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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한맥문학가협회에서 펴낸 사화집에 게재된 글이오니
한번 일독을 바랍니다.
一 松 韓 吉 洙
강진(康津)지방의 역사와 문화
유흥준 교수의 문화유산 답사 1번지인 강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화 유적지를 찾아보는 것도 큰 뜻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번에는 강진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康津이라 편안할 康자와 나루津자 편안한 나루이니 우선 이름부터가 마음에 든다. 우리에게 편안함과 안정을 주는 고장이다.
강진지방은 일찍이 이곳 탐진 최 씨인 친구 최동석의 차로 구석구석을 탐방한바 있고 66향우회 모임에서도 가족동반으로 여행 온 일이 있는 등 비교적 많이 찾아다닌 곳이어서 눈에 선하다. 특히 탐진강변에서 점심식사시간에 구워먹은 장어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물이었다.
강진하면 다산 정약용 선생과 청자 가마, 그리고 청곡 윤길중 선생이 생각나는 고장이다. 최동석이 서예를 사사한 윤길중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에 24세라는 약관의 나이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초임으로 1000여리나 되는 강진의 군수 발령을 받고 부임 차 강진에 왔더니 나이 먹은 군청 직원들이 군청 정문밖에 도열해 서있는데 어느 애송이가 그 가운데로 걸어오는 걸 군청 직원들이 깜짝 놀라 “얘야 어서 비껴라. 군수영감이 오실시간이다.”하며 밀어 내는데 윤길중 왈 “내가 군수다” 군청 직원“ 장난치지 말고 어서 비껴” 옥신각신 정숙해야 할 장소에서 실랑이가 벌어지니 할 수 없이 윤길중 씨가 안 호주머니에서 군수 사령장을 꺼내 보여 주자 도열했던 직원들이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납작 엎드렸다는 우화가 아닌 실화가 살아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먼저 문화의 고장 강진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강진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인 석기 류가 성전면 성전리, 군동면 파산리 등에서 발굴되었다. 전 군에 걸쳐 5백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도암면 지석리에는 30여 기가 집중 분포되어 있어, 일찍부터 이 지역에 조직적인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전리 유적에서는 돌칼이 출토되었고 칠량면 송전리에도 지석묘군(전라남도기념물 제66호)이 있다.
삼한시대 마한의 54국 중 구해국(狗奚國)이 강진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백제의 도무군(道武郡)과 동음현(冬音縣)이 이 지역에 설치되었는데 신라가 통일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도무군을 양무군(陽武郡)으로, 동음현은 탐진현(耽津縣)으로 개칭하였다. 이 시기에 무위사 백련사 정수사 등 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940년(태조 23)에 양무군을 도강현(道康縣)으로 개칭하고 1018년(현종 9)에 영암군에 속하게 했으며,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탐진현은 처음 영암군에 속했다가 후일 장흥부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청자의 도요지가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에 산재해 있으며, 이 중 사당리의 요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어, 이 지역이 고려시대 청자의 중요한 생산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1417년(태종 17)에 도강과 탐진의 두 현을 합쳐서 강진현(康津縣)으로 하고 탐진에 치소(治所)를 두었으며, 병마도절제사의 영(營)은 도강의 치소로 옮겼다. 현의 치소는 이후 1429년(세종 11)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겨졌다가 1475년(성종 6)에 탐진으로 되돌아왔다.
1895년에는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강진군으로 개칭한 뒤 1936년 7월 1일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되었으며 도암면 영파리를 강진읍에 편입하였다. 도암면 신전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었으며 마량출장소가 마량면으로 승격되어 헌재 강진군의 행정구역은 1읍, 10개면, 112개 법정리로 되어 있고 500.94㎢ 면적에 약 5만 여명에 달하는 인구가 살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그 당시 호수는 355호, 인구는 1,644명(남자만의 수)이었다고 하니 비교해 보면 재미가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이 지방 출신의 많은 인사들이 이순신(李舜臣)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
순조 때 정약용이 이곳으로 귀양을 와 18년을 지내면서 그의 저술 대부분을 이곳에서 완성하였다. 그 때 거처했던 귤동의 다산초당은 다산실학(茶山實學)의 산실로 유명하다.
강진에서는 1919년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김안식(金安植) 오승남(吳承南) 김윤식(金允植, 永郎) 등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김윤식 김현구(金炫耉)는 우리나라 신시(新詩)를 개척한 문인으로 이름이 높다.
