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서로 맞대다[與合面], 俗은 서융(西戎)의 것 [2편]
胡人 漫散이 東 混同江에도 있고, 西 萬里長城에도 있다
2023년 09월 16일
○ “1편”에서는 주로 “호인(胡人)과 만산군(漫散軍)”에 대한 설명(說明)을 하였다. “2편”에서는 이들 〈호인(胡人) 만산군(漫散軍)이 동(東) 혼동강(混同江)에도 있고, 서(西) 만리장성(萬里長城)에도 있다〉고 하였는데,
즉(卽), 〈호인(胡人) 만산(漫散)이 동(東) 혼동강(混同江)에도 있고, 서(西) 만리장성(萬里長城)에도 있다〉고 하는 말은 무엇일까? 오늘의 주제(主題)다.
※ ’혼동강(混同江)=송화강(松花江)‘ : [이미지 출처 : 두산백과] 【필자(筆者) 注 : 21세기(世紀)의 작품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以前) 이곳 땅의 지명(地名)은 토착인(土着人)들의 언어(言語)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혼동강(混同江) : 길이는 약 1,960km로 아무르강의 최대 지류이다. 송화강은 백두산의 천지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흘러 지린성 북서단의 삼차하(三岔河)에서 남류하는 눈강(嫩江)을 합친 뒤 북동쪽으로 유로를 바꾼다. 하얼빈을 거쳐 무단장에서 합치고, 다시 자무쓰(佳木斯)시를 지나 헤이룽장성 북동단에서 본류(아무르강)에 합류한다. [출처 : 나무위키]
즉(卽), 태종실록(太宗實錄) 13년 7월 19일 : 《또 호인(胡人) 만산군(漫散軍)이 동(東)쪽으로 혼동강(混同江)에도 있고, 서(西)쪽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에도 있는 까닭으로 반드시 남(南)쪽으로 우리에게로 도망할 것인데 방비하지 않아도 좋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는데,
➨ 〈호인(胡人) 만산군(漫散軍)이 동(東)쪽으로 혼동강(混同江)에도 있고〉라고 하였는데… … 이 설명(說明)은, 동(東)쪽으로는 혼동강(混同江) 주변(周邊)까지 “만산군(漫散軍)”이 있다는 이야기는, 혼동강(混同江)의 서안(西岸) 일대(一帶)까지를 말하는 것이고, “혼동강(混同江) 동안(東岸) 땅에는 만산군(漫散軍)이 없었다”라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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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인(胡人) 만산군(漫散軍)은, 서(西)쪽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에도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정말 어디에 있었던 장성(長城)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서(西)쪽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에도 호인(胡人) 만산(漫散)이 있었다』라고 한다면 : 『만리장성(萬里長城) 이남(以南) 땅은 바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것』이기 때문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해 누구도 반문(反問)하지 않을 만큼 확고(確固)하게 뇌세포(腦細胞)에 각인(刻印)되어 있으나,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고장성(古長城) 즉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하는 건가?” 하는 문제에는 답을 내놓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도 오류(誤謬)가 많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 아닌 「한족(漢族) 위주(爲主)의 역사(歷史)로 새롭게 만들어져 재탄생(再誕生)되었기 때문이다」
●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빙자(憑藉)한 일본제국(日本帝國)과 그 앞잡이들인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이놈들은 “능지처참(凌遲處斬)+부관참시(剖棺斬屍)+구족 멸(九族 滅)”을 해도 시원치 않을 자(者)들이다.
➤ 이놈들은 배신(背信)에 능하고, 카멜레온처럼 변신(變身)에 변신(變身)을 거듭하여 어느 날 갑자기 독립투사(獨立鬪士)로 옷을 바꿔입고, 또는 투철(透徹)한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가 되고 보수우익(保受右翼) 패거리가 되어 정권(政權)의 앞잡이가 되었다.
➤ 독립투사(獨立鬪士)와 정적(政敵)들을 암살(暗殺), 살해(殺害)하고, 독재정치(獨裁政治) 철권(鐵拳)을 휘두르며, 이 땅의 젊은이들을 고문(拷問), 살해(殺害)하던 수괴(首魁)가 보수우익(保受右翼)계의 거물(巨物)이 되었다.
➤ 일제제국주의(日祭帝國主義) 수괴(首魁)에게 충성맹세(忠誠盟誓) 혈서(血書)를 쓰고, 민주주의(民主主義) 정권(政權)을 강제(强制) 탈취(奪取)한 자(者), 일제(日帝)의 강제통치(强制統治)를 지원(支援)하며, 독려(督勵)하고, 강제(强制) 수탈(收奪)에 앞장섰던 자들이 어느 날 빨갱이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가 되고, 또 어느 날 갑자기 독립투사(獨立鬪士)로 옷을 바꿔입고, 또는 투철(透徹)한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가 되고 보수우익(保受右翼) 패거리가 되어 정권(政權)의 앞잡이가 되고, 지방(地方)의 토호(土豪)들이 되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보수우익(保受右翼)이라고 자칭하는 자(者)들의 ’무리 간판(看板)스타‘들의 숨길 수 없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이게 보수우익(保受右翼) 사상(思想)이냐?”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가 보수우익(保受右翼)이냐?
…빨갱이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가 보수우익(保受右翼)이냐?
대한민국(大韓民國)에는 보수우익(保受右翼)이 존재(存在)할 수 없다.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 역설적(逆說的)인 이야기지만 : 대한민국(大韓民國) 땅에서 ’보수우익(保受右翼) 사상(思想)‘을 가지고 있는 자(者)들이 바로 “진보주의자(進步主義者)”들이다.
여기서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위하고 이익극대화(利益極大化)를 꾀하는 일은 보수(保受)나 진보(進步)나 똑같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을 벗어나는 보수(保受)나 진보(進步)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궤도(軌道)에서 벗어나는 일은 ‘적대국(敵對國) 또는 다른 나라의 이익(利益)’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러한 예(例)를 우리는 ‘매국행위(賣國行爲)’라고 부르며, ‘매국노(賣國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者)들에 대한 감시(監視)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언제 또 그 숨은 발톱을 들어낼지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배신자(背信者)는 배신자(背信者)일 뿐이고, 또 매국노(賣國奴)는 매국노(賣國奴)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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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고전(古典) 기록(記錄)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➊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 : 《낙랑군(樂浪郡)의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곳이다.》라는 기록(記錄)으로 보면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봐도 : 낙랑(樂浪)은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이 아닌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이어야 맞다.
