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波多野
波多野晴通[파다야청통](하타노 하루미치) ????~????
단바 야가미성 성주.
주가였던 호소카와가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단바의 지배 기반을 확립했다.
하루모토와 미요시 조케이의 항쟁에서는 호소카와측에 가담했다.
거성 야가미성에서 농성하며 항전했으나 마쓰나가 히사히데에게 투항하여 거성에서 추방되었다.
波多野秀治[파다야수치](하타노 히데하루) 1529~1579
하타노 하루미치의 아들.
미요시가로 부터 거성 야가미성을 탈환하여 세력을 신장했다.
오다가의 아케치 미쯔히데가 공격해 왔을 때는 이것을 잘 막아 내었다.
미쯔히데가 어머니를 인질을 보내 투항을 권고해 오자 이에 응해 개성했으나,
조건과는 달리 노부나가 앞에 불려간 히데하루는 처형되었다.
일설에는 상처에 악화되어 호송중에 죽었다고도 한다.
波多野宗高[파다야종고](하타노 무네타카) ????~????
하타노가 일족.
[단바귀]라는 이명이 붙은 맹장.
맹우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오다 노부나가와 일전을 치루려 하는 것을 알고
말리러 갔으나 전투에 말려들어 전사하였다.
赤井直正[적정직정](아카이 나오마사) 1529~1578
하타노가의 가신.
단바국 오3군을 지배한 구로이시성 성주.
지모에 뛰어난 맹장으로 [단바의 붉은 귀신] 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사이었다.
1575년 노부나가의 명으로 단바를 침공한 아케치 미쯔히데군을 격퇴시켰다.
히데요시의 중국평전군에 대항하여 맞섰으나
항복을 권고하러 온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
대대로 가보로 전해져 온 진귀한 침승 초의 모피를 야스하루에세 전해주었고
야스하루는 이것을 가보로 한 일화로 유명하다.
荒木氏綱[황목씨강](아라키 우지쓰나) ????~????
하타노가의 가신.
하타노가의 필두 중신으로 소노베 성주.
아케치 미쯔히데의 단바 침공 당시에는 미쯔히데의 어머니를 인질로 맡고 개성했다.
이후 미쯔히데가 휘하로 들어 올것을 권유 했지만 아들에게 가문을 인계하고 은거했다.
靭井敎業[인정교업](모미이 노리나리) ????~1576
하타노가의 가신.
단바 모미이성 성주로 [단바의 푸른 귀신]으로 불리며 아카이 나오마사와 함께 활약했다.
히데요시의 중국 침공군에 대항하여 선전했으나 전사.
一色
一色義幸[일색의행](잇시키 요시유키) ????~????
단바의 패권을 잡은 호족.
잇시키가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야마나, 아카마쓰, 교코쿠가와 함께 [4직]의 한 가문.
단고국의 패권을 둘러싸고 와카사 다케다가와의 싸움으로 나날을 보냈다.
一色義道[일색의도](잇시키 요시미치) ????~1579
잇시키 요시유키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서 추방한 장군 요시아키를 보호했다.
그 때문에 노부나가와 대립하여 노부나가군의 공격을 받아 한번은 격퇴했으나
가신 누마타 가게요시의 내통으로 자결.
一色滿信[일색만신](잇시키 미쓰노부) ????~1582
잇시키 요시미치의 아들.
통칭 잇시키 요시사다.
아버지가 가신의 배반으로 자결하자, 단고 유미키성에 입성해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싸웠다.
아케치 미즈히데의 중재로 화해 했으나 후에 다시 배반해서 후지타카의 저택에서 모살되었다.
一色義淸[일색의청](잇시키 요시키요) ????~1582
단고 잇시키가 일족.
잇시키 요시사다의 숙부.
조카 요시사다가 모살되자 유미키성에 들어가 잇시키가의 가독을 상속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에게 성을 포위당하자 적진으로 쳐들어가 전사했다.
稻富祐秀[도부우수](이나토미 스케히데) ????~????
잇시키가의 가신.
단고 오시키성 성주.
사사키 요시쿠니에게 포술을 배운 후 자신의 창안을 부가했다고 한다.
상당히 우수한 군략가로 손자인 스케나오는 이나토미류 포술의 창시자가 되었다.
稻富祐直[도부우직](이나토미 스케나오) 1552~1611
잇시키가의 가신.
이나토미류 포술의 창시자.
주가 멸망 후에는 호소카와 타다오키를 섬기며 총포 사범이 되었다.
후에 마쓰다이라 타다요시, 도쿠가와 요시나오를 섬기며 막부 총포대를 조직했다.
山名
山名祐豊[산명우풍](야마나 스케토요) 1511~1580
다지마 수호 대명.
숙부 사네토요의 양자의 다지마 수호로 취임했다.
동생 토요사다를 이나바로 파견하여 다지마, 이나바 양국을 지배했다.
노부나가의 침공군에 투항한 후 모리가의 침공에도 투항했기 때문에
다시 노부나가의 공격을 받아 항복했다.
山名豊定[산명풍정](야마나 토요사다) 1512~1560
야마나 스케토요의 동생.
다지마 수호가 된 형 스케토요를 따라 계속되는
다지마와 야마나 양국을 통일하는데 진력했다.
그후 이나바의 수호로서 영지 경영을 담당했다.
山名豊國[산명풍국](야마나 토요쿠니) 1548~1626
야마나 토요사다의 삼남.
일족의 분쟁과 가신 다케다 다카노부의 배반으로 혼란에 빠진 가문을 수습하고
제 17대 이나바 수호의 돗토리성 성주에 올랐다.
아마고가, 모리가로 잇달아 주군을 바꾸고 마지막에는 히데요시의 산인 침공군에 투항했다.
결국은 가신들의 신망을 잃고 성에서 쫓겨나 이후에는 히데요시의 말벗 상대로 지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가하여
전후 도쿠가와 정권하에서 다지마 무라오카 야마나가의 선조가 되었다.
垣屋續成[원옥속성](가키야 쓰구나리) 1482~1570
야마나가의 가신.
