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자명 | 성공회대학교 |
학술지명 | 성공회대학논총SungKongHoe DeaHakNonChong |
권 | 1997 |
호 | 11 |
출판일 | 1997. |
이 논문은 성공회대학교 교수연구지원금에 의해 제출된 것임.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백여년이 넘었는데 교회는 각 시대마 다 나릉대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런데 해방 후에는 목회의 기능 강조 점이 시대마다 비교적 뚜렷이 드러나 보인다. 즉 50년대에는 교회가 신자 들을 지지하는데(sustaining)에 주력을 했고, 60년대에는 전도폭발 운동 에, 70년대에는 성령운동에, 80년대에는 성경공부에, 그리고 90년대에는 영성파 치유운동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영성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말하고 있지만, 막 상 그들에게 영성에 대해 물어또면 영성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각각 너무나 다른데다가, 대답하는 사람 자신들도 영성에 대해 몹시 혼란스러워하고 있 다. 사실 영성은 종교적 심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늘 중심적 과제이지만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특히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과제이다. 사람들은 도시화의 진전과 과학의 발달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오리라고 믿었지만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오늘날 인간들은 그 어느때보 다도 더욱 고독과 공허함을 느끼고 있고 의미의 상실에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런 인간들에게 어떻게 인생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의식의 창을 마련해 주 어 치유와 해방의 환희를 경험하게 해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이것은 목회의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 문제를 다루는 것은 현대 목회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성의 개념이 매우 혼돈되어 있으므로 영성이 란 말의 개념 정의가 우선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들어 개신교는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체계적인 접근은 부족한 것 같 다. 반면에 천주교에서는 이미 18세기 경부터 영성에 대한 문제를 학문적인 영역으로서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영성신학이라는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 영 성문제를 심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목회적 관점에서 보면 영성문제가 하나의 학문으로 체계를 갖추 면 영성 고유의 생명이 빛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목회와 관련지 어 영성을 말할 때는 영성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본다. 또한 영성은 어떤 한 종교, 혹은 교단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 기 때문에 종교와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영성 문제를 우 선 다루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기독교의 영성을 다루는 것이 효과적이고도 합리적인 순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문에서는 종교를 초월하여 영성 일 반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그것이 현대와 미래의 목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 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영성이란 용어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미국의 선험주의 자들은 초월적인 지성을 가리킬 때 영성이란 말을 깼고, 프랑스인들은 삶에 대한 보다 뛰어난 인식을 가리키는 말로 이용어를 썼다. 이 말은 또한 종종 죽은자의 영들이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 매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에서는 보다 깊고 온화한 종교적 감정 을 지칭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햇다. 성서에서는 영성은 'pneumatikos'라는 형용사로 나오는데, 이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자 의 특성을 서술하는데 자주 사용된다. 그러한 사람은 성령을 자신의 삶의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원리로 지니는데 이것은 초기 기독교인이 이해한 영성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영성은 꼭 집어서 이것이다라고 말하기가 어 렵게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맥브라이언은 이를 좀 더 구 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성은 종교와 같이 일반적인 용어이다. '일반적인 종길와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그리스도臺, 유대교 등과 같은 특정한 종교들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영 성'과 같은 것도 없다. 크리스찬 영성, 불교도의 영성 등과 같은 영성이 있 을 뿐이다. 개별적 종교들 안에 다시 구분이 있는 것 처럼(그리스도교에는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성공회, 동방정교회 등), 마찬가지로 크리스찬 영성 안에도 도미니꼬회 영성, 프란치스꼬회영성, 베네딕도회 영성, 예수회 영성 등의 구분이 있다. 오늘날 어떤 수도회에도 의존하지 않는 많은 새로운 형 태의 영성이 이전 형태의 영성들이 그래왔던 것 처럼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 1)
