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자: 윤 명 철(동국대 사학과 교수)
정 우 영(한백역사문화연구소 부소장)
오 순 제(명지대학교 출강, 문학박사)
김 성 우(MBC문화부 기자, 한백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김 윤 명(단국대 교수)
운악산성(雲岳山城)개요
1. 운악산성의 특징
운악산성은 포천군 화현면 화현리에 위치한 운악산의 산 중복(해발고도 400∼500m 일대)에 세워진 석축산성으로, 폭포와 기암절벽의 험요한 천연지세를 절묘하게 활용한 성곽형태를 갖추고 있다. 험요한 산악의 지형지세를 잘 활용하여 정교하게 산성을 축성하는 모형은 고구려 강역 및 북부지방의 성(고려의 장성)에서 자주 보이는 특징이다. 따라서 축성에 동원된 대다수의 군사 및 부역장정이 이곳 포천(견성 및 양골현 민)출신 토착인임을 추정할 수 있다. 운악산성의 문지(門址) 및 성가퀴는 운악산의 가파른 경사 및 암석의 석질과 규모, 폭포와 절벽의 위치, 계곡의 유입방향 등을 정확히 실측·답사한 후 여러 방향의 예상 공격로와 도주로를 다각도로 설정하고 정교하게 축성한 점이 특징이다. 이런 정교한 공사는 포천 출신의 대다수 군민만이 가능한 일이고 따라서 이들 토착민이 부역했음을 알 수 있는데, 외지인이 운악산의 복잡하고 광대한 지형지세를 면밀히 파악하고 축성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음을 현장을 확인해보면 이내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토착호족에 의해 축성된 성으로 의심되는 곳이다.
또한 포천 고을이 한 때 고구려의 강역이었음을 古地名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4권 지리지>에 이런 지명기록이 보인다. "견성군(堅城郡)은 본디 고구려 마홀군(馬忽郡)인데 신라 경덕왕때 고친 이름 이다. 지금의 포주(抱州)로 두 현을 거느렸다. 사천현(沙川縣)은 본디 고구려의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신라 경덕왕때 고친 이름 이다. 지금도 인습한다. 동음현(洞陰縣)은 본래 고구려 양골현(梁骨縣)인데 경덕왕때 고친 이름 이다. 지금도 인습한다. " 위 기록으로 보아 과거에는 포천읍 군내면 일대를 마홀이라고 했으며 영중면·창수면·영북면 일대를 양골현이라 불렀고 모두 고구려의 지방 강역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운악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한 철원(鐵圓郡), 가평(加平郡), 화천(華川郡), 남양주(骨衣奴縣), 양주(北漢山城)고을이 모두 고구려 강역 이었으니 운악산 주변에서 생거하던 촌민 또한 고구려의 문화를 자연히 체득하고 계승했을 것이다. 즉 고구려 문화권에 속했던 당시 포천 지역민들이 산성 축조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험요한 지형을 최대한 적합하게 살려서 고구려 방식의 난공불락의 산중요새를 완성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2. 운악산성의 축성시기와 규모
정밀한 발굴조사가 완료되어야만 정확한 축성시기를 알 수 있겠으나 산성의 축조방식과 주변에서 출토되는 유물유적(어골문 기와편, 청자편, 연질토기 등....)으로 보아 운악산성은 신라 말기에 축성되어 고려 및 조선 초기때까지 활용된 군사 시설물로 추찰된다. 몽고병란때 운악산 북쪽의 도성령 산성(적목치산성)에서 가평군민이 항전한 기록이 있어 운악산도 몽고병란을 비켜가지 못했을 것으로 추찰된다.