관광유적으로는 신라시대 군마방목장으로 사용되었다는 연해산성(沿海山城)과 대구면 구수리(九修里)의 성지, 그리고 마량면의 만호성, 병영면 박동리의 수인산성 등이 있다.
현존하는 문화유적지로는 백련사 금곡사 외에 군동면 화산리에 화방사(華芳寺) 등이 있다. 불교 문화재로서 성전면 월하리의 무위사에는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 보물 제507호), 무위사 삼층석탑(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76호). 선각대사탑과 미륵당 안의 석불입상. 월남리의 월남사지 모전석탑(月南寺址模塼石塔, 보물 제298호),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 월남사지(전라남도기념물 제125호), 도암면 만덕리의 백련사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백련사 사적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원묘국사 중진탑(圓妙國師中眞塔), 군동면 파산리의 금곡사 삼층석탑(金谷寺三層石塔, 보물 제829호), 대구면 용운리의 정수사 대웅전(淨水寺大雄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등이 있으며 도암면 만덕리에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정다산 유적(사적 제107호) 등이 있다.
이 외에 대구면 사당리의 도요지(사적 제68호)와 칠량면의 상흥리의 도요지(전라남도 기념물 제81호)등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이름이 나 있으며, 칠량면 명주리와 봉황리, 대구면 용운리에는 조선시대 도요지들이 분포되어 있다.
그 밖에 경치가 좋아 명명된 금릉경포대(金陵鏡浦臺)는 성전면 월남리의 월출산 남쪽 사면에 있는 경승지로서 금릉은 강진의 옛 이름인데 여름밤의 밝은 달과 담소(潭沼)의 맑은 물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기 때문에 금릉경포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월출산에서 발원한 물이 남쪽 사면의 암석 계곡을 흐르면서 3m 정도의 폭포를 만들고 담소를 이루는데 수량이 일정하고 여름에 시원해 피서객이 모여든다. 특히 월출산을 등반하는 등산객이 더위를 식혀가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남쪽으로 약 1㎞ 지점에 월남사지가 있다.
강진군은 진도의 운림산방, 보길도의 세연정과 함께 한국의 3대 원림 중의 하나인 백운동 정원과 사의재(四宜齋)를 복원하기로 했다.
백운동은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역사가 있다. 다산이 초의선사와 같이 백운동에 온 뒤 12승경 시를 읊고 초의선사에게 백운동을 그리게 한 백운도가 백운첩에 보존돼 내려온다.
백운동은 한국 차 문화의 중요한 현장이기도 하다. 차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저작인 동다기(東茶記)를 백운동에 거주했던 다산의 제자 이시헌이 필사해 세상에 전했다. 100여 년 전 이한영 선생이 최초로 차를 상품화한 '백운 옥판차'와 '금릉 월산차'를 출시하여 일제강점기 사라져가던 국산차의 전통과 명맥을 이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강진군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온 뒤 처음 기거해 다산 실학사상의 모태가 된 사의재(四宜齋) 일원에 저잣거리를 조성하고 동문샘 공원 등을 조성키로 했다.
사의재(四宜齋)는 1801년 강진에 유배 온 다산 정약용 선생이 오갈 데 없는 딱한 사정을 동문 밖 한 주모가 알고 마련해 준 골방이다.
여기에서 다산선생이 4년 동안 기거하며 ‘네 가지(생각ㆍ용모ㆍ언어ㆍ행동)를 올바르게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사의재라는 당호를 걸고 6명의 제자를 길러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는 등 다산 실학사상 탄생의 모태가 됐던 곳이다.
정 다산의 초당
강진읍에서 남서쪽을 향해, 구강포 서쪽 모퉁이를 끼고 비스듬히 내려오면 도암면 만덕리 귤동 마을에 닿게 된다. 마을 뒤의 만덕산 기슭에는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이고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茶山)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별명으로, 정약용의 호 다산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정약용은 장장 18년에 걸친 강진 귀양살이 가운데 10년을 다산초당에서 지내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자기 생애의 한겨울 속에서 동백꽃처럼 붉게 학문과 사상을 피워 올렸다.