➋ 통전(通典) : 《갈석산(碣石山)은 한(漢)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장성(長城)이 이 산(山)에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상고해 보건대, 장성(長城)의 동(東)쪽은 요수(遼水)를 끊고 고구려(高駒驪)에 들어갔는데,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는 기록(記錄)으로 보면 :
왜곡(歪曲)으로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역사통설(歷史通說)인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으로 봐도 : “낙랑(樂浪)은,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이 아닌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이어야 맞다”
그러나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 어디에도 옛 장성(長城)의 유지(遺址)는 없다. 현존(現存)하는 장성(長城)은 한참 후대(後代)의 것일 뿐이다. 또한 『림유관(臨楡關)이니, 림유산(臨楡山)이니, 림유하(臨楡河) 등이 없다』라는 것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또한 「옛 요서군(遼西郡) 땅이 아니었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➌ 자치통감(資治通鑑) 수기(隋紀) 양제(煬帝) 상지하(煬帝 上之下)의 주(注) : 《두우(杜佑)가, “갈석산(碣石山)은 한(漢)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으니,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이 산(山)에서 시작되었다[碣石山 在漢樂浪郡遂城縣 秦長城起於此山]”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위의 글 “➊+➋+➌”에서 설명(說明)하는 말에 따르면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통전(通典)+자치통감(資治通鑑)】 : ‘갈석산(碣石山)은 낙랑군(樂浪郡)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에 의하면 :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은, 옛 낙랑군(樂浪郡) 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 땅에는 ‘요수(遼水), 패수(浿水), 압록강(鴨綠江)’ 등이 없다.
「“갈석산(碣石山)”과 “산해관(山海關)=유관(渝關:투(渝)관)=림유관(臨楡關)=림투관(臨渝關)”은 조선(朝鮮) 영토(領土) 안에 있었다」라는 것이고, 옛 장성(長城)의 시초(始初) 또는 시작되었던 곳은 “조선(朝鮮) 영토(領土)”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다. 이건 속일 수 없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문제(問題)는 :『진(秦) 장성(長城)의 동(東)쪽은, 요수(遼水)를 끊고, 고구려(高駒驪)에 들어갔는데,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하였는데,
➊ 그 땅이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인가?
➋ 그 땅이 신강성(新疆省)에 있는 천산(天山)과 하(河) 상류(上流)인가?
➌ 그 땅이 ‘동(東)쪽 임조(臨洮)’에서 ‘북(北)쪽으로 요수(遼水)’까지 쌓았는가? 동(東)쪽 ‘임조(臨洮)’라는 말이 시사(示唆)하는 바가 큰 것이다. 이런 기록(記錄)에 따르면 “임조(臨洮)”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는 황하(黃河)【시황(始皇) 때의 덕수(德水)다】가 바로 “요수(遼水)”가 되기 때문이다. 【이건 오늘의 역사해설(歷史解說)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 소식(蘇軾) 3의 05 儒者可與守成”편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이다】
옛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위치(位置)’에 대해서는,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現在)의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절대로 신뢰(信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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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이집(簡易集) 제3권 / 서(序) / 중국의 경사(京師)로 떠나는 정몽여(鄭夢與) 공을 전송한 글 사은사(謝恩使)
《按楡關之故。而知長城因之以拓。: 그리고 유관[楡關 산해관(山海關)]을 넘을 적에는 옛 고사를 떠올리면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 개척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요》라고 하였으니,
➨ 위의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와 통전(通典)에 의하면 : 산해관(山海關) 즉 ‘유관(渝關)=유관(楡關)’은, 『조선(朝鮮)의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다』는 말과 같다. 【➊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 : 낙랑군(樂浪郡)의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곳이다. ➋ 통전(通典) : 〈갈석산(碣石山)은 한(漢)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장성(長城)이 이 산(山)에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상고해 보건대, 장성(長城)의 동(東)쪽은 요수(遼水)를 끊고 고구려(高駒驪)에 들어갔는데,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그 유지(遺址)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고,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은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산해관(山海關)=유관(楡關)’이 아니었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2) 薊山紀程 2권 渡灣 ○ 계해년(1803, 순조 3) 12월 17일(무인)
《深河 : 出城一里而渡河。是遼東伯金應河大鏖之地也。往往有京觀云。而今不可見。關外路傍。有玉皇閣及楡關書院。書院卽學堂也。: 성에서 1리쯤 나와 강물을 건너게 된다. 이곳은 요동백(遼東伯)이었던 김응하(金應河)가 크게 섬멸된 땅이라 왕왕 경관(京觀)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볼 수 없다. 산해관(山海關) 밖 길 곁에 옥황각(玉皇閣)과 유관서원(楡關書院)이 있다. 서원은 곧 학당이다.》하였으니,
➨ 〈‘김응하(金應河)’ 장군(將軍)이 절사(節死)했다는 ‘심하(深河)’는, 곧 산해관(山海關) 서(西)쪽에 있었다〉는 것이고, 〈산해관(山海關)은 곧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다〉는 것이 고전(古典) 원전(原典)에서 말해주고 있다.
「산해관(山海關)이 동방(東方)에 없었다」라는 말은 곧 「심하(深河) 역시(亦是) 서역(西域) 땅에 있었다」라는 증거(證據)다.
〈折戟沈長沙.宿雲埋古壘.將軍去不還.千載空流水 : 부러진 창은 멀리 뻗은 모래벌판에 가라앉았고, 밤새의 구름은 옛 보루 묻어 버렸다. 장군은 가 버리고 돌아오지 않는데, 천년토록 부질없이 물 흘러가는구나〉하였다.
만리성(萬里城) : 自大石橋以後.望見閭山之腰.長城逶迤而走.是秦時所築萬里城也.城止於柵外.山海關則城附其曲折處築.而至於海 : 대석교(大石橋)를 지나서부터는 무려산(巫閭山) 허리에 장성(長城)이 구불구불 달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이것이 진(秦) 나라 때 구축한 만리장성이다. 성은 문책(門柵) 밖에서 끝났고, 산해관(山海關)에는 성이 꼬부라진 곳에 붙어서 바다에까지 이른다.
➨ 오늘날의 의무려산(醫巫閭山) 주변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없다. 이러한 기록(記錄)은, 오늘날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옛 기록(記錄)에서 말하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아니다”라는 것을 여실(如實)히 증명(證明)해주고 있다.
이런 많은 기록(記錄)은 : 오늘날의 북경(北京)은 『옛 북경(北京) 즉(卽) ‘연경(燕京)이 아니다』라는 것을 후세(後世)인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3) 고금주(古今注) 도읍(都邑) 편을 보면 : 자새(紫塞)는 곧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딴 이름이다【都邑 第二 : 紫塞,秦築長城,土色皆紫. 漢塞亦然,故稱紫塞焉】라고 하였다.