조선 중·후기의 고문헌 및 사료에 운악산성의 기록이 일체 누락된 것으로 보아 이미 이 시기엔 군사시설로써의 활용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폐성(廢城)된 것 같다. 이 지방의 대표적 향토사지라 할 수 있는 <포천군읍지>에 조차 운악산성의 기록이 없고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도 기록이 없다. 다만 <견성지>에 화성(花城)이란 기록이 있고 <견성지> 산천조에 "운악산은 포천군 동쪽 25리에 있는데 곧 가평 현등산 서쪽의 산이다. 산꼭대기에 옛 나라의 궁궐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운악산성의 규모는 전체길이가 약 2.5㎞에 달하며 높이가 3m∼0.5m인데, 보존상태가 좋은 성터에서는 회각도 및 치성까지 축조된 치밀하고 견고한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성곽을 축조할 때 쓴 석재는 운악산 전역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석질의 암석(주로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가공한 후 어긋물린 구조로 안으로 들여쌓았는데, 석재를 가공하는 기교가 뛰어나서 암석의 절리를 따라 자르고 전체하중을 미리 예상하여 경도에 따라 쌓고 다듬은 것이 마치 벽돌을 다루듯이 하였다. 이런 흔적이 성벽의 여러 곳에서 보인다. 상태가 좋은 성의 단면에서는 25열까지 가공한 석재를 쌓아올렸다. 축조방식 및 형태가 이처럼 견고하였기 때문에 급경사를 이루는 경사진 암반능선에 성을 축조했는데도 천년의 장구한 세월을 견디고 일부나마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온 것이다.
성내에는 두 곳의 산간계곡이 있는데 항상 맑고 수량이 풍부해서 우물 및 샘을 별도로 개발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자연히 이 산간계곡의 물을 성내 용수로 사용한 것이다. 성내에 건물지는 3곳으로 확인되었는데, 청학사 절터가 그 하나이며 성의 문지(南西門)가 있던 곳이다. 청학사터는 산성에 주둔했던 첨병들의 막사가 있던 곳으로 보인다.
청학사터 바로 위는 깍아지른 30m의 암절벽 폭포를 이루는데, 폭포의 상단에는 계곡을 낀 약 100여평의 평지가 있다. 이곳에 수장급 군사의 막영지 1동이 있었으며 주변에서 어골문기와편, 청자편, 토기, 물확 및 제사용 그릇 등을 발견하였고 취사를 위한 숯가마터도 확인하였다. 난방 및 취사를 위한 연료를 대량으로 확보, 저장하기 위해 숯을 성내에서 직접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홍폭(紅瀑: 일명 무지치폭포) 상단의 서북쪽 평지에 건물터가 또 있는데, 이 지역을 화현 주민들은 현재까지 '대궐터'로 부르고 있다. 오래전부터 궁예의 웅거지라는 전설이 함께 구전되어오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견성지>에서 밝힌 옛나라의 궁궐터가 이곳으로 추정된다. 백제문화연구회 연구자들이 답사한 결과 건물 4동(4棟)의 초석과 다량의 기와편·토기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궐터로 불리는 건물터는 운악산성 내에서 가장 넓은 평지를 이루는데 협곡과 폭포 사이에 감추어진 은밀한 요지여서 성내 최고의 수장이 웅거하던 장소로 추정된다. 3단의 평지는 총 200-400평의 규모를 갖추고 있는데, 토질이 양호하고 용수가 풍부하여 둔전(屯田)을 조성하여 소규모의 자경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건물터는 사찰양식의 초석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제사를 지내던 제단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곳이 운악산성의 핵심병영이었으며 정치적 귀족(군사지도자)이 웅거했던 곳으로 보여진다. 성내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사찰이 있었음은 나말여초(羅末麗初) 시기의 호족들이 축성한 성곽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산성의 배치형태이다. 또한 먼 곳까지 관측이 가능한 험준한 바위봉우리에는 망대(望臺)를 설치하였는데 모두 세 곳이다. 그리고 산성의 중요한 지점에 소규모의 보루성을 설치하였으며 목책을 설치하기 위한 천공(바위구멍)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3. 운악산성의 관방적 가치
운악산성은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역사적 공백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이며, 독특한 형태를 갖춘 산성모형으로 앞으로 많은 연구와 규명이 요구되는 역사자료이다.