브라이언의 설명은 영성의 개념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데 그의 요점은 영 성은 구체적인 모습 안에서만 그 내총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영성은 다양한 모습으필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영성이란 말 자체 가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영성의 일반적인 성향은 여전 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성의 다양성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주의해 야 할 점은 영성을 기독교 내의 것으로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기독교에 서도 영성의 일반적인 성향을 체계화한 영성신학이란 용어도 18세기에 이 르러 정리되어 쓰이기 시작했는데, 신학사의 흐름 속에서 지금가지도 영성, 영성생활, 신심생활, 초자연적 생활, 내적 혹은 내면생활, 신비주의, 신비 학(occultism), 수덕신학 등등_으로 불리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영성의 일반적인 성향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쿠쉬너는 성서 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인간답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준다 고 말한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느님은 "우리 모습을 닳은 사람을 만들 자"고 하는데, 여기서 왜 '우리'라고 복수로 지칭했을까? 하느님이 '우리 를' 혹은 '우리의'라고 한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창세기의 창조설화에 보면 하느님은 당신이 만든 세상을 식물, 물고기, 새들, 파충류들로 채우고 마지막으로 포유류를 만든다. 그리고 나서 하느님 은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한다. 쿠쉬너는 이것을 다음과 같 이 말한다. "집짐승과 길짐승을 만들고 난 후에 하느님은 흔잣말로 너희와 나, 즉 우리 모습을 닮은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자. 그 피조물은 어떤 면에 서는---먹고 잠자고 짝짓기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너희들 즉 동물과 비 슷한 것이며, 또 동물의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는 나와 비슷하게 되도 록 만들자. 너희 동물들은 육체적 특성을 그에게 나누어 줄 것이며 나는 그 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 하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창조의 꽃이 라 할 수 있는 인간이 반은 동물로 반은 신성한 존재로 태어난다. "2)
쿠쉬너의 이 상징적인 해석은 영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찬 말이다. 반은 동물의 모습이지만 그 나머지 반, 즉 하느님의 형상을 닳은 신성한 존 재, 그것이 바로 영성이라고 불리는 것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이 특성 때문에 인간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으며, 조물주를 찾으며 동물과는 다 른 좀 더 고상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영성이 있기에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고귀한 지위와 권세를 버리고 구도의 고행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영성의 성향때 문에 그리 했을 것이다. 시편 42편 1절에 "하느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 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고 한 것도 바로 같 은 이유에서이다.
그리피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영성의 일반적인 성향에 대한 이해에 도움 을 준다. "영혼의 평화를 지속시켜주는 순수 의식상태의 체험이 존재한다. 존재의 깊이, 존재의 근거를 영혼의 중심에서 감지하고, 감각과 사고를 초 월하여 존재의 신비를 깨치고,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 깨달음 을 증득하는 체험이다. 그것은 분열되지 않은 존재의 토대에 대한 체험이 며, 사고를 초월하여 직접 존재의 심연을 만나는 체험이다. 또한 완전한 하 나에 대한 일치의 체험이기도 하다. "3)
여기에서 '순수의식상태'라 하는 것은 무아(無我) 혹은 무심(無心)의 경 지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며, '감각과 사고를 초월'한다 함은 미국의 초월 주의자(transcendentalist)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 깨달음을 증득하는 체험'이라는 것은, 기독교에서 하 느님을 만나는 경험이나 도교의 도(道) 그리고 불교의 해탈과 같은 개념이 다. 이러한 의식상태는 선(禪)에서의 깨달음과 같이 강렬하게 얻어질 수도 있지만, 궁도(弓道)나 다도(茶道), 또는 꽃꽃이 등의 수련을 통해서도 시나 브로 성취될 수도 있다고 존스턴은 말한다. 4) 이상에서 보면 영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는 어떤 체계적인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는데, 깨달음이란 어떤 것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의식인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의식의 깨달음은 명상적인 수도생활이나 은둔생활 속에서도 가능하지만 우 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가능하다. 기독교의 영성생활의 깨달음을 체계적으 로 다룬 영성신학은 신학의 내용을 지식으로가 아니라 가승으로, 즉 현재의 식이 아니라 잠재의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5)
인간의 영성이란 성향이 눈을 뜨고 꿈틀대며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자 신에 대한 존재와 존재의 근원과 운명,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한 자각으로부 터 나온다. 이런 동기로 영성에 눈 뜬 사람들은 신앙 속에, 기도 가운데, 노래 가운데, 문학작품 속에, 그리고 종교적 구도 가운데 영성의 물음과 나 름대로의 깨달은 바를 남겨놓는다.
