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8일 [연중 제27주일]
마태오 21,33-43
사랑은 감사하는 이만 파견한다
이탈리아 카시아에서 성체 기적이 있었습니다. 성체가 종이에 피로 변해서 스며든 것입니다.
그 종이는 감실에 모셔져 있습니다. 감실은 하느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성체가 그 사람 안에 살아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이가 아니기에 성체를 모셔도 그분을 우리 안에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렇습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의 외아들을 죽였습니다.
만약 우리도 못된 소작인들처럼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지 않으면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그렇게 죽이게 됩니다.
소출의 일부를 바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두 주인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자기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살아계실 수 없습니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서 자기 원수 같은 후배 직장 상사와 바람을 피우는 아내에게
주인공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랬니? 너 지석이 엄마잖아. 애 엄마잖아. 너 그 새끼랑 바람피운 순간 너 나한테 사망선고 내린 거야. 박동훈 넌 그런 대접 받아도 싼 인간이라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그냥 죽어버리라고.”
아내는 남편에게 파견받습니다.
자녀를 잘 키우라고. 물론 파견할 때 그 능력도 함께 받습니다.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어 아내에게 다 가져다줍니다.
파견받음은 나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 파견을 거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물을 던지는 어부를 생각해 봅시다.
그물은 어부에게 파견받습니다.
그래서 그물이 조금이라도 뜯어지면 어부는 고이 손질합니다.
물고기가 거기로 빠져나갈 수도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물이 자신에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파견받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러나 그 파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흐를 수 없게 합니다.
그러면 사랑해도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돈을 벌어다 주며 파견하는 남편에게 사형선고 내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구약과 신약에서 다 하느님께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먼저 에덴동산에서 감사의 마음으로 땅 소출의 일부, 곧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파견받을 수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파라오의 종살이 하던 때를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소출의 일부를 받아오라고 보낸 주인의 외아드님도 죽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계속 주님께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결국 서로를 사랑할 능력도 잃고 주님의 것이 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오에겐 자부로’의 『사육』에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한 일본 산골 마을에 미군 비행기가 추락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흑인 병사 한 명을 끌고와 지하 창고에 가두고는 짐승처럼 묶어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년은 흑인 병사의 살갗이 벗겨져 염증이 생긴 것을 보고는 덫을 풀어주었습니다.
소년의 도움으로 흑인 병사는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청에서 흑인 병사를 끌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흑인 병사는 지레 겁을 먹어 소년을 인질로 잡아서 난동을 벌입니다.
결국, 흑인 병사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년의 아버지가 휘두른 도끼에 맞아 죽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감사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며 그렇게 주님을 내 안에 인질로 잡아놓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성체를 영해도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이 이와 같습니다.
아기 돼지가 엄마를 잃었습니다. 오갈 데 없는 돼지의 엄마가 되기 위해 코끼리 아줌마가
엄마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기 돼지는 코가 긴 코끼리 아줌마를 엄마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코끼리 아줌마는 자기 코를 잘라 돼지코로 만들었습니다.
아기 돼지는 피가 뚝뚝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 모습과 같은 아줌마를 엄마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기 돼지가 엄마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하며 파견하신 분께 감사의 봉헌을 조금이라도 드릴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8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이사야서 5,1-7
필리피 4,6-9
마태오 21,33-43
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새로운 하루와 더불어 또 다시 건너갈 것(Pascha)을 바라십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습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현실과 암담하고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겪게 되는 근심과 걱정,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런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필리피서 4장 6~7절)
탈출구도 없을뿐더러, 사방이 높은 담으로 가로막혀,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랍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현실 앞에, 입만 열만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터져나오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랍니다.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현실 앞에, 마냥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구하며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랍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바오로 사도의 권고는 지극히 현실성이 떨어져 보이고, 대책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께서 걸어가신 전도 여행길을 생각해보니, 권고 말씀이 절대로 헛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미의 송가를 불렀습니다.
혼절할 정도로 심한 매를 맞으면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마음에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토록 공들였던 초기 교회 공동체들이 수시로 흔들리고 분열되었으며 삐그덕거렸지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희망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몸소 겪은 바를 가르쳤고, 당신이 직접 사신 바를 권고했습니다.
그러니 2천년 세월을 건너와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분의 말씀은 생생한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를 끝맺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또한 감동적입니다.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필리피서 4장 8절)
풀잎끝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사라지는 대상들, 헛되고 무의미한 대상들, 속되고 천박한 대상들에 자신도 모르게 깊이 함몰되어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참되고 고귀한 대상들, 의롭고 정결한 대상들, 사랑스럽고 영예로운 대상들을 선택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새로운 하루와 더불어 또 다시 건너갈 것(Pascha)을 바라십니다.
천박한 삶에서 품위 있는 삶으로, 지극히 본능적인 삶에서 지성적 삶으로,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08.연중 제27주일.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마태 21, 37)
교만과
존중 사이에
어리석은 우리가
살고 있다.
존중은
또 다른 존중을
불러들인다.
존중이
빠져버리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서로를
아름답게 하는
존중이다.
다양성과
차이점을
인정하는
존중이다.
존중은
생명의
질서이다.
존중을 통해
생명의 힘을
다시 얻는다.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고
존중하는 것이
회개의 핵심이다.
하느님께서는
존중으로 이 땅에
오셨다.
존중은
생명을 살린다.
바뀌어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이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존중이다.
존중은
모든 관계의
열쇠이다.
소중하게
받아들여지는
기쁨이 존중이다.
복음은 존중으로
우리를 부른다.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우리들 여정이다.
겸손의
또 다른 이름이
존중임을 믿는다.
교만은
욕심과 살인으로
얼룩져가지만
존중은
믿음과 행복
성숙으로
충만케한다.
모든 여정은
존중을
필요로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