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BUNGEE (Fall in love) - 오마이걸
재업입니당
퐁당 IN LO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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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 위로 퐁당, 번지 점프!
열여덟 황여주는 근래 들어 사랑타령만 했다.
사랑은 타이밍일까? 사랑은 운명일까? 사랑은 우연일까? 사랑은, 사랑은? 사랑은 뭘까?
제 쌍둥이 오빠인 황인준을 붙잡고 계속 같은 말만 했다. 인준아, 너는 사랑을 아니? 황인준은 그런 황여주의 질문에 무시로 일관했다. 그럼 황여주는 한참을 그 옆에서 사랑에 대한 본인의 지론을 펼쳤다.
인준아,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아. 세상엔 쓰레기 같은 남자들이 너무 많고, 그 사람들을 사랑하기엔 난 너무 매력 있고. 또 난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 어떻게 감정이 영원불멸하겠어? 몇십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해? 말도 안돼. 그래서 난 한 눈에 반한다는 말도 안 믿었어. 뭘 보고 한 눈에 반해? 사람을 좋아할거면 말이야, 응? 그 사람의 인성과 됨됨이, 그런 걸 다 파악하고서 신중하게 좋아해야하는건데 말이야.
래퍼토리가 이쯤까지 가면 핸드폰을 하고 있던 황인준이 짜증이 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뭐. 누가 네 사랑 철학 듣고 싶대? 할 말이 뭔데. 까칠한 말에 상처 받을 법도 한데 황여주는 대신 볼을 발그레 붉혔다. 근데 있잖아. 있잖아, 인준아. 오빠야.
"나⸱⸱⸱ 사랑에 빠진 거 같아."
웃기게도 본인이 그렇게 부정해 마지않던 "한 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퐁당 IN LOVE!
황여주의 첫사랑의 시작은 6월 모의고사가 있던 날이었다.
뭐, 모의고사날 아침에 지각을 했는데 우연히 등굣길에 부딪혔다느니 점심시간에 모의고사를 망쳐 엉엉 우는 도중에 만났다거나 하는 뻔한 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황여주는 돌이켜 그 순간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진부하고 뻔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 또 없을거라고 사랑에 빠진 황홀한 눈으로 자조했다. 입이랑 얼굴이랑 따로 노는 건 알아? 쌍둥이 오빠의 친절한 지적에 황여주는 볼을 발그레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은⸱⸱⸱ 그런 모순인가봐, 인준아.
"여주는 잠깐 선생님 좀 보고갈까?"
내년이면 고삼이니 이번 모의고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희들 스스로가 제일 잘 알겠지. 종례를 무려 20분이나 하며 모의고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이제 얼마 안 남은 고삼 수능 현역에 대한 위기감을 일깨워주던 선생님은 인사를 마치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여주를 붙들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도 또 할 말이 남으신건가요? 빨리 집으로 가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고 싶었는데. 여주가 차마 선생님이라 하지 못할 말들을 혀 밑에 꽁꽁 숨겨두고는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향했다.
"오늘 모의고사는 어땠니?"
"뭐⸱⸱⸱"
쉬웠어요. 라고 애들 있는 곳에서 대답했다면 분명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거다. 그렇지만 여긴 교무실이고, 선생님 밖에 없으니까 여주는 그냥 사실대로 말했다. 심드렁하게 말하는 모습에 선생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래? 그래서 말이야, 여주야. 아직은 좀 이르지만 내년에 우리 학교에서 고삼 대상으로 심화반을 만들건데 말이야. 아, 왜 불렀나 했는데. 여주가 고개를 까딱거리다가 바로 내저었다. 1학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얹게 들었던 말이었다.
"싫어요."
"심화반 들어가면 여주도 공부에 집중하기 훨씬 편할거야."
그래도 싫어요. 대쪽같은 여주의 대답에 선생님이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모의고사 보느라 피곤했을텐데 붙잡아둬서 미안하다며 음료수를 하나 건네준 선생님께 여주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내일 보자 여주야. 네에. 여주가 문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쌤~ 통통 튀는 밝은 목소리가 등 뒤로 꽂혔다.
"너 아직도 안 갔냐?"
"아, 심부름 하느라요. 이제 가야죠."
"머리는 이제 좀 차분해졌네."
"저 분홍머리 잘 어울리지 않았어요?"
선생님과 편하게 농담을 하는 목소리에 여주가 문을 열고 교무실을 나가면서 살짝, 뒤를 돌아봤다.
"그래, 오늘 모의고사는 잘 봤지?"
"당연하죠."
저 나재민이에요, 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생기가 가득해 목소리와 같이 발랄함이 잔뜩 깃든 눈동자가 여주의 눈에 들어왔다. ⸱⸱⸱성격 되게 좋은 애네. 나재민이라. 복도에서 오며 가며 들었던 이름 같기도 하고.
교실에 올라와 가방을 챙겨 계단을 내려가면서 계속 교무실에서의 대화가 귀에 맴돌았다. 저 나재민이에요, 쌤. 이라니. 자신감 넘쳐도 너무 넘치는 거 아닌가.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올만큼 당당했던 목소리였다.
"⸱⸱⸱"
건물에서 나온 여주가 잠깐 숨을 들이키고는 운동장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덕에 운동장 위로 해가 쨍쨍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덥겠다. 눈살을 가볍게 찌푸린 여주가 운동장으로 발을 디뎠다.
야-!!
운동장 한복판에 뒤늦게 하교하는 남자애들이 뭉쳐있었다. 평소라면 무시를 하고 빨리 집으로 가겠다고 걸음을 재촉했을텐데, 그 날따라 여주는 그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훤칠하게 생긴 애들이어서 그런가?
