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les의 역사는 1955년으로부터 시작된다. John Lennon 자신이 다니던 학교 이름을 따서 The Quarrymen이라는 스키플 밴드를 창단하면서부터이다.
☆스키플밴드
가수 Lonnie Donegan이 을 히트시키면서 시작됐다. 스키플(Skiffle)이란 재즈 밴드 스타일의 음악에 포크와 컨트리의 요소를 가미한 가벼운 음악이었다. John은 스키플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그가 결성한건 분명 스키플 붐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16세의 John Lennon은 1956년 7월에 리버풀의 'Woolton Parish Church'에서 14세의 Paul McCartney와 만나게 되었고 Paul이 그 후 그룹에 가담하였다. 1958년에는 Paul과 같은 학교에 다니던 George Harrison(노동자 집안. 아버지는 버스운전사)이 가담하였다. 1957년 9월 John은 리버풀 미술대학에 입학하게된다. 대학입학자격시험의 모든 과목에서 낙방했지만 교장의 추천으로 입학할수 있었던 것이다.
☆Rock 음악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영국의 뮤지션 중에는 미대 출신들이 많다. Rolling Stones의 키스 리처드, The Who의 피트 타운젠트,킹크스의 레이 데이비스,핑크 플로이드의 시드 배리트,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야드버즈의 Eric Clapton, Queen의 프레디 머큐리,데이비드 보위가 미대 출신이다. 영국의 노동계급 청년들에게 미술대학은 암담한 미래를 거부하면서도 출세하려는 에너지와 욕망을 잃어버린 10대에겐 최후의 도피처였다. 레논은 이 대학에서 첫사랑의 기쁨을 안겨준 Cynthia Powell과 우정의 소중함을 가르쳐준 Stuart Sutcliffe를 만나게 된다.
Riverpool의 무명밴드
결국 1959년에 그들은 트리오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한해동안 그들은 그룹 이름을 몇번씩이나 바꾸었는데 결국 The Silver Beatles로 낙찰이 되었다.
☆Beatles라는 그룹명은 당시 인기를 누리던 그룹 버디홀리와 귀뚜라미 Buddy & the Crickets에서 힌트를 얻어 딱정벌레라는 Beetle을 그룹의 이름으로 정했다. 아울러 자신들의 음악이 Beat중심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Beatles라는 이름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 Lennon과, McCartney, Harrison, 드럼의 Pete Best:영국의 언더그라운드신에서 활동, 그리고 기타의 Stuart Sutcliffe로 구성된 Silver Beatles는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가수 Tony Sheridan을 후원하였는데, Sheridan과 함께 녹음한 것들은 후에 앨범으로 발매가 되었다. 함부르크에서 그들은 감상력이 부족한 청중들 앞에서 밤을 세우는 혹독한 연주를 하며 음악의 수련기를 마쳤고, 스타 클럽에서 연주 실황을 녹음한 것이 1977년에 마침내 발매가 되었다. 1961년에는 Stuart Sutcliffe가 그룹을 떠났으며 그는 다음해인 1962년 4월 10일에 함부르크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Silver Beatles는 영국으로 돌아왔고 1961년 2월부터 Riverpool의 Cavern Club에 일자리를 잡았다.
Brian Epstein과의 만남
그해 말, 레코드 상점 주인인 Brian Epstein이 그들의 재능을 발견한 후 녹음 계약을 맺어 주기 위해 힘을 썼다. 그러나 처음에는 데카레코드사로부터 거절을 당했지만 1962년 초에 EMI(브리티쉬 캐피톨)사에 의해 발탁되었다.
