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사유로 천착한 풍경 속 전언
_ 김숙경 시집 《바람이 사는 집》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김숙경 시인의 첫 시집 《바람이 사는 집》을 만났다. 그 안에 빼곡하게 들어찬 세월 속 시간의 분신들을 본다. 하나의 음절이 모여 온전한 문장이 되듯 사람이 살며 보고 듣고 지낸 유려한 흔적을 고스란히 형상화하여 세상에 없던 삶을 드러낸다. 그 안은 온통 우리가 몰랐던 존재에 대한 고민들이 혼종되어 있다. 그래도 생존을 위한 치열한 고투를 극복하고 완성된 정념이란 것을 안다. 말하고 싶지만, 다 말할 수 없는 현실이 한계였다면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범위를 극복하려는 비대칭적 욕망은 많은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삶의 일상으로 다가온 현상들을 단순하게 보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인식으로 천착하여 시인이 추구한 상징적인 질서로 포착해낸다. 시인은 글을 쓰기 전 바라본 사물성에 대한 감각적 순간을 직관으로 흡입한 궁극적 사유로 활용한 경우가 많다.
김숙경 시인의 시적 바탕이 된 삶의 시간은 부모님으로부터 연원 한다. 부모님이 살아온 긴 세월도 시인의 성장 속 근원이 된 소중한 시간이다. 시는 삶의 지향과 평소 인식하고 있는 관점에서도 닮아간다. 그 지점은 시간과 환경에 따라 쉽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난 시간 속에는 우리가 분별해야 할 긴장된 경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종종 반복되는 불합리한 사회 현실에 대한 각성은 시인 정신으로 극복해야 할 올곧음과 상통한다. 따라서 실존에 대한 고민없이 비합리적인 가치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것 또한 매우 황당한 일이다. 그런 왜곡된 문제점을 냉정하면서 단도직입적인 인식으로 형용한 문장이 행간을 이룬다. 그것이야말로 김숙경 시인의 올바른 가치관이고 사회가 추구해야 할 지점이란 것을 제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영역으로 반사되는 풍경 속 지명에 대한 인식도 평이하지 않다. 인간 중심에 대한 질문의 저의底意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과거사로 치부한 문제까지 포함된다 해도 당연한 것이다. 아직도 화해되지 못한 ‘여순 사건’ 때 자행된 국가 폭력과 여수국가산단에서 유출된 공해로 인한 생태환경을 주시하고 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지점을 가능한 지점으로 바라보는 긍정은 미래까지를 담당한다. 현재는 미래의 과거가 된다는 관점에서 시어 속 순정한 언어로 완성된 음절의 조합은 문장의 절제를 실현하려는 김숙경 시인의 문학적 고뇌를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현실을 시적으로 현현한 사유가 진정한 문장의 집약이라면 아름다움과 상통한다. 다시 시적 근원인 여수 바다로 다가가 보자.
어머니는
다 닳은 얘기를 어제 일처럼 되풀이하고
나는
뒷얘기 꼬리에 장단을 맞춰 거드는 시간
바다를 만져본다
뜨거움이 솟구친다
따뜻한 생
-<어머니의 바다> 부분
몸을 통한 교감과 전언적 공감이 있다. 전자는 감각에 의한 것이고, 후자는 정신적 몰입을 통해 발현된다. 두 가지 특징은 확연하게 구분할 수 없어 모호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연어가 대양을 가르며 찾아간 곳은 태어난 모천이다. 타고난 본능의 실현을 위한 시기는 다 자란 연어만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란 근원을 향해 다가가려는 의지의 본능도 연어와 다르지 않다. 어머니가 기억한 과거의 시간을 현재화하면서 모녀라는 상관성을 강화시켜준다. 어머니가 들려준 풍경은 낯설지 않다. 그렇다고 귀에 쏙 박히는 것도 아니다. 