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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길을 떠난 영혼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진실로 덕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녀가 이러한 목표에 꾸준히 정진하노라면 마침내 자기 인식의 집에 이를 것이며, 그녀는 거기에 틀어박혀 세속적인 교제를 완전하게 끊고 깨어 지키며 부단히 기도할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 갇히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녀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아는데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순수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획득하고자 하는 염원 때문이기도 하다. 영혼은 이런 사랑을 획득하자면 다른 길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래서 내가 오고 자신이 은총 속에서 성장할 수 있기만을 깊은 신앙으로 학수고대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해서 깊은 신앙을 알게 되겠느냐? 덕에 꾸준히 매진함으로써다. 너는 그 어떤 이유로도 돌아서서는 안 된다. 복종이나 자애를 제외한 어떤 이유로도 거룩한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악마는 흔히 기도하는 시간에 온갖 종류의 번민과 걱정거리를 들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네가 기도하지 않고 지낼 때보다 한결 심하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기도에 염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는 곧잘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런 식의 기도는 너에게 아무 쓸모도 없다. 네가 생각하거나 관심을 기울일 것은 오로지 낭송기도뿐이다.” 그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이렇게 하면 네가 염증을 느끼고 혼란에 빠져 기도수련을 포기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는 온갖 적에게서 네 자신을 수호할 수 있는 무기다. 만일 네가 이것을 자유 선택이라는 팔과 사랑의 손으로 거머쥘 때, 이 무기는 지극히 거룩한 신앙의 빛과 어울려 네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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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랑하는 딸아, 영혼이 끝까지 참고 견디면 꾸준하고 충실하고 겸허한 기도 속에서 모든 덕을 배우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라. 그러므로 영혼은 참고 견디면서 기도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악마가 미혹한다고 해서, 아니면 자신의 연약함(다시 말해서 그녀의 육신 안에서 솟구치는 생각이나 충동)을 이유로 삼거나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악마는 흔히 그들의 혀에 달라붙어 영혼의 기도에 방해되는 일들을 발설하도록 조종하기 때문이다.
아, 자신을 알고 나를 아는 자기 인식의 집에서 바치는 그 거룩한 기도야말로 당사자인 영혼에게는 더없는 만족이 되고 나에게도 더없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 영혼은 나의 충만한 자애를 듬뿍 머금은 애정과 신앙의 빛으로 마음의 눈을 뜨게 된다. 나의 충만한 자애는 내 외아들을 바라봄으로써 알게 되는바, 그는 이것을 자신의 피로 드러내 보였다. 이 피는 그 영혼을 취하게 만든다. 이 피는 그녀에게 신적 사랑의 불길을 옷처럼 입힌다. 이 피는 내가 신비체 성교회라는 숙박소에서 너희를 위해 만들어 세운 성사의 음식, 곧 온전히 하느님이요 온전히 사람인 내 아들의 살과 피를 그녀에게 제공한다. 나는 이것을 성교회에 맡겨서 내 대리자의 손으로 관장되도록 조처했던바, 그는 이 피에 이르는 열쇠를 쥐고 있는 장본인이다.
내가 전에 말한 대로 이 숙박소는 다리 위에 서서 나의 '진리'가 가르치는 길로 여행하는 순례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어 기운을 얻게 함으로써 그들이 힘 빠져 도중에 주저앉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음식은 받는 자가 성사적으로 받든 사실적으로 받든 그의 갈망 정도에 따라 많든 적든 힘을 주게 된다. 여기에서 '성사적으로'란 당사자가 거룩한 성사 안에서 통교하는 때를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 '사실적으로'는 친교를 열망하고 아울러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피를 존중하는 가운데 성스러운 갈망으로 통교하는 경우를 말한다. 바꾸어 말해서 사람이, 그리스도의 피가 사랑으로 말미암아 흐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에 거기에서 발견하고 맛보게 되는 사랑에 찬 자애를 방편 삼아 성사적으로 통교하는 경우가 이것이다. 따라서 그 영혼은 거룩한 열망으로 배부르고 불타오르고 취한 가운데 나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 충만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디에서 이런 비결을 터득하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 인식의 집, 거룩한 기도 안에서다. 제자들과 베드로가 집 안에 머물면서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네 불완전성을 타파하고 완성을 터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불완전성을 타파한 것이다. 그 방법은 무엇이었던가? 