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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유형문화재111호(대한국ㆍ대청국 통상조약 서울특별시)
대한국ㆍ대청국 통상조약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111호
대한국ㆍ대청국 통상조약(大韓國大靑國通商條約) 이 책은 고종 16년(1879) 9월 11일 한국과 청나라간에 체결한 통상조약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전문은 총 15관(款)으로 정하되 한국, 청나라는 서로의 균등한 자격으로 거류민을 보호하며, 양국의 전권대신이 주도하여 상선은 양국이 지정한 통상지역 안에서만이 무역할 수 있다는 요지이다. 또한 중국인이 범법을 했을 경우 청나라 영사관을 통하여 조회하고 심판하며 양국 상선들이 서로 근해에서 폭풍우와 결량때에는 원조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는 한국측에서는 외부대신 박제순(朴濟純)이, 청국측에서는 청국대신 서수붕(徐壽朋)이 국가대표로 서명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11호(류성룡 필 진시무차 초고) 류성룡 필 진시무차 초고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111호
이 작품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1월 평안도 정주(定州)에 있으면서, 국가의 시무(時務)에 대하여 올린 차자(箚子)의 초안이다. 1633년(인조 11)에 간행된 『서애집(西厓集, 서애선생문집)』 권5, 차(箚), 「진시무차(陳時務箚) 임진 11월 재정주(壬辰十一月 在定州)」의 초고(草稿)에 해당하는 문서이다. 이 차자는 세로로 116행의 초서(반초서)로 쓰여 있으며, 가로로 9장의 한지를 이은 두루마리 형태로, 첫째 장은 앞부분이 잘렸고, 아홉째 장은 끝 부분의 배면 글씨가 잘렸다. 다섯 째, 여섯 째 장은 길이가 다른 장에 비해 좁고 다른 지질에 전후의 묵적과 다르게 갈필(渴筆)로 되어 있어, 수정 가필함에 따라 다시 써서 이은 것으로 짐작된다. 내용은 국가의 위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인심이므로,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즉시 상을 주도록 하는 등 흩어진 민심을 규합할 세부 계획과 강원도 산척(山尺, 사냥이나 약초 캐는 자)을 복병으로 활용하여 왜적 북로(北路)군의 수미(首尾)를 절단시킬 것, 경성 수복의 계책, 풍년을 맞은 호남의 곡식을 영남으로 옮겨 백성을 구제할 것 등을 비롯하여 변방의 보고를 즉시 처리해 시사(時事)에 만전을 기하고 게릴라전을 활용할 것 등이 중심이다. 『서애집(西厓集)』에 실린 「진시무차(陳時務箚)」와 이 초고는 경기감사 최원(崔遠)의 실행(失行), 함흥의 적을 소탕하는 일, 송언신(宋言愼)의 교체 관계 등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초고 작성 후에 발생한 변동 사항을 첨가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 자료는 임진왜란 관련 기본 사료로서 주목할 만한 자료이며, 임진왜란 당시 위정자의 시국관과 극난극복의 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서애집(西厓集)』에 최종적으로 수록된 「진시무차(陳時務箚)」와는 상당 부분이 동일한 내용이지만 동시에 양자 간에 서로 첨삭된 부분이 있어 초고가 가지는 고문서로서의 가치도 뛰어날 뿐 아니라, 이 초고는 현존하는 유일본이라는 점에서도 그 자료적 가치가 뛰어난 유물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111호(강릉 보광리 석조여래좌상 ) 강릉 보광리 석조여래좌상 강원도 유형문화재111호
현재 이름을 알 수 없는 절터에 세워져 있는데, 약 50여 년 전 이 지역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말의 것으로 추정된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光背)와 부처가 앉은 자리인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다. 광배의 윗부분이 깨어졌고, 부분적으로 마모된 곳이 있기는 하지만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광배와 불상은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들었다. 얼굴에는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입의 양끝이 아래로 처져 있다. 양무릎은 평면적으로 조각되었으며, 손은 가늘고 빈약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였고, 왼손은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광배는 2줄의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였는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안쪽에는 넝쿨무늬[당초문(唐草紋)]을 새겼다. 대좌는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윗단과 아랫단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투박한 얼굴 모습, 신체에 비해 빈약한 팔과 손, 대좌 윗단의 꽃무늬 표현 등의 특징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전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111호 (성공회 강화성당) 성공회 강화성당 경기도 유형문화재111호
1890년 한국에 성공회(聖公會)가 전파된 후 1893년 영국인(英國人) 왕남도[Leonard O.Warner] 신부(神父)가 갑곶에서 회당(會堂) 겸 사택을 매수하고 이곳에서 전도(傳道)를 시작하였다. 그후 왕신부(王神父)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1896년 조마가[Mark N.Trollpe] 신부가 부임하여 강화읍에서 김마가(희준)을 전도하였다. 1897년에는 영화원이라는 보육원(保育院)을 개설(開設)하고 서양 의술로 많은 환자를 돌보았으며 1900년 이곳에 현재의 한식중층건물(韓式重層建物)을 완공(完工)하였다. 경기도와 인천광역시 분리되면서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31호로 재지정됨에따라 1995년3월1일 해지.