독일의 어느 작가의 단편소설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 주제는 다음과 같다. 아들이 어느날 눈을 떠보니 안개 자욱한 숲 속에서 자신이 방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왜 아버지가 자기를 이 숲 속에 갖다 놓았는지 궁금해 하면서 숲 속을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쓰지만 숲 속은 너무나 안개가 짙어서 도대체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아 버지, 여기는 어디며 나는 왜 여기에 있습니까?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어도 안개때문에 나갈 수 없는데 아버지, 당신은 왜 잠자코 계십니까? 나를 종 도와주십시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갈망을 매우 상징적으로 나타낸 소설이다.
불교의 십우도(十半圖)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 인간이 자신을 아들(피조물)로 자각하고 아버지(조물주)를 찾는 것인데 반해, 십우도에서는 인간이 아들도 아버지고 자각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여 그 의미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것이 따를 뿐이다. 6)
존스턴은 십우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십우도 의 제 2도에 등장하는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 사람은, 불경을 읽던 중에 그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해설을 붙인 중국의 유명한 학자가 있다. 그리스도인 이라면, 복음서를 읽어나가다가 그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 으리라. 왜냐하면 소의 발자국이란, 더 깊은 진리의 세계로 유혹하는 진리 의 흔적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를 찾아 험난한 길을 떠나 는 불교의 구도자와, 친척과 고향땅을 떠났던 아브라함과, 보물이 묻혀 있 는 밭을 사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그리스도인과의 사이에 신앙의 공통점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종교의 내부구조인 신앙의 차원에서 모든 종교의 구도자들이 만날 수 있으며, 그 자리에서는 서로가 하나임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7)
존스턴의 말은 미래의 목회를 담당할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 겨있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미래 혹은 현재에 이미 에큐메니칼운동은 일반 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며 종교간의 대화도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는 상황임 을 감안한다면 배타적인 교리보다는 서로 하나임을 느낄 수 있는 영성이 매 개체가 되어 교파, 종교간의 대화가 이루어졌으면 좋을 것 같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다른 종교와 대화를 할 수 있 는 것은 영성적인 접근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한 구소련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Yuri Gagarin)은 달나라까지 갔다 와도 천국이나 하느님의 모습은 보이 지 않더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 공간을 날아서는 우주 저 쪽 끝까지 간다 할지라도 결코 하느님 혹은 어떤 절대자를 만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말한다면 하느님은 명상과 관상 속에서 만 날 수 있다. 명상과 관상 속에서 하느님과의 근본적인 관계, 나와 다른 사 람과의 근본적인 관계가 드러나고 알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위선과 독선과 형식주의와 시끄러움 속에서는 하느님은 슬며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위 대한 신학의 이론 속에서도 하느님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거나 피상적인 모 습만 비칠 뿐, 그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느 님과의 참 만남은 침묵의 명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곽노순 교수는 "영성을 향하여"라는 글 속에서 영성수련의 한 방법으로, 똑바로 서서 오른발을 들고, 천천히 앞으로 옮기고,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 고, 다음으로 왼발을 들고, 앞으로 옮기고, 바닥에 내려놓는 동작을 반복해 보라고 한다. 8) 이런 느린 동작은 명상과 관상을 유도하게 되는데, 이것은 빠른 행동과 좌뇌 중심적인 사고 속에서는 영성 수련이 어렵다는 것을 간접 적인 방법으로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침묵의 명상 속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 속에서 우리의 영 성은 깊어진다. 우리는 명상을 통하여 깊은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를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깨달 음도 우리의 영성을 풍부하게 하여 우리가 하느님께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중심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성서 전체를 통독하 고 성서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의 영성을 깊게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성서를 읽는 방법 중 하나는 성서를 묵상하듯이 읽는 것이다. 시편이나 성서구절을 조용하게 천천히 읽다가 감 동을 주거나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발견하면 그 의미를 새기면서 명상을 하 는 것이다.