"빨리 와, 나재민!"
뭉쳐있는 애들이 건물을 보며 소리를 지르자, 남자애 하나가 그 쪽으로 달려갔다. 나재민⸱⸱⸱. 여주의 시선이 그쪽으로 아예 고정되었다. 걸음은 멈춘지 오래였다.
"야, 나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먼저 가면 어떡해?"
"우리 너 존나 오래 기다렸거든? 지가 늦게 왔으면서 우리 보고 지랄."
"의리 없냐, 진짜?"
"나재민이 의리 따지고 지-랄."
아까 교무실에서 봤던 얼굴에 환하고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걸렸다. 어, 이상한데. 여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여기 자연광 밖에 없는데. 빛이라고는 머리 꼭대기에 있는 햇살 뿐인데.
"⸱⸱⸱"
근데 왜 쟤한테만 스포트라이트 300개 집중시킨 것 같지. 이상한데, 이거.
여주가 침을 삼켰다. 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거⸱⸱⸱.
"피방 고?"
"나 오늘은 안돼."
"뭐야, 기껏 기다려줬는데 안된다고?"
"길고양이 밥 챙겨주러 가야 돼."
"아 그럼 인정."
서서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여주가 뒤늦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웃는 모습이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아지랑이가 바닥이 아니라 눈 앞에서 피고 있는 거 같았다. 그리고 그 아지랑이에선 자꾸만 그 남자애의 웃는 모습만 아른, 아른.
눈 앞에서 반복 재생되는 웃음에 정신이 팔려 멍한 채로 교문까지 걸어온 여주의 귀로, 교무실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한번 더.
저 나재민이에요.
당당하고 자신감 넘쳤던 목소리였다. 힘이 가득 담겼는데 허세 따윈 하나도 없었다.
"어떡하지⸱⸱⸱"
햇볕 아래에서 너무 오래 있었나. 정수리가 뜨끈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기분을 느끼며 여주가 양 손을 들어 볼을 감쌌다.
이런 게 사랑인건가⸱⸱⸱?
열여덟 황여주, 6월 모의고사를 끝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 첫 사랑을 시작하다.
§
"인준아."
"왜."
"사랑은 어떻게 하는거야?"
"아 진짜, 미쳤냐?"
왜 자꾸 사랑 타령이야, 이게. 인준의 환멸스러운 시선에도 여주는 볼을 감싸쥔 채 사랑은⸱⸱⸱ 어떻게 하는걸까. 사랑은 뭘까. 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인준은 조금 억울해졌다. 자기는 한 눈에 반하는 걸 정말 이해 못하겠다고 투덜거리는 걸 들어준 세월이 얼만데, 그 세월이 아깝게 어디서 웬 외간남자한테 홀딱 반해나 오고⸱⸱⸱.
한숨을 내쉬며 하던 게임을 접은 인준이 턱을 괴었다. 그래서 짝사랑 하는 걔가 누군데. 여주의 얼굴이 좀 더 달아올랐다. 그게에-. 답지않게 말꼬리를 늘이는 게 낯설어서 인준은 저도 모르게 팔을 쓰다듬었다. 소름 안 돋았나, 확인하려고.
"이름은 아는데에,"
"야 너 그렇게 말꼬리 자꾸 늘릴거면 카톡으로 해."
"아아, 알았어. 제대로 말 할게."
"나이가 몇 살인데 말꼬리를 늘려. 어른스럽게 말하지는 못할 망정."
"오빠 너 나중에 말꼬리 0.1초라도 늘려봐."
"됐고. 이름은 아는데, 그래서?"
여주가 입술을 꾹꾹 눌렀다. 저 버릇 고치라니까. 정작 인준도 부끄러울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면서, 여주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에 인준이 혀를 쯧쯧 찼다.
"어떻게 친해지지?"
"가서 좋아한다고 고백해."
"잡소리하지마, 오빠."
"미안."
걔 우리 학교냐? 여주가 고개를 끄덕일때마다 머리카락이 붕붕, 들떴다. 강아지 같이 생겼네. 새삼 인준은 제 쌍둥이 동생이 저와 아주 다르게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좀 고양이 상이던데.
생각 하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겠는지 여주의 볼이 터질 것처럼 빨게졌다.
"선배야, 후배야?"
"우리랑 같은 학년이야."
"누군데?"
"⸱⸱⸱부끄러워, 말 안 할래."
"아니, 그래놓고 뭘 도와달래."
"그니까- 좋아하는 애랑은 어떻게 친해지는지 방법을 알려달라니까?"
"네가 좋아하는 애가 누군지 알아야 어떻게 도와줄지 알려주지. 같은 반이야?"
"아니, 다른 반⸱⸱⸱."
"수준별 수업 같이 해?"
"아니⸱⸱⸱."
"보충 수업 같이 듣는 거 있어?"
"아니⸱⸱⸱⸱⸱⸱."
"같은 동아리야?"
"아니⸱⸱⸱⸱⸱⸱⸱⸱⸱."
환장하겠네. 인준이 머리를 쓸어올렸다. 같은 학년인데 반도 다르고, 수준별 수업도 따로고, 보충 수업도 따로 듣고, 동아리도 다르고. 그럼 어디서 만난거야, 걔를? 어디서 웬 별 거 없는 놈팡이한테 코 꿰여 온 건 아닌지 걱정이 된 인준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야, 황여주.
"너 걔 어디서 만났어? 어디서 보고 반해 온거야?"
⸱⸱⸱운동장.
뭐, 운동장?
으응.
⸱⸱⸱거기서 걔가 뭘 했는데.