갈수록 희미해진 어머니의 전언적 주문들이 잔잔한 음정처럼 화자에게 다가온 것이다. 생애 전부가 각인된 표정에서 배열된 어머니의 가슴속 이야기가 전언을 통해 공감을 이뤄간다. 해무가 느릿느릿 덮여오는 바다를 보며 어머니는 박자라도 맞춘 듯 풍경 속 과거를 되짚어간다. “해무가 보드랍게 차오르면/ 아다지오(Adagio)로 바다를 연주하는 가랑비/ 파랑 지붕의 조명에/ 방파제 전봇대는 음표가 된다”는 풍경은 현재를 가리킨다. 해무가 낀 바다는 고요하거나 완만한 파랑만 일 것이다. 심한 파도나 바람이 불면 해무는 어디론가 떠밀려 사라지고 만다. 어머니는 살아온 일들을 회상하면서 독백처럼 읊조리길 반복했고, 눈빛은 바다를 떠나지 않는다. 산더미같이 밀려오던 파도에 맞서 여윈 몸으로 견뎌온 어머니였다. 고통스럽던 긴 시간을 가슴에 간직한 어머니가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것은 ‘아다지오’보다 더 느린 음표를 그리며 완만해진 시간 속을 바라보는 것이다. 살아온 터전이 바다로 집약된 생의 지난함을 잊을 수 없다며 바다를 한없이 응시하는 어머니다. 한적한 바닷가 푸른 지붕 안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전부인 밤이다. 간간이 바다에 파도가 일어 수평선을 깨트리면 홀로 서 있는 전봇대가 출렁이지만, 그에 맞춰 조응하는 바닷가 풍경은 안온하다. 그래도 바다는 바다다. 그 속을 뒤집으며 지나가는 배가 작은 포물선을 그린다는 바닷가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구부정한 할멈과 흰 개가 지나가고 있다. 바닷가는 만선의 깃발을 달고 들어오는 배를 기다리며 흥청대듯 북적여야 맞다. 하지만, 그런 좋은 시절 한번 제대로 만나지 못한 어머니의 바다는 그리움만 애틋해졌다. 대사는 같아도 음감音感은 매번 달라진다. 시간은 공간에서 멀어져도 모녀가 공유한 추억을 되풀이해 재현할 수 있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안타까운 생의 서사도 끝이 있는 연극무대처럼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 그렇다 쳐도 어머니가 간직한 바다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시 <상암동 사람들>에서 보여주는 상황은 녹록지 않은 현실을 말해준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은 하루아침에 들어선 곳이 아니다. 오랜 인연으로 알게 모르게 찾아들어 좋은 집터를 골라 심사숙고해 지은 집이다. 하지만, 여수국가산단이 국가 주도로 급속히 조성되면서 생산 시설 투자에 대한 가성비에 중점을 두고 설계된 차이가 있다. 결국 인간의 삶과는 별개인 기계 장치 산업의 효율성이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다. 화학단지가 들어서면서 영취산 근경의 “웃바구, 모여 사는 남촌 북촌 진례 읍동 당내마을/ 골짜기마다 자귀나무 넘쳐났다는데” 사십 년 지나 그 많던 자귀나무는 사라지고 산 능선에 남은 진달래가 전부다. 주민들 항의가 이어지자 내놓은 이주 정책은 사십 년이 지나서도 요원한 무소식이다.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야 하는 ‘상암동’ 사람에게 매일매일은 고통인 것이다. 이제 그런 시간도 더는 견딜 수 없도록 악화된 환경에서 얻은 것은 호흡기 질환에다 언젠가는 보상될 투기성 “철제건물들이 야금야금 들어서고/ 쾨쾨한 욕심 연무에 섞여 녹슬어 가는 영취산 앞마당”엔 한탕 심리만 판치는 사람들로 멍들어가고 있다. 지엽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 범주는 유별한 것이다. 천인천색이란 인간이 갖는 사고의식의 다양성을 일컫는 말처럼 김숙경 시인의 시편들이 지시하는 시의성詩意性에 주목해야 할 지점은 ‘나’와 ‘너’로 분화된 사회관계 인식을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환기 복원하려 한 데 있다. 시인이 제기한 문제가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이란 것이다. 우리의 삶이 봉착한 공동의 문제란 것을 각성하게 한다.