➨ ‘자새(紫塞’)를 찾아내면 진(秦)의 장성(長城)을 찾아낼 수 있는데, 오늘날의 하서회랑(河西回廊) 서(西)쪽 돈황(燉煌)과 서역(西域) 땅에 그 유지(遺址)가 남아 있을 뿐인데, 사가(史家)들은 이것이 전한(前漢) 때의 것이라고 말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자새(紫塞)란 곳, 황토(黃土)를 빗어 장성(長城)을 쌓았다는 이야기다. 대륙의 황토(黃土)층은 서(西)쪽인 ‘황토고원(黃土高原)’과 ‘천산(天山) 일대(一帶)’에 널려있다고 전해진다. 【準噶爾盆地 : 黃土地貌 : 主要分布於天山、準噶爾西部山地的低中山區其山麓地帶。由風成黃土、冰水黃土及次生黃土堆積形成。 黃土塬見於博樂北部、瑪納斯南部,為黃土堆積的台地或古老傾斜平原經流水切割形成】
(4) 농암집(農巖集) 제2권 / 시(詩) : 연경(燕京)에 사신 가는 남 우상(南右相) 구만(九萬)을 전송하며
➊ 주석(註釋) : 〈칙륵가(敕勒歌)는 악부(樂府) 잡가(雜歌)의 편명으로, 동위(東魏)의 고환(高歡)이 북주(北周) 옥벽성(玉壁城)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그의 장수 곡율금(斛律金)을 시켜 짓게 한 것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중국(中國)의 ‘위키백과’에서는 ‘작자미상(作者未詳)’이라고 하였다.
➋ 중원(中原)사람이 무엇 때문에 칙륵가(勅勒歌)를 짓게 했을까? 곧 고환(高歡)은 ‘칙륵(勅勒)’ 사람으로 그 휘하(麾下) 병사(兵士)들 역시(亦是) 칙륵(勅勒)이었다는 말과 같다.
敕勒歌 [北朝乐府民歌,作者不明] :《敕勒川,陰山下。天似穹廬,籠蓋四野。天蒼蒼,野茫茫,風吹草低見牛羊.》
(5)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9권 / 연기(燕記) 각산사(角山寺)
《山海關。在長城之內。關之北十里。有山曰角山。緣山而上十里。倚長城而有寺。曰角山寺。自關城來往。可費半日功。又使行出關時。自衙門點閱。不可落後。: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萬里長城) 안에 있다. 관 북쪽 10리에 있는 산이 각산(角山)이다. 산을 따라 10리쯤 올라가면 장성을 끼고 각산사란 절이 있으니, 관성(關城)에서 왔다 가는데 반나절이 걸린다. 게다가 사행(使行)이 관(關)을 나올 때면 아문으로부터 검열이 있으므로 뒤떨어질 수도 없다.》
➨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萬里長城) 내(內)에 있다’라고 하였다. 허나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에는 없다. 후대(後代)의 작품(作品)이다.
옛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수천(數千)리 서북방(西北方)에 있다고 전해지며, 「몽념(蒙恬)의 자살(自殺)과 함께 중단(中斷)되었는데, 양산(陽山) 북(北)쪽으로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졌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으로부터 수천리(數千里) 서북(西北)쪽에서 중단(中斷)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6) 동문선(東文選) 제8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연산의 노래[燕山歌 : 이색(李穡) ]
《연산 북쪽에 구름이 무더기로 쌓인 듯 : 燕山之陽雲如堆 / 용이 날고 봉이 춤추듯 산세 멀리서 왔네 : 龍飛鳳舞源源來 / 만리장성 중단된 곳이 거용관이요 : 長城中斷居庸關》이라고 하였는데,
➨ “사기(史記) 몽념전(蒙恬傳)”에 의하면 :『당시(當時)의 장성(長城)은 하(河)를 따라 쌓다가 양산(陽山)으로 이어져 북방(北方)으로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졌다. 몽념(蒙恬)의 자살(自殺)과 함께 중단(中斷)되었다』라고 했기 때문에, “거용관(居庸關)”은, 역사통설(歷史通說)을 적용(適用)한다고 해도, 최소한(最小限) 하투(河套) 북방(北方) 내몽고(內蒙古) 땅에 있어야 한다. 이는 곧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은,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하투(河套)에는 음산(陰山)도 없고, 양산(陽山)도 없다. 이게 중요(重要)한 것이다. 지명(地名)을 차용(借用)한 것이다」
(7)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2권 / 무오년(1798, 정조 22) 12월 12일
《꼭두새벽에 떠나 10리를 가니 해가 비로소 돋더라. 소송령(小松嶺)에 이르니 이즈음에서 동북(東北)으로 바다가 보이는데, 물빛이 검고 푸르러 하늘에 닿아 끝이 없으니, 이는 발해(渤海)라 하는 바다요, 서북으로 또 큰 산이 막혔으니, 산허리에 만리장성이 굽이굽이 둘러져 있으니 이는 진시황(秦始皇)이 쌓은 것으로, 임조(臨洮)란 땅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러 넓이와 길이가 만여 리라.》
➨ 〈동북(東北)으로 바다가 보이는데〉 : 이곳은 산해관(山海關) 동(東)쪽 주변이다. 산해관(山海關)은 발해(渤海) 바닷가에 있는 관문(關門)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동북(東北)쪽으로 바다가 보일 수 있을까?
동북(東北)쪽으로 발해(渤海)가 보인다면 :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서남(西南)쪽에서 북경(北京)으로 올라오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의무려산(醫巫閭山) 쪽으로부터 서남(西南)쪽으로 행군(行軍)해야 산해관(山海關)에 도착(到着)할 수 있다. 따라서 발해(渤海)는 이들이 산해관(山海關)으로 오는 멀지 않은 남(南)쪽에 발해(渤海)가 있게 된다.〉
“뭔 동북(東北)에 발해(渤海)가 있다는 것일까?” 이러한 기록(記錄)은 『산해관(山海關)이나 만리장성(萬里長城)이나 발해(渤海) 등은 본래(本來) 다른 땅에 있던 것을, 지명(地名)을 차용(借用). 이동(移動)시켰다』라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8) 부연일기(赴燕日記) 역람제처(歷覽諸處) 산해관(山海關) :
《是長城門也。城自西北來。東迤入海。築于水中十里。望見可悉。: 이는 만리장성의 문이다. 성이 서북(西北)쪽에서 시작하여 동(東)으로 길게 뻗어내려 바다에 이르는데, 수중(水中)에 쌓아 10리 되는 지점에서 바라보아도 다 알 수 있다. 而關以南至海。間間崩頹。踰踐無禁。: 지금은 관문(關門)이 남쪽으로 바다에 접한 곳이 간간이 무너져, 밟고 넘어다녀도 금(禁)하는 사람이 없다. : 又有中城。城樓西面。扁以天下第一城。中城西門東面虹楣。刻祥藹搏桑四字。: 또 중성(中城) 성루의 서편에는 ‘천하제일성(天下第一城)’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중성의 서문 동편 둥근 문미에는 ‘상애박상(祥藹搏桑)’의 네 글자를 새겼다.》
➨ ‘천하제일성(天下第一城)’은, 동(東)쪽 끝머리에 있을 수 없다. 최소한(最小限) ‘천하제일성(天下第一城)’이라고 한다면 서변(西邊)【땅의 중심(中心)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성(城)이라고 했기 때문이다.】의 끝에 존재(存在)해야 ‘천하제일성(天下第一城)’이 될 수 있는 것이다.