그냥⸱⸱⸱친구들이랑 웃으면서 가던데.
⸱⸱⸱⸱⸱⸱너 미쳤냐? 거기에 반해서 지금 이러는 거라고?
"오바야, 황여주."
여주가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오바야? 내가 걔 이름 밖에 몰라서? 나이 밖에 몰라서? 이마를 짚고 있던 인준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걔 이름이 뭔데. 같은 학년이면 내가 알 거 아니야. 여주의 입이 합, 다물렸다.
"왜 말을 안 하는데?"
"부끄럽다니까!"
"아니, 이제껏 실컷 말 할 거 다 말해놓고 뭐가 부끄럽다는거야? 내가 어디가서 네가 걔 좋아한다고 소문이라도 낼까봐?"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야!"
오빠는, 인준이 너는⸱⸱⸱!! 차마 문장을 끝낼 수가 없었던 여주가 쿠션을 인준에게 던졌다. 오빠 네가 그러니까 맨날 연애를 못하지! 바보야! 꽥 외치고 인준의 방을 후다닥 도망쳐 나갔다. 야! 황여주! 제 방으로 돌아온 여주가 문을 걸어잠궜다.
쿵, 쿵, 쿵, 성난 발걸음으로 여주의 방문 앞으로 온 인준이 심호흡 했다.
"야, 너 진짜 이상한 애 좋아하는 거 아니지?"
"나도 몰라! 걔 이름 밖에 모르는데 내가 걔가 이상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아니, 그러니까 이름을 말해달라고! 내가 이상한 앤지 알아볼테니까!"
"안된다고!"
뭐가 문제야, 왜 안되는거야? 답답한 인준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 똥고집⸱⸱⸱. 누굴 닮아서 이렇게 고집이 센거야? 이름 좀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쌍둥이끼리.
"인준아."
"왜."
"오빠."
"왜, 여주야."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넌 친구 사귈 땐 인성 따져서 사귀지? 다짜고짜 이상한 걸 묻길래 인준의 얼굴이 와작, 구겨졌다.
"나름 인성 따져서 사귀긴 하는데⸱⸱⸱ 왜?"
"오빠 친구 중엔 이상한 애들 없지?"
"어, 없는데⸱⸱⸱"
"그럼 됐어."
근데 갑자기 그걸 왜 물어보는⸱⸱⸱⸱⸱⸱. 인준이 여주의 방문을 두드렸다.
"⸱⸱⸱⸱⸱⸱야, 황여주, 야, 문 열어봐."
너 설마 좋아한다는 애가 내 친구야??
퐁당 IN LOVE!
"쭈 아파?"
"응⸱⸱⸱"
"어디가?"
"상사병⸱⸱⸱"
여주의 힘 없는 목소리에 수영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전에 말했던 걔? 걔 때문이야? 여주가 책상에 엎드린 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볼살이 밀려나는 모습에 수영이 옆자리에 앉아 여주의 볼을 찔렀다. 아주 중증이네, 우리 쭈.
"나는 왜 걔랑 같은 반이 아니지⸱⸱⸱"
"교장쌤 찾아갈까? 반 바꿔달라고 해봐?"
"고맙지만 됐어, 수영아⸱⸱⸱."
사랑에 빠지는 것 까진 좋았다. 근데 접점이 없어도 이렇게 없어도 되는거야? 여주는 조금 억울했다. 명색이 태어나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하는 짝사랑인데, 하늘은 도대체 왜 하나도 도와주질 않는거지? 하다 못해 영어, 수학 때 하는 수준별 수업 때라도 같은 반이면 좀 좋으련만. 발 넓은 수영을 통해 알아낸 정보로는 여주의 짝사랑은 여주와는 반이 아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여주는 1반, 그 애는 9반. 멀어도 너무 먼거 아니야? 마치 재민이와 여주 사이의 거리를 대변하는 듯 해서, 여주는 요즘 쉬는 시간마다 이렇게 맥아리 없이 늘어져 있곤 했다.
아니, 진짜. 처음 하는 짝사랑인데 좀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여름 방학을 코 앞에 두고서야 학교의 반배정 시스템마저도 이제서야 불만스러웠다.
"쭈 왜 이래?"
"상사병이래."
"아이고."
매점을 갔다온 다른 친구들이 여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흐물흐물, 늘어진 여주가 눈을 감았다. 용기 내서 인터넷에 사랑은 어떻게 하는거냐고 물어봐도 다들 초딩이면 우유 먹고 일기 쓰고 잠이나 자라는 답변만 달고⸱⸱⸱. 난 진지한데.
휴. 여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쭈, 운동장에 걔 아니야?"
"어디?!"
여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급하게 일어나느라 의자까지 뒤로 나자빠졌지만, 여주는 그런 건 신경도 안 쓰고 창문에 달라붙었다. 헝클어진 머리는 대충 뒤로 넘기고 운동장을 샅샅이 뒤졌다. 체육 수업 때문에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에 나와있는 애들 사이에서, 여주는 여전히 머릿 속에 선명한 밝은 갈색의 머리를 발견했다. 헉. 여주가 입을 틀어막았다.
"⸱⸱⸱나도 체육하러 나가고 싶어."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활짝 웃는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찼다. 정신 놓고 구경을 하던 여주가, 책상을 들어 창가로 딱 붙여 옮겼다.
"당당하게 수업 듣지 않겠다는 뜻인가, 이 자리 옮김?"
"그런 듯."
"침 나오겠다, 쭈. 입 좀 닫아."
"됐어, 말해도 못 들어."
친구들의 대화는 귓전으로 날렸다. 여주는 턱까지 괸 채로 작정하고 창 밖을 구경했다. 그건 수업 종이 치고 선생님이 들어오고 나서도 여전했다.