야마나 유키토요가 다지마 수호가 되자 수호 대리가 되어 영지 경영의 실권을 잡았다.
야마나 사천왕의 일인으로 알려진 실력자였지만, 만년에 같은 사천왕의 한명인
다이노쇼 고레요시와 대립해, 고레요시의 기습을 당해 자결.
垣屋光成[원옥광성](가키야 미쓰나리) ????~1592
가키야 쓰구나리의 아들.
주군을 새로 옹립하고 다이노쇼 고레요시를 실각시켜 실권을 장악했다.
후에 히데요시의 산인 침공시에 미야베 케이준에게 항복한다.
이후에는 돗토리성 공략의 주력부대로 활약하여 이나바에 1만석의 영지를 받았다.
森下通與[삼하통여](모리시타 미치요) ????~1581
야마나가의 가신.
야마나가 몰락 후에는 모리가를 섬기고 깃카와 쓰네이에의 부하로서 돗토리성을 수비했다.
하시바 히데요시에 의해 돗토리성이 함락되자 쓰네이에와 더불어 자결했다.
吉岡定勝[길강정승](요시오카 사다카쓰) ????~????
야마나가의 가신.
히데요시의 산인 침공군에 대항하요 모리가 측에 가담해 쓰스라오성에서 농성했다.
선전했으나 히데요시가 군량보급로를 차단하여 병사들이 달아났기 때문에 패배했다.
南條
南條宗勝[남조종승](난조 무네카쓰) ????~1584
난조가 7대 당주. 통칭 난조 무네모토.
난조가를 중흥시킨 장본인.
호키국 동부를 다스렸으나 아마고가의 침공으로 거성 우에시성을 잃었다.
유랑한 끝에 야마나가의 협력으로 성을 탈환했다.
南條元續[남조원속](난조 모토쓰구) ????~1591
난조가 8대 당주,
아버지 무네모토 사후 가독을 계승하고 우에시성 성주가 되었다.
이후 히데요시를 섬겨 규슈정벌에 종군했다.
병에 정무를 동생 모토키요에게 맡겼으나 오다와라 정벌에는 종군했다.
재임 7년째에 병사.
尼子
尼子晴久[니자청구](아마코 하루히사) 1514~1560
이즈모 아마코가 당주.
아버지가 일찍 전사해, 조부 쓰네히사를 따라서 여러전투에서 활약했다.
1537년 쓰네히사로 부터 상속자가 되어 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이름을 따 하루히사라고 칭했다.
일족인 쿠니히사가 이끄는 신궁당의 활약으로 주코쿠 지방 8국의 수호를 맡았다.
이윽고 세력이 커진 신궁당을 꺼림직 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 아키 모리가의 모략에 빠져 신궁당을 멸해 버려 세력의 약체화를 초래했다.
그 후도 모리가를 상대로 일진일퇴의 공방을 반복하지만, 방어전 중에 갓산 도다성에서 급사.
尼子義久[니자의구](아마코 요시히사) ????~1610
아마코 하루히사의 적자.
아버지의 급사로 20세에 아마코가 당주가 된다.
이미 열세에 빠진 가문을 부흥 시킬 수는 없었고, 모리가의 압박은 거세어져 갔다.
1565년 갓산도다성에서 농성하지만, 가신 오츠카 요사에몬의 중상모략으로 많은 가신들을 잃는다.
다음해 마침내 할복을 조건으로 항복하고, 생명은 용서받아 동생들과 더불어 아키로 유폐되었다.
아마코가 재흥의 의지가 없고, 불문에 입적해 우림이라 칭하자, 용서받아 모리가의 비호를 받는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모토도모가 뒤를 이어, 이후 사사키씨로 칭하고 가문이 존속되었다.
尼子勝久[니자승구](아마코 가쓰히사) 1553~1578
아마코 마사히사의 오남.
신궁당이 당주 하루히사와 대립해 아버지가 모살되자 도호쿠사의 승려가 된다.
그러나, 아마코가가 모리가에게 멸망당하자
야마나카 유키모리(시카노스케)등에 옛 신하들에게 옹립되어 아마코가 재흥을 도모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히데요시 아래에서 이즈모 침공을 시도한다.
그런중에 노부나가에 의해 히데요시가 승진이 되어 전선이 전환되어 지원을 받지 못하자,
모리 군세에 의해 하리마 고즈키성에 고립되어 패배하자 자결.
赤穴盛淸[적혈성청](아카나 모리키요) 1529~1595
아카나 미쓰키요의 삼남.
형들의 사망으로 아버지 사후에 가독을 계승했다.
아버지의 충섬심에 감동한 주군 아마코 하루히사로 부터 영지를 늘려 받았으나
모리가의 침공군에 투항했다.
宇山久兼[우산구겸](우야마 히사카네) ????~1566
아마코가의 가신.
아마코가 필두 가로를 맡은 충신.
아키 모리가의 고리야마성 공격등에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다.
모리가의 이즈모 침공시 야마나카 유키모리, 다치하라 히사쓰나등의
진언을 무시해 패하기도 했지만, 갓산 도다성에서 농성할시에는 사재를 털어
식량을 구입해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며 아마코가를 위해 힘썼다.
그러나, 모리 모토나리의 이간책에 빠진 주군 요시히사에게 살해당했다.
龜井玆矩[구정자구](가메이 고레노리) 1557~1612
아마코가의 가신.
주가가 멸망하자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야마나카 유키모리와 함께 아키 모리가와 싸웠다.
그 뒤로는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어 돗토리성 공격 등에 활약한다.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임진왜란등 히데요시의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다.
간천, 용수로 건설등 산업진흥에도 진력하였다.
또, 무역 허가장을 얻어 태국으로 무역선을 파견하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해, 3만 8천석의 영지를 얻었다.
佐世淸宗[좌세청종](사세 기요무네) ????~????
아마코가의 가신.
아마코가에서 두번째로 많은 석고를 받았다.
각지의 전투에 종군하여 활약했으나,
갓산 도다성 함락 직전에 모리 모토나리의 이즈모 침공군에 투항하여 그의 신하가 되었다.