지극히 거룩한 신앙으로 단련된 인내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같은 열정과 자양분이, 수많은 영혼들이 믿듯이 오로지 낭송기도로만 얻어진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자들의 기도는 애정으로 이루어지기보다 말로 이루어지며, 그들의 관심 역시 다수의 시편을 마무리하고 '주님의 기도'를 무수하게 외우는 일에 쏠리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바치기로 마음먹은 횟수를 다 바치고 나면 더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도의 목적을 소리내어 바치는 것에다 두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하는 일 전부가 고작 이것이라면 그들은 거기에서 별다른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며 내게 기쁨도 안겨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낭송기도는 집어치워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렇지 않다.'인데,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묵상기도에 끌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한 걸음씩 걸어야 하는 법이다. 영혼이 완전해지기 전까지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녀의 기도 또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안다. 영혼이 아직 불완전할 동안에는 낭송기도에 매달림으로써 나태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묵상기도를 생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바꾸어 말해서 영혼은 말 마디마디를 발음하는 동안 내 사랑에 정신을 쏟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죄와 내 외아들의 피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녀는 내 자애의 포용력을 발견하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된다. 그러니까 자기 인식과 죄의 성찰은 영혼이 자신에 대한 나의 선의를 깨닫고 참된 겸손으로 수련에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해야 한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죄를 낱낱이 되새기는 일은 바라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녀가 추한 죄들을 하나하나 기억함으로써 마음을 더럽힐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녀가 내 아들의 피와 나의 큰 자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죄를 전체적으로든 하나씩이든 곰곰이 생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혼란에 빠질 뿐이다. 자기 인식과 죄의 성찰에 내 아들의 피를 기억하고 자비를 기대하는 기억과 희망이 함께하지 않을 경우 그로 인한 결과는 혼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악마인즉, 그는 죄에 대한 미움과 통회 혹은 죄과에 대한 슬픔을 가장하여 그녀를 영원한 저주로 끌어들인다. 이런 이유로 물론 이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그녀는 내 자비의 손길에 맞닿지 못할 경우 끝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악마가 내 종들을 상대로 펼치는 교묘한 사기행각의 하나다. 그러므로 너는 한없이 큰 내 자비 안에서 진실로 겸손하게 마음과 애정을 키워나감으로써 네 자신의 선익을 도모하고 악마의 올가미를 피하고 나에게 자기만족을 주도록 해야 한다. 네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영혼이 정말로 희망을 가질 경우 악마의 오만이 그의 마음을 괴롭히지도, 악마가 일으키는 혼란이 나의 거대한 선과 자비에 대적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너는 악마가 너를 혼란으로 놀라게 만들려고 하던 때를 기억하고 있느냐? 그는 네 삶이 하나의 환상이며 따라서 너는 내 뜻을 따른 일도 준행한 일도 없었다고 너를 설득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너는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 나의 선한 뜻이 너에게 힘을 주며 행하게 한 일을 실행하였다. 나의 선한 뜻은 이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스스로를 감추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너는 내 자비를 힘입어 굳건히 일어나서 겸허하게 말했다. “제 삶이 그동안 완전히 어둠 속에서 소진되었음을 창조주께 고백하옵니다. 하오나 앞으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상처 속에 제 몸을 숨기고 그분의 피로 깨끗하게 닦음으로써 저의 사악을 완전히 씻어내고 창조주에 대한 갈망을 향유하려 하나이다.”
너도 알다시피 악마는 바로 그 순간에 도망쳤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와 또 한번 너를 공격하였다. 그는 너를 들어높여 오만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완벽하며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기뻐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이상 그대의 죄 때문에 슬피 울거나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빛을 주었고, 그리하여 너는 네가 가야 할 길이 마땅히 네 자신을 낮추는 길임을 알아차리고 악마에게 대꾸할 수 있었다. “나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다! 세례자 요한은 한번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이미 성스러워졌음에도 그토록 극심한 고행을 실천했다. 그러나 나는 엄청나게 많은 죄를 범하고도, 내가 거역하고 있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고 그분을 거역하고 있는 내가 누구인가를 깨달은 상태에서, 진정한 통회와 눈물로 이를 시인하는 작업에 착수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러자 너의 겸손한 정신과 내 선을 신뢰하는 너의 믿음에 견디다 못한 악마는 너에게 부르짖었다. “저주받을 여자! 너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구나! 내가 너를 혼란에 빠뜨리면 너는 자비를 향해 솟구쳐 오르고, 내가 너를 들어높이면 너는 아래로 끌어내리는구나. 네 겸손은 지옥까지라도 내려오고, 그곳에서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너는 나를 사랑의 곤봉으로 후려치고 있으니 이제 다시는 너를 찾지 않으리라!"
