낡아버린 세계는
우적우적 먹어버리지
제가 친 그물에는 절대로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한 왕
걸려 있는 것은 찐득한 인간들이다
엉겨붙어 신음하며 허우적거리는
불쌍한 인간들을 보며
반야왕거미는 말한다
세계에 붙지만 말고 세계를 타라
이것이 비밀이다.
-〈반야왕거미〉전문
거미의 탁월한 창조력을 찬탄하는 것이 아니라 거미를 망가진 세계를 ‘기워 낸’ ‘조물주’로 격상함으로써 거미만도 못하게 살아가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고대 켈트인들은 거미줄을 모든 존재의 생명을 하나로 묶는 정교한 그물의 상징으로 믿었다 한다. 최승호 역시 거미를 ‘제가 친 그물에는 절대로 걸리지 않는/자유자재한 왕' 혹은 모든 법의 실상을 통찰하는 지혜의 왕을 일컫는 ‘반야왕거미’로 높여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복잡하게 뒤엉킨 관계사슬에 ‘엉켜 붙어 허우적거리는’ 인간들, 그리고 그 위에서 조금은 거만한 자세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반야왕거미의 모습으로 ‘높은’ 거미와 ‘낮은’ 사람이란 풍자적 뒤집기를 통해 숙명적인 비애감을 드러내 보인다. 그런데 자비로운 반야왕거미가 ‘찐득한 인간들’을 가엾이 여겨 ‘비밀’ 하나를 누설하는데, 그 핵심은 ‘세계에 붙지만 말고 세계를 타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삶의 그물에 악착같이 매달리지 말고 세상을 물 흐르듯 순리대로 살아 갈 것을 충고하는 것이다. 세계를 탈 수 있는 필요한 덕목은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유이며, 그러한 여유는 무위무욕의 경지에서 오는 것임을 시인은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모두는 그의 시 저변에 흐르는 불교적 선적 사유와 화엄적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다.
요컨대 최승호는 세속적 문명의 살풍경과 그것을 야기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욕망의 환각 상태를 집요하게 비판적으로 조망한다. 따라서 그의 시편들에서, 도시문명의 폐해와 훼손된 생태학적 전체성의 파편들은 역설적이게도 환상의 현실에 더 깊숙이 비집고 들어가는 그로테스크한 시적 담론을 묘출한다. 그 과정에서 시인은 현대사회의 반생태적인 상황을 지적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자각과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여기에 자유로운 삶은 탐욕과 무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무소유와 무아, 무상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시인의 삶의 통찰이 설파되고 있다.
- 백원기 /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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