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중부 여행기7
2024년 1월 28일 일요일
1
오늘도 7시에 호텔에서 아침밥을 먹고 다낭의 미케 해변으로 갔다. 오토바이 가게 앞을 지키는 송아지만큼이나 덩치가 큰 누렁개가 도로변 인도에 놓인 양푼에 담긴 밥을 먹고 있었다. 연민의 정이 일었다.
해변에는 야자수가 길게 서 있고 그 밑에는 야자수잎 지붕의 원두막들이 있었다. 쓰레기가 전혀 없는 넓고 긴 해변 모래밭은 알갱이가 미세하여 파도가 들어오고 나면 마치 유리판처럼 투명하고 깨끗하였다. 구름 사이로 비집고 나온 햇빛이 그 위에 비추어드니 구름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야말로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 나오는 구절인 ‘햇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떠도는(天光雲影共徘徊)’ 것과 같았다. 해가 나오지 않고 회색 구름이 가득하니 하늘과 잿빛 바다와 파도의 허연 거품과 해조음(海潮音)이 어울려 천지가 나누어지기 전의 태초의 풍경을 보였다. 바다와 하늘이 뒤섞인 수평선에는 종이배처럼 작게 보이는 화물선과 고기잡이배가 파도에 솟아다가 꺼졌다가를 되풀이하며 항해하고 있었다.
슬리퍼를 벗어 손에 들고서 맨발로 걸으며 바닷물이 파도쳐 올 때마다 모래밭에 빠지며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모래알의 감촉을 즐겼다. 과거와 미래로 떠도는 온갖 생각들을 멈추고 마음은 오직 지금 여기 내 발바닥의 감촉과 지금 여기의 시공간에 머무는 즐거움을 알아차리며 걸었다. 미케 해변은 정말이지 맨발 걷기 건강법과 걷기 명상을 위한 최상의 장소이었다.
한참을 앞만 보며 걸으며 마음 챙김 명상을 하고 있는데, 서양인 젊은 커플이 모래밭에 다리는 가부좌를 하고 손은 상품상생 수인을 하고 무릎에 올린 채 눈을 감고 들숨·날숨을 알아차리는 명상을 하고 있었다.
둥근 모자에 아오자이를 입은 사람이 모래밭에 차린 과자나 음료수, 과일, 꽃, 향로를 올린 제사상 앞에서 자리를 깔고 절을 하더니, 그 주변에 앉아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서 청바지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두 번째로 절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 사업 번창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식당 앞에 내놓은 노랑색 꽃을 소복하게 피운 국화 화분을 보니 나그네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다.
2
캐리어를 들고 체크아웃하고서 어제 가지 못한 다낭 남쪽의 오행산으로 갔다. 가이드 윤실장님은 오행산의 오행(五行)은 금·수·목·화·토인데 주역이 출전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주역은 주례와 역경을 합쳐놓은 책이라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음양도 오행도 주역에는 나오지 않거니와 주역은 ‘주나라의 역’이라는 뜻이다. 버스에서 내려 윤실장님 곁으로 다가가서 그 오류를 바로잡아 주었다. 한번 잘못 입력된 정보는 고치기 어려운가 보다. 믿지 못하면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시라며 조언하였지만, 선뜻 인정하지 않았다.
오행산은 지질학적으로 동해판(東海板)에 붙어 있는 여러 섬이다. 지각운동으로 장산(長山)산맥판과 광남평원판(廣南平原板)이 이동하여 상호 작용하고 추분강(秋盆江) 및 그 지류가 퇴적하여 오행산이 형성되었다. 지질의 변동 과정을 거쳐 오행산은 해안에서 800미터 떨어져 있다. 오행산은 베트남 석회 산맥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행산의 여러 동굴은 석회암 지형의 지하수에 용식(溶蝕)되어 형성되었다. 베트남의 봉폐식 산암 계열(封閉式山巖系)과 다르게 오행산의 산암계(山巖系)는 통천류(通天類)의 산암으로 동굴 밖의 환경과 통한다. 동굴 밖의 해양 환경의 영향으로 동굴 안은 습기가 있고 서늘한 기후를 보인다.
2022년에 오행산의 비문 69점이 유네스코 기록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참파국의 힌두교 성지였던 오행산은 본래 오온산(五蘊山, 1631, 五蘊山古跡佛寂滅樂, 蕙道明禪師)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640년에 호이안(會安)에 살던 일본 상인들이 시주하여 화엄동(華嚴洞)에 관세음보살을 조성하고 산 이름을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을 줄여서 보타산(普陀山, 1640, 普陀山靈中佛, 蕙道明禪師)으로 부르기도 했다.
응우옌 왕조의 2째 황제로 유교 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민망(明命) 황제는 오행산을 사랑하여 자주 왔다. 민망 18년(明命, 1837)에는 동굴과 석문(藏眞洞, 雲通洞, 靈巖洞, 洞天福地, 雲根月窟, 雲月谷, 玄空關)의 이름을 명명하고 친필로 명칭을 써서 새겼다. 그리고 불교식 산 이름을 서유기(西遊記)에 손오공이 500년 동안 갇혀 지내던 산인 오행산에서 취하여 오행산이라 하고, 5개의 산에 각기 오행(금·수·목·화·토)의 이름이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다섯 산 중 동굴과 사찰이 많아서 오행산을 대표하는 수산(水山)에 올랐다.
천상 세계의 화과산 돌에서 태어난 손오공(孫悟空)이 도술을 익히고, 천도를 훔쳐 먹고서 난동을 부리며 옥황상제 자리를 넘보고 제압되지 않자, 서방 극락 세계의 영축산(靈鷲山) 뇌음사(雷音寺)에 살던 석가모니불이 옥황상제의 부탁으로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오공과 내기를 하였다. 석가불이 손오공을 오른손에 올려놓고서 손바닥을 빠져나가면 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손오공은 근두운(觔斗雲)을 타고 순식간에 십만 팔천 리를 날아가니 큰 기둥 다섯 개가 구름 속에 있었다. 그곳에다 머리털을 뽑아 만든 붓으로 ‘제천대성 이곳에 와 노닐다’라고 쓰고 오줌까지 기둥 밑에다 누었다. 나중에야, 자신이 석가불의 다섯 손가락을 보았고 손바닥에 오줌 냄새가 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손바닥에서 도망치려하자, 석가불이 다섯 손가락으로 금, 수, 목, 화, 토 다섯 개의 이어진 산을 만들어 손오공을 눌러 놓았다. 그리고 오행산의 토지신에게 손오공을 잘 감시하고, 배프다고 하면 쇠구슬을 먹이고, 목말라하면 구리 녹인 쇳물을 먹여라고 하였다. 손오공이 죄과를 다 치르면 그를 구해줄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다. 500년 뒤에 그곳을 지나가던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구해주고 제자로 삼아 불경을 구하러 천축국으로 갔다. 천상 세계의 오행산은 왕망이 한나라를 찬탈했을 때 하늘에서 떨어졌다. 당나라가 서쪽을 정벌하여 달단족과 국경을 정하면서 양계산(兩界山)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서유기에 등장하는 오행산은 베트남에 있지는 않다.
불교와 도교 문화가 주축을 이루고 유교 문화도 섞인 서유기에 등장하는 오행산, 뇌음사(후에의 티엔 무 사(天姥寺)의 카이딘 황제 시비) 같은 이름이나, 손오공상(선짜 반도의 영응사)을 여행 중에 보았다. 이것은 베트남이 문화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베트남 문화의 바탕에는 불교와 함께 도교와 유교 문화가 혼합되어 있음을 짐작하게 하였다.
예로부터 전쟁이 많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역사에서 특히, 석가모니 열반 이후 미륵불이 올 때까지 세상의 고통을 구원하는 관세음보살 신앙이 베트남에 발달해 있음도 이번 여행에서 알 수가 있었다.
음부동(陰府洞-사후 세계-업경대, 염라대왕 등 10명의 판관, 지옥, 천당)의 커다란 입구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초 만에 절벽 위로 올라갔다. 미케 해변의 바다가 보이는 전망대를 보고 나니, 자바에서도 보았던 어릴적 어머니 가슴에 달렸던 브로찌를 닮은 란타나꽃과 노랑협죽도(Cascabela thevetia)꽃이 남국의 정취를 돋우었다. 6각 7층 사리탑 앞에서 단체로, 또 아내와 함께 사진을 촬영하였다. 불탑 앞의 대련은 ‘多寶佛塔所求如意願, 靈應五行第一勝各嵐-다보탑은 구하는 것이 소원대로 이뤄지고 영응사와 오행산은 제일 가는 승경이라네.’이라고 되어 있었다.
조금 가니 스님의 3층 석조 사리탑이 있었다. 탑의 비문을 보니 ‘元命癸丑年良月日時受生出世六十三歲 嗣臨濟正宗四十二世靈應寺住持諱上是下能字智友號香山黎公和尙堂塔 便於乙卯年十一月二十八日午時付囑 門徒法春 合奉立 임제종 정통을 계승한 42세, 영응사 주지, 휘 상자(上字) 시(是), 하자(下字) 능(能), 자 지우(智友), 호 향산(香山) 화상의 당탑(堂塔), 원명(元命) 계축년(1913) 좋은 달·날·시(시능 스님의 생일은 응우옌왕조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保大) 황제가 태어난 1913년 10월 22일이다.-황제와 생년월일이 같은 것을 원명일(元命日)이라고 한다.)에 생명을 받아 세상에 나온 지 63세 되는, 곧 기축년(1975) 11월 28일 오시(午時)에 부촉받은 문도 법춘(法春) 등이 함께 받들어 탑을 세움’ 이라고 되어 있었다.
탑 앞의 대련은 ‘有爲方便度衆生, 智慈弘深徹妙法-유위의 방편으로 중생을 구원하고, 지혜와 자비가 넓고 깊어서 오묘한 진리를 꿰뚫으셨네.’라고 쓰여 있었다.