☆ Brian Epstein
Brian Epstein은 1934년 생으로 Riverpool에서 부유한 유태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가구점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 사업을 확장하여 음반과 악기를 판매하는 넴즈NEMS(North End Music Store)라는 대형상점을 경영하였다. 어머니가 애지중지 키운탓인지 그는 무척 허약하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외면의 소심함이 내면의 음습함을 자극하였는지 그는 음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열살 때 학교에서 퇴학당했고,일곱번이나 전학을 다닌 끝에 15살 때 학교문을 나와야 했다. 그가 학교측의 냉정한 조치를 받은 데에는 30년대 기승을 부리던 유태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편견도 작용하였다. 더군다나 성인이 되면서 그는 자신이 동성연애자임을 발견하였다. 열여덟살이 되던해 그는 군대에 징집되어 부모의 함으로 런던에서 근무했지만, 그나마 얼마 후 '정신적, 감정적 부적격자'라는 판정을 받고 강제 전역당해야 했다. 그가 군대에서 쫓겨난 진짜 이유는 동성연애자였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제대후 부모는 그에게 가구점을 차려주었고 그는 성공적으로 경영하였다. 스물다섯이 되던 1959년에 리버풀의 중심지 샤로트가에서 넴즈의 분점을 그의 형과 함께 경영하게 되었다. 브라이언은 이때부터 사업에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여 2년뒤,즉 그가 비틀즈와 만났을 때 넴즈는 영국 북부 최대의 음반상이 되었다.1961년 10월 28일 오후 세시경 레이몬드 존스라는 청년이 넴즈에 들러 Beatles의 레코드를 찾았다. Brian은 Beatles의 이름도,라는 beatles의 레코드도 처음들었다. 11월 8일 흥미를가지고 넴즈로부터 200미터 떨어지지 않은 Cavern Club을 찾았다. 몇번의 만남 끝에 이듬해1월24일에 그들의 매니저가 되기로 정식계약을 맺었다. 'fifth beatles'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그는 1967년 8월 27일 Beatles가 뱅거에 머무는 사이, 런던 서남부 1벨그라비아 채플 스트리트 24번지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약물과용으로 사망한채 발견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1962년 8월, 그들이 1960년 함부르크에서 만났던 Ringo Starr가 Rory Storm`s Hurricanes그룹을 탈퇴하여서 Pete Best를 대신하여 Beatles의 드러머로 가담했다. 이것으로 Beatles의 멤버는 모두 모였다. Beatles는 Brian Epstein이라는 매니저의 손에서 상품으로 포장되고 다듬어 졌다. 지저분하게 기름을 바른 헤어 스타일은 산뜻한 머시룸 헤어스타일(이른바 몹헤어)로바뀌었고,가죽잠바는 유니폼을 겸한 양복으로,거친 무대 매너는 상큼한 미소로 바뀌었다. Epstein은 노동계급 로큰롤러들을 'Mods'로 탈바꿈 시켰다. 그것은 중산층 팬을 획득하여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데이비드 돌턴이라는 사람은 Rolling Stones에 관한 전기에서 'Beatles는 당신의 손을 잡고 싶어하고, Stones는 당신의 집에 불 지르고 싶어한다'는 말로 둘을 대비시키기도 했다.
1962 ~ 1965
1962년 9월에 미래의 비틀즈인 그들은 제작자 George Martin과 함께 처음으로 녹음을 위한 모임을 가졌는데, 1962년 10월 5일에는 첫 싱글 [Love Me Do]가 그레이트 브리튼레코드사에서 출반되었고 두 번째 싱글 [Please Please Me] 는 1963년 1월에 발매되어 2월이 되자 No.1의 히트 곡이 되었다.
4월에 출반된 Beatles의 첫 영국 앨범은 차트에서 6개월 동안 제1위를 기록했다.
Beatles는 1964년 1월, 미국에서 세 번째 싱글인 [I Want to Hold Your Hand](뒷면은 [I Saw Her Standing There])를 캐피톨 레코드사를 통해서 대대적인 선전을 하며 발매하였는데 2주일이 되기도 전에 제1위의 곡이 되었으며 60년대를 통해서 가장 빠른 속도로 팔린 싱글이 되었다.
