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50년 12월 16일 미국 전역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모든 국민들에게 공산제국주의와 맞설 것을 촉구했다.
트루먼은 권리장전으로 보장된 만족스럽고 부유한 생활이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트루먼은 방위를 위한 무기생산에 주력할 것이며, 자유를 위해 유럽을 방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정부는 크라이슬러, 포드, GM사들의 가격인상 조치를 취소시켰다. 물가인하정책을 반대해 왔던 자동차 회사들도 정부에 지지를 약속했다. 노동조합 역시 트루먼을 도와 철도파업 노동자들을 직장에 복귀시켰다.
이같은 트루먼의 결정은 북한에서의 맥아더 군대의 패배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6주 전 한국전역이 UN군 통치하에 있어서 승리가 눈앞에 있었지만 중국군의 개입으로 UN군은 평양을 빼앗겼고, 중국군은 전력을 다해 그들의 38도선 이남으로 밀어부쳤다.
한편 우리나라 국회는 이 날 국민방위군 설치령을 통과시켰다.
측천무후 사망/705
◀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여자 황제에 오른 당나라 고종의 비 측천무후가 705년 12월 16일 사망했다. 80세였다. 본명은 무조로 산동성 문주현 출신이었다. 당나라 고종의 비로 들어와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으로 통치했다.
무후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한 시기였다. 태종은 당나라 2대 왕으로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이세민이다. 태종이 병사하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었으나 태종 생존시부터 깊은 관계를 맺어 왔던 고종에 의해 다시 궁궐로 들어와 소의 자리에 올랐고 32세인 655년에는 황후로 책봉되었다.
고종 사후에도 후임 황제를 자주 바꿀 정도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소정방을 통해 백제를 멸망시킨 것도 측천무후였다. 마침내 690년 65세로 꿈에 그리던 황제 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로 변경하고 천수라는 연호를 쓴 이래 16년간 여제(女帝)로 군림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개최/1945
1945년 12월 16~25일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 문제 처리를 위해 모스크바에 모였다. 한반도에 먼저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4대 강국(미국·영국·소련·중국)이 최고 5년간 신탁통치 또는 후견을 한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의안은 한반도 특히 미군정의 직접 통치하에 있던 남한을 크게 뒤흔들었다. 처음에는 좌우익 모두 신탁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곧 현실론과 당위론으로 갈라졌다. 좌익 세력이 찬탁으로 돌아선 반면, 임시정부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은 줄기차게 반탁의 목소리를 높였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의 파고가 높아질수록 좌우 대립도 깊어만 갔다. 이러한 좌우익의 대립에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통일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3상회의의 결정 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보스턴 차 사건/1773
◀ 17세기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1773년 12월 16일 인디언으로 변장한 보스턴 주민들이 항구에 정박 중인 영국 동인도회사 소유의 배에서 1만 파운드 상당의 차를 바다에 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식민지 주민들이 차에 부과된 과도한 세금과 동인도회사의 차 판매 독점에 반발하여 일으킨 것이다. 1767년 영국은 식민지 의회를 일시 정지시키고 식민지에 추가세금을 엄격하게 부과함으로써 영국 본국이 식민지에 대해 전통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일 목적으로 타운센드 법안을 제정했다. 그러나 곧 식민지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 영국 정부는 1770년 차세를 제외하고 타운센드 법이 부과한 모든 관세를 폐지했다. 그러자 보스턴의 상인들은 네덜란드 밀수업자들을 통해 차를 공급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재정난에 빠진 동인도회사를 돕기 위하여 1773년 영국 의회는 차조례의 시행규칙을 조정했다. 이 시행규칙은 동인도회사에 식민지로 수출되는 모든 차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하고 수출세를 면제해 주는 등의 특혜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영국의 식민지정책은 보수적인 식민지의 상인들과 영국에 강력히 저항할 것을 주장하는 급진파와의 연합을 야기하였고 결국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다.
출생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년 12월 16일 태어남 / 1944년 12월 13일 죽음
"색(色)은 건반이고 눈은 화음이며 영혼은 여러 줄의 현을 가진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연주하는 손’으로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 영혼의 떨림을 일으킨다."