울타리를 따라 길을 가니 네거리가 나왔다. 그곳에 흰 대리석 조각으로 8상도 중 초전 법륜 (初轉法輪) 장면을 재현해놓았다. 석가모니불 앞에 꿇어앉아 합장하고 설법을 듣는 5명의 비구, 6마리 사슴, 법륜, 열반불이 놓여 있었다. 부다가야 나이란자라강 변 보리수 아래서 성도한 부처님이 사르나트 녹야원으로 가서 도반이던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4성제를 설법하자, 콘단냐가 제일 먼저 알아듣고 아라한이 되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계단을 내려가자 동쪽에 미륵불상, 중앙에 석가모니불상, 서쪽에 아미타불상, 보태(寶台) 장로 스님 위패가 모셔진 영응사(靈應寺) 대웅보전이 동쪽을 향하여 자리 잡고 있었다. 녹색 유약을 입힌 2중 처마의 기와지붕의 디귿자 평면의 건물은 기둥이나 외관이 화려하였다. 금당 앞에 계단이 있고 황매화 같은 분재가 놓여 있었다. 역시 2중 녹색 기와를 올린 정자에 백색의 해수관음상이 모셔져 있었다. 절문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북쪽 기슭에는 선정인의 백색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계단 아래에는 탄생불과 슈도다나왕과 마야 부인, 시녀들, 아홉 마리 용의 조각이 있었다.
영응사는 17세기 초에 은둔하는 관료가 양진암(養眞庵)을 세우며 시작되었고 양진암은 양진당(養眞堂)으로 개명하였다. 응우옌 왕조의 창업 군주인 자롱(嘉隆) 황제가 이곳에 행차하여 황제가 ‘어제응진사(御製應眞寺)’의 이름을 내리며 국찰이 되었고 방장은 고승 보대 스님이었다. 민망 6년(1825)에 황제의 지시로 중수하고 다시 ‘어제응진사’라 하였다. 타잉 타이(成泰) 3년(1891)에 황제가 이름을 고쳐 ‘영응사’라 하였다.
대웅보전 뒤로 돌아가자 장진동(藏眞洞)이라는 동굴이 있었다. 동굴에는 참파국 시대의 시바신과 왕권을 상징하는 요니와 링가가 남아 있었다. 연꽃 받침 모양의 요니 둘레에는 여성의 팽팽한 유방이 촘촘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불상을 모신 동굴 입구에는 역시 참파국 시대의 힌두교 사원의 유물인 칼을 짚고 있는 수문장, 드와라팔라가 남아 있었다.
안쪽 굴에는 선정인의 거대한 불상을 동굴 대리석으로 조각한 2미터 높이에, 선정인의 좌불을 조각해 놓았고 그 앞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있었다.
다른 쪽 동굴에는 인도의 석굴사원에서 볼 수 있는 모양의 네모난 형태에 단순한 기둥의 법당을 조성하고 그 안에 항마촉지인의 석가불상을 모셔 놓았다. 법당은 동굴의 석재를 깎아 만들었다.
또 다른 동굴은 천정이 뚫려서 햇빛이 내부로 들어왔고 백색 대리석으로 조각한 두 신선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조성해 놓았다. 더 안쪽의 동굴에는 오른손은 내리고 시무외인을, 왼손은 올려서 상품 하생인을 하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불을 조각해 모셔 놓았다.
동굴의 벽면에 상 다리 위에 연화좌를, 그 위에 비석을 새겨놓았다. 글자는 거의 읽어볼 수가 없었지만 불상 조성의 취지와 그에 시주한 사람들의 공덕비일 것이다. 여행 뒤에 아내가 촬영한 사진을 확대하여 보았다. 비의 상단에 큰 글씨로 쓴 비액(碑額)이 희미하지만 보였다. 비액은 ‘南寶薹馨碑(남보대형비-남쪽의 보배로운 유채꽃 향기 비)’이었다.
1900년 가을에 오행산을 방문한 징계(澄契) 스님은 이 동굴에 들어와 불상에 참배하고 이들 비문을 읽고 시를 읊었다.
藏眞洞勒石
장진동의 비석
海上飛來鶴騎輕
바다 위에는 신선이 학을 타고 가벼이 날아오고,
雲門早已証無生
구름 문(절)에서 이미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였네.
蓮臺桂宇秋濤響
연대계우(蓮臺桂宇, 극락, 달-오행산)에는 가을 파도 소리 울리고,
瑤草琪花石竇明
기화요초(琪花瑤草)는 돌 구멍을 밝게 하네.
遺翰日星垂萬古
남긴 글은 해와 별과 같이 만고에 드리우고,
前身烟月認三清
전생의 안개와 달(신선술) 수련은 삼청(三清)을 알아보네.
冷風應有神仙住
찬 바람은 응당 신선이 머물러 있음이고,
夜夜雙鳧躡玉京
밤마다 쌍오리는 옥경(玉京)에 오르네.
*무생법인(無生法忍, anutpattika-dharma-kṣānti): 모든 법(法)의 불생불멸을 체인(體認)한다는 의미로, 비교적 초기부터 대승불교 문헌에서 나타나는 개념이다. 무생법인은 보살이 대승불교의 진리인 공(空)에 대해 확신함을 의미한다.
*삼청(三清): 도교의 이른바 삼동교주(三洞敎主)가 거하는 최고의 선경(仙境), 즉 삼청경(三淸境)의 준말. 삼동교주는 옥청경 동진 교주(玉淸境洞眞敎主)인 원시천존(元始天尊), 상청경 동현 교주(上淸境洞玄敎主) 영보천존(靈寶天尊), 태청경 동신 교주(太淸境洞神敎主) 도덕천존(道德天尊).
*쌍오리(雙鳧): “상서랑(尙書郞) 왕교가 현종 때에 섭현(葉縣)의 현령이 되었다. 왕교는 신선술(神仙術)이 있었는데, 매달 삭망(朔望)이면 섭현에서 조정으로 와서 조회에 참여하였다. 그가 그렇게 자주 오는데도 타고 온 수레나 말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황제가 태사(太史)를 시켜서 몰래 살펴보게 하였더니, 왕교가 올때에는 항상 오리 두 마리〔雙鳧〕가 동남쪽에서 날아오는 것이었다. 그물을 쳐서 그 오리를 잡아서 보니 그물에 걸린 것은 신발 한 켤레이었는데, 바로 조정에서 하사한 상서랑의 신발이었다.”고 하였다.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王喬》
*옥경(玉京): 백옥경(白玉京). 도가(道家)에서 이른바 천제(天帝)가 있다는 황도(皇都)를 말한다.
1883년 초 쥘 페리(Jules Ferry)가 정권을 잡으면서 프랑스는 대외 팽착 정책을 추구하여, 베트남 점령을 위한 군사비를 의회에서 승인 받았다. 육군이 6월 통킹 델타를 점령하고 해군이 8월에 후에 외곽의 투언 안(Thuận An) 항을 함락하자, 고등판무관 프랑수아 쥘 아르망은 후에 조정에 자기의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거절한다면, ‘안남(安南)’이란 이름은 역사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말과 함께.
후에 조정은 1883년 7월 뜨 득 황제가 사망하자, 죽 득(Duc Duc 育德)이 제위를 이었다. 섭정 응우옌 반 뜨엉(阮文祥)과 똔 텃 투옛(尊室說)은 즉위한 지 3일 만에 죽 득을 독살하고, 뜨득 황제의 이복동생을 옹립하여 연호를 히엡 호아(協和, 1883년 7~11월)라고 했다.
히엡 호아 황제가 즉 한 지 한 달 만에 받은 최후통첩에 후에 조정은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 협상단을 파견하여 8월 25일 이른바 아르망 조약(제1차 후에 조약, 계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고, 외교권도 프랑스에 넘어갔다.
이에 좌절감을 느낀 응우옌 푹 홍 빈(Nguyễn Phúc Hồng Vịnh, 阮福洪영(永+舟), 1851~?)은 함룡산(Hàm Long, 含龍山)에 들어가 초막을 짓고 은둔하고 아호를 여여도인(Như Như đạo nhân, 如如道人)이라 하였다. 그는 민망 황제의 손자인 응우옌 미엔 탄(Nguyễn Mien Thanh, 阮綿寈, 1830~1877)의 3째 아들이었고, 은둔 전에 관직은 한림원 시강(翰林院侍講)이었다.
1898년에는 바오 꾹 사(Báo Quốc, 報國寺)에서 승려가 되었고 법명은 징계(Trừng Khế, 澄契)였다.
1900년 가을에 오행산을 여행하며 다른 동굴은 황제가 내린 이름이 있으나, 속칭 등롱동(燈籠洞)이라 하고 특별히 명명된 이름이 없어서 동행한 승려의 요청으로 그 동굴을 ‘선취동천(鮮翠洞天 TIÊN THÚY ĐỘNG THIÊN)’이라 이름하였다. 그래서 후에에서 오행산을 거쳐 호이안까지 석 달 동안 여행하며 지은 시 57수와 수도 후에로 돌아온 뒤에 지은 시, 8수를 덧붙여서 시집 이름을 <선취동천음초(鮮翠洞天吟鈔, TIÊN THÚY ĐỘNG THIÊN NGÂM SAO )>로 이름 붙였다. 이 시집은 후에의 불교 사적을 집성한 <<함룡산지(HÀM LONG SƠN CHÍ, 含龍山志)>>에 부록 제2권으로 실려 있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베트남의 외세에 대한 배타심과 유교적인 충성심이 결합된 근왕 운동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근대적인 민족주의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중국에서 들어온 루소의 민약론(民約論), 스펜서의 진화론을 비롯하여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의 사회진화론자들의 저작과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량치차오(梁啓超)의 무술정변기(戊戌政變記), 신민총보(新民叢報), 영환지략, 중동전기본말(中東戰紀本末), 일본유신삼십년사(日本維新三十年史) 등의 신서(新書)가 소개되어 베트남 지식층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판 보이 쩌우는 근왕운동에 가담했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가서 량치차오(梁啓超)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량치차오의 조언으로 민족의식을 분발시키는 역사서, <<월남망국사>>를 집필하였다. 이 책은 곧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소개되어, 만해 스님이 읽고 민족 독립의 의지를 젊은 승려들에게 고취하기도 하였다. 나는 월남망국사를 영환지략과 함께 설악산 백담사의 만해기념관에서 보았다.
영응사에서 올라와 서쪽으로 가니 남쪽 절벽에 동굴이 있고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발목이 불편하지만, 계단을 올라 동굴 안을 보니 가운데에 노랑 가사를 입은 입불상을 모셔 놓았고, 그 뒤의 좁은 틈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곳은 운통동(雲通洞)이었다.
3
다시 서쪽으로 가니 바위 절벽에 사람이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문을 통과하여 내려가니 제법 넓은 평지가 있고 다시 네거리가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 서쪽으로 가니 절벽으로 좁아진 길목에 절이나 궁궐에서 본 2층의 아치형 석문이 있었다.