1964년 2월 7일에 그들은 처음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시작하였고 역시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가 뒤따랐다.
이것을 사람들은 British Invasion(제 1차 영국침공)이라고 한다.
20년후인 80년대 중반에도 뉴 뮤직 밴드에 의해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제2차 영국침공으로 불린다.
댐이 터지듯 폭발적인 Beatles의 인기를 저지시킬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아무것도 없었고, 그들의 뒤를 따라서 영국의 그룹들이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실로, Lennon과 McCartney는 유망한 그룹들에게 많은 히트곡을 마련해 주었는데, 중요한 것으로는 빌리 크래머와 다코다스 그룹을 위한 [Bad To Me]를 비롯하여 피터와 고오던을 위한 곡인 [I Don`t Want to See You Again]과 [World Without Love]등 다수가 있다.
Lennon과 McCartney가 함께 작곡한 곡인 [I Wanna Be Your Man]은 Rolling Stones의 첫 힛트 싱글이 되었다.
[I Want to Hold Your Hand]를 발매한지 수주일 뒤에 Beatles는 차트의 상위권을 석권하게 되는데, 그 곡들을 살펴보면 [Can`t Buy Me Love]를 비롯하여,[She Loves You], [Please Please Me],[Do You Want to Know a Secret],[Twist and Shout], [Love Me Do],[P.S. I Love You]등 다수가 있다.
1964년 3월에 비틀즈는 그들의 첫 영화인 'A Hard Day`s Night'를 녹화하기 시작하였고, 존 레논은 그의 첫 저서인 'In His Own Writer'를 출판하였다.
상술한 영화는 7월에 개봉이 되었고, 8월에는 두 번째의 미국 순회 공연을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의 2월과 3월에 그들은 두 번째의 영화인'Help'를 촬영하여 7월에 개봉하였다.
6월에는 레논이 또 그의 두 번째 책인 'A Spaniard in the Works'를 출판하였다.
60년대의 중반을 통해서 비틀즈는 연속적으로 히트 싱글을 내어 놓았다.
[A Hard Day's Night], ]And I Love Her], [I'll Cry Instead], [Carl Perkins], [Matchbox],[Slow Down], [I Feel Fine],[She's a Woman], [Eight Days a Week],그리고 [Ticket to Ride]등이 바로 그것이다.
☆John Lennon의 발언
John은 간명하지만 뼈 있는 말을 통해 자신의 정신 어딘가에 숨어있는 노기와 우울을 드러내어 해소했던 듯하다.
John의 내면은 그의 발언 속에서 상세히 설명되지 않은채 역설적인 형태로 응축되었다.
John의 답변은 항상 질문 밑에 숨어있는 의도를 간파하고 질문자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Riverpool식의 악센트와 빠른 말투 때문에 표현 방식이 경박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진지했다.
그의 농담이 가장 압축되어 발휘된 것은 1963년 11월 프린스 오브 웨일즈 극장에서 개최된 로열 버라이어티 쇼에서였다.
이 쇼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마가렛 공주도 자리한 일종의 어전연주회였는데,그자리에서 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Twist and Shout]을 소개하면서
John은 '싼 좌석에 앉으신 분들은 모두 손으로 박자를 맞춰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 뒤, 로열박스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한뒤'그 밖의 분들은 몸에 차고 계신 보석을 짤랑짤랑 흔들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John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공연장은 폭소와 박수 갈채로 뒤덮였다.
지체 높은 관객들이 불쾌해한 것은 한참 지난 뒤 그가 한 말의 진의를 곰곰이 생각해본 다음이었을 것이다.
이는 즉흥발언이 아니라 면밀하게 계획된것이었다.