佐世元嘉[좌세원가](사세 모토요시) 1546~1620
아마코가의 가신.
아버지 기요무네와 함께 모토나리의 이즈모 침공군에 투항했다.
그 후는 모리가를 섬겨 국정에 참가하였으며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성에 머물러 수비를 맡았다.
立原久綱[립원구강](다치하라 히사쓰나) 1531~1613
아마코가의 가신.
아마코가가 모리가에 멸망되자 모리가에 항복하여 관직에 오른다.
조카인 야마나카 유키모리가 가쓰히사를 옹립해 부흥을 꾀하자,
오다 노부나가의 원조를 받아 모리가와 싸운다.
하리마 고즈케성 농성에는 반대하지만, 결국 농성에 참가한다.
끝내, 낙성되자 가쓰히사는 할복하고 히사쓰나는 유키모리등과 포로가된다.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잡혀 호송 중에, 유키모리의 희생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노부나가를 의지해 출가하여 주영이라 칭한다.
만년에 사위가 있는 아와로 가서 그곳에서 숨졌다.
本城常光[본성상광](혼조 쓰네미쓰) ????~1561
아마코가의 가신.
용맹함을 인정받아 이와미 오모리 은광의 요충지인 야마부키성의 수비를 떠맡았다.
침공해 온 모리군을 격퇴하여 명성을 얻지만 모토나리의 모략으로 투항한다.
이걸 계기로 아마코가의 여러 장수들이 차례차례로 투항한다.
그러나, 그후 오만한 행동이 많아, 모살 되었다.
그의 무용을 두려워 한 모토나리에 의해 모살되었다고도 한다.
山中幸盛[산중행성](야마나카 유키모리) 1544~1578
아마코가의 가신. 통칭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젊었을 때, 초승달을 향해 [나에게 세상의 모든 고난을 주게] 라고 빈것으로 유명.
1563년 아키 모리가의 침공시에 그의 가신인 시나가와 다이젠과 일기토를 벌여 승리하기도 했다.
아마코가가 멸망하자 아마코 십용사의 필두격으로서 주가 재흥을 꾀해,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아마코 가쓰히사를 옹립하여 모리가에 격렬히 저항했다.
고즈키성에 모리군에 포위된되다 히데요시의 군사가 물러났기 때문에 항복한다.
모리가의 당주가 데루모토로 바뀐것을 알고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항복하였던 거지만
이를 간파한 깃카와 모토하루에 의해 호송 도중에 살해되었다.
別所
別所就治[별소취치](벳쇼 나리하루) 1502~1563
아카마쓰가의 분가.
하리마에서 가장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하는 미키성을 거성으로 삼았다.
아마코 하루히사, 미요시 나가요시가 번번이 침공했으나 그때마다 격퇴하여
동하리마 에서 용맹을 떨쳤다.
別所安治[별소안치](벳쇼 야스하루) 1532~1570
벳쇼 나리하루의 적자.
미키성 성주. 39세로 병사.
벳쇼가는 하리마국의 명문 아카마쓰가의 분가로
아카마쓰 요리키요가 가사이군 벳쇼로 이전하여 벳쇼란 성을 칭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別所長治[별소장치](벳쇼 나가하루) 1558~1580
벳쇼 야스하루의 아들.
하리마 미키성 성주로 노부나가를 섬기기도 했지만
오다가의 중국공략 당시에는 모리가에 소속되어 히데요시와 교전했다.
포위 공격에 3년간이나 농성하며 견뎌냈지만 병사들의 구원을 조건으로 할복했다.
糟野武則[조야무칙](가스야 다케노리) ????~????
시즈가타케 칠창의 일인.
벳쇼가의 가신이었으나 후에 히데요시 밑에서 잡무를 보는 무사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하여 후시미성 공격등에 참가하였으나
패전 후 영지를 잃었다.
赤松
赤松晴政[적송청정](아카마쓰 하루마사) 1513~1565
하리마, 비젠, 미미사카 삼국 수호대 아카마쓰가 당주.
아버지가 하급 관리인 우라가미 무라무네에게 피살당하고 자신은 연금되어 실권을 빼았겼다.
수호대의 지위에 올랐지만 무라무네의 괴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지원한 무라무네가 셋츠로 출병하자,
하루마사는 그 정적인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통해 무라무네를 패사시키는데 성공했다.
하루마사는 해방되어 영지 복권에 성공했으나 권위는 이미 실추되었고,
아들 요시스케와 대립해 추방되고 만다. 이후에는 일족인 마사히데를 의지.
赤松義祐[적송의우](아카마쓰 요시스케) ????~1576
아카마쓰 하루마사의 아들.
우라가미가에 빼앗긴 실권을 되찾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와 연합을 꾀했으나,
아직 때가 일러 우라가미 무네카게의 공격을 받아 오히려 아카마쓰가는 몰락했다.
요시스케는 실의 속에서 병사했다.
赤松則房[적송칙방](아카마쓰 노리후사) ????~1598
아카마쓰 요시스케의 아들.
히데요시의 중국 침공군에 투항하여 하리마 오키시오 1만석을 받았다.
이후에는 히데요시의 신하로 시즈가타케 전투, 고마키 나카쿠테 전투, 시코쿠 정벌등에 종군.
그 공으로 아와 스미요시에 1만석의 영지를 더 받았다.
赤松政秀[적송정수](아카마쓰 마사히데) ????~1570
하리마 다쓰노성 성주.
아카마쓰가 일족으로 추방당한 본가의 하루마사를 성으로 맞아들여 보호했다.
세력을 키우고 있던 우라가마 마사무네를 암살하고 세력회복을 도모했다.
벳쇼 야스하루와 연합하여 오데라 마사모토, 구로다 모토타카와 싸웠다.
아카마쓰 종가의 세력회복에 분주했으나 급사했다. 독살되었다고 한다.
小寺政職[소사정직](오데라 마사모토) ????~????
하리마 고차쿠성 성주.
구로다 간베에가 처음 섬겼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리마의 호족들과 연합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주코쿠 원정군에 저항했으나 패배하였다.
그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黑田
黑田職隆[흑전직륭](구로다 모토타카) ????~????
