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슬픈 생각
-임맹진-
눈이 내린다. 서재 창 넘어 하염없이 내리는 귀여운 눈을 바라보니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는 것처럼 평화로운 마음이다. 창밖에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고 좋아라 뛰논 모습을 바라볼 때, 나의 옛 생각이 떠오른다.
어릴 적 깊은 산골에서 살았다. 저 멀리 어마어마하게 큰 내장산을 마주하고 있는 같은 크기의 고당산이 있다. 중턱에 하늘아래 첫 동네 운두리 마을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탯자리다. 유달리 눈이 많이 오는 곳이다. 겨울에 눈이 오면 젊은이들은 산에 노루 토끼나 꿩을 잡으러간다. 노루는 사람들이 서로협력이 잘되어야 한다. 함께 뛰어 다녀야 하기 때문에 지치고 힘들다. 주로 토끼와 꿩을 잡는다. 토끼는 올무로, 꿩은 독극물이든 콩으로 잡는다. 산짐승들을 사냥하려면 우선 눈이 많이 내려야한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 마을로 내려오기 때문에 그때를 노린다. 며칠 동안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은 그치고 온천지가 하얀색으로 물든 화창하게 갠 어느 날이다. 꿩 잡기 딱 좋은 날씨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냥에 필요한 도구들을 들고 길을 나섰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밟으며 가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2킬로미터 정도는 가야 한다. 유인하기 좋은 곳은 계곡물이 흐르는 양지바른 곳이 좋다. 독극물이 위에 들어가면 속이 타들어가 물을 마시러 오기 때문이다. 물과 함께 들어간 독이 빠르게 몸속에 퍼져 빨리 죽는다. 꽤나 넓은 양지바른 언덕 밭에 눈을 치운다. 독극물이든 콩을 많은 콩깍지부스러기와 검불에 뒤섞여 여기저기 뿌려놓았다. 사냥할 때 재미있는 것은 내려와 먹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일이다. 계곡건너 따뜻한 자리에 진을 치고 날라 오는 것을 바라본다. 오는 동안은 지루하니까 장기를 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한사람이 흥분된 낮은 목소리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신호를 보낸다. 한 마리가 날아왔다. 첫사랑 애인 만난 것만큼이나 반갑다. 장기 두는 것을 팽개치고 모두 숨죽이고 엎드려 바라본다. 조금 지나니 대여섯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온다. 장끼와 까투리가 뒤섞여 위아래로 열심히 다니면서 쪼아 먹고 있다. 배가 고파 던 모양이다. 긴장이 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행복한 순간에 빠진다. 꿩들이 한참을 돌아다니다 물가로 간다. 목이타서 물을 마시러 가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한 번 더 큰 희열의 흥분에 빠진다. 물가로 내려간 꿩들은 아무움직임이 없다. 지금 바로 가면 안 된다. 죽어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완전히 숨이 끊어질 때까지 더 기다려야한다. 죽었다고 기쁜 마음에 쫓아가서 다 날려 보낸 버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고 현장에 와서 여기저기 줍는다. 금덩이 줍는 것처럼 기쁘다. 똑같이 서로 분배하고 집으로 돌아 올 때는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 하다. 꿩이나 토끼를 잡는 날에는 동네잔치가 벌어진다. 깡 시골에서는 이때가 단백질을 섭취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운두리 마을이 마음이 하나로 되는 따뜻한 하루이기도 하다. 말은 못하지만 꿩도 살고자 하는 하나의 생명체이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죽어가는 생명을 보고 좋아했다. 아무 생각 없이 보통 그랬다. 지나 생각해 보니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월이 흘러 뒤늦게나마 깊이 성찰한다. 철모르고 그때한 잔인한 행동에 대해 깊이자책하고 용서를 구한다.
중학교 다닐 때 일이다. 칼바람 싸락눈이 휘몰아치는 겨울 어느 날이다. 학교공부를 마치고 정읍 읍내 시장 모퉁이를 막 지나가는데 전봇대 밑에 우리 동네 아줌마가 서있다. 고창 댁이다. 자전거에서 내려 반갑게 인사했다.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상기된 얼굴로 어딘가를 계속 주시하고 있다. 순간 나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그 집 딸 순난이가 아닌가! 순난이는 눈을 맞으며 오른손에 찐빵하나를 들고 엄마를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큰 건물 뒤에는 사랑의 집이라는 대형 간판이 보인다. 그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자전거에 올랐다. 자전거를 타고 오면서 많은 생각에 의문이 풀렸다. 순난이는 우리 집 개울건너에 사는 대여섯 살 먹은 여아다. 그 집은 늘 시끄러웠다. 알고 보니 순난이 는 아빠가 바람을 피워 데려온 자식이었다. 함께 살고 있던 본처아이들의 따돌림이 심했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면 남루한 옷에 얼굴이 검붉게 멍들어 있었고 늘 울고 다녔다. 그것을 바라볼 때 순난이가 너무 불쌍해 보였다. 동네 사람들도 그 아이 때문에 모두들 순난이 아빠를 욕하며 수군댄다. 오늘 읍내에서 보고 의아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랑의집 고아원건물 앞에 버린 것이다. 누가 행여 데려가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새엄마는 혼자 울고 있는 순난 이를 바라 볼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도 해본다. 고창댁은 동네에서 인색하고 표독스럽기로 소문난 여인이다. 칼바람에 눈을 맞으며 한손에 빵 하나를 들고 울부짖는 그 아이의 모습이 눈 내리는 날이면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린 시절 겨울에 눈썰매 얼음지치기, 설빔으로 어른들께 세배 다니고, 지금은 생각조차하기 싫지만 그때 꿩 토끼 잡으면 좋아라했던 친구 상기와 길준이...... 칼바람 눈보라치는 거리에서 손에 빵 하나를 들고 울부짖는 순난이...... 눈 내리는 날이면 이들이 생각난다. 흘러간 세월 속에 같은 하늘아래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날의 아련한 추억의 강 속에서 꿈을 꾸듯이 향수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