그러기에 영혼은 자기 인식에 내 선을 아는 지식을 곁들이고 나를 아는 지식에 자기 인식을 곁들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낭송기도를 바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내게도 기쁨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그 영혼이 이를 꾸준하게 실천할 경우 불완전한 낭송기도에서 발전하여 완전한 묵상기도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녀가 정한 기도의 횟수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거나 낭송기도 때문에 묵상기도를 포기한다면, 그녀는 결코 진전을 보지 못한다. 영혼이 일정한 횟수의 낭송기도를 바치기로 작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 역시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녀를 찾을 수가 있는바, 그것이 때로는 그녀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섬광 같은 통회와 자기 인식의 형식을 취할 수도 있고, 때로는 나의 크나큰 사랑이 그녀의 마음에 내 '진리'의 현존을 감지하게 하되 내 원의나 그녀의 열망 정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하도록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영혼이 너무나 어리석은 나머지 자기 마음 안에서 감지되는 나의 초대를 거부하면서까지 스스로 정한 횟수를 채우려고 덤비는 경우도 없지 않다.(루가 19,41-44참조) 자신이 한번 시작한 일을 포기하는 것이 마치 양심의 문제나 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녀는 결코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런 식으로 처신할 경우 그녀는 악마의 노리개가 되고 만다. 그렇다. 그녀는 내 초대에 응할 채비가 되어 있음을 감지하는 그 순간 낭송기도를 포기해야 한다. 그런 다음 묵상기도를 바치고도 시간이 남으면 자신이 바치기로 작정했던 기도를 계속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시간이 남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하거나 심란해하거나 당황해서는 안된다. 다만 여기에서 예외가 되는 것은 성무일도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이 기도를 의무적으로 바치게 되어 있고 바치지 않으면 죄가 된다. 그들은 죽음의 시간이 찾아올 때까지 성무일도를 바쳐야 한다. 만일 성무일도를 바치기로 정한 시간에 마음이 이끌리고 고양된다고 느껴지면 성무일도 시간을 앞당기거나 늦춤으로써 의무를 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영혼이 시작단계에서 바칠 다른 기도 이야기라면 마땅히 낭송기도로 시작해서 묵상기도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가 일단 준비되었다고 느껴질 때면 그런 의향에서 낭송기도를 포기해야 한다. 내가 앞서 너에게 이야기했듯이 이런 뜻에서 바치는 낭송기도는 영혼을 완성으로 인도한다. 형식이야 어떻든 간에 낭송기도를 중단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끈기를 가지고 꾸준히 실천할 때 그녀는 진실로 기도와 그 음식, 즉 내 외아들의 살과 피를 체득하게 된다. 내가 앞서 너에게, 영혼들 가운데는 자신의 열망에 비례하여 거룩한 기도를 통해 누리는 사랑에 찬 자애 안에서 통교를 함으로써 비록 성사적이지는 않을 망정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안에서 통교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분별력이 모자라고 한 걸음 한 걸음 걷지 않는 영혼은 발견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분별력이 있는 영혼은 많은 것을 발견한다. 영혼이 자신의 애정을 풀어놓고 오성의 빛을 통해 나와 결부시키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이 알게 된다. 더 많이 아는 자는 더 많이 사랑하며, 더 많이 사랑하면 더 많은 기쁨을 누린다.
보다시피 완전한 기도는 이처럼 많은 말이 아니라 사랑에 찬 갈망으로 이루어지며, 그럴 때 영혼은 자기 인식과 함께 나에게로 올라오며 모든 움직임마다 나머지 하나도 곁들여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낭송기도와 묵상기도를 동시에 바치게 되는데, 이는 둘이 활동생활과 묵상생활처럼 하나로 어우러지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낭송기도와 묵상기도는 아주 다양한 형태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거룩한 갈망, 다시 말해서 선하고 거룩한 의지를 갖는 일 자체가 곧 '항상기도'라고 말한 것이다. 이 점은 낭송기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혼이 거룩한 갈망과 의지를 확고하게 견지하는 한 지정된 시간에 낭송기도를 바치리라. 하지만 때로는 지정된 시간을 뛰어넘어 자애가 이웃에게 선익을 베풀도록 요구할 때나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때 또는 내가 그녀에게 처하도록 만든 그 상황에 맞추어서 이 항상기도를 바치게 되는 것이다.
거룩한 의지의 기본 취지는 각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가 이웃의 선익을 위해 말로나 행동으로 하는 일은 무엇이든 모두가 진정한 기도다. (나는 너희가 지정된 시간에 그처럼 실천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친다.) 하지만 너희가 의무로 바치는 기도와 별도로 수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 자체가 너희 이웃에 대한 사랑이거나 사랑의 형태를 띄는 것이거나 간에 주어진 상황을 그런 식으로 활용하기만 한다면, 기도가 될 수 있다.(콜로 3,17 참조) 나의 훌륭한 나팔수 바오로(1데살 5,15-16)가 “선행을 중단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 역시 중단하지 않는 사람이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실천기도가 묵상기도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아주 많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실천기도가 내가 말한 방식대로 이루어질 때 그것은 사랑어린 자애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며, 이 사랑어린 자애가 바로 항상기도이기 때문이다. (로마 8,26 참조)
지금까지 나는 영혼이 묵상기도에 이르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그 것은 곧 실천과 끈기를 통해, 그리고 내가 그녀를 찾아갈 때 낭송기도를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나는 또한 평상기도 및 지정된 시간과는 별도로 바치는 평상적인 낭송기도, 선하고 거룩한 의지의 기도, 일정으로 짜인 기도시간 이외에 선한 의지로 바치는 기도 또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형태의 기도에 관해서도 너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영혼은 어머니처럼 용기를 가지고 기도로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영혼이 벗으로서의 사랑과 자녀로서의 사랑을 터득하고 스스로 자기 인식의 집에 틀어박힐 때 가능해진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이야기한 길을 따르지 않을 경우 그녀는 언제까지나 미지근하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사랑도 나나 자기 이웃에게서 이익과 자기 만족을 얻어야만 하는 수준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대화' / 성찬성 옮김 / 바오로딸 193-20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