"지난 번에 140쪽까지 했- 여주 뭐하니?"
준비 운동으로 운동장을 뛰는 재민을 하염없이 보며, 여주가 3박자 정도 느리게 답했다. 네? 여주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이 다시 한번 물었다. 여주야, 자리가 왜⸱⸱⸱ 거기에 있니, 너 혼자? 여주가 몽롱한 목소리로 답했다.
"광합성이요⸱⸱⸱"
햇살이 짱짱하게 내리쬐는 창가를 한번 본 선생님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
"아으, 난 우리 학교 탕수육 너무 질겨서 못 먹겠어."
"내 턱 보이냐, 나 지금 턱근육 발달한 거 같아."
"무슨 고무 타이어를 튀겨놨어."
점심을 먹고 운동장으로 산책을 나온 여주와 친구들이 점심으로 나온 탕수육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씹어먹다가 이빨이 먼저 나가나, 탕수육이 먼저 끊기나 내기한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떠는 친구의 말에 피크닉을 마시고 있던 여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인정. 탕수육 맛 없더라. 여주도 친구를 따라 턱을 문질렀다.
"점심 영어였나?"
"응, 영어."
"황여주, 나 영어 과외 해달라니까."
"한 달에 4번 치킨 사주면 해준다니까."
"4번 너무 많아, 2번 어때."
"양아치 아님? 치킨 4번이면 10만원도 안 하는데. 야야, 쭈, 이런 애한테 과외 해주지마."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양아치 심보도 아니고. 나 비싸.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서 운동장을 한번 쓱, 둘러봤다. 혹시 걔 있나? 하고서. 아니 뭐, 있으면 다리도 아픈 김에 앉아서 쉬고 구경도 하고 일석이조니까.
그리고 그런 여주의 바쁜 눈동자를 알아챈 여주의 친구들도 함께 운동장을 스캔했다. 친구의 첫 짝사랑이 이렇게 귀여우니 안 도와줄 수가 있나. 그러다가 수영이 어! 하며 여주의 팔뚝을 쳤다. 야야, 저기 있다. 저기.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재민이 있었다. 여주가 합, 입을 다물었다. 볼에 다시 홍조가 올라왔다.
"야 쭈~ 가서 말이라도 걸어봐~"
"축구하는데 끼어들어서 무슨 말을 걸래, 미친."
"초 치지마, 강슬기."
"쭈, 우리 여기 앉아서 구경할래?"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티 안나겠지? 우리 그냥 산책하다가 잠깐 앉아서 쉬는 것처럼 보이겠지? 아이들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하나도 안 어색해. 그렇게 해서 여주를 중심으로 친구들이 스탠드에 둘러앉았다. 여주가 피크닉 빨대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축구하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운동도 잘하네⸱⸱⸱"
"얘 턱 빠진다, 야."
"여주 턱 여기에 맡겨둘래?"
친구들의 장난에도 여주의 시선은 운동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하게는 재민을 보는 시선이. 살짝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웃지도 않고 멍하니 보는 모습에 친구들이 전부 웃음을 삼켰다. 100km 밖에서 봐도 나 지금 짝사랑하고 있어요! 하고 자랑을 하는 얼굴이었다. 여주 본인은 알려나?
"근데 쭈야, 걔가 왜 좋아?"
"사랑에 이유가 어디 있어?"
"넌 이유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며?"
초등학생 때였나, 토론 시간 주제가 첫 눈에 반할 수 있느냐였다. 열세살의 황여주는 그때 첫 눈에 반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세상엔 이유 없이 벌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고 그러므로 이유 없이 그저 외관만 보고 사랑에 빠지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었다. 그땐 열세살이고, 지금은 열여덟이잖아. 여주가 항변하듯 웅얼거렸다. 사람 일 모르는 거라더니, 내가 이렇게 한 눈에 홀딱 반하게 될 줄 알았겠어? 열세살 황여주가.
그리고 그때, 운동장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피해!!
"억⸱⸱⸱!"
쇠망치로 머리를 강타 당한 느낌이 짧게 지나가고, 귀가 멍해졌다. 여주의 친구들이 놀라서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세게 날아와 여주의 머리를 친 공이 또르르, 힘 없이 굴러 떨어졌다.
"괜찮아?!"
급하게 달려오느라 헉헉 거리는 숨도 채 고르지 못하고 여주에게 괜찮냐 묻는 재민을 보며 여주가 눈만 깜빡였다. 여전히 머리가 멍했다. 어, 그러니까. 어⸱⸱⸱. 걱정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아파도 안 아프다고 해야할 것 같아서, 여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나 괜찮⸱⸱⸱ 위잉- 소리가 음소거 됐다.
"여주야!"
픽, 여주가 그대로 기절했다.
여기 어디지. 눈을 뜬 여주가 밝은 회색의 천장 타일을 보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내 방 천장은 흰색이고. 그럼 여긴 내 방이 아니고.
정신을 잃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주가 천천히 돌아봤다. 그러니까, 점심 먹고 친구들이랑 산책 하러 운동장을 나갔지. 그러다가 운동장에서 재민을 봤고, 축구하는 걸 구경하겠다며 스탠드에 앉아서 친구들이랑 대화를 나누다가-
"⸱⸱⸱"
뒤늦게 두통이 밀려와 여주가 이마를 짚었다. 맞아, 나 축구공에 머리 맞았지. 기절하기 직전에 재민의 얼굴을 본 것 같았는데. 여주가 혀를 깨물었다. 미친. 걔 앞에서 기절했다는거잖아. 여주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꼭 감고 관자놀이를 붙잡고 있자, 커튼이 걷혔다.