하늘이 내렸다는 섣부른 오해가
길을 막아 버리고
허망의 늪에 빠진 그대
공포의 벽에 싸여 피비린내 씻어냈다
긴 모가지 구슬픈 눈빛
바다에 드러눕고
뭉툭한 손으로 새겨놓은
천년의 시간
-<소록도> 전문
섬이 갖는 이미지는 외로움이자 이상향적인 순수함을 연상하게 한다. 소록도도 그와 다르지 않은 섬 중 하나다. 많은 섬이 제 나름 특징을 살려 지명을 이루었듯 ‘소록도’도 사슴을 닮은 형상을 띄고 있다. 그런 섬이 어찌하다 보니 오욕의 섬으로 각인되어 버린 적이 있었다. 갇힌 긴 시간이 역사 속으로 흘러갔고 뭍사람들과 멀어진 뒤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은 철저히 사육되듯 통제되어 인간의 존엄과는 멀어져 갔다. 인간성의 상실은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치욕 같은 절망으로 변질된다. 그것도 강압된 물리력 앞에서 인간으로 살아갈 권리를 박탈당했다. 오로지 살아 실재한다는 의미 외에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관리되기 위한 존재에 불과했던 사람 아닌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미 밝혀진 사실이지만, 일제 침략기에 강제로 격리된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시설로 시작해 이후 온갖 만행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그 억울한 역사의 시간을 견디고서야 세상과 교통 하는 섬이 된다. 김숙경 시인도 그곳을 찾아 역사적인 시간을 거슬러 가다 슬픈 흔적을 목도했을 것이다. 소록도에 가서야 깨닫게 된 “하늘이 내렸다는 섣부른 오해가/ 길을 막아 버리고”라며 말문을 닫고 호흡을 멈춘다. 사실 그곳의 시간을 되짚어보면 가슴이 답답할 수밖에 없다. 비명과 통곡으로 점철된 흔적들을 가리기 위해서였을까? 진입로부터 멋있게 조성된 소나무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기암괴석으로 조성된 공원을 에워싼 울창한 나무들이 한센병 환자들의 피와 땀을 착취한 결과물이란 것을 알게 된다. 철저히 인간적 삶을 갖지 못하도록 강제한 사실들은 가슴이 아파 더는 거론 할 수 없다. 김숙경 시인은 “허망의 늪에 빠진 그대/ 공포의 벽에 싸여 피비린내”라고 말하면서 “뭉툭한 손으로 새겨놓은/ 천년의 시간”처럼 슬픈 한하운 시인의 심정을 대신 술회하고 있다. 한 끼의 밥은 생존으로 직결된다.
콘크리트 석축 사이
삐죽삐죽 터져 나오는 생명줄이 헐렁하다
동그란 시계가 거꾸로 치닫는다
좁은 틈새로 접혀 들어가는 얇은 종잇장 몸
책 무게가 천근이다
위로인 양
야무지게
부르튼 입에게 묻는다
얘들아, 밥은 먹었니?
-<밥은 먹었니> 부분
밥과 연관 지어 생각한 발상이 재밌다. 한 끼의 밥은 생존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밥그릇을 앞에 놓고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는 묘사는 먹는 것에 대한 욕구를 잘 보여준다. 같은 욕망이라도 품위와 격식을 가리는 식사 예법도 있다. 충분히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로 허례허식 같지만, 그럴만한 환경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 없는 상황이 종종 현실에서 발생한다. 몇 끼니를 아예 못 먹어 절박함이 극에 달해있다면 상황은 달라지는데 ‘밥은 먹었니’라는 풍경은 배려와 연민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콘크리트 석축 사이/ 삐죽삐죽 터져 나오는 생명줄이 헐렁”한 상태는 마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딸’의 모습으로 오버랩 되고 가슴 울컥한 심정이 전이되면서 시적 상상력으로 환치된 것이다. 밥도 걸러 가며 무거운 책을 펼쳐놓고 서울 도심의 도서관에서 힘든 공부를 하고 있을 딸아이를 생각한 것이다. ‘헐렁’하다는 생경함을 ‘퀭한’ 이미지로 연상하게 하면서 비대칭적 모호성을 보조해준다. 순간적으로 포착한 풍경 속 사물을 시적 대상으로 환기해내는 찰나를 직관적 감성으로 잘 발현한 것이다. 사실 식물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토양과 생장에 필요한 영양소가 필요하다. 그런데 콘크리트 석축 좁은 틈에 뿌리내린 식물의 영양 상태가 좋을 리 없다. 하지만, 발현한 시적 상상력은 거침없이 한 끼의 ‘밥’이란 의미로 이미저리imagery화 한다. 시적 상상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간극의 층위를 더 넓혀간다. 밥과 시간을 중요한 의미 관계로 함의케 한다. 시간에 비례해서 배고픔의 강도가 가중되듯 “동그란 시계가 거꾸로 치닫는다” 는 발상을 통해 역 시계의 방향성을 고통의 긴 시간을 강조해주는 의미로 활용한다. 김숙경 시인의 눈을 통해 잠입한 시적 감상이 감동에서 그치지 않고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상력이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먹고사는 것과 다른 의미의 절박한 상황도 있다. 밥의 의미가 “좁은 틈새로 접혀 들어가는 얇은 종잇장 몸/ 책 무게가 천근”으로 변주된다. 화자가 감당한 고통은 콘크리트 석축 사이에 낀 식물의 식욕과는 또 다른 문제로 버금간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 시가 범주를 흔들어 상상적 외연을 충동질하는 것은 “야무지게/ 부르튼 입”에게 묻는 어조에 있다. “얘들아, 밥은 먹었니?”라는 말은 고시 공부에 전념하는 딸 아이의 애틋함에서 비롯되었지만, 궁극에는 치열한 삶의 단면을 말하면서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한 치열함과 고통의 시간을 배고픔으로 환유한 언어 활용은 확장적 변별성까지 충족해준다.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심정적 고통도 그와 다르지 않다.
