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없는 우리 집 돌확에 누가 넣었는지? 금붕어 다섯 마리가 보였다.
알고 보니 옆집 요셉이 할아버지께서 당신 쌍둥이 손자 보여주려고 넣으셨단다.
자고 나니 한 마리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바닷가 “테트라포드” 위에서 하늘을 처다 보고 기도하는 듯한 새 “바다직박구리” 그 새 짖 같으다.
가로등위에서 미동 없이 아침기도 하는 듯! 내가 한 바퀴 돌고 와도 꼼짝 않고 하늘만 처다 보는 그 새!
나를 따라왔을까? 돌확에 앉아 물먹는 줄 알았더니 그새 금붕어를 물고는 절구에 “철석” 기절이라도 시켜? 포르르 날라 갔다.
“아하~ 요놈 짓이었구나!”
새들의 먹잇감은 벌레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얼씨구 금붕어가 훌륭한 먹잇감인지? 이해가 힘든 상황을 연출하기에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니, 민가엔 음식 쪼가리 등 먹을 게 풍부할 것 같고
벌판의 벌레나 씨앗보다도 새들도 쉬운 것과 편한 것을 찾는 게 본능이겠기에 화초 속이나 베란다, 기와지붕 같이 “기상천외”한 곳에서도 둥지를 틀고 새끼를 부화하나 보더라!
자생력이 떨어지더라도 나도 한 줌의 먹이를 뿌려댐은? 그것들에게 도움을 못 주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 새가 참 많다....
아침이면 속에 것을 버리기에 마침맞아 보이는지? 하필이면 응가를 내차 위에 뿌려댄다.
매일 씻어내는 것이 부담은 되지만 그래도 활기 넘치는 생물들이 주위에 많아 좋긴 한데! 올해도 텃밭에 엄청 올라오는 카멜레온 새싹을 화분에 옮겨 심는 것만 하더라도 그렇다.
지난주 북양산 성당에서 미사참례하고 `공암`마을 막내집에 가보니 새장에 참새가 설쳐대더라!
조카가 “소쿠리 세워놓고 먹일 뿌리고 숨어 참새가 들어가면 줄을 당겨 잡았다는데, 야생이라 좁은 새장에서 분주했다.”
그렇구나! 내 아들이 어릴 때 한 그 방법이구나! 싶었는데, 나는 당시 내 아이의 인내심을 인정했었다.
“날려줘라" 했더니, "조금 더 지켜본다" 했다.
우리 땐 이즈음이면 “설익은 들판에서 `보리피릴` 불며 아이들이 추억을 만들고 존재를 알렸지만” 요즘은 어떨까?
나는 일찍이 내 고향과 멀리 떨어진 남쪽에 정착을 했는데, 계절이 보름정도 앞서가는 이곳 남도의 바닷가 풍경에 감사한다.
새벽이면 봄의 냉기가 반바지 종아리에 감겨오긴 해도, 한 낮엔 초여름 더위라서 꽃을 피우는 게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데
항상 그랬듯이 `라일락` 과 `장미`가 개화하여 `백합`과 신비함을 다투고, 언덕바지 운무 속에 장승같이 서있는 `나리꽃`과
이국적인 `접시꽃`, 그리고 `해바라기`가 일출을 최고조로 맞으려 제각기 아름다움을 뿜 뿜 할 때면,
나는 사진기자가 되어 신바람 나게 가파른 언덕을 기어오르는데, 의욕이 앞서다 보니 자주 무르팍이 수난당한다.
문득 종아릴 걷어보니 작년에 생긴 흉터가 꽃물 든 듯 아직도 검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