하리마 히메지성 성주.
하리마의 호족 고야마 시게미치를 쓰러뜨린 공으로 오데라 마사모토를 섬기게 되었다.
마사모토의 딸을 처로 맞아들여 중신의 자리에 올랐다.
마사모토의 이름에서 한자를 따 모토타카라 칭하고
오데라라는 성을 쓰도록 허락을 받고 중용되었다.
黑田孝高[흑전효고](구로다 요시타카) 1546~1604
구로다 모토타카의 아들. 통칭 구로다 간베에.
하리마 히메지 태생으로 초기에는 오데라라는 성씨를 썼다.
주가 몰락 후에는 오다가를 섬겨 히데요시의 수하가 되었다.
다케나카 한베에 사후에는 히데요시를 보좌하며 참모로써 활약했다.
아라키 무라시게의 모반시에 사자로 셋츠 아리오카성에 파견되었지만
포로로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 때문에 다리가 부자유스러워졌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기여를 했으나,
그의 지모를 두려워 한 히데요시에 의해 부젠 나카쓰 12만석으로 영지가 삭감되었다.
그 후에는 도쿠가와가에 접근하여 가문을 전국 굴지의 가문으로 키워냈다.
黑田長政[흑전장정](구로다 나가마사) 1568~1623
구로다 요시타카의 적자.
유년기에는 오다가에서 인질로서 나가하마에서 산다.
아라키 무라시게의 모반이 일어나 설득하러 간 아버지가 억류되자
이것을 의심한 노부나가에 의해 처형의 명령이 내려졌으나,
다케나가 시게하루의 기지로 인해 구출되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해 맹 활약하여,
그 공으로 일약 지쿠젠 후쿠오카에 52만석의 영지를 받았다.
後藤基次[후등기차](고토 모토쓰구) 1560~1615
구로다가의 가신. 통칭 고토 마타베에.
벳쇼가의 가신이었으나, 주가 멸망 후 구로다 요시타카를 섬긴다.
[黑田八虎]의 한명으로 꼽히는 구로다가 최고의 무장.
구로다가의 여러 전투에 종군하여 많은 전공을 쌓았으나 구로다 나가마사와 대립하여 출분한다.
모토쓰구의 명성에 봉직을 원하는 가문이 많았으나 나가마사의 방해로 낭인으로 떠돌았다.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초청으로 오사카 성에 입성하여
사나다 유키무라와 함께 사실상의 총대장으로 활약한다.
오사카 여름전투에서 격전 끝에 총탄에 맞아 전사.
母里友信[모리우신](모리 도모노부) 1556~1615
구로다가의 가신. 통칭 모리 타헤에.
[黑田八虎]의 한 명으로 꼽히며 특히 창술에 뛰어났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호위대장으로 각지의 전투에 종군하여 활약했으며,
주군을 향해 서슴없이 직언을 하고 무력행사도 불사하는 전형적인 호걸이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큰 술잔에 따른 술을 보기 좋게 다 마셔
명창 [일본호]를 하사 받았다. 그 모습은 [구로다부시]로 남아있다.
宮本武藏[궁본무장](미야모토 무사시) 1584~1645
二刀流의 달인으로 二天一流의 시조.
사사키 고지로와의 舟島의 싸움으로 유명한 생애 무패의 검호.
오만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목욕하는 것을 싫어해
몸가짐이 좋지 않아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식객의 신분으로 호소카와 타다토시 아래에서 녹을 받기도 했다.
저서로는 [五輪書]가 있으며, 의외로 화가로도 유명하다.
浦上
浦上宗景[포상종경](우라가미 무네카게) ????~????
우라가미 무라무네의 아들.
아카마쓰가에 속한 비젠 텐진야마 성주.
무라무네의 차남으로 하리마를 다스리는 형 마사무네와 항쟁하면서 비젠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가신 우키타 나오이에 의해 비젠에서 추방되었다.
島村盛實[도촌성실](시마무라 모리자네) ????~1559
우라가미가의 가신. 통칭 시마무라 간아미.
가문 내에서 세력 독점을 도모하여 정적인 우키타 요시이에를 모살했다.
그러나 후에 요시이에의 손자인 우키타 나오이에에게 죽음을 당했다.
모반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宇喜多
宇喜多直家[우희다직가](우키타 나오이에) 1529~1581
비젠 오카야마성 성주.
비젠 수호대 우라가미가의 신하로 조부, 아버지는 우라가미 우지이에를 섬겼다.
시마무라 모리자네의 공격으로 조부가 자결하자, 아버지와 함께 비젠 후쿠오카에 은둔했다.
후에 우라가미 무네카게를 섬기면서 옛 신하를 모아 우키타가를 재흥시켰다.
그후 모략을 구사해 원수인 시마무라 모리자네, 나카야마 노부마사등을 죽이고
여러 성을 공략해 비젠, 빗츄, 미미사카로 세력을 넓혀 가문내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당주 무네카게가 오다가와 연합을 꾀하자, 모리가와 연합하여 무네카게로 부터 독립하고
1577년 무네카게를 공격하여 그를 추방하였다.
그후에는 모리가와 연합하여 침공해 온 오다가와 싸우지만
히데요시의 세상을 예견하고 오다가와 연합하여 모리가와 싸웠다.
임종시에 히데요시에게 아들 히데이에를 부탁하고 숨졌다.
친 아우인 타타이에 조차도 나오이에가 죽자
[언제나 형을 무서워 하고 있었다]다고 한 전국굴지의 모략가.
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우키타 히데이에) 1572~1655
우키타 나오이에의 적자.
어릴때 부터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토요토미가의 오대로의 한사람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히데요시를 대신해 총사령관으로 참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은혜를 갚기위해 서군으로 참전하였으나 패배.
패전 후 시마즈가에 피신하여 시마즈 요시히로의 탄원으로 죽음을 면해
하치조지마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할때 까지 50년을 섬에서 살았다.
宇喜多忠家[우희다충가](우키타 타다이에) ????~????
우키타 나오이에의 이복 동생.