2층 아치형 문에는 백색의 대리석으로 조각한 백의의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고 일층 문미(門楣)에 민망 18년(1837)에 민망 황제가 행차하여 쓴 ‘玄空關(현공관)’이라는 웅필이 새겨져 있었다. 문을 통과하여 내려가니 화엄동(華嚴洞)이라는 동굴이었다.
삼굴(三屈) 자세의 백의(白衣)의 관세음보살이 정병을 아래로 기울여 붓는 모습의 입상이 정면 높은 곳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 옆의 벽에 비문이 2개 새겨져 있었지만 글씨가 작고 희미하여 거의 읽어볼 수가 없었다.
여행 뒤에 찾아보니, 2개의 석비(石碑) 중 큰 것의 가로로 쓴 비액(碑額)은 ‘普陀山靈中佛(보타산영중불)’이다. 1640년에 혜도명(蕙道明) 선사(禪師)가 지은 것이었다(1640, 普陀山靈中佛, 蕙道明禪師).
베트남 자료에는 평안사(平安寺, chua Binh An) 창건에 시주한 사람이 82명인데, 호이안에 있는 일본영(Nhat Ban dinh, 日本營)과 종본영(Tung Ban dinh, 從本營)에 거주하는 일본인 7명이 참여하였다. 이름은 헤이자부로(平三郞), 쇼고로(宋五郞), 슌몬(峻門), 아치코(阿知子), 시치로 베이(七郞 兵衛), 아키우(何奇采), 헤이자 에몬(平左 衛門)인데 전체의 18.2%이다. 명나라 사람은 섭성공(葉聖公), 여종오(呂宗吳), 곡오이(梏吾耳) 3인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나가사키, 쿄토, 사카이 등지에서 쇼군의 특허를 받고 베트남, 필리핀, 타이완, 싱가폴 등 동남아시아와 슈인센(朱印船)의 무역이 있었다.
일본 상인들이 항해 중에 험한 파도로 선박이 침몰할 위기 속에서 관음경(觀音經, 법화경(法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지성으로 독송하자, 파도 속에서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상인들을 구하였다. 이후 호이안(會安)에 살던 일본 상인들이 시주하여 화엄동(華嚴洞)에 이른바 ‘파도 속에서 나타난 관세음보살(滝見觀音)’ 상을 조성하고 산 이름을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을 줄여서 보타산(普陀山)으로 불렀다.
『슈인센 시대의 일본인-소멸한 동남아시아 일본인 마을의 수수께끼(朱印船時代の日本人-消えた東南アジア日本町の謎)』(오구라사다오(小倉貞男), 中公新書, 1989)에 의하면, 이 비석에는 1640년에 시주한 10명의 일본인 이름과 기부액이 새겨져 있다.
당시에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취하였지만 교역은 중국 상선의 나가사키(長崎) 항을 경유하여 당분간 계속되었다. 호이안의 일본인 마을을 일본영(日本營)이라고 하였다. 비문의 시주자와 금액의 예로, ‘일본영(日本營) 히라사부로(平三郎) 자(字) 복야(福耶) 응우옌 씨(阮氏) 천(賎-베트남인 부인) 호(號) 자광(慈廣) 삼보(三寶)에 시주하는 돈 500 꿰미(貫)’, ‘일본영 시치로베에(七郎兵衛) 응우옌 씨(阮氏) 자(慈) 호 묘태(妙泰) 시주한 돈 이십 꿰미로 전답을 매입’ 같은 것이 있고, ‘일본국(日本国) 챠야타케시마카와카미카베에(茶屋竹嶋川上加兵衛) 아사미와치로(浅見八郎) 동전(銅錢) 570근(斤)’처럼 호이안에서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거금을 보내 온 경우도 있었다.
스미야(角屋) 씨는 호이안에 살면서도 120돈(匁)의 은을 이세신궁(伊勢神宮)에 바치기도 하였다. 그는 만년에 편지(手紙, 文通)를 보내, “호이안에 절을 세우려고 합니다. 종과 절 이름을 쓴 편액을 만들어 보내주십시오. 디자인은 꽃으로 하고, 테두리에는 용이 들어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후 ‘편액은 고승에게 의뢰하여 써서 보내주었고, 절 이름은 마츠모토사(松本寺)였다’ 고 하는데,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다.
그 뒤의 편지는 스미야의 부고였다. 베트남 현지 여성이었던 부인은 남편이 죽고, 마츠모토사에 살았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일본까지 해저(海底)에 큰 용이 있어서, 용이 난폭해지면 일본에 지진이 일어난다는 말을 믿은 호이안의 일본인들이 용의 급소인 머리에 일본도(日本刀)를 박는 목적으로 내원교(來遠橋)를 건설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인들은 일본과 호이안을 내왕하면서 감각적으로 환태평양지진대를 알고 있었기에, 내원교를 세워서 일본의 안전을 기원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 내원교가 수리 중이어서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다리에는 도교의 존상들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비문 앞쪽에 큰 글씨의 해서체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가가서 머리 위의 그 글을 읽어보니 중간에 희미하여 보이지 않거나 이체자가 들어 있어서 무슨 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끝의 작은 글자들을 읽어보니 ‘프랑스에서 돌아오는 길(大法國回程)’ 이란 구절이 눈에 띄어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휴대폰으로 각도를 달리하여 몇 컷의 사진을 찍어왔다.
관음상에서 왼쪽으로 돌아 계단을 내려가니 엄청난 동굴이 나타났다. 정면 높은 곳에 선정인의 좌불이 조성되어 있고 그 바로 아래에는 현장법사를 닮은 승려가 모셔져 있는 현공동(玄空洞)이 나왔다.
불상 아래의 둥근 마당 가에는 인도의 석굴사원의 법당을 닮은 불전, 재물의 신 관우를 모신 제단 등 4곳에 성상이 모셔져 있고, 입구 좌우에는 채색이 된 각각 2명의 사천왕상으로 보이는 존상이 모셔져 있었다. 천연의 동굴 사원이었다.
광장으로 내려가니 높은 천장에 큰 구멍이 2개가 뚫려 있어서 햇빛이 굴 안으로 들어왔다. 천장의 구멍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공습으로 생긴 것도 있지만 예전부터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해가 머리맡에 올라오는 정오 무렵에는 햇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굴속으로 쏟아진다고 한다. 삼장법사가 구출하러 올 때까지 오백년 동안 벌을 받고있는 손오공의 얼굴이라고 하는 눈, 코, 입 모양이 뚜렷한 천연의 바위가 있다고 하고, 참파국 시대에 조성한 힌두교 석상의 밑바닥 부분이 있다고 하나 현장에서는 안내받지 못했다.
현공동에서 돌아나와 음료수를 파는 노점이 있는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가니 삼태사(Chùa Tam Thai, 三台寺)가 나왔다.
삼태라는 이름은 그곳 오행산 중 수산(水山)의 봉우리 3개가 큰곰자리의 삼태성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절에는 민망 황제가 쓴 둥근 동판이 보존되어 있어서 관람할 수가 있다고 하나 역시 뿔뿔이 흩어져 다니다 보니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삼태사 대웅전 마당에는 미륵불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포대화상 석상이 있고 그 앞에는 3개의 아치형 석문이 있었다. 문미(門楣)에 1825년에 민망 황제가 방문해 쓴 친필 편액으로 보이는 ‘三台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문에는 이끼가 끼어 고색창연한 맛을 주었다. 삼태사 문 앞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우람한 고목이 좌우에 있었다.
오행산에서 가장 고찰인 삼태사는 1630년에 처음 지었고, 1826년 민망 황제가 9존의 불상과 3좌의 동종을 하사하였다. 민망황제 이름이 들었고 불꽃무늬가 테두리에 주조되어 있으며 불속의 심장 모양이라서 이름이 ‘화심(火心)’이라고 하는 동패(銅牌)에는 ‘我/ 如來以法王 御/世弘濟人天 變現十/方虛空常住 作十大/功德 而炎方獨/厚焉(앞) 明命陸年 吉日造(뒤)-우리 여래께서는 진리의 왕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널리 인간과 천신을 구원하시고, 시방 허공계에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시며, 늘 머무시며 열 가지 크나큰 공덕을 지으시지만, 남방에서 유독 공덕을 두터이 지으시나이다.(앞) 민망 6년(1825) 좋은 날 주조함(뒤)’라는 글이 들어 있다. 또 절에는 민망 황제의 친필 편액이 전하고 있다. 1907년 태풍으로 사탕수수액을 넣고 벽을 쌓은 옛 절이 무너져, 현재와 같이 기와집을 지었고, 1946년, 1975년 두 차례 중수했다. 국찰(國刹)인 삼태사에는 응우옌 왕조의 황제가 행차하여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묵던 행궁(行宫) 터가 남아 있다.
징계 스님은 1900년 가을에 이곳 삼태사 선방에서 묵으며 시를 읊었다.
宿三台禪堂
삼태사 선방에서 묵으며
似與山僧契宿盟
산승(山僧)과 같아서 숙세의 서원에 계합(契合)하고,
偶然風雨滯回程
우연히 비바람에 돌아가는 길 머무네.
濤音撼寺山應倒
파도 소리 절을 흔드니 산은 응당 뒤집어지고,
風勢翻沙海欲傾
바람이 모래를 날리니 바다는 기울어지겠네.
一百八聲鯨杵斷
백팔 종소리는 고래 공이(고래 모양 당목(撞木))를 끊고,
三十六洞蝶魂萦
서른여섯 동굴에 나비 혼(장자 제물론 호접몽-영혼)이 맴도네.
天涯旅夜燈相伴
하늘가를 여행하는 밤, 등불을 짝하고,
炤徹禪心倍覺明
밝게 사무치는 선심(禪心), 깨달음을 배가하네.
삼태사 삼문을 나와 서쪽의 마당으로 들어가니 기역 자 형태로 두 건물이 있었다. 습기와 더위가 많은 자연환경 때문인지 건물에 문이 없이 기둥만 있고 개방된 공간이다. 첫째 건물은 열 개의 기둥에 9칸의 큰 건물이다. 검은 빛이 도는 기둥과 목재가 오랜 세월을 보여주었다. 건물 안으로 오르는 입구 계단 아래의 마당에는 석조 사자상이 좌우로 놓여 있었다.