<시는 나에게>에서 시심을 모으는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 시는 고요한 상태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득/ 혼란이 멈추고 질문이 찾아들던 그 순간/ 비켜 앉은 자리에서 지그시 바라보았다”며 시적 상상력이 침투하는 과정을 설명해준다. 이어 호흡마저 멈추며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의 수위는 높아만 간다. “온전히/ 지금이 아니면/ 지금을 빠져나오지 않으면/ 고른 숨길이, 나른한 신경이/ 진흙 속 연잎의 대롱이 되어 버릴까 봐/ 갈등(葛藤)의 힘겨루기에 뒤틀려 버릴까 봐/ 마른 잎처럼 푸석거리다가 사라져 버릴까 봐”라며 조바심 같은 찰나의 심상적 충동을 놓칠 수 없다는 강렬한 욕망을 욕망한다. 어차피 욕망 그 자체가 타자화된 욕망이기에 완전할 수 없겠지만. 풍경 속 감각적 전언을 통해 한 편의 시를 담아오겠다는 무의식적 욕망을 의식화한다. 시는 찰나의 문장이다. 일상으로 다가오는 풍경(사물) 속 이미지를 사물성이라는 시적 상상력을 통해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김숙경 시인도 시쓰기라는 것은 “마음이 집중하는 일”이란 것을 잘 알기에 그런 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항상 긴장하며 사물을 통해 감응한 기호를 기표로 그치지 않고 의미되어지는 기의를 통해 시적 언어로 치환하는 일이 시인의 삶이다. 하지만, 매번 문장 속에서 황당하게 미끄러지는 것도 시인의 삶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만큼 시의 형용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시적인 열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과 불일치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 욕망한다’면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
주먹깨나 쓰던 젊은 청년이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기에 섬은 너무 작고 뭍은 멀었다 그는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고 자식들을 뭍에서 공부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자신의 그림자는 고향에 남겨둔 채 뭍사람이 되었다 바람이 삭지 않던 날 바다 넘어 터덕거리는 황톳길을 왔다던 옹기 항아리들과 유리됫병의 식초는 고향의 물맛을 그대로 품어 감칠맛 나는 보름달이 되었다
-<아버지의 바다> 부분
바다는 어머니로 상상되는 상징으로 대부분 활용된다. 그런 바다는 모든 것을 품어주는 모성성으로 극대화되지만, 이면에 감춰진 부성적 강인함도 갖고 있다. 화자는 과거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다. 그 문장적 발화 시점은 혈기 왕성한 “주먹깨나 쓰던 젊은 청년”기로부터 시작된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청년기 혈기방장한 시절을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미래의 꿈이 되었다. 꿈은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성취를 위한 시도는 거침이 없다. 하지만, 청년기 아버지를 가로막은 바다는 뭍으로의 출향에 난관이 된다. 시시때때로 이는 풍랑도 그렇거니와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게 밀려들어 깨어날 줄 모르는 해무 덮인 바다는 답답함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해무가 걷히듯 냉철한 이성으로 중심을 잡아 나선 삶의 기로는 외지로 나가는 것이었다. 되돌아보면 아찔한 청년기의 도발적 각성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회를 열어준 셈이다. 비록 고향을 떠나 뭍으로 나왔지만, 근본적인 탯자리를 잊을 수는 없다. “바람이 삭지 않던 날 바다 넘어 터덕거리는 황톳길을 왔다던 식초는 고향의 물맛을 그대로 품어 감칠맛 나는 보름달이 되었다”는 아버지의 바다는 어머니의 바다로 공존한다. 풍경이 풍경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대물림된 아버지의 바다가 화자의 가슴 안에서 출렁이는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마음이 들뜰 때면 마당을 빗자루로 쓸곤 했다.