형을 따라 각지에서 싸우며 형의 창업을 도왔다.
형이 사망하자 조카 히데이에의 후견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히데이에의 참모로 출전했다.
坂崎直盛[판기직성](사카자키 나오모리) ????~1616
우키타 타다이에의 아들.
우키타가의 내분 때문에 우키타가를 떠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이와미 하마다에 2만석의 영지를 받았다.
오사카 여름전투에서 센공주를 구출하여 그녀와의 혼인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죽음으로 약속이 취소되었다.
나오모리는 센공주 탈취를 도모했으나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
岡 利勝[강리승](오카 도시카쓰) ????~1592
우키타가의 가신.
우키타가 3숙로의 한 사람.
주군 나오이에의 거병을 도운 용사.
검술과 창술에 뛰어나 40여번의 전투에 출진하였다.
비젠 오카야마성의 구축, 성내의 마을 건설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출병중에 병사했다.
長船貞親[장선정친](오사후네 사다치카) ????~1588
우키타가의 가신.
우키타가 3숙로의 한 사람.
주군 나오이에의 거병을 도운 용사.
도가와 히데야스의 은퇴후, 국정을 장악했으나 매제에게 살해되었다.
長船綱直[장선강직](오사후네 쓰나나오) ????~1598
오사후네 사다치카의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후원으로 국정을 담당하여 영지내의 토지검사,
오카야마성의 구축, 성시의 정비등에 진력했다.
주군 히데이에의 총애를 믿고 전횡을 일삼아 가신들과 대립하여 독살당했다고 한다.
戶川秀安[호천수안](도가와 히데야스) 1533~1592
우키타가의 가신.
우키타 3숙로의 한 사람.
주군 나오이에의 거병을 도운 용사.
적자 미치야스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은거할 때 까지 필두 가로를 맡았다.
戶川逵安[호천규안](도가와 미치야스) 1567~1627
도가와 히데야스의 아들.
우키타가를 섬기며 임진왜란등에 종군하였다.
독실한 일련종 신자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인 오사후네 쓰나나오등과 대립하였다.
그 때문에 히데이에의 노여움을 사 가문에서 추방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낭인의 신분으로 동군 가토 요시아키의 밑에서 분전하였다.
전후 빗츄 니와세 2만9천여석을 받아 이곳의 초대 번주가 된다.
도가와 전승에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부장 시마 사콘을 베고 그의 투구를 보존했다고 전해진다.
花房正幸[화방정행](하나부사 마사유키) 1524~1605
우키타가의 가신.
주군 나오이에의 거병을 도운 용사.
궁술의 명인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호소카와 후지타카로 부터 고금화가집을 전수받은 문인이기도 했다.
花房正成[화방정성](하나부사 마사나리) 1555~1623
하나부사 마사유키의 아들.
하시바 히데요시의 중국 정벌군에 종군했을 때에는
빗츄 다카마쓰성을 수공으로 함락시킬 것을 진언했다고 한다.
후에 주군 가문의 내분에 말려들어 근신형을 받았다.
花房職秀[화방직수](하나부사 모토히데) 1549~1616
우키타가의 가신.
우키타가의 여러 전투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가극을 즐기던 히데요시를 욕하고 꾸짖었으나 오히려 칭찬을 받았다.
후에 주군 히데이에를 간언했다가 노여움을 사, 사타케가를 의지하는 처지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여하여 빗츄 다카마쓰 8천석을 얻었다.
明石全登[명석전등](아카시 데루즈미) ????~????
우키타가의 가신.
세키가하라 전투이후 녹을 잃고 떠돌았다.
오사카 성에 입성하여 천주교도 무사들을 이끌고 분전했다.
무용이 뛰어나 오사카성 전투 후 이에야스는 따로 부대를 편성해
[아카시 토벌]을 하게 할 정도로 위협을 주었다.
三村
三村家親[삼촌가친](미무라 이에치카) ????~1566
빗츄 마쓰야마성 성주.
여러 호족들을 복종시키며 빗츄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비젠, 미마사카 진출을 도모하여 우키타 나오이에의 여러 성을 공략했으나
우키타 나오이에에게 암살되었다.
三村元親[삼촌원친](미무라 모토치카) ????~1575
미무라 이에치카의 차남.
모리가와 연합하여 빗츄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우키타가에 빼앗겼던 마츠야마성이나 사이전성을 되찾지만
모리가가 아버지의 원수인 우키타가와 제휴하자 모리가를 이탈하였다.
이로 인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마츠야마성이 공략되어 자결했다.
三村親成[삼촌친성](미무라 지카나리) ????~????
미무라 이에치카의 동생.
조카 모토치카가 모리가를 떠나 노부나가와 결탁하려고 한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추방되어 모리가를 의지하게 됐다.
모토치카 토벌군을 안내해 준 공으로 쓰루쿠비성 성주가 되었다.
毛利
毛利元就[모리원취](모리 모토나리) 1497~1571
아키의 요시다 고리야마 성주.
형과 그 후사가 죽음으로써 아키 모리가 당주가 되었다.
전술, 모략, 외교등 모든 면에서 우수하였다.
나가토 오우치가와 이츠모 아마코가 사이에서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이쓰쿠시마 전투에서는 무라카미 수군의 힘을 빌려 스에 하루카타의 대군을
불과 4천의 병사로 2만의 대군을 격파하고
모략으로 두 가문을 타도하고 아키의 소영주에서 중국의 패자가 된다.
한층 더 나아가 규슈로 진출해 분고 오토모가와도 종종 싸웠다.
일족의 단결을 도모한 3화살의 교훈의 일화는 유명하다.
毛利隆元[모리륭원](모리 다카모토) 1523~1563
모리 모토나리의 장남.
유년기 스오우의 오우치에 인질로 보내졌다.
아버지 모토나리로 부터 상속자를 양보받아 아키 모리가의 당주가 된다.
특히 내정에 발군의 수완을 가졌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가문의 신망이 두터웠다.
지나친 상냥함에 모토나리가 일국을 맡기는데 불안을 가졌을 정도였다.
