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처 등극 실패기
일요일이다. 아들 셋을 점심에 초대한 날이다. 명동 칼국수를 먹이려고 오라고들 했다.
아들 모두가 칼국수킬러이다. 바지락, 애호박 느타리버섯에 동봉된 액상스프를 넣고 끓이면 맛이 좋다.
삼겹살로 수육을 만들고, 겉절이하고, 동태전, 호박전 부쳐서 상을 차리려고 했더니
‘포천 이동갈비 주문해 보내드리니 그거 구워 먹어요. 우리...’ 큰애가 문자를 보냈다.
12시 반 점심을 먹게 하려면 아침부터 바쁘다. 우선 애들 아버지에게 조반을 실하게 드시게 해야 한다.
이 양반은 아들들이 와도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원래 아침을 침대에서 먹고
그 자리에서 정오를 지나 1시 넘어야 겨우 눈을 뜨는 사람이다. 쟁반에 노인양반 밥상부터 준비했다.
거짓말 하나도 안보태고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자란 사형제다. 자랄 때부터 동생들을 끔찍히 사랑하던 큰애이고
동생들은 큰형의 말은 어명처럼 따랐다. 어린시절에는 강아지처럼 엉켜서 놀았고
커서는 네 녀석이 야구, 축구, 바둑, 장기 카드 놀이등 참으로 재미있게 지냈다. 정말 재미있게 지냈다.
"너희들이 이담에 커서 각자 가정을 가진대도 이 충신동시절처럼 재미있지는 않을 거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대견해 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큰애가 자주 온 식구에게 갈비를 사주었다.
그러다가 거리두기가 시작되고 확산세가 심해져서 외식을 할 수 없게 되자
내가 내 집에서라도 형제들을 만나게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밥을 하게 되었다.
양념고기를 늘 저희들이 장만하고 팬에 굽는 것도 둘째나 막내가 맡았다.
그리고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도 어찌 그리 회포들을 푸는지 나는 맘껏 행복해 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온 것을 잠결에라도 알았으련만 자는 건지, 자는 척인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도, 병들지 않은 시절에도. 아버지라는 내 남편은 늘 그랬다. 애들하고 휩싸이지 않았다.
애들뿐만이 아니다. 자기형제들하고도 어울리지 못했다. 늘 저만치 한구석에 떨어져 있었다.
누구하고 대화하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기에 내 가슴에서는 주야로 찬바람이 불었고
행복한 여인이기를 애 저녁에 포기한 체 살았다.
그 남자는 나름의 아내 사랑, 자식 사랑이 있기는 했다.
죽자고 아껴서 몽땅 주머니 털어 아내에게 주는 돈이다
통근버스를 놓치면 걸어서 출근했고 식권이 아니면 굶으면서까지 돈을 아껴서 아내에게 주었다.
나는 넉넉한 주머니로 금쪽같은 아이들에게 마음껏 해주는 "자식들과 찰떡궁합"의 행복한 엄마였다.
이 부분은 남편이요 아버지인 그 남자가 우리모자에게 해준 큰 선물임을 안다.
85살, 몸도 정신도 잃으면서 나는 이 큰 선물의 가치와 고마움을 앓는 이에게 7년째 보답하고 있는 거다.
아들들이 갈비를 맛있게도 먹는다. 칼국수 맛있네요? 겉절이도 바닥이 난다.
막내는 어리굴젓 한 탕기를 비운다. "맛있어요" 아무리 가지 수가 적다해도 내 혼자 손에는 버거운 점심상이다.
설거지거리를 그대로 쌓 놓고 과일을 벗기고 있는데 남편이 나온다.
"아이고, 아버지 나오세요!" 애들이 일어나 반기고 나도 반갑게 알은 채 했다.
덤덤히 바라보더니 다시 침대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입고 자던 수면 바지에 양말도 안 신고 가을양복 웃옷을 걸치고 막내에게로 온다.
"동숭동에 짐 가질러 가야겠다."