(9)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권 / 천지문(天地門) 하투(河套)
《河套者黄河北走折轉入中國而長城即跨其南 : 하투(河套)는 황하가 북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중국 내지로 들어오며 만리장성이 그 남쪽으로 걸쳐 있는 곳이다. 周回六七百里三面阻河戰國時為上郡蒙恬逐匈奴有其地所謂河南地者也 : 6~7백 리를 돌아서 흐르는데 삼면이 황하와 연접되었다. 전국 시대에는 상군(上郡)이었는데 몽염(蒙恬)이 흉노를 쫓아내고 그 지역을 점령하고 하남지(河南地)라 하였다. 漢武用主父偃䇿立朔方郡因河為固若夏赫連勃勃李継遷皆䧺㨿北方至宋元昊遂稱夏帝: 한 무제(漢武帝)가 주보 언(主父偃)의 건의를 받아들여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하고 황하를 튼튼한 방어선으로 삼았다. 하(夏) 나라의 혁련발발(赫連勃勃)ㆍ이계천(李繼遷) 같은 사람은 모두 강하게 북방을 점령하였고, 송(宋)에 와서 원호(元昊)는 하(夏)의 황제라는 칭호를 썼다. 地冝五穀尤冝稻麥張仁愿三受降城皆在套北 : 이 지역은 모든 곡식이 잘되는데, 특히 벼와 보리가 더 잘된다. 장인원(張仁愿)이 항복을 받은 성이 세 곳이 있는데 모두 하투(河套)의 북쪽이다.》하였다.
➨ 이곳 땅을 보면 :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바에 의하면 : 〈하늘이 내려 준 천혜(天惠)의 땅이었다〉고 하였다. 곡창지대(穀倉地帶)요, 목초지(牧草地)로 유목민(遊牧民)들의 천국(天國)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예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라고 한다. 이는 자연환경(自然環境) 파괴(破壞)로 인한 재앙(災殃)이 이곳을 휩쓸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 땅에 있는 장성(長城)을 곧 하새(河塞)라고 불렀다고 하였는데, 다른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 “진(秦)의 장성(長城)이 아니다”라는 설명(說明)이 있다. 【이는 다음 “3편”에서 다뤄보기로 하겠다.】
(10) 성호사설(星湖僿說) 제8권 / 인사문(人事門) 차한일기(車漢日記)
《我孝廟九年戊戌大國徵我兵助攻車漢賊車漢者羅禪也. : 효종(孝宗) 9년에 대국(大國)이 우리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도와서 차한(車漢)을 치라 하였으니, 차한은 나선(羅禪)이다. 扵是以惠山僉使申瀏移拜北虞候領兵赴戰 : 그러므로 혜산첨사(惠山僉使) 신류(申瀏)를 북우후(北虞候)에 이배(移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가게 하였다. 先時曰介介夫落愎介三國朝幣不至淸將問罪三國皆言小邦為車漢所侵掠捄難不贍寕有貮志 : 이에 앞서 왈개(曰介)ㆍ개부락(介夫落)ㆍ퍅개(愎介) 등 세 나라가 조공(朝貢)을 바치지 않자, 문죄(問罪)하니, 세 나라는 모두 말하기를 “소방(小邦)이 차한의 침략을 받아 난리를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서이지 어찌 다른 생각을 두겠습니까? 大國若揚威勦㓕是大國有䘏小之恩小邦盡事大之誠 : 대국이 위엄을 보여 차한을 섬멸한다면, 대국은 소방을 구제하신 은혜가 있게 되고 소방은 사대(事大)의 정성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扵是連歲發兵徃討皆為賊所敗. : 이리하여 청(淸)에서는 해마다 군사를 출동시켜 차한을 토벌하였으나, 번번이 차한에게 패하였다. 甲午遺使徵兵我邦以北虞候邉岋為將領銃手百名旗皷大丁四十八名赴之遇賊扵厚通江賊多中丸死追至好通及骨地賊逺遁岋全師還 : 그러자 갑오년에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출동시키라 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북우후 변업(邊岋)을 장수로 삼아 총수(銃手) 1백 명과 기고(旗鼓)ㆍ화정(火丁) 48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후통강(厚通江)에서 적을 만난 우리 군사는 많은 적을 사살(射殺)하고 호통(好通)ㆍ골지(骨地)까지 추격하매 적은 멀리 도망쳤으며, 변업은 한 명의 군사도 잃지 않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至是選北邉九邑銃手二百名及標下旗皷手火丁六十名齎三月糧前去 : 그러므로 이번에도 북변(北邊) 9읍(邑)의 총수 2백 명과 표하(標下)ㆍ기수(旗手)ㆍ화정 60명을 선발하여 3개월의 군량을 가지고 앞서가게 하였다. 戊戌春三月一日也渡豆滿江十三日渡漁濟江十六日歷毛段江十九日達靈古塔 : 무술년 봄 3월 1일에는 두만강(豆滿江)을, 13일에는 어제강(魚濟江)을 건너고, 16일에는 모단강(毛段江)을 거쳐 19일에 영고탑(靈古塔)에 당도하였다. 中間樹林蔽天人迹未到麋鹿成羣魚不避人長或十餘尺以佃以漁饗士皆飽 : 영고탑까지 지나온 길은 숲이 하늘을 가렸으며, 인적(人迹)이 미치지 않아 사슴이 떼를 이루고 물고기가 사람을 피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잡아 군사를 배불리 먹였다. 靈古城髙池深人民繁庶畜産遍野耕農之地在城外十里行 : 영고성(靈古城)이 높고 호(濠)가 깊으며, 인구(人口)가 많고 가축(家蓄)이 들에 가득한데, 농지(農地)는 성 10리 밖에 있다. 至厚通江江濶十餘里又十餘日歴蒙古國四月十九日渡加里江至金泉江去萬里城六日程云 : 후통강에 이르니, 강의 너비가 10여 리나 되었다. 또 10여 일 만에 몽고(蒙古)를 거쳐 4월 19일에 가리강(加里江)을 건너서 금천강(金泉江)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만리장성(萬里長城)까지 엿새 길이라고 한다. 歴愎介國其俗男女同服以鬚為別五月五日到曰介國此本淸之餘種與淸族類相錯 : 퍅개(愎介)를 지났는데 그 나라 풍속(風俗)은 남녀가 같은 옷을 입기 때문에 수염으로 남녀를 구별한다. 5월 5일에는 왈개국(曰介國)에 도착하였는데, 이 나라는 본래 청(淸) 나라의 일종(一種)으로서 청 나라와 종족이 흡사하였다.
