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가옥(등록문화재 357호/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가 36-1)
장면가옥은 1937년에 신축해서 장면 전총리가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건물이다. 이 집은 건축가 김정희金貞熙가 설계한 집이다. 김정희(1895 - ?)는 장면박사 부인인 김옥윤金玉允여사의 넷째 오빠다. 김정희 손자인 김정권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희는 정식으로 건축을 배운 사람은 아니었으며, 당시 백동(현재 혜화동)소재의 신학대학 재학 중에 독일인 신부에게서 건축을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그 후 신학교를 도중에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건축 활동을 시작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석 달 후인 1950년 9월 납북됐다. 그의 작품으로는 ‘장면가옥(1937)’, ‘명동성당 문화관(1939-40)’, 동성고등학교 강당(1940)이 있다. 그리고 명동대성당보수공사(1945) 총감독을 역임했다.(김승배/142쪽)
보고서에 나온 토지대장에 의하면 과거 밭이었던 곳인데 1933년 지목이 대지로 변경됐다. 아마도 이때 이 대지를 매입한 장최근이 살림집이 지어 지목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장면박사는 1931년 동성상업학교로 부임하고 4년 뒤인 1935년 이 땅을 매입한다. 학교에서 가까운 이 대지를 매입한 것을 보면 동성상업학교에 장기 근무할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1936년 교장으로 취임하자 새로 집을 짓기로 하고 처남인 김정희에게 설계를 의뢰한 것으로 보인다.
장면가옥은 부지 안에 한옥과 양식건물이 공존한다. 안채는 한옥으로 사랑채는 양옥으로 지었다. 그리고 건축 재료와 기법도 다양하다. 이 집을 지을 당시 생활양식과 건축 환경이 1900년대 초와는 많이 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한옥 구조도 이전이 전통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 있다고 한다. 건물 주변 환경도 지금과 달랐다. 우선 지금 앞 도로는 과거에는 개천이었다. 이 집을 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리고 문 앞에도 작은 배수로가 있었다. 지금처럼 하수시설을 지하에 묻어 처리하는 것이 아니니 하천으로 방류하는 배수시설이 노출되는 것이다.
현재 부지 내에는 안채, 사랑채, 뒷방채, 경호원실 등 4채 건물이 있다. 경호원실은 지하실만 있던 것을 지상부분을 증축한 것이고, 안채 화장실 쪽도 나중에 증축한 것이다. 안채가 처음에는 ‘ㄴ자’형태였으나 화장실 쪽이 증축되면서 ‘ㄷ자’형태가 됐다.(보고서참조) 그러나 집 형태나 구조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서 집을 지을 당시의 건축을 확인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사회가 변화면 건축도 변한다. 이 집에서도 그런 모습이 보인다. 우선 여러 형식의 건물이 있다는 것이 조선시대 보다 사회가 다양하게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까지 남녀유별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래서 내외담 역할을 하는 벽이 대문 바로 앞에 있었다. 지금은 초기 상태로 복원한 것이라 대문에서 들어가면 앞에 벽이 있다. 그러나 이 벽은 처음에 있다가 중간에 허물었다가 이번에 원상 복구했다. 중간에 벽이 사라진 것은 남녀유별이 사라지고 나니 벽 때문에 마당이 좁아졌다고 느껴 마당을 넓게 쓰기 위함이다. 마당을 넓게 쓰려고 담을 헐어버린 것은 보고서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채는 한옥으로 지어졌다. 이 시기에 지어진 한옥은 살림집으로는 한옥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이후에 지어진 한옥은 문화재와 관련된 것 외에는 거의 없으니 그렇다. 사실 전후 살림집으로 지어진 한옥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최근 다시 살림집으로 한옥이 지어지고 있지만 살림집으로의 한옥의 맥이 끊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지어진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 건물 영향을 받아 화장실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욕실도 만들어진다. 퇴칸에는 유리 미서기 문을 설치해서 완전히 실내공간이 된다. 대청 구조가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바뀌고, 천정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또한 압록강 변 목재채취가 되면서 목재 수급이 원활해지면서 집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규제가 약화되면서 집이 화려해진다. 이 집에서도 그런 특징들이 보인다.
안채는 전후퇴집으로 계획됐다. 그러나 전퇴보다 후퇴 쪽 폭을 더 넓게 해서 공간을 다양하게 쓸 수 있게 했다. 건넌방 뒤쪽에는 반침과 화장실을 두었고, 부엌은 안방 뒤에 달아내 ‘ㄴ자’형태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부엌 옆에는 대청과 연결되는 찬방을 두었는데 이 찬방 아래는 지하실을 두어 창고로 사용하였다. 지하실은 부엌에서 들어간다. 지하실은 이전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설이다. 건넌방 쪽 뒷부분은 나중에 덧붙여 증축했다. 구조도 한옥과는 다른 양옥구조다. 이곳에 밖에서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해방 후 정치활동을 하면서 외부인이 많이 드나들자 외부인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안채 뒤쪽은 해방 후 증축한 것이 아닐까 한다. 보고서 사진을 보면 목욕탕에는 주철로 만든 일본식 욕조를 설치했다.