John은 'X같은 보석을'이라고 말하려했지만 주위의 만류와 본인의 자제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1966년 3월에 영국의 잡지<이브닝 스탠더드>의 인터뷰 도중에 나온 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기독교는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다. 쇠퇴하여 소멸할 것이다. 이점은 왈가왈부할 여지도 없다. 내 말은 옳으며, 그것은 머지않아 증명될 것이다. Beatles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유명하다. Rock`n Roll과 기독교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사라질 것인가는 알수없다. 그리스도는 현명했지만 그 제자들은 우둔하고 범상하였다. 그들이 기독교를 소멸시켜 간다면, 우리쪽이 유리하다.'
이 발언으로 인해 미국 남부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Beatles의 레코드 수백장을 대형 목제 십자가에 걸어놓고 화형식을 집행했다.
또한 어떤 목사는 설교중에 'Beatles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파문행위'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후 John은 8월12일 사과발언을 하였다.
☆MBE(Members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대영제국 훈장
Beatles의 전멤버가 1965년 10월 26일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일에 버킹검 궁전에서 MBE훈장을 수여 받을 때 John의 발언은 진지함을 더했다. '우리가 훈장을 받은 것은 외화를 많이 획득했기 때문이다. Rock`n Roll이 좋아서가 아니다. 수출의 공적 때문에 훈장을 받는 다면 MBE는 Rolling Stones가 받는게 나을 것이다. 우리는 기사나 경의 칭호를 받는 것도 좋을 것이다.'...자신들이 Rock`n Roll가수와 같은 훈장을 받는다는 것이 기분 나빴던 사람들은 훈장을 반납했다. Beatles와 함께 훈장을 받을 예정이었던 명사들이 훈장 수여를 거부하고, 이미 훈장을 수여받은 863명이 왕실에 훈장을 반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후 John은 1969년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분쟁에 대한 영국의 개입과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에 대한 영국의 지원, 그리고 <약물끊기 Cold Turkey>가 히트 차트에서 도중하차된것'을 명시적으로 들며 MBE훈장을 여왕에게 반납했다.존이 훈장을 반납하자 65년 훈장을 반납했던 이들이 다시 훈장을 받아갔다는 말이있다.
Beatles 혁명
Beatles 혁명 Beatles 음악의 사회.문화적 위력은 오직 그 음악의 독창성과 풍부함 때문이었다. Beatles의 음악은 말 그대로 대중음악의 진정한 혁명이었다.
첫째, Beatles는 세 개의 코드를 가진 칵 록과 네 개의 코드를 가진 티니밥의 진부한 구성을 파괴하였다. 그들은 마이너코드와 세븐스코드를 자주 사용했고,심지어 한 마디 안에서도 코드를 능란하게 바꾸었다. [All My Loving]에서는 모두 여섯 개의 코드가,[A Hard Day`s Night]에서는 무려 열한개의 코드가 사용되었다. Beatles, Rolling Stones와 함께 60년대 대항문화를 이끌었던 미국의 포크가수 Bob Dylan은 Beatles의 음악을 듣고,'그들의 코드는 분노에 가득 차있다'라고 표현하였다.
둘째, Beatles의 창법은 이전의 백인 음악에서는 들을수 없는 스릴 넘치는 것이었다. 그들의 전매특허가 된 '예예예'나,'컴온,컴온,컴온'은 초기 모타운의 리듬 앤 블루스에서 빌려와서 발전시킨 것이다. 리틀 리처드는 Beatles의 음악을 듣고,'내가 Beatles를 보지 못했다면, 나는그들이 백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흑인 보컬 그룹의 스타일을 자신의 독특한 노래에 융합시켰고,그 결과 그들의 음악은 인종의 차이를 뛰어넘어 폭 넓게 사랑받을 수 있었다.
