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22장 16-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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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탈출한 후 석 달 만에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려고 40일 동안 시내산에 머무르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포함하여 수많은 계명들을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돌 판에다 십계명을 친히 기록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모세는 40일 만에 산에서 내려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들려주신 계명들을 전해 줄 마음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쁨도 잠시,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우상을 만들어 광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너무나도 화가 난 나머지 두 돌 판을 깨뜨려버렸습니다. 다시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40일 동안 올라가서 2차로 십계명을 받아옵니다. 이런 내용들이 출애굽기의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1차로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머무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포함한 계명들을 직접 듣는 장면입니다. 계명을 듣는 내용이 20장에서 31장 까지 무려 11장에 걸쳐 계속 됩니다. 많은 계명 중에서 오늘 말씀의 내용은 도덕에 관한 계명들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개인 윤리적으로 지켜야 할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선택받은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중요한 내용들이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도’라고 불리는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깊이 새겨야 할 계명들입니다.
16-17절은 약혼에 관한 계명입니다. 16절에 지칭하는 ‘사람’은 남자를 말합니다. “사람이(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여자를 꾀어”라고 했는데, 꾀인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집요하게 유혹하고, 속이기까지 하여서 결국 목적 달성을 하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적극적으로 대시를 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심한 스토킹을 한 것입니다. ‘약혼’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풍습으로는 ‘약혼’이 부부사이를 시작하는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서 롯의 딸들에게는 약혼한 남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이미 사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에서도, 아직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이미 친족이나 이웃들은 두 사람이 정혼하여 부부관계를 출발한 사이로 보았습니다. ‘약혼’은 되돌릴 수 없는 부부사이의 정식 출발인 셈입니다.
계속해서 16절에,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남자를 가리켜 늑대라고 부릅니다. 남자가, 음흉하고 비열하고 포악할 것 것처럼 보이는 야생 늑대와 닮았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야생 늑대는 의외로 일편단심, 한 마리의 암컷만을 데리고 사는 일부일처제 동물입니다. 부성애도 무척 강해서 잡아온 먹이를 항상 암컷과 새끼들에게 먼저 먹입니다. 남자가 정말 늑대 같은 습성을 지녔다면 한 여자만을 사랑해야하고, 저돌적으로 대시 했으면 남자답게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처녀를 꾀어 잠자리까지 갔다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납폐금”은 결혼 지참금을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남자 쪽에서 여자 쪽 부모에게 ‘납폐금’으로 50세겔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납폐금’을 주라는 말에는 반드시 주어야 한다는 강제 이행적인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남자가 처녀 여자와 동침 했으면 당연히 그 남자도 책임을 져야 하고, 남자의 집안에서 반드시 그에 대한 연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문란한 성 문화를 단속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17절에,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에서 보듯이 여자 쪽의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낼지 결정 권한이 있음을 봅니다. 동침한 사이인데도 헤어지게 되면 더 큰 상처를 입을 것은 여자 쪽이며, 순결을 잃은 것도 여자 인데, 왜 당사자인 여자는 제쳐두고 아버지가 결혼을 좌지우지 결정하는 것일까요?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딸은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불합리한 처사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 당시 자녀의 결혼에 관하여 딸의 아버지가 결정하는 것은 시집 간 후에 발생하는 노동력 상실과, 시집보내는 집안에 있는 남자 동생들의 결혼자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의 역할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딸을 팔아 돈만 챙기려는 파렴치한 아버지가 아니라 당시 문화적인 가부장 제도의 책임과 역할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결혼관은 한사람을 만나고, 한사람 하고만 한 몸으로 연합하고, 한 사람 하고만 일평생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문란하고 타락한 성도덕은 일체 용납하지 않고, 음행은 남녀 누구나 큰 죄로 다스린다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입니다.
요즘 시대는 자녀들의 결혼 전 이성교제가 자유로워진 만큼 성에 너무 노출되어 있습니다. 혼전 순결이란 말이 무색합니다. 교회에서 혼전 순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육시켜도 젊은이들의 개방적인 사고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갈수록 최초 성경험 연령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남자의 경우 20세 미만에서 성경험 비율이 50%를 넘었고, 16세 미만의 비율도 20%가 넘는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여자의 경우는 이보다는 조금 나이가 올라가지만, 대부분 23세 이전에 성경험을 하는 것으로 조사 되었습니다. 가수 강균성씨는 기독교인으로 떳떳하게 혼전 순결을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 했는데, 대다수 시각은 보수적이라거나 독특한 시각을 가진 유별난 사람으로 봅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이다보니 오늘 말씀처럼 남녀가 동침했다고 해서 곧 결혼해야 된다는 것은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 시대입니다.