명상 가운데서 말씀의 참 의미를 머리로서뿐만 아니라 가슴으로도 깨닫 게 되면 우리의 영성은 깊어지고, 영성이 깊어지면 우리는 내면의 눈을 뜨 게 되는 것이다. 내면의 눈은 물질과 현상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의미의 세 계를 볼 수 있는데, 성령의 역사는 바로 이런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명상에서 더욱 나아가면 관상에 이른다. 명상기도와 관상기도를 동일선 상에 놓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 두 기도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관상 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오로지 그리스도만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와 신비의 일체감을 이루려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 이기심, 미움, '좌절 등 온 갖 것을 다 버림으로써 텅 빈 우리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게 채워진다. 불교에서도 이런 상태를 '無' 혹은 '空'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뜻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텅빈 충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신교에서도 요즈음 큐티(07: Quiet Time)라고 하여 침묵기도를 매 우 강조하고 있는데 경건의 시간이라고 하는 QT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인격 적인 교제를 중요시하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QT는 체계 적인 영성수련의 방법으로는 아직 미숙하지만 영성수련의 한 방법으로 실시 하는 것은 분명하다.
명상하는 방법은 정신건강 지도자, 심리학자, 상담학자, 영성신학자, 수 도자 등에 의하여 다양하게 실시되는 방법이 있으나, 크리스찬이 간단하게 실시할 수 있는 영성수련 방법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1)명상을 위한 주제를 정하거나 마음에 와닿는 성서말씀을 먼저 찾는다.
(2)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집중시킨다. 마음을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는 예수 기도(마음 속으로 '예수그리스도여'하는 예수의 거룩한 이름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 그리고 우리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 때까지 계 속 반복하여 부르는 기도)를 하거나 제단의 십자가나 한 촛불을 계속 응 시하는 방법이 있다.
(3)마음에 정했던 성서말씀이나 주제의 의미를 묵상한다. 이때 의미 자체를 탐구할 수도 있고, 상상을 통해 예수님 생애의 사건에 자신이 직접 참여 할 수도 있다.
(4)집단 영성수련에서는 명상 후에 서로가 경험했던 것을 나눔으로써 우리 의 영성을 더욱 강화시켜 나갈 수 있다. 9)
영성수련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 로을라의 익냐시오의 「영신수련」이 자주 거론되는데, 익냐시오의 「영신수련」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의미를 내면적으로 형성하는 영성이며, 부르심에 응 답하는 선택적 영성이라 할 수 있다. 「영신수련」의 형태는 한 주를 하나의 단계로 하여 4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주는 시간적 단위라기보다 는 사건적 단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즉 크로노스적인 시간이 아니라 카이 로스적인 시간이라는 말이다. 그 첫번째 주는 정화를 위한 과정이고, 두번 째 주는 조명을 위한 과정이며, 세번째와 네번째 주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일치의 단계이다. 10)
익냐시오도 영성의 형성을 위해서는 명상과 관상을 중요시 하는데, 켈시 의 말대로 적당한 토양과 온도가 씨앗의 싹을 돋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상은 인간의 마음 속에 영성의 씨앗이 돋아나도록 인간의 영혼 속에 영적 인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11) 명상은 이성적인 의식과 영혼 의 내면세계를 분리하고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며, 또한 관상의 세계로 들어 가는 전단계이기도 하다. 관상기도에 대한 방법으로는 관상하고자 하는 역 사적인 사건의 현장을 생각하여 그 역사가 펼쳐지는 장소와 상황을 내면의 눈에 그려본 다음, 상상력을 통한 관상을 하면서 떠오르는 영상들을 자신 의 구체적인 상황 속으로 스며들게 하여, 개별적인 의미에 도달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현존적인 삶을 의미있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 기도 방법은 다시 한번 간단히 설명하면, 그리스도의 생애 중에서 한 장면을 택 해서 마치 그 일이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듯이 그 장면을 다시금 체험 하여12)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 는 경험은 기독교 신비주의의 절정인데 이 신비주의는 가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것은 신비주의가 엄청난 사회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 는 오해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정한 신비주의는 사랑의 하느님에 사로잡 혀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려 하는데 있으므로 행동없는 신비주의는 진정 한 의미의 기독교 신비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 는 신비적 경험을 체험한 사람은 오히려 부당한 사회문제에 대하여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용기있게 대처해 나간다. 13)