셋째,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콤비 싱어송라이터인 Lennon-McCartney는 직접 작사 작곡 하였고, 연주도 외부 세션맨의 도움을 별로 받지 않았다. 그 덕에 그들은 음반사와 프로듀서에 대해 상당한 자율선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점도 당시 대중음악계에서는 드문현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영리를 꾀하는 음반산업의 거추장스러운 간섭에서 어느정도 자신들의 음악을 보호할수 있었다. 초기에 Beatles는 상업성을 고려하여 10대의 사랑을 테마로 한 빠른 템포의 음악을 주로 발표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차 자신의 고유한 음악세계를 펼쳐갈 수 있었다.
넷째, Beatles는 데뷔 이전부터 진정한 리더가 없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는 다른 지방밴드와도 다른 점이었다. 소란스러운 함부르크에서 연주할 때 그들은 목의 피로를 막기 위해 돌아가면서 보컬을 담당했고 코러스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 결과'우리가 함부르크에서 돌아왔을때,모든 그룹에는 분홍색 옷을 입은 리드 싱어가 있었다. 전면에 한사람을 내세우지 않은 그룹은 우리뿐이었다.'리드싱어를 중심으로하고 다른멤버는 주변자리를 차지하는 다른 그룹과는 달리 Beatles는 다양한 개성이 하나의 뚜렷한 이미지로 통합된 조화스러운 그룹으로 비쳤다.
1965 ~ 1970
Lennon과 McCartney의 노래말의 세련미는 1965년 중반 이후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Help],[Yesterday],[Nowhere Man],그리고 [Eleanor Rigby]의 가사와, [In My Life(Rubber Soul중에서)] 같은 노래는 초기의 작품에서는 볼수 없는 심오한 정적 감성의 응축된 밀도가 내포되어 있다. 더욱이 George Harrison의 작곡 실력도 과시가 되는데 「Revolver」에 실려있는 [Tax man],[Love You Do],그리고 [I Want to Tell You]의 세곡은 Harrison의 곡이다. Beatles는 또 [Paperback Writer]의 레코드 뒷면 곡인 [Rain]과 「Revolver」중의 [Tomorrow Never Knows]과 같은 곡을 녹음하는데,스튜디오의 제작기술을 동원하였다. 제작자겸 편곡자인 George Martin의 영향이 1966년부터 1968년 사이에 특히 강하게 나타났고 가사에 있어서는 Lennon과 McCartney의 노래들이 흔히 논리적 설명을 거부하며 괴기 와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띄기 시작했다. 「Rubber Soul」앨범중의 [Nowegian Wood]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던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중의 [A Day in the Life]와 같은 정수적인 곡, [Strawberry Fields Forever/Penny Lane], 그리고 [I Am the Walrus] 등의 곡들에도 나타났다. 1966년 8월의 미국 순회 공연(1964년과 1965년의 헐리웃 보울 연주실황 녹음은 1977년에 발매됨)을 끝으로 실황 연주 활동을 마친 Beatles는 그들의 관심을 녹음과 개인적 활동의 추구에 기울였다. 그들의 첫 스튜디오 제작 앨범인 「Sgt. Pepper Lonely Hearts Club Band」는 1967년 6월에 100만장이 예약된 가운데 발매가 되었고, 판매업계가 처음으로 '자작곡 앨범'으로 인정을 한 그 레코드는 또 평론가들로부터도 높이 평가를 받은 것으로서 Beatles의 녹음활동 경력중에서 최고봉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앨범에 포함되어 있는 곡들로는, [With a Lettle Help from My Friend:링고가 불렀음.], Harrison의 자아 인식의 철학적인 [Within You Without You:해리슨이 시타르를 연주함.]그리고 60년대의 스튜디오 제작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A Day in the Life]등이 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기념비적인 이유
1.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 Beatles는 흘러간 시대에 가상의 음악홀(그 이름은 '알버트홀'이다.)에서 연주하는 가상의 밴드로 둔갑한다. 앨범전체에 담긴 연속된 흐름을 강조하기 위해서, 노래와 노래 사이에는 통상있는 4~5초간의 정지 없이 적절한 효과음이 삽입되었다. 그때까지 팝 음악의 앨범들이 히트곡 모음집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혁신적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컨셉트앨범'이라는 신조어를 낳으면서 이후 좁게는 록음악, 넓게는 팝음악 전체의 발전에 전기를 마련했다.