각지의 전투에서 활약하다 이츠모 아마코가 공략을 위해
빈고 카즈사토 성주의 초대로 식사를 한 후 갑자기 사망하였다.
독살이라는 설이 있어 상심한 모토나리는 성주를 포함한 의심스러운 가신들을 모두 처형할 정도였다.
毛利輝元[모리휘원](모리 데루모토) 1553~1625
모리 다카모토의 장남.
아버지 사후, 아키 모리가의 당주가 되었다.
어렸기 때문에 조부 모토나리, 그 사후는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양숙부가
후견인을 맡아 데루모토를 도왔지만, 그는 범용한 무장이었다고 한다.
히데요시와 강화 한 이후로는 히데요시를 따라 히데요시의 5대로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 안코쿠지 에케이에 의해 서군의 총수가 되었다.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지는 않았지만 전후 스오, 나가토의 2국으로 영지가 줄어들었다.
吉川元春[길천원춘](깃카와 모토하루) 1530~1586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
아키 깃카와가에 양자로 가지만 모토나리가 깃카와가를 토벌하자 깃카와가를 장악한다.
세상에 추녀로 알려진 아키의 유력자 구마가이 노부나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자
노부나오는 감격해 모리가를 추종하게 된다.
이후, 산인 방면 공략을 담당하였으며 생애 75번의 전투에서 64번을 이겼다고 하는 명장.
또 진중에서 [태평기] 전 40권의 사본을 만들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장수였다.
모리가가 히데요시에 항복하자 은거하고 있었지만,
규슈정벌때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출정해 전투 중 진중에서 병사했다.
吉川元長[길천원장](깃카와 모토나가) 1548~1587
깃카와 모토하루의 장남.
아버지 모토하루로 부터 양보 받아 깃카와가를 상속한다.
아버지에게 뒤 떨어 지지 않는 지용 겸비의 장수였다.
각지를 전전하며 모리가 발전을 위해 활약했다.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 종군했지만 아버지 사후 아버지를 따르듯이 병사.
吉川廣家[길천광가](깃카와 히로이에) 1561~1625
깃카와 모토하루의 삼남.
아버지를 따라 각지의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가문이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자 고바야카와 히데카네와 더불어 인질이 되엇다.
형 모토나가가 죽자 깃카와가를 상속하였다.
임진왜란에도 종군하지만 안코쿠지 에케이등과 불화가 생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주가와 함께 서군에 속했지만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주가 모리가와 도쿠가와가와의 화해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결과 이에야스가 히로이에에게 주려고 한 2국을 모리가에 주도록 신청해
모리가의 한 가문으로서 초대 이와쿠니 지방 영주가 된다.
그러나 가문에서는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小早川隆景[소조천륭경](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33~1597
모리 모토나리의 삼남.
1544년 타케하라 고바야카와가에 양자로 들어가
1550년에는 그 계승자에 해당하는 누마타 고바야카와가도 이어받아 양 고바야카와가를 정리했다.
고바야카와 수군을 중심으로 주로 시코쿠나 큐슈, 산요 방면등에서 활약했다.
형 다카모토 사후 어린 데루모토를 보좌하여 모리가를 위해 힘을 다했다.
임진왜란에도 수군을 인솔해 참전하여 귀국 후 토요토미가 5대로의 한 사람이 되었다.
히데요시로 부터 받은 영지를 모리 본가에 내어 놓으며 모리가 결속을 위해 열심이었다.
히데요시가 모리가에 히데아키를 양자로 들이려 하자
주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히데아키를 자신의 양자로 맞아들였다.
온화한 인품으로 가문의 신뢰를 받은 지용 겸비의 장수.
穗田元淸[수전원청](호이다 모토키요) 1551~1597
모리 모토나라의 사남.
빗츄 호이다가의 양자가 되어 주로 동방의 싸움에서 활약했다.
1578년 아마코가의 가신 야마나카 유키모리의 하리마 고즈키성을 함락시켰다.
1582년에는 침공해 온 히데요시군과 싸우기도 했다.
1589년 히로시마성의 공사봉행을 맡았다. 후에 모리성을 다시 쓰게 되었다.
차남 히데모토가 데루모토의 양자가 되어 모리 가문을 상속하였다.
성은 穗井田이라고도 한다.
毛利秀元[모리수원](모리 히데모토) 1579~1650
호이다 모토키요의 아들.
종형제인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가 되어 임진왜란시에는 데루모토 대신 모리가를 이끌기도 했지만
데루모토의 친 자식이 태어나자 야마구치의 성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패전 후, 나카토 쵸후성으로 옮겨 쵸후 모리가의 선조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를 후처로 맞이해 오사카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熊谷信直[웅곡신직](구마가이 노부나오) 1507~1593
모리가의 가신.
아키 다케다가의 가신으로 모리가와 적대하였지만 후에 모리가를 섬겼다.
추녀로 유명했던 딸이 깃카와 모토하루와 혼인을 하자 그에게 감복해
모토하루가 깃카와가를 상속한 후 모토하루를 따랐다.
일문으로 중용되어 깃카와군의 선봉으로 각지에서 확약했다.
熊谷元直[웅곡원직](구마가이 모토나오) 1555~1605
구마가이 노부나오의 손자.
모리가를 섬기며 시코쿠, 규슈정벌, 오다와라 정벌등에 종군했다.
구로다 간베에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귀의했으나
후에 개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족 전원이 몰살되었다.
肉戶隆家[육호륭가](시시도 다카이에) 1518~1592
모리가의 가신.
모토나리의 딸과 혼인하여 일족의 대우를 받았다.
주로 깃카와 모토하루와 행동을 같이 하여 모리가 발전을 위해 진력했다.
육자는 갓머리/六 자로 고기:육/살찔:유자로 고기:육 자와 동일어
桂 元澄[계원징](가쓰라 모토즈미) ????~1569
모리가의 가신.
이쓰쿠시마 전투에서는 모략으로 스에 하루카타를 꾀어내는 대역을 맡았다.
그 후에는 사쿠라오성 수비를 맡았다.
이쓰쿠시마 신사를 관리하기도 했다.