영양 연당동 석불좌상 시도유형문화재111호(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마을 한가운데 임시로 지어놓은 건물 안에 모셔져 있는 석불좌상이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는 불상으로, 머리와 눈부분이 깨져 있고 광배가 3조각으로 절단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얼굴은 직사각형 형태이고, 사각형의 신체와 반듯한 어깨, 좁아진 무릎 등에서 경직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 이 불상이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평행으로 흐르는 물결식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3단의 높은 8각형 대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몸 뒤의 광배에도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좌의 연꽃무늬, 광배의 구름무늬, 그리고 불신의 정돈된 형태와 물결식 옷주름선 등은 통일신라 후기의 조각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상 뒷면에 음각(陰刻)된 '□원년기유팔월 불성문□□택천랑(□元年己酉八月 佛成文□□澤千郞)'이라는 명문(銘文)으로 미루어 제작연대가 889년으로 거의 확실하다. 제작 연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지방색이 현저한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하게 여겨진다.
천문도<동> 시도유형문화재111호(양산시)
전면에는 천구(天球)의 북극을 중심으로 둥글게 북극으로부터 적도부근에 이르는 영역의 별자리들이 표시되어 있고, 항현권(恒顯圈)(주극성,週極星) 영역이 직경 19㎝가 되는 둥근원으로 그려져 있다. 별자리의 형태나 위치는 조선 초기의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비교해 보아 대체로 일치하며, 동판 위에 표시된 별자리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모든 별 가운데 중요하게 여겨지는 109개의 별자리(자미원과 28수)이며 별의 총 개수는 481개이다. 각 별자리는 별과 별 사이가 선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별 하나하나마다 구멍을 뚫어 진주를 박아 넣어 아름답게 조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24개의 진주만이 남아 있는데 별에 따라서 0.5㎝, 0.7㎝ 등 여러 가지 종류의 것들이 구멍에 박혀 있다. 별자리 이외에 3개의 구멍이 원판의 중심부근과 좌우 바깥부근에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는데, 어두운 상황에서도 천문도의 방향을 파악할 수 있고 28수 등 각 별자리들을 손으로 더듬어 알 수 있어 하늘을 보면서 별자리를 찾아 볼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실제 별을 관측할 수 있도록 진주보석에 희미한 빛을 비추어 별자리를 찾거나 익히는데 편리했을 이 천문도판은 휴대하여 사용에 편리하도록 제작된 과학유물로 볼 수 있다. 후면에는 점각(點刻)으로 표현된 송악도(松岳圖)가 있는데 봉우리가 다섯 개인 오악(五嶽)과 두 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바다가 표현되어 있어 전통공예품으로서의 예술적인 가치는 물론 회화사 및 사상사적인 측면에서도 연구가치가 높다 하겠다. 그림 우측하단에 「순치구년임진구월(順治九年壬辰九月) 삼각산문주암비구니(三角山文殊庵比丘尼) 선화자조성(仙化子造成)」이라는 명문이 점각되어 있어 이 천문도(天文圖)는 조선 효종 3년(1652)에 비구니(比丘尼) 선화자(仙化子)가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도사 금동천문도 보물 제1373호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2003년4월14일 해지.