2. 실린곡들은 행진악대, 서커스음악, 민요, 재즈 등 과거의 다양한 대중음악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속에서 Rock`n Roll과 Ballad의 적절한 조화가 돋보인다.현란한 효과 음향의 사용과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도 세련되고 성숙된 Beatles의 음악적 변모를 보여 주었다. 뉴욕 교향악단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조차 'Beatles의 사운드는 바하의 푸가에 필적할 만큼 아름답다.' 라고 말했고,[타임]지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 대중음악을 예술형태로 변화시켰다고 평했다. 대중음악가가 예술가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이 처음이었다.
3. 역사적으로 저명한 인물들의 몽타주를 배경으로 한 팝아트의 성격을 지닌 앨범 재킷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앨범의 재킷에서 예술성이 강조되기 시작한것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이후다. 거침없는 표현법은 그 인물가운데 칼 마르크스 까지 등장시켰는데, 이 때문에 보수적 평론가들이 이 앨범이 공산주의적이라고 낙인찍는 일도 벌어졌다.
4. 마지막으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당대 문화에 끼친 영향을 들수 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Beatles의 LSD체험이 가장 크게 반영된 앨범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약물문화에 관심을 지닌 청년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 대표곡은 아무래도 John의 [Lusy in the Sky With Diamonds]일 것이다. 환각적 분위기의 전주에 이어 John은 간드러진 목소리로 자기 눈에 비친 세계를 '마말레이드색 하늘' 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곡의 약자가 환각제 LSD와 같다는 점이 이곡에 관한 스캔들을 더욱 증폭시켰다. LSD의 영향이 더욱 생생하게 나타난 곡은 [A Day in the Life]이다. 이 곡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멜로디가 교묘하게 결합된 John과 Paul의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공동작품이다. 차량속에서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가 신문에 무심히 보도되고, 신문을 읽는 독자는 혼란스럽고 고독하게 되는 현상을 묘사한 것은 문자 그대로 환각적이다.
1967년에 Beatles의 개별적인 활동에는 John Lennon과 Ringo Starr가 각각 'How I Won the War'와 'Candy'라고 하는 영화에 출연하여 연기인으로서 데뷔를 한 것이다. 같은 해에 Beatles는 'Magical Mystery Tour'라고 하는 텔레비전용 영화를 대본, 배역, 감독, 그리고 편집까지 자신들이 맡아서 만들었으나 편집과 촬영의 미숙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 해 11월에는 사운드 트랙 앨범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수록된 곡들로는 [The Fool on the Hill],[I am the Walrus],그리고[All You Need Is Love]등이 있다. 1968년에 Harrison은 'Wonderwall'이란 영화의 사운드 트랙을 위해서 작곡과 편곡을 자신이 한 자작 음악을 녹음하였고, Lennon은 Ono Yoko와 함께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앨범「Two Virgins」를 녹음하였다. 같은 해 4월에 Beatles는 자신들의 레코드 회사인 애플 레코드사를 설립하여 11월에는 자사의 상표로 「The Beatles」라고 하는 두장으로 만들어진 레코드 세트를 처음으로 발매하였으나, Lennon과 McCartney의 불화설이 나도는 가운데 그룹이 해체되었고 그 불화설을 뒷받침하듯 앨범에는[Back in the U.S.S.R],[Blackbird], [Revolution #1],그리고 George Harrison의 수작인[Whild My Guitar Weeps:명성이 없던 때에 에릭 클랩튼과 녹음함]등 전혀 다른 종류의 곡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앨범의 레코딩작업은 멤버각자가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맡은 파트를 믹싱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앨범은 마치 네 명의 음악가가 각자의 개성적 음악세계를 전개해 놓은 '옴니버스 앨범'같았다. 