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 논개, 北 월향…임진왜란 2대 여걸
▶평양 함락
1592년 4월 14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20만 대군은 그 날로 부산을 함락하고, 불과 보름 만인 5월 2일 한양마저 점령했다.
평양성의 백성들은 며칠 후 면 들이닥칠 왜병들로 공포에 빠져 있었다.
평양 기방의 기생들도 근심은 깊었다. 평양 기방의 기녀들은 전국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던‘꽃 중의 꽃’이었다. 기녀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앞날을 걱정했다.
“이제 여자의 몸으로 우리가 가면 어딜 갈 수 있겠나”
“나는 차라리 일본 장수들에게 내 한 몸 맡기련다. 내 미모 정도면 그 놈들도 혹하지 않고 배기겠느냐?“
“그 더러운 놈들에게 안기겠다고? 나 같으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겠다. 이 미친년아!”
왁자지껄… 우왕좌왕…
혼란에 빠져있는 기방 한 구석에는 아무 말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기녀 한 명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계월향(桂月香).
당시 ‘조방장(助防長)’으로 근무하던 김응서(金應瑞)의 애첩이었다.
김응서는 평민출신으로 선조16년 무과에 장원급제했다. 그러나 미천한 신분이 드러나 파직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피해 의주로 도망가는 선조가 왜군들에 포위됐을 때 탁월한 무예실력으로 임금의 탈출을 도와 곧바로 조방장에 임명됐다.
그 해 6월 11일 평양이 함락됐다. 왜병이 부산에 발을 내린 뒤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적과의 동침
조선군사는 중과부적인 적들과 싸우다 평양성 밖으로 패퇴했다.
일본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평양탈환의 최선봉장으로 큰 공을 세운 고니시 히(小西 飛) 부대를 크게 칭찬하며 평양성에서 승리자의 기쁨을 마음껏 누려도 좋다고 허락했다.
“말로만 듣던 조선의 평양기방은 어떤 곳일까?`
기방을 찾은 ‘고니시 히’는 단박에 계월향의 미모에 빠져버린다.
그 날 고니시는 계월향을 취했다.
‘제일 고고한 척 하더니 왜장에게 제일 먼저 수청을 드는구나. 에이 더러운 년’
‘김응서 나으리만 불쌍하구나. 저렇게 지조 없는 것이 무슨 평양 제일 명기라고...’
주위의 수군거림도 아랑곳 않고 계월향은 고니시를 극진히 모셨다.
“숱한 미녀들과 지내봤지만 이런 여자는 정말 처음이다” 고니시는 계월향에게 며칠 만에 사랑의 포로가 된 것이다.
“말만 해 다오. 원하는 것 다해 주마”
바깥에서 이런 소식을 들은 김응서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배신, 회한, 원망, 자책, 울분 여러 가지 감정들이 격랑처럼 소용돌이 쳤다.
김응서는 모든 것을 잊고 사람들을 다시 모아 평양성 탈환을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반년이 흘러갔다.
명나라의 이여송 부대가 참전해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 수복을 노리고 있던 그 때에 김응서는 계월향이 보냈다는 한 사내를 만날 수 있었다.
사내를 통해 계월향의 진심을 깨달은 김응서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계월향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김응서 평양성 잠입
계월향은 주도면밀하고 철저한 고니시의 경계심을 허물었다.
그녀는 고니시에게 자기 오빠 좀 출세시켜달라고 끊임없이 졸라댔다.
“제 오빠가 조선군에 있을 때 상급자들이 어찌나 구박하던지. 부당하게 뇌물을 요구하고, 개인적으로 얼마나 일들을 부려먹던지. 조선의 장교들만 생각하면 치를 다 떠는 걸요”
“그래 하하! 조선 놈들이 그렇지 뭐. 부하들을 그렇게 다스리니 군대에 기강이 서겠나. 오합지졸 같은 녀석들`
“우리 오빠를 받아주신다면 일본군에서 나으리를 위해 큰 공을 세울 것입니다. 힘이 장사고 무력도 대단해 이 나라에서 무과에 장원급제했던 사람입니다. 신분 때문에 한이 많았던 사람이니 기회만 주시면 가장 충직한 부하가 될 것입니다”
“그래 생각해 보자”
고니시는 깊은 생각 끝에 결심을 내렸다.
‘월향이 나에게 하는 걸 생각하면 도저히 나를 속인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자신의 피붙이를 위해 저렇게 간청하는데.... 허락하자’
김응서는 월향의 지략으로 평양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월향의 오빠로 위장된 신분이었다. 김응서는 왜군에 전향하는 척 함으로써 왜군들의 환대를 받기까지 했다.
▶고니시의 목을 베다
그날 밤 계월향은 그 어느 때보다 한껏 애교를 부렸다.
고니시는 계월향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몹시 흡족하여 호기를 부리며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잔뜩 취한 고니시는 자기 장막으로 가서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고니시의 부하들도 거나하게 술에 취했고,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 절호의 기회였다.
월향은 김응서를 고니시의 장막으로 안내했다.