마당을 쓴다
다른 모습들을 쓸어 모은다
싹 틔우던 봄 햇살을 떠올리며
꽃 피우던 현기증에 거친 숨 몰아쉬며
내려놓았던 긴 시간
잎 하나의 흔적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휘젓던 무수한 일상들을 생각한다
채우려고만 했던 욕심의 꾸러미
비워지기도 했던 주머니
바람 따라 바스락거리는 철없는 소란
쉬 떠나질 못해 칙칙하게 드러누운 집착
놓을 수 없는 지금
-<시월에> 부분
풍경과 경치는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풍경은 전이를 통한 사유를 촉발한다. 경치는 시각적 효과를 충족하는데 그만이다. 따라서 풍경으로 다가온 사물성은 인식과 의식으로 전면화되고 사유로 확장되어 기어이 심상적 이미지로 번져 공감을 충동한다. ‘시월에’란 시적 접점은 마당을 쓸면서 시작된다. 마당은 생활공간으로 청결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을 반복적으로 투여해야 한다. 화자는 마침 마당을 쓸다 속절없이 버려져야 할 낙엽이 품은 시간에 생각이 미쳤다. 그 소중한 시간 속 생명성으로 충만했던 기운으로 성장을 멈추지 않던 왕성한 계절을 상상한다. “싹 틔우던 봄 햇살을 떠올리며/ 꽃 피우던 현기증에 거친 숨 몰아쉬며/ 내려놓았던 긴 시간/ 잎 하나의 흔적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휘젓던 무수한 일상들을 생각”하다 열심히 쓸던 비질을 멈춘다. 떠나가 버린 계절은 화자와 함께 견뎌온 ‘낙엽’들이다. 낙엽에 배어든 시간이라는 언어가 빼곡하다. 혀를 내밀 듯 말라가는 잎사귀를 지탱한 잎맥과 잎맥 사이 가느다랗게 조직한 생의 비문秘文을 간직한 상형의 문장을 본다. 끝없이 탐하던 탐욕의 시간과 수시로 비워내 가벼워진 비움의 시간이 공존한 낙엽들이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 낙엽들, 아직도 못다 이룬 욕망이 남았는지 가벼운 바람에도 풀썩대며 일어서는 생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본다. 똑같이 건너온 봄의 화사함과 여름의 치열함을 견디고 화색 돌아 환해지던 마당을 감싼 생명의 언어가 인간의 오욕칠정같이 유한한 탐욕처럼 끝을 보고 말았다. 무의미한 것들 속에서 발견한 생의 기운들이 화자의 상상력을 통해 삶의 지혜로 발현되는 기회를 얻었다. ‘시월’의 의미는 생의 절정 뒤 쇠락으로 접어든 장년기의 인생살이와 닮았다. 화자는 삶도 떨어진 낙엽과 같다는 전언적 의미를 인생 담론으로 변주하여 들려주고 있다. 삶의 부분이 전체가 되었다 다시 부분으로 나뉘어지곤 한다. 아이가 장성해 국방 의무를 수행할 청년이 되었다.
포항 가는 길
어릴 적 귀염 떨던 불국사 한 바퀴 돌았다
푸른 하늘이 기왓장 아래 서늘하다
천년의 숨소리
굴곡진 소나무 아래 스무 살 아들과
빗질하는 수도승의 이른 참선이 낯설다
가족사진을 찍었다
흘러가는 초침까지 감지하는 듯
이어폰이 손끝을 타고 내려온다
까까머리를 지키던 모자에
네 모습이
오래도록 남았다
-<군대 가던 날> 전문
시계추가 진동한 만큼 시간은 흘러 세월로 넘어가곤 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 이내 성인이 되고 가정을 이루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키우는 것의 반복이 인생살이다. 누구나 다 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다 같지 않은 것이 세상살이인 것이다. 화자의 아들이 장성해 포항 해병 입대를 하는 날 빡빡 깎은 머리를 한 아이를 앞세워 가족 여행 겸 경주 불국사를 찾아간 모양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에 데리고 간 적 있던 불국사여서 추억이 새로웠을 것이다. 불국사 경내를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귀염을 떨던 아이가 성장해 군 입대를 한 것이니 세월이 유수와 같다. 빡빡 밀어 버린 아들의 머리를 보면서 ‘푸른 하늘’에 비친 기왓장 아래의 서늘한 기운이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천년의 숨소리/ 굴곡진 소나무 아래 스무 살 아들과/ 빗질하는 수도승의 이른 참선이 낯설다”는 비유적 상관성은 더 깊어진다. 군 입대도 특수한 환경에서 규정된 생활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고, 수도승의 출가도 속세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로 빡빡 깎은 머리 모양이 아들과 흡사하다. 시간을 유일하게 붙잡아놓을 수 있는 “가족사진을 찍었다/ 흘러가는 초침까지 감지하는 듯/ 이어폰이 손끝을 타고 내려온다”는 화자의 마음은 까닭 없이 초조해진다. 사진 속 “까까머리를 지키던 모자에/ 네 모습이/ 오래도록 남았다”며 그 사진 한 장이 지나온 세월만큼 흘렀을 때 언젠가는 현재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을 것이다. 심란한 마음은 경내를 빠져나오며 동해 바다에 훌훌 던져버렸다. 간만에 찾아온 자유를 맞이한 것이다.