귤동 마을을 지나 대밭을 끼고 오르는 길이 약간 가팔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땀을 흘리며 다산초당에 오르니 앞이 탁 터져 강진만의 구강포가 보이고 날 좋은 날은 멀리 흑산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다산 초당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조선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 와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다산의 외가로 친척인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이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원하여 이 해 사적 제107호 정다산유적 (丁茶山遺蹟)으로 지정받았다. 건물은 도리단층기와집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1970년, 1971년,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정석(丁石) 약천(藥泉)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다조(茶竈) 등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다산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 몰려 유배를 떠난 형 정약전은 16년의 흑산도 유배생활 중 그곳에서 병들어 생을 마감하였다. 다시 만나지 못한 형제의 모습을 다산은 천일각에 앉아 남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정약전 또한 유배생활 중 남도의 어류를 분석한 [자산어보]를 저술하여 실사구시의 학문을 삶으로 실현하였다. 어둠 속 한줄기 섬광처럼 빛나는 옛 선현들의 모습이다
햇빛 아래 번쩍이는 원색의 산과 들, 구강포의 잔물결, 겨울에도 푸름을 간직하는 대숲과 동백 잎, 잔설을 이고 피어나는 동백꽃. 더구나 1.3ha에 1.500그루가 품새를 자랑하는 백년사 경내의 왕 동백꽃 등 강진의 풍광은 물론 아름답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는 아름다움 가운데 그중 큰 것은 아름다운 사람과 그 사람의 아름다운 자취일 것이다. 강진 땅의 남도다운 아름다움은 다산 정약용의 자취로 하여 그 빛을 더한다.
김영랑의 생가
우리 일행이 들렀을 때는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모란이 가득피어 있어 별천지 같은 느낌을 받았던 곳이다.
김영랑이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5년간 살았던 집이다. 영랑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생가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을 한답시고 지붕을 시멘트기와로 보수하였고, 기단부와 벽체는 시멘트로 발라 원형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1985년 강진군청이 그 집을 다시 사들여 복원작업을 하여 원래 초가집 원형으로 다시 지었다. 본채와 사랑채 2동만이 남아 있고 주변에는 모란 밭이 조성되어 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인 초가지붕이다. 본채에서 10여m 떨어진 왼쪽에 사랑채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가지붕이다. 집 뒤편에는 장독대가 놓여 있고 언덕에는 오래된 동백나무와 대나무 숲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5월이면 생가의 마당에 조성된 모란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이 때를 맞췄기에 우리 일행은 모란 향에 취한바 있다.
이곳은 전라남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되어 강진군에서 관리한다. 강진읍의 공원에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비가 서있다.
[모란이 피기 까지]라는 서정시를 읊조리노라면 영랑선생을 금방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며 영랑선생은 홍안에 하얀 바지저고리에 녹색조끼를 입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강진의 무위사
《사지(寺誌)》에 의하면 617년(신라 진평왕 39)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는데, 875년(신라 헌강왕 1) 도선(道詵)이 중건하고 갈옥사(葛屋寺)라 개칭하였다. 946년(고려 정종 1)에는 선각(先覺) 형미(逈微)가 3창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하였다가, 1550년(명종 5) 태감(太甘)이 4창하고 무위사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보물 507호인 선각대사 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비명(碑銘)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도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로 불렸으므로 《寺誌》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당우(堂宇)는 본 절이 23동, 암자가 35개소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는데, 그 후 화재 등으로 극락전만 남았는데 조금씩 복원중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남아 있는 당우는 극락전과 명부전 및 요사(寮舍)뿐이었는데, 1974년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 ·해탈문(解脫門) ·분향각(焚香閣) ·천불전(千佛殿) ·미륵전(彌勒殿) 등을 중건하면서 옛날의 1부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중 국보 제13호 극락전은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만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어떤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 무위사의 극락전은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만덕산 백년사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7㎞에 있는 만덕산 계곡에 백련사가 있다.
만덕산(408m)에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한다. 사찰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다. 사찰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렀다가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많이 숭상하였기에 원묘국사 요세(了世) 스님에 의하여 사찰의 사세는 확장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었고 백련사는 퇴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남해안 일대는 고려청자와 곡창지대로 유명하였기에 약탈을 목적으로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에 의해 점점 폐사될 지경이 되어 사찰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1170년경 주지 원묘(圓妙)스님에 의해 중수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중수는 조선 세종 때인 1426년 주지 행호(行乎) 스님이 2차 중수를 하면서 백련사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430년부터 대대적인 불사가 시작되었고 효령대군의 도움이 컸다. 효령대군은 왕위를 동생(세종)에게 양보하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강진땅 백련사에서 8년 동안 기거하였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면서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건물로, 각 추녀마다 4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2개의 주두(柱頭)에는 용두(龍頭)로 장식되어 있는데, 단청(丹靑)이 잘되어 있는 다포(多包)집 건물이다.