"일어났어?"
어어⸱⸱⸱? 고개를 들어올리자 재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네가 왜 여기에⸱⸱⸱? 어어⸱⸱⸱ 일단, 어⸱⸱⸱ 인사를 해야하나? 벙찐 여주를 앞에 두고 재민이 눈꼬리를 축 내렸다.
"미안, 많이 아프지."
"아, 그⸱⸱⸱별로 안, 아니, 조금 아픈거 같아."
안 아프다고 하려다가 금방 말을 바꿨다. 재민의 눈에 죄책감이 더 짙게 서렸다. 사실 재민이 찬 공도 아니었는데. 빨갛게 부어오른 여주의 이마를 한번 살핀 재민이 눈을 내리깔았다.
"많이 아파?"
"어? 어⸱⸱⸱ 좀⸱⸱⸱."
아예 안 아픈 건 아니니까 뭐⸱⸱⸱. 짝사랑하는 상대랑 이런 식으로 대화를 틀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여주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얼떨떨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나재민이랑 대화 하고 있는거 맞지? 여주야. 재민이 여주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렀다. 와, 어떡해. 재민의 입에서 들린 제 이름에 심장이 쿵떡쿵떡 널뛰기를 했다.
"내 이름, 어떻게⸱⸱⸱"
"아, 명찰, 보고⸱⸱⸱"
"나 오늘 명찰 안 하고 왔는데⸱⸱⸱"
"⸱⸱⸱아까 네 친구들이 말하는 거 들었어."
"아."
괜히 기대했네⸱⸱⸱. 여주가 입을 꾹 눌렀다. 근데 왜⸱⸱⸱? 어떻게 이름을 알았느냐고 묻는 탓에 대화 주제가 어긋나서, 여주가 되물었다. 왜⸱⸱⸱? 재민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혹시 오늘 집 가서 아프면 연락해줘."
"⸱⸱⸱"
핸드폰 번호를 교환한다고? 번호 교환이 이렇게 빨라도 되는거야? 수영이 옆에 있던가, 아니면 쌍둥이인 인준이 있다면 붙잡고 물어보기라도 할텐데 지금 양호실에는 재민과 여주, 단 둘 뿐이었다. 여주가 떨리는 손을 최대한 티 내지 않고 핸드폰을 가져갔다.
"여기⸱⸱⸱."
11자리를 꾹꾹 눌러 건네자 재민이 바로 전화를 걸어 부재중을 남겼다. 그리고 잠깐 정적이 오갔다. 몇 초 안되는 정적 속에서 여주는 양 볼을 부여잡고 싶었다. 얼굴 엄청 빨게졌을 것 같아.
"양호 선생님이 좀 더 쉬어야 한다고 하셨어."
"아, 응."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나 있으면 못 쉴 거 같으니까."
머뭇머뭇 걸음을 옮기던 재민이, 뒤를 돌았다. 있잖아, 여주야. 명치께를 콩콩, 주먹으로 치고 있던 여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나재민이야."
"⸱⸱⸱"
"그리고⸱⸱⸱ 아프면 꼭 연락해."
꼭, 연락해줘.
퐁당 IN LOVE!
열여덟 나재민은 요즈음 자주 멍을 때리기 일쑤였다.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하다가도 멍-. 밥을 먹다가도 멍-. 게임을 하다가도 멍-. 시도때도 없이 정신을 놓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재민 때문에, 친구들이 그를 붙잡고 물었다.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걱정 어린 제노의 물음에 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있어. 무슨 일. 평소에 힘든 일이라고는 입도 벙긋 안 하는 애가 무슨 일이 있다고 하니, 재민을 둘러싼 친구들 모두 심각해졌다. 야, 무슨 일인데. 집에 무슨 우환이라도 생긴거야? 아니면, 누가 너 괴롭혀? 누군가 괴롭힌다고 하면 당장 찾아갈 것처럼 팔을 걷어올린 동혁을 인준이 주저앉히고 차분히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서?
그게 말이지⸱⸱⸱. 힘 없는 재민의 목소리에 아이들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얘가 이렇게 맥아리가 없는 애가 아니었는데. 재민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있잖아, 얘들아.
"나⸱⸱⸱ 사랑에 빠진 거 같아."
익숙한 대사에 인준 홀로만 몸을 굳혔다. 뭐지, 이 데자뷰?
재민의 짝사랑은 6월 모의고사를 본 다음 날 시작했다.
금요일마다 하는 방송 조회 때 각종 대회 수상을 하거나 트로피 전달식을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근래에 논술대회니 뭐니 열린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웬 트로피 전달인가 했는데 같은 학년에 어떤 여자애가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서 1등을 먹고 왔다고 했다. 와, 대박. 조회가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에 재민과 친구들 모두 입을 벌렸다. 국제 수학 웅엥 그거 엄청 어려운 거 아니야?
도대체 그 국제 수학 웅엥에서 1등을 한 애가 누구인가, 싶어서 평소라면 에어팟 끼고 잠이나 잤을 재민도 빔 프로젝터로 영사되는 조회를 유심히 봤다. 지루한 교장선생님 훈화가 이어지고, 체육부 애들이 먼저 수상을 받았다. 근데 그러니까 금방 흥미가 동했다. 아, 지루해. 걔 언제 나오는데 그래서. 슬슬 잠이 밀려오길래 흥미도 사라졌겠다. 에어팟을 찾아 한쪽 귀에 끼는데, 그때 카메라 앵글 안으로 여주의 뒷모습이 들어섰다. 오, 나이스 타이밍. 재민이 에어팟을 다시 귀에서 빼냈다.