삼국시대의 성은 대부분 성읍의 형태로 촌락의 구릉성 산지나 교통로의 고갯길(군사적 요충로)에 위치하였으나 고려·조선조에 이르면 높은 산지에 만든 대규모의 산성으로 축성형태가 바뀌게 된다.
그런데 신라말기의 지방군벌(호족세력)들은 신라의 변경 각지에서 발흥 웅거하여 한 고을 또는 여러 고을을 차지하고 서로 군현을 침탈 합병해가는 처지어서 자신이 장악 관장하는 고을을 강력한 군사조직으로 개편하여 다른 지방군사의 공격에 늘 대비해야 했다. 따라서 성곽의 형태가 독특한 모형으로 바뀐다. 이 시기의 지방군벌들은 감히 왕을 자처하면서도 아직은 정치적 역량과 카리스마가 부족한 형편이어서 체계화된 국가조직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대다수 상·하층민의 신앙체계였던 불교를 이용, 사찰을 건립·중창하여 권력 증강의 모태를 삼는다. 이들 성내의 사찰은 군벌의 궁성(宮城)이었으며 군사를 징발·훈련시키는 연병장이었고 신앙을 통해 군현의 지역민을 통합하고 군벌의 정치적 권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강원도 영월의 법흥사와 흥녕산성, 경기도 양평의 사라사와 함왕산성, 원주의 석남사와 영원산성, 춘천의 흥국사와 삼악산성, 전라북도 김제의 금산사와 모악산성등이 궁예, 함규, 양길, 견훤등 군벌과 관련된 성으로 이런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특히 운악산성은 천연의 험요한 지형을 기묘하게 활용한 형태가 특이하며, 이성의 연구를 통해 신라말 신흥혁명세력이었던 이들 호족군벌들이 어떻게 한 지역을 장악하고 군사력·정치력을 체계화하여 후삼국, 고려라는 시대를 창출하고 새로운 문화, 고대국가와 중근세국가의 새 사회 건설을 표방한 국가모형의 연구와, 신앙체계·정치·문화적 모형·군사조직 및 관방체계를 규명하는 중요한 열쇠인 셈이다. 신라말 고려초 시기의 지방군벌이 세운 성은 경북상주의 견훨성·양평의 함왕성등이 있으나 유독 포천 지방에 많이 산재해 있다. 이는 궁예세력과 왕건세력이 포천 지방에서 상당기간 팽팽하게 대립한 역사를 알려주는 흔적이다.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의 태조로 등극하고서도 6년 동안이나 포천 고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위 기록으로 알수 있다. 또한 명성산성, 보개산의 가산상성, 운악산성등은 궁예시대에 강역을 관리하기 위해 중요지역에 축성하였던 고대 군사시설인데 후일 왕건에게 투항, 복속하지 않은 포천지역의 맹주인 성달·이달·서림형제가 웅거·저항했던 요새지로 활용된 것이니 페루의 마추피추의 역사와 비견되는 비장한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잇겠다.
4. 운악산성 관리의 문제점
성곽내에 무속인이 거처하는 움막이 난립하면서 성돌을 빼내어 축대와 건축재료로 사용하여 성의 형태가 심각할 정도로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며, 무지한 등산객들이 산성을 등산로 이용하면서 많은 부분이 허물어지고 있다. 일부 산악인들은 산성에 돌을 무분별하게 쌓아 탑을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오랜기간 방치하면 산성의 본래 축성형태를 도저히 확인할 수 없게 되며, 복원작업을 할 때 역시 축성의 모형조차도 가늠하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사적으로 보호받지 못하여 문지, 청자, 기와편등이 등산객들에 의해 반출, 파괴되어서 유물유적이 급격히 멸실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암반 위에 노출된 유구가 많아서 홍수로 많은 유구가 유실되고 있어 시기를 늦어질수록 지표조사와 발굴이 어려워질 것으로 여겨진다. 파괴된 자연은 오히려 복원할 수 있어도 문화유산은 한 번 파괴되면 영원히 복구,복원이 어려운 귀중한 자산임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서둘러 보존대책을 수립하고 실행해야 옳을 것이다.