내 자녀는 괜찮겠지 라는 생각은 정말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통계에 나온 젊은이들의 비율이 곧 내 자녀의 비율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내 자녀에게 우선적으로 정결과 순결함을 제대로 잘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세상의 성 윤리 기준이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서 크게 벗어났음을 가르쳐서,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혼전 순결 서약 등을 다짐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나, 어른이나, 부모라고 해서, 무조건 그렇게 하라고 강요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이 그렇다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18절에,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는 말이 무섭습니다. 여기서 ‘무당’은 여성형으로 여자 점술가, 요술가, 신접한 자를 말합니다. 신명기 18장에서는 ‘무당’이 남성형 으로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남녀 누구나 무당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을 직독직해 하면 “너는 무당이 살아있는 것을 결단코 허용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살인을 허용하니 살인하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성을 훼손하고 더러운 짓을 하는 무리나 개인에게는 결단코 자비를 베푸시지 않습니다. 요상한 짓거리로 귀신들과 어울리는 사술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하는 중대 범죄입니다. “살려두지 말라”는 말은 우리 보고 직접 죽이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무당이라는 존재 자체를 거들떠보지도 말고 일절 상대조차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요즈음은 ‘무당’이라는 직업이 과거처럼 당을 차려놓고 지정된 장소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식이 아니라 유선전화나, 인터넷, 모바일 등을 통해서 운수나 사주팔자, 궁합, 점괘 등을 봐줍니다. 일반인들이 가볍게 접근해서 재미로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콘텐츠가 많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버스에서도 유명한 운세 사이트 광고가 많이 보입니다. 이단도 마찬가지고, ‘무당’들도 다양한 형태로 변종처럼 계속 기승합니다. 이단이나 무당들이 하는 짓거리는 마지막 심판을 향해 치닫는 마지막 발악입니다. 우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 권세로 모든 가증스러운 짓거리를 이겨 내야 합니다. 혹시라도 우리 자신이나, 내 자녀들이 재미로라도 한 번 운세를 봐 볼까? 하는 가벼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너는 무당이 살아있는 것을 결단코 허용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반드시 따라야 할 것입니다.
19절에,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런 말씀을 읽는 것조차 구역질이 날 정도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관계를 맺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이기를 포기한 미친 짓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본성상 짐승과 행음하는 더러운 짓은 쉽게 할 수 있는 행위는 아닙니다. 하지만 더럽고 추잡한 행동을 부추기는 사탄은 인간을 유혹해서 얼마든지 더 더럽고, 더 추하고, 더 구역질나는 일들을 하게 만듭니다. 극히 일부이긴 하겠지만, 동물과 행음을 하려는 목적으로 가정에서 애완동물을 키우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결코 하지 말라는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세태를 보면 정말 말세가 임박 했구나 느끼실 겁니다.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말씀 속에, 이런 행위들에 대해 하나님이 얼마나 가증 스럽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20절에,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는 말씀은 십계명의 제 1계명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고, 21-24절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21-24절은 이방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0절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경배하는 자는 어느 누구라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냉정하게 대하거나 쫒아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게 제사하고 절하는 자는 이방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들을 억압하고 괴롭게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여 귀찮아하고 떼어내 버려 쫒아내기 일쑤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가?, 다른 신을 경배하는가? 의 차이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180도 차이를 보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배하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21절 하반절에, “~너희도 애굽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이방 나그네와 과부나 고아는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상징 적인 집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자신들이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했던 노예 신분이었다는 사실을 한 시라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은혜도 잊어버리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는지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결국 과거는 다 잊혀 버리고 현재 자신의 평안과 풍요만을 즐기느라고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약한 자들을 멸시하고 학대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모든 근원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아서이고, 자기 자신이 과거에 이방 땅에서 나그네(노예) 였음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는 다는 것은 정체성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그네였음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나그네(노예) 신세를 면하게 해주셔서 탈출하게 하시고 새로운 땅까지 주신 것을 영원토록 잊지 않고 감사를 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죄인이었고, 고집불통이었고, 교만한 자였는지를 잊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의인으로 만들고, 화평한 자로, 온유한자로, 사랑이 많은 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리면 하나님 자리에 내가 있고, 예수님 자리에 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경고합니다.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다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나그네와 과부나 고아를 쫓아 버린다면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과거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들을 다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면, 주신 것들을 다 빼앗기고 또 다시 애굽 땅에서와 같이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아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어떤 인도함을 받은 백성인지, 또 누가 자신들을 지켜주는 보호자인지 절대 잊지 말고 살아가기 원하셨습니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이 말씀만 가슴에 새긴다면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데도 감사하지 않고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예화) 한 심리학자가 특이한 실험을 했습니다. 어느 동네의 한 구역을 택해서 집집마다 매일 100달러씩 갖다놓은 후 그 결과를 관찰하기로 한 것입니다. 실험 첫날 사람들은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아해하면서도 슬그머니 돈을 집어갔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100달러씩 집 앞에 놓고가는 사람 이야기로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둘째 주쯤 되자 현관 앞에 나와 돈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셋째 주쯤 되자 돈을 받는 것을 이상해 하지 않았고 넷째주가 되었을 때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돈을 집어갔습니다. 실험기간인 한 달이 지나자 학자는 돈을 집앞에 놓지 않고 그냥 동네를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매우 불쾌해 하며 “왜 오늘은 안 주고 가느냐?”고 따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유 없이 베풀어진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주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하고 불쾌해 했던 것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은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무언가 더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냐? 하면서 하나님에게 대적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심리는 본성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고 완악합니다. 하나님을 거래의 수단으로, 보상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주면 따라가고, 안 주면 등 돌리고, 보여 주면 믿고, 안 보여주면 불신하는 약삭빠른 행동을 취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는 말씀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고백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5-31절에서는 이웃과 사회에서 지켜야 할 계명들을 말씀 합니다. 25절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며, 26-27절은 단벌 옷 밖에 없는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전당 잡았으면 저녁에는 돌려주라고 합니다. 이자(돈)과 옷은 우리 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수단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생계수단을 담보로, 조금 부유하다고 해서 없는 자를 핍박하거나 착취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부요함은 기준은 쌓아놓는 것이 아니고, 나누고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없는 자, 가난한 자들을 긍휼하게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초적인 생계수단이 막혀 궁핍에 처했을 때 가장 비참한 상황이 됩니다. 이런 이웃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입니다.