바람 들어 붕붕 이 꽃 저 꽃 찾아 헤맨다고 시비 걸지 마소
향기에 취해 밤낮 사랑타령 한다고 미쳤다 마소
한두 번 뒤집어진대도 홀딱 벗은 꽃보다 더 하겠소
난데없이 팔짱 끼고 꽃구경 가잔다고 어이없다 마소
울 집 백구도 살 떨리는 향내 쫒아 목줄 풀고 줄행랑쳤다오
-<아따 봄잉께!> 전문
김숙경 시인만의 유머 가득한 ‘아따 봄잉께!’라는 봄날 한 때가 소요유逍遙遊적 삶보다 더한 여유를 한껏 보여준다. 꽃구경도 소풍이니 마음만큼은 자유를 만끽하는 천방지축으로 낭만이 폴폴 향내를 풍겨온다. 바쁜 만큼 여유를 풀어낸 행간의 여백이 낭만적인 감성을 부풀려낸다. “시비 걸지 마소”라며 이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간섭받고 싶지 않다는 앙칼진 단언 같아도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속내는 어떤 상황이라도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표정이 행간에 담겨있다. 바람도 잔잔하거나 살랑살랑 부는 것이 아니라 ‘붕붕’ 명랑하게 불어 제친다. 바람을 타고 화자는 날개를 단 듯 비행하는 자유를 만끽한다. 이어 사랑에 도취된 자신을 절대 오해하지 말라는 시비는 금물이라는 선언도 간결한 말로 방榜을 붙여버렸다. 어차피 사랑에 도취되어 버린 작금에 더 망설일 것도 없다는 심사가 도원경에 든 듯하다. 봄이 절정으로 치달은 이때를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는 한 철, 망중한에 빠진 감상적 충동이 ‘시적인 것’을 능가해버렸다. 기어이 시적 행간으로 옭아맬 수 없는 “울 집 백구도 살 떨리는 향내 쫒아 목줄 풀고 줄행랑쳤다오”라는 비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슬픔과 먼 상춘賞春에 들떠 지른 환호인 것이다. 김숙경 시인의 시적 바탕이 견지한 건강성을 거침없이 보여준 좋은 시다.
그 집 앞에 다시 섰습니다
봄이 왔다 갔는지 매화꽃이 살랑거립니다
잡념도 많았는지 잔디는 여기저기 옆구리를 내어 주었네요
나눠 주겠다던 능소화가 외줄을 타고 있습니다
챙기신다는 길고양이들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그대가 없을까 봐 눈물이 돋았습니다
눈물 위로 내 발자국 힘주어 남겨놓았습니다
-<바람이 사는 집> 부분
‘바람도 흔적을 남긴다’는 말이 가슴에 박혀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 마음으로 이해가 되지 않던 말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 ‘바람’이 ‘사랑’으로 변주되고 ‘이별’로 환기될 즈음에야 알게 된 ‘바람’의 의미는 인생 여정에 도사린 ‘상처’인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게 된 ‘세월’이란 말도 그랬다, 화자의 연륜도 깊어져 그럴 만한 세월을 살아서 일까? ‘바람이 사는 집’을 알고 있단다. 바람은 흔적을 남긴다지만, 아예 눌러 붙어사는 법을 알고 있는가 보다. “그대 집에 가 보았습니다”라며 세월의 마모에도 여전한 그리움으로 남은 ‘그대’가 사는 집을 몇 번씩 찾아갔지만, 부재한 ‘그대’를 볼 수 없었다.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위로를 다독이는 심사도 애처로운 것이다. 그런 시간이 잠시려니 했지만, 그게 그렇지 않았더라는 속내다. 그에 더해 원망까지 듣는다면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혹시라도 하는 마음으로 “그 집 앞에 다시 섰습니다/ 봄이 왔다 갔는지 매화꽃이 살랑거립니다/ 잡념도 많았는지 잔디는 여기저기 옆구리를 내어 주었네요/ 나눠 주겠다던 능소화가 외줄을 타고 있습니다 / 챙기신다는 길고양이들이 보입니다”라며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리움이 된 ‘그대’의 부재를 확인시켜준다. ‘그대’가 그토록 좋아하던 능소화가 꽃줄기를 매달고 담을 오르지만, 그 꽃을 바라봐줄 ‘그대’는 없다. 아무것도 모른 길고양이들이 아직도 ‘그대’ 없는 빈자리를 학수고대하며 지키고 있다. 집을 비운 횟수가 늘고 손길 뜸해진 집안 풍경은 자꾸 느슨해져 간다.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그대’의 부재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될까 봐 조바심이 들었고, 텅 빈 집 마당에서 슬픔이 복받쳐와 눈물로 마음을 달래고 나온 듯하다. 호칭으로 활용되는 ‘그대’는 연인을 에둘러 표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다른 의미로 전용되고 있는 듯하다. 화자의 가슴 안에 잔잔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찾아갔지만, 집을 비운 ‘그대’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되돌아오는 날이 종종 있었다. 만나지 못한 횟수가 늘어갈수록 불안한 생각이 들었고, 자칫 더는 못 볼 수도 있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어차피 생은 유한한 것이라 언젠가는 이별의 순간을 맞게 된다. 사람도 바람과 다르지 않아 세월의 풍화에 사그라지고 말 대상이다. 화자는 간곡한 그리움을 ‘그대’라는 대상으로 호명을 거듭하고 있다. 간절하게 불러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 묻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 호명되기 시작했다.