5. 운악산성의 문화적 가치개발, 가능성
운악산은 송악산,화악산,관악산,감악산과 함께 경기5악의 명산으로 예로부터 대접받아온 신령한 산으로, 폭포와 단풍숲, 기암괴석과 청정한 계류, 험준하면서도 빼어난 산악미를 고루 갖춘 천혜의 경승지이다. 더구나 소중한 문화유적까지 있으니 자연환경과 산성 등의 유적을 널리 홍보하고 문화상품으로 개발하여 보전하면 관광객이 급증하고 지역 주민들에게도 관광수익이 실재로 증대되어 포천경제에도 많은 실익이 될 것이다. 아울러 인근에 소재한 온천휴양지, 스키장, 골프장, 이동 갈비촌 등과 연계하여 문화관광벨트를 구성하여 집중적으로 개발, 홍보한다면 포천의 수익증대에 상당한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를 위해선 운악산의 문화유적·지형 및 지질·식생환경 등을 연구하는각방면의 전문가의 용역연구를 통해 정밀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운악산성의 역사를 알리는 관광안내판 및 관광안내지도 제작, 우회 등산로를 개발하여 운악산성을 보존하는 대책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추진할 운악산 문화개발추진주민위원회가 결성되고 경기도 포천군의 협력하에 관민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추진하는 운악산 학술세미나, 운악산 문화예술제, 운악산등산대회 등의 문화행사가 있었으면 한다.
*신라하대의 토호(호족)세력과 궁예
정 우 영(경기지역역사지명연구가)
신라 후기에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몰락하여 내려간 중앙 귀족과 그 지방에서 성장한 토착적인 村主 출신, 그리고 지방의 군사적인 무력을 가진 군진세력(軍鎭勢力)등이 지방호족으로 대두하여 농민반란 등 혼란한 사회적 환경을 틈타 각지에서 봉기 웅거하였다. 9세기 말에는 이들 토호 및 장군(호족)세력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상주지방의 원종과 애노, 죽주의 초적두령 기훤, 북원의 초적두령 양길(梁吉), 양평의 승려 출신 함규(咸規), 하동의 호장(戶長)출신 정도정(鄭道正), 목천의 백제유망민 마육황, 명주의 몰락한 신라왕족 김순식(金順式), 풍양의 토호로 추정되는 조맹(趙孟), 전라도 지방의 신라군관출신 견훤(甄萱) 등이 대표적 세력이었으며, 특히 그중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룬 것이 기훤과 양길의 부하였다가 독립한 궁예였다.
신라하대의 호족들은 성주(城主),장군(將軍)이라 자칭하면서 중앙의 정치기구를 모방한 독자적인 지배기구 즉 관반제(관반제)를 갖추고 지방사회를 통치하였다. 이들은 또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방의 행정을 장악하였고 조세, 역역(力役) 등을 독자적으로 징수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당시 새로이 전래된 선종(禪宗)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정치적으로 적극 후원하였다.