다음은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우수한 성적을-
마냥 검지만은 않은, 갈색 빛의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보며 재민이 톡톡,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까 작년에 수학 수준별 수업 때 같은 반이던 여자애 하나가 수학을 엄청 잘했었는데. 수업을 빨리 끝내달라고 성화를 피워대는 애들한테 선생님이 그럼 이 문제 풀면 너네 바로 끝내줄게. 하고 내줬던 엄청 어려웠던 문제를 5분만에 풀어냈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나 배우는 내용이라 선생님은 애들을 골려주고 수업을 마저 이어나갈 생각이었는데, 그 애가 그렇게 문제를 쉽게 풀어버렸어서 결국 그 날은 50분 수업이 20분만에 끝이 났었다. 걔 진짜 대박이었는데.
걔 이름이 뭐였더라. 재민이 미간을 좁혔다. 황⸱⸱⸱
"⸱⸱⸱"
그런 생각을 할때 쯤 트로피를 건네받은 카메라 속 작달막한 여자애가 인사를 위해 몸을 틀었다.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 옅게 웃는 모습에 늘어져 있던 몸에 차츰 힘이 들어갔다. 기억을 더듬느라 힘이 들어갔던 미간도 사르르 풀렸다.
명찰 박힌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여주."
황, 여주. 황여주. 입 안에서 계속 혀를 굴리며 이름을 외웠다. 심장이 뻐근해졌다. 수줍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모습이 머릿 속에서 계속 반복 되었다.
짝사랑이었다. 재민의 짝사랑은 그렇게, 방송 조회를 보며 시작했다.
§
이름, 황여주. 나이, 열여덟. 특징, 공부를 매우 잘함.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1등을 함. 그거 말고도 국제 과학 웅엥이랑, 논술 대회, 토론 대회에 나가서도 상을 휩쓸어 왔다고 했다. 작년 고등학교 신문부터 싸그리 모아와 정독을 끝낸 재민이 텅텅 빈 종이를 내려다봤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 이름이랑 나이랑 공부 잘한다는 건 지나가는 개도 10분만에 알아채는 사실 아니야? 물론 그 개는 얼마나 공부를 잘 해야 나가는 대회란 대회에서 상을 휩쓸어오는지까지는 모르겠지.
결국 재민이 한숨과 함께 책상 위로 엎어졌다. 재민을 따라 도서관에 온 제노가 질린 눈을 했다. 쟤 미친 놈 같아. 갑자기 도서관을 가겠다고 하더니 와서 하는게 교내신문 정독이고, 또 거기서 웬 여자애 프로필이나 뽑아내고 있고⸱⸱⸱.
"제노야."
"응, 재민아."
"사랑이 원래 이렇게 어렵냐."
"⸱⸱⸱"
어떻게 접점이 하나도, 단 하나도 없지? 여주와 재민 사이에 교집합을 겨우겨우 찾자면 작년에 수학 수준별 수업을 같이 들었다는 것 뿐이었다. 근데 그건 다른 애들도 똑같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다짜고짜 찾아가서 아는 체를 할 순 없잖아? 아, 진짜 어렵다. 엎어진 재민이 책상 위에 올려놨던 핸드폰을 꺼냈다.
"⸱⸱⸱"
번호를 받은 것 까진 좋은데 말이야⸱⸱⸱. 연락이 안 온다고, 연락이. 엊그제 제노가 찬 공에 머리를 맞고 기절한 여주를 양호실까지 데려다주고 억지에 가까운 핑계로 번호를 받아냈다. 아프면 꼭 연락해달라고 했는데, 안 아팠던 걸까. 이제노 초싸이언이라 공 차는 거 맞으면 개아픈데⸱⸱⸱. 엄청 아팠을텐데. 그러다 문득 공을 잘못 차 여주가 머리를 맞은 게 괘씸했다. 공을 어떻게 차면 애 머리를 맞추지? 그래서 제노의 정강이를 책상 밑으로 걷어찼다.
갑자기 조인트를 맞은 제노는 정강이를 부여잡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신음 소리를 참아냈다. 저 미친. 갑자기 왜 때리고 지랄이야⸱⸱⸱.
"내가 먼저 연락해야 하나."
아픈 데는 괜찮냐고 물어봐도 되겠지? 재민이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정강이를 한참 부여잡고 있던 제노가 이를 갈며 소리 내 책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이따 물어보고 일어나. 예비 종 쳤어. 재민이 종이를 챙겨들고 흐물흐물 일어났다. 제노야아, 나 진짜 사랑이 너무 어려워. 나 요즘 엔시티 드림 사랑이 어려워만 반복해서 듣고 있는 거 알아? 내가 딱 그 노래 제목이랑 심정이 똑같아. 사랑이 어려워도 너무 어려워.
개소리를 칼 같이 차단하는 제노는 재민에게 대답 한 마디 해주지 않고 제게 매달린 재민을 끌고 교실로 향했다.
"⸱⸱⸱"
그리고 재민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여주가 왜 여기 있어. 그것도 내 자리 근처에?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굳은 재민의 등을 제노가 퍽! 쳤다. 뭐해, 들어가라니까. 재민이 주춤, 주춤, 안으로 들어섰다.
"웬일이야, 황여주?"
"어? 너 걔지. 올림피아드 1등."
"어? 아, 응. 안녕. 인준이 친구야?"
"응, 이동혁이야. 둘이 쌍둥이인거야?"
"응, 근데 안 닮았지."
"조금⸱⸱⸱? 다행이다, 황인준 안 닮아서."