이 밖에 시왕전(十王殿) 나한전(羅漢殿) 만경루(萬景樓) 칠성각(七星閣) 등의 건물이 있다. 절 앞에는 비자나무와 후박나무, 그리고 푸조나무와 함께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151) 등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강진도요지
목포 앞바다와 충남 태안 앞바다의 뻘에서 고려청자를 가득 실은 배가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강진 도요지에서 만든 청자를 고려 때의 수도인 개경으로 운반하던 중에 해난사고로 침몰된 청자 운반선이 발견된 것이다. 그처럼 이곳은 고려청자의 대량 생산기지 이었다.
강진군 대구면 일대에는 고려시대 청자와 도기를 구웠던 183개의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으며, 이 중 보존상태가 좋은 98개의 가마터를 사적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남쪽은 바다와 인접해 있어 해로를 통한 수송이 편리하고, 북쪽에는 크고 작은 산이 있어 땔감이 풍부했다. 또한 기술이 좋은 도공과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와 규석이 산출되어 도자기 생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대구면 용운리에 있는 대부분의 가마터는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중엽에 성립된 초기 청자가마터로서 청자의 기원과 초기청자의 특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 이 가마터에서는 중국의 월주요(越州窯)와, 요주요(耀州窯), 여요(汝窯)와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계율리 가마터에서는 대체로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후반까지의 양식화된 상감 청자 조각이 많이 발견된다. 사당리 당전마을의 가마터는 12세기 전반에서 13세기에 이르는 것이 대부분이며 이곳에서 생산되었던 도자기는 우수한 비색과 상감기법을 보여주는 고려청자 최고 전성기의 것으로 평가되었다. 수동리 가마터는 14세기 무렵의 고려후기에 해당하며 도자기의 형태와 기법이 다양하고, 유약의 색과 모양도 매우 다채롭다. 이처럼 대구면 일대의 도요지는 고려시대 전반에 따른 가마터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구조에 있어서도 각 시기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강진 도요지는 1914년부터 가마터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후 도자기 사료 연구에 있어서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오고 있다. 이곳의 가마터들은 최초 발견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수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며, 발굴된 요지(窯址) 중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던 가마 1기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전 복원되어 있다.
강진군 대구면 일대는 전반적인 고려시대(10세기∼14세기)의 도요지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되는 도자기 조각들은 기형(器形)과 기법, 채색 등이 다양하여 고려자기의 발생 및 그 발전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사적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진 도요지는 다른 지역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징과 한국도자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수양관광농원
전남 강진군 수양리 856-23에 위치한다. 강진군에는 강진 8경이 있다. 강진 8경은 만덕산, 주작산, 석문산, 금곡산 등 명산이 있고, 다산초당, 백련사, 금곡사와 그리고, 강진만이 있다. 수양관광 농원이 자리 잡은 곳은 네 명산 중 가장 중심에 들어있는 주작산의 두 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농원에서 보면 산 아래로 넓게 트인 들녘이 시원하고, 그 끝에 바로 강진만이 이어져 있어 경관이 뛰어나다. 금릉 8경 모두가 이 농원에서 20분 이내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주작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산 아래 수양저수지로 흘러드는데, 여름에는 이 농원 앞을 지나는 개울가에 피서객들이 몰려 땀을 식힌다. 특히 이 계곡물은 옛날부터 피부병에 좋다는 약수로 알려져 있다.
강진 병영 성
우리는 이 성을 강진 병영 성(兵營城)이라고 부른다, 성곽은 허물어지고 겨우 얼마간의 석성의 흔적과 함께 초등학교가 성내에 자리하고, 학교 주변에는 밭농사를 짓고 있었고, 허물어진 석성 사이 돌무더기 위로 학생들은 학교를 넘나들고 있었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된 광산구 송정동에 있는 고내상 성지(古內廂 城址)는 1397년(태조 6) 전라도 병영을 이곳에 설치하면서 만든 성이다. 전라도 지방의 육군 사령부가 있었으나 왜구의 침탈이 심하자 1471년(태종 17) 해안이 가까운 강진의 병영 성으로 옮기면서 고내상 성은 폐쇄 되었다.