十五日到宋加羅江江與黑龍江合此車漢徃来之衝 : 15일에는 송가라강(宋加羅江)에 도착하였다. 이 강은 흑룡강(黑龍江)과 합류(合流)하는데, 이 강이 바로 차한이 왕래(往來)하는 요충(要衝)이다. 車漢者以船為宅不耕不織攘奪為業非水戰不可制留待戰艦之至 : 차한은 배를 주택(住宅)으로 삼아, 농사와 길쌈을 하지 않고 노략질로 생업(生業)을 삼는 무리여서, 수전(水戰)이 아니고는 제압할 수가 없으므로, 전함(戰艦)이 오기를 기다렸다. 留八日戰艦至大者長五十丈小亦十三丈髙可三四丈內作三層用板為隔下蔵穀中蔵械具上可容五百人每 : 기다린 지 8일 만에 전함이 왔는데 큰 것은 길이가 50장(丈)이나 되고 작은 것도 길이가 13장은 되며 높이도 3~4장은 되는데, 내부(內部)를 3층(層)으로 만들고 판자(板子)로 칸막이를 하여, 하층에는 군량을 저장했고 중층에는 무기를 간직하였으며, 상층은 5백 명을 수용(收容)할 수 있었다. 艦領五小舠制作極精緻曰介軍獵得大魚長五丈以其半餉我軍皆飽 : 전함마다 작은 배 5척을 거느렸는데,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왈개의 군사가 길이가 5장이나 되는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반으로 우리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淸元帥率曰介介夫落愎介及蒙古䓁兵六月五日觧纜十日到黑龍江 : 청나라 원수(元帥)는 왈개ㆍ개부락ㆍ퍅개와 몽고의 군사를 거느리고, 6월 5일에 배를 출발하여 10일에 흑룡강에 도착하였다. : 江濶二十餘里深不可測色如柒魚族及江邉禽獸皆黑人言宋加羅従萬里城外来 : 흑룡강은 너비가 2십여 리나 되고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빛깔은 숯처럼 검고 물 속의 고기와 강가에 짐승도 모두 검다. 사람들은 송가라강은 만리장성 밖에서부터 흘러온다고 한다. 十日賊従黑龍下流至望見驚惶一字擺列半登于島水陸掎角淸元帥發卒再甞賊銃丸齊發死傷過半 : 10일에는 적이 흑룡강 하류로부터 오다가 청 나라 군사를 바라보고 깜짝 놀라 일자(一字)로 나열하여 반(半)은 육지로 올라가서, 수륙(水陸)으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었다. 청 나라 원수가 군사를 놓아 두 번째로 적을 시험하게 하자, 적은 일제히 총탄을 퍼부어 과반수를 죽이거나 부상시켰다. 淸元帥用我國副將裵是熀策以鉅艦橫截堅鐡干為城使水陸不相及先殱島賊北軍亦多死傷復進攻水賊不利相持五日士氣益沮. : 청(淸) 원수는 우리의 부장(副將) 배시황(裵是熀)의 계책을 사용하여, 큰 배로 해상(海上)의 적이 육지의 적과 통과하는 길을 차단하고 철책(鐵柵)으로 성을 만들어, 수륙의 적이 서로 구원할 수 없게 한 다음 먼저 섬[島]의 적을 섬멸하였는데, 북군(北軍 중국 군대)도 많은 사상자(死傷者)를 냈다. 다시 전진하여 해상의 적을 공격하였으나, 전황(戰況)이 불리하여 5일 동안을 서로 버티게 되자, 사기(士氣)가 매우 떨어지게 되었다. 我將以火攻之策說之淸元帥利其貨物不聽至勢窮而後許之扵是令裵是熀劉應天被重甲乗流而下 : 이때 우리 장수는 우리는 화공(火攻)의 계책으로 청나라 원수를 설득하였으나 원수는 적이 가지고 있는 화물(貨物)을 탐하여 듣지 않다가, 궁지에 몰린 뒤에야 허락하고 배시황ㆍ유응천(劉應天)에게 겹으로 된 갑옷을 입고 흐름을 따라가게 하였다. 二人相謂曰賊船皆樺皮重覆多蔵火藥既發火箭不急避必不免扵虐炎 : 두 사람[배시황ㆍ유응천]은 서로 이르기를 “적선(賊船)은 모두 자작나무 껍질로 겹겹이 덮었으며 화약을 많이 싣고 있으니, 화전(火箭)을 쏜 뒤에 빨리 피하지 않으면 사나운 불꽃에 타서 죽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賊見其孤行慮為疑兵不搏撃船稍近矢發着船一時延焼風雷交作聲震天地 : 적은 이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보았으나, 의병(疑兵)이라 생각하여 치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탄 배는 적선에 가까이 다가가서 적선에 화전을 쏘매 일시에 불이 일어 배가 타니, 폭약이 터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二人迴船走避慌忙相失 : 두 사람은 배를 돌려 급히 도망치다가 경황중에 서로 헤어졌다. 行止十里許猶波飜舟蘯戰袍皆沾烟炎晦冥自分必死半日始風㝎浪息若東方之漸白 : 10여 리를 도망쳐왔는데도 파도는 여전히 높고 배는 기우뚱거리며, 전포(戰袍)는 다 젖고 바다에는 연기가 자욱하여, 꼭 죽을 것으로만 생각했더니, 한나절이 지나자 바람이 자고 파도가 멎으니, 마치 동녘이 밝아오듯 살 희망이 보였다. 數日始達大軍淸元帥延謂曰凶濤忽起吾以爾為死矣明日進船至賊所則盡為灰燼腥膻之臭不堪聞諸國咸稱曰此朝鮮之力也 : 며칠 만에 대군(大軍)이 있는 곳에 당도하니, 청 나라 원수 연(延)은 “사나운 파도가 갑자기 일기에 나는 너희들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하였다. 그 다음 날 배를 몰아 적이 있던 곳으로 가서 보니, 적선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살이 타는 냄새는 차마 맡을 수가 없었다. 여러 나라 군사들은 모두 “적을 이처럼 섬멸한 것은 조선(朝鮮)의 힘이다.”라고 하였다. 賊身長十尺目長而深赤髮鬖鬍如海毛垂肩此恐是契丹所征黃頭室韋也 : 적은 신장(身長)이 10척(尺)이나 되며 눈은 길고 깊으며, 털은 붉고 수염은 헝클어져 마치 해초(海草)가 어깨에 늘어진 것 같으니, 이는 아마도 거란(契丹)이 정벌했던 황두실위(黃頭室韋)인 듯하다. 