- 바실리 칸딘스키
칸딘스키는 순수 추상미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화가이자 미술이론가이다. 모스크바대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교수로 재직하던 중 화가가 되기 위해 법률가의 길을 접었다. 1896년 뮌헨으로 이주하여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1910년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라 불리는 <무제>를 발표했고 그 이듬해에는 독일 화가인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파'라는 추상미술가 집단을 조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돌아가 교육활동과 예술집단을 조직하는 데 전념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독일로 돌아와 1922년 건축·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에 합류했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형태는 유연하고 유기적인 것에서 기하학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잔잔한 열정 Tempered Elan>과 같이 상형문자와 비슷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부흐너/Hans Buchner
1850. 12. 16 독일 뮌헨~1902. 4. 5 뮌헨.
독일의 세균학자.
면역학 연구 도중 혈액에서 선천적으로 생성되는 알렉신이라고 하는 살균제를 발견했다(1886~90). 또한 γ-글로불린 연구의 선구자로서 혐기성 세균을 연구하는 방법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에두아르트 부흐너와 형제간이며 뮌헨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의학사, 1874)에서 공부했다. 1870년대 바이에른 군대에서 내과의로 복무한 후, 1880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뮌헨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894년 위생학연구소의 위생학교수 겸 소장이 되었다. 그는 〈결핵의 병인학적 치료와 예방 Atiologische Therapie und Prophylaxis der Tuberkulose〉(1883)과 1892년 면역학에 대한 1권의 책을 저술했다.
베르크만/Ernst (Gustav Benjamin) von Bergmann
1836. 12. 16 라트비아 리가~1907. 3. 25 독일 비스바덴.
독일의 외과의사.
두개수술(頭蓋手術)에 관한 고전적인 저술 〈뇌 질환의 외과적 치료 Die Chirurgische Behandlung der Hirnkrankheiten〉(1888)의 저자이다. 베르크만은 도르파트대학에서 공부했고, 나중에 그곳에서 1871~78년에 외과교수로 재직했다.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1882년까지 강의했으며, 뒤에 베를린대학교에 정착했다. 두개수술에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기구 소독과 상처치료에 증기살균법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며(1886), 1891년에는 외과시술에 무균법(無菌法)을 도입했다.
1864년 8월 5일에 혜성(근일점을 2번째로 지난 혜성 1864 Ⅱ)의 스펙트럼을 최초로 관측했다. 이 관측으로 혜성의 꼬리가 태양빛의 반사만으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내는 기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1854~64년에 6개의 혜성을 발견했으며 그 가운데 1858년 6월 2일에 발견한 혜성에 그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이러한 발견으로 그는 1864년 피렌체대학교의 천문학 교수와 그곳 천문대 대장이 되었다. 또한 초기에 항성 스펙트럼의 분류법에도 기여했다. 도나티는 피렌체 근처의 아르체트리에서 천문대 신축공사를 감독하다가 사망했다.
리터/Johann Wilhelm Ritter
1776. 12. 16 슐레지엔 하이나우 근처 사미츠~1810. 1. 23 뮌헨.
독일의 물리학자.
스펙트럼에서 자외선 영역을 발견해 인간의 시야를 가시광선 밖으로 넓혔다. 1791년부터 4년 동안 슐레지엔의 리그니츠에서 약제사로 일했고, 예나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가르쳤다. 그뒤 작센 고타 공작의 후원을 받았다. 1800년 영국의 화학자 윌리엄 니콜슨이 물을 수소와 산소로 전기분해하는 방법을 발견한 지 몇 달 뒤에 리터도 똑같은 실험을 했는데, 수소와 산소를 따로 모을 수 있도록 전극을 배열해서 실험을 했다. 곧이어 전기도금법을 발견했다. 1801년 빛을 쪼이면 분해되는 염화은(AgCl)이 보라색 스펙트럼 바깥쪽의 보이지 않는 빛에 노출되면 더 빠르게 분해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주로 전기와 전기화학을 연구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1801년 열전류를 관찰했고 후에 토마스 요한 제베크가 발견한 열전기를 예견했다.
일상 속의 평범한 사람들을 다룸으로써 현대적 성격을 지닌 소설을 최초로 썼다. 〈분별과 다감(多感) Sense and Sensibility〉(1811)·〈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1813)·〈맨스필드 공원 Mansfield Park〉(1814)·〈에마 Emma〉(1815)·〈노생거 수도원 Northanger Abbey〉(1817, 사후 출판)·〈설득 Persuasion〉(1817) 등의 소설에서 당시 영국 중산층의 풍속희극을 창조해냈다.