마루는 장마루를 깔았다. 이때 쯤 되면 장마루가 일반화됐을 것이다. 장마루임에도 꿀렁거리지 않는 것을 보면 튼실하게 잘 만들었다. 아산 윤보선 고택 사랑채에도 장마루를 깔았는데 꿀렁거려 집의 품격을 많이 깎아먹었다. 이집은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복원 전 안방 사진을 보면 현재 자개장이 놓여있는 뒤편 외벽 쪽에 고창을 설치했다. 보고서에 나오는 초창기 사진을 보면 현재처럼 가구가 놓여 있다. 이런 것을 보면 나중에 고창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의 처음 모습은 사랑채를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채 외벽 쪽 구조는 붙박이 벽장이 설치돼있다. 안방도 처음 집을 지었을 때는 사랑채처럼 붙박이 벽장과 낮은 문갑文匣이 설치됐을 것이다. 보고서의 건넌방 쪽 과거 사진을 보면, 천정에서 벽이 내려와 있다. 이것을 보면 건넌방은 가운데 미서기문을 설치하여 한 칸씩 나눠 쓴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방을 나눠 칸 별로 구분해 사용했다. 보고서 사진에도 있듯이 이곳에서 모임이 많다보니 넓게 쓰기 위해 중간 미서기문을 제거한 것이다. 대청에도 천정을 설치했다. 이렇게 대청에 천정을 설치하는 것은 대청이 실내공간이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예전처럼 연등천장을 하면 되면 난방에 불리하므로 천정을 설치한 것이다.
안채에서 몇 가지 눈여겨 볼 것이 있다. 첫 번째는 안방과 건넌방에 설치된 주철제 환풍구다 왜 이런 환풍구를 설치했는지 의문이다. 원래부터 환기구가 있었는지 아니면 아궁이를 연탄용으로 개조한 후 연탄가스 중독을 방지하기 위해 환기구를 설치했는지 알 수 없다. 보고서에서는 당시 주생활에서 환기문제가 논의되고 있어 그런 영향으로 보고 있다. 보고서에서는 아궁이가 처음에는 장작으로 때다가 연탄으로 개조됐을 것이라 보고 있다. 1920년대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이 집은 당시로써는 잘 지은 집이니 처음부터 연탄아궁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주1) 두 번째는 선홈통이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집 처마 끝에는 철판으로 처마홈통을 설치하고 처마홈통 물을 바닥으로 보내는 선홈통이 설치된다. 대부분 집에서 선홈통 마구리가 노출되어 마당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는데 이집에서는 기단 아래 숨겨져 깔끔하게 처리됐다. 이런 경우는 이곳에서 처음 봤다. 집을 지을 때 작은 것까지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기단에 있는 글자다. 시공자가 주인의 성을 재미로 써놓은 것이겠지만 그런 것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집을 보는 재미를 더 한다.
사랑채는 별동으로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얹은 서양식건물이다. 별동이지만 처마가 겹쳐있어 비 맞지 않고 사랑채를 출입할 수 있다. 외부인 사랑채 출입은 대문에서 바로 들어가게 돼있다. 당시 남녀유별 관념이 많을 때니 그럴 것이다. 이 집을 짓기 시작하기 전 장면이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니 손님이 많이 올 것을 고려해 계획한 것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이렇게 안채와 분리된 구조는 해방 후 정치활동을 하고부터 더 유용한 구조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사랑방은 온돌이고 옆에 응접실은 서양식 응접실이었다. 응접실은 현재 복원된 모습의 과거와 비슷하다면 애초부터 완전히 서양식 분위기로 만들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방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벽장과 문갑으로 구성된 단출한 형식이다. 사랑채 구조는 경량 목구조에 얇은 판재를 덮고 그 위에 회반죽을 바른 구조다. 지붕은 안방과 달리 일식 기와를 얹었다. 한옥이 아니다 보니 일본식 기와를 얹었을 것이다.
부속 건물로는 경호원실과 뒷방채가 있다. 경호원실은 지하층이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과거 방공호 용도로 썼을 것이라 한다. 건물은 경량 목구조 위에 외로 엮은 흙벽이고 그 위에 몰탈로 마감했다고 한다. 흙벽구조는 한옥 구조와 같다. 이 건물은 1955년 작성된 건축대장에 등재돼 있어 1955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현재 강판 접기로 마감돼있다. 뒷방채는 현재 1층인데 과거 사진에는 2층이다. 나중에 2층으로 증축한 것인데 다시 1층으로 고쳤다. 1층은 난방시설이 설치돼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보면 사람이 거주할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에 조금 산다고 하는 집에서는 식모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주2) 별동으로 떨어져 있고 난방을 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 식모가 거주했던 시설로 추정된다.
(주1)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집 즉 60년대 살았던 집이 적산가옥이라고 불렸던 일본인 집이다. 이 집 안방에는 온돌이 놓였는데 아궁이가 연탄 아궁이었다. 이미 일제강점기 때 연탄을 이용한 온돌이 보급됐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주2) 1971년도에 준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에는 지금으로 보면 국민주택규모 임에도 주방 옆에 작은 식모방이 설치돼있다.
참고문헌
- 장면가옥 기록화조사보고서/문화재청/2008년 11월
- 장면가옥의 근대 건축적 특성과 의미에 관한 연구/김승배·장명학/大韓建築學會論文集 計劃系 제24권 제5호(통권235호)/2008년 5월
- 장면 :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B%A9%B4
- 동성고등학교 홈페이지 : https://www.dongsung.hs.kr/xe2/about/history.php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혹 석탑은 없었나요?
장면 가옥인지. 윤보선 가옥인지 정원에 석탑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장면가옥에는 그런 것 없었습니다. 윤보선 가옥에는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