현대인을 가리켜서 즉흥적이고 찰라적이라고들 한다. 저녁에 강남의 압 구정 일대를 다녀보면 환락을 쫓아 불나비처럼 모여들어 흥청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 환락의 이면에는 심장을 갉아먹 는 공허감이라는 괴물이 꿈뜰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헨리 나 웬은 많은 일들로 바쁘고 또 환락에 빠져 흥청거리는 현대인들에 대해 다음 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많은 일들로 바쁘고, 또 걱정하면서도 우러는 실 제로 만족감, 평화 또는 편안함을 거의 느기지 못하고 있다. 내적 공허가 주는 고독이 세상사로 가득찬 우리의 삶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14)
나웬의 이런 말은 영성신학자나 상담자에게는 낯설은 말이 아니다. 힐트 너는 "사람들은 직접적인 좌절때문만 아니라 의미와 운명에 대한 고민 때문 에도 정신적인 질병에 걸린다. "고 말하고 있고, 브룬(Geoffrey Brunn)은 "우리의 시대는 급변하는 역동적인 기술시대의 충격으로 역사적인 과거와 단절되어 버린 고아의 시대이다. 오늘날 고독한 군중 속에서 모든 개인들은 비참감과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단독자라는 생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 다. "고 했으며15) 클라인벨은 이런 고독과 공허감에 빠진 현대인들이 알코홀 이나 마약 같은 중독증에 혹은 사이비 종교에 쉽게 빠지는 이유라고 하고 있다.
고독이란 분명히 현대의 가장 일반화된 질병 중의 하나인데, 이렇게 보 편화된 고독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고독과 공허에서 구원되기를 간절히 바 라고 있다. 클라인벨은 현대인들의 특징은 상처를 받고, 뜻있는 인간관계를 그리워하고, 인생의 의미에 목말라하고 있는데, 미래의 목회는 교회가 이런 인간들의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켜줄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16)
인간 공허의 또 하나의 원인은 죽음이다. 하이덱거(Martin Heidegger) 는 우리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전 생애 동안 에 멀리에서 희미하게 연주하는 배경음악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틸리히 (Paul Tillich)는 공허와 의미의 상실과 함께 운명과 죽음의 위협 등이 실 존적인 불안을 일으키는 비존재의 위협이 되고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안은 유한성의 깨달음이다. 사람은‥‥‥항상 죽어야 한다 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불안 가운데서 살아간다. 비존재 (Won-being)는 인간 존재의 모든 시간 속에 편재해 있다. 존재의 영고성쇠(vicissitudes)는 모든 방향에서 인간을 위협 한다. 고통과 사고와 질병과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의 상실과 고독과 불안전자 연약함과 실수 등은 언제나 인간들과 함께 있다. 끝으로, 죽어야만 한다는 위협은 죽음의 순간에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을 몸에 지니고 살지 않으 면 안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비존재를 영원히 정복하신 분--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만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이 능력을 전달하고 유한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중보하는 것이 바로 목회의 기능이다. 17)
실존적 불안에 대해 대답을 주는 어떤 심리학적 또는 심리치유적인 방법 이 있을까? 클라인벨은 실존적 불안에 관해서는 어떠한 심리학적 혹은 심리 치유적인 대답은 없다고 말한다. 18) 이것은 가장 심층적인 영성의 문제이다. 삶과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만남의 관계는 좀처럼 형성하기가 쉽지않다. 그래서 실존적 불안에 예민한 사람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구도자가 되 기도 하고 방황의 늪에 빠지기고 하는 것이다. 엄두섭 목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런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나는 고아. 밤중에 울고 있는 고 아. 할 말 없이 울고만 있는 고아.' 인생은 고아다. 내 존재의 근원이 어디 로부터인지 알지 못한채 넝쿨에서 굴러 떨어진 박같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누구 오라고 한 사람 없이 왔고, 누구 가라 하는 사람 없이 떠날 슬픈 우연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사람은 모두 자기의 근원을 찾는다. 유 일한 생명의 원천을 찾는다. 두 개의 길이 있을 수 없는, 하나밖에 없는 인 생의 진리를 찾는다. 우리 모두가 구도자이다. "19)
칼 융은 이 문제에 관하여 「영혼을 찾는 현대인」(Modern Man in Search of a Soul)에서, "인생의 후반기, 즉 35세 이상의 환자들 중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인생의 종교적 의미를 찾으려는 문제를 갖고있지 않은 사 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고 말하고 있다. 20) 융의 말은 인생의 의미의 문제 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영성의 문제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겠다. 이 문제는 비단 종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誇)에 소설에 니· 름대로의 고뇌와 방황과 깨달음을 적고 있다.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데 물어보자