제인 오스틴은 아버지 조지 오스틴 목사의 교구인 햄프셔의 스티븐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들 6명과 딸 2명 중 7번째이자 둘째 딸인 그녀는 언니 캐산드라와 가장 친했는데, 두 자매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정규교육은 1782년경 언니와 함께 옥스퍼드에 가서 콜리 부인이라는 사람에게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1783~84년경에 레딩의 애비 스쿨로 옮겨가 1787년경까지 다녔으며, 그뒤에는 계속 집에서 교육받았다. 아버지는 성직자가 되기 전에 옥스퍼드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펠로가 되었으며, 자식들이 학문을 사랑하도록 장려했다. 어머니 캐산드라(결혼 전 姓은 리)는 재치있는 여성으로, 시와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지어내는 재주로 유명했다. 이 대가족이 즐긴 오락은 연극이었다. 오스틴 일가와 그 이웃들은 스티븐턴 극단을 만들어, 여름휴가 때는 목사관 헛간을 소극장으로 개조해 연극을 공연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집에서 공연했다.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1485. 12. 16 스페인 알칼라데에나레스~1536. 1. 7 잉글랜드 헌팅던 킴볼턴
잉글랜드 왕 헨리 8세(1509~47 재위)의 첫번째 왕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무효를 승인하지 않음에 따라 헨리 8세와 교황청의 관계가 단절되고 잉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의 공동통치자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501년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첫째 아들인 아서 공과 결혼했다. 이듬해 아서 공이 사망하자 곧 헨리 7세의 둘째 아들 헨리 공과 약혼했다. 한편 곧이어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서로 대립하면서 페르난도 2세가 결혼지참금의 완전한 지불을 거절함에 따라 헨리 공과 캐서린의 결혼이 성사되지 못했으며 1509년 헨리 공이 헨리 8세로 왕위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의 결혼이 성립했다. 몇 해 동안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몇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딸 메리(메리 1세)만 남고 모두 요절하였다. 헌신적으로 남편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는 것이 원인이 되어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1531년 이후 별거 당하였다. 1534년 헨리가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이혼하고 시녀 앤 불린과 재혼(영국종교개혁의 계기)한 후에도 여러 차례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합법적인 왕비임을 주장하였다.
* 헨리 8세
◀ 헨리 8세
영국 역사에 가장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긴 인물은 바로 '헨리 8세'이다. 긴 영국사에서 헨리 8세만큼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도 없었거니와 영국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었으며, 6명의 아내 중에서 2명을 사형에 처하는 등 영국 역사에 숱한 뒷이야기를 남긴 헨리 8세는 어떤 사람인가?
1509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18살의 청년으로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스포츠맨이었다. 그의 첫 아내는 이미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였던 에스파냐 왕의 딸 '캐서린공주'였다. 이 결혼은 그가 원해서 된 게 아니라 순전해 정치적 이유(에스파냐의 덕을 보기위한) 때문에 신하들의 권유로 결혼하여 '메리'라는 딸을 낳았는데 '메리'는 나중에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을 사형에 처해 '피의 메리'라 불리는 여왕이 된다. 어쨌던 사랑없는 결혼은 오래 못가고 헨리 8세는 까만 눈동자의 시녀 '앤 불린'을 사랑하게 된다. 이래서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서 캐서린과 이혼을 했어야 했는데 이혼신청은 로마 교황의 권한아래 있었고 로마 교황은 에스파냐의 압력 때문에 이혼을 거절했다. 독실한 카토릭 신자였던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이혼의 사유 - 아들을 못 낳는다)과 엔 볼레인과의 결혼을 성공시키기 위해 로마 카톨릭과 단절을 선언하고 영국의 성공회를 탄생시키니 나중에 이 두 종교로 인한 피비린내나는 투쟁이 시작된다. 성공회로 종교를 바꾸지 않는 사람을 처형하는 등 나라는 갑자기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고, 앤 볼레인과의 결혼에 성공하였으나 앤 볼레인을 통해 딸하나와 죽어서 태어난 아들 까닭에 앤은 왕비의 책임을 못다했다는 죄로 목이 잘리고 말았다. 비극의 왕비 '앤 볼레인'의 딸, 이가 곧 엘리자베스 공주로 뒷날 세계 제1의 바다의 왕자 영국 함대의 바탕을 이룩한 '엘리자베스 1세'가 된다!