사적 제397호 전라 병영 성이다. '병영(兵營)'은 조선시대 지방군사 조직이다. 남해안 일대의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강진 병영 성(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은 조선시대 전라도의 육군훈련 및 지휘부 기능을 담당했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그 당시 조선 주요 요충지에 지방군사 시설인 병영이 있었다, 지금의 강진현에 전라도 군사사령부이자 훈련소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병영 성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월출산에서 발원한 탐진강의 지류인 금강천이 작천과 병영 평야를 적시고 있어, 험준한 산 사이의 협곡만 차단하면 철옹성 요새로 군량미 걱정이 없는 평야와 풍부한 물이 있으며, 그리고 배후에는 산악요새 수인 산성을 끼고 있는 군사시설 이였다.
강진 병영 성은 5개의 영(營)과 53주(州) 4성(城)을 통할하던 군사 요충지로, 조선 태종 17년(1417)에 쌓은 길이 1천60m 가량의 평지성으로서 성벽의 기초가 되는 아랫부분이 잘 남아 있다. 성곽 시설로는 수구문 3개소를 비롯하여 옹성 7개소, 건물터, 초석과 25기의 비석(면사무소 안으로 이전)이 남아 있다. 성 안쪽에는 병영초등학교와 학교 관사, 민가 1동이 있으며 나머지 지역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다
강진군지'와 '조선 환여승람'에 따르면 마천목(馬天牧)이 병마절도사로 와서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마천목은 장흥 출신으로 조부(祖父)인 마치원(馬致遠)이 장흥 수령 성을 축조하였고, 부친 마영(馬 榮)도 왜구의 침탈을 막아 싸웠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1895년의 '병영영지(兵營營誌)'에는 창설 당시 마 병사가 일망대에 올라가서 활을 당기며 말하기를 ‘후세에 활 쏘는 자들 중에서 내가 쏜 곳까지 미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적의 화살도 이르지 않을 것이니 내 화살이 떨어진 곳에 성을 쌓도록 하라'하여 그 곳에 성을 쌓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병영 성의 건립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마천목과 병영 건립의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강진 병영 성의 규모는 '세종실록 지리지'이후 간행된 각종 지리지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병영 성의 둘레를 561보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후의 지리지들에는 거의 공통적으로 2천820척으로 나와 있다. 이와 함께 강진 병영 성에는 치(雉)에 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아쉽다. '치(稚)'는 성벽과 성벽이 만나는 지점과 적을 관찰하기 쉬운 성벽의 특정 지점에 설치하는 일종의 성 축성의 양식이다. 실제 이 성은 현지 조사에서 성벽의 교착 점 4곳과 동벽 2곳, 서벽 2곳에 치가 설치된 흔적이 발견된다. 병영 성이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지점에도 치가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 급수 시설과 관련한 우물은 '문종실록'에는 4개소, '대동지지'에는 5개소, '병영 지'는 9개소로 기록돼 있다. 이 보다 다량의 물을 확보할 수 있는 못(池)은 '대동지지'에 2개소, '병영 지'에 5개소로 나와 있다. 시기가 내려올수록 조금씩 수가 늘어나고 있어 당시 성의 규모를 가늠케 하며, 강진 병영 성 주둔군과 관련해서는 '세종실록 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에는 정군(正軍) 498명, 수성군(守城軍) 51명, 조역군(助役軍) 163명, 장인(匠人) 141명이 소속돼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로 대략 350여명이 주둔했다가 대폭 줄어들었다.
성 안에는 객사인 청심각, 동헌인 운주헌을 비롯하여 누각인 망미루, 공무루 그리고 군기고를 비롯한 각종 공공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건물들이 모두 사라져 폐허로 남게 되었지만 1997년 사적 지정 이후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을 시작하여 성곽, 남문, 동문 등을 복원하였으며, 나머지도 점진적으로 복원 할 계획이다.