가까이 가면서 들리는 대화에 재민의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여주랑 인준이랑 쌍둥이라고? 재민의 원망어린 시선이 인준에게로 잠깐 쏟아졌다. 왜 나한테 말을 안 해준거야⸱⸱⸱? 너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재민이 제노와 함께 다가가자, 동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여주가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갔다 왔냐?"
"도서관 다녀왔어. 누구야?"
"황인준 쌍둥이래."
"너 쌍둥이였어?"
"대박이지. 우리 다 모르지 않았어? 나재민, 너도 몰랐지?"
"어? 어."
여주의 시선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재민이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뭐 하고 있었어? 인준을 툭 치며 묻자 인준이 뒷목을 쓸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황여주 너 왜 왔어? 좀 전까지 말만 잘하던 여주가 갑자기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거. 인준이 얼굴을 구겼다. 그거 뭐?
"체육복,"
"체육복?"
"⸱⸱⸱안 가지고 왔어."
⸱⸱⸱빌려줘. 말이 뚝뚝 끊기는게 창피한 여주의 귀가 서서히 붉어졌다. 인준의 시선이 오묘해졌다. 뭐야, 얘. 왜 갑자기 쑥쓰럼 타?
"나 체육복 없는데. 이동혁, 너 체육복-"
"내 거!"
"⸱⸱⸱?"
"내 거 빌려줄게. 이동혁 체육복 쓰레기 냄새 나."
"뭐라고요, 미친 놈아?"
재민이 빠르게 사물함으로 가 체육복을 꺼냈다. 뒤에서 동혁이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다. 야, 나재민. 야 와라. 내 체육복에 무슨 쓰레기 냄새가 나! 내가 체육복 빨 때마다 섬유유연제를 반통이나 들이붓는데! 야! 야야, 너가 참아, 너가 참아.
홀린 듯 재민을 따라온 여주가 품에 재민의 체육복을 안았다. 이미 뒤에서 혼자 열을 내고 있는 동혁은 딴 세계 이야기였다. 재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나 원래 진짜 예쁘게 잘 웃는데. 거울을 보면 어색하기 그지 없을 제 미소가 야속했다. 재민아, 네가 잘 하는 거 해서 꼬셔도 모자른데 왜 이래.
"수업 끝나고⸱⸱⸱ 내일 빨아서 줄게."
"아니야, 괜찮아. 그냥 줘도 돼."
"아, 그래도⸱⸱⸱. 냄새 날텐데."
"괜찮아, 진짜로. 그냥 수업 끝나고 바로 줘도 돼."
그럼 수업 끝나고 가져다줄게. 여주의 대답에 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고마워 해야 할 사람은 여주인데 되려 재민이 고맙다고 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근데 여주와 재민 둘 다 그 이상함을 눈치 못 채고 발만 톡톡, 바닥을 찼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인준이 설마, 하고서 둘을 번갈아봤다. 발그스레 볼을 붉힌 제 쌍둥이 동생, 그리고 똑같이 발그스레한 재민의 볼. 어, 미친?
"아, 종 쳤다. 나 갈게⸱⸱⸱!"
"응, 잘 가."
여주야. 용기 내 부른 이름에 여주가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가 다시 손을 흔들었다. 어, 안녕, 재민아⸱⸱⸱. 그리고 뒷문으로 쪼르르 반을 빠져나갔다. 재민이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걸 사물함에 기대 참았다. 후, 하. 심호흡을 하는데 인준이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의자를 쓰러뜨리면서 일어났다. 야, 나재민. 재민이 인준을 돌아봤다. 응, 인준아.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인준이 재민의 멱살을 잡았다.
"⸱⸱⸱너 황여주 좋아해?"
"⸱⸱⸱"
"설마 진짜? 미친, 제발 아니라고 해주라."
재민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처남⸱⸱⸱. 소름끼치는 호칭에 인준이 냅다 주먹을 들었다. 미쳤냐?!
+Bonus)
집에 돌아온 여주가 침대 위로 다이빙 했다. 미친! 꺅! 발을 동동 구르고 팔도 팡팡, 침대를 내리쳤다. 먼지가 폴폴 올라와 목구멍으로 넘어가 사레가 들리고서야 바둥거리는 걸 멈춘 여주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내가 오늘 나재민 체육복을 입었다니. 꿈은 아니겠지? 볼을 꼬집어도 아픈 걸 보니 꿈은 확실히 아니었다.
체육복 받아서 빨아준 다음에 내일 또 대화하면 좋았을 텐데. 수업이 끝나자마자 체육복을 받으러 온 재민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아쉬워⸱⸱⸱. 입을 비죽 내민 여주가 체육복에서 나던 재민의 섬유유연제 냄새를 떠올렸다. 우리 집거랑 다른 거 같던데. 인준이한테 섬유 유연제 바꾸자고 하면 싫다고 하겠지.
나재민을 주제로 하니 생각의 전환이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차 같았다.
-"그래서 오늘 체육복이 나재민 거였단 말이지?"
"응!"
-"너 나재민한테 체육복 빌리고 싶어서 일부러 네 쌍둥이 찾아간거지?"
"아니야! 만나고 싶어서 찾아간 건 맞는데, 그건 진짜 아니었어."
완전 대박이야. 나 오늘 운 짱 좋아. 나 로또 살 수 있었으면 샀다. 히히. 재민을 볼 수 있으려나 싶어서 굳이 인준이한테 간 건 맞는데, 정말로 재민이도 보고 거기에다가 체육복까지 빌릴 줄이야.