막대로 횐 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보고 가노메라
아, 가을바랑이 불어오네
--송강 정철
정철의 이 시에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그의 정서가 매우 압축되어 나타 난다. 물 아래 그림자 질 때 다리 위로 걸어가는 중을 불러세워 그 가는 태 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목마름을 상징한다. 중은 삶 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 알고 있는 존재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은 아무 대답도 없이 막대로 횐 구름만 가리키며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린다. 이것은 사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정철 자신의 대답인 것 같다. 누가 인생을 알겠느냐? 인생은 그저 뜬구름처럼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마지막 연, "아, 가을바람이 불어오네"에서는 인생은 흘러가는 뜬구름 같다는 생각을 품은 정철의 그 쓸쓸한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자 미상의 시 한 수를 더 소개해 본다.
인생은 구름 한 점 일어남이요
죽음은 구름 한 점 흩어짐이니
있거나 없거나 웃으며 사세
웃지 않고 사는 이는 바보이로세.
이 시는 인생에 대한 허무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하 여 달관한 시인의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인이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 여 그의 이 위대한 영성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미래의 목회자 의 영성은 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영성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기독 교 영성의 정체성은 지키면서 다른 종교의 영성, 그리고 문학에 나타난 영 성까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미래의 목 회자들에게 문학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일반적으로 영성이 매우 약한 것 같다. 세계에 내놓아도 손 가락에 꼽히는 대형교회들이 즐비하고, 성령운동이 매우 활발한 한국교회가 영성이 약하다니 무슨 소리냐 할지 모르지만, 그 성령운동이 참 생명과 사 랑인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로이드가 갈파한 것 처럼 인간의 약 함과 이기심과 어리석음이 투영된 것이라면 그것은 참 하느님의 영성이 아 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과 하 나가 되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 하는 성령운동이 왜 반하느님영성적일까?그 것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혜의 깨달음의 영성이 한국교회에 매우 빈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깨달음이란 제 3의 눈 즉 마음의 눈이라고 불리우는 영안(靈眼)이 열리 는 것을 말한다. 불상을 보면 붓다의 이마에 혹같이 생긴 동그란 점이 하나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제3의 눈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래서 불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비밀은 제 3 의 눈으로 보아야 보인다는 문학작품의? 주제는 수없이 많이 있다. 그 중에 서도 「외디푸스 왕」은 백미라고 할 수있는 작품이다. 친아버지를 죽이고 어 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테베의 왕자 외디푸스는 그 운명을 벗 어나 보려고 했지만 끝내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 게 된다. 그가 테베의 왕이 되었을 때 그 나라에는 심한 역병이 돌아 수많 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러자 국민들이 외디푸스의 궁 앞에 모여들어 외디 푸스 왕에게 하소연 한다.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운 외디푸스 왕 이시여, 지난 날 스핑크스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던 것 처럼 오늘 우리 를 이 역병으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외디푸스는 왜 이런 끔찍한 역병이 도는지를 신에게 물어보았다. 신탁 (神託)에 대한 신의 대답은 이 나라에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패륜아가 있어 이런 불행이 닥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외디푸스는 그 패륜 아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꼭 그를 잡아 나라와 백성을 구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 인간 중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외디푸스는 그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고 장님인 타이레시아 스가 그 비밀을 알아내었다. 