병영은 지방관이 군사적인 업무를 겸하였기 때문에 전라병영성의 역할은 단순히 군사업무만 관장했던 것은 아니고 인근 4개면 57개 마을의 행정까지 직접 관할하기도 하였다, 성내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의 형태가 병영상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하여 지금도 많은 후손들이 호남 상권의 한축에서 병영상인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 일행이 일본에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는데 1656년 3월 한양 훈련도감에서 이들을 담당하기가 힘겨워지자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에 소속시켰다. 이곳에서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잡역에 종사하였다. 당시 흉년으로 생활은 궁핍하여 먹을거리를 구걸하기도 하였다. 1660년에 전라병영에 부임한 절도사 구문치는 하멜 일행에게 비교적 관대하여 이들에게 집과 텃밭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7년 동안 전라병영 성 근처 초가집에 머물렀다. 1663년(현종 4) 흉년이 들자 하멜의 일행은 남원에 5명, 순천에 5명, 여수(麗水)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12명이 분산되어 배치되었다. 하멜은 여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었고 고된 노역과 생활고에 지쳐 탈출을 결심하였다. 1666년(현종 7) 마침내 7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일본 히라도(平戶)로 건너가서 나가사키(長崎)로 탈출한 일이 있는데 이들이 자기나라로 돌아가서 [하멜 표류기]를 썼는데 이 책이 최초로 우리나라를 서양에 소개하는 책이 되었다.
강진의 민속놀이
이 지방의 민속놀이는 6월 유두나 7월 백중에 행해진다. 두 마을의 농군들이 영기(令旗), 각각 청룡과 백호를 그린 덕석기(大將旗)를 자기편의 들녘에 꽂고, 모심기에서 김매기까지의 과정을 「농부가」를 부르면서 진행한다. 그것이 끝나면 각기 풍년을 기원하는 농악놀이를 한바탕 벌이고는 상머슴을 황소에 태우고 마을로 돌아간다.
이 때 외길에서 이웃마을의 농부 행렬과 맞부딪쳐 길을 비키지 않으려고 싸움을 벌이는데, 상대방의 덕석기를 먼저 넘어뜨리는 편이 이긴다. 농토와 황소를 걸고 겨루는 이 싸움에서 이긴 쪽은 진 쪽으로부터 황소와 함께 농토를 넘겨받아 그 해 수확을 차지하게 되고, 잇달아 세 번 이기게 되면 농토를 완전히 넘겨받게 된다.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군동면 화산리에서만 일부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음력 정월 초사흘이 지난 뒤 골목길에서 어린이들에 의해 시작된다. 주로 골목길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골목 줄’이라고 불리며,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월대보름까지 계속된다. 날이 지날수록 줄도 굵어지면서 점차 어른들이 참여하게 되고, 나중에는 강진읍 전체가 옛날 객사 앞에서 부터 남문에 이르는 대로를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어 일대 격전이 벌어진다.
음력 정월 17, 18일이면 한쪽 편의 줄의 길이가 250m 가량이나 되는데 줄은 머리 부분이 굵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데, 가장 굵은 부분은 성인이 걸터앉아도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이다. ‘골목 줄’에 대비해 이를 ‘큰 줄’이라 불러 구분한다.
다리 밟기는 정월대보름에 소년소녀가 마을 근처 개울에 돌멩이를 넣은 가마니로 징검다리를 어른들이 만들면 그 위에 목화씨를 뿌리면서 자기 나이 끝수만큼 건너다니는 놀이로써, 한 해를 무병다복하게 보내기를 기원한다. 이 밖에 마당 밟기 논두렁 불 지르기 초군놀이 콩 볶기 등의 놀이가 전해진다.
편안한 나루인 康津은 풍광이 수려하고 비옥한 전답과 바다에서 나오는 많은 물고기로 풍요롭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고장인데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니 문화유산이 풍성하여 지금까지도 문물이 많이 남아 있는 고장이다.
끝으로 강진군 내에 있는 여덟 군데 경치 좋은 곳으로 강진(금릉)팔경(金陵八景)을 살펴보자
① 고암모종(高庵暮鐘): 고성암(高聲庵)의 저녁 종소리
② 파산제월(琶山霽月): 비파산(琵琶山)에 솟는 달
③ 금강명탄(錦江鳴灘): 금강에서 들려오는 여울물소리
④ 금사효무(金沙曉霧): 금사봉의 아침 안개
⑤ 죽도귀범(竹島歸帆): 죽도에서 돛단배가 저녁에 돌아오는 풍경
⑥ 구강어화(九江漁火): 구강포에서 불을 켜고 고기 잡는 야경
⑦ 만덕청람(萬德晴嵐): 만덕산의 아지랑이 풍
⑧서산낙조(西山落照); 서기산은 강진 서쪽에 있는 산으로 상서로운 기 운이 감도는데 낙조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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