궁예는 신라의 왕족으로 몰락한 가문 출신이었는데 북원에 있던 양길의 부하가 되어 강원도 일대를 경략하고 세력이 강성해지자 마침내 양길을 넘어뜨리고 송악에서 자립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내세워 901년에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에 신라와 함께 백제·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는 후백제·고려(후고구려)가 정립하여 후삼국시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가 진골왕족의 정치적 권력다툼에 휩싸여 경상도 일대만을 지배하는 상태였던데 대하여, 견훤과 궁예는 전제군주로써 전라도 일대와 중부지방에서 커다란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왕건은 본래 혈구진(穴口鎭)을 비롯한 해상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궁예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것은 구신라에 대한 혁명적인 새왕조 건설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왕건이 건국초의 불안정한 시기에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송악지방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기반위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태조 왕건은 통일왕조를 이룩하였으나 지방에는 여전히 반 독립적인 호족세력들이 분립하여 만만치 않은 세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6명의 태후(太后)와 23명의 후비(妃)들과 혼인하여 전국의 20여 호족들과 정략적으로 결합하였다. 또한 왕씨 성을 주어 一家와 같은 혈맹관계를 맺고 이를 바탕으로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초기에는 자치적인 지방호족이 사병을 양성하고 수령(外官)이 파견되지 못한 군현을 지배하였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전기에는 수령이 파견된 주현이 130개 였는데 비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은 무려 374개나 되어서 중앙통치력의 지방침투가 매우 불안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는 호족연합에 의한 건국이라해도 좋을 것이다. 지방세력이 작용하고 중앙권력이 이를 용인함으로써 비입지(飛入地)는 형성되고 존속하였다. 군현제(郡縣制)는 신라말 통치질서의 해이에 따라 무너지고 사병을 거느린 호족들에 의하여 전국이 분점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비견할만큼 전국 각지에서 발흥한 호족들의 항쟁속에서 이들 상호간에 지배복속의 관계가 생겨 대호족은 중소 호족을 지배하게 되고, 이것이 더욱 진행되어 후삼국의 정립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 복속의 관계는 가변적인 것이었고 대·중·소 호족들은 엄연히 독자의 지배구역을 보유하였다. 이런 상황은 왕건의 통일 이후에도 마찬가지여서 고려는 초기에 호족들과 연합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그들의 지배권을 인정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할 수 밖에 없었다. 태조 23년(940) 또는 고려초라고 기록된 시기에 주현 명호(名號)의 개정과 함께 잔읍(殘邑)을 부근 군현에 소속시킨 사실은 이들 호족들의 세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하겠다.
철원의 선창벌·대야장평 등은 예로부터 넓고 토지가 비옥하기로 유명하였고 우리나라 3대 다우지 가운데 하나이며 경기북부의 곡창지역이다. 궁예는 철원의 이러한 자연지리적 환경을 이용하고자 철원을 궁성으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철원에 소재한 마장면 대전리에 가실현성지, 입목면 승양리의 성산, 내문면 마방리의 토성, 북면 홍원리와 어운면 중강리에 걸쳐있는 풍천원 도성은 모두 궁예왕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진주(光州)를 습취한 뒤 스스로 왕이라 칭한 견훤이 양길에게 비장(秘將)이라는 벼슬을 내린 사실(견훤의 그러한 행동이 선전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겠지만)로 미루어 양길은 당시 상대적으로 아직 큰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음을 추찰할 수 있다. 그러다가 궁예의 귀부(歸附)를 받고 난 뒤부터 양길의 세력은 점차 커졌다. 양길은 궁예를 우대하여 모든 일을 위임하였으며 군사를 나누어 주고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였다. 궁예는 양길의 군사(초적)를 거느리고 치악산 석남사로부터 주천, 내성, 울오, 어진 등의 여러 현을 습격하여 항복을 받고 894년에는 마침내 명주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모두 3500명이 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8년조에는 궁예의 무리 600명이 명주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이 상이한 것은 궁예가 양길로부터 빌린 군사가 본래 600명이었을 것이며, 그들이 명주에 이르렀을 때는 각주현의 항복을 받아 3500명으로 불어났을 것으로 추찰된다. 