아버지의 발 노릇은 막내가 늘 하고 있다. 사태를 짐작한 내가 얼른 양말을 신기고
막내는 "추워요"하면서 겨울옷을 입혀 드렸다.
잠만 자고나면 자기가 미혼시절 살았던 동숭동 집을 찾아나서는 아버지인 것을 아들이 안다.
"가요, 아버지".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다른 아들들이 내 어깨를 한번씩 어루만지며
“어머니 저희들도 갈께요” 하면서 서둘러 떠났다.
나는 소중한 시간을 잃은 것이 너무 아쉬워서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 그릇 앞에 섰다.
내가 제일 즐기는 것, 좋아하는 것, 식후의 아이들과의 차 마시는 시간.
큰애의 박학다식, 둘째의 냉철한 식견, 서로의 생각의 차이로 벌이는 논쟁. 감탄하면서 경청하는 막내.
이 황훌한 시간들을 놓친 게 무한 섭섭했지만 마침 막내가 있었기에
이 추운 날씨에 노인이 거리에 나서지 않아도 된 것을 감사히 여기며 그릇들을 씻었다.
오후 3시경 막내가 아버지를 무시고 왔다. ‘동숭동을 다섯 바퀴 돌았어요.’ 한다.
옛날 그 집이 있을 리 없다. 그 자리에 건물이 들어선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주위를 뱅뱅 돌며 뜰이 넓었던 집을 찾아 헤매다 매번 돌아오는 것이다.
“어머니 커피 드셨어요?" 자기하고 차 마시는 것을 즐기는 막내가 물었다,
엄마를 위로하고 싶은 것이다. "응, 혼자 마셨어. 걱정말고 돌아가. 고맙다" 아들을 보냈다.
그리고 노인의 점심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점심을 든 양반이 다시 침대로 올라간다. 나는 설거지를 마져 끝내고 따뜻한 침대에 누웠다.
전 날, 토요일부터 일을 많이 했다. 하루 종일 일을 했다. 오늘도 7시에 일어나 4시까지 일을 한 것이다.
여든일곱 살의 나이이다. 쉬어야한다. 잠이 들었나 보다.
잠결에 부수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눈을 떠 보니 노인양반이 일어나, 옷을 입으려고 한다.
"왜요?"
"아무래도 다시 가야겠어. 막내는 도무지 짐 둔 것을 가지고 나오려고 안 해. 내가 가져와야겠어.
막내는 억지로 운전을 해줄 뿐이야. 내가 가야돼. 나는 어디 있는지 알어"
"내일 날 밝으면 갑시다. 지금 밤 6시 넘었어요. 캄캄해. 날도 몹씨 춥고...“
막무가내로 집을 나설 태세다. 이럴 때는 막을 재간이 없다.
두꺼운 옷을 입히고 나도 옷을 입었다. 어두워진 바깥에 찬바람이 매서웠다.
걷다가 앉기를 반복하며 큰길까지 나왔다. 빈택시가 없다.
삼십분 넘게 덜덜 떨고 있는데 타다택시가 지나간다. 세웠다.
노인이 타다택시에 올라가지를 못한다. 엉덩이를 들이밀고 짐짝처럼 택시 안에 밀어 넣었다.
타다택시는 처음이다. 네비게이션을 했을 터인데도 동숭교회를 찾지못해 대학로 뒷편을 돌고 돌다가 겨우 옛날 집 앞에 왔다. 동숭교회를 목적지로 삼는 것은 그 근처가 집동네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기 집터에 세워진 4층 건물이 당신집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옛날 집을 찾아 나선다.
이가 덜덜 떨리게 춥다. 집에 갈일이 아득하다. 여기는 방통대 뒷문 앞. 혜화역 큰길까지도 걸어가기 힘든 거리다.
2미터쯤 걷다가 앉으면서 큰길까지 왔다. 빈택시가 없다. 1시간 가까이 기다리며 콜택시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
또 다시 타다 빈택시가 지나간다. 이번에도 노인이 또 올라타지를 못한다.
겨우겨우 밀어 넣었다. 눈치를 챈 택시기사가 말을 한다.