軍器則火炮長鎗也銃不用火線以㻴瑚石著在火門堅不動又扵龍頭上置金鐩龍頭落而金石相薄激成火㸃火起丸發 : 적의 군기(軍器)는 화포(火炮)와 장창(長槍)이고, 총(銃)에는 화승(火繩)을 쓰지 않고, 만호석(㻴瑚石)을 화문【火門 화승의 불로 화약에 점화하는 곳】에 단단히 고착(固着)시키고, 또 용두(龍頭) 위에 금수(金燧)를 달아 놓았는데, 용두가 떨어지면 금수와 만호석이 서로 부딪쳐 불이 퉁기어 점화(點火)되며, 점화가 되면 곧 발사되도록 되어 있다. 舡制覆以木板或排椽加柞外皆樺皮厚覆多穿穴放丸也 : 배는 나무 판자(板子)로 덮거나 서까래를 걸어 떡갈나무로 덮었는데, 밖은 모두 자작나무 껍질로 두껍게 덮고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많이 내어놓았다. 我兵死者八人傷者又若干七月十日奏捷發還舉銕碇十八不能勝有械囚俘賊一舉引上若取芥然其膂力如此 : 우리 군사는 8명이 전사하고 약간 명이 부상하였다. 7월 10일에 첩서(捷書)를 아뢰고 회군(回軍)하는데, 열 사람이 들어 올리지 못한 철정【鐵碇 쇠로 만든 닻】을 포로로 잡은 차한 사람은 혼자서 마치 지푸라기 들듯 들어 올리니, 그 완력이 이와 같다. 九月二十七日還到靈古塔勑降賜朝鮮將爵龍骨大副骨大頒賞有差 : 9월 27일에는 영고탑에 도착하였는데, 황제가 칙명을 내려 조선 장수에게 용골대(龍骨大)ㆍ부골대(副骨大)의 벼슬을 내리고 상(賞)을 차등 있게 주었다. 淸元帥引是熀至家見其三妻三人舉一臂垂一臂為禮進與合面享以盛饌 : 청(淸) 원수는 배시황을 이끌고 집으로 가서 자기의 세 아내와 인사시켰는데, 세 아내는 한 팔은 올리고 한 팔은 내려 예를 하고서 앞으로 나와 제 얼굴을 배시황의 얼굴에 대었으며, 성찬(盛饌)으로 대접하였다. 意者一舉一垂指天地也心不同如面故面合則心合也 : 생각건대, 한 팔은 올리고 한 팔은 내린 것은 천지(天地)를 가리킴이고, 사람의 마음은 사람의 얼굴처럼 서로 다르므로, 얼굴을 갖다 대면 마음도 합한다는 것을 뜻함인 듯하다. 十一月十八日離靈古塔十二月十五日到豆滿江明年大國付貢使賜陳亡者八人家銀各三十两傷者二十五人分五䓁賜銀有差申裵二人皆嶺南人 : 11월 18일에 영고탑을 출발하여 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하였다. 그 이듬해 청 나라에서는 공사(貢使) 편에 부탁하여 건사한 여덟 사람의 집에는 각각 은(銀) 30냥(兩)을 주고, 부상한 25명에게는 5등급으로 나누어 은을 차등 있게 주었다. 신류(申瀏)와 배시황(裵是熀)은 모두 영남 사람이다.》 -終-
➊ 〈至厚通江江濶十餘里又十餘日歴蒙古國四月十九日渡加里江至金泉江去萬里城六日程云 : 후통강에 이르니, 강의 너비가 10여 리나 되었다. 또 10여 일 만에 몽고(蒙古)를 거쳐 4월 19일에 가리강(加里江)을 건너서 금천강(金泉江)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만리장성(萬里長城)까지 엿새 길이라고 한다.〉
〈후통강(厚通江) : 송화강(松花江)이다. 至金泉江去萬里城六日程云금천강(金泉江)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만리장성(萬里長城)까지 엿새 길이라고 한다〉
※ [지도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송화강(松花江)이 동북(東北)쪽으로 흘러 흑룡강(黑龍江)으로 유입(流入)되는 주변일대(周邊一帶)로부터 산해관(山海關)의 만리장성(萬里長城)까지가 6일 정도 걸린다[六日程]고 하였는데, 『거리(距離)상으로 보면 : 이때의 조선군(朝鮮軍)은 신군(神軍) 곧 ‘신(神)의 전사(戰士)’들이라는 말과 같다.』 불가능(不可能)한 거리(距離)란 뜻이다. 이는 곧 오늘날의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黑龍江)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구글어스’ 직선거리(直線距離)를 구해보면 : 진황도[옛 산해관(山海關)]로부터 눈강(嫩江)과 송화강(松花江)이 합류(合流)하는 곳까지 1,200km【3 천리】,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이 합류(合流)하는 곳까지 1,600km【4 천리】정도가 되니, 산(山)과 들(野)과 하천(河川)을 따라 행군(行軍)한다고 보면 5 천리(千里)가 넘는 길이므로, 이 길이 “6 일정”이라면 :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신류(申瀏)가 거느린 부대(部隊)는, 특수(特殊) 수륙양용전차(水陸兩用戰車)를 타고 다니던 별동(別動) 기동부대(機動部隊)였다〉고 봐야 한다. 타당(妥當)한 일인가?
➨ ‘차한일기(車漢日記)’는, 오늘날의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黑龍江)에서 벌어졌던 사건(事件)이 아니었음을 증명(證明)하는 기록(記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지도(地圖)에서 산해관(山海關)【지도 : 진황도】에서 송화강(松花江), 흑룡강(黑龍江)은 직선거리(直線距離)로 ‘1,200-1,600km’에 달하며 실제(實際) 행군(行軍)은, ‘5 천리’이상(以上)이 되는 먼 곳으로 “6 일정”이라는 말은, 당시(當時)의 군(軍)으로써는 불가능(不可能)한 여정(旅程)이다. 이게 가능(可能)하다고 보면 : 당시(當時) 신류(申瀏)가 지휘(指揮)한 조선(朝鮮) 군대(軍隊)는 말 그대로 “신(神)의 전사(戰士)였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인류(人類) 역사상(歷史上) “신(神)의 전사(戰士)”는, 출현(出現)한 적이 없다. 인간(人間)들이 만들어낸 허황(虛荒)된 이야기일 뿐이다.