志道廣良[지도광량](시지 히로요시) 1467~1557
모리가의 가신. 구치바 미치요시의 형.
시지가는 모리가의 분가 사카가에서 파생한 일족.
모리가의 가독 상속문제에서는 모토나리를 지원하여 상속을 성공시켰다.
당시 거의 유례가 없는 장수를 한 인물로 주로 내정면에서 활약하였다.
모토나리의 적자인 다카모토의 양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口羽通良[구우통량](구치바 미치요시) 1513~1582
모리가의 가신.
시지 히로요시의 동생으로 형 사후 모토나리에게 중용되어
깃카와 모토하루를 보좌하여 산인 지방의 공략을 담당했다.
모토나리 사후 데루모토를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후쿠하라 사다토시와 함께
보좌한 4인의 간부중 한 사람이 되었다.
福原貞俊[복원정준](후쿠하라 사다토시) 1512~1593
모리가의 가신.
대대로 모리가를 섬겨온 중신.
성실한 인품으로 상하 신뢰가 두터워 가문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정치면에서는 모토나리와 데루모토를 보좌하고
군사면에서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보좌하여 산인, 세토내해 방면에서 활약했다.
모토나리 사후에는 데루모토를 보좌한 4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國司元相[국사원상](쿠니시 모토스케) 1493~1591
모리가의 가신.
모리 모토나리의 중신으로 신임이 두터웠으며 다카모토를 보좌했다.
요시다 전투에서는 적의 수급을 34두나 베고 다케다 노부자네를 격퇴하는등 분투하였다.
이와미 쇼우잔성 공격에서도 수훈을 세웠다.
정치면에서는 모리가 5봉행으로 발탁되어 활약했다.
兒玉就忠[아옥취충](고다마 나리타다) 1507~1562
모리가의 가신.
모리 모토나리의 가독 상속 직후부터 측근에서 활약했다.
군사면 보다는 행정 수완이 뛰어났으며 다카모토 아래에서 5봉행으로 활약했다.
모토나리는 [시야도 넓고 붙임성도 좋으며 사무에 숙달한 자]라고 평했다.
兒玉就方[아옥취방](고다마 나리카타) 1513~1586
모리가의 가신.
고다마 나리타다의 동생으로 형의 천거로 모리가의 가신이 되었다.
젊은 무렵에는 맹장으로 알려저 요시다 전투 이래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후에 다케다 수군을 인솔하여 북규슈, 산인 지방에서 활약했다.
아마코가와의 전투에서는 적의 군량수송을 방해했다.
堅田元慶[견전원경](가타다 모토요시) 1568~1622
모리가의 가신.
아와야 모토미치의 아들로 모리 데루모토로 부터 가타다란 성을 받았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요국으로 이봉되면서 미하라성 수비를 맡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데루모토의 대리로 출전했다.
杉原盛重[삼원성중](스기하라 모리시게) ????~1581
모리가의 가신.
빈고 가미노베성 성주 스기하라 마사오키 사후 가미노베성 성주가 되었다.
요시가와 모토하루를 따르고 산인방면 공략군의 선봉으로서 활약했다.
후에는 호키 이즈미야마 성주도 겸임했다.
乃美宗勝[내미종승](노미 무네카쓰) 1527~1592
모리가의 가신.
아키 누마타 고바야카와계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따라 수군을 통솔했다.
스오우의 스에 하루카타와의 아키 이츠쿠시마 전투에서는
친족인 무라카미 수군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스에군의 원군이라고 속여 스에군의 수군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상륙에 성공하여 모리가 승리에 공헌했다.
그러나 그 후, 무라카미 수군이 대두됨에 따라 쇠퇴하였다.
淸水宗治[청수종치](시미즈 무네하루) 1537~1582
모리가의 가신. 빗츄 다카마쓰 성주.
히데요시의 중국 정벌군이 공격해 왔을 때 다카마쓰성을 수비하였다.
3만의 적병에게 둘러쌓였지만 성을 지켜내었다.
그러나 원군은 오지 않고 성은 [수공]을 당한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으나 혼노지변이 일어나 강화하였고
무네하루는 성병의 구명을 조건으로 자결하였다.
市川經好[시천경호](이치카와 쓰네요시) ????~????
후지와라 깃카와가의 분가.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 모토하루가 깃카와가에 양자로 들어가는데 공을 세웠다.
오우치가 멸망 후에는 스오 다카미네성에 입성하여 야마구치의 관리로서
나가토와 스오 양국의 서무를 담당했다.
吉川經安[길천경안](깃카와 쓰네야스) ????~1574
깃카와가의 분가.
모리 모토나리에게 받은 후쿠미쓰 미나토에 모노이와즈성을 세웠다.
모리가를 이반한 후쿠야 다카카네가 성을 공격해 왔으나
쓰네야스, 쓰네이에 부자는 이를 사수했다.
吉川經家[길천경가](깃카와 쓰네이에) 1547~1581
깃카와 쓰네야스의 아들.
오다가의 침공군에 대해 야마나가의 부탁으로 돗토리성에서 농성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돗토리성 기아 작전]으로 군량 보급로가 차단되어
쓰네이에는 성병 구원을 조건으로 자결했다.
安國寺惠瓊[안국사혜경](안코쿠지 에케이) ????~1600
모리가의 가신.
아키의 호족 다케다가의 일족.
모리가와 적대했으나 후에 모리가를 섬겨 외교방면에서 주로 활약한 승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두를 예언한 것으로 알려진다.
토요토미 정권하에서 막강 권세를 누리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주모자의 한 명으로서 교토에서 참수되었다.
平賀元相[평하원상](히라가 모토스케) 1547~1645
모리가의 가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토요토미의 성을 받았다.
아키 다카야에 1만8천석을 보유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주군과 더불어 봉록을 삭감당하고 은거했다.
天野隆重[천야륭중](아마노 다카시게) 1503~1584
아키 시와호리성 성주.
오우치가를 섬겼으나 오우치가 멸망 후에는 모리가를 섬겼다.
모리 모토나리 휘하의 맹장으로 알려져 쿠마가이 노부나오와 함께 깃카와 오키타카를 멸망시켰다.