앤 왕비를 사형시키고 며칠후 헨리8세는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머'와 결혼, 드디어 왕자를 낳았으나 며칠만에 왕자가 죽고 얼마안가서 왕비 '제인 시머'도 죽는다. 그리고 헨리 8세는 도이칠란트와의 친선을 위해 무뚝뚝한 도이치 여자인 앤 공주를 왕비로 맞았으나 금방 이혼을 해버리고 다섯 번째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이 결혼도 왕비 캐서린 하워즈의 외도 때문에 앤 볼레인과 마찬가지로 목이 잘렸고 여섯 번째로 '캐서린 파아'와 결혼하였다.
헨리 8세의 여섯 아내
여섯 명의 아내, 그 가운데 두 아내의 목을 자른 헨리 8세, 영국의 종교까지도 앤과의 사랑을 위해 바꿔 버린 헨리 8세, 공포의 전제 군주였으며 지금도 영국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인물, 그의 통치는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피의 통치(카톨릭의 탄압과 화형)였다. 헨리 8세는 6명의 아내로부터 딸 둘과 아들하나를 얻었으나 아들 에드워드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허약한 체질로 6년만에 병으로 죽고 맏딸 ‘메리’에게로 왕관이 돌아갔다. '메리'는 억울하게 이혼 당한 어머니(캐서린, 에스파냐, 철저한 카톨릭)의 운명을 옆에서 함께 겪어야 했고, 아버지 헨리 8세의 무관심 속에 에스파냐 유모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다. 헨리 8세는 국교를 카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꾸었고, 메리 여왕은 다시 카톨릭으로 국교를 바꾸었으며 스페인 황태자와 결혼하니 나라안은 크게 시끄러웠고(성공회의 반발) 드디어 반란과 폭동이 일어나자 메리 여왕은 무자비하게 반란한 사람들을 사형에 처했다. 당시 신교인 '청교도'들의 세력도 무시 못할 정도로 왕성했었는데 1555년부터 1558년까지 3년동안 성공회, 청교도에 대한 메리 여왕의 무자비한 탄압이 계속되었었다. 수 만 명의 신교도가 화형장에서 죽고 화형장의 불길은 하루도 꺼지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탄압이었으므로 메리는 나중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그녀도 죽었는데 정신병 환자가 되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외로운 침대에서 155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앤 불린 [Anne Boleyn, 1507 ? ~ 1536.5.19]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어린 시절의 3년간을 프랑스에서 보낸 뒤 15세 때 귀국, 얼마 뒤 궁정으로 들어가 왕비 캐서린의 시녀가 되었다. 헨리는 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여 왕가가 단절될 것을 염려하여 이혼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때 마침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검게 빛나는 아름다운 눈 이외에는 별로 보잘것없는 여자였으나, 헨리는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교황에게 캐서린과의 결혼무효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교황이 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왕과 교황이 대립하여 영국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1533년 1월 25일 헨리는 그녀와 비밀결혼을 하였고, 부활절에 이 사실을 공포하였다. 9월 공주(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으며, 1534년 아이를 유산하고 1536년 1월 왕자를 사산하였다. 왕자를 열망한 헨리에 의해 간통과 근친상간 오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그 밖에....
1997년 위안부 참상 첫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별세
1996년 서울고법 형사1부, 12.12및 5.18사건 항소심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무기징역,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징역 17년을 각각 선고
첫댓글전후처리에서 미.영.소가 모여 우리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 우리나라가 전범도 아닌데,,, 반으로 동강나고..이래저래..식민지는 서러워요.^^.핸리 8세...가장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긴 '왕'답게 한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네요..엘리자베스 1세..조용히 자라다가 세계 제1의 바다의 왕자 영국 함대의 바탕을 이룩한 분.. ^^
첫댓글 전후처리에서 미.영.소가 모여 우리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 우리나라가 전범도 아닌데,,, 반으로 동강나고..이래저래..식민지는 서러워요.^^.핸리 8세...가장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긴 '왕'답게 한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네요..엘리자베스 1세..조용히 자라다가 세계 제1의 바다의 왕자 영국 함대의 바탕을 이룩한 분.. ^^
불과 9년후 같은 날에 법정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는 대통령 당선 소식.... 참 불쌍한(?) 우리 현실이지요...
맞습니다, 맞고요~~^^ 정말 안타깝고 아픈 우리의 현실이예요ㅛ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