기록으로는 고니시가 의자에 앉아 두 칼을 지팡이처럼 받히고 잠이 들어 있었다한다.
김응서의 칼이 번쩍이고, 고니시의 머리는 피를 뿜으며 떨어져 나갔다.
김응서는 장막 밖의 말 한 마리를 풀어 탈출을 시도했다. 금방 발각될 것이고 일각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때 계월향이 비장하게 말했다.
“나는 말을 타기에도 서툴고, 민첩하지도 못하니 나를 데리고 나가려면 들다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나으리의 칼에 죽고 싶소. 왜놈에게 몸을 더럽힌 나를 부디 용서하시오”
김응서는 울부짖었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느냐? 너를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이냐? 죽으면 여기서 나도 죽을 것이다. 적장은 사실상 네가 벤 것이 아니더냐?”
그러나 계월향은 단호했다.
“나으리는 살아 남으셔서 저 왜놈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저를 따라 오시오. 나으리가 나를 베지 않는다면 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 수밖에 없으니 부디 저를 베어주세요”
“......”
▶그대의 붉은 한(恨)
김응서는 결국 계월향을 벨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물을 쏟으며 평양성을 탈출했다.
그는 이듬해 1월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포도대장에 임명됐으며, 평안도병마절도사까지 거쳤다.
김응서 장군(1564 ~ 1624)은 북한 우표에도 그려질 정도로 유명한 임진왜란의 전쟁영웅이다. 김경서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는 사후 우의정까지 추증됐다.
평양성 탈환에는 이렇게 매운 넋을 지닌 조선여인의 활약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후인들은 ‘남 논개요 북 계월향’이라고 그녀를 칭송했다. 계월향은 조선여인들의 당찬 기상을 세상에 떨친 ‘우리민족의 여걸’이다.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 가 없는 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붉은 한(恨)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 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그대의 푸른 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 실이 되야서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運命)의 길을 떠나는 저문 봄을 잡아매랴 합니다.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볕을 받치고 매화(梅花)가지에 새 봄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 드리것습니다.
자 그러면 속하는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만해 한용운 스님, ‘계월향(桂月香)에게’ (<<님의 침묵>>(1926))
-박재호, 여성농업인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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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論介)의 애인이 되야서 그의 묘(墓)에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같은 광음을 따라서 달음질 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얏노라
그대는 어데 있느뇨 죽지 않는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을 회상한다
술 향기에 목메인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픈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얏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이냐
삐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우지 못한 낙화대(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야 얼굴 붉었다
옥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밟히운 강언덕의 묵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랴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랴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야요 논개여 금석 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야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鍾)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서입니다
용서하야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겄습니다
천추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스르겄는가
나는 웃음이 제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제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야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1926년 회동서관 복제본에 제목의 묘(墓-무덤)를 목차에서는 묘(廟-사당)라고 하였다.
시 내용으로 보면 묘(墓)가 맞다
*삐비: 띠(茅)의 사투리, 띠풀의 속심.
띠풀의 여린 속심을 뽑아 봄날에 껌처럼 씹어 먹었던
추억이 있다. 경북 영천이 고향인 나도 어린 날 '삐비', '삐삐'라고 했다. 삘기.
네이버에서 삐비를 검색하니 만해 스님의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발행되는 홍성신문에
연재하는 홍성말 코너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었다.
이니: 소 여물 주고 서래미, 이따마직 뒷산에 삐비나 따러가세.
저니: 아니 나이가 몇 갠디 여적 삐비를 씹는다나. 넘덜이 숭 봐.
<삐비>는 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식물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잘 자란다. 높이는 어른 무릎에서 허리 정도로 자라며, 꽃은 5월경에 피어난다. 삐비의 표준말은 ‘삘기’이며 ‘띠(띠풀)’ 또는 백모향(白茅香), 모초(茅草)라고도 한다.
삐비는 띠의 꽃대가 채 피어나기 전에 이파리(잎은 둘둘 말아진 칼의 모양이며 끝이 뾰족한 것이 특징이다.) 속에 둘러싸여 있는 어린 이삭을 일컫는다. 이 이삭은 은백색의 빛깔이 나고 아주 부드럽고 연하며 은은한 풀냄새가 나는데, 입에 넣고 씹으면 사르르 녹는 느낌이 난다.
껌이 귀해 문지방에 붙여놓고 며칠씩 깨물던 그 시절에는, 비록 단맛은 없지만 지금의 마카롱이나 마시멜로에 버금가는 부드러운 간식이었다. 보리밭에 나는 깜부기 대신 삐비 뽑으러 다니는게 더 즐거웠고, 껌 마냥 너도나도 질겅질겅 씹어 대며 산과 들로 산딸기, 으름, 개금(개암), 때꼴(까마중), 셩(싱아)을 따러 다니는게 ‘국민핵교 학상들’의 유일한 방과 후 활동이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면 들녘 초입에 붙들어 매두었던 소를 끌고 오면서도 늘 질겅질겅 씹어먹던 추억의 맛 ‘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