1990년 중반까지
둔덕 삼거리에서 가파른 둔덕 재를 넘다보면
검문소의 흔적이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는데
늦은 밤, 섬뜩한 형상이 겹치거나
어깨의 쭈뼛거림에 뒷목이 오싹해지면
자동차의 문이나 실내를 확인하곤 하였는데
소소한 바람소리로
눅눅하고 처연한 빗소리로
주파(周波)를 보내고 있었던 것인데
1998년 10월 12일
호명마을 돌쫑지 깊숙한 계곡
여순항쟁 50주년에 맞춰
민간인 학살 피해자 암매장지를 최초로 발굴했다
불법적인 학살이나 암매장은 없었다는 거짓된 권력이
동백꽃 울음 앞에 하얗게 밝혀지던 날
여순반란이 여순사건이 되는 공론화(公論話)가 피어 올랐다
-<돌쫑지> 부분
여수 푸른 바다가 흑빛으로 변해버린 시절이 있었다. 아름답기만 한 섬들을 군데군데 척후처럼 띄워 임진왜란 때는 망국의 조선을 살려낸 여수 바다였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으로 인해 엄습한 공포감은 극심해졌고, 이어 들이닥친 토벌 과정이 문제였다. 피아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양민들이 좌익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임 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부분적으로 인용한 시다. 여수를 진출, 입 하기 위해서는 국도 77호선 둔덕삼거리와 만나게 된다. 둔덕재를 가까스로 올라서야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다. 과거 열악한 도로 환경에서 ‘둔덕재’는 쉽게 넘을 수 없는 고개였고. 그 재를 넘어야 순천으로 빠져나갈 수 있던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곳에서 “1990년 중반까지/ 둔덕 삼거리에서 가파른 둔덕재를 넘다보면/ 검문소의 흔적이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는데” 지날 때마다 왠지 모를 공포감이 엄습했다는 화자의 감이 적중한 것인가. 여순사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후속 조치들이 취해지면서 까풀이 벗겨지듯 숨겨온 만행이 조금씩 드러났다. 둔덕재 근처 “호명마을 돌쫑지 깊숙한 계곡/ 여순항쟁 50주년에 맞춰/ 민간인 학살 피해자 암매장지를 최초로 발굴했다”는 기사를 본 것이다. 화자는 이어 국가 권력이 지금껏 그래왔듯이 ‘여순 사건’ 때 자행된 “불법적인 학살이나 암매장은 없었다는 거짓된 권력”의 말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확인하며 분노한다. 그 원통하게 죽어간 원혼들의 넋을 위로하는 한 편의 시로 역사를 되돌리거나 바로잡을 수는 없다. 여순 사건의 진실을 반복해서 알리겠다는 시인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시 <맨드래미재 십리길>을 보자.