28절에,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합니다. 원어에서 재판장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쓰시고 계신 이 땅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권세와 자리는 모두 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권위자들을 존중하고 잘 따라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의하거나 폭압적인 권세까지 따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뚜렷한 이유 없이 수시로 권위자들을 대적하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사탄이 조종하는 분열에 휩쓸리는 사람들입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귄위자, 지도자를 공격하는 것이고, 이는 사탄이 자주 쓰는 방법입니다.
재판장이나, 지도자가 자신의 생각에 못 미치는 결정이나 명령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때 그 때 기분에 따라 권위자들을 비판하고 공격하고, 심지어 물러나라고 항의 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런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공론화 과정을 통해 시정하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심각한 잘못을 햇을 때는 하나님이 치리 하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권위를 주시기도 하지만 거두어 가시기도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9-30절에서 가축이나 농산물, 심지어 첫 아들까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풍요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의 표현을 하라는 요구이십니다. 누구라도 먹을 것, 입을 것을 풍족하게 주신 것과, 자손이 번성하게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산물을 주시고, 모든 태를 여시고 닫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삶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부담감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감사를 드리는 것이 생활화 되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고, 계속 해서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화목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31절에,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고 합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은 야생 육식 짐승들이나 먹는 피범벅이 된 고기들처럼 더럽혀지고 부정한 음식물이나, 물건들은 접촉조차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함과 성결함을 장조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쓸모없는 것이나 가증 스러운 것들을 치워버리라는 표현으로 “개에게나 줘버려”라고 합니다.
거룩한 성도는 자기 자신을 깨끗이 지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곳저곳에 가서 더러운 것 묻히고 돌아다니지 말고, 하나님이 정해준 장소, 하나님이 정해준 음식,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행동들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불결하고 더러운 것은 “개에게나 줘버려!”라고 끊어내는 단호함이 있어야 합니다. 분별력 없이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면서 다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게 될 것이고, 개에게나 줘버릴 가증한 것들을 품안에 넣고 좋아라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나를 지켜 주지 않습니다. 나는 내 스스로가 지켜가야 합니다. 하지만 내 스스로는 충분하게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 붙잡고 이겨내야 합니다. 오직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나 자신을 지켜 나가도록 다스려야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여러 계명들을 통해 우리 자신들의 삶을 점검해 봅니다. ‘음행’이 횡행하는 시대에 내가 거룩한 ‘성’ 윤리의식에서 살아가도록 깨어 있어야 하고, 내 자녀들도 그렇게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재미나 심심풀이로라도 운세나 사주, 행운 점 등을 보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가벼운 행동 하나가 대놓고 귀신을 초청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짐승과 행음하는 일은 생각도 하지 말고, 그런 일에 가담하는 자와는 상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도 나그네 였다는 우리의 과거를 잊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에 늘 감사하며, 우리가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넉넉히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없는 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권위자들에게 대적하지 말고 하나님 뜻 안에서 순종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거룩하지 않은 부정한 일을 금하고, 더러운 생각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차단해야 합니다. 거룩하지 않은 모든 가증한 것들은 남김없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계명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뜻은 한 결 같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나그네였음을 잊지 말고, 큰 은혜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그 감사와 사랑을 이웃에게 그대로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또 일상에서 거룩함으로, 온전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명들은 부담을 주는 내용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켜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이 필요합니다.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도덕에 관한 여러 계명들을 잘 소화하고 받아들여서,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은혜주신 하나님과 늘 동행하면서, 내가 과거에 나그네였다는(죄인이었다는) 정체성을 잃지 말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매사에 거룩함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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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너희도 나그네 였음이라” 들려주신 말씀으로 인해, 우리 자신들이 과거에 죄인이었으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이웃에게는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여러 가지 주신 계명들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잘 적용되도록 성령 하나님 이끌어 주옵소서. 항상 거룩한 성도로서 우리의 언행과 행실을 올바르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나그네였던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도록 길을 밝혀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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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