아마코가 멸망 후에는 모토나리의 5남의 보좌역으로 갓산 도다성의 성주 대리를 맡았다.
성의 탈환을 위해 공격해 온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를 격퇴하여 용맹을 떨쳤다.
內藤隆春[내등륭춘](나이토 다카하루) 1528~1600
오우치가의 가신.
오우치가를 섬겼으나 스에 하루카타가 모반을 일으키자 모리가를 섬겼다.
모리가의 오우치가 침공에서 첨병으로 활약하여 영지가 안도되었다.
친 누나가 모리 다카모토의 아내가 되어 중용되었다.
나가토 스오 양국의 치안 유지에 진력하였다.
후에 오사카로 가 본국에 중앙의 정세를 전했다.
吉見正賴[길견정뢰](요시미 마사요리) 1513~1588
이와미 쓰와노성 성주.
오우치 요시타카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오우치가에 속하였다.
스에 하루카타가 모반을 일으켰을 때는 모리가와 결탁하여 스에가 타도의 군대를 일으켰다.
이쓰쿠시마 전투 후에는 모리가를 섬겼다.
吉見廣賴[길견광뢰](요시미 히로요리) 1535~1613
요시미 마사요리의 아들.
아내가 일찍 죽고 적자 모토요리는 임진왜란 출병에서 전사했다.
후처도 사별하고 딸들마저 죽어 가정면에서 불행한 장수였다.
益田藤兼[익전등겸](마스다 후지카네) 1529~1596
이와미의 마스다성 성주.
오우치가의 가신이었으나 오우치가 멸망 후에는 모리가를 섬겨 영지 유지에 진력하였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와 일기토를 겨룬 시나가와 다이젠은 그의 부하이다.
益田元祥[익전원상](마스다 모토나가) 1558~1640
마스다 후지카네의 아들.
모리가를 섬기며 중국 평정전에서 활약하여 깃카와 모토하루의 사위가 되었다.
재정 수완이 뛰어나 주군 가문의 영지가 축소된 후에는
재정 재건에 진력하여 훌륭하게 성공시켰다.
仁保隆慰[인보륭위](니호 다카야스) ????~????
오우치가의 가신.
오우치 요시타카 밑에서 관리로 일했다.
요시타카 사후에는 요시나가를 섬겼다.
주가 멸망 후에는 모리가를 섬겨 부젠 몬시성의 수비를 맡았다.
大內
大內義長[대내의장](오우치 요시나가) ????~1557
스오우 오우치가의 마지막 당주.
분고 오토모가 일족으로 오토모 소린의 동생.
오우치 요시타카의 조카로 후사가 없던 요시타카의 양자로 들어간다.
후에 요시타카로 부터 후사가 태어나자 관계가 소원해져 결연은 백지가 된다.
요시타카 사후에 스에 하루카타에 의해 옹립되어 오우치가 32대 당주에 오른다.
그러나 스에 하루카타가 이쓰쿠시마에서 모리가에 의해 토벌당한 후에
모리가에 의해 영지가 차례차례 잠식되어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모리군의 공격을 피해 야마구치에서 나가토 카츠야마성으로 옮겼으나 가신의 배신으로 자해.
靑景隆著[청경륭저](아오가케 다카아키라) ????~1556
오우치가의 가신.
당주 요시카게 아래에서 봉행을 맡았지만
요시카게가 사가라 다케토를 중용하자, 이를 스에 하루카타에게 중상모략하여
스에 하루카타가 모반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하루카타를 따라 행동을 같이했지만 모리가와의 전투에서 전사.
陶 晴賢[도청현](스에 하루카타) 1521~1555
오우치가의 가신.
[서국 무쌍의 무사대장]이라는 평을 받은 장수로 스오우 수호대를 맡았다.
스오우 도미타 와카야마 성주로 각지의 전투에 종군하여 오우치가를 받들었다.
미남자로 알려져 한때 당주 요시타카의 시동으로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시타카가 사가라 다케토를 중용하자, 정치가 혼란스러워 지는것을 간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자 1551년 모반을 일으켜 당주 요시타카를 자결케 만들었다.
하루카타의 모반 의혹은 그 전부터 흘러 나오고 있었지만 요시타카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하루카타의 요시타카의 누이의 아들인 요시나가를 맏아들여 후사를 잇게 했다.
이와미 요시미가를 공격하고 있을 때, 아키 모리가의 공격을 받자
요시미가와 화해하고 모리가를 공격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용장 에라 후사히데를 모토나리의 책략으로 스스로 토벌한 후 에는 힘을 잃어
이쓰쿠시마에서 모리군의 기습을 당해 패배한 후 포위당하자 자결하고 만다.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 깃카와 모토하루와는 의형제 사이였다.
杉 重良[삼중량](스기 시게요시) ????~????
오우치가의 가신.
오우치 요시타카 사후, 스에 하루카타와 대립하여 아버지가 토벌당하자 모리가를 섬겼다.
모리가에서 영지가 안도되어 분고 오토모가와 싸웠다.
오토모가에 패배한 후 복종하지만 다시 배반했기 때문에 토벌당했다.
問田隆盛[문전륭성](도이타 다카모리) ????~1555
오우치가의 가신.
오우치가의 중신으로 이와미 수호대를 맡았다.
스에 하루카타가 모반을 일으키자 이에 따라 요시타카를 할복으로 몰아넣었다.
새로이 주군이 된 오우치 요시나가를 섬겼다.
그 후, 이쓰쿠시마에서 패배한 후 침공을 받자 스오우 도미타에서 자결했다.
弘中隆兼[홍중륭겸](히로나카 다카카네) ????~1555
오우치가의 가신.
오우치 요시타카 밑에서 아키 수호대를 맡았다.
스에 하루카타의 모반에 임해서는 하루카타의 오른팔로서 활약했다.
모략애 빠져 스에 하루카타의 명으로 에라 후사히데를 살해하였다.
이쓰쿠시마에서 모리가와 전투를 벌이려는 하루카타를 간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분전했으나 모리군에 포위당해 전사하였다.
다음은 사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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