➨ 결과론(結果論)이지만 :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두만강(豆滿江)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벌어졌던 사건(事件)이 아니었다.”라는 증거(證據)다.』 【차한일기(車漢日記) 속의 내용(內容)에 대해서는 다음 게재(揭載)분으로 준비(準備) 중임】
➋ 《淸元帥引是熀至家見其三妻三人舉一臂垂一臂為禮進與合面享以盛饌 : 청(淸) 원수는 배시황을 이끌고 집으로 가서 자기의 세 아내와 인사시켰는데, 세 아내는 한 팔은 올리고 한 팔은 내려 예를 하고서 앞으로 나와 제 얼굴을 배시황의 얼굴에 대었으며, 성찬(盛饌)으로 대접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
놀라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차한일기(車漢日記)’를 몇 번을 보면서도 보이지 않던 이야기다. 여진족(女眞族) “청(淸)”의 정체(正體)를 알 수 있다. 곧 우리와는 전혀 다른 호인(胡人)들로 “이민족(異民族)”이었다는 사실이다.
➨➨➨ 위에서 말하는 인사법(人事法)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서방(西方) 종족(種族)들의 풍속(風俗)』이다. 여진족(女眞族)과 청(淸)나라는 동방(東方)에 없었다는 확실(確實)한 증거(證據)요, 증명(證明)된다.
이러한 인사법(人事法) 풍속(風俗)을 가진 종족(種族)과 부족(部族)들은, 서방(西方) 땅의 호인(胡人)들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黑龍江) 주변(周邊)에서 벌어졌던 사건(事件)이 아니었음을 정확(正確)하게 알려주는 내용(內容)이다.
➤➤➤ 이에 따르면 : 『“호인(胡人) 만산(漫散)”이 있었던 곳은 :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가 아닌 ‘서융(西戎)=호인(胡人)’이 있었던 서북방(西北方) 땅에서 벌어졌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이건 팩트[Fac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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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는,
〈일제제국주의자(日帝帝國主義者)들과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와 서세(西勢)들에 의해 일차적(一次的)으로 한반도(韓半島)로 이동되어 일개(一介) 제후국(諸侯國)으로 왜곡(歪曲) 조작(操作)되었다〉
그리고 이차적(二次的)으로는 : 1945년 해방(解放) 이후(以後), 1948년 대한민국(大韓民國) 이후(以後) 지금까지도 조선인(朝鮮人)들의 후손(後孫)이라고 자칭(自稱)하는 한국인(韓國人)들에 의해 다시 왜곡(歪曲)되고 조작(操作)되기에 이르러, ‘한반도(韓半島) 고착화(固着化) 과정(過程)’을 성실(誠實)하게 수행(遂行)하기에 이르렀는데, 여기에 앞장선 자(者)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와 그에 붙어 콩고물을 노리는 부역(附逆) 매국(賣國) 사가(史家)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누구도 이에 이의(異意)를 제기(提起)하지 못한다.
학계(學界)에서 매장(埋葬)되기 때문이다. 1948년 이후, 지금까지 이들에게 투입(投入)된 국고(國庫)는, 지원금(支援金)은 ‘수백(數百)억 원’이 아닌 ‘수천(數千)억 원’에 이르지 않을까?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지원(支援)되었다.
이런 지원(支援)으로 무엇을 했는가?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고착(固着)시키는데 사용(使用)되고, 학자(學者)들을 먹여살리는데 사용(使用)된 것이다. 학자(學者)놈들도 나쁜 놈들이지만 대한민국(大韓民國) 정권(政權)은 뭔가?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 곧 정권(政權)”들이 앞장서서 자국(自國)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한 것이다. 『동서(東西) 수만리(數萬里) 영토(領土)를 가지고 있었던 조선제국(朝鮮帝國)』을 『동서(東西) 수백(數百) 리의 일개(一介) 제후국(諸侯國) 조선(朝鮮)』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血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➊ 高麗史 地理志 서문(序文)만 보아도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을 조작(造作)해 버리는 것이다. 즉(卽), 〈惟我海東三面阻海一隅連陸輻員之廣幾於萬里 : 우리 해동(海東)은 삼면이 바다에 막혀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는데, 그 폭과 둘레는 수만리(數萬里)나 된다. 【‘네이버한자사전’의 ‘한자 구성원리’ 인용(引用) : ‘幾’자 : ‘몇’이나 ‘얼마’, ‘자주’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수만리(數萬里)는, 아래의 고전원전(古典原典)에서 이를 고증(考證)할 수 있다”
➨➨➨ 「‘반도(半島)’의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을 만들고 추종하고 받드는 이놈들은 “幾”자(字)를 “거의”라는 뜻으로만 해석(解釋), 번역(飜譯)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자(漢字) 구성원리(構成原理)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몇’이나 ‘얼마’라는 뜻은 뭐냐? 또 이것을 번역(飜譯)하려면 더 많은 사서(史書)를 고증(考證), 참고(參考)했어야 올바른 것이다.
