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그래스루티 http://www.grassrooti.net/ 의 '안산역사 산책'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일제강점기 ‘독립만세’ 외쳤던 수암 ‘삼일로’ |
대지주 주도의 대규모 만세시위…지난해에야 삼일정신 되찾아 |
1914년 안산군의 맥이 끊어졌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9개 면(面)을 관할하던 안산군은 3개면씩 합하여 수암면·군자면· 반월면으로 묶은 뒤 2개면(수암, 군자)은 시흥군으로 1개면(반월)은 수원군으로 편입되었다. 일제는 새로운 면제(面制) 시행으로 모든 사무의 주체를 면 단위로 삼아 종래 마을에서 경영 하던 사업은 면에 귀속시켰고, 이장은 무급의 명예직인 구장(區長)으로 바꾸었다. 식민통치를 하면서 무단농정, 중과세, 부역징발, 토지수탈, 소작료 인상, 고리대 수탈, 각종 농민적 권리의 부정 등은 조선농민들을 비참한 처지로 내몰았다. 따라서 반일의식은 고조되었고 농민들은 이러한 비참한 처지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독립뿐이라고 생각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나서게 되었다. 1919년 서울에서 봉기한 삼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안산지역에서도 3월 말부터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9일 선부리 지역에서 시위가 전개된 것을 시작으로 3월 30일 수암 비석거리 시위, 4월 1일 반월장터 시위, 4월 4일 군자면사무소 시위 등에 연 인원 4천여 명이 참여하였고 안산지역 시위는 거사 직전에 발각된 것을 포함하여 모두 7차례나 된다.
수암 비석거리, 주민 8천여명 중 2천여명 참가한 대규모 만세시위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수암 비석거리 만세시위이다. 수암 비석거리 만세시위는 첫째, 2천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의 시위였다는 것과 둘째, 주도인물들의 계층이 특별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옛 안산치소(安山治所)로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 보통학교, 향교 등이 집중되어 있는 비석거리[碑立洞]에 18개 리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1916년 현재 수암면의 인구는 1,592호 8,120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남자가 4,112명이었다. 2천여 명의 군중이라는 기록 숫자는 남자인구 가운데 노인과 아동들을 제외하고 수암면 주민이 거의 다 참석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참여인원이 또한 2천여 명 이라는 사실은 일본경찰 기록에 보이는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경찰 추산과 시위주도층이 주장하는 것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 더 많았을 것으로 온 동네 사람이 모두 모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부분의 지방의 만세시위는 서울 삼일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한 학생들과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 단체가 핵심 역할을 하고 이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순식간에 전 민족운동으로 파급되었다. 그러나 비석거리 만세시위는 주도층은 지역 대상인(大商人), 대지주(大地主), 대한제국 장교(將校)출신 등으로 지역의 유지들이며 중산층 이상의 재력가이고 연령도 4~50대 중장년층이다. 이들은 당시 친일의 유혹 대상층이었으며 독립만세시위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면 개인의 재산이나 지위는 그대로 지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와리(현 와동)지역의 대지주였던 홍순칠은 “나는 원래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사람인데 독립을 기도하려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시위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소작인들에게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지가 되니, 이 때 만세를 부르는 것이 득책이다”고 권유하였다고 한다. 홍순칠은 거사 당일에도 만세시위 현장에서 소작인들의 참석여부를 조사하였다. 홍순칠은 봉건적 토지 소유 관계를 청산하고 토지분배의 실현이라는 농민적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의식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조선총독부 식민지 통치의 최말단 전달자인 마을의 구장(區長;이장)이 30~40 명씩의 동리주민을 직접 인솔하거나 통문을 돌려 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는 지방말단 행정을 면(面)으로 일원화하여 식민지 경영을 손쉽게 하고자 하였으나 면리제(面里制)의 전통 하에서 마을단위 공동체의 대표자로서 말단 실무를 관장하거나 마을의 여론을 조절하는 역할을 해왔던 이장들은 바뀐 식민지 행정체제에서의 구장역할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일제에 반하는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시위를 주도할 별도의 조직체가 구성되어 있지 않은 단계에서 사전통고를 할 수 있는 것은 주민 간 두터운 연대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수암 비석거리 만세시위는 비록 단발(單發)로 그쳤지만 사전준비는 철저하게 이뤄진 시위였다. 위와 같이 수암 비석거리 만세시위는 같은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일어났던 삼일운동과 차이를 보인다.
뒤늦게 ‘삼일정신’ 되찾은 수암 비석거리, 하지만…
오늘날 되돌아보면 우리는 안산 삼일운동의 정신을 잊은 듯하여 안타깝다. 삼일운동 당시 주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하며 걸어갔던 길을 1992년에 ‘삼일로’라 이름하고 그 곳의 수암초등학교는 ‘삼일초등학교’로 고치고 기념식을 행한 이후 이제껏 공식적인 기념식을 한 번도 치르지 않았다. 전국 곳곳에 세워진 삼일운동 기념비도 안산시에는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지난해 8월 조그만 기념비 하나를 비석거리에 세웠고, 올해는 안산시 주관으로 기념식을 개최하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라와 마을을 살리려는 마음에서 자기의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몸소 ‘독립만세’ 시위에 앞장섰던 안산지역 애국지사들의 묘소 앞에서 편한 마음으로 참배할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