지선정 충청북도 유형문화재111호
조선시대의 정자로 광해군 2년(1610)에 오명립(吳命立)이 벼슬을 단념하고, 광해군 6년(1614)에 세운 건물이다. 오명립(吳命立)의 본관은 보성(寶城)이며 자는 현백(顯伯), 호는 지선정(止善亭)이다. 자신의 호를 따서 ‘지선정(止善亭)’이라 하였으며, 이곳에서 강의하고 제자를 길렀다. 숙종 30년(1704)에 다시 짓고, 영조 14년(1738)과 순조 2년(1802)에 수리하였다. 1879년(고종 16)에 후손 당산공(唐山公) 오정호(吳正鎬)와 농은공(農隱公) 오계영(吳啓英)이 개건하고 담장과 중문을 설치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화려한 팔작집이다. 현재 이곳에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쓴 현판과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가 쓴 ‘지선정(止善亭)’현판이 있다. 지선정(止善亭) 주변에는 같은 시대에 오유립(吳立)이 세운 월송정(月松亭)이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영탑사약사여래상 영탑사약사여래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상왕산 영탑사(靈塔寺)의 우뚝 선 암벽에 돋을새김 한 높이 3.5m의 불상이다. 고려말에 무학대사가 사찰을 둘러보니 기이한 바위가 빛을 내고 있어 심상치 않게 여겨 여기에 불상을 조각해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재 난고 전라북도 유형문화재111호
『이재난고(頤齋亂藁)』는 이재(頤齋)라는 인물이 10세부터 시작하여 63세 일기로 죽기 전까지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한 문학· 산학·예학·도학·지리·역상·언어학·예술 등 정치·경제·사회·농·공·상 등의 여러 방면에 걸친 인류생활에 이용되는 실사를 총망라하여 일기 또는 기사체로 쓴 것으로, 6천장 57책으로 되어 있다.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친필 유고로, 13세 때부터 63세로 사망하기까지 듣고 보고 배우고 생각한 것이 기술되어 있다. 황윤석(黃胤錫)은 조선 중기의 언어학자 이다.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호는 이재(頤齋)이다. 이재(頤齋)는 책마다 쓰기 시작한 연대와 끝난 연대를 기록하고『난고(亂藁)』라는 표지제목을 붙였는데『이재난고(頤齋亂藁)』는 그 엄청난 분량 뿐만 아니라 실학적인 내용과 함께 한국의 저술사상 최고의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속집을 간행할 때에는『난고(亂藁)』중에서 선집(가려서 뽑아 수록함)한 약간의 내용과 시문이나 언어, 산학, 도학적인 것에 불과하여 그것은『난고(亂藁)』내용의 1/5에도 못미치는 것이었다. 『난고(亂藁)』는 실학적인 면에서 매우 귀중한 학술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광양향교 시도유형문화재111호(광양시)
향교(鄕校)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세조 25년(1443)에 세운 광양향교(光陽鄕校)는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5년(1613)에 군수 남내원(南來爰)과 지방 유림이 힘을 모아 대성전(大成殿)을 지으면서 점차적으로 건물을 지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완전히 없어진 것을 1966년에 출입문인 풍화루(風化樓)를 돌기둥으로 대신하여 세운 것을 시작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大成殿)·명륜당(明倫堂)·풍화루(風化樓)·동재·서재 등이 있다. 앞쪽에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을 두고, 뒤쪽에 대성전((大成殿) 중심의 제사공간을 이루는 일반적인 배치형식과는 달리 자유롭게 배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책·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걸쳐 제사만 지낸다. 이곳에는 전라남도 향교(鄕校) 중 비교적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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