건물 안을 들여다 보니 고승의 위패와 사진, 아라한상 등이 봉안되어 있고, 천장에는 歷朝祖德(역대 조정의 조사들의 덕), 道淵德渚(도의 연못 덕의 물가), 靈嶽應機(신령한 산악에 답하는 마음), 慈華秘傳(자비의 꽃이 몰래 전하네) 등의 횡액이, 기둥에는 佛即心 心即佛 心齋成佛, 人弘道 道弘人 道不遠人(부처는 마음이고 마음이 부처이니 마음 공부를 하여 부처를 이루고, 사람이 도를 넓히고 도가 사람을 넓히니(논어 위령공)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네.(중용)/ 積善有由来 仙源慶衍, 得道謂可量 法派榮陞(적선은 유래가 있어서 무릉도원의 경사가 넘치고, 득도를 헤아릴 수 있을 만하고 법의 갈래 번창하고 높아지네.)/ 優鉢花開 香遍禅林 光祖印, 菩提樹長 蔭垂福地 振尊風(우담바라꽃이 피어 향기가 선림(禪林)에 가득하여 조사의 인가를 빛내고, 보리수가 자라서 복지동천(福地洞天)에 그늘을 드리우니 선풍(禪風)을 떨치네.) 등의 대련이 걸려 있었다.
서쪽 건물은 3칸 건물인데 가운데 칸에는 12비(臂)의 관음상이 모셔져 있었다. 12비 중 가운데 합장한 2비 외에 나머지 10비는 연꽃, 법륜, 염주, 복숭아 등의 물건을 쥐고 있었고, 그 앞 계단 아래 마당 좌우에는 석조 사자상이 놓여 있었다. 관음전인데 그 문미에는 ‘方丈(방장)’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어서, 삼태사가 선종 사찰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마당을 지나가는 스님의 가사는 고동색이었다. 마당에는 많은 분재가 놓여 있고 황매화가 피어 있었다.
마당에서 남쪽 샛길로 하여 비탈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그곳에 망강대라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 가운데에 누구의 글씨인지는 모르겠으나, ‘望江臺(망강대)’라는 웅필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민망 황제나 징계 스님도 여기에 올라 남쪽에서 흘러와 한강으로 들어가는 강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굽어보니 가운데에서 약간 동쪽에 직사각형의 목산이, 가운데에 삼각형으로 작고 낮은 화산이, 그 앞의 약간 서쪽에 산세가 웅장한 삼각형이지만 정상이 평평한 금산이, 서쪽 끝에 산세가 약하고 낮은 세 봉우리가 모여 있는 토산이 보였다. 4산이 다낭의 주택과 건물과 추분강(秋盆江) 강물과 도로 사이로 솟아 있었다.
징계 스님도 이곳 오행산 수산에 와서 망강대와 삼태사, 운통동과 운근월굴을 답사하고 시를 지었다.
題五行山
오행산에 붙임
望江臺上衆峰迴
망강대(望江臺) 위에서 뭇 봉우리 둘러보고,
仄磴飛梯詰屈來
비탈길 사다리 타고 굽히고 펴며
내려왔네.
洞裏山深通五蘊
(운통동)동굴 안은 깊어 오온산(五蘊山)과 통하고,
巖凹寺古過三台
바위는 오목하여 삼태사(三台寺) 옛 절을 지나가네.
頑風怪鳥令人訝
억센 바람, 괴이한 새가 사람을 놀라게 하고,
倒樹懸猿見客猜
거꾸로 선 나무, 매달린 원숭이가 나그네를 샘하네.
行脚老拚雲月窟
행각 노승이 운월굴(雲月窟-수산의 雲根月窟)을 쓸고,
四崖壁立石門開
사방에 벼랑이 섰고, 돌문이 열렸네.
*오온산(五蘊山): 오행산 중 수산(水山)의 운통동(雲通洞)에 있다.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
망강대에서 돌아 나오는데, 여행 내내 부군과 손잡고 다니던 미경샘이 남편을 보지 못했느냐고 나에게 물으며 이리저리 찾고 있었다. 원앙처럼 금슬이 좋은 두 분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초전법륜상 앞에서 미리샘에게 설명을 해주던 법련 거사님이 출구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나에게 부처님의 첫 제자가 된 콘단냐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물었다. 주차장에서 우리 돈 천원을 내고 공용 화장실을 이용하였다.
4
오행산에서 돌아나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차가 많지 않은 도로가의 식당에서 베트남 음식인 분짜를 먹었다. 우리 외에도 한국인 관광객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 건너편 앞 자리에 같은 교무실에서 함께 오랫동안 근무한 재성샘이 보였다.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하였다. 부부가 함께 베드민턴 클럽 사람들과 관광오셨다고 하였다. 다낭은 한국 관광객이 넘쳐나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은 인연의 그물이 시공에 촘촘하게 있음을 말해준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있지만,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좋은 인연을 지어야 함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도심에서 가까이에 있는 공항으로 향하였다. 이제까지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신 가이드 윤실장님은 작별 인사를 하고 박수를 받으며 중간에서 내렸다. 관유샘이 이번 베트남 여행을 마무리하는 멘트를 하셨다. 나는 가이드 흥과 운전기사 선에게도 박수를 보내자고 제안하였다. 흥과 선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 번졌다. 공항에 내려서 일주일 동안 은근한 정이 들었던, 아들 같은 청년, 흥에게 작별 인사를 하니, 카톡으로 문자를 보내라고 하였다.
캐리어를 화물로 부치고,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신호음이 울렸다. 검색원이 나보다 먼저 우리말로 확인하였다. “수술!?” 작년 4월에 당한 발목 골절상 수술 때 설치한 발목의 철심 때문에 금속탐지기에서 소리가 났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탑승구 앞에 짐을 두고 공항 구내 면세점 쇼핑을 하러 가고, 발목이 아직도 불편하여 걷기에 불편한 나와 목감기로 힘든 계림샘, 관유샘, 옥현샘 등 몇 분은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점심을 이미 먹었기에 사람들은 공항 면세점 쇼핑을 하러 가고 오지 않고, 다른 분들은 그냥 쉬고 있었다. 벤치 가까이에는 김밥, 떡볶이, 어묵을 파는 집도 있고, 베트남 쌀국수, 포(Pho) 식당도 곁에 있었다. 베트남 현지에서, 내가 평소에 먹기를 좋아하는 쌀국수를 다시 먹어볼 기회를 놓칠 것 같았다. 첫날, 동허이에서는 감기로 열이 올라 입맛이 떨어져 쌀국수를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식당으로 아픈 다리를 하고 무작정 들어가서 카드를 내밀고 주문하였다. 혼자서 큰 그릇에 담겨나온 쌀국수를 먹고 있자니, 한국인 관광객들이 다가와서 맛있느냐며 물었다. 조금 뒤에 관유샘과 계림샘도 함께 들어오셔서 주문했다. 큰 그릇에 뜨끈한 국물에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나는 쌀국수와 고명으로 넣어주는 소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무리 여행 중이고, 발목이 불편하고, 쌀국수를 먹을 욕심에 판단력이 떨어져도 그렇지, 곁에서 감기로 힘든 몸을 하고 누워서 쉬는 계림샘과 휴대폰을 보고 계시는 관유샘께 함께 가자고 권하지도 못하고, 사 드리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계림샘과 서연샘으로부터 평소는 물론이고, 여행 중에도 약, 꿀, 옷, 대추차, 과일 등 온갖 것을 얻었는데 말이다. 한참 뒤에 아내가 베트남 음식인 반미 샌드위치를 2봉지 사 왔다. 즉시, 계림샘과 관유샘에게 기내 저녁으로 드리라고 하였다. 술을 마시거나 어려울 때, 인간의 숨은 본능과 이기심이 나타난다고 한다. 내가 그러했다.
비행기가 타이완을 지날 무렵 창문 밖을 내다보니, 해가 지고 서녘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 멀리 여객기 한 대가 그야말로 쏜살같이 남녘으로 지나갔다. 올 때는 기류 때문에 5시간 걸린 비행시간이 3시간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20년 전에 샀던 창작과비평사의 교양 문고 시리즈의 하나인 《당시(唐詩) 읽기》를 다시금 읽었다. 심경호 교수가 번역한 요시까와 코오지로오(吉川幸次郞)와 미요시 타쯔지(三好達治)의 해석이 탁월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읽는 두시(杜詩)의 맛이 더욱 각별하였다.
처음 여행한 베트남의 사찰, 궁궐, 명승지에서 황제, 관료, 지식인, 승려가 지은 한시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축복 같은 유산을 읽고 감상할 수가 있어서 행복했다.
春望
춘망
國破山河在
나라 깨어져도 산하는 그대로,
城春草木深
성에 봄 들어 초목 깊어라.
感時花濺淚
시절에 느껴 꽃도 눈물을 쏟고,
恨別鳥驚心
이별을 한하여 새도 놀란다.
烽火連三月
봉화가 삼월에도 이어져,
家書抵萬金
집 편지는 만금값.
白頭搔更短
흰머리는 긁는 대로 짧아져,
渾欲不勝簪
도무지 비녀를 못 이길 지경.
유인선 교수의 <<베트남의 역사>>에는 우리와 베트남의 역사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하고 있다.
당은 윈난(雲南)의 남조국(南詔國)의 5만 군사를 격퇴하기 위해 864년 가을에 고변(高騈)을 안남도호총관경략초토사(安南都護總管經略招討使)로 임명하였다. 866년 겨울 고변은 라 타인을 포위 공격하여 단추천 등 남조군 3만을 참수하고 그 세력을 안남에서 몰아냈다. 이후 당은 안남도호부를 철폐하고 정해군(靜海軍)을 설치하고 고변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라 타인의 수비를 튼튼히 하고 다리와 제방, 수로를 건설하며 토착신앙을 존중하고 불교와 도교의 사원을 세워 민심을 수습하였다.
868년 가을 고변은 당으로 돌아가고 그 손자가 후임 절도사로 파견됐다. 뒤이어 당에서 농민반란군 황소의 봉기(875~884)가 일어나고 고변이 토벌 총책임자가 되고, 그의 종사관(從事官)최치원이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었다. 고변과의 이런 인연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에는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라는 베트남 관련 글이 실려 있다.
베트남 리 왕조 년 똥(Nhan Tong, 仁宗, 1072-1127)의 양자 턴똥(Than Tong, 神宗, 1128-1138) 외에 또 다른 양자 즈엉 꼰(Duong Con, 陽焜)이 있었는데, 턴똥이 즉위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남송으로 도피했다가 우리나라 경주로 건너와 한때 정착했다. 그 후손이 강원도 정선으로 이주하여 정선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고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트남에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리 왕조가 멸망하자 후에 똥(惠宗, 1211~1224)의 숙부 리 롱 뜨엉(李龍祥)이 1226년 망명길에 올라 배를 타고 표류하다가 황해도 옹진에 도착했고, 화산(花山)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설로 알려져 있지만, 베트남에서는 거의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1592년 말 막 머우 헙은 찐 둥의 공세에 동 낀(東京)이 점령당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막(莫)씨 정권은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막을 내리고 레(黎) 왕조가 부활했다.