"저희 아버지가 아흔두 살인데 요양원에 계셔요. 5년전에 치매에 걸리셨는데 어머니가 병수발 드시다가
2년 전에 먼저 돌아가셨어요. 간호할 자식이 없어서 요양원에 모셨어요.
할머니, 이 추운 밤에 할아버지가 나오신다고 같이 나오시면 어쩌실려구요.?
할머니 먼저 돌아가셔요. 안된다고 방에 가두셔야 돼요. 아니면 병원에 입원시키시던지요.
할머니가 돌아가셔요. 저런 병의 노인은 기운이 펄펄 나더라구요..
집으로 돌아오니 9시 20분, 3시간 20분을 밖에서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65키로의 몸을 못쓰는 노인을 끌고 다니느라고 팔은 뻐질 듯이 아프고,
속 내장까지도 얼어붙은 듯 냉기는 돌고 저녁밥도 걸른 체였으니.
허기지면 큰일인 갑상선항진증의 나는 밤새 끙끙대며 앓았다.
노인은 멀쩡하다. 처음으로 앓는 남편에 대한 미움이 차올랐다.
택시기사를 하느님이 보내서 경고를 해주신 것 같았다.
나는 살아야하겠다. 목숨에는 귀하고 덜 귀한 것이 없다하지만 92세 치유불가 환자의 목숨보다
아직은 살아서 해결해야할 일이 남아 있는 내 목숨이 더 연장 되야 하지 않은가? 나는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
"이제는 동숭동이든 아무데든 당신 혼자 나가시오.
택시를 타고 번지만 대면 택시 기사가 알아서 데려다 주니 동숭동 199번지에 내려 달라고 하면 되고
집에 돌아올 때는 논현동 41번지2호 에 데려다 달라고 하시오" 라고 말하니
"그 일대는 다 199번지야. 199번지 15호가 우리집이야" 노인이 대꾸한다.
맙소사.!! 이런 기억력을 가지고 있고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껴지지 않는 인지력이면서
잠만 자고나면 자기 20대에 묶여 있는 이 착각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다음 날 월요일.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는 할 만큼은 했다. 나는 살아야 겠다. 너무 잘 먹여서 기운이 펄펄 나는 건가?
그러면 억지로 깨워 일일이 반찬 골고루 떠먹이는 짓 안하겠다. 시장하면 식탁으로 나와서 식사하라.
나가려면 택시 타고 동숭동 번지를 대고 돌아올 때는 논현동 주소를 대라.
지갑에 늘 넉넉한 돈이 있지 않느냐? 당신과 나 둘 중에 누가 더 살아야 겠느냐?
내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리하고 죽어야 할, 일 때문이다.
뒷마무리를 하고 떠나야 하려면 누가 살아야 겠느냐?
이제 나가려면 혼자 나가라. 밥도 안 먹인다. 시장하면 밥 달라고 해서 먹어라"
노인은 기가 막힌다.
병든 이래 이런 아내는 처음 경험한다. 그 동안 칠년 넘게 임금처럼 대우 받으며 살았다.
병들고 나서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냉정한 노처의 말에 기가 팍 죽는다. 아내의 눈치만 슬슬 살살 살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절대 악인도 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며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병자인 것을.... 병들어 그러는 것을....뇌가 고장 난 사람을...어쩌란 말이냐? 어쩌란 말이냐?
나는 다시 전처럼 밥을 떠먹이고, 이불을 덮어주고, “괜찮아. 괜찮아요"하면서 살고 있다.
악처가 되는 일도 쉽지 않구나.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나보다.
첫댓글 어지럽다면서 길게도 쓰셨구려. 글 쓰는 필력에 경탄 하면서 봤어요.
그 전에 논스톱으로 1시간반동안 썼던 것을 손을 본것이야.
한기간 반을 쉬지 않고 썼더니 원고지 35매더군.
조금 정리하니 원고지 26매가 되었어.
이제는 어지럼증 때문에 글도 못 쓰겠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