가장 지혜로운 외디푸스가 그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고 장님인 타이레시아스가 그 비밀을 알아냈다는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타이레시아스는 비록 사물은 보지 못하지만 제 3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열려 있었기에 운명의 비밀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지혜의 깨달음은 영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한국교회는 바로 이 깨달음의 영성이 부족했던 것이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도 깨달음에 대 한 말씀은 많이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태복음 6:22-23).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인생에서 내적인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주시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들 중 에서도 특히 요한복음은 이런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데 존 스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이야기와, 눈 먼 장님 이 눈을 뜨고 나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인식하고 예수를 주 님이라고 고백한 사건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그 장님의 이야기는 다름아닌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이다. 우리들은 영적 인 장님들이다. 눈을 뜨고 참다운 깨달음을 얻어야 할 장님들 이다. 만약 우리가 그 알량한 이성적인 지식을 가지고 '본다' 라고 자부한다면, 그 즉시 영적인 장님이 되고 말 것이다. 21)
사람들은 이 한 세상을 살면서 끊임없이 위기의 사건들을 겪는다. 그런 데 위기는 근본적으로는 영성적인 문제이다. 목회상담자는 위기에 처한 사 람을 도울 때에 위기의 배후에 있는 영성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위기에 처한 사람으로 하여금 사물과 사건을 보 는데 있어서 기존의 눈과는 다른 제 3의 눈 즉, 새로운 마음의 눈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안석모교수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고 있 다. "현대적 영성의 논의는 그 근본에 있어 해석학적이요, 의미창출의 사건 이며, 의미발견의 작업이기도 하다‥‥‥ 그릴다면 상담이 문제해결이라기 보다 의미발견이요, 의미추구의 작업이라고 볼 때 자연히 상담과 영성은 같 은 맥을 소유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22) 그는 이 논문에서 J씨의 사례 를 들어 영성상담(spiritual direction/spiritual guide)의 가능성을 설명 하고 있다.
J씨는 미국으로 마음에 없는 유학을 와서 적응성 장애로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그가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했을 때 정신과 의사의 1차적 관심은 J 씨의 우울과 그 우울의 원인규명 및 극복에 있었다. 그러나 J씨가 마음에 없는 유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우울증의 그 너머에는 인생에 대한 좀 더 근 본적인 문제 즉, 유학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그 무엇을 얻는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영성적인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씨가 도 움을 받아야만 하는 영역은 유학생활의 장애와 우울만이 아니라, 더 깊고 근본적인 삶의 의미와 목적에 관계된 영역도 있었던 것이다. 23)
목회상담자인 K씨는 M씨를 상담한적이 있었다. M씨의 어머니는 M씨 가 갓난아이였을 때 남편과 이혼하고 재혼하면서 M씨를 재혼한 남편의 호 적에 올려 키웠다. M씨는 중학교 때에 우연히 이 사실을 알고 한참 예민한 사춘기를 열등감과 우을 속에 보냈다. 전교에서 1,2위를 달리던 M씨는 점 점 성적이 떨어져 결국에는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과 자괴 감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나는 패배자다. 내 인생은 가치가 없어. 이 런 나를 누가 인정해 줄 것이며 또 어떤 여자가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좋아 할 것인가?' 등의 자기패배적 생각에 깊히 빠져 있었다. 상담자의 1차적 판 심사는 물론 그의 우울증과 또 그의 자기패배적인 불합리한 생각과 정서, 그리고 그에 대한 극복 등이었다. 그러나 M씨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 다. 그의 더 심각한 문제는 불합리한 사고와 정서로 인하여 생긴 인생에 레 한 비관과 허무주의였다. 이것은 분명히 영성적인 문제이다. 그의 마음 속 심층부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는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의 문제, 즉 영원과 궁극의 문제에 잇닿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영성적인 문제를 돕기 위하여 빅터 프랭클은 '의미치료' (logotherapy)를 제안했고24) 안석모 교수는 '해석학적 변화' (hermeneutical transformation), 즉 사물을 '다르게 봄'으로 해결한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런 면에서 현대목회상담의 영성추구는 동양적 선과 그 지혜의 전통에 맥이 닿는다고 했다. 25) 여기서 목회상담자는 비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런 영성적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갖게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내면의 눈이 있 다. 