1597년 레 왕조는 책봉사(冊封使) 풍 칵 코안( Phung Khac Khoan, 馮克寬)을 연경(燕京)에 보냈는데, 당시 그가 만난 조선 사신 이수광(李晬光)과의 친교에 대한 이야기가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실려 있다. 풍 칵 코안이 명 황제의 만수절(萬壽節)에 하시(賀詩) 30수를 바쳤는데, 그 시가 맘에 들었던 황제는 판각을 명했고, 이때 이수광이 그 서문을 썼다는 것이다. 이수광은 귀국해 풍 칵 코안과 문답한 내용과 시들을 모아 <<안남국사신창화문답록(安南國使臣唱和問答錄)이라는 책을 엮었다. 이 책은 당시 조선의 문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베트남 붐을 일으킬 만큼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부산공항에 착륙해 8시 31분에 가이드 흥에게 카톡으로 무사히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넣었다. 올 때 탔던 신라관광의 버스로 경주를 거쳐서 포항 연화(蓮花)재 주차장에 도착하고, 집에 돌아오니 밤 10시 30분이 넘었다. 단체 카톡에 귀가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여행을 하고 돌아온 지 벌써 100일이 넘었다. 내 휴대폰과 아내가 들고 간 캐논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들에 지나간 시공간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인터넷이 있어서 남방의 머나먼 타국의 지식, 정보들을 뒤지고 찾아서 여행의 시공을 복원할 수 있었다. 아내가 정년 퇴임 기념으로 딸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가고 없는 시간에 서연샘이 만들어 주신 국과 반찬으로 밥을 맛있게 먹고 여행기 집필을 끝낼 수가 있었다. 계림·서연샘의 한결같은 의리와 인정에, 동행하신 분들의 친절에 깊이 감사드린다.
에이포(A4) 종이에 10포인트 글씨로 162쪽의 여행기 쓰기를 끝내고 보니, 매실이 토실해졌고, 모란이 지고 난 밤공기에 아카시꽃 달콤한 향내가 싸하게 퍼져온다.
***
화엄동(華嚴洞) 비문 해독기
지난 1월 말에 베트남 중부 지방을 여행하였다. 다낭에 있는 명승지인 오행산(五行山)의 수산(水山)에 올랐다. 여러 개의 석회암 동굴에는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현공관(玄空關)을 지나 현공동(玄空洞) 입구의 화엄동으로 들어갔다. ‘현’은 노자와 천자문 첫머리에 나오는 그 ‘가믈 현’이고, ‘공’은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그 공이니, 현공관은 심오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뜻이다. 화엄동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고, 그 옆의 벽에는 공덕비들이 새겨져 있었다. 비문들의 글씨는 희미하고 작아서 읽어볼 수가 없었다. 그 옆에 행서 기법이 섞인 해서체로 새겨진 글이 있었다. 석회암 벽이라서 글씨가 희고 선명하게 보여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중간에 여러 글자가 보이지 않거나 이체자가 있어서 현장에서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카메라로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다.
섬이 융기하여 이루어진 오행산은 그 이름이 서유기(西遊記)에 나온다. 손오공(孫悟空)이 천상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바위에 눌려 벌을 받은 부처님 손의 다섯 손가락이 굳어서 된 산이 오행산이라는 전설이 있다. 오행산의 오행은 음양, 오행의 오행으로 금·수·목·화·토인데, 그중에 수산이 제일 유명하다. 오행산에는 동굴들이 있어서 참파(占婆) 왕국 시대의 힌두교 신전 유적, 유물이 파편이지만 남아 있고, 삼태사(三台寺), 영응사(靈應寺)를 비롯한 응우옌 왕조 시대(1802~1945)의 불교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여행에서 돌아와 여러 차례 사진을 보고 동굴 벽에 새겨진 글을 읽어보고 싶었지만, 이체자와 판독이 되지 않는 글자들 때문에 해독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였다.
검색 사이트 ‘구글 베트남’에서, 분명히 유명한 관광지인 이곳의 이 글은 누군가 취재한 것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찾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한글세대처럼 고전 언어인 한문을 배우지 못해 자신들의 뿌리와 단절된 베트남의 젊은 세대와 이체자와 판독되지 않는 글자 때문에 같은 한자문화권이지만 나 같은 외국인이 접근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동굴 벽에 새겨진 비문들이 2019년에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베트남의 문화재 당국에서 학술조사를 했을 것이고, 관광자료집에는 이 글이 실려 있을 것이다.
戀(1闕)懸愚悃歸舟計客程/
思(2涵)(3滄)海闊心共白雲征靜/
夜星河近晴天(4島)嶼明五行/
山色秀旬月待金旌/
(5從?)(6來)甲(7午)奉使大法國回程經地中海/
有作因記于此金(8江)又書
사진으로 잘 보이지 않는 글자(1, 2번)를 선입관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문맥을 따져서 복원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선명하게 보여도 이체자(3, 4번)는 사전을 찾아도 나오지 않아서 다시 답답하였다.
전체 문장을 7자로 끊어서 읽으니, 칠언절구는 아니고, 다시 5자로 끊어서 읽으니, 오언율시였다.
이체자를 시의 특성대로 대구(對句)와 문맥으로, 또 글자의 모양을 직관적으로 보았다. 4번을 뒤의 '섬 서(嶼)'와 연결하고 획과 글자의 모양으로 추리하니, ‘도서(島嶼)’의 '섬 도(島)' 자의 이체자임을 알 수가 있었다. 3번은 클 군(涒)자로 보이나 윗부분에 획이 있어서 미지수였다. 백운(白雲)과 대구를 이루는 '○海'인 것만은 분명하였다.
시를 새긴 사연을 적은 낙관(落款) 문장에서 '대법국(大法國)'은 유럽의 프랑스 본국이고, 지중해는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로 둘러싸인 바다(the Mediterranean Sea)이다.
5번은 글자 획의 아래 부분이 조금 남아 있었다. 뒤의 래(來)자와 연결하면 종(從)자로 보인다. '종래(從來, 예전), 갑오년에 프랑스에 사신 갔다'로 읽혔다.
7번은 동학농민혁명, '갑오'개혁 때문에 '갑오'라는 간지가 익숙하고, 모양도 비슷하여 ‘오(午)’자로 보이고, 8번은 ‘왕(汪)’자로 보이지만 분명치 않았다. ‘김왕(金汪)’이 누군지, 구글 베트남에서 검색되지 않았다.
화엄동 벽에 새겨진 글은 '프랑스(大法國)'에 황제의 사신으로 다녀오며 '지중해(地中海)'를 항해하는 배에서 지은 시를 이곳에다 새기고, 지은이가 직접 쓴 붓글씨이다. 시도 아름답고 글씨도 달필이다.
시의 원문은 대강 파악되는데, 이 시의 지은이가 누군지 미스터리이었다. 답답하여 검색포털 ‘구글 베트남’은 포기하고, ‘야후 재팬’에서 첫 구를 검색하니, 베트남의 어느 지식인이 베트남 한시(漢詩) 백가(百家)의 시 중에 한 수로 이 시를 소개하고 해석해 놓았다.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분이 올려놓은 이 시에는 오행산 화엄동 벽에 새긴 이 시와 다른 글자들이 보인다. 내가 사진으로 판독한 것과 대조하니, ① '정성 곤(悃)'은 의미가 비슷한 '생각 려(慮)'로, ② '젖을 함(涵)'은 의미가 닮은 '머금을 함(含)'으로 되어 있었다. ③ '푸를 창(滄)'은 이체자이고, ④ '밝을 명(明)'은 '어두울 명(冥)'으로 되어 있어서, '뜻'은 반대이고 '음'은 같았다. ⑤ 이 시의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①, ②는 의미가 통하기에 문제가 없고, ③은 이체자를 깔끔하게 해결해 주었으며, ④는 문맥으로 보면 '명(冥)' 자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명(明)과 명(冥)의 음이 같아서 시집의 판본이 잘못되었거나 옮긴이가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
지은이의 인적 사항을 중국어 위키백과로 확인하니, 아호가 ‘금강(金江)’이고, 이름은 ‘응우옌 쫑 헙(阮仲合)’이며, 원명은 응우옌 투옌(阮瑄)이다! 만년에 영충자(永忠子)라는 봉호(封號)를 받았다. 동굴 벽에 새긴 ‘왕(汪)’ 자는 ‘강(江)’ 자를 잘못 새긴 것이 확실해 보였다.
지은이의 행적을 유인선 교수의 『베트남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쟁이냐 항복이냐를 선택하라는 프랑스의 최후통첩을 받은 후에(Hue, 順化) 조정은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 쩐 딘 뚝(Tran Dinh Tuc, 陳廷顯)과 응우옌 쫑 헙(Nguyen Trong Hop 阮仲合)을 정사와 부사로 하여 협상 대표로 파견하였다. 1883년 8월 25일 이들과 고등판무관 프랑수아 쥘 아르망 (Francois Jules Harmand) 사이에 이른바 아르망 조약(제1차 후에조약, 계미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 본국 정부는 청나라가 신경쓰여서 너무 많은 베트남 인구를 책임지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판단했다. 1884년 5월 주중 프랑스 공사 쥘 파트노트르(Jules Patenotre)를 후에로 파견하여 새로운 조약을 예부상서 응우옌 반 뜨엉에게 제시했다. 응우옌 반 뜨엉은 여기에 즉시 서명했다. 이른바 파트노트르 조약(제2차 후에조약, 갑신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베트남은 을사늑약 이후의 우리나라처럼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고, 이후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 역사의 갑신정변은 갑신조약 뒤에 일어난 청불전쟁과 연관되어 있었다.
지은이가 계미조약에 부사로 파견된 행적을 읽고, ‘갑오년’은 ‘갑신년’으로, ‘대법국’은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로, 지중해는 메콩강의 하구와 삼각주 또는 오행산이 바라보이는 다낭만의 연근해인 것으로 견강부회하였다. 사실과 추리와 상상이 뒤섞여 머리 속에서 스토리를 만들어내었다.