세월이 지난뒤에는 각자의 상이한 개성과 직관적 창조력이 발휘된 '모짜르트적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하고, 그럴만한 요소도 충분히 존재했다. 그러나 걸작여부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화이트 앨범에는 과거의 조화로운 4인조의 이미지는 없었다. 이앨범을 통해 Beatles가 해체되리라 예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8월달에 출반된 [Hey Jude]는 애플레코드의 상표로 된 첫 번째의 싱글이었다. 1968년 7월, 활기에 넘치는 영화 'Yellow Submarine'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야 말로, Beatles가 관여한 가장 예술적이고도 평이 좋은, 성공적인 영화였었다. 더욱이 그것은 또한 60년대 후반에 나온 '사이키델릭' 영화들 중에서 최고의 걸작품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 이듬해 1월에 발매된 사운드 트랙 앨범에는 타이틀곡과 [All You Need Is Love]가 또 다시 수록되어 있었다. 1969년을 통해서 Beatles는 각자 개별적인 활동으로 바쁜 한해를 보냈는데, Ringo는 'The Magic Christian'이란 영화에 출연하였고, 그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는 배드핑거 그룹이 연주한 McCartney의 곡[come and Get It]가 수록되어 있다. 3월달에는 John Lennon이 Ono Yoko와 결혼을 하였고, Paul McCartney는 린다 이스트맨과 결혼을 하였다. 이들 두 쌍의 결혼은 Beatles의 종말을 비공식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이 보였다.
☆Ono Yoko
John은 Beatles가 데뷔하기 바로 직전 1962년 8월 23일 신시아 파월과 결혼을 했다. 당시 매니저인 Brian이 Beatles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결혼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John은 결혼전에 임신중이던 신시아에대한 책임감 때문에 결혼을 강행했다. 그리고 Riverpool출신의 남자라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남성지상주의는 영국 북부의 노동계급문화에서 나온것 이다. 그는 뿌리깊은 성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963년4월 8일 첫째아들 Julian Lennon이 태어났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던 John을 후에 여성해방에 관한 노래까지 만들정도로 변화시킨이가 바로 Ono Yoko이다. Yoko는 일본의 존과 정반대인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전위예술가가 되어 전시회도 많이 열었다. Yoko는 John을 만나기 전에 벌써 두 번의 결혼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66년 11월에 Ono Yoko가 개최한 작품발표회에서 첫만남을 가졌다. 서양인과 동양인 대중적 로큰롤러와 전위예술가, 남성 우월주의자와 여성해방론자라는 점에서 John과 Yoko의 삶의 이력은 어떻게 보면 정반대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고립되고 외로운 예술가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대중음악가 John은 자신의 세계를 진솔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고,전위예술가인 Yoko는 자신의 창조적 예술행위가 대중의 이해와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각자가 속한 세계는 달랐어도 둘은 모두 예술적 창조력과 강한 자아를 가졌으면서도 인간적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Lennon은 그해 9월에 토론토에서 플래스틱 오노 밴드(The Plastic Ono Band)와 연주를하여 Beatles의 일원으로서 Beatles를 떠나 연주를 한 첫 번째의 멤버가 되었다. 1969년에 나온 Beatles의 유일한 앨범,「Abbey Road」는 11월에 발매 되었으며, 그 앨범에는 Harrison의 [Something]과 [Here Comes the Sun],그리고 Ringo의 [Octopus' Garden]과 [She Came In through the Bathroom Window]가 실려있다. 「Abbey Load」앨범은 사실상 Beatles의 마지막 앨범이 된 것이다. George Martin이 처음으로 제작하였고 후에 필 스펙터가 다시 작업하여 결국 1970년 5월에 출반하였던 [Let It Be]는 다시 드러난 내부의 불화와 영화 편집 문제로 말미암아 발매가 중지되었다. 