이어 궁예는 저족, 생천, 부약, 금성, 철원 등지를 점령하니 군세(軍勢)가 심히 강성하여 패서(浿西: 황해도 일부와 강원도 경기북부의 일부)의 적들이 항복해 오는 무리가 많았다. 당시 점령한 지역들이 양길의 세력으로 흡수되었기보다는 오히려 궁예의 세력기반이 되었다. 이후 궁예는 양길의 휘하에서 벗어나 독립세력을 구축하였고 송악군으로부터 왕건의 투항을 받으면서 후삼국시재의 강력한 지배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양길과 기훤은 붕괴되어가는 고대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주도해갈 수 있는 경륜이 부족한 초적임에 반하여 궁예는 새로운 세상의 정치철학(용화세계의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여러 사실정황으로보아 궁예는 <고려사>의 기록처럼 포악하고 잔인무도한 인물이라기보다는 군사전략에 능통한 용병술의 달인이었고, 적을 설복시키는 수완이 뛰어났으며 부하를 감화시켜 거사를 도모하는 출중한 정치외교가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궁예를 내쫒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세력으로서는 왕조건국의 정당성을 내외에 그럴듯하게 천명해야했고, 궁예를 그 희생물로 삼아 난세를 극복할 경륜이 없는 몰염치한 인물로 폄하, 평가절하하였을 것이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국고가 탕진되었는데도 신라의 왕실에서는 사치와 부패가 극에 달해 889년(진성왕 3년)에 세금을 과도하게 독촉하자 호족과 중앙의 이중수탈에 허덕이던 전국의 백성들이 초적으로 유망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민심은 이미 신라에서 유리되어 신라의 붕괴와 새로운 세상의 출현을 열망하게 되었다. 궁예는 이런 민심을 적확하게 읽고 당시 사회에 만연하게 성행한 미륵신앙을 새로운 세상의 비젼으로 제시하며 미륵이 출현한 태평성대를 건설하겠다고 지상천국건설의 사회개혁의지를 표방하였다. 이런 사회개혁을 주도해가는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곧 자신을 미륵불이라하고 두 아들의 이름을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하고 법상종에 충실한 불교관으로 통치하며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는 제과정을 보면 고도의 정치책략과 경륜을 갖춘 범상치않은 인물임에 틀림 없다. 또한 이미 세달사에서 선종이란 법명을 받고 승려생활을 했던 궁예로서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지식집단이었던 많은 승려들과의 교유(交遊)에서 새사회건설의 주도이념과 경륜과 지식, 통치철학, 민심의 결집책 등을 터득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궁예는 요망한 폭군이라기보다는 상당한 엘리트지식인 이었던 것 같다. 이를 증명하는 <고려사>의 기록이 스스로 불경 20권을 강해하여 편찬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왕권강화를 지나치게 서둘러 시도하는 과정에서 일부 호족과 반목이 생겨 정적을 만든 것이 큰 화근이 되었다. 또한 확실한 토착지원세력과 국가경영을 위한 경제적 근거지가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을 제압해가는 정복전을 오래하여 軍官民을 힘겹게한 점이 불만으로 누적되어 개성에 세거하며 해상토호로서 인적,경제적,군사적 힘이 풍부한 왕건에게 거세 당하는 원인이 된다. 왕건세력이 궁예를 제거했어도 후고구려의 모든 호족과 성주가 왕건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고려사> 제1권 세가 태조1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정유일에 진각성경 유척량이 혁명(왕조교체) 당시에 여러 동료들은 당황하여 뿔뿔이 도망하였으나 그는 홀로 본성을 떠나지 않았고, 맡은 바 창고는 조금도 손실이 없게 하였다고하여 특별히 광평시랑의 벼슬을 주었다. (丁酉以珍閣省卿柳陟良當革命之際群僚倉卒散走獨不離本省所典倉庫 無所亡失特授廣評侍郞)"
윗 기록으로 본다면 상당수의 호족과 성주가 권력교체의 쟁투에서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거나 궁예의 편에 가담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중 포천 영평과 연천 양주 일대의 여러 고을은 철원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워 철원에서 패주해온 일부 궁예세력과 합세하여 궁예왕부흥운동을 펼쳤으리라 추찰된다. 오순제씨의 발표자료(성동리 패주골, 항서받골, 야전골, 여우고개, 망봉, 궁예왕굴 등의 지명 )에서 보듯 포천 지방과 연천지방에 궁예와 관련된 지명이 수 없이 산재한 까닭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여진다. 포천군 관인면 보개산성지는 궁예가 왕건에게 패해 성을 쌓고 마지막 저항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산은 궁예가 왕건에게 패해 이곳에 와서 크게 울었다하여 울음산이란 지명이 붙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화현면 운악산에 虹瀑(무지치폭포) 역시 궁예가 왕건에 쫒겨서 이곳까지 피신하였는데 이곳에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몸을 씻고 성을 쌓아 최후의 항전을 했다는 전설이 각각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도 궁예가 옛나라터를 바라보았다는 국망봉과 궁예의 비였던 강씨부인과 관련된 강씨봉 지명 등이 있다.