➋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 〈至 隋 漸 大, 東 西 六 千 里 : 수(隋)나라 때에는 점점 커져 동서(東西) 6천리(千里)나 되었다【고구려(高駒驪)를 지칭(指稱)한다】〉라고 하였는데, 통전(通典)은, AD 766년에 착수(着手), 30여 년에 걸쳐 초고(初稿)가 완성(完成)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때가 AD 800년 이전(以前)이다”
➌ 高麗史節要卷之十八 元宗順孝大王[一][庚申元年 宋 景定元年,蒙古 世祖 中統元年] : 〈皇 弟 驚 喜 曰, 高 麗, 萬 里 之 國, : 홀필렬(忽必烈)이 놀라 기뻐하며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만리(萬里)의 나라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때가 AD 1,260년이다”
➍ 大學衍義補 卷155 四方夷落之情 下 [原文:大學衍義補 卷155 有] 왈(曰) : 〈今 耽 羅 亦 為 所 有. 其 土 壤 比 隋 唐 往 征 之 時 已 數 倍 矣. : 지금은 탐라(耽羅) 역시 차지하여서, 국토(國土)의 넓이가 수(隋), 당(唐)나라가 정벌하러 갔을 때에 비해 이미 몇 배(數倍)는 된다【명(明)나라 때의 ‘구준(邱濬)’이 AD 1,487년에 편찬(編纂) : 조선(朝鮮) 성종(成宗) 18년이다.】〉라고 하였으니, 당연(當然)한 이야기고, “이때가 AD 1,487년이다”
〈수(隋) 때에 이르러 동서(東西)【가로, 橫, 左右】길이가 ‘육천리(六千里)’에 달했는데, 이제는 그때보다 몇 배(數倍)가 된다〉라는 뜻이므로, 『동서(東西) 길이가 1만 2천리(千里)에서, 크게는 2 만리(萬里)가 되었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는, 『열도(列島)로부터 한반도(韓半島), 대륙(大陸)에 걸터앉아 흑해(黑海)를 넘고, 발틱해[Baltic, Sea]에 다다르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제국(帝國)을 건설(建設)했었던 것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다.』〉
➤ 15세기 명(明)나라의 학자(學者) ‘구준(丘濬)’이 군주(君主)에게 이 책을 헌상(獻上)했다고 전해주고 있잖은가! 사대주의(事大主義) 똘똘 뭉친, 중화사상(中華思想)과 황제(皇帝) 교화(敎化)를 최(最) 우선적(優先的)으로 하였다는 황제국(皇帝國) 명(明)나라에서 이를 바라보면 : “명(明)” 나라는 어디에 있었다는 말일까? 「명(明)은 서남아세아(西南亞細亞) 또는 조선(朝鮮)의 일개(一介) 제후(諸侯)로 있었다」라는 이야기로밖에 해석(解析)할 수 없는 것이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는, 명(明)나라 때의 ‘구준(邱濬)’이 AD 1,487년에 편찬(編纂)하고 “조정(朝廷)에 상주(上奏)했다”라고 전(傳)해지는 서책(書冊)이다.【明代邱濬 撰.凡160卷.1487年(成化23年) 11月上奏朝廷】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논한 책으로, “錢穆評此書(전목비평서)에서는, 중국사(中國) 상(上)의 제일(第一) 일류 인물(乃中國史上之第一流人物也)”이라고 칭송(稱頌)하였다고 전(傳)한다.】
➎ 朝鮮王朝實錄 世祖 1년 을해(1455) 7월 5일(무인) / “민심 수습ㆍ제도 정비ㆍ강명ㆍ예법 등에 관한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의 상소문”에서 이르기를 : 《吾東方世居遼水之東,號爲萬里之國.三面阻海,一面負山,區域自分,風氣亦殊. :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遼水)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렀습니다. 삼면(三面)이 바다로 막혀 있고, 일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그 구역(區域)이 자연적으로 나뉘어져 있고, 풍토(風土)와 기후(氣候)도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가 AD 1455년이다”
➏ 太平寰宇記卷一百七十三 / [宋 樂史] : 〈至 隋 漸 大 東 西 六 千 里 : 수(隋)나라 때에는 점점 커져 동서(東西) 6 천리(千里)나 되었다【고구려(高駒驪)를 지칭(指稱)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때가 낙사(樂史) : AD 930年—1007年이다”
➐ 昨夢錄 [南宋·康與之] : 〈猛 火 油 者, 聞 出 於 高 麗 之 東 數 千 裏 : 맹화유(猛火油)는 “고려(高麗) 동(東)쪽 수천리(數千里) 땅에서 맹화유(猛火油)가 산출(産出)된다”라고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때가 12세기다”
➑ 연번로속집(演繁露續集) 演繁露 續集卷一 / 髙麗境望 [宋 程大昌 撰] : 〈而麗之屬郡有康州者又在麗南五千里乃與明州相對康之鄰郡曰武州自産橘柚 : 고려(高麗)의 속군(屬郡)으로 강주(康州)가 있는데, “강주(康州)는, 또 고려(高麗) 남(南)쪽 5 천리(千里)에 있다.” 이에 명주(明州)를 상대(相對)로 하는 강주(康州)와 가까운 군(郡)을 무주(武州)라고 하는데, 귤(橘)과 유자(柚)가 산출된다〉라고 하였다. “이때가 정대창(程大昌 : 1123年—1195年 때이다”
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고전(古典) 원문(原文)’ 하나하나 세밀(細密)하게 찾아보면 : 놀라운 기록(記錄)들이 있다. 옛 성현(聖賢)들이 기록(記錄)해 놓은 것에 대해, ‘일천(一千) 수백(數百) 년, 일천(一千) 년, 또는 수백(數百) 년’이 지난 후(後), 지금의 한반도(韓半島) 학자(學者)들이 무슨 재주가 있어 “아니다, 오류(誤謬)다”라고 말할 수 있나?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지식(知識)이라고는, 오직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에 찌들고 찌들은 ‘한반도(韓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라는 “언문(諺文) 얘기책”속의 이야기를 ‘역사(歷史)’라고 부르고 있는 그대들이 아닌가!
○ 통상적(通常的)으로 고전(古典)에 의하면 : 《‘만승지국(萬乘之國)’이란 ‘병거(兵車) 일만 채’를 갖출만한 힘을 가진 ‘천자(天子)의 나라’를 지칭(指稱)하는 말이다. 또 여기에 ‘만리지국(萬里之國)’이란 그 영토(領土)가 1만 리(萬里)를 나타내는 말로, ‘천자국(天子國)=황제국(皇帝國)’이 아니면 불가능(不可能)한 영토(領土)를 나타내는 말이다》라는 것은 기본적(基本的)인 상식(常識)에 속하는 일이다.
➤➤➤ 이제는 하다 하다못해 “윤석열”과 같은 식민사관(植民史觀)과 사대주의(事大主義)에 푹 빠진 “무능력(無能力)과 무책임(無責任)과 무정책(無政策)을 자랑하는 어처구니없는 자(者)”를 ‘국정(國政) 지도자(指導者)’로 뽑아 놓고, “검찰조직(檢察組織)과 경찰(警察)과 감사원(監査院)” 등을 총동원(總動員)하여 이 나라를 파괴(破壞)하고 있는 중이다.
➤ 솔직(率直)하게 말하면 : 〈철수(撤收)를 밥 먹듯 했던 어리석은 ‘안철수’라는 무책임(無責任)한 자(者) + 보수(保受)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언론(言論) 아닌 언론(言論)을 빙자(憑藉)한 일부 무리들 + 뭐가 뭔지 구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어리석은 유권자(有權者) 48.6%의 잘못된 선택(選擇)이었다〉 이를 어떻게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국민(國民)들의 분노(忿怒)는 곧 행동(行動)으로 이어진다』라는 것을 잊으면 곧 “파멸(破滅)의 시작(始作)이 닥친다”라는 상식(常識)도 알았으면 좋겠다. 8,000만 한민족(韓民族)과 5,200만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의 선택(選擇)은 무엇일까?
“선택(選擇)의 기로(岐路)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이 길만이 ‘한민족(韓民族)과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3편으로 계속] 2023년 09월 16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