그저 얼굴이나 한번 슬쩍 보면 소원이겠거니 했던 여주는 꿈에도 상상 못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전화 너머에서 통화를 하던 슬기도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좋아? 응, 완전. 야 진짜 슬기야, 사랑을 하면 세상이 분홍색이라더니 나 오늘 먹은 짜장밥도 색깔이 분홍색으로 보였다? 대박이지. 나 진짜 빨리 걔랑 친해지고 싶다아.
"야, 황여주!"
"아, 깜짝이야."
현관문을 쾅, 닫고 들어온 인준이 거실에서 여주를 큰 소리로 불렀다. 슬기와 통화를 하던 여주가 깜짝 놀라 중얼거리자 슬기가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주가 좀 이따가 다시 전화하겠다며 전화를 끊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인준아, 왜 들어오자마자 소리를 질러? 너 옆 집에서 소음 공해로 신고 들어오면-
"너 나재민 좋아해?"
"눈치 챘어?"
"⸱⸱⸱미친. 진짜라고?"
여주가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인준아. 네가 나 좀 도와줘! 기왕 들킨거, 나 걔랑 진짜 잘 되고 싶어! 발랄하게 외치는 여주를 보며 인준이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걘⸱⸱⸱ 걘 안돼."
"뭐? 왜?"
"⸱⸱⸱"
일단 안된다고 뱉었는데 이유가 없었다. 인준이 안되는 이유를 짜내는 사이, 여주가 치고들어왔다. 네 친구 중에 이상한 애 없다며. 다 괜찮은 애들이라며. 왜 안돼? 왜? 인준이 고개를 내저으며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안돼! 그냥 안돼!! 떼를 쓰는 것도 아니고, 이유 없이 안된다는 말에 여주가 입꼬리를 내렸다.
"오빠 너는 동생 짝사랑은 도와주진 못할 망정⸱⸱⸱!"
"야, 네가 걔를 몰라서 그래. 걔 완전 능구렁이야."
"유머러스하고 위트 있다는 뜻이지?"
"걔 그리고 친구들 대박 많아서 너 걔랑 만나면 피곤할걸? 걔 핸드폰 맨날 불나잖아. 연락하는 애가 하도 많아서."
"사교성도 좋구나."
"걔네 집에서 걔한테 기대가 얼마나 큰 줄 알아? 연애한다고 하면 바로 반대하실걸?"
"내가 걔보다 공부 잘하잖아. 그걸로 꼬셔볼게."
"이익⸱⸱⸱ 너 애가 왜 이렇게 제멋대로 생각하냐?! 안된다니까!"
"그럼 인준이 너는 왜 걔를 매도해?!"
야, 나 걔랑 4년 친구거든? 내가 너보다 걔를 더 잘 아는데 매도는 무슨 매도야! 뭐, 4년? 4년이나 알았는데 왜 나한테는 소개 한 번 안 해줬는데!!
+Bonus)
< 나재민
저기
안녕
나 황여주..!
오늘 체육복 빌려준 거 고마워서ㅎㅎ...
아
안녕 여주야
체육복에서 냄새 나진 않았지?
내가 맨날 빨기는 하는데
사물함에 넣어놨던 거라
혹시 좀 퀴퀴한 냄새 났을까봐
이상한 냄새 하나도 안 났어!
되게 좋은 향기만 났어ㅎㅎ
그럼 다행이다ㅎㅎ... 오후 9:11
그..
머리 아픈 건 좀 괜찮아? 오후 9:32
아 응
아니
어
응
아니...
아직도 조금 아픈 거 같기도 하고..
진짜 미안해..ㅜㅜ
아냐..ㅎㅎ..괜찮아ㅎㅎ...
내가 진짜 너무 미안해서 그러는데
내일 매점에서 뭐라도 사줄까? 오후 9:41
그럼 같이 갈래?
나도 네가 체육복 빌려준 거 고마워서
오후 10:09 뭐라도 사주고 싶어서..!
그럼 우리 내일
점심 시간에 매점에서 만날까?
점심 먹고
그래!
아
나 이제 잘 시간이라
자러 가야 할 것 같아ㅎㅎ...
잘 자
여주야.
내일 봐!
응
내일 봐!
퐁럽은 오마이걸의 번지를 듣다가 가사가 너무 귀여워서 쓰게 된 글입니다
가사 중에 "네 마음 위로 번지 정확히 한가운데" 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 가사가 제 취향을 저격해버렸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퐁당 인 러브=네 사랑 위로 퐁당! 번지 점프! 한다는 뜻...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너스 톡에서 재민이가 9시 11분에 카톡 보내고 9시 32분에 다시 카톡을 보냈잖아요? 이건 거진 20분 동안 머리는 괜찮냐고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용기내서 물어본 거랍니다.
그리고 9시 41분에 매점에서 뭐 사다줘도 돼? 하고 물은 재민이 때문에 10시 9분까지 고민하다가 답장 보낸 쭈....
갑자기 자러 간다는 쭈는 너무 설레서 톡 하다가 핸드폰 부술 것 같아서 핑계댔다는 설정~ 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케챱 고백 하자면 사실..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퐁럽은 톡글이었어요....제목도 그냥 번지점프TALK 이었습니다...어쩌다가 갑자기 이렇게 길게 쓰게 됐는지...ㅋㅋㅋㅋ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인준이가 안돼!! 하고 반대하는 이유는..약간 동생덕후 설정이라 그렇습니다.
내 친구들 다 괜찮은 애들인데..그래도 내 동생한텐 안돼ㅡㅡ 이런 느낌이에요ㅋㅋㅋㅋ
22.10.25
오랜만에 재업!
+편도 금방 올라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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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10.25 21:07
첫댓글 으아아아아아아!!!!!!
쌍방최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10.26 13:06
아아아악 귀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