"계미6년 (923년)봄 3월 신축일에 명지성장군 성달이 그 아우 이달 서림과 함께 귀순하여 왔다. (辛丑命旨城將軍城達與其弟伊達瑞林來附-고려사 권제1세가 제1태조)"
"계미 태조6년(923년) 여름 6월에 신라에 명지성 장군 성달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사절요권1)"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약간 상이하여 귀순과 항복으로 각각 표현했는데 아마도 왕건과 적대적으로 대립하다가 힘이 부쳐 항복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니 <고려사절요>의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다. 명지성 장군 성달을 신라장군이라고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 표현한 것 또한 기록자의 오류다. 신라는 889년 원종 애노의 난과 초적의 봉기가 일어나는 진성여왕때부터 이미 경주주변을 제외한 군현의 통치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923년에 신라의 장군이 포천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전후의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달은 아마도 궁예를 지지하는 포천출신의 군사적지배자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형제들로 기록된 이달과 서림 또한 포천의 일부지역을 분점한 군사지도자로 보여진다. 따라서 이들 중 성달이 대표적 실력자(中豪族)였고 이달과 서림은 소규모의 지역을 지배하며 성달에 충성한 소호족(小豪族)이었으리라. 포천의 반월산에도 궁예왕과 관련된 지명전설이 구전되고 있는데 아마도 반월산성의 주인공은 여러 정황으로보아 성달로 추정된다. 이달과 단림이 포천의 외곽고을을 다스리며 요충지를 장악, 지배했다면 둘 중 어느 한 인물이 운악산성을 축성하고 화현면 일대를 지배하면서 적게는 성달에 충성하고 크게는 궁예에 충성하는 지원세력을 형성했을 것이다. 다만 현재 사료가 빈곤하여 문헌적으로 더 이상의 규명이 어렵고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해봐야 군사적 규모와 축성세력의 성격과 시기 등을 밝힐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을유 8년 (925년) 가을 9월 갑인일에 매조성 장군 능현이 사절을 파견하여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甲寅買曹城將軍能玄遣使乞降-고려사 권1) "의 기록으로 포천이 무너지자 고립무원의 반대세력이었던 양주호족 능현이 항복을 애걸할 정도로 사정이 다급해졌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시기 전후까지 왕건이 飛入地 또는 斗入地로 각각 남아 독립화 된 일부 호족들을 제압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무자 11년(928년) 봄 정월 임신일에 명주장군 순식이 조현하러 왔다. 8월에 왕이 충주로 갔다. 이때 견훤이 장군 관흔을 시켜 양산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왕은 명지성 원보 왕충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쳐서 패주케 하였다. 관흔은 퇴각하여 대량성을 확보하고 군사를 풀어서 대목군의 벼를 베게 하였다. (八月行忠州甄萱使將軍官昕城陽山王遣命旨城元甫王忠率兵擊走之官昕退保大良城縱軍參取大木郡禾稼) "의 <고려사> 기록에서 포천에 외관을 파견하여 고려왕실에서 직접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지명으로 고찰한 운악산성