테니스 코트에서 맨발 걷기를 하며 곰곰이 생각하니, 원래 생각한 대로, 갑신년은 갑오년이고, ‘대법국’은 유럽의 프랑스 본국이고, ‘지중해’는 메콩강 하구나 다낭 연근해가 될 수 없고, 지중해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한 달을 항해하면 오행산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킴 지앙(金江) 응우옌 쫑 헙(阮仲合, 1834~1902)이 1894년 갑오년에 프랑스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중해에서 시를 지었고, 그 시를 이곳에 새긴 것이다. 시를 새긴 까닭은 오행산이 시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시를 보면, 지은이는 지중해에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조국 베트남의 수도 후에의 남쪽에 있는 유서 깊은 오행산을 다시 보려면 한 달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오행산은 베트남인들에게 고국을 대표하는 명승으로 보인다. 시에서 지은이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느껴진다. 혜초(慧超) 스님이 인도에 순례 가며 일남(日南, 베트남 중부)에서 고국 계림(雞林; 신라)을 그리워하며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실려 전하는 시가 연상된다.
月夜瞻鄕路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浮雲颯颯歸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緘書忝去便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風急不聽廻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我國天岸北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他邦地角書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日南無有鴈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誰爲向林飛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雞林)으로 날아가리.
익재(益齋) 이제현 선생이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쓰촨의 아미산 정상에 올라 천하의 태평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러 가고, 돌아오며 지은 시를 모은 서정록(西征錄)이나, 통신사들이 에도막부에 다녀오며 지은 시와 일기를 기록한 동사집(東槎集)처럼, 서사시집(西楂詩集)은 지은이가 프랑스에 다녀오며 지은 시를 모아 놓은 것으로 보인다.
보정대신 문명전 대학사 영충자(輔政大臣 文明殿 大學士 永忠子) 금강(金江) 응우옌 쫑 헙(阮仲合)이 오행산 화엄동에 이 시를 새긴 것은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가졌던 '진경(眞景)시대'에 포항의 내연산 삼용추(三龍湫)라는 천하의 명승에 조선 후기의 사대부 관료들이 찾아와 빼곡하게 자신의 이름을 새긴 일과 비슷한 일이다.
回程舟行地中海
돌아오는 길의 배로 지중해를 항해하며
戀闕懸愚悃(慮)
임금님 생각에 어리석은 정성(걱정)이 떠나지 않고,
歸舟計客程
돌아가는 배에서 나그네 여정을 헤아리네.
思涵(含)滄海闊
생각은 푸른 바다에 젖어(머금어) 광활하고,
心共白雲征
마음은 흰 구름과 함께 가네.
靜夜星河近
고요한 밤에 은하수는 가까워지고,
晴天島嶼明(冥)
비가 갠 날에 섬들은 밝네.
五行山色秀
오행산의 모습은 수려한데,
旬月待金旌
한 달을 금빛 깃발(을 단 배를 타고 항해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네.
*금빛 깃발(金旌): 응우옌 왕조의 국기, 사신의 깃발.
從?來甲午 奉使大法國回程經地中海有作 因記于此 金江 又書
예전?, 갑오년(1894)에 프랑스에 황제의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중해를 지나며 지은 시가 있어서, 여기에 새겨 기록한다. 금강(金江)이 또한 쓴다.
***
2024년 올해 1월에 베트남 중부를 여행했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Hue, 順化)의 뜨 히우 사(chua Tu Hieu, 자효사慈孝寺)에도 갔다.
이 절은 세계 4대 ‘살아있는 부처(living buddha)’로 추앙받은 틱낫한(Thich Nhat Hanh, 석일행釋一行) 스님이 1942년, 16세에 출가하여 사미승 시절을 보냈고, 2022년 96세에 열반하여 제5대 조사로 추존된 절이다.
여행 가기 전에, 스님이 36세에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쓴 일기에서 ‘수필’ 한 편을 읽었다. 이 수필을 읽으니, 스님이 일본의 전통 악기 고토(箏) 연주를 듣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작은 책이 <당신의 호주머니를 위한 장미(A Rose for Your Poket)>이었다. 이 책은 나중에 <<사랑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Teachings on Love)>>이라는 책의 제9장으로 들어갔다.
오래 전에 나는 제9장을 읽고 번역하여 부처님 오신 날과 어버이날이 오면 다시 읽어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선물했다. 이 글이 집필된 인연을 이번 베트남 여행을 앞두고 읽은 스님의 일기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1962년 12월 24 ~ 25일, 뉴저지, 프린스턴
생일이 지나고 이틀 뒤 나는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불교 사원에 갔다. 10월 보름이었고 어머니의 제삿날이었다. 그날은 미국에 불교가 전파된 지 70주년이 되는 날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3일간 열리는 축제의 첫날이기도 했다. 비록 대부분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긴 했지만, 여러 나라를 대표하여 2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큰 절-그 안식처는 안꽝 사원의 대웅전만 한 크기였다-은 아니었지만, 그 사원에는 ‘미국 불교 아카데미’라는 걸출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곳에선 불교 철학 코스와 수행은 물론, 일본어와 다도 그리고 꽃꽂이 수업도 열렸다. 그곳은 일본 정토종의 절이었는데, 선임 법사인 호젠 세카와, 델라웨어 대학교의 교수였던 필립스 박사가 돌보고 있었다.
미국에는 대략 8만 명의 불자들이 있는데, 중국과 일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워싱턴 디.씨.(D.C.)의 정토종 본사에서 최근 계를 받은 70명의 성직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고, 그들은 미국 전역에 살았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미국 대학에서 일본어와 일본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미국에는 54개의 크고 작은 정토종 사원이 있는데, 뉴욕의 사원은 워싱턴의 사원보다 작다. 기념행사에서 샛노란 승복을 입은 두 명의 상좌부 스님을 만났다. 코네티컷에서 오신 아누룻다 스님과 매사추세츠에서 오신 비니타 스님이었다. 스리랑카 대사인 수산타 데 폰세카 씨도 거기 있었다.
나는 아파트를 나와 331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있는 사원까지 다섯 블록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법회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그 법회는 효과적이지 않다. 미국에 불교의 씨앗을 심는 데 그런 법회는 효과적이지 않다. 정토종은 외부의 근원으로 보이는 것에서 구원 찾기를 강조한다. 이 접근은 유럽인과 미국인에게 익숙하다. 서구 교회에는 기독교가 전하는 구원의 말을 퍼뜨리기 위한 수많은 신학교와 유능한 성직자가 있다. 서양의 교회처럼 보이기 위한 정토종의 노력이 내게는 미국인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미국인들은 독립성에 높은 가치를 둔다. 아이들을 독립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기른다. 개인을 바로 세우고, 발달시키고, 깨우치게 하기 위해 선(禪)과 같이 자기 노력과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불교의 접근법이 미국인의 정신에 더 잘 맞는 것 같다. 기독교와 정토종은 신성의 개입 없이 구원을 성취하기에는 인간이 너무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사실 이곳에서 선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 서양에 선禪을 전한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 교수의 목소리는 이 나라 전역에 울림을 주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끝없이 계속되는 계획과 생각에 지쳐 있고, 선과 같은 길이 주는 고요와 자기만족에 목말라 있다.
미국인들은 일본 음식을 먹고, 고토(箏/일본 가야금) 음악을 듣고, 다도에 참여하고, 꽃꽂이 하는 것을 좋아한다. 법회가 끝난 뒤 고토 음악회가 있었다. 고토 연주는 지루한 법회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법회 동안 조금 산만해 보이던 두 미국인 사이에 앉아 있었는데, 그들도 그 음악을 즐겼다.
나 역시 그 음악이 좋았다. 연주자의 이름은 에토 키미오(衛藤公雄 Kimio Eto, 1924-2012, 일본의 저명한 고토 작곡, 연주자, 고토 음악을 대중화하기 위해 1950년대에 미국으로 가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명성을 얻음)였는데, 그는 친절하고 숨김없는 표정의 서른 살 안팎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검정 기모노를 입은 그는 젊은 남자의 세심한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무대에 올랐다. 나는 그의 시력이 나쁜지 궁금했다. 세키 법사가 그를 소개하자 에토는 천천히 자리에 앉아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의 존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결코 관중을 바라보지 않고 하얀 천이 드리운 단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미소는 고요하고 평온했다. 나는 그와 같은 미소가 이 나라에서 가능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불교 전파 70년을 기리기 위해 그의 연주를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님께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7’이라는 숫자가 자신에게 의미가 깊다고 했다. 아버지가 7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일곱 달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고, 고요한 얼굴에는 감동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믿음, 기억 그리고 슬픔의 가닥을 발견했다. 그는 자작곡을 연주했다.
첫 번째 곡은 <희망의 노래 希望の曲>라고 했다. 가락에 구슬픈 동경이 어려 있었지만, 견뎌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도 표현하였다. 두 번째 곡인 <가을바람>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의 향기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곡인 <믿음의 언어>는 자비의 길에 대한 헌신을 표현했다. 각각의 곡 다음에는 긴 침묵이 뒤따랐고, 그동안 관객들은 숨죽인 채, 그저 고요한 미소를 머금은 젊은 연주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세 번째 곡을 마치고 그는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말을 했다. 모두가 감동을 받은 듯했고, 나도 온몸으로 감동을 느꼈다. 아무도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고 짐작하지 못했다.