기독교인은 이것을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목회상담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형상인 그 내면의 눈을 뜨도록 도와야 하는 기능 이 있다.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 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아직도 마음이 둔하냐?너희는 눈이 있 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가복음 8:17-18). 마음 의 눈이 열림으로써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의 문이 열리면 진리의 세게, 본질의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예수님은 생각하셨다. 목회상담자는 이 면에 착안하여 위로부터 오는 위로와 깨달음, 그리고 그로 인한 치유를 추 구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목회의 모습은 어떨까? 미래는 여러가지 면에서 크게 달라질 것 이다. 목회자는 달라질 미래에 대비하는 어떤 목회적 비전을 가져야 할텐데 그 중에 하나가 영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오늘날도 이미 그렇지만 미 래에는 더욱 더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과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살 것이다. 미래에는 기술과 산업화와 과학이 더욱 더 발전하리라고 보는데 그러기에 영성의 문제는 더욱 더 절실하게 된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록회자가 배타 적이 아닌 열린 자세로 혼란되어 있는 영성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고, 특히 미래에 더욱 중요한 분야가 될 목회상담 분야에서 영성적인 문제를 어떻게 상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주제라고 본다. 그 구체적인 방법과 사례는 이후 목회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1) Richard p. McBrien저, 이봉우 역, 「司牧職이란?~ (왜관' 분도출판사, 1989), 118쪽.
2) 해롤드 사무엘 쿠쉬너 저, 송정희 역, 「선한 사람들에게 왜 불행이 오는가」, (서울: 중앙일보사, 1995), 117쪽.
3) 원리엄 존스턴 저, 정창영 역, 「내면의 불꽃」, (서울: 도서출판 깊이와 넓이, 1991), 28쪽에서 재인용.
4) 같은 책, 28쪽.
5) 여기서 말하는 잠재의식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잠재의식과는 다른 것으로서, 이것은 인간의식의 깊은 곳에서 유한한 존재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어떤 절대자에게 부르짖는, 또 그를 향하는 목마름 같은 것이다.
6) 십우도는 열장의 소의 그림이란 뜻인데, 여기서 소는 참다운 지혜를 의미한다. 그래서 십우도는 참다운 지혜, 혹은 진리를 깨닫는 열 단계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7) 정창영 역, 「내면의 불꽃」, 11쪽.
8) 관노순, "영성을 향하여" 「기독교사상」, 1996년 5월호,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35쪽 참고
9) 이 영성수련 방법은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선교교육원에서 발간한 「성서연구와 영성훈련」이라는 소책자 4쪽에서 인용한 것 임.
10) 유해룡, "영성형성의 모델연구", 「실천신학」, 한국실천신학회 편,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 523-533 참고
11) Mormon T. Kelsey, The Other Side of Silence: A Guide to christian Meditation, (New Jersey:Paulist Press, 1976) , p.31.
12) 같은 책, 같은 글 534-537쪽과, 4. 드멜로 저, 이미림 역, 「하느님께 나아 가는 길」,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5), 96-100쪽 참고
13)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분도출판사가 펴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의 영성」을 참고할 것.
14) 헨리 나웬 저, 이봉우 역, 「상처입은 치유자」, (왜관: 분도출판사,1993), 126쪽.
15) 하워드 클라인벨 저, 박근원 역, 「목회상담신론」,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1991), 169쪽에서 재인용.
16) 같은 책, 27-45쪽 참고
17) 같은 책, 174쪽.
18) 같은 책, 174쪽.
19) 엄두섭, 「진리의 바다」, (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1), 28쪽.
20) 하워드 클라인벨, 「목회상담신론」, 175쪽에서 재인용.
21) 월리엄 존스턴, 「내면의 불꽃」, 204쪽.
22) 안석모, "영성과 목회상담" 「한국교회를 위한 목회상담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234-235쪽.
23) 같은 책, 235-240쪽 참고
24) Logotherapy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면 「성공회대학논총」 제7호(1994년)에서 필자의 논문 '로고테라피 소고"를 참고
25) 안석모, "영성과 목회상담", 242-243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