「Hey Jude」는 미국에서 낸 앨범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곡들을 모은 것이었다. ([Rain],[Lady Madonna],[Paperback Writer],[Hey Jude]등등). 5월에 개봉된 영화 'Let It Be'의 사운드 트랙 앨범에는 주제곡인 [Get Back]을 비롯해서[The Long and Winding Road] 등의 곡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Beatles의 마지막 싱글이 된 것이다. 1970년의 말에는 Beatles의 네 멤버가 모두 각자의 솔로 레코드를 발간하였고, 1971년 초에는 Paul McCartney가 Beatles의 해산을 청원하기에 이르렀으며, 1974년 12월 30일에 결국 법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수에 나온 Beatles의 앨범으로는, 2장으로 된 명곡집 4세트로서, 진술한 바 있는 「Live at the Hollywood Bowl」과 「Live at the Star Club」,그리고 1980년대의 모음곡집인 「Rarities」가 있다. 70년대를 통해서, Beatles가 다시 모여서 야심적인 프로모터의 지휘하에 녹음을 하거나 아니면 연주를 다시 할 것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러한 공론은 1980년 12월 8일, John Lennon이 뉴욕시에서 살해당하자 마침내 비극적 여운을 남긴채 사라져 버렸다. 나머지 세 사람은 Linda McCartney와 함께, 1981년 Lennon의 추모식에 봉헌된 George Harrison의 곡, [All Those Years Ago]를 공동으로 녹음하였다.
John Lennon의 사망
1980년 12월 8일 월요일... Lennon과 Yoko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John이 다코다 하우스 아파트 입구의 아치밑을 지나갈 때였다. 머리뒤에서 'Mr.Lennon!'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Lennon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5미터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에서 청년은 무언가를 들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총이었다. 그가 누군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38구경에서 모두 5발의 총탄이 발사되었다. Lennon의 복부와 어깨에 네 발의 총탄이 명중했다. 총소리를 들은 경비원은 경찰에 신고를 했고 그 장소에 있던 수위는 '당신이 무슨짓을 했는지 알아?'하고 소리쳤고 그 청년은 '아, 내가 John Lennon을 쏘았어.'라고 답했다. 그 청년은 총을 버리고 코트를 벗어 정갈하게 개서 다리밑에 두었다. 주저앉은 그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이한 행동이었다. 그때 Lennon은 총탄에 맞아 3~4리터의 피를 흘렸다. 혈액전체의 80%의 피를 흘린 Lennon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 숨지고 말았다. Lennon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다고타하우스의 현관은 조문객들이 놓고 간 꽃,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 크리스마스 십자가로 뒤덮였다. 조문객은 불어났다가 줄어들곤 했지만 항상 수백 명 이상의 군중이 자리를 지켰다. 누가 가지고 왔는지 질이 좋지 않은 포터블 라디오에서는 만가가 되어버린 Beatles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조문객의 행렬은 12월 10일 John이 흙속에 묻힐때까지 계속되었다. Lennon의 죽음에 대해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레이건 차기당선자도 애도를 표했다. Lennon을 쏜 것이 순간적인 환청에 의한 것이었는지 정신이상자였는지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1981년 6월 8일 채프먼이 '신이 독방에 있는 내게 말을 걸어 왔다'고 말하면서 갑자기 유죄를 시인해버려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결국 1981년 8월 24일 뉴욕지방법원의 에드워즈 판사는 마크채프먼에게 최저 금고 20년, 최고 금고 종신형을 선고했다.(아티카 주립교도소) 지금도 그는 철창에 갇혀있다. 하지만 살해 동기는 아직도 불분명한채로 남아있다. 어떤 이들은 Lennon이 평화운동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까닭에 정치적암살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부 책에 나와있는 광적인 팬에 의한 죽음, 채프먼이 자신과 John Lennon을 동일시했다는 말도 수긍하기 힘들다는말도 있다.
첫댓글 My favor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