울고 싶었다. 몇 곡이 더 남았지만, 나는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세 곡의 아름다운 연주로 충분했다. 다소 우울한 기분으로 리버사이드 드라이브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나는 여전히 에토 키미오의 미소를 마음속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큰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없다. 나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왜 그의 미소가 나를 깊이 휘저었는지를 이해했다.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밤거리를 혼자 걷지 말라던 친구들의 경고가 떠올랐다. 지구상의 모든 도시가 그렇듯 뉴욕 또한 그 몫의 범죄가 있다. 나는 108번가를 가로질러 브로드웨이로 돌아왔다. 그때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은 부처님의 연꽃 얼굴처럼 둥글었다. 그것은 높이 솟은 고층 건물로 액자 모양이 된 한 조각 하늘에서 마법처럼 나타났다. 마치 달과 내가 같은 방향으로 함께 여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10월의 보름달, 어머니가 나와 함께 있었다. 달이 지평선 위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어머니가 나를 따라 사원까지 가셨음을 믿게 되었다. 법문 뒤 이어진 에토 키미오의 음악을 듣고 있을 때, 달은 사원의 지붕 위를 비추었다. 그리고 지금 그 달은 나를 따라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6년 전 10월 보름에 돌아가셨다. 한밤의 달은 어머니의 사랑만큼이나 부드럽고 경이로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 4년 동안 나는 스스로 고아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어머니가 꿈속에 나타났다. 그 순간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어머니의 죽음을 상실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어머니는 결코 죽지 않았으며, 나의 슬픔은 환상에 기인한다고 이해한다. 내가 여전히 베트남 중부 산악지대에 살고 있던 4월의 어느 날 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늘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슬픔의 기미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전에도 어머니 꿈을 여러 번 꾸었다. 하지만 그 꿈들은 내게 그날 밤 꾼 꿈과 같은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꿈에서 깨어나자 마음이 평화로웠다. 나는 어머니의 태어남과 죽음이 개념일 뿐,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태어남 때문에 존재하신 것이 아니고, 죽음 때문에 존재하기를 멈추신 것이 아니다. 나는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았다. 존재는 오직 존재하지 않음과의 관계 속에만 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음은 오직 존재와의 관계 속에만 있다. 그 어느 것도 존재하기를 멈출 수 없다. 어떤 것이 무에서 생겨날 수는 없다. 이것은 철학이 아니다. 나는 오직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날 밤 1시쯤 잠이 깼고 슬픔은 사라졌다. 나는 어머니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단지 하나의 생각일 뿐이었음을 보았다. 꿈속에서 어머니를 볼 수 있었기에, 나는 어머니를 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드러운 달빛이 흘러넘치는 뜰로 걸어 나갔을 때, 나는 그 빛을 어머니의 존재로 경험했다. 이것은 그저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모든 곳에서, 언제나 내 어머니를 볼 수 있다.
8월 여전히 포모나에 있으면서, 나는 <<당신의 호주머니를 위한 장미 A Rose for Your Pocket>>라는 제목의 작은 책을 썼다.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의 기적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글을 쓰는 동안, 새들이 숲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그 글을 니앤에게 보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새로운 시각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타이 탄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묘사한 방식이었다. 베트남 문학을 가르칠 때면 언제나 리 왕조의 선사禪師 틱만짝의 이 시를 언급한다.
봄이 갔을 때
거기 어떤 꽃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지 마라.
바로 어젯밤 앞뜰에
한겨울 매화 한 가지 꽃이 피었네.
나는 언제나 이 시의 느낌을 찬탄했지만, 그날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틱만짝 스님 시의 진정한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다. 그때 나는 어두운 겨울밤 매화 가지에 꽃이 피는 것을 자각하는 것처럼 사물의 진정한 경이로움을 보기 시작했다.
-틱낫한 지음, 권선아 옮김, <<젊은 틱낫한의 일기-나를 만나는 길 1962-1966, Fragrant Palm Leaves>>(김영사, 2023), pp.113-119.
https://youtu.be/3p9-6AZA8sY?si=gr0LmgldnqmeQ6fs
에토 키미오의 고토 연주, <벚꽃 櫻花 사쿠라>
https://youtu.be/717AzdKgGqk?si=zzfnPlx1z46Zb0By 에토 에토 키미오 작곡의 고토 연주, <희망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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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face
서문
Happiness is only possible with true love. True love has the power to heal and transform the situation around us and bring deep meaning to our lives. The Buddha's teachings on love are clear, scientific, and easily applicable to daily life. Every one of us can benefit from these teachings.
행복은 오직 진실한 사랑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진실한 사랑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리 주변의 환경을 바꾸며, 우리의 삶에 깊은 의미를 가져다준다. 부처님의 사랑에 관한 가르침들은 명쾌하며, 과학적이고, 일상생활에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이 가르침들에서 이익을 얻을 수가 있다.
When the Buddha's son Rahula was a young novice monk, the Buddha advised him to practice being like the Earth and its oceans and rivers. No matter what people pour onto the Earth, whether milk, flowers, or compost, the Earth receives it all. Why? Because the great Earth is vast and has the power to transform everything into soil, plants, and flowers. If you pour a handful of salt into a cup of water, the water become undrinkable. But if you pour the salt into the river, people can continue to draw the water to cook, wash, and drink. The river is immense, and it has the capacity to receive, embrace and transform.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는 어린 행자였다. 부처님은 그를 대지와 대지의 바다와 강들과 같은 존재가 되도록 수행할 것을 조언하였다. 대지에 사람들이 우유든, 꽃이든, 거름이든 무엇을 쏟아 부을 지라도 대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왜 그런가? 대지는 광대하고 모든 것을 흙으로, 식물로 그리고 꽃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줌의 소금을 한 컵의 물에 넣는다면, 물은 마실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만일 강물에 그 소금을 넣는다면, 사람들은 요리나 씻고 마시기 위해 그 물을 계속 끌어 쓸 수 있다. 강은 막대하고 받아들이고 품으며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If our heart are big, we can be like the river. When our hearts are small, our understanding and compassion are limited and we suffer. We can't accept or tolerate others and their shortcomings and we demand that they change. But when our hearts expand, the same things don't make us suffer anymore. We have a lot of understanding and compassion and can embrace others. We accept others as they are, and then they have a chance to transform. So the big question is: how do we help our heart to grow? With practice, your heart will become infinitely large like the heart of the Buddha, capable of embracing the whole cosmos.
만일 우리 마음이 크다면 우리는 강과 같이 될 수 있다(4무량심-자.비.희.사). 우리 마음이 작을 때, 우리의 이해와 연민심은 한정되고 우리는 고통을 겪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그들의 단점들을 받아들이고 관용할 수가 없고, 그들이 변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커지면 같은 것들 어떤 것들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게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많은 이해와 연민심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품을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러면 그들은 바뀔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큰 물음은, ‘어떻게 우리가 우리 마음을 자라도록 도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참을성을 가지면, 당신의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처럼 무한하게 커지게 될 것이며, 온 우주를 품을 수 있을 것이다.
The French writer Antoine de St. Exupery wrote that to love is not just to look at each other but to look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I reflect on that statement a lot. One day I was visualizing a couple who were looking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and I began to laugh, because the direction they were looking in was the direction of the television set. When two people no longer find joy in looking at each other and instead look in the direction of a distraction, this is not true love.
프랑스 작가 생떽쥐베리는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썼다. 나는 이 말을 많이 되새겨보았다. 어느 날 나는 같은 방향을 바로보고 있던 한 부부를 떠올렸고,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보고 있던 그 방향은 텔레비전이 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더 이상 서로 마주보면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대신에 오락물을 향해 바라보는 이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So what does it mean to love? To love is to look at each other and to look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If we know how to look, then looking at each other is also wonderful. Because if you know to look at each other and discover the basic goodness and beauty within the other person, you have a chance to discover that love is something real; each of us is given opportunities to experience love as something that really exists. Love is the energy helping us to be strong and to care for the well-being of other people and other living beings.
그러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랑하는 것은 서로 마주보고 같은 방향을 함께 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바라보는 법을 안다면, 그러면 서로 마주보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서로 마주 보는 법을 알고 다른 사람 속에서 기본적인 선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를 가진다면, 사랑은 실재하는 어떤 것임을 발견할 기회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사랑을 경험할 기회가 주어져 있다. 사랑은 우리가 강해지는 것을 돕고, 다른 사람과 다른 생명들의 행복을 보살피는 에너지이다.
Because we don't know the art of mindful living, we make mistakes in our daily lives, and internal formations arise in us and those around us. We make our families, friends, and colleagues suffer because we don't understand them well enough and we have no patience. Slowly, our relationships become strained and one day we may find communication has become completely blocked.
우리가 알아차림 하는 삶의 기술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일상 삶에서 실수를 하며, 우리 내면과 우리 주변에 업(業)을 일으킨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친구, 동료들을 괴롭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을 충분히 잘 이해하지 않으며 참을성이 없기 때문이다. 천천히, 우리의 인간관계는 껄끄러워지게 되고 어느 날 우리는 서로 간의 소통이 완전히 막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All of us need love and all of us need to love. The realization of the Buddha on the morning of his enlightenment was that all of us have the capacity to love and to understand. But we seem not to believe it and we continue to cause suffering to ourselves and others. Maybe we haven't had the time to look deeply into the nature of our love, to sum up what our love is about, and understand why it is that when we love, suffering arises from it. In Buddhism, the meaning of love is very deep but also very clear. In this book, I explore the elements that make up true love and practices that allow us to develop it within ourselves.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고 우리 모두는 사랑할 필요가 있다. 깨달음을 얻은 아침에 부처님이 알게 된 것은 우리 모두는 사랑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믿지 않고 있는 듯이 보이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사랑의 본성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우리가 사랑할 때 왜 괴로움이 사랑으로부터 일어나는가를 이해할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불교에서는 사랑의 의미는 아주 깊지만 또한 매우 분명하다. 이 책에서, 나는 진실한 사랑을 이루는 요인들을 탐색하고 우리가 우리 내면에 사랑을 개발할 수 있도록 수행한다(자애명상, 4무량심). (김희준 옮김)
-Thich Nhat Hanh, Teachings on Love
틱낫한 스님, 사랑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
제9장 당신의 호주머니를 위한 장미
A Rose for Your Pocket
‘어머니’에 관한 생각은 ‘사랑’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맛있습니다. 사랑 없이 어린이는 꽃 필 수가 없고 어른은 성숙할 수가 없지요.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나약해지고 위축되고 맙니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는 잡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 왔다!” 나이든 사람일지라도 어머니를 여읠 때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 또한 자신이 아직은 성숙하지 않았으며, 갑자기 자신이 홀로 되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는 마치 어린 고아처럼 버려지고 불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지요.
모성을 칭송하는 모든 노래와 시들은 아름답고, 쉽사리 아름답습니다. 심지어 많은 재능이 없는 작사자들과 시인들도 이들 작품들에 그들의 심혈을 쏟아 부은 것처럼 보이며, 그들 작품들이 연주되고 노래될 때는 연주자들 또한 그들이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를 정도로 너무 일찍 어머니를 여읜 경우가 아니라면, 깊이 감동된 것처럼 보입니다. 모성의 덕성들을 찬탄하는 작품들은 세계 어느 곳이든 역사가 있은 이래로 있어 왔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는 것에 관한 간단한 시를 들었습니다. 아직도 그 시는 나에게 중요합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다면,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그대는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느낄 것이고, 그러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날이 멀지만 반드시 닥칠 것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해에 비록 내가 아주 어렸지만 엄마는 나를 떠나갔네.
