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기도 여주는 국도의 상류 지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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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0:13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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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국도의 상류 지역에 있다
죽산 남쪽에 있는 구봉산은 산이 고리처럼 돌아서 산성을 만들 만하고, 경기와 충청 한복판에 있다. 물길은 충주에서 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는데 원주, 여주, 양근을 지나고 광주 북편 회룡진에 이르러서 한양의 면수(面水, 바로 앞에 있는 물)가 된다. 여주읍은 강 남쪽에 위치하여 한양과의 거리는 물길로나 육로로나 2백 리가 못 된다.
태백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흘러내리며 만드는 여러 물굽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한 군데가 신륵사 부근일 것이다. 한강 상류인 이곳을 이 지역 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르는데, 주변의 풍경과 수려함이 하도 뛰어나 예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학자인 김수온은 그가 지은 『신륵사기(神勒寺記)』에 “여주는 국도(國道)의 상류 지역에 있다”라고 썼는데, 국도는 바로 충청도 충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한강의 뱃길을 말한다.
신작로나 철길이 뚫리기 전까지는 경상도와 강원도, 충청도의 물산이 한강의 뱃길을 타고 서울에 닿았으므로 한강 뱃길을 국도 즉, ‘나라의 길’로 불렀던 것이다. 정선 아우라지에서 띄운 뗏목이 물이 많은 장마철이면 서울까지 사흘 만에 도착했다는데, 1973년 팔당댐이 생기고 1978년부터 충주댐 건설에 들어가면서 국도로 일컬어지던 뱃길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목은 이색은 그의 시에서 여주를 “들이 펀펀하고 산이 멀다”라고 읊었고, 조선 세조 때 사람인 설문우는 “긴 강은 서쪽으로 흘러가고 겹겹으로 된 구름은 북으로 와서 얕은 산을 둘렀네”라고 하였다. 조선 초기의 학자 서거정은 “강의 좌우로 펼쳐진 숲과 기름진 논밭이 멀리 몇백 리에 가득하여 벼가 잘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되며, 나무하고 풀 베는 데에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 데 적당하며 모든 것이 다 넉넉하다”라고 하였다.
부도비
청심루
고달사지 부도
남한강 중심부에 위치한 여주는 수많은 사찰과 나루가 흥망성쇠를 겪어온 곳이다. 특히 고달사지는 화려한 불교문화가 석탑과 부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한 신륵사 앞은 조포나루가 있던 자리다.
강물은 강원도 오대산에서 흘러나와 충주 월악산에서 흘러나온 강물과 합쳐져 수백리를 흐른다. 고을 북쪽에 이르러 깊고 맑으며 매우 넓은 호수를 이룬다.
웅장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동북쪽에 턱 하니 버티고 있는 산은 바로 용문산이다. 우뚝 솟아 푸른빛을 띠며 치솟아 나는 듯 춤추는 듯 추녀와 기둥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듯 솟은 산은 바로 치악산 봉우리다.
신륵사의 그림자가 강물 속에 거꾸로 비치고, 마암(馬巖)은 요충지로서 강물을 막아서니 정말로 나라의 상류를 제어하며, 경기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땅 넓이가 여주와 비슷한 고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상서롭고 복스러운 기운을 간직하여 나라의 근본이 되는 지역으로 여주처럼 융성한 곳은 없을 것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총서(總敍)’에 실린 글이다.
여주는 산이 야트막하고 들이 넓다. 그래서 쌀 하면 여주ㆍ이천 쌀, 즉 자채쌀이 일등미가 되었을 것이다. 『택리지』의 여주에 대한 설명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주읍의 서쪽에 백애촌(白崖村)이 있다. 긴 강줄기가 동남방에서 동북방으로 흘러들어 마을 앞을 가로로 흐르는데 이곳이 강가에서 제일가는 이름난 마을이다. 물의 입구가 막힌 듯해서 강물이 어디로 흘러나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읍과 백애촌은 넓은 들로 통하여 동남쪽으로 넓게 트였으며 기후는 맑고 서늘하다. 그런 이유로 이 두 곳에는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와 큰 재산을 가진 집이 여럿 있다. 한편 백애촌의 주민들은 오로지 배로 장사하는 데 힘을 써서 농사를 대신하는데, 그 이익이 농사일을 하는 집보다 낫다.
그런데 한글학회에서 나온 『한국지명총람』뿐 아니라 어떠한 기록에서도 백애촌은 찾을 수가 없다. 여주문화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6년 전 여주의 옛 지명을 조사할 때에도 백애촌을 찾고자 했으나 찾지 못해서 이포나루가 있는 금사면 이포리나 능서면 일대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때나 다름없이 지금도 이곳은 살 만한 곳으로 여겨져 서울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이포나루터
남한강에서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거대했던 이포나루. 한양으로 향하는 황포돛배와 나룻배를 타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읍내에 있는 청심루(淸心樓)는 제법 강과 산의 경치가 뛰어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여주여종고 옆 ‘여주 문화의 거리’에 옛 시절 청심루가 있었다는 표지석이 보일 뿐이다. 청심루는 『동국여지승람』뿐 아니라 『택리지』나 『연려실기술』 같은 옛 기록에 거의 항상 나올 정도로 이름난 누각이었다. “강물 옆에 있으며, 우뚝 솟아 있어 시야가 탁 트였다. 예나 지금이나 경치가 아름답다”라고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 청심루는 고려 때의 가정(稼亭) 이곡, 목은 이색, 정몽주, 도은(陶隱) 이숭인과 조선시대의 서거정, 신용개 등이 시를 지어 현판에 걸었다. 대들보는 하나인데 칡으로 되었다 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구름과 안개 처마 끝에 오래 머물고
4월에 청심루 오르니 얼굴이 차갑네.
여강의 깊은 물은 오대산 물줄기이고
용문산 길게 뻗은 산세 6대 명산이네.
석양 모래섬 그림자 하늘 끝에 이르고
안개 낀 절 종소리는 나무 사이로 들리네.
긴 강을 쳐다보는데 한 줄기 휘파람 소리
지난번 이야기는 모두 한가로운 소리네.
노수신의 시가 남아 전하는 청심루에 올라서면 여주팔경을 거의 다 볼 수가 있었다는데, 안타깝게도 광복 직후 일어난 폭동 때 불타서 없어졌다. 그 폭동은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일본과 그 앞잡이들에게 시달렸던 이곳 사람들이 일으킨 것인데, 당시 여주군수였던 강진수가 그 앞잡이 노릇을 워낙 지독하게 하여 그 앙갚음으로 청심루 곁에 붙어 있던 그의 집에 불을 지른 것이 청심루에까지 옮겨붙어 잿더미가 되고 만 것이다.
여주읍 창리에 있는 자안당(自安堂) 터에 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철종 때 세도가인 김병기가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자안당이라는 당호를 지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이 집을 빼앗아 여주군청으로 삼았다. 그러자 김병기가 바로 그 옆에 집을 똑같이 짓고서 우안당(又安堂)이라는 당호를 붙이자, 대원군이 그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자식을 낳거든 김병기 같은 놈을 낳아야 한다”라고 장탄식을 했다 한다. 현재에는 여주교육청이 들어서 있다.
남한강 북쪽에는 신륵사가 있고 절 곁의 강변에는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강에 임한 바윗돌이 아주 기이하다. 강 남쪽 기슭에 마암(馬岩)이 있고, 바위 밑에는 몸이 온통 검은 용이 산다는 말이 전해온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주는 국도의 상류 지역에 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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