“아침 들녘 까마귀를 보신 어머니/ 아침상에서 경찰이던 친정 동생의 부음을 듣고/ 저녁 큰아들의 죽음을 보듬었다/ 잉구부에 매복한 진압군 총 앞에서/ 큰 눈을 가진 짙은 눈썹의 어린 가장의/ 달음박질은 소용이 없었다// 미평 오림리 잉구부에서 여천리 내동 부락까지/ 걸음걸음 맨드래미 빛 서러움이 찍히고/ 못다 푼 응어리들 뭉쳐 무겁디무거워진 몸/ 산 자들이 힘 합쳐 떠메고 돌아온 핏빛 십리길/ 아들의 마지막을 수습했던 마음을 잊지 말라했다// 고통의 진폭이 넓어지고/ 죽음의 형상에 대한 뿌리들/ 그 끝에 딸려오는 기억의 단편들은/ 막연한 두려움에서 적절한 말의 옷을 입고/ 빛 속에서 당당해지기 위한/ 삶의 동심원(同心圓)이 되었다”는 시는 한 가족의 서사이자 잘못된 역사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순 사건 발생 시 가장 크게 부각된 문제가 억울하게 죽은 대부분이 좌익으로 몰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위 시의 증언을 보면 지금껏 알고 있는 피해자와는 다른 사례이다. 경찰관인 친정 동생이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죽임을 당한 것이다. ‘여순 사건’은 결국 피아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든 상황에서 혼란을 틈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역사 속 가슴 아픈 비극임을 알게 한다. 참고로 위 시의 내용은 유가족의 녹취를 통해 증언된 자료집을 바탕으로 쓰인 시란 것을 밝혀둔다. 하여튼 무고한 민중들의 목숨을 앗아간 여순 사건은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국가 권력에 의해 억압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피맺힌 유가족의 증언뿐만이 아니라 숨겨진 과거의 진실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늦었지만, 피맺힌 원혼들의 한 맺힌 절규를 외면해선 안된다는 시인의 역사 인식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현재의 시간 속에서 사라진 대상을 실종이라 한다. 실종된 대상이 사람이라면 가족의 애태우는 심정은 가중된다.
군불 태워 뜨듯하고 토실하게 키워 낸 자식
여수 쪽만 바라보며 애태우더니
바람 따라 흘러가 버렸다
신덕 갯가 물안개 넘어오는 날이면
울퉁불퉁 늙은 가지마다
가지런히 발맞춘 까치 울음소리
목청 높아 안타깝다
-<까치산鵲山* 이야기> 부분
사람이 사라진 것을 알고 날아왔는지 모르지만, 까치가 산다는 작산 마을이다. 까치가 사는 산동네라고 풀어쓴다면 될 듯도 하다. 영리한 까치가 사람 사는 동네를 용케도 찾아들어 정을 붙이고 살아간다. 열심히 주변을 맴돌아보았자 곡식 낱알 몇 개 얻어먹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길조로 여겨 까치 울음은 언제나 반갑다. 이름마저 작산鵲山(까치산 마을)인 동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신덕 갯가 물안개 넘어오는 날이면” 집 나간 자식 돌아온다고 목청 높여 우는 까치 소리도 무용해진 아침이다. 떠난 사람에 대한 뒷담화가 아니고 돌아와야 된다는 담론이 우선이다. 떠나간 여수 쪽을 한없이 지켜본다는 지어미의 심정은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로 젖어있다. 사지로 떠밀려 사라진 여순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좋겠다는 여망을 띄워본다.
지금껏 둘러본 김숙경 시인의 시편 속에는 사람 중심인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 일관된 주의 주장이 아니라 해도 충분히 가치 있게 다가와 읽힌다는 데 주
목했다. 시인이 살고 있는 ‘여수’라는 지명은 역사적인 시간 속에서 현재와 관통하고 있어 더 각별한 곳이다. ‘여수’라는 고유 지명은 견고한 역사성을 기반으로 발생된 제 사건들을 함의하고 있어 시적 사유를 촉발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또한, 일상적 가치를 환기하면서 동일성으로 확장과 환기를 거듭해간다. 역사적인 사건들을 말할 때는 개별적 판단보다는 양심에 준한 인간의 존엄성으로 다가간다. 시적 대상으로 현전화한 언어적 순종은 때론 순수한 이면을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남도의 질감을 은근해진 언어 미학으로 담아내려 한 의중이 깔려있다. 시적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연출한다거나 수사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순정한 모습을 현재화된 언어 형태로 보여준다. 시적 중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어의 능란한 굴림이나 부림이 아니다. 그보다 인간의 실존에 위협이 되는 사회 제 현실을 끝없이 고민하며 질문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김숙경의 시가 지향해야 할 서정성을 견지하면서도 사회 담론 안에서 놓쳐서는 안 될 사건들을 주시한다는 데 있다. 특히 김숙경 시인다운 행간의 나열은 지루하지 않고 간결한 문장으로 이뤄진다는 것도 장점이다. 실재한 사건이나 체험을 통한 시적 전개가 세상사에 대한 애환이겠지만,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시 돌아가 사람 사는 것에 대한 담론의 궁극도 존재에 대한 긍정과 따뜻한 삶의 서정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시라는 문장으로 끊임없이 소통하고자 한 김숙경 시인의 진정한 세계가 존중될 때 시가 함의한 의미는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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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철영평론가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