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64
다시 살아나는 당산나무처럼 활기를 되찾고 있는 마을
무안읍 매곡리 양림 마을
무안에서 무안 박씨의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은 현경면의 평산리, 양학리, 무안읍의 매곡리 등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 매곡리의 양림 마을은 전 세대 중 두 가구만 장씨 고씨 등 他姓이 살고 있고 그 외 가구는 무안 박씨들이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양림 마을은 무안에서 현경 쪽으로 가는 구 도로를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서 조금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무안읍 매곡4리 양림 마을이다.
이 마을을 안고 있는 玫谷里는 원래 盤谷里였다. 마을의 위치가 감방산을 포함한 보평산 삿갓봉[笠峰], 옥녀봉, 병풍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가 이 마을을 향하고 있어 풍수지리로 보면 마치 다섯 명의 노인이 밥상을 받는 형국이라 해서 반곡리라 했다. 그러나 일제 시대 때 일본인들이 그들 식으로 한자 이름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즉 ‘盤’을 일본어로는 ‘반’이라고 읽는데 ‘盤’자가 쓰기 어려워 비슷한 음을 지니고 있는 ‘玫’자로 바꿔 버린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등을 기회로 마을 이름을 쓰기가 어렵다거나 어려울 때는 쉽게 고치거나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꿔버린 예가 전국적으로 나타난다. 우리 지역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가 구로리의 ‘龜’자가 ‘九’자로 바뀌어진 청계면 구로리이다.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鶯林이었다’고 한다. 꾀꼬리가 노니는 숲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현재의 이름인 楊林으로 변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고 있다. 1789년 조선왕조가 발간한 호구총수에도 ‘楊林’으로 나온다.
마을의 입향조는 이웃한 수반 마을의 입향조인 박염(1526-1603)의 다섯째 아들 朴慶補가 결혼하여 이 마을에 분가해 살면서 마을의 터전이 닦아졌다. 마을의 전체적인 지형이 이웃 마을인 수반 마을이나 현경면의 모촌 마을처럼 숲으로 둘러 싸인 아담한 분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는 자랑거리가 두 개나 있다. 하나는 다시 살아나고 있는 당산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을 숭배해 유명한 학자를 모셨던 사당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당산할머니라고 부르는 느티나무는 마을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둘레가 4ⅿ90㎝가 넘는 크고 오래된 나무로 길이도 20여 미터가 넘는다. 400여년 전 이 마을의 입향조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이다. 한때는 나무 가운데에 크게 구멍이 파져 있어서 살쾡이가 살기도 하고 껍질이 벗겨져 죽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해서 1980년대 초반까지도 나무가 시들시들하고 회생의 기미가 없었는데 주민들이 뜻을 모아 마을 뒤에 숲을 조성하고 영양주사를 놓는 등 정성을 다하고, 당산제를 다시 지내면서 나무가 기력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산제는 매년 정월보름에 시작되는데 제를 지내기 며칠 전부터 제관을 뽑고, 뽑힌 제관은 비린 것을 먹지 않는 등 엄격한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 그 후 堂木의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고 농악놀이와 함께 제를 지낸다.
실지로 현재의 느티나무의 모습은 여느 고목처럼 구멍이 나 있다거나 나무 껍질이 벗겨진다거나 하는 노화 현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파진 구멍이 메꾸어지는 등 왕성하게 다시 생기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은 마을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징조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양림사(楊林祠)다. 양림사는 이 지역의 대학자이던 竹坡 朴淇靑의 손자 박광선이 지은 사당이다. 박광선은 조부께서 스승인 구한말의 대학자 松沙 기우만 선생(1984-1916)을 흠모하던 정신을 계승하여 1965년 마을 뒤에 楊林壇을 설치하고 송사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여 내려오다가 1975년에 유림들과 협의를 거쳐 楊林祠를 건립하였다. 사당에는 송사 기우만 선생을 봉안하였고 후일 죽파 선생을 추배하여 매년 음력 3월 3일에 이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죽파유고 4권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현재 수반 마을의 입향조인 박염이 세운 죽헌정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데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郡과 門中이 힘을 모아 복원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사당 아래엔 제사 지낼 때 거처하고 준비할 수 있는 詠歸堂이라는 집이 있다.
이 마을 출신의 인물로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사람은 세계 미들급 챔피언을 지낸 박종팔이다. 박종팔은 객지에서 짜장면 배달을 하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권투의 꿈을 키어온 입지전적인 인물로 무안 군민의 상을 수상하는 등 무안의 자랑이기도 하다.
무안 쪽에서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는 동학과 관련된 묘가 하나 있다. 후손들에 의해서 곱게 꾸면진 화포 박규상의 묘이다. 묘비에는 고인이 동학과 관련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관련된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또 양림사 옆에 세한정 박재린의 비가 있는데 세한정이 동학에 참여하였다고 짤막하게 무안군사에 나온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소[牛]형국과 관련된 이름인 가마지성, 각골[角洞], 식골(구스통을 말하는 듯)이 있으며 약냉기, 달뫼[月山], 또따물, 초석쟁이, 장마등, 살피, 개미 등이 있다.
34세대 84명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