그래서 난 내가 고아가 된 것을 알았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울고 있고 나는 침묵 속에 괴로웠네....
눈물이 흐르도록 내 버려두었고
난 고통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어.
저녁이 엄마의 무덤을 뒤덮었어.
절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감미롭게 울렸지.
엄마를 잃는 것이 온 우주를 잃는 일임을 난 깨달았네.
우리는 오래도록 부드러운 사랑의 세계 속에서 헤엄쳤고, 심지어 그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곳에서 아주 행복하였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 늦었을 뿐이지요.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의 복잡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시 사람이 어머니는 “사랑의 보배”라고 말하면, 시골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미 너무 복잡한 것입니다. 베트남의 시골 사람들은 그들의 어머니들을 바나나, 꿀, 쌀, 사탕수수 같은 여러 가지 최상의 것들에 비교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이들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표현합니다. 나에게 어머니는 최고 좋은 품질의 바 후앙 바나나, 최고 좋은 넾 뫁 감미로운 쌀, 제일 맛있는 미아 라우 사탕수수와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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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가 걸려 열이 나면, 입맛이 쓰고 밋밋하고 아무 맛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오직 어머니가 와서 나를 이불 속에 눕히고, 이불을 턱 위로 부드러이 끌어당기며, 손을 불덩이가 되어 담금질 하는 내 이마에 올릴 때, 엄마의 그 손은 정말로 손인지 아니면 천상의 비단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엄마가 가만히 “불쌍한 내 새끼!” 라고 말할 때, 내 몸은 어머니 사랑의 감미로움으로 회복되고 감싸임을 느낍니다.
아버지의 일은 거대한 산처럼 엄청납니다. 어머니의 헌신은 봄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넘쳐흐릅니다. 어머니 사랑은 모든 사랑의 감정들의 기원이 되는 우리 사랑의 첫 맛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는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분이십니다. 어머니가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감사하게도 나는 모든 존재들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나는 이해와 연민의 개념을 얻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사랑의 바탕이 됩니다. 많은 종교적 전통들은 이것을 알고서, 성모 마리아나 관세음보살처럼 어머니의 존재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엄마가 요람으로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 어린 아이들은 거의 울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불행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정신입니다. “어머니”라는 말이 주장되었을 때, 이미 우리는 마음이 사랑으로 넘쳐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사랑에서부터 믿음과 행동까지의 거리는 매우 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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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우리는 오월에 ‘어머니 날’을 기립니다. 나는 베트남의 시골 출신이라서 이런 전통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토쿄의 긴자 거리를 티엔 안 스님과 같이 방문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의 친구들인 몇 명의 일본인 학생들을 서점 바깥에서 만났습니다. 한 학생이 따로 그에게 물었고, 가방에서 흰 카네이션을 꺼내어 내 가사에 달아 주었습니다. 난 놀랐고 당혹스러웠지요. 이런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전혀 몰랐고, 감히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지방의 어떤 풍습일 것이라고 여기며,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가고 있을 때(나는 일본말을 하지 못한다.), 티엔 안과 나는 서점 안으로 들어갔고, 오늘이 이른바 ‘어머니 날’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호주머니나 옷깃에 붉은 꽃을 달고,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것에 자랑스러워 합니다. 내 가사 위에 달린 흰 꽃을 보고 난 갑자기 아주 불행함을 느꼈습니다. 나는 어떤 다른 불행한 고아와 다를 바 없는 고아였고, 우리 고아들은 더 이상 우리의 단추 구멍 속에 붉은 꽃들을 자랑스럽게 달 수가 없었습니다. 흰 꽃들을 달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어머니 생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신다는 것을 알기에 붉은 꽃을 단 사람들은 아주 행복합니다. 그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서 너무 늦어지기 전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노력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아름다운 풍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베트남과 서양에서도 이런 풍습을 가지기를 제안 합니다.
어머니는 사랑의 한량없는 원천이고, 다함없는 보배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때때로 잊고 삽니다. 어머니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아직도 가까이에 어머니가 있는 그대들은 “신이시여, 저는 어머니를 가까이서 바라보지 못하고 이 모든 해들을 어머니 곁에서 살아 왔습니다. 단지 잠시 보며 보잘 것 없는 푼돈이나 이런 저런 것들이나 물어보면서 몇 마디 말을 나누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말기 바랍니다. 그대는 따뜻해지려고 어머니 곁에 눕고, 어머니에게 샐쭉해지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대는 오직 어머니의 삶을 복잡하게 하고, 어머니를 걱정하게 하고, 어머니의 건강을 해치고, 어머니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게 합니다. 자식들 때문에 많은 어머니들이 일찍 죽습니다. 어머니의 일생 동안 우리는 어머니가 밥하고, 빨래하고, 우리가 어지럽힌 뒷자리를 청소하여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 우리는 오직 우리의 지위와 직장 일만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더 이상 우리를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없고, 우리도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기에는 너무 바쁩니다. 오직 어머니가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에야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평소 결코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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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는, 울람바나 명절(우란분절/백중절)에 우리는 마우드갈라야나 보살(목련존자:목련 존자는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원하였다. 목련경)에 관한 이야기와 전설, 효심, 아버지의 일, 어머니의 헌신 그리고 자식의 의무에 대해 듣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부모의 장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우리는 효심 없는 자식은 쓸모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효심, 헌신은 단지 인위적일 뿐입니다. 사랑이 표현되는 것으로 족하고 의무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의무가 아니고, 목이 마를 때 물 마시는 것처럼 완전히 자연적인 것입니다. 모든 자녀는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자녀는 어머니가 필요하고, 어머니는 자녀가 필요합니다. 어머니가 자녀가 필요하지 않다면 자녀도 어머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머니도 자녀도 아닌 것입니다. ‘어머니’와 ‘자녀’라는 말을 잘못 쓰는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선생님들 중의 한 분이 물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할 때 너는 무엇을 해야만 하지?” 선생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에게 순종해야 하고, 어머니를 돕고, 어머니가 연세 드셨을 때 돌봐드려야 하고, 어머니가 산 뒤로 사라졌을 때 조상의 제단을 지키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서 “무엇”이라는 말이 쓸모없는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어머니를 사랑한다면, 어떤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 그것으로 족합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이나 덕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교훈을 주려고 이 책을 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대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익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맑은 물이 솟는 샘과 같고, 최고의 사탕수수와 같으며, 최상의 품질을 가진 감미로운 쌀과 같습니다. 이것으로 이익 되는 방법을 모른다면, 당신에게 불행한 것입니다. 당신을 위한 삶에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불평하는 날을 피하는 것을 돕기 위해 나는 단지 이것을 당신의 ‘주의’와 ‘관심’ 속으로 불러오기를 원합니다. 당신 자신의 어머니의 존재와 같은 선물이 당신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심지어 당신이 대기업의 회장이거나 우주의 제왕일지라도 당신은 아마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창조주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스스로 생겨났고 어머니를 가지는 좋은 행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나를 생각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의 누나는 결혼하지 않고, 나는 스님이 되지 않을 수가 있었답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새 인생을 살든, 동경하던 이상적인 삶을 살든 우리 둘은 어머니 곁을 떠났지요. 누나가 결혼한 날 밤에 어머니는 천한 가지 일들을 걱정하였고 심지어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나를 위해 오는 자형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가벼운 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았을 때, 어머니는 한 입도 음식을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십팔 년 동안 누나는 우리와 같이 밥을 먹었지만 오늘은 누나가 식사를 하기 위해 다른 가정으로 가기 전에 여기서 마지막 밥을 먹는 것이다.” 누나가 울었습니다. 누나의 이마가 접시 위로 드러나며 고개를 떨구며 말했습니다. “엄마, 나 결혼하지 않을래요.” 하지만 누나는 그럼에도 결혼하였지요. 나 자신을 위한 스님이 되기 위해 나는 엄마 곁을 떠났습니다. 스님이 되기 위해 가족을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해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였지만 또한 이상을 가졌고, 스님이 되기 위해 어머니를 떠나야 하였습니다. 그만큼 나는 힘들어졌습니다.
인생에서, 어려운 선택들을 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는 한 손에 한 마리씩이지 동시에 두 마리 생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기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고통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스님이 되기 위해 어머니를 떠나는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그런 선택을 하여야만 했던 것에 미안합니다. 어머니, 이 너무나도 소중한 보배에서 완전히 은혜로울 기회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였지만 더 이상 내 인생에서 부드러운 바나나, 감미로운 쌀밥, 달콤한 사탕수수 맛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의 일을 쫒지 말고 어머니 곁의 집에만 있기를 제안하고 있다고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나는 도덕적인 교훈이나 조언을 하려는 것이 아님을 이미 말했습니다. 나는 단지 어머니는 바나나 같고, 품질 좋은 쌀 같고, 설탕 같다는 것을 당신에게 일깨워주고 싶을 따름 입니다. 어머니는 부드러움이고, 어머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당신, 나의 형제와 자매들은 어머니를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엄마를 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막대한 손실을 낳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무지’ 때문이든 ‘주의 결핍’ 때문이든 그러한 손실을 감내할 필요가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기꺼이 붉은 꽃, 장미를 그대의 옷깃 위에 달 것이고, 그래서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만일 내가 어떤 조언을 하려고 하였다면,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밤 학교나 일터에서 돌아올 때, 혹은 다음에 어머니를 방문할 때면 어머니 방에 조용히,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가 어머니 곁에 앉으십시오.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어머니가 일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한참 동안 어머니를 바라보십시오. 어머니를 잘 보기 위하여, 어머니가 거기에 살아계시고, 당신 곁에 앉아 계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하여 어머니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러고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런 짧은 물음을 물어 보기 바랍니다. “엄마, 아세요?” 어머니는 좀 놀랄 것이고, 당신에게 미소 지으며 “애야, 무얼 말이냐?”하며 되물을 것입니다.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며, 어머니에게 말하십시오. “제가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세요?” 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물어보십시오. 당신이 서른이든, 마흔의 나이가 되든지 간에 당신은 어머니의 아이이기 때문에 그냥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 어머니와 당신 두 사람 모두 행복해지고 영원한 사랑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 어머니가 당신 곁을 떠날지라도 당신은 아무런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 오늘 노래하라고 주는 후렴구입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찬송하고 노래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무관심’이나 ‘망각’ 속에서 살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빨간 장미는 이미 내가 당신의 옷깃 위에 달아드렸습니다. 행복하시길! (김희준 옮김)
-Thich Nhat Hanh, Teachings On Love(2007)
틱낫한, 사랑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