<포천군읍지>와 <山圖後記>에는 "한양 동쪽의 모든 산은 현등산으로 중조(中祖)를 삼으니 운악산은 뭇산의 조종(祖宗)이 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포천지방의 향토사를 기록한 고문헌은 영조 34년(1758년)에 이세욱(李世郁) 등이 편찬한 <견성지(堅城誌)>와 광무년간(1899년)에 편찬한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가 대표적인데, 운악산성에 대한 기록은 <견성지>에 유일하게 전해져오고 있다. <견성지>는 1책 40장으로 구성된 필사본으로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포천에서 세거한 인물로 전해지는 조경이 읍지편찬에 뜻을 두어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했으나 완성을하지 못했는데, 김효대가 포천수령으로 부임하자 이세욱이 관과 고을의 식자들에게 건의하고 물어서 <견성지>를 만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체재나 내용은 자료를 많이 구비했던 조경의 후손들에의해 거의 정해진 것 같다. <견성지>는 포천에서 가장 오래된 사찬읍지로 10여년에 걸쳐 향토사료를 치밀하고 방대하게 조사하였기때문에 오히려 150년 뒤에 완성된 <포천군읍지>에 비해도 내용이 풍부하고 정확하다. 이 <견성지>에 운악산성과 연관된 기록이 두 곳에 있으니 옮기면,
첫째 <견성지> 산천조에 "운악산은 포천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즉 가평 현등산의 서쪽이 되는 산이다. 산꼭대기에 옛나라의 궁궐터가 있다. " 고 기록했는데 옛나라의 궁궐터라 한 곳이 아마도 현재의 운악산성(궁예왕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찰된다. 또한 봉래산인 양사언의 시에 이르기를
" 天作高山壓震方
芳名流傳小金剛
花峯崔崔參 漢
積翠蒼蒼接大荒..."이라 했는데 "花峰崔崔...(꽃같은 봉우리는 높이 솟아 은하수에 닿았고)"에서 花峴과 花城의 지명이 되는 단서가 보인다. 운악산은 이름 그대로 뾰죽뾰죽한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구름을 뚫고 솟아서 그 모습이 마치 瑞氣를 품은 한 떨기 향기로운 꽃과 같았다.그래서 지명이 운악산이 된 것인데 후일 자연발생적으로 花山, 華山이란 별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런 예가 인근의 가평 화악산에 있다. <대동여지도> <동여도> <가평군읍지> 등에는 華嶽山으로 기록된데 비하여 <수진일용방> <팔도전도> <경기고지도첩> 등에는 花嶽山으로 기록되어 華와 花는 지명에서 서로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성은 水邊의 요로가 되는 언덕이나 주요 교통로를 이루는 산의 정상부나 고갯마루에 축조 되었다. 그래서 고개를 의미하는 '재(잣-작-鵲-栢으로도 표기)'라는 말이 '성'이라는 의미까지도 뜻하게 되어 城을 오는날 '재 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꽃성(花城)과 꽃재(花峴)는 결국 같은 의미의 지명으로 이해하면 된다. 일부 역사연구자들이 화현을 서파부근에 있는 봉수리라는 지명에 근거하여 '烽火를 피우던 고개→火峴→花峴'으로 주장하기도 하나 운악산과 봉수대자리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서 신빙하기에 무리가 많다하겠다. 오히려 '툭 앞으로 삐져나오거나 솟은 땅'을 말하는 곶(串)이 변음(격음화)되어 꽃이 되었다는 설은 문헌연구와 지형지세 관찰을 통해 규명해볼만한 주장이다.
둘째로 <견성지> 충신조에 "조득남(趙得男)은 본관이 한양인 사람인데, 한천부원군 조온의 후손이다. 포천현의 동쪽 20리 운악산(雲岳山) 아래 화성리(花城里)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병자호란때는 인조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수어사 이시백의 관하가 되었다.....남한산성의 북문에서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는데 인조임금이 놀래 애도하면서 유포를 내려 시신을 싸서 북문 아래에 매장토록 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화성리(花城里)에 옮겨 장례 지냈다."는 기록으로 운악산성이 화성으로 불렸었음을 추찰할 수 있다. 적어도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나 <견성지>가 만들어지던